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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애가 3:33-40 / 하나님의 본심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애가

예레미야애가 3:33-40 / 하나님의 본심

정인순 2012. 6. 28. 08:47

 

하나님의 본심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2년 6월 2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3:33-40

(애 3:33, 개역)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애 3:34, 개역)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애 3:35, 개역)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애 3:36, 개역)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다 주의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애 3:37, 개역)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라』

(애 3:38, 개역)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애 3:39, 개역)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애 3:40, 개역)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사람과 하나님 사이는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죄’라는 것을 통해서 관계됩니다. 이는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도 됩니다.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인간이라는 것이 먼저 있고 하나님을 요청하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계시고 그 다음에 그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셔서 인간이 생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조사하거나 분석할 때는, 필히 하나님의 요소와 요소들의 결합으로 간주해서 그 요소들에 의해서 해부되면서 분석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출발점을 인간 쪽에서 시작을 하게 되면 여기에는 필히, ‘나에게 이익’이라는 가치가 항상 떠나지 않고 우선적인 것이 됩니다.

즉 인간 쪽에서 출발을 하게 되면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와야 됨’이 기본적인 가치가 됩니다. 이를 다시 표현하면 이러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나의 것’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살아있다”가 됩니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 여기 살아있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 신은 뭘해줄거요?”라는 묻기 위해 신을 찾게 되고 섬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서 연결되는 관계가 사라져버린 세계관이 되는 것입니다. 죄에 준해서 인간을 바라보게 되면 ‘필히 소멸되어야 될 존재’로서 인간이 보입니다. 시중에 번개탄이라는게 있습니다. 번개탄을 애완견처럼 껴안고 자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번개탄의 용도는 불에 태우기 위합니다. 따라서 그 재질이 불에 잘 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고 대자연이고 간에 모두 진노의 불에 잘 태워지는 재질로 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번개탄이요 연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왜 아직 나는 번개탄으로서 활용되지 않는가를 두고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관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게 너무 신기합니다. 하나님. 왜 저를 계속 살게 만드시는 이유가 뭡니까?”는 식으로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 겁니다.

살고자 하는 자가 더 사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더 살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여전히 살아있는 바가 여전히 기적입니다. 우리가 진적 죽어야 될 이유는,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에 의하면 죄로 보이고, 죄가 보이면 마땅히 저주가 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의 일관된 원칙입니다.

오늘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뜻은, 오로지 죄와 관련해서 자기 백성을 다룬다는 점을 분명히 하므로서, 다른데 관심 두거나 신경 쓸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관점에서만 인간을 보십니다. 악마가 아담에게 찾아오면서부터 인간은 난치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약도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처럼 되리라’는 교만병입니다. 악마는 인간이 형성하는 모든 세계가 교만의 깊은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대로 구원이란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교만의 덫에 빠져서 이 세상에서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계속 죽지 않고 살려고 하는 이유도 한 번 맛본 그 교만하는 즐거움을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요 더구나 그 교만을 더욱 키워나가려고 움직인다는 겁니다. 보다 큰 교만을 위해서라도 기어이 계속 살아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신이 살아야 될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관계가 죄로 연결된다는 점을 알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율법이 개입된 겁니다. 죄가 있음을 겨냥해서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18-19에 보면,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은혜의 해’라는 말이 나옵니다. 구약에서는 개인이 얼마나 성실하게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느냐가 관권이라면 신약에서는 자신의 행함에 관심두기 보다는 도대체 ‘은혜의 해’가 어떻게 주어지느냐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구약에서는 “바르게 살아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면 신약에 와서는 ‘마지막 때는 믿음을 보겠느냐’로 나오는 식입니다.

즉 ‘누구를 믿느냐’를 묻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해’에 해당되는 ‘끄집어내는 방식’입니다. 교만의 깊이에서 인간은 자력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들을 보세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고 합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들어간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하고 십일조합니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선행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악인으로 판정 내리십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18년 동안 귀신 들린 자를 구출하시고, 십자가 달리신 그 날에는 강도를 데리시고 더불어 낙원에 들어가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해를 나타내시는 방식입니다. 구약의 사울왕은 처음에는 매우 겸손한 왕으로 시작했습니다. 자진해서 왕이 되겠다는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왕이 되고 난 뒤에는 처음 겸손함은 사라지고 교만한 자로 자신이 달라진 것을 본인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골리앗이 등장하고 소년 다윗이 등장할 때 비로소 자신이 어느새 교만한 자임을 폭로합니다.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외면하고 권력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재구성하면서 살 생각으로 그는 다윗과 그와 관련 자들을 향하여 죽이려고 덤벼들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악신이 들렸다’고 표현합니다. 권력이 덫에 걸린 겁니다. 처음의 온유한 마음을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장치가 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즉 자기 스스로 하지없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장담했는데 막상 자기 능력으로 감당 못할 사태가 일어나니 그는 본디의 자리 자리로 돌아갈 생각을 못하고 예상 밖의 교만의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누구나 교만의 덫에 빠져 있습니다. 끄집어냄을 당하는 것은 오로지 은혜의 해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의 몫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행하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입니다. 자신이 교만한 죄인임을 자백하면서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진작 죽어야 함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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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오용익
8강-애가3장 33-40(하나님의 본심)12062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에서 4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47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33-40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다 주의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사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면 우리가 늘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어떤 식으로 만드시는지, 하나님이 만드신 흔적들이 내 안에서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그것을 살피면서 살아야 됩니다. 내가 뭘 할까가 아니라 주께서 나를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지를 늘 조사하고 찾아내고 그래서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나를 만드셨구나, 그러면 모든 일어나는 일들과 행동과 태도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음의 흔적을 캐치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이 창세기부터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왜 삽니까, 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이여, 저를 뭘 하려고 만들었습니까?’라고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질문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어떤 이익이 있느냐, 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때문에 만들어졌다면 하나님께서 뭘 하려고 만들었습니까, 라고 되는 것이 정상인데 나는 어떤 이득을 더 챙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출발을 하나님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부터 출발한 것이 돼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힘들 때 ‘오, 하나님이여, 살려주세요.’라고 부르짖는 것도 다 음흉한 생각, 잘못된 부르짖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너 살아서 뭐할래.’ ‘살아야 내 것을 챙기지요.’ 이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살아서 내 것 챙기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리는 내 것 챙기는 것이 내가 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어떤 식으로 나를 만드셨는가, 그 내막을 알아채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주께서 인생으로 근심하게 하는 것이 본심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시고 ‘재판 잘못하는 것과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는데 어찌 원망하랴. 우리가 스스로 조사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이런 모든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죄라는 것, 여기서 죄란 우리가 생각하는 죄 말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죄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잡힌 것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죄라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연결시켜 놓았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은 죄야, 죄가 아니야, 라고 묻는 것 자체가 우리가 우리 계획을 철회해야 되고 탈탈 털어버려야 된다는 말이지요. 나의 이익, 내가 어디가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의 명령과 죄와 연결된 그것을 완전히 잘라버리고 나오는 생각에 불과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본인이 이 세상에 살아 있고 존재해야 될 이유는 완전히 사라지는 거예요. 그것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에 나오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끄집어내는 거거든요. 끄집어낸다는 것은 갇혀 있다는 뜻입니다. 갇혀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가 있어서 그 죄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죄에 갇혀 있는 것 같으면 우리의 관심사나 우리가 신경 쓰는 것이나 우리의 모든 바라보는 것은 죄가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가 죄에 갇혔는가에 관심을 둬야 할 텐데 죄에 갇혀 있으면서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나는 오늘도 어디 가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남길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세상을 불로서 살라버린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불에 태워지는 재질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건 짐승이건, 개나 돼지나 건물이나 대지나 산천초목까지 불에 다 태워지는 재질로 되어 있어요. 그 말은 뭐냐, 항상 재가 된다는 뜻이지요. 여러분들이 가게에서 번개탄을 살 때 그것을 가지고 같이 침대에 눕고 뒹굴기 위해서 사지는 않잖아요. 그것으로 집을 지키려고 사지는 않습니다. 번개탄은 모양자체가 새까맣게 되어 있어서 ‘불 지르면 잘 타겠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것은 번개탄이 타야 될 재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 시선인가, 번개탄처럼 바라보는 거예요. 불에 잘 타겠네, 그런 안목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에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니까 ‘아, 그러면 나는 재판할 때 억울하지 않게 하고 나는 갇힌 자를 안 갈구고 주의 명령을 잘 지키는 식으로 살면 되겠다.’ 하는데 구약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우리사이는 율법이 주어지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라는 관점에서 우리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채소 팔고 있는데 와가지고 ‘아주머니!’ ‘예, 뭘 드릴까요? 오이 드릴까요, 토마토 드릴까요?’ ‘아주머니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에이, 재수 없다고 소금 뿌리잖아요. 그게 왜 듣기 싫은가, 나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우리의 버릇이고 속성이고 타고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딱 듣기 싫어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기서 그런 사람은 선지자 예레미야지요, 지금 사람들은 멸망당하고 포로 잡혀가는 힘든 상태인데 여기서 하는 말이 ‘여러분이 힘든 것은 재판을 굽게 했고 사람들을 억울하게 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듣기가 싫겠어요.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런 말을 해야 될 이유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대체 우리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뭐냐 그 말입니다. 대체 하나님 눈에 보기에 우리는 뭐로 비취냐, 그 연결고리를 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식으로 보고 있다는 그것을 안겨주는데 이것이 뭐가 그렇게 듣기 싫은 소리입니까? 이것이 뭐가 그렇게 자기를 공격하는 나쁜 의미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것이 듣기 싫다는 말은 평소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말씀이나 성경말씀이 그렇게 듣기 싫은 겁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내가 버티고 살았고 내가 채소장사해서 애 키우고 대학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고, 그렇게 살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시장에서 이웃주민에게 듣는 이야기는 그거잖아요. ‘내가 이만큼 고생해서 애 둘 공부 다 시키고 이렇게 산다.’는 거예요. 성경은 이겁니다. 사도바울의 안목에서 보면 살아남은 자에게 동정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고 인간아. 에고, 사신다고 고생 참 많았지요.’ 이렇게 오히려 동정의 위로를 해 주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소원은 빨리 죽는 것이니까. 자기가 살아 있으면서 얼마나 그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난 뭘 먹고 살지? 낼은 뭐하고 한 달 뒤에는 뭘 하고 살지?’ 살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사는 것이 고통이 되고 질곡이 되고 짐이 되고 무거운 쇳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이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뭔가 성공한 것처럼.


우리는 동정을 해야 돼요. ‘아이고, 아직도 사셨어요. 세상에나! 얼마나 고생을 더 하려고. 얼마나 고생을 더 하려고 더 살려고 하십니까? 아이고, 안됐다! 안됐다!’ 마치 암 말기 환자에게 하는 것처럼 ‘아직도 링거 꽂고 있어요? 아직도 코에 호스 꽂고 있습니까? 저거 다 빼버리지. 저걸 왜 꽂아서 자식들 병원비 댄다고 고생들 무지 한다. 빼면 그냥 갈 것을 가지고 그런 호스 꽂고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서 계속 사십니까? 참 장하네요. 그게 잘한 겁니까?’ 그때서야 말하지요. ‘휴, 안 죽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진작 그렇게 하지. ‘하나님이 안 죽이는 것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진작 그런 식으로 살아갔어야지요.


다시 말해서 어떻게 삽니까, 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고 왜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나를 여기에 존재하게 만드십니까, 존재 안해야 될 인간이 왜 이렇게 존재하는 기적을 계속 유발 시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해야 돼요. 살아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이상하다. 내가 왜 살아있지? 내가 뭐했다고 살아 있지?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 왜 저주는 안 떨어지는 거야? 왜 벌은 안 받는 거야? 미치겠고 환장하겠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서 죄를 지었는데 왜 벌은 안 내리십니까?’ 세상에 괴로운 것이 살아 있고 존재하면서도 존재이유를 모르면서 존재하는 것, 이것처럼 괴로운 것이 없습니다.


구약 때는 어떤 행함, 지시, 명령, 이런 것이 있어서 ‘너는 이렇게 살면 죄야.’ 항상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인간과 하나님사이가 그냥 맨 얼굴로 통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죄가 걸쳐 있어요. 이래서 죄고 저래서 죄라는 것, 그래서 ‘스스로 행위를 조사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말은……, 39절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살아 있는 사람의 이유는 죄가 무엇인가를 까발려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 있는 겁니다. 네가 계속 살아 있어야 계속 죄가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죄가 계속 나오니까 그 죄를 보면서 자기 살아 있는 이유를 ‘하나님, 이렇게 죄가 많은데 왜 살려주십니까?’라고 하나님과 이야기가 통할 수 있는 거예요. 어쨌든지 하나님께서는 죄를 가운데 두고 자기 백성과 통화하고 대화하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구약 때는 항상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라는 것이 있고 명령이 있어서 ‘네가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라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구약성경을 안 보게 되면 ‘하나님, 내가 이번에 사업을 차렸는데 어떤 이익을 줄 겁니까?’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죄는 날라 가 버리고 자기 이익 챙기기에 급급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겁니다.


구약 때는 명령과 지시로 죄를 끄집어낸다면 신약 때는 뭐냐,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믿음을 보겠느냐?’ 네가 지금 누구를 믿느냐고 나오는 거예요. 구약 때는 ‘제대로 하란 말이다. 똑바로 살아. 그렇게 안 살면 너는 죄야.’ 이렇게 나오는데 이것이 구약이라면 신약에서는 ‘네가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완전히 달라요. 오늘 본문 40절에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로 돌아가지고 되어 있어요. 그러나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하는 것은 돌아가는 출발점이 우리 자신이고 조사하는 것도 우리 죄를 스스로 탐색하는데서 출발한다면 신약의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 서서 성경책을 펴시고 이사야 61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시면서 ‘그 은혜의 때가 지금 이때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을 정도로 어려운 말이에요. 왜냐, ‘이 때’라는 것이 두 달입니까, 석 달 입니까, 두 시간이에요, 삼초에요, 아니면 몇 년입니까? 그 이때라는 것이 어느 때 어느 만큼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건데요? 딱 정해진 것이 없어요.


진짜 어려운 이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어떤 점이 어려운 가를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서는 내가 여기 있는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보내서 저보고 이야기한다 합시다. ‘네 죄가 뭔지 네가 스스로 조사해서 나에게 돌아오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그때는 뭐가 필요 없느냐 하면 그냥 나의 죄를 조사하는 나만 있으면 돼요. 이때고 저때고 여기고 저기고 필요 없어요. 내가 내 스스로 조사하고 내가 억울한 사람을 억울하지 않게 하고 내가 주의 명령을 지키고 내가 사람들의 재판을 굽게 하지 않고 내가 갇힌 자를 갈구지 않고, 이렇게 내가 돌아가느냐 안 가느냐는 내가 하기 나름이에요.


내가 내 죄를 조사해서 돌아가기 위해서 나는 이 세상에 존재했다, 라고 정리되는 것이 구약 때의 예레미야의 말씀이에요. 때고 장소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 때는 뭐가 다르냐 하면, 나에게 묻는 것이 아니고 ‘지금은 은혜 받을 때’라는 그 때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뭐가 덮친다는 소식이 주어지는 겁니다. 덮친다는 소식. 우리가 이방인이고 또 현대에 살아도 항상 구약을 통해서 신약으로 나와야 돼요. 구약을 통해서 안 나오면 신약이 나올 수가 없거든요. KTX가 부산 지역을 통과할 때 울산근처에서 굴속에 들어가서 잠시 후에 보면 종착역인 부산역에 도착되지요. 구약의 굴을 뚫고 들어가야 신약으로 튀어나온다니까요.


그 굴에 들어가면 뭐가 나오느냐하면, ‘내 인생은, 내가 착하냐, 안 착하냐? 내가 벌 받을 것인지 안 받을 것인지는 누구 소관이냐 하면, 내가 여기 있어야 되고 여기 있는 내가 하기 나름 따라 벌도 받고 안 받을 수도 있다.’는 나 하기 나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뚫고 부산으로 튀어나오니까 튀어나오자마자 하는 소리가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용서받을 때요, 긍휼의 때다.’라는 이 말은 실컷 나름대로 내 죄를 조사해서 ‘이만하면 내가 이제 하나님께 돌아왔겠지.’ 하고 툭 튀어나와보니까 그것도 죄였어요. 그것도 저주받을 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번개탄의 번개탄 됨이 시커멓게 해서 튀어나온 거예요. 얼굴 시커멓게 해서 부산역에 튀어나온 거예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하고 십일조를 했습니다.’ 하고 하늘을 향해서 성전에서 기도했던 그 바리새인, 실컷 성전에서 기도하니까 주님이 와서 ‘어이, 지옥가거라.’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하고 금식했지요. 인간으로서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인데.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고 했는데, 그 최고영역이 바리새인인데 어느 인간이 바리새인을 뚫을 수가 있습니까? 안되지요. 어렵게 할 것 없어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세상이라는 덫에 걸렸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수상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뭔가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지시를 받으면서 묶여져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적인 부귀와 영화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 세상적인 성공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 늪에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대전공부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리고 광주에서도 했고요, 말기 암도 방사선치료도 하고 약은 있어요. 그런데 인간에게 천하에 고칠 약이 없는 병이 있는데 그게 뭐냐, 교만입니다, 교만. 그게 왜 그런가, 마귀가 우리 조상에게 다가갈 때에 교만을 심어줘 버렸어요. ‘네가 신처럼 되리라.’ 네가 이것을 따먹으면 신처럼 되리라, 해서 교만의 속성을 훅훅 풍선에 바람 넣듯이 해서 태어나는 족족 다 허풍선이처럼 되어서 그저 세상 것으로 자랑하고 싶어서 환장한 겁니다. 이 교만은 약도 없다니까요.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교만해야 됩니까? 교만은 말기도 없고 끝도 없어요. 교만은 스톱되는 법이 없어요. 교만은 교만을 낳고 또 낳으면서 더욱 악화일로로 접어 들어가야 돼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해서 이젠 멈춰야지,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브레이크 없는 비탈길의 자동차 같아요. 가속이 붙어서 점점 더 심해져요. 늪에 빠졌어요. 덫에 걸린 겁니다. 시골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도시에 와서 중국집 아르바이트 할 때는 얼마나 순진들 합니까? 시골에서 농사짓던 이빨 누런 총각이 서울에 와서 살려고 처음에 철가방 들고 배달할 때는 그렇게 겸손해요. 그런데 철가방 들고 왔다 갔다 하다가 길거리에서 캐스팅 되어서 스타 되고 난 뒤에는 옛날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더욱더 센 것, 많은 것, 더 큰 권력을 추구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자들보고 뭐라고 했느냐하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라디오에서 나온 것 같은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어요. ‘너 나중에 커서 뭐 될래?’ ‘대통령이요.’ 아버지가 얼마나 듣기 좋은지, 대통령이 얼마나 교만하게 하는 것인지 모르고 중요한 것은 죄가 문제가 아니고 나한테 어떤 이익이 있는지만 생각하니 대통령 된다고 하니 그냥 좋아한 거지요. 아버지가 다시 아들에게 ‘너 대통령 되면 이 아빠는 뭐 시킬래?’ 하니까 애가 고민이 된 거예요. 나에게 어떤 자리를 줄 것인가,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물었던 거지요.


한참 고민하다가 애가 ‘아빠, 탕수육 시켜줄게.’ 아버지는 권력을 생각하는데 애는 당장 먹고 싶은 것을 생각했지요.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잖아요. ‘먹는 것 입는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했는데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교만해야, 우리가 얼마나 난치병에 걸려야 우리가 만족하겠습니까? 이게 덫에 걸린 거예요. 이게 교만의 덫에 걸린 겁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데 사울이에요, 사울. 아주 재미있는 것이 성경에서 처음에 사울이 왕이 될 때 그야말로 왕 안 되려고 안 들키려고 도망 친 사람이에요.


작은 자 사울, 겸손한 자 사울, 백성들은 그 사울을 좋아했습니다. ‘저 인간 같으면 우리를 지배하지 않겠지.’ 그렇게 겸손했던 사울이 자기가 그냥 왕이 될 때 하나님께서 왕 시켜줬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울이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이 잘려져 날라 가 버렸어요. 하나님 풍선의 끈히 끊어져 버렸어요. 하나님은 날라 가고 이제는 하나님도 귀찮아. 요즘 교인들이 하나님도 귀찮고 예수도 귀찮고 복음도 귀찮아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복음이고 뭐고 가위로 다 잘라버렸어요. 어느 정도 살만 하니까 왕이 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이게 권력의 늪에 빠진 거예요.


다윗이 나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하나님 잘 믿는 줄 알았어요. 소년 다윗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배치를 해서 골리앗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과 아무 쓸모없음을 공개적으로 다 털어놓게 했지요. 골리앗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야기한 거예요. ‘어이, 하나님 믿는 너희들! 하나님 믿는다면서? 나하고 일대일로 한 번 붙자. 아이고, 겁쟁이들! 뭐 할례? 그래가지고 너희가 여호와를 믿는다고? 자, 자, 한 번 붙자.’ 사울하고 군대가 깨갱, 다 기어들어갑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런 배치를 하신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믿는 것인지, 믿는 척을 하는 것인지 언제 들통나느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어떤 설정을 해놓았는데 오히려 그것을 보고 ‘그래, 나는 처음부터 믿음을 내가 만들 수 없었어. 주께서 주신 거야.’ 이렇게 나오면 되는 것을 가지고 ‘아이고, 내가 이렇게 믿음 없는 것을 보면 남들 앞에서 얼마나 우세하겠나.’ 거기서도 또 자기 이익을 생각하는 거예요. 명예생각, 체면생각.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드러내고 얼마나 무가치하고 낮은 자라는 것을 드러내면 그것이 하나님의 작전인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구원은 하나님께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 교만과 권력과 어른들의 마음에서 끄집어내는 것인데 우리는 도망칠 생각부터 하는 거예요. 숨어 들어갈 생각부터 해요. 복음 전하면 다 기어들어가 버리고, 말씀 전하면 다 기어들어가 버리고, 십자가 이야기하면 다 기어들어가 버리고. 구원은 끄집어내는 것인데! 어디 가서 무슨 이익을 얻었고……, 맨 날 나의 이익, 나의 이익은. 소년 다윗을 투입해서 골리앗을 꺾어버리니까 그때가 사울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거든요. ‘아, 나는 어린아이보다 못하구나.’ 이러면 그것이 진짜 이스라엘다운 면모입니다.


큰 소리 치는 것이 왕이 아닙니다. 목사가 교회에서 큰 소리 치는 그것이 왕이 아니에요.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았으니 여러분도 됩니다, 이게 복음 증거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목사가 하나님 잘라버리고 예수 잘라버리고 복음이고 십자가고 다 잘라버렸어요. ‘나보다 믿음 좋은 놈 나오기만 해봐.’ 이런 식이에요. ‘나보다 설교 잘하고 기도 잘하는 놈 나오기만 해.’ 이런 식이란 말이지요. 그 다음부터 사울은 악신이 들렸다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처음부터 늪에 빠진 거예요. 악신이 만든 늪에 빠진 것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몰아가신 겁니다. 악신 들려서 그 다음부터는 아무 사람이나 죽이는 것이 아니고 다윗과 관련된 사람들, 다윗을 비롯해서 다윗과 관련된 사람들을 다 죽이려고 합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 요나단까지도, 왕자까지도 죽이려고 달려들지요.


이게 실제 상황입니다. 하나님 계심으로 인하여 이 땅에 이상스럽게 벌어지는 실제 현상입니다. 이게 성경에 나와요. 오늘날 신약시대에. 바로 우리 자신이 늪에 빠졌다는 것, 더 교만하지 못해서 안달 나는 늪에 빠진 거예요. 성공이라는 이름의 늪에 빠졌고 주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늪에 빠졌고 그저 눈만 뜨면 나의 이익이고 해가 져도 나의 이익이고 그 나의 이익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거기다가 예수와 연관시키고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이익만 챙기는 그런 인간, 예수님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이게 바로 은혜의 때다, 이게 바로 은혜 주는 날이다, 너희를 자유케 함이라.’


간음한 여인을 자유케 했고 귀신들린 사람들 자유케 했고 막달라 마리아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셨던 주님, 삭개오와 창기와 세리를 하늘나라 먼저 간다고, 그리고 옆에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 강도까지 ‘오늘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겠다.’ 하고 낙원에 데리고 가신 주님, 이거 실제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조사하는 이유가 우리에게서는 나올 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이 땅에서 더 살아야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살아야 될 이유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진작 죽어야 되는데 다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 하라고 살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매일같이 느껴지는 우리의 기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믿는 척 하는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 하지만 믿는 자는 왜 그리 적은지. 우리가 다윗처럼 비록 시련 당하더라도 우리가 믿는 분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나에서 출발하지 않도록 주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