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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사기 10:10 / 사람의회개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사사기

사사기 10:10 / 사람의회개

정인순 2013. 10. 2.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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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강-삿10장10(사람의회개)-jdg080309회개

이근호

 

 

2008년 3월 9일

 

본문 말씀: 사사기 10:10

 

(삿 10: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좀 느긋해지니까 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들을 섬기기 했습니다. 오늘날 21세기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을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어차피 종교라는 것이 짜투리 시간 내어서 취미삼아, 여가 삼아 하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나 신앙생활을 자신의 주 관심사로 삼지는 않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있으나마나 하는 영역으로 취급받습니다. 신앙생활도 하면 좋지만 꼭 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겁니다. 해도 안해도 사는데 지장없고 여기기 때문에, 오늘 본문과 같이 참 하나님을 안 섬겼다고 회개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고서는 현대인들은 ‘참 순진한 양반들이여. 그게 뭐거리 중요하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분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백성’으로 확정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됨은 이 땅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정해지지만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선택하심에 의해 이미 거룩한 백성이라고 불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이런 신분을 획득할 수 없다는 점을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의 백성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면 다시 구원의 혜택을 내려주시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치매 걸려서 배설도 제대로 못한 늙은 시부모를 어떤 며느리가 모신다고 칩시다.

 

 

깨끗한 집에다가 깨끗한 방을 준비하고 시부모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여기는 집도 깨끗하고 침대로 깨끗하고 도배도 말끔하게 새로 해놓았으니 제발 배설만큼은 화장실에 가서 해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몇 시간 안 가서 다시 그 방이 배설물로 지저분하고 냄새가 진동한다면, 남의 부모 같은 길거리로 내다버리면 그만이지만 이미 시부모이기에 다시 그 방을 새로 깨끗하게 치우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회개할 때마다 다시 그들을 돕고 나서시는 이유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참으로 거룩하고 깨끗한 곳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거룩하고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깨끗한 집에 살고 있는 그런 신분자들이기에 더러운 품성들을 쏟아놓으면, 이 곳을 깨끗하게 하신 하나님의 정성과 애씀이 어떤 피해를 보느냐를 생각하라는 겁니다.

 

 

즉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야기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갖추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경우가 인간이 처음 범죄했을 때부터 있어왔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하나님은 아담의 부부를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죽든지 말든지 나 몰라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찾아나섰습니다. 그 때 인간들은 어느새 껍데기를 만들어 자기 수치를 가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죄한 인간들의 특징입니다. 자꾸만 껍데기를 가지고 자신 위에 걸칩니다.그럴 때 하나님은 그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를 벗기고 그 대신 가죽옷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혔습니다.

 

 

택한 받은 인간들은 자기가 만든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입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의 본색이 드러나야 합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십니다. 즉 인간이 자신을 꾸미기 위한 일들을 마음껏 동원시키게 하시고, 고 그렇게 해서 생겨버린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덧입게 해주는 것, 이것이 참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알고 자신이 수치당해도 마땅함을 알 때에는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하지만 그렇지 않고, 자력으로 만든 껍데기가 충분히 다른 사람들에게 통한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긍휼대신 자신이 가꾸어놓은 권력으로 일관되게 나가게 됩니다.

 

 

바로 우상이란 인간의 욕망의 화신입니다. 인간 손안에서 쥐락펴락 놀아나는 신입니다. 우상은 자기 나름대로의 뜻이란 없습니다. 오로지 인간이 갖다 안겨준 내용으로 가득 찬 신입니다. 따라서 우상 앞에서 회개란 딴 게 아니라 정성이 부족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신 이시여. 내가 당신께 바친 정성이 부족해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더 열심과 정성을 가지고 당신께 나아 가겠습니다”라는 기도가 만발한 곳이 우상의 전당입니다.

 

 

인간은 결코 자신이 살고자 하는 그 자체를 죄라고 볼 안목이 없습니다. 떵떵거리지도 못하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것을 죄라고 보고 있지, 결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것을 죄라고 보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나올 것은 오직 우상밖에 없습니다. 회개 안해도 되는 우상을 사람들은 원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우상적 신학은, 이 땅에서 이유를 막론하고 성공해야지만 축복받은 자로 간주하기에 성공 하기 위한 열정은 본인의 본능이기도 하지만 남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원없이 발휘하게 합니다. 질적이 아니라 양적으로 보다 많은 것을 얻는 것이 신으로부터 복받은 행운아라는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조를 계속 유발시킵니다. 가난하게 살고 사업이 잘 되는 것을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당하고 그런 자를 충분히 무시해주는 이 세상의 풍토에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긍휼에 의한 하나님의 백성 신분 갖추기’가 환영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애써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허락한 하나님의 공로를 무시하고 훼손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주신 거룩한 신분과 하나님의 공로를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들이 걸치고 있는 세상적인 껍데기를 벗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껍데기가 벗겨지는 어려움이 찾아오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우상들을 버리기 시작합니다. 회개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수준 같은게 있습니다. 그 한 예가 고린도후서 5:15에 나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고백인데 이 고백에서 ‘자기를 위한 살기 않기’ 내용이 나오지요. 즉 회개란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신에게 사랑과 긍휼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회개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대단히 슬프다고 여기시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회개상태보다 더 행복하고 감사하고 즐거운 일은 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신분이 창세 전부터 확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구름 위를 나는 비행기처럼 여유만만합니다. 지금 이 구름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일 때문에 창세 전의 확정된 신분이 변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같이 자신을 위장하는 껍데기 쌓기를 그만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