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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애가 2:18-22 / 눈물을 강처럼 / 120606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애가

예레미야 애가 2:18-22 / 눈물을 강처럼 / 120606

정인순 2012. 6. 6. 20:54

 

 

눈물을 강처럼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2년 6월 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2:18-22

(애 2:18, 개역)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애 2:19, 개역)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애 2:20, 개역)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륙을 당하오리이까』

(애 2:21, 개역) 『노유는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살륙하셨나이다』

(애 2:22, 개역) 『주께서 내 두려운 일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에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었나이다 내 손에 받들어 기르는 자를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당시 갈대인이 행한 실상은 역대하 36:17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여인들은 전쟁으로 인한 굶주림 때문에 자기가 사랑스럽게 기르던 아들을 먹게 되었으며, 성전에는 살육당한 선지자들의 시신이 널려 있고, 도로에는 매장되지 않은 채 버려진 시체들이 즐비합니다.

시신, 그것은 인간의 각자 모든 과거는 하나의 관점에서 볼 때에 동일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 동일함은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와 관련 있습니다. 당시에는 축제일이 가까울 때면 나팔을 불어 모든 사람들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아들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방에서 두려움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사람을 집결시키고서는 한꺼번에 몰살시키는 방식을 사용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죄 값을 받게 하시는 겁니다. 예레미야 14:16-18에 보면,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인하여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입을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 아내와 그 아들과 그 딸도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끊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창상을 인하여 망함이라 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내가 성에 들어간즉 기근으로 병든 자며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다 땅에 두루 다니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도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해야 될 일은 우는 일입니다. 심판을 하나님이 하시지만 막상 그 심판이 지상에 등장하면서 대표해서 우는 자의 등장과 짝이 되면서 구원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레미야가 죽은 자들 속에서 같이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남은 자’로서 존재해야 하는 의의는, 지상에서 성도가 만나게 되는 구원이라는 것이 ‘회개의 눈물’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란 나름대로 완전을 기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뭐든지 하자없이, 오류를 줄이며, 나름대로 완벽에 완벽을 기하면서 그것 자체가 감상하면서 즐기고 기뻐하려 합니다. 즉 울 일을 줄이는 것이 나름대로 인생성공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자세로서는 하나님의 뜻마저도 자기 선에서 완전에 완전을 기하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어미들이 자기가 낳은 갓난 아이를 식량으로 먹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걸핏하면 백성들 앞에서 온갖 거룩하고 경건스럽고 거룩한 말만을 골라하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들 차원에서 완전과 거룩이 하나님 앞에서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들이 자기 구원을 위해 조치해야 될 일은 전혀 없다는 말이요 달리 말해서 눈물로서 회개만 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육적으로 지은 죄가 아무리 비정하고 냉혹하라고 하지만 예루살렘에 들이닥쳐서 사정없이 칼질하는 바벨론 군대의 차가운 살육 앞에서는 늘 징벌의 연결점이 부합되지 않습니다.

육으로 지은 자가 아무리 지독스럽게 할지라도 영적 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가 육으로 지은 죄가 아무리 많다해도 영적으로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영적 죄는 육적인 죄로 온전히 해명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죄없는 갓난 아이와 머리 허연 노인네들조차 차별없이 적군의 칼날에 비정하게 죽어야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조치 앞에서는 인간들의 보편적이고 인륜적인 가치가 인정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벌하면서 마치 축제 때에서 한 곳으로 집결시키듯이 시행하셨다는 말은 인간마다 사적인 자기만의 역사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복들을 쥐고 나름대로 소박한 자기만의 세계를 꾸려나가는 그 모든 인간들의 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이라는 중심을 가지고 그 중심으로 모아놓고 다 저주의 징벌을 내리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저주를 퍼부으시는 기준이 되는 영적 범죄라는 것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의’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과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합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 사람들이 신약에 보면 나오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바리새인과 대비되면서 그들 앞에서 막아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구원을 받겠다고 나오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회개 뿐이다”는 겁니다. 이 회개의 촉구를 위해 세례요한은 매우 과격하게 보이는 발언을 서슴치 않습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는 겁니다. 만약에 회개치 아니하면 불에 태워지는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이와같은 과격한 발언은 이미 인간들은 자신들의 본성상 ‘흩어지는 역사관’을 각자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역사는 중심을 갖고 있으면 그 중심은 남녀노소 그 어느 차이에도 없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의를 장만하기 위해 따로 자기만의 소박한 세계를 다듬게 됩니다.

따라서 중심에서 볼 때는 그 ‘자기만의 세계’를 폭파하기 위해서는 과격한 발언이 주입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누가복음 6:24-25에 보면,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웃는 것은 자기 것이 잘되었다고 여기는 경우요, 사람들이 우는 것은 자기 것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자기 것을 사수하고 키우기 위해서 웃고 우는 것은 제대로 하나님의 저주의 맛을 보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울게 합니다.

이 울음을 통해서 보여주는 의미는, 인간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따로 구성할 것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오히려 늘 부셔져야 하는 겁니다. 소위 ‘나만의 세계’라는 것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의로만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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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오용익

5강-애가2장18-22(눈물을 강처럼)12060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2장 18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45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애가 2:18-22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찌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수게 하지 말찌어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찌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찌어다 하였도다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육을 당하오리이까 노유는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살육하셨나이다 주께서 내 두려운 일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에 무리를 부름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었나이다 내 손에 받들어 기르는 자를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지시하기를 ‘울어라’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것도 ‘쉬지 말고 울어라.’ 대책이 없다, 그런 이야기죠. 심판과 멸망을 실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이고 우는 것은 예레미야고. 마치 옛날 유월절에 각 가정마다 맏아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천사가 하는 일이고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은 구원받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고, 뭔가 퍽이나 대조가 되고 뭔가 안 맞는 것 같은데, 이 지상에서 서로 화합이 되지 않고 연결이 안 되면서 대립이 되는 두 행위가 한쪽은 하늘, 한쪽은 땅, 이것이 만남이 성사된다는 것이 아주 기이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행하시면서 또 우는 것은 이 지상의 예레미야가 울고 있고.

 

그래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족치시고 이 땅에서 우리 대신 울어주는 분 때문에 구원받는 자가 생산되고, 이러한 만남은 우리가 일상에서 돈벌이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고 귀에 담아 들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고 몰라도 될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별 소용도 없는 이야기처럼 그렇게 들려집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어떤 완전함을 추구해서 하나님에게 복 받은 티를 내려고 애를 쓰는데 여기에 인간들이 추구하는 어떤 완전한 것, 완전한 교회, 완전한 신학, 완전한 기도, 완전한 헌금, 완전한 전도, 내가 완전한 것, 이것을 원하는데 예레미야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그런 것은 다 접어버리고 그냥 울어라, 회개의 눈물을 흘리라는 겁니다.

 

회개의 눈물이라는 것은 우리 손으로 뭔가 멋들어진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솜씨 어때요? 이렇게 모였는데 어떻습니까? 하나님, 좋지요?’ 이런 식으로 재롱을 부린다든지 하나님 앞에 멋들어진 작품을 만들어서 안기는 것,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구원을 우리가 알아서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에 참여만 되는데 그 참여방식이 뭐냐, 회개입니다. 울면서 그냥 회개하는 것이지요. 잘못했다고 우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울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평상시의 삶을 이용하신 겁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살아간다는 것이 자기의 육을 위하여, 생존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까? 자기의 밥벌이를 위해서 살고 분주하게 자기 생활의 터전을 위해서, 것을 확장시키고 또는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도 신경 쓰고 스트레스 써가면서 하루하루 분주하게 세상에 나가서 삽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이 울게 하기 위해서, 울음을 유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우리를 거기에 집어넣은 겁니다. 쉽게 말해서 ‘네가 이 세상에서 육적인 범죄를 저질러도 그 육적인 범죄는 주님보시기에 영적인 범죄에 비하면 그것은 문제꺼리도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가 구원받은 것, 여러분이 아시지요? 육적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어떤 범죄자가 술 먹고 욱, 하는 성질에 범죄 해서 경찰에 체포되어서 현장검증 할 때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족이 난리를 치고 ‘저건 재판도 필요 없어. 당장 때려죽여야 해.’ 하고 ‘내 자식을 돌려줘.’ 하고 고함치고…… 축구동우회에서 얻어맞다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애들 부모심정이 어떻겠어요, 보통 애 하나 키우는데 2억 5천만 원 든다는데 그동안 한 1억쯤 들어갔을 텐데 그런 아들이 축구동우회에서 애들에게 얻어맞으면서 고민하다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면 이것은 부모로서는 보통일이 아니잖아요.

 

얼마나 가해자가 괘씸하고 원한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무지무지한 그 무서운 범죄도 주님께 행한 영적 범죄에 비하면 그것은 범죄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때리시는 무서운 모든 심판은 육적 죄 때문이 아니라 영적 죄 때문에 하늘에서 쏟아지는 징벌이고 저주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대아인, 바벨론 군사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에 먹을 것이 없어서……, 옛날 전쟁은 성을 중심으로 하는 전쟁이기 때문에 성을 포위해 놓고 식수와 양식을 차단해서 항복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하게 됩니다.

 

물자가 전혀 유입되지 않도록 해서 성안에서 굶어죽든지 항복하든지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는데 그처럼 갈대아 군대가 성을 뺑 둘러 싸버리니까 먹을 것이 없는 거예요. 인간의 육은, 세포는 먹어야 사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자기 배로 낳은 어린 자녀를, 인육을 먹는 겁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좋은 말씀, 거룩해 보이고 경건스러워 보이고 천하가 다 멸망해도 진짜 천국 갈만큼 훌륭한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주의 성소에서 살육을 당하고. 특히 21절에 보면 “노유” 여기서 ‘노(老)’는 노인들, ‘유(幼)’는 유아들, 어른이나 애나, 할아버지나 갓난애나 다 길바닥에 엎드러지니 시신이 즐비하게 길바닥에 널려 있어요. 시체가 널려 있는데 치울 사람도 없어요.

 

바벨론 군사들이 봐주는 것도 없었던 모양이지요. 그 다음에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이 새파란 젊은이들, 결혼도 안한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다는 말이지요.그렇게 죽었는데 이 날이 뭐냐, “주께서 진노하신 날”이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살륙하”신 날이라는 말입니다. 죽는 사람이야 편하지요. 죽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살아 있는 예레미야는 지금 울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그 갈대아 군대, 바벨론 군사들이 얼마나 비정하고 차가운 인성을 갖고 있었는지 할아버지고 애고 가리지 않고 다 죽여 버렸어요. 물론 배후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했지만.

 

‘너는 네 애비도 어미도 없나?’ 이렇게 달려들 수 있잖아요. 그러면 갈대아 군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애비고 어미고 없거든’ 해서 죽였다는 말이지요. 보편적인 인륜, 천륜이라고 하지요, 이런 인륜적 선이나 가치마저 하나님이 시행하시는 영적 범죄에 대해서는 묵사발 됩니다. 전혀 인정받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 대 인간사회에서는 아무리 사람이 원수지고 분노에 젖었다 할지라도 기본적인 양심이라는 것이 있고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부모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공경심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노인에 대해서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또 누가 봐도 죄 없어 보이는 그 갓난아이를 죄가 있다고 마구잡이로 치는 악독한 심성을 가진 군사들은 별로 없어요. 사이코패스 같은 정신병자 아니면 그런 경우가 잘 없거든요.

 

그런데 이런 정도마저 용납이 안 되고 가차 없이 살육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이야기해 주느냐하면 ‘너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윤리적인 도덕적인 기준에 의해서 너희들을 징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대하 36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갈대아 왕이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남녀와 노인과 백발 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머리가 허옇게 된, 굳이 안 죽여도 훅 불면 엎어져 죽을 노인들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다 죽여 버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지옥 보내는 것이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기준에 의해서 보내는 것이 아니듯이, 그리고 유다나라를 저주하고 심판할 때 천륜이나 인륜 같은 기준과 전혀 관계없는 다른 기준을 들이대서 다른 방식으로 저주한다는 것은 곧 다른 말로 하나님의 천국 간다는 것은 인간이 예상 못할 다른 기준에 의해서 천국 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천국을 간다는 것이 우리가 착하고 선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많이 들어서 아는데 막상 그렇게 이야기해도 ‘그래도 천국은, 그래도 천국 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착할 것이 아닌가?’라는 이러한 생각을 우리 마음속에서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가 문제냐, 착한 사람이 천국 가는 그것이 뭐가 문제냐, 이렇게 하겠지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더 착한 사람이 천국가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오류에 빠지는가 하면, ‘적어도 지옥 가는 사람은 아무래도 악해서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이 무서운, 계속해서 저주받을 기준을 자기가 쥐고 있는 것이 되는 거예요. 이것을 분명히 해줘야 됩니다. 제가 하루는 5시 30분에 눈이 떠져서 운동 삼아 동네 한 바퀴를 빨리 걷고 있는데 그 때가 한 6시쯤 되었을 거예요. 60대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 할머니인지 아주머니인지 애매한데 그 세분이 ……, 거기 아파트는 딱 두 동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아파트에 대고 ‘210호! 아직 자나!’ 하고 셋이 고함을 치는 거예요.

 

아, 저분들이 대체 생각이 있는 분들인지, 이 동네 다 못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주로 밤늦게까지 일하고 아침 여섯 시 같으면 한참 잘 시간이거든요. 사실은 자기 친구 집에 직접 가서 초인종 눌러도 그것도 그 시간에는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아예 아파트 앞마당에 가서 셋이서 ‘210호! 아직도 자나!’ 하고 고함을 지르니 온 아파트 주민들 잠 다 깨는 거예요. 그래서 ‘저게 분명히 특이한 사건인데 저기서 무슨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뭔가는 내가 신앙적 이득을 봐야 되니까, 가만 생각해보니 ‘아, 그거구나!’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 도덕하고 상관없이, 210호! 빨리 안 나오나! 하는 식으로 그냥 일방적으로 건져내는 거예요.

 

그것을 구원에만 적용시키면 우리가 이해도 안하고 있으면서 이해했다고 우길 수가 있는데 이것을 구원받는데 적용시키지 말고 저주받는데 적용시키자 그 말입니다. 저주받는데 적용시키려면 주께서 저주받는 그 현장에 우리가 가야 되거든요. 가려면 성경에 보면 있지요. 예레미야같은 경우에 있지요. 그 갓난아이가 무슨 죄가 있고 훅 불면 엎어져서 곧 죽을 80되고 90된 그 할아버지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런데 아주 냉혹하고 차가운 심성으로 하나님께서 바벨론 군사를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내리신 아주 차가운 그 저주의 기준, 이 기준에서 ‘아, 진짜 해도 해도 너무 심하다. 그래도 전에 하나님 믿던 백성인데, 개미하나 안 죽이던 사람을, 여호와 잘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적군으로 포위되게 해서 자기가 예뻐서 돌잔치까지 해줬던 그 아이를 자기 손으로 뜯어먹게 하는지.’ 인간으로서는 차마 이를 수 없는 그 지경과 그 속에 있는 모양새를 다 드러내는 그런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때 도무지 하나님의 뜻은 뭐냐, 그 말입니다.

 

천국 간다고 할 때는 하나님 참 좋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럴 줄 알았는데 막상 이 지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울지 않을 수 없는, 울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날 때 천국 간다는 그 기쁨마저 다 의도적으로 달아난다는 느낌을 주께서 만들어주시는 것 같아요. 자, 그러면 그 이유를 우리가 찾아봐야 되겠지요. 그 방식이 예레미야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예레미야애가 2장 22절에 보면 그 힌트가 나와 있어요. “주께서 내 두려운 일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에 무리를 부름같이 하셨나이다.” 여기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어린아이와 노인들, 그리고 청년들, 결혼 안한 처녀들을 불러 모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불러 모으냐 하면, 절기 때, 축제 때, ‘야, 어느 동네에 가수가 온다더라.’ 또는 축제하는 날, ‘야, 대통령이 우리 고향에 온단다. 구경 가자.’ 이렇게 축제와 절기, 집단적ㅇ니 파티를 할 때 사람들이 즐거이 그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 한마음 되기 위해서 온 주민을 한데 모으는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모아놓고 조져버리는 겁니다.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안 나오면 못 견디게 만들어서 의도적으로 절기 때 성전으로 불러내서 그 성전과 더불어서 그 성전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일생에 지울 수 없는 정신적인 충격과 육체의 살육을 당하게 하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이 말은 어렵게 말해서 역사, 그 중심으로 모으는 역사를 주께서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중심으로 모아지는 역사, 흩어지는 역사가 아니고. 흩어지는 역사란 이런 것이지요. ‘너는 네 역사가 있고 나는 내 역사가 있어.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데 너는 네 일기장이 있고 나는 내 일기장이 있어.’ 이것은 전부 다 흩어진 역사에요. 그런데 모아진 역사가 흩어진 역사로 자기 나름대로의 사는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을 축제 때 사람들이 끌려서 나오는 것처럼 자기 사적인 역사를 모조리 그 자리에서 다 던져두고 하나의 장소로 집결시켜서, 하나의 역사로 집결시켜서 ‘집결했나?’ 와장창 조져버리는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강제로 납치하는 방법이 아니고 유인하는 방식을 동원해서 그들에게 철저한 심판과 치욕적인 저주를 감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 방식이 신약성경에서 어떻게 드러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좀 짐작하실 거예요.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온 민중들이 십자가에 관심을 끌기 이전부터 열두 제자로 하여금 먼저 관심사를 예수님의 자기 죽음에 집중하도록 해놓고 그 예수님 죽으실 때 그들은 뿔뿔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흩어져서 사적인 어떤 역사, 자기만의 멋있는 인생, 그런 것들 안에 있으면 무엇을 놓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제가 영적으로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라는 점을 놓쳐버려요.

 

그런 점을 놓쳐버리고 대신 무엇으로 대치하느냐하면, ‘하나님, 제 자리에서 윤리적, 도덕적으로 뭔가 아주 심하게 나쁜 짓은 안했지요. 이정도 하면 그래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주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낼만한 저질스런 죄는 안 지었잖아요.’라는 자기만의 소박한 자기의 역사를 긍정해가면서 자기 스스로 자기인생관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영적인 죄를 지었습니까?’가 표가 나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면 소박하게 자기만의 그 꿈꾸는 자기만의 인생 속에 잠겨서 자기 인생으로 즐거워하는 것에 대해서 그 하나의 초점, 십자가의 초점으로 끄집어내려면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 선지자의 말씀은 아주 심한, 뭔가 자가당착적인, 모순적인, 또는 너무 과하다 싶은 심한 말씀들이 송곳처럼 우리에게 날라 오게 되어 있어요.

 

그 한 가지 예를 들게 되면 누가복음 6장 21절에 보게 되면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이라.’ 그리고 24절에 보면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이 말씀들은 우리보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이 들이닥친다는 거예요. 어떤 상황이 와서 어떻게 들이닥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상황이 만들어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상황이 쳐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나만의 세계, 나만의 소박한, ‘한평생 나는 이렇게 예쁘게 살았습니다. 타는 이렇게 참하게 살았습니다.’라고 자기 인생 다듬으면서 그 안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완벽과 착하게 살기, 바르게살기, 훌륭하게 살기, 남에게 해코지 않으면서 살기, 남을 배려하기, 남에게 친절하기, 남에게 사랑하기, 남에게 선한 성령의 삶을 살기, 자기 나름대로 꾸려놓은 그 모든 것을 가혹하게 들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쳐들어오게 되면 전부다 무산되고 붕괴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울어라, 이 말이죠. 그리고 회개하라, 그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왔을 때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자기가 선하고 착하다고 본 겁니다. 그럴 때 세례요한이 아주 과격한 말로 대꾸했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 그 열매가 없으면 전부다 너희는 불에 타버린다는 아주 심한 말을 한 겁니다. 그게 그냥 심한 말일까요, 현실일까요? 현실입니다. 정리해봅시다. 그런 식으로 자기 것이 다 깨어진다면 주님의 저주 앞에서 살아남을 자는 누가 있느냐, 그러면 구원받을 자가 없지 아니하냐, 그렇게 대꾸가 나올 거예요.

 

왜 그런 대꾸가 나오느냐 하면, 사람들이 말씀을 보고 나름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자기 구원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거룩하게 살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을 다 했는데 기껏 해봐야 그것이 자기만의 세계거든요. 자기가 꾸려놓은 자기만의 소꿉놀이라는 말이지요. 자기 아지트고, 그 안에서는 자기가 영광 받고. 그런데 그렇지 않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구냐 이 말이지요. 그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남아 있어야 돼요. 멸망당하지 않고 남아 있어야 됩니다.

 

왜 남아 있어야 되느냐, 회개의 눈물이 어떤 근거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느냐를 대표로 보여주기 위해서 예레미야는 남아 있어야 되는 겁니다. 죽지 않고 울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가 우리를 망하게 한다는 사실, 자기 의가 우리자신을 망하게 해요. 인간의 자기 의는 바로 모아지는 역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흩어지는 역사에서만 자기의가 나온 거예요. 어떤 미친 사람이 트럭에다 싣고 5만 원 권 지폐를 죽 뿌려버리면 어떤 사람은 그 지폐를 주워서 ‘아저씨 그 트럭에 있던 돈이 바람에 날립니다.’ 하고 가져다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모아지는 역사겠지만 ‘웬 횡재냐?’ 해서 자기가 열심히 나름대로 주워 모은 그것을 저금한다면 그 사람은 그 트럭 입장에서 보면 흩어지는 역사속의 일부를 자기가 다듬고 만들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영광이고 자기의고 자기 믿음이고 자기소망이고 자기사랑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천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은 예수님의 믿음이고 예수님의 사랑이고 예수님의 소망이거든요. 이것은 하나로 모아져야 되는데 이것은 주께서 주신 것을 뚝 떼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해서 주님 주신 것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따로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맨 날 그런 사람은 묻지요. 구원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구원의 기술은? 구원의 기술이 없어요. 구원의 기술이 없다는 말은 그냥 닥쳐온 그 피 흘린 하나님의 저주를 보면서 회개하면 되는 겁니다.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미국의 유명한 나이아가라 폭포에 뛰어든 사람이 있었어요. 지금까지 그 엄청난 폭포에 뛰어내려서 살아남은 사람이 세 사람이 있답니다. 최근에 구조된 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나이아가라 폭포에 뛰어들었습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는 물길이 부드러운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뛰어들어 보니까 물길이 무척 사납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 하나는 단지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온 사람이 아니라 물속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직접 맛보았다는 점이 그 사람으로서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경험한 유일한 체험이 되겠지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사랑스러운 분이다, 자비로운 분이다.’ 굉장히 좋은 말들을 하시는데, 마치 어릴 적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양말 속에 선물 넣어주는 이미지, 그런 뉘앙스를 가지고 계속 하나님을 염두에 두어서 그렇습니다. ‘복 주실 거예요, 안주실 거예요? 착하면 복 주실 것이고 나쁜 짓 하면 복 빼앗아 갈 것이고 …….’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의를 굳히고 있으니 이런 사람은 애쓰고 노력하고 착하게 사는 것뿐이지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는 것은 없어요. 아마 가끔은 울 거예요. 우는 이유는 데모하기 위해서, 내꺼 왜 빼앗아 가느냐고 짜증내면서 우는 것이지 진짜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라는 인간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더러운 존재인 것을 알면서 ‘주여, 그동안 나를 위해서만 산 것을 저주합니다.’ 하고 우는 회개, 그것은 예레미야처럼 구원받기 위해서 남은 자 외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런 회개를 못합니다,

 

‘주여, 나의 의가 이처럼 지독하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군요. 나의 의를 저주합니다.’ 라는 식으로 회개하고 울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자기 의, 나의 의, 관심사를 나의 의에 두고 살아온 이 모든 것, 내가 그동안 만들어낸 나의 의로 말미암아 내가 앞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나 중심의, 내 행복 중심의 그 사고방식,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흩어지는 역사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걸 하나님께서 모아놓고, 십자가 앞에 모읍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실은 너의 저주니라.’ 하는 사실을 일깨워주실 때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울고 알면서 기뻐하고 주님만 찬양하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지독하게 떨어지지 않는 고치지 못하는, 치유할 수 없는 병 같은 것, 고질병 같은 ‘자기의 추구’라는 병입니다. 무슨 수로 이 자기 의를 고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우리는 십자가 바라볼 때마다 울면서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이런 고질병도 이런 병자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