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사사기 12;1-4 / 에브라임과의 전쟁 본문
이근호
24강-삿12장1-4(에브라임과의전쟁)-jdg080323에브라임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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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과의전쟁
2008년 3월 23일
본문 말씀: 사사기 12;1-4
(삿 12: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삿 12: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고로』 (삿 12:3) 『내가 너희의 구원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붙이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날 내게 올라와서 나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고』 (삿 12: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성경에 나오는 지명과 역사 사실을 오늘날 우리들이 구태여 알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역사를 귀찮아합니다. 지금의 사정을 처리하기에 벅찬 나날을 보내기에 지나간 역사를 새삼 들추어내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동일하신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언제 어느 시기나 장소에서도 하나님의 일에 원리가 있고 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칙대로 우리는 지금 적용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원칙을 알고자 하는 것은 성도로서 당연한 관심사입니다.
오늘 나오는 내용은 이러합니다. 입다 선지자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니 그 좋은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퍼졌습니다. 자연적으로 여기에 시기하는 집단이 나올 만 할 것입니다. 그 집단이 바로 에브라임 족속들입니다. 그들을 주장하기를, 그 영광스러운 일에 왜 자신들을 불러 주지 않았냐 하는 겁니다. 모든 영광이 입다한테 가는 것이 눈꼴 시려워 못보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과연 하나님의 일이 그 결과를 놓고서 누구의 공로를 따질 그런 성질의 일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의 과정을 놓지만 결과만 빼먹겠다고 나선다면 과연 이 사람은 ‘용서받은 사람이 맞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혹시 용서받은 것이 가짜 아닐까요?
하나님의 용서란 결과를 우리 몫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완료된 결과를 주시면서 그 과정에 참여시키는 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즉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구원은 받은 것은 우리가 짊어진 그 십자가 안에 내막이 있기에 우리는 그 십자가를 귀찮고 싫다고 갖다 버릴 수 없는 겁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진정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승리의 성격을 안다면 자신들이 입다에게 그렇게 따질 입장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이라는 책에 보면, 주인공이 하루 아침에 흉측한 벌레가 되고 맙니다. 그럴 때, 그 주인공이 제일 먼저 걱정한 것은, 오늘 이 몸 가지고 회사가면서 상사가 지각했다고 꾸지람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보세요. 몸은 비록 벌레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전의 인간이었던 시절의 마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을 운운하지만 마음이 그 몸에 부합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자기 것으로 이전시키는 작업을 자기 내부에서 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를 죄인으로 보고 용서를 해주건만 우리는 그 용서를 받는 자아를 아주 훌륭하고 대단한 존재로 재정립하려고 시도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먼저 만들어 놓으시고 그 뒤에 ‘아담’이라는 이름을 붙어주었습니다.
이는 이름이라는 것은 만드신 분과 관계를 터기 위한 호칭용이기 때문에 나중에 붙여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라는 것도 우리보다 먼저 있었고, 그 용서에 부합되는 자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먼저 있고 용서가 그 다음인 줄 알고, 우리가 알고 있는 용서가 되게끔 우리 내부에서 재조립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우리가 납득이 되는 방식으로 용서해주세요. 그냥 예수님의 피로 용서하지 마시고요”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가 미리 이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도착한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 소유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란 일종의 파도라고 보면 됩니다. 방파제에 무심코 서 있다가는 파도가 아무 생각들이 들이닥쳐 우리의 옷을 다 젖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파도를 소유하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너는 몇 방울 가져갔느냐? 나는 세 방울 건졌다”라고 타인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십자가가 유발하는 사건 중심부로 끌려가는 그 십자가 사건이 터지는 현상 전체를 맛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을 알지 못하는 에브라임 자손들은 입다에게 시비걸었습니다. 왜 영광을 독차지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입다는 말합니다. 이 승리는 순전히 하나님의 승리이지 인간을 가져갈 승리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을 에브라임 사람들과 붙이도록 유도합니다. 그것은 평소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을 무시해 왔습니다. 즉 상호간의 본질을 따진 것입니다. 요즈음 식으로하면 “나는 경상도, 너는 전라도”라는 식입니다. 입다는 여기서 제2차 전쟁을 감행합니다.
1차 전쟁이 이방민족인 암몬 자손들과의 전쟁이라면 2차 전쟁은 이스라엘 내부의 전쟁입니다. 본질을 가지고 시비거는 자는 바뀌어지지 않는 본질로 인하여 크게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길르앗 사람들이 나루턱에다 포진하고 에브라임 사람인지 아니면 아군인지를 구분짓어 처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방식은 ‘십볼렛’이라는 말을 해보라는 겁니다. 하지만 에브라임 사람들은 본질상 ‘씹볼렛’이라고 발언하게 됩니다. 아무리 바꿔보려고 해도 바꿔지지 않는 점을 통해서 에브라임 사람들은 보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는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십자가 복음이 사람의 본질까지 바꿔져야 합니다. 달리 말해서 더 이상 나의 본질성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원받겠다는 식으로 해서는 아니되어야 합니다. 흔히들 사람이 새 사람된다는 것은 더 착해지는 것을 말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타인을 용서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타인이 아무리 나에게 해꼬지 하여도 내가 그들 위에서 서서 그들을 저주하고 심판할 자격이 없을 정도로 나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나만의 본질을 따로 가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내 구미에 맞도록 손질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그저 매일같이 파도처럼 용서가 덮쳐지는 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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