복음과 믿음
사사기 11:1-3 / 사사 입다 본문
이근호
23강-삿11장1-3(사사입다)-jdg08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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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 입다
2008년 3월 16일
본문 말씀: 사사기 11:1-3
(삿 11:1)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삿 11:2)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삿 11:3)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자는 평가를 그 사회에서 받으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일까요? 우리 인간들은 주위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에 더 실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잘 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 대신 교회 내에서 다른 교인들이 나를 어떤 존재적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사사들을 비롯해서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정작 믿었던 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말씀의 위력이었습니다.
즉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음을 믿고 그들은 자기 목숨도 하나님을 위하여 아끼지 않았습니다. 주저하는 법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확실한 것은 인간들의 시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곧장 자신이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뀌기 십상입니다. 따라서 남들이 자기를 향한 평가를 빌미삼아, “좋다, 그래 나 그런 인간이다. 어쩔래. 그래서 나도 막 갈련다”라는 식으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둘 다 잘못된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말씀은 세상이 어떻게 수군거리고, 세상이 어떻게 보든지 간에 변함이 없다는 사실은 한결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한지는 인간들의 어설픔과 객기와 상관없이 주어짐을 봐야 할 것입니다.
입다는 사회적으로 소외받을 조건을 갖추어진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바깥에서 기생과 관계해서 낳은 자식입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주위 사람이나 가족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정상적인 대우를 받은 인물이 못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잡류들과 어울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의 교회는 이런 천한 조건 속에서 도리어 예수님이 더욱 빛이 났습니다. 고린도전서 1:26-31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입다가 사람들로부터 지도자로 발탁이 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외부의 적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침공하도록 조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힘에는 힘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는 논리에 젖어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여서 의논을 모으기를, 이 나라에서 제일 힘 께나 쓰는 자가 누구냐를 따져다 보니 평소에 무시했던 입다를 거론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입다의 입장에서는 평소에 사람들로부터 질 나쁜 자라고 무시당한 과거의 쓰라린 세월에 일거에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면 자신을 이스라엘의 우두머리로 세워주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다급해진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앞 뒤 가릴 처지가 못되었습니다. 사태가 그만큼 다급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아람 나라의 요구조건은 이러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땅은 원래 아람 나라 땅이니 거기서 나가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달라 나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입다를 앞장 세운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배짱이 두둑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과연 입다는 배짱이 두둑합니다. 논리적으로 말도 안되는 주장를 아람나라보고 해댑니다. 우리는 원래 이 땅에 대해서 욕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땅에 대해서 탐을 내지 않고 그냥 곱게 지나가기만 하려고 했는데. 너희 아람 나라 족속이 그것마저 허락지 않자,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들을 쳐버리고 이 땅을 우리들이 살도록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나 따지고 싶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따져야지 하나님 덕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따지만 안된다는 논리를 폅니다. 게다가 덧붙여 말하기를, 만약 너희 아람 나라가 남의 땅을 차지해 놓고서, ‘우리의 신 그모스 신이 뜻이 계셔서 이 땅을 차지했다’고 한다면 그 땅을 다시 원주인에게 돌려주겠는가?‘라고 따집니다.
당연히 원주인에게 돌려줄 일이 만무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가 선점한 이 땅을 당신네들 아람 나라에게 못돌려주겠노라고 합니다. 결국 입다는 하나님 핑계댑니다. 드디어 전쟁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입다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아람 나라를 치고 이스라엘이 승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입다는 마치 자신이 이스라엘의 중심에 서 있기에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일하는 줄로 여기고, 또한 그러한 인상을 이스라엘 전체 사람들에게 새겨두기 위해서, 과도한 맹세를 해버립니다. 앞으로 자신의 영광을 고려해서 그런 맹세를 한 것입니다. 승리하고 난 뒤에 맨 처음 나오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번제로 바치겠다는 겁니다.
그는 설마 자기 딸이 마중 나올 줄을 몰랐습니다. 기껏해야 짐승이나 혹은 자기 집안의 노예 같은 자들이 나올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입다의 의도와는 달리 무남독녀 외동딸, 그것도 시집도 가지 않고서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은 포부와 소망을 듬뿍 안고 살아오고 있는 자기 딸이 맨 처음 아버지의 승리를 축하하려 뛰쳐나온 것입니다.
온 나라가 승리의 축제를 벌리는 그 시간에 입다의 집안은 초상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람 나라를 치시고 난 뒤, 입다의 가정을 쳐버린 셈이 됩니다. 입다의 딸은 압니다. 이번 승리는 인간의 힘이 개입될 수 없는 전쟁인 것을! 바로 이점을 온 나라에 알릴 수 있다면 자신이 기꺼이 희생 제물이 되겠다고 나섭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하나님이 그저 주시는 은혜를 드러낼 수만 있다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이 생각이 진정한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의 욕심으로 인해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끝까지, 줄기차게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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