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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애가 3: 55-60 / 두려워말라 / 120704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애가

예레미야애가 3: 55-60 / 두려워말라 / 120704

정인순 2012. 7. 4. 20:38

 

 

두려워 말라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2년 7월 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3: 55-60


(애 3:55, 개역)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애 3:56, 개역)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

(애 3:57, 개역)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하셨나이다』

(애 3:58, 개역)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애 3:59, 개역)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하옵소서』

(애 3:60, 개역) 『저희가 내게 보수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

예레미야가 물 없는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억울하고 분통해합니다. 그 당시 왕인 시드기야왕의 지시에 의해서 빠졌습니다. 평소에 예레미야를 미워하고 모해하는 신하들이시드기야왕으로 하여금 예레미야를 죽이도록 부추긴 것입니다. 그런데 왕의 입장도 우리가 생각해 봐야합니다.

왕이란 그 국가의 안녕과 보위를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왕에서 모든 최종 권한은 넘겨준 것입니다. 즉 일개 백성들이 못하는 것을 왕은 나라 전체의 번영을 위하여 힘 써보라고 사적인 권한까지 왕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가 잘 되려면 명령 계통이 오로지 왕에게 통하는 하나 뿐이어야 합니다.

만약에 백성에게 또 다른 명령계통이나 지시계통이 내려오게 되면 이는 나라가 둘로 나뉘어진 셈이 됩니다. 따라서 신하들은 왕에게 조언을 하되 최종 결정은 왕이 내려야 하며 그 왕이 지시한 이상, 악법이라도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나라 백성된 도리를 포기한 셈이 됩니다. 즉 왕와 백성의 관계가 아니라 왕과 원수의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왕의 신하들이 이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한다”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자연적으로 백성들 사이에는 혼돈이 일어날 소지를 품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입장에서는, 왕이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를 때만 왕다울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 나라에서 인간 왕이 제일 높은 자리가 아니라 그 위에는 하나님이 왕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왕의 취지가 다른 미래를 예언한다고 해서 예레미야가 왕으로 자처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예레미야로는 본인이 좋든 나쁘든 간에 외칠 것은 외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왕은 예레미야의 왕을 사람의 말로 들어서도 아니되고 자신의 권력을 탐하는 발언이라고 여겨서도 아니되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이러한 입장은 마치 신약 시대에 아기 예수님의 처지와 같습니다. 그 당시 왕인 헤롯 왕이 아기 예수님의 출생지에 권력을 남발하여 두 살 밑의 아이를 모조리 죽여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왕이 얼마나 대단히 무섭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려준 효과는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동시에 이 세상 말고 다른 나라, 곧 하나님 나라가 이미 개시되었다는 사실은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자기 죽음에 직면에서 인간적으로 몸부림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소연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응답을 해주십니다. “두려워 말라”고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이 응답을 받은 것은 자신이 편할 할 때가 아닙니다. 죽음을 가장 가까운데서 직면할 때 받은 응답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응답이란 그 응답자가 죽음에 둘러싸여 있을 경우에 국한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든다는 것은, 죽음에 둘러싸였음이 아니면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사람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하면서 기도하는 모든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지는 환경이 아니다 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인간이라고 여기고 그 다음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를 묻는 것이 성경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반대이어야 합니다. 즉 “너는 이러저런 일을 할 때에 비로소 인간이다”는 말입니다. 나의 존재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나 말씀이 우선입니다. 이것을 바꾼 경우가 마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부자청년이 나옵니다. 부자청년이 하는 말이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만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나옵니다. 우리는 이 발언에서 공포, 곧 두려움에 둘러싸워 있는 한 인간을 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기 힘으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예수님에게 찾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사람은 자기에게 찾아든 두려움을 선한 일로 해결할 수 있를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해결책은 도리어 반대입니다. “너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여겨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즉 이 부자 청년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돈이 자신을 인간답게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도리어 자신에게 걱정과 두려움을 안겨주는 요인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가시로 만든 이불을 덮는 것처럼 자신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겁니다.

예수님은 모든 재산을 버리라고 했을 때, 부자 청년은 근심하여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근심이 어디서 온 근심일까요? 자신을 마치 인간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명에 의하면 인간은 ‘한 줌의 재’입니다. 즉 재가 되는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성도가 사람으로 사는 것은 “두려워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 상황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즉 성도에게는 앞으로,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들이닥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끄셔서 말씀의 현실성을 나타내 보이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받을 때에 거기에 악마가 나타났습니다. 악마는 이처럼 예수님과 관련한 자리에만 나타납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택한 자라고 미혹하기 위함입니다. 돌이 떡 되게 하고, 기적을 베풀어서 ‘인기 있는 메시야’로 자처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세상 권력적으로 움직이는 메시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동안 인간 사회가 이미 악마의 힘에 지배받고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즉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공포가 수시로 찾아든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거기 누구요?”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수직적으로 자신의 할 일을 생각하지 않고 수평적으로 자기 일들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주변 인물에서 찾기 마련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참으로 일반적이지 않는 삶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실은 우리들이 이상한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늘 죽음 앞에서 설 때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명과 지시를 받게 됩니다.

자기 식으로 살려고 하면 악마가 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귀 앞에 무장해제해서 자신을 사수할 수 있는 모든 것과 자기 자랑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목숨보다 예수님의 사명이 더 귀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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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오용익

9강-애가3장 55-60(두려워말라)12070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3장 55절에서 6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48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55-60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하셨나이다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 하옵소서 저희가 내게 보수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시드기야 왕이 이스라엘 왕인데 왕이라면 왕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다 협조를 해야 됩니다. 야당이라고 해서 쥐어뜯기만 하면 그렇게 밉상이죠. 요새 대통령도 그런데 왕 같으면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어줘야 나라꼴이 되어가는 겁니다. 왕의 지시를 따라줘야 책임 있게 국가를 끌고 가고 백성들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모든 권력을 왕에게 일임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유다사람이 선지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왕의 정책에 대해서 반대하게 되면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나라가 두 개로 되는 셈이에요.

 

백성들에게 어떤 지시가 올 때 명령계통이 두 개가 되어버리면 백성들이 어느 장단에 춤을 추게 될지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렇잖아도 나라가 힘든 판국에. 임금이 ‘여러분, 이렇게 합시다.’ 그러면 백성들이 있다가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던데요? 그게 하나님 뜻이 아니라 하던데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한마디로 임금이 말발이 안서잖아요. 교회도 마찬가지잖아요. 목사님이 이렇게 합시다, 하는데 장로님들이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합시다, 하면 목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목회하고 네가 설교해라.’ 이렇게 나올 것이 뻔하다는 말이지요.

 

예레미야가 이렇게 힘들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시드기야 왕 입장에서는 굉장히 그것이 불쾌한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예레미야가 왜 그렇게도 나댈까, 하겠는데 우리가 아시다시피 예레미야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거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로 오셔서 그냥 말 한마디 한 마디 무엇을 의미하느냐, 간단히 해서 이렇습니다. ‘백성들아, (요새 말로 하면 국민들아!) 너희들이 평소에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희망하고 사느냐?’ 그러면 백성들이 속으로 대답하겠지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뭐라 하겠습니까? ‘글쎄, 그것이 행복도 아니고 그런 나라가 하늘나라도 아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지요. 백성들 자체가 현재 눈에 보이는 나라가 잘 되어야 자기가 잘 되니까 관심사가 거기에 몰입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런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인간들이 만든 이 국가라는 것, 국가가 보장해 주는 거예요. 만약에 전쟁이 일어나서 그거 보장 못해주면 우리는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하잖아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국가가 안정되고 잘되기를 원하는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게 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 국가가 너희들이 가야될 국가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때 기존에 있는 정권 잡은 사람들이 얼마나 싫어하겠느냐 그 말입니다. 예수님 태어날 때 조용하지를 않았잖아요. 헤롯왕이 예수님 태어난 장소를 알아서 그 장소 주변의 두 살 밑의 애들을 다 죽였지요. 왜 그런 것인가요? 왜 명령계통이 두 개가 되느냐 그 말이지요. 어떤 사람이 있을 때 왕이 지시하는 것만 남아야지 다른 것이 왕 노릇해버리면 왕이 두 사람 되잖아요.

 

왕이 둘이라는 것을 느끼고 이것은 세상 왕이고 저쪽은 하늘의 왕이라고 둘 사이를 구분해서 하늘의 왕에게 섬기고 순종하겠다는 사람을 신자라고 하고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라는 것은 하나님을 감춰놓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잠시 잊은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어디서 뭘 하든지, 집에서 놀든지 공무원생활을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항상 지금 우리를 인도하는 왕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구약성경 다니엘에 보면 그것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다니엘이 백수가 아니고 국가공무원입니다. 공무원이면서도 자신이 섬기고 기도하고 받들어야 될 분은 느부갓네살이 아니고 여호와하나님이에요. 에베소서 6장에 봐도 나오는데, 어떤 공장이나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하나님께서 공장장에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밑에 있는 종이나 노예한테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 네 머리 위에 너를 종으로 부리는 하나님이 따로 계시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어느 직장이든 사업체든 어디에 가도 내 위에 계시는 주님이 시키기 때문에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성령의 사람이고 그것을 미리 보여주는 사람이 예레미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들어간 것은 피서차 들어간 것이 아니고 지금 시드기야 왕이 집어넣는 거예요. 예레미야 38장 5절, 6절, 거기에 보면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들어가는 겁니다. 시드기야가 죽으라고 들어가게 한 거예요. 나중에는 빼내 줍니다만. 그럴 때 막상 구덩이에 들어간 예레미야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그게 본문 57절에 나옵니다.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하셨나이다.” 여기에 ‘두려워 말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55절에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거기에 대한 응답이 뭐냐 하면, ‘두려워 말라’고 했다는 거지요. 이 말은 예레미야라 할지라도 산채로 죽음에 이를 때는 두려움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설교가 시작됩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구덩이에서 죽음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응답받기를 ‘두려워 말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죽음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뭔가 이상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뭔가 성도답지 않다는 생각을 가져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 지옥 가는 사람들하고 동일한 삶인데, 뭔가 달라야 되는데 다른 것은 없고 뭔가 내가 지금 잘못되게 가는 것이 아닌가, 내가 신앙생활 안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한번쯤 생각해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델을 너무 주변에서 많이 찾기 때문에. 여고동창생이랄지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나의 모델로 삼는 거예요. 우리 서 목사님 자제분이 우리교회 나오는데 7월 2십 며칠쯤에 해병대에 입대한답니다. 학교 휴학하고 해병대에 합격해서 입대한다는데 내가 여기 있는 내가 군대에 입대한다, 그것은 수평적이잖아요. 그러면 수직적인 것은 어디 있습니까? 해병대에 입대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해병대에 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왕 군 생활 하는 거 해병대 가겠다.’ 이런 생각은 예레미야나 성경과 상관없이도 나올 수 있는 일인 겁니다.

 

내가 의대를 갈까, 법대를 갈까, 이것은 담임선생한테 물을 일이니 목사한테 물을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담임한테 물어보고 진로 정하고, 만일 의사라면 안과 할까 내과 할까,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 인생이 좀 이상하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그것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물어본 적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대학졸업하고 시집가고 애 낳고, 이런 것은 남들이 다 하는 것인데 그것이 다가 아니고 그것만이 인생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 본적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펴보면 나와요. 예레미야는 지금 구덩이에 들어갔고 그 구덩이는 호되게 당해서 죽으라고 들어간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거거든요.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죽음에 이르러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래서 응답받기를 ‘두려워 말라’는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아니라, 삼촌이나 올케가 아니고 혹은 대통령도 아니라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두려워 말라’는 음성을 언제 들은 적이 있습니까? 두려워말라는 응답이 안 나온다면 뭔가 우리는 세상사람 따라잡기, 그것으로 인생 잘사는 것처럼 오해할 가능성이 많아요.

 

사사기에도 나오고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응답한다는 것,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우리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닐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십니다. 왜, 그 응답이라는 사명이 있음에 네가 존재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응답이 없는데 그냥 내가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은 겁니다. 수직적으로 봐서 산다는 것은 항상 위에서 연결고리가 되어야 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연결고리를 자르든지 아니면 생각을 못하고 남들 하는 대로 가는 거예요.

 

우리 해병대 입대하는 사람 같으면 해병대 가서 어떻게 하겠다든지 또 어떤 사람은 취직해서 어떻게 하겠다든지 하는 계획, 이것은 위하고 상관없이 내가 여기 있음에 남들이 하는 흉내, 저 사람 저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남들의 흉내를 내면서 하는 거지요. 신학교 나왔으니까 목사 하겠다, 이것은 남들이 하는 것을 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그것을 목적으로 기도한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는 나를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는 응답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두려워 말라’는 이 대목을 보면서 자꾸만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기존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으면서 당회장 목사님을 수행해서 권사님과 일행이 함께 심방 다닐 때인데 그 목사님이 수시로 꺼내는 본문이 그거예요. 여호수아 1장을 펴서 ‘너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두려워 말라.’ 지금 심방을 받는 그 분은 하나님 없이는 못 죽겠다는 상황이 아니고 심방 받았으니 복 받고 여기서 더 발전한다는, 살아 있는 나를 더 살려달라는 것이지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순교당하는 그런 자세가 아닌데도 두려워말라고 하니까 좀 이상한 것은 느꼈어도 그때는 분명하게는 잘 몰랐지요.

 

왜 몰랐는가, 어떤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엉터리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 기준, 이것이 옳습니다, 하는 그 기준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그게 분명히 아닌 것은 알았는데 어디서 아닌지 그때는 밝혀내지 못했지요. 오늘 본문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성신을 받은 예레미야가 있더라는 말이지요. 예레미야가 기준이라면 예레미야처럼 인생을 안 살고 있는 우리는 지금 기준에서 이탈한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나는 인간이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된다.’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 지옥 가는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면 성경에서는 뭐냐, 아까도 언급했지만 ‘너는 이렇게 해야 된다. 그럴 때 너는 인간이다. 너는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는 인간인데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나는 뭘 해야 되는가? 아, 이렇게 해야 되겠다.’라는 것은 성경에 없고요, 성경에는 ‘두려워 말라’라는 일을 할 때 너는 비로소 선지자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두려워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계획을 한 거예요.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의도적으로 집어넣어 놓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레미야의 자생력이라든지 예레미야의 의지나 결심, 이것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에요. 너는 앞으로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이제부터 예레미야 속에서 솔솔 뽑아내는 겁니다. 이제부터 약간 어려우니 잘 들어보세요. 그러면 예레미야 입장에서 죽음에 직면했을 때……, 죽음에 직면하지 않은 상태에서 ‘두려워 말라’고 해도 그는 ‘예,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로 하여금 구덩이에 집어넣어서 죽게 해놓고 거기서……, 여기 오늘 본문 56절에 에 나오지요,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 ‘아, 죽겠습니다. 하나님, 날 왜 이렇게 죽이려고 하십니까?’ 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 라고 응답을 줬느냐?

 

왜 예레미야로 하여금 곤란하게 만들어놓고 왜 뒤늦게 ‘두려워 말라’고 응답을 주느냐? 이것이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갈 모습을 미리 대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 한 예를 신약에서 보면 부자청년이 나오지요. 부자청년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하면, ‘예수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두려움 속에 있는 겁니다. 부자인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기 딴에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끄집어 낸 용어가 뭐냐, 영생 얻으면 두렵지 않겠다, 라는 생각을 해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여, 어떻게 하면 내가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럴 때 예수님께서 그 부자한테 ‘네가 진짜 두려워해야할 것의 맛을 아직 못 봤다. 그 맛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영생을 논하는 것이 말도 안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네 모든 재산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 다음에 빈털터리가 되어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영생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 부자청년이 근심하면서 돌아간 거예요. 그러니까 이 청년은 자기에게 돈이 있다는 것이 두려움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고 돈이 모자라서가 아니고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돈이 오히려 두려움과 염려를 키우고 유발시키는 겁니다.

 

돈은 얼추 되는데 뭐가 없나 보니 영생이 없더라, 돈은 있으니 먹고 사는 것은 되었고 나머지 영생이 없으니까 요새 말로 교회 가서 예수 믿고 천당은 가련다, 이렇게 오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응답을 할 수가 없지요. 왜냐, 네가 용서가 없어서 두려운 것이 아니고 나에게는 돈이 있다는 그 사실이 가짜 근심을 일시적으로 덮는 것밖에 안되니까. 자기는 돈을 덮으면 편안한다고 생각하는데 돈이 만약에 가시로 만든 이불이라면 주께서 가시로 만든 이불을 걷어낼 때 비로소 돈이 있을 때는 근심이 있다가도 돈이 아예 없어버리면 아예 근심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너는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설교 다시 할게요.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지시가 와야 인간인데 이 부자청년은 뭐냐, ‘나는 인간이다. 이왕 인간된 것 근심 없이 살고 싶다. 돈은 있는데 영생은 없다.’ 따라서 돈은 됐다 싶고 나머지 선한 일을 해서 영생 얻고자 예수님께 온 거예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나는 일단 인간인데, 라는 그것이 너로 하여금 염려라는 가시이불을 덮어씌운 것과 똑같다.’는 말이지요. ‘나는 인간도 아니야.’라고 출발하면 염려가 없는데 ‘난 살 가치가 없어.’ 이러면 염려가 없는데 ‘나는 인간으로 살아야 돼.’라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모든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니까 그렇게 되면 졸지에 거지가 되는데요. 거지는 인간도 아닌데. 거지는 가치가 없잖아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뭘 해줄 것인가를 계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나타낸 진짜 인간의 모습, 성도의 모습은 뭐냐 하면,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될 인간으로 계속 너를 만들어가겠다는 거예요. 두려워하지 말아야 될 인간으로 되기 위해서는 남들 보기에 신자가 아니면 주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계속 유발되고 터지는 거예요. 예수님은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으니까 우리 같으면 완전히 염려와 걱정을 뒤집어쓰는 거예요. 왜 염려하는가 하면 ‘이러다가 인간 안 되겠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뭐냐, ‘너는 원래 인간 아니야.’ 우리가 ‘이러다가 내가 한줌의 재가 되지.’ 주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처음부터 네 이름 자체가 재야.’ 박 재, 이 재, 최 재, 이름 자체가 재인데 주의 말씀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을 가지고 그것을 반대로 해서 ‘내가 여기 있고 주의 말씀을 지키면 내가 더 풍요롭게 배 두들겨가면서 잘 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것은 근심과 걱정을 사서 하는 거예요. 그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스스로 쇼핑몰에서 돈 주고 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해야 될 일도 없는데 왜 살아야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연세 한 80 넘어가면 강제로 죽여 버리잖아요. ‘치매 걸린 그 모습이 네 모습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 두려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이걸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도대체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게 된 그 이유가 있어요. 이 세상에 걱정과 근심이 오게 된 이유가 마귀가 이렇게 집어넣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할 때 마귀가 예수님이 가지고 있을 성 싶은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을 노리면서 질문들을 해 댄 거예요.

 

사람이 떡 없이는 못살고 인기 없으면 그것은 메시아도 아니고 세상 권력 없으면 하나님 일 못한다, 우리가 평소에 안고 있는 모든 걱정 근심을 마귀가 집어넣었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아무리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도 항상 이것은 우리의 허락도 없이 불쑥 불쑥 올라오는 것이 뭐냐 하면 공포에요, 두려움이에요. 우리는 두려움이 생길 때 물어야 됩니다. ‘거기 누구 있소? 그 뒤에 누구인지 정체를 밝히시오. 나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은 누구야?’ 그러면 마귀가 얼굴을 쓱 내밀고 ‘나다, 나! 내가 너한테 두려움을 주는 거야.’

 

마귀가 어디 있느냐, 마귀는 공동묘지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예수님과 엮여서만 나타나요. 그래서 일반사람한테는 마귀가 이야기할 필요도 없어요. 왜, 그것은 애초에 마귀의 종이니까. 성도도, 택한 백성도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지옥 보내려고 환장하지 않았습니까? 뭔가 마귀가 환장한다는 그것, 그것이 말씀 그대로니까, 사자가 우니까 그것은 미친 사자고 정상이 아니지요, 이건 뭐 신자라면, 복음 아는 사람이라면 마구 공격하는 거예요. 마구잡이로 집 안에 있든지 집 밖에 있든지 마구잡이로 우는 사자와 같이 공격을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래가지고는 네가 못산다.’ 하는 식으로 예수님께 했던 세 가지 시험을 계속 성도에게 퍼붓는 겁니다.

 

그럴 때 성도가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나온다면 그 성도는 문제 있어요.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런 식으로 주문 외운다고 물러갈 사탄 같으면 그것은 사탕이지 사탄도 아니지요. 그런 식으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고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자기 스스로 계속해서 무장 해제를 해야 됩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지킬 만한 것을 내가 소지하면 안돼요. 무장해제, 옷이고 휴대폰이고 뭐고 내가 나를 지킬만한 것, 내가 이만큼 우수함을 자랑할 만한 모든 것을 주머니 홀랑 뒤집어서 다 내놓아야 돼요.

 

나의 의, 나의 장점, 축적된 나의 선행, 내가 뭘 해서 효과 봤다는 그런 것, 과거의 업적들, 그런 것들이 모여서 나는 인간이다, 이렇게 구축하기 때문에. 사명이 우선이고 내가 우선이 아닌데 자꾸 우리는 그런 것이 있으면 ‘역시 나는 계속 살아 있어야 돼. 나는 죽으면 안 돼.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는 죽으면 안 돼.’ 이렇게 나부터 챙기고 그 다음에 나를 살리기 위해서 사명이 유지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를 웅덩이에 집어 넣어버립니다. 예레미야한테는 구덩이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 더 못살겠네. 인생 여기서 이제 끝내라는 뜻이구나.’

 

이처럼 주님만 쳐다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다음 조치, 그 다음 사명이 무엇인지, 그 다음 내가 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 내 일은 없어지고 주의 일만 주어질 때 그때 비로소 주님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들어가는 것도 주의 뜻이고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도 주의 뜻이고. 바로 예레미야가 당했던 이 수모와 환란이 그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이렇게 폭력적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라는 것이 이렇게 폭력적이에요. 곱게, 곱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죽음에 집어넣는 그 폭력을 통해서 주님의 인자하심을 새롭게, 새롭게 우리에게 안겨주는 겁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나 잘되기 위해서, 나의 명예와 명성을 위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지 않도록 먼저 자기 백성부터 손대버리시는 하나님의 이 양보 없는 법칙, 원칙, 말씀의 원리, 영생 주는 원리, 이것이 바로 일관되게 유지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입니다. 그 부자청년이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에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부자청년만 못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그 뒤에 있는 제자들도 다 자신 없어서 ‘주여, 그러면 아무도 구원 못 받겠습니다.’ 하고 자수하고 말았어요.

 

부자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가지고 제자들이 자기 속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알아듣고 자수를 했어요. ‘그러면 주님, 아무도 구원받을 사람 없습니다. 저 부자가 지옥 간다면 아무도 천국 못갑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그 부자청년 이야기 백날 해 봐야 똑같아서 그 부자청년하고 달리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 차원이 선과 악의 차원, 행동을 어떻게 하고 안하고의 차원이 아니고 아예 수평적인 길 자체를 없애버리고 수직적인 관계만 남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마지막 한 말씀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전도서 7장 18절에 보면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그 앞에 있는 말씀은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지도 되지 말라……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고 하지요. 너무 똑똑하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지도 말라고 하는데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의인이냐 죄인이냐, 또는 지혜자냐 어리석은 자냐, 그 자체에서 벗어나는 길은, 거기에 저촉되지 않고 그 자체에서……, 내가 의인일까 악인일까, 내가 지혜자일까 어리석을까, 이 자체에서 벗어나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이 모든 좌우의 자체에서 벗어나고 초월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잘했나 못했나, 그것을 따지면 근심걱정이 떠날 리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말씀 증거 하기 위해서 사용한다는 그 사실, 그 사명이 나에게는 생명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레미야에게 일어났던 일, 그것은 그 개인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성도면 누구에게나 다 적용될 일인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에게 응답받아본 적이 있으며 우리가 언제 두려워말라는 기쁜 소식을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수평적으로 남들이 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이 생활, 주여, 이 생활 속에서 죽음이 뭔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죽음 속에서 주께 진지하게 부르짖을 때 걱정하지 말라는 주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