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애가 3:20-24 / 소망 / 120620 본문
소망
이근호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3:20-24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7강-애가3장 20-24(소망)12062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3장 20절에서 2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47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20-24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나라가 망했는데 오히려 완전히 진멸되지 않은 것은 감사합니다, 그것이 소망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날라 간 것은 어디서 회복합니까? 아깝지도 않습니까? 예레미야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싹 다 날라 가야 되는데, 완전히 날라 가야 되는데 유다 자체가 전부 다 멸망당해야 되는데 이렇게 얼마간 남아 있다는 것, 포로 잡혀 간 사람들을 두고 이야기하겠지요, 얼마간 남아 있다는 것은 ‘저 남아 있는 자도 결코 남아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고백 하에서 이러한 소망이 나오지요.
여기서 알 수 있는 소망이라는 것은 ‘하나님, 이것만큼은 제발 손대지 말아주세요.’라는 데서 살아남았다는 소망이 아니라 ‘이것마저도 사실은 다 거덜 나야 되는데 이것은 왜 남겨둡니까? 아, 이것이 주님이 주신 소망, 주님이 주신 희망이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 마음가짐이라는 것이 우리의 인간적인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들지요. 현재 있는 것은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은 강력한 자기존재에 대한 집착이잖아요. 이 집착으로 인하여 우리는 살아가는데 그러한 집착을 가진 사람한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소망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남아있는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하면, 여기에 중요한 말, 어려운 말이 나옵니다. 24절에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남아 있는 사람의 기업이 아니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업인 것을 눈치 채는 그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방에 있는 거울을 깼다고 칩시다. 큰 거울이 천장을 평소에 비추었는데 애들이 장난치다가 거울을 깨서 그 깨진 거울이 아래쪽으로 다 쏟아졌다 합시다. 그래서 엄마가 그 거울을 다 치웠는데 손바닥 만 한 깨진 거울조각이 하나 남았다면 그 손바닥만 한 깨진 거울조각 안에서 큰 거울로 보였던 천장이 그 안에 다 보일 때에 거기에는 여전히 소망이 남아 있는 거예요.
옛날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우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업이 된다면 어떤 착각에 빠지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니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런 의식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하나님이 저를 버리면 하나님도 손해입니다. 그러니까 저를 버리면 안 됩니다.’ 하는 식으로 자기 사는 것을 기정사실로 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기에 결합시키는 경우를, 그런 오해를 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오해, 그런 사고방식이 결국은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끌게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기업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기업인데 그 전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 나라 이스라엘이 있다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고 여겼다는 말이지요. 기업이라 하니까 요새 말로 회사를 두고 기업이라고 하는 것 같이 보이는데 그 기업이 아니고 쉽게 말해 ‘상속, 상속물’ 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어떤 상속인가, 부모가 자식에게 남겨주는 상속 물을 기업이라 또는 상속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부모가 자식에게 상속 물을 남겨준다면 그 이야기를 자식이 들었을 때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 저를 괄시하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애지중지 하는 아버지의 상속분은 저입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저를 박대하면 아버지의 상속이 날라 가는 겁니다.’라고 아버지를 향하여 도리어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버리지요. 우리가 성경을 보고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 항상 자기가 챙길 것을 먼저 챙기는 버릇이 있다 보면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러한 오해가 매일같이 생기는 겁니다.
문제가 어디서부터 되느냐 하는 것은 예레미야가 당했던 치욕스럽고 굴욕스럽게 당했던 유다나라 멸망사건에 우리가 참여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우리의 존재자체, 우리 자신의 존재를 가지고 큰 소리 치는 형국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겠지요. 예레미야가 살고 있던 유다나라가 전쟁에서 패배를 합니다. 우리가 축구나 야구를 봐도 자기가 편들고 응원했던 팀이 져버리면 상당히 마음이 안 좋지요. 대한민국과 일본이 축구시합을 하면 축구가 아니라 전쟁이죠. 그런데 한국이 만약 일본을 이기면 그 다음날 온 국민들의 출근시간은 아주 생기발랄합니다. 그런데 만약 졌다, 그러면 가슴 아파 하고 일도 손에 안 잡혀요.
그런데 진 정도가 아니고 5:0 이라는 큰 점수 차로 졌다, 그러면 수치와 굴욕을 느끼는 겁니다. 지금 유다나라가 누구한테 졌느냐, 지금 유다나라가 자체적으로 자폭을 했으면 어느 정도 자긍심은 남아 있을 거예요. 자폭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에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족속이라고 간주했던 그 바벨론 나라의 일사불란하고 강력한 군대와 무기 앞에 하나님한테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도움만 원했던 유다나라가 쫄딱 망했어요. 망한 정도가 아니고 아주 굴욕적으로 철사 줄에 꽁꽁 묶여서 포로 잡혀 간 사람들, 그것도 시시한 사람들이나 인간 같지도 않은 천한 사람들은 데려가지도 않고 쓸 만한 사람들과 귀족들을 두 번 다시 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바벨론 왕이 잔인하게 다 데려갔습니다.
잡혀간 사람 중에는 에스겔도 있었고 다니엘도 있었죠. 예레미야는 잡혀갔다가 바벨론 장군이 ‘당신은 그만 돌아가시오.’ 해서 도로 집에 온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배신자, 순교해야 될 선지자가 순교마저 허락을 못 받고 오히려 배신자로 낙인찍힐 정도로 도로 자기고향에 돌아와 버린 겁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이러한 모욕과 수치를 배후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줬다는 사실을 예레미야 애가를 통해서 알려줍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믿는다, 사랑한다, 소망한다, 어떤 좋은 말을 동원해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자긍심이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중심부분이 속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나의 자존심이 강화되는 거예요. 그것을 자긍심이라 하지요. 나는 곧 죽어도, 집에 쌀 한 톨 없어도 나는 갓을 벗지 않는다는 그 선비정신, 내가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처자식이 굶어죽어도 내가 상놈한테 손 벌리지 않는다는 이 양반정신, 나는 굶어죽어도 주일 지킨다는 그 주일정신, 이것마저 처참하게 망가져야 됩니다, 이것마저! 나는 복음을 알기 때문에 남에게 꿇리지 않는다는 그것이 남들 보기에 되게 복음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 보기에는 그것도 마귀의 유혹이었고 마귀의 몸짓이었어요. 예수, 하나님, 복음, 십자가, 언약, 온갖 좋은 것 다 가져와서 자기 자신의 외장을 멋있게 성경적으로, 말씀으로 치장을 해도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자긍심입니다. 선비정신.
예수님은 과연 그랬는가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어떤 수모도 당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내 놓겠다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과 결별하고 난 뒤에는 문 꼭 닫아걸고……, 예수님도 가버렸고 천사도 안 올 것이고 이제 남은 것은 그나마 쥐고 있는 것은 마지막 남은 자긍심, 그 자존심을 서로가 지키기 위해서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찾아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끝까지 추궁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기는 사랑 하냐?’ 다시 말하면 ‘네가 언제 나를 사랑한 적이 있기는 있느냐?’ 그 말이지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네 신세, 네 팔자, 네 인생 그것만 챙겼잖아.’ 예수 믿으면 내 인생 내 자존심 세우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냥 다리 걸쳐 놓듯이 걸쳐 놓은 것이지 진정 네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과연 이 예수님이었는가, 아니면 너 자신의 자긍심이었는가를 다시 한 번 물어보는 겁니다. 베드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그럴 때 베드로가 자기의 본색을 숨기지 못하고 또 엉뚱한 발언 합니다. ‘저 요한, 저 제자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나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요. ‘내가 재림할 때까지 남아 있다 하더라도 네가 관리할 몫이 아니니 너는 네 갈 길을 가라.’
끝까지 다른 제자하고 자기하고 비교한다는 것, 그리고 두리번거린다는 것, 두리번거릴만한 여지가 아직도 안 깨지고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인간속의 자긍심의 완력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가 없어요.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워낙 세니까, 나의 자존심은 나에게 너무 세니까. 심지어 얼마나 세면 자살까지 하겠습니까? 자살한다는 말은 아직도 나는 안 죽었다, 그런 뜻이거든요.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버리겠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해서 목숨은 버리고 목숨 버린 대가로 자존심은 살리겠다는 뜻이거든요. 그 살리겠다는 그 자존심, 그것을 죽이는 것이 영적죽음이고 진짜 십자가의 죽음인 겁니다. 그것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서문시장이나 칠성시장에서 채소 파는 할머니 아주머니들 전 거둘 때 대부분 뭐합니까? 오늘 얼마나 남겼는지 주머니에서 돈 천 원짜리, 만 원짜리, 오만 원짜리 꺼내서 계산하지요. 그처럼 우리도 오늘 내 자존심은 어떻게 유지했는가, 늘 그거 계산하는 거예요. 그 계산하다 보면 바로 옆 사람과 우리가 비교가 되고 저 사람한테 안 지려고 하는 것, 그 안지겠다는 그것이, 아직도 그 자긍심이라는 씨앗이 남아 있는 거예요. 그것이 남아 있으면 그것은 아직까지 주님의 저주와 심판의 의미를 잘 몰라요.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장차 올 메시아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자기의 메시아라는 자존심마저 사람들손에 산산조각 나듯이 그냥 흔적도 없이 다 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자존심은 누가 살리느냐 하면, 아버지 하나님이 살리는 거예요. 예수님 본인이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냥 아버지한테 이런 말을 했어요. ‘아버지여, 어찌 저를 버리셨나이까.’ 버림받은 그 절차가 없으면 아버지한테 온전히 맡겼다고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온전히 버림을 받아야 온전히 그 다음 조치는 그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의 명예와 영광의 손에 넘겨지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부활된다면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예요. 죽은 체 하면서 눈 감고 살짝 새눈 떠가지고 언제쯤 부활시키나, 한 열시쯤에 부활되나, 주께서 이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뭘 알았느냐, 말씀이 어떻게 해서 어떻게 천국을 이룬다는 것을 아시기에 그 말씀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이 세상이 죄와 더불어서……, 예수님이 죄인 아닙니까,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택한 백성의 죄를 뒤집어썼으니까 아버지한테 죄인으로 취급받는 거예요. 죄인이 갈 곳은 그냥 버림받는 거예요. 거기에 무슨 여지라는 것이 없어요. 말씀 따라서 모든 것을 맡기면 말씀이 알아서 언약대로 고난 받고 사흘 만에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 성도에게 성령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보고 예수님 가신 길을 가라고 한다면 우리는 기껏 흉내나 내고 시늉만 할 뿐이에요.
어떻게 그 세계에 진입이 가능합니까? 진입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본인이 원하지 않던 예수님의 팔자 속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합류가 되면 합류 되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요한복음 15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로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터이나……” 이것이 엄청 중요한 말씀인데 일단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 사람들은 미움을 받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미움을 안 기 위해서 자기 것을 꽁꽁 챙기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세상은 덜 미움 받기 위해서,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남에게 능멸 당하지 않기 위해서, 남에게 수치와 모욕을 될 수 있는 대로 당하지 않는 방법이 뭐냐, 자기 것만의 힘을 키우고 자기 것을 확대시키는 그 방법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공통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너희가 만약에 너희 것을 사랑한다면 세상이 예수님 제자들을 미워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왜, 같은 편이기 때문에.
‘저 예수님의 제자들 어떻게 사나, 우리하고 똑같네. 자기 자긍심, 자존심 위해서 신을 믿고 예수 믿는 것 보니까 우리가 부처 믿어서 자존심 세우는 거나 매 한가지네. 모든 종교는 똑 같네. 천상천하유아독존, 자기만 위하고 자기만 편하면 끝나네.’ 그러니까 세상이 미워할 필요가 없잖아요.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을 이유가 없다니까요. 마귀가 알아요. 마귀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 마귀인데 나 마귀가 예수도 알고 사도바울도 아는데, 그 쪽 분들은 저쪽 세계라는 것을 내가 알거든. 그런데 너희들은 내 쪽 세계, 이 마귀세계에 속했는데 왜 자꾸 저쪽 세계의 흉내를 내느냐?’ 그 말입니다.
미움이에요, 미움. 어떤 미움, 예수님이 미움 받는 거예요. 예수님이 누구한테 미움 받는가? 바로 자존심과 자긍심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은 미움 받았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의 내부, 제일 깊은 곳을 향하여 말씀이 화살처럼 꽂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흉내나 행함으로 위장할 수 있는 용도의 말씀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 제발 이것만큼은 손대지 마세요. 이것 손대면 안 됩니다.’라고 하는 곳에다 화살을 쏘아대는 겁니다.
젊은 주부들이 ‘하나님, 다른 것은 가져가도 좋은데, 내 목숨은 가져가도 좋은데 내 아이만큼은 다치지 않게 해 달라.’는 이런 것, 그리고 연애하는 사이에서 어떤 남자가 ‘신이시여, 제가 벌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저 여자만큼은 허락해주세요.’ 이런 것, 내 모든 것을 잃어도 저것 하나는 얻을 정도로 나는 대단한 존재며 나의 존재가치는 저것이 있기에 유지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무엇, 그것을 주님께서 폭파시키면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에요.
나의 가치는 이런 것들이 모아져서 나의 가치가 있다고 우기는데 문제는 그런 나의 가치가 죄잖아요, 죄. 여러분이 아시잖아요.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있다는 것을. 이거 몰라요? 이것은 기본이잖아요. 제가 지금 이야기한다고 해서 처음 아는 것처럼 하시면 곤란합니다. 기본이 뭐냐,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저주는 안 받겠다는 거예요. 저주가 무엇 때문에 오는지를 본인이 안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몰라요. 저주가 괜히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있을 때 저주가 오거든요.
출애굽 때 죽음의 사자가 괜히 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조리 다 죽이려고 온 거예요. 모조리 다 죽이려고 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람들이 자긍심,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안 죽은 것이 아니고 문설주에 발라놓은 흠 없는 어린양의 피가 대신 죽었기 때문에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가준 거예요. 그러니까 피를 보고 넘어갔다는 말은 이미 큰 애는 죽은 자다, 그런 뜻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저주가 오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우리가 말리면서 아니오, 라고 손짓한다고 안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마지막 남긴 최후의 자존심의 덩어리가 저주를 유발할 덩어리다, 그 말입니다. 왜,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은 것 자체가 저주입니다.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왜 따먹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가, 왕, 왕, 왕! 울려요. 속에 앰프가 들어 있어서 왕왕! 울리면서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 이게 왕왕 울린다고요. 여기서 예레미야는 유다나라의 멸망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기업이라는 것을 통해서, ‘아, 내가, 우리가 기업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기업이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언급합니다. 이 말은 구약성경에 약속했던 그 약속, ‘내가 내 기업을 만들 것이다.’라는 그 약속을 이스라엘이 나서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서서 만드는데 그 만드는 과정 중에 필수적으로 거쳐야 되는 절차가 뭐냐, 마지막 남아 있는 나의 자존심과 자긍심, 나의 가치라는 것, 그것이 와장창 수치와 수욕으로 깨져야 됩니다.
이것을 누가 도와주느냐, 바로 불신자들이, 불신세계에서, 세상이 이것을 깨는데 도와줍니다. 얼마나 그 사람들이 고마운지. 비언약적인 불신세계 이단들이 존재해야 될 이유가 거기 있는 거예요. 그들이 항상 우리 성도가 갖고 있는 마지막 남아 있는 자긍심과 자존심을 그것마저 홀라당 모욕하고 능멸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줍니다. 참 고마우신 분들이에요. 정말 고마우신 분들입니다. 그렇게 능멸할 때 강력하게 ‘나 복음 안다, 십자가 안다.’고 반발하면 그것은 여전히 자기 자긍심이 있는 가짜였다는 것이 들통 나지요.
오늘 저녁에 보니까 어떤 분이 십자가마을에 질문을 하나 해 놓았어요. 세상에 이단들이 설치는데 언제까지 이단들을 하나님께서 그냥 방치할 것인가, 그 질문이었어요. 제가 답변을 해 놓았습니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부지런히 살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 저런 유구나, 하는 것이 윤곽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잠언서에 보면 의인과 악인, 악인과 의인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어요. 잠언서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다 짝을 이루는데 후렴처럼 붙는 것이 ‘악인은 이렇고 의인은 이렇고, 이런 자는 악인이고 이런 자는 의인이’라고 하지요. 이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택한 받은 자가 있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있다고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으면, 우리가 성도라면 평생을 살면서 ‘누굽니까, 누가 버림받은 자입니까?’ 그것을 파악하는 눈이 같이 아울러서 팍팍 돌아가야 된다 그 말이지요.
창세기 21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업과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기업이라는 단어에 따라붙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내어 쫓으라.’고 했다고요. 이 말을 듣는 우리 생각은 뭐냐 하면, 버림받을 사람 같으면 아예 이 땅에 태어나 하지를 말든지 아니면 이 땅에 태어났어도 나한테 멀리 수만 킬로 떨어져 살게 하든지 해야 될 것인데 이렇게 한 집에서 살게 해 놓고 ‘저 애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 기업을 얻지 못할 버림 받은 자.’라고 간주하는 이유가 뭐냐는 말이지요.
아예 지옥 갈 사람이라면 옆에 붙이지도 말든지 하지 왜 붙여놓고 ‘저 사람은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말을 왜 하시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지도 못할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우리 죄 때문에 죽은 겁니다. 우리 존재의 가치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구원받아야 되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그 다음에 구원되고 안 되고는 예수님 소관인 겁니다. 우리는 죄 너머에 내가 마땅히 있어야 될 가치가 있는 것처럼 자꾸 우리의 죄를 넘어서서 생각하는데 그렇게 넘어서는 생각을 하는 것을 모욕과 능멸을 통해서 잘라버리는 겁니다.
네가 구원되고 안 되고는 예수님 내 소관이지 너의 기대감으로 인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일러주는 거예요. 기업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물론 아브라함 시대에는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거의 2천년 뒤에 나타나시기 때문에.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위에 그냥 한가하게 머물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기업이라는 것, 상속이라는 것, 하나님의 언약적인 상속을 집어던져놓고 그 상속이 일종의 카메라처럼 장착되어 있는 겁니다. 일단의 마라톤 선수가 마라톤을 하게 되면 그 길에 나선 마라톤선수만 뛰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중계차가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 중계차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달리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부터 출애굽기……, 계속해서 달려 온 겁니다. 그 기업이라는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로부터 능욕과 수욕과 수치, 이런 것을 당하게 만드는 식으로 기업이 되게 하시는데 우리는 자존심과 자긍심이 있어서 수치는 안당하려고 하고 그냥 어떤 지식으로, 복음적인 지식, 언약적인 지식, 또는 신앙심, 종교심, 이런 것을 동원해서 수치를 안당하면서도, 능멸을 안당하면서도 되는 구원 이후의 자기모습을 자꾸 상상하는 거예요.
그리되면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가 하나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이벤트가 되어버려요. 가만 있거라, 내가 다 해줄게, 주님께서 벌이는 쇼가 되고 우리는 그저 박수나 치면 되고. 그것은 아니거든요.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다가 예수님을 다 버렸잖아요. 예수님보다 자기 구원먼저 생각하다가 결국 예수님을 버릴 수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베드로 같은 경우에 객기를 부리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예수님 자체를 모독했지요. 내가 더 중요하니까. 내가 더 중요하다는 마지막 그것마저 성령이 와서 십자가로 깔끔하게 능멸케 하는 순서가 남아 있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단들과 이방인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의 몫이에요.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런 역할을 좀 해 줘야 돼요. 복음도 모르면서 복음 아는 척 하는 것, 십자가도 모르면서 십자가를 아는 척 하는 자들이 성도를 향하여 그렇게 능멸을 계속 해 줘야 되는 겁니다. 신명기 9장 29절에 보면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알아서 이끄시는데 그렇게 알아서 이끄신다는 그 말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열심히 우리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챙기면서 자기의 위신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지요, 바로 그것으로 인하여 예레미야가 당했던 그 능멸과 수욕, 그것도 안 믿는 백성들로부터 모독을 당하는 그 수치를 계속해서 된통 얻어맞으면서 비로소 그 능멸가운데서 십자가의 능멸에 동참하는 계기를 통해서 우리는 소망이라는 것이 하나님 자체가 소망이고 예수님 자체가 소망이지 예수 믿는 내가 나에게 소망이 아님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겁니다.
육에서 나온 소망은 예수 이용하기지만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은 바로 예수님의 소망이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 우리가 그것을 이용할 수는 없어요. 예수님의 소망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주님의 소망이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사실, 변개되거나 변경될 수가 없다는 사실, 늘 내가 나를 신경 쓰는 것 보다 주님이 나에 대해서 더 신경 써서 어쨌든지 간에 십자가로 꼴아 박는 그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주께서 하신 말씀이 오늘도 우리 귀에 쟁쟁히 들리는데 그것을 제가 오늘이라고 이야기한 이유가 오늘 본문에 보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봅시다. 예레미야 애가 3장 23절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매일같이 주께서 우리 자신이 주님의 소망이며 주님의 기업이고 그렇게 되도록 매일같이 우리 자신의 자존심과 자긍심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구원받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나름대로의 속성은 포기되지 못하고 날마다 바깥으로 발산됩니다. 남한테 안 지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하루 일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남한테 꿇리지 않고 나의 가치를 어디서 찾을 것인지를 머리 굴리는 것이 저희들의 24시간의 삶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이용해서 나의 가치를 높여보자, 향상시켜 보자, 잘 살았다, 훌륭하다, 놀라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서 움직이는 우리,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러한 것이 늘 주위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한이 있더라도 늘 깨달음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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