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애가 3:1-9 / 고난 받는 선지자 본문
고난 받는 선지자
이근호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3:1-9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6강-애가3장1-9(고난받는 선지자)12061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3장 1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46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1-9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 당한 자는 내로다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 종일토록 손을 돌이켜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 담즙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다듬은 돌을 샇아 내 길을 막으사 내 첩경을 굽게 하셨도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예레미야는 본래 자기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 역할은 뭐냐, 자기가 생각했던 자기 인생은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로 제어가 되고 관리가 되고 그 자리에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어떤 수모와 고통을 당하는지를 하나님의 성령,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미리 앞당겨서 예레미야 속에 체험하도록 되는 겁니다. 바로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당하는 이 체험이라는 것은 결국 예레미야가 그리스도와 관련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예수님과 관련 있는 예레미야가 이런 처절한 체험을 겪는다는 것은 곧 오늘날 우리들 성도의 모델로서 성도도 예수님 때문에 이 땅에서 이와 같은 수모를 당하는 운명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복이 나와 있는데 그 복의 결정, 팔복의 마지막 대목에서 복의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과 고난 이것이 나에게 복이 된다, 그리고 그 단서를 붙이기를 ‘너희 앞서 왔던 선지자들도 그런 것을 이미 경험을 했다.’ 합니다. 선지자가 그냥 선지자가 아닙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해라’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선지자 되게 만드신 거예요. 미래의 일들을 위하여 과거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이러한 선지자가 받은 복은 뭐냐, 예수님이 당한 고난과 수난을 앞당겨서 경험했다는 그 점이 팔복, 복중의 복이 되는 겁니다.
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마태복음 16장에서 시몬 베드로보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구나 네가 이것을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다.’라고 해서 이 베드로가 자기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되는데 그 원치 않는 그 길이 바로 복된 길이고 평소에 자기가 원했던 길은 복이 아닌 저주받을 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방치해 버리면 우리는 저주받을 짓을 골라서 지옥 가는 길을 어떻게 그렇게 잘 찾아가는지 본성적으로 본능적으로 우리는 천국 가는 길보다 지옥 가는 길, 좁은 길보다 넓은 길을 선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강제로 질질 끌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복을 받지 아니하면 그것도 매일같이 복을 받지 아니하면 지옥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매일같이 복을 주셔서 예수님의 가신 그 고난에 동참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예레미야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난을 미리 받게 되는데 그 고난의 경향이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뭐냐, 신체적으로 굉장히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겁니다. 6절, 7절에 보면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그리고 8절에 보면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절에 이야기하는 것,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 이것은 신체적으로 굉장히 아프고 허약하고, 그런 입장이라면 그 뒤에 방금 이야기했던 6절부터 20절까지는 모든 자유가 박탈당합니다. 자유가 박탈당하고 자신의 신앙적인 논리도 삭제당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이렇게 응답이 올 것이다.’ 하는 그 기대, 그리고 그렇게 기도의 응답이 있어야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그 선입감, 그것마저 묵살당합니다. 신체적으로 핍박을 당하고 정신적으로 묵살을 당한다는 그 말은, 결국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예레미야는 없는 겁니다.
예레미야 본인이 실종되었어요. 예수님께서 자기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이처럼 그 인간을 실종시켜 버립니다. 내가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 내가 있음으로 인하여 내가 견딜 수 없게 만들어요. 내가 있게 되면 나는 내 자유를 생각하게 될 것이고 나한테 자유가 주어지면 그 자유를 활용해서 내가 원하는 나의 미래상을 꿈꾸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시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너무 의식하게 되면 예수님의 길이 아니라 내가 위대해지고 내가 신이 되는 길로 가요. 내가 스타가 되는 길로.
내가 화려하게 성공된 사람으로 가게 되는 그곳으로 우리의 몸이 자연적으로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예레미야가 겪었던 그 복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 예레미야에게 우리가 궁금한 것은 주님이 예레미야를 구원하신다 하시면서 구원하신다고 했으면 그냥 구원하시지……, 흔히 하는 말로 값없이 구원하시고 사랑으로 구원하시고 자비로 구원하시고, 그렇게 좋게 이야기를 하셨으면 그야말로 요란스럽지도 소란스럽지도 않고 곱게 그냥 구원하시지 왜 이렇게 탄식과 절망과 좌절과 기도응답조차 되지 않는 힘든 인생을 살게 하느냐, 그것은 우리가 이점을 알아야 돼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기 위해서. 구원이란 것은 우리하고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줄게 받아라. 그리고 잘 간직해라.’ ‘예’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은 우리를 예수님의 운명으로 삼키는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팔자와 운명에 삼킴을 당하는 상태를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죽음을 통해서 부활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예외규정이라는 것은 아예 염두에 두지 맙시다.
주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죽어서 부활에 갔다면 그 부활이라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우리 고유의 나 나름대로의 영광, 내 나름대로 계획 잡은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그것이 죄로 드러나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공로로 부활에 참여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덮치게 되면 내가 나름대로 계획했던 나의미래의 구원은 날마다 실컷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징벌, 그 징벌을 오늘 이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징벌적 차원의 고통이라 하는 것은 흔히 불교에서 생로병사를 이야기할 때 ‘사는 것이 힘들고 괴로운 것이다.’ 하는 것은 연약한 인간으로서 대자연속에서 버티고 생존하려 하니까 힘에 부쳐서 살기 힘든 거잖아요. 징벌적 차원의 고통은 아닌 거예요.
인간이 힘들게 사는 것이 징벌이 되려면 벌을 내리시는 어떤 어르신네가 있어야 돼요. 그런데 불교는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어르신, 그런 인격자를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대자연의 변화는 너무나 무쌍한데 인간의 지혜로는 파악이 안 되고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너무나 약해서 자기 코앞의 일밖에 모르니까 거기서 오는 차이 때문에 사는 것이 힘든 것이지 누가 일부러 ‘이거 못됐어. 이것은 맞아야 돼. 이것은 벌 받아야 돼.’라고 때리시는 어떤 분을 불교가 설정하지는 않아요. 불교라 하는 것은 눈앞에 사람밖에 안보입니다.
사람밖에 안보이기 때문에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서 얼마나 편하게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거지요. 누가 자기를 ‘너 매 맞아도 싸.’라고 때리지 않는 한, 비록 이 땅에서 살기 힘들고 편하게 살 형편이 안 되면 마음이라도 낮추면 그나마 뭔가는 마음을 낮추는데서 오는 행복이라든지 마음의 평안함이 있지 않겠느냐, 그런 아이디어를 발휘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불교라는 것은 누가 나 잘못되었다고 때리시는 분이 있어서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내 욕심이 너무 분수에 넘쳐서 그 욕심을 조절해서 낮추면 그 다음부터 범사에 모든 것이 감사해 보이면 그 때 마음의 평안과 행복이 주어진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분수에 넘쳐서 너무 욕심을 내다 보면 대 자연과 충돌이 일어나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되니까 스스로 자기 힘에 부쳐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때리고 미워하는 것밖에 안되니까 누가 나를 때리고 나무라고 ‘너는 날 때부터 나쁜 놈이야.’ 하고 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내 마음을 조절을 못해서 분수에 넘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내 마음만 조절하게 되면 세상만사 얼추 그만하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다, 라는 도 닦는 소리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불교이야기를 했는데요, 불교에서 이런 소리 합니다. 모든 인간은 부처라고 해요.
그 말은 뭐냐, 불교에서 이렇게 한다, 가 아니라 인간들이 내심 원하고 노리고 있는 바는 누가 와서 나를 때린다는 논리가 아니라 어떤 수를 써서든지 간에 내가 한 평생 맘 편하고 몸 편하고, 정신 편하고 육체도 편하고 행복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불교적인 심성을 누구나 타고 났어요. 구태여 불교라는 말을 안 해도 천주교나 기독교나 모든 종교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평안과 안식과 행복을 찾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고 논리구조고 철학체계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불교가 대표해서 이야기했지만 기독교가 되었든 천주교가 되었든 상관없어요. 인간이 노리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 마음 편하면 최고예요.
돈 때문에 힘들다면 돈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맘 편하면 최고고 몸이 아파서 힘들다면 자살하는 식으로도 자기 맘 편하면 최고라고 본 거예요. 인간은 그 한계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예레미야를 보면서 우리가 배울 것이 뭐가 있느냐, 배울 것은 없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배울 것이 뭐가 있습니까? 구원은 배워서 얻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주는 거예요. 어떤 상황,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상황이 그냥 덮치는 것이 구원이지 교회를 학원처럼 생각해서 뭘 하나 배운다고 해서 배워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 구원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주는 겁니다. 그런데 거저 준다는 말을 사람들이 오해를 해요. 거저 준다고 하니까 ‘그러면 나는 안 다치지요?’ 하는데 그런 법은 없다 이 말이지요. 늦게 들어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 그 여덟 번째 복이 ‘나의 의와 이 복음을 위해서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다.’ 했습니다. 지금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교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인생을 살면서 힘 안 드는 그것이 복 인줄 알고 복음인줄 안다 그 말이지요.
내 인생이 행복하고 불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위해서 내가 무슨 노력을 하면 됩니까, 이렇게 묻는데 그 물음에 대해서 주님은 어떻게 대답하느냐, ‘힘들어야지! 내가 십자가에서 당한 수모가 너한테 덮치면 너도 마찬가지로 힘들게 돼. 그리고 그것이 복이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단서를 붙이기를 ‘이전의 선지자들도 이미 내가 오기 전에 나와 같은 고생을 다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불교적인 그 마음가짐, 마음의 행복과 몸의 행복을 얻겠다고 교회오고 성당 다니고 절에 가는 이 모든 사람들은 처음 출발부터가 예수를 아무리 입에 붙여 달아도 그것은 다 다단계 같은 사기, 마귀한테 속아 넘어간 겁니다.
고생을 안 하겠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징벌적 차원에서 사는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가 인생사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듭니까?’ 때리거든요. 죄졌다고 때리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왜, 징벌적 차원의 인생이니까. 아담의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한 것이 주님께서 아담의 이마의 땀방울을 보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고 맴매, 때리시는 거예요. 요새 신문에 굵직하게 나오는 그 활자가 뭐냐, 백화점매출 격감, 외국어학원도산, 이런 것이 뜬다고요. 그렇게도 안 망한다는 그 백화점의 매출이 급하게 줄어들고 영어는 누구나 다 가르치기에 잘 된다던 그 외국어학원까지 도산위기에 처했다, 그러면 그 뒤에 나오는 말은 뭡니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면 이 땅에서 편하게 살 수 있습니까?’라는 생각을 하는데 지금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두 손 들고 매 맞고 있는 상황인데 매 맞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매를 안 맞을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몸이 아프다, 몸이 아픈 것도 지금 매 맞고 있기 때문에 아픈 거예요. 맞아야 정신 차리지요, 맞아야! 물론 맞는다고 다 정신 차리는 것은 아닌데. 월요일에 공부했지만 시편119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이 없었으면 내가 말씀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주의 말씀에 관심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지금 자기 행복 찾기에 분주한데 어느 인간이 ‘주여, 어떻게 하면 주의 십자가 고난을 내가 몸소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런 데로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합니까? 마음을 낮출까요, 마음을 낮추지요. 욕심을 부렸다고요? 욕심을 없애지요. 어찌되었든지 간에 내 마음에 평안과 행복을 주신다면 감사합니다.’ 이렇게 불교식으로 나오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징벌을 요청할 수 있습니까? 요청 하지를 않지요. 피해가려고 통박이나 굴리고 있는 입장에서.
그렇다면 이런 인간,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자기의 안위와 평안밖에 찾지 않는 이 불교적인 인간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구원하느냐, 그것이 오늘 본문이 핵심이 됩니다. 오늘 본문이 어렵기 때문에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보통 이를 뽑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잇몸 자체를 다 뽑아버려요. 이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은혜를 줬습니다. 은혜를 주고 그냥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은혜 준 것까지 뽑아내려면 그 박혀 있는 은혜를 뽑아낼 때 그 은혜 뽑아내는 그것이 십자가의 아픔에 동참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박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박혀 있는 그 구원의 취지를 사람들이 알 리가 없어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하는 말씀 자체를 아무도 몰라요. ‘왜 저런 이야기를 하지?’ 하는 식입니다. 주께서는 그 예수님 자체를, 은혜 자체를 뽑아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 입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되는 거예요. 버리신다는 말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복을 받은 자에요. 복을 받은 자가 복을 철수 시키고 그것을 빼버릴 때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저주가 요구되고 저주가 동반되는지를 보라 그 말이지요.
하나님이 은혜의 자리를 이 땅에서 철거해 나갈 때 그래서 예수님마저 아버지께 버림받는 그 무시무시한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 고통스러운 이 세상, 저주받아야 될 세상에 주님께서 잇몸으로서 박혀 있다는 말은 그 은혜라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고귀한 것인가를 이 은혜가 뜯겨져 가면서, 아픔을 느껴 가면서 아는 거예요. ‘아, 엄청난 은혜가 있었구나.’ 하늘에서 햇빛주고 달빛 주고 비 내리니까 하늘에서 남아돌아서 공짜로 주는 줄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의 핏방울 하나하나가 빗방울이고 햇빛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살점이 떨어져 나오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받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만 십자가의 자리에서 뜯겨져나가는 고난을 줘서 은혜라는 것이 아무 대가없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은혜는 은혜자체가, 그 무서운 저주, 네가 감당하기 힘든 그 무서운 저주가 은혜의 자리에서만 면제가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지요. 그렇다면 그것을 우리가 모르는 이상은 은혜가 뜯겨져 나가는 경험을 겪으면서 거기서 뭐가 없어지는가, ‘나’라는 것이 실종되는 경험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예레미야를 보면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어떻게 보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고 예레미야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보고 다른 사람은 예레미야를 어떻게 보느냐, 이런 관계로 봐요. 우리의 평소 살아가는 것이 사람 대 사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 관계로 보는 겁니다. 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세상의 종교가 많고 다 신을 믿지요. 그런데 이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이 알고 있는 신과 언약, 이것을 하나님께서 강제로 분리를 해버려요.
분리를 해 버리면 인간들이 생각했던 신은 그것은 신이 아닌 겁니다. 인간이 지어낸 망상이에요. 가인이 신에게 제사드릴 때 아벨을 따로 준비해서 가인의 신과 아벨의 신의 차이점을 나타내 버립니다. 한 예를 들면 노아가 전도를 했어요. 노아가 전도를 했는데 노아가 만약에 자기 식구를 구원한다면 노아의 전도 때문에 자기식구가 구원받았느냐, 아니면 방주 때문에 구원받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신약시대에 사도들이 전도를 하는데 전도자 때문에 구원받는 일은 없어요. 이것은 노아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방주로 인하여 노아 자체도 구원받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어도 하나님을 안다는 것 때문에 네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지요. 그 하나님은 인간이 지어낸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가 신을 지어내 놓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소설이고 시나리오잖아요. 그런 것은 일체 안 됩니다. 그래서 인간을 제외시키는데 인간은 제외시켜도 자꾸 들러붙어서 안돼요. 그래서 인간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아버지와 예수님사이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레미야가 받는 이 고통과 심판, 이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아픔도 자기가 이렇게 아파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 아파야 된다는 그 말을 듣고 우리가 아픈 그 흉내를 낸다면, 아프고자 애를 쓴다면 그것은 전혀 예수님의 구원의 취지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왜 모르느냐, 엄연히 내 자신이 의식되고 내 자신이 살아 있는 이상은 가장 내 구원에 방해자가 나를 느끼는 내가 되는 겁니다. 내 구원을 내가 훼방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느껴지고 이렇게 내가 있다는 것을 아는데 이걸 어떻게 모르는 것으로 할 수 있느냐? 그것은 무리한 요구다.’ 할 수 있거든요.
그 방법은 의외로 쉽습니다. 불교에서는 자기를 비우고, 비우고, 그 비운 것을 또 비우고, 이렇게 하는데 그것은 백날 해 봐야 그것은 사기니까 속아 넘어가지 마시고요. 불교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뜻은 기독교 목사한테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뜻으로 아시면 됩니다. 성경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이렇게 합니다. 들어보면 간단해요. 이사야 53장 3절을 제가 잃어드리겠습니다. 2절부터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으며.” 이겁니다. ‘싫어버린바 되었다.’는 것.
‘싫어버린바 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 제가 구원받고자 합니다. 누구를 모델로 삼고 누구를 본받으면 됩니까?’라고 물어요. 왜, 내가 느껴지니까. 남이 구원받는 것은 안 기뻐요. 내가 구원받아야 기뻐요. 진정한 구원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나 이어야 하는 거예요. 이것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를 태어날 때부터 이랬고 이래서 우리는 불교신자인겁니다. 구원받아서 장래를 미리 대비해서 지금은 고생스러워도 나중에 죽어서는 편안하고 행복은 삶을 누리겠다, 이것은 타고난 본성인데 이것을 말릴 수가 없어요.
이것은 뜯어고칠 수도 없고 하지 말라고 하는 그 자체가 무리한 요구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리 주님께서 이야기해도 자꾸 거기에 끼어들어요. ‘주여, 예레미야가 고난 받았으면 나도 받겠습니다.’ 자꾸 우리는 내 구원을 위하여 힘을 쓰고 나를 가만 두지를 않아요. 자꾸 구원받는데 한자리 끼어들려고 하는 거예요. 뭔가 알아 되는 양 배우려고 하고.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자기 방법으로 이것을 내 쫓느냐 하면, ‘싫어버린바’ 되게 하는 겁니다. ‘싫어버린바.’ 예레미야가 고난 받는 것을 알고 우리가 예레미야를 본받으려고 달려들면 처음에는 예레미야 그 모습이 싫어지지만 사람의 정이라는 것이 자꾸 보면 정 나게 마련이지요.
나중에는 예레미야의 고난도 자꾸 정이 들어요. 그러면 예레미야는 더 이상 우리에게 싫어버린바 되지를 않고 우리의 친한 친척인양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하면, 예수님은 우리 손에 잡히지를 않습니다. 잡았다, 하는 그 순간 벌써 내빼고 없어요. 우리에게 싫어버린바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잡게 되면 예수님 잡은 나를 스스로 내가 우상화시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잡은 나를 믿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싫어하는 모습으로 다시 다가와 버리면 내가 예수 잡은 그 신앙이라는 이유로 해서 그 쪽을 우리가 싫어하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가 구원받는데 우리는 전혀 기여한 바가 없게 되는 겁니다. 내가 구원되는데 전혀 기여한 바가 없게 되는 겁니다. 성경의 복음은 이렇습니다. 간단합니다. 오늘 설교에서 이것은 꼭 들어야 돼요. 우리한테 싫은바 되신 분이 홀로 다 하셔서 그 결과로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방금 제가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말을 했어요. 우리에게 싫어버린바 된 그 분이 싫어버린바 된 그 결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이 고난 받으라고 하면 우리는 고난이라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 인간들이 우리 자신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노력한 것을 주님께서 지적해버리면 지적하는 그 분이 주님인줄도 모르고 우리는 그 분을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나는 지금 예수님의 고난을 받는 그것을 스스로 자화자찬하고 있기에. ‘아, 내가 주님과 더불어 고난을 받다니! 야, 나라는 인간은 하여튼 대단해, 대단해! 십자가 고난까지 참여하니까 대단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존재의 모습이거든요. 그래서 항상 성령이 오게 되고 주님이 오게 되면, 우리가 어떤 것을 흉내 내려고 시도하더라도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존재로 발각 당하게 됩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이 잇몸이 되셔서 주님이 만들어진 나라는 것은 그 전에 내가 생각했던 나가 아니라 매일같이 주님이 나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다는 그런 나를 우리는 추후 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러면 매일의 내 모습은 내가 기대했던 내가 아니라 주께서 손수 만들어서 만들어진 나임을 우리가 차후 적으로 늘 느끼게 되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거부당했습니다. 절망이었습니다. 하지만 23절에 보게 되면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분명히 몸 아프고 기도 응답 안 돼요. 분명히 이쯤이면 응답이 와야 할 그 시점이 아무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했던 기도 응답은 되지 않더라도 주의 말씀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야, 주님이 나하고 거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예수님하고 거래해서 그 거래한 결과로, 그 결과물로 우리 자신이 매일같이 만들어진다.’는 거지요. 예수님이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신 결과로 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열심히 일한 결과로 오늘날 내가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뭐라도 흉내 내서 나 유리한 쪽으로 실시하는 그 못된 버릇, 평생을 가도 없앨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싫어버린바 된 그 분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죄고 그것이 저주받을 짓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이러한 관계에 엮이게 된 것이 진짜 주님의 은혜인줄 알고 우리가 어떤 수난과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마땅히 받을 고난과 수난이라고 여기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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