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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아모스 5:1-6 / 나를 찾으라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5:1-6 / 나를 찾으라

정인순 2012. 1. 15. 15:40

 

 

나를 찾으라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2년 1월 15일                         

 

본문 말씀: 아모스 5:1-6

(암 5:1, 개역)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암 5:2, 개역)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암 5:3, 개역)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암 5:4, 개역)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 5:5, 개역)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암 5:6, 개역)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이스라엘이라는 표현 자체가 주변에 말씀이 휘감아져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민주주의 근대 국가를 살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납득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는 상황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현실은 사람이 우선이지 하나님의 계시가 우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오로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대자연도 예외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과학이란 이처럼 기본 정신이 ‘오로지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이 과학 정신 바탕 위에서 사람들은 인간을 위해서만이 ‘진리’라고 우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봉사할 때만 결과로서 진리가 드러난다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이런 영향과 이런 분위기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들도 같은 인간이고 같은 몸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고방식이 하나님 말씀에 위배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이 없는 곳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고 지칭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백성을 창출하십니다. 그리고 그 백성 만들기에는 인간들의 성질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동원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자들까지 하나님께서는 백성이라고 간주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 위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처녀 이스라엘’이라는 표현 자체도 하나님의 말씀 작전에 의해서 산출되게 됩니다. ‘처녀’라는 것은 ‘순수성’을 말합니다. 즉 “순수한 이스라엘아 너는 순수함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 순수함을 회복하는 인간들의 방식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의 방식은 바로 길갈로 가고 벧엘로 가고 브엘세바로 올라가는 방식입니다. 즉 내부적으로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휘감기지 않는 상태에서 오로지 자신들의 몸의 이익을 위해서 새삼스럽게 자기 쪽에서 영험한 신의 사건이 발생했던 지역을 신성시하여 자기 몸으로 합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찾는 방식에서 탈락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들은 신에게 고분고분하고 이웃들과 서로 양보하며 사는 것 같지만 인간의 내부는 그런 ‘수동성’으로 진행되지를 않습니다. 도리어 ‘악한 능동성’이 설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세상에서도 권위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자기 몸의 유리와 불리에 따라서 권위에 고분고분하다가고 권위에 반발합니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봐서도 그러합니다. 옛날 학생을 두고 있는 각 가정의 어른들의 의식은 학교에 대해서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모와 학교 선생님을 동격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식을 낮에는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학교 선생님에게 자식을 맡기고 있다는 의식으로 인하여 선생님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는 어떠합니까? 가정에서는 부모가 권위가 있었습니다. 자식들이 많다보니 자식 하나하나는 부모에 대들기 위해서는 일단 같은 동료라 할 수 있는 형제간 지간에 있어 승자가 되어야 하는 경쟁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자식이 하나 내지는 둘입니다. 자식이 귀하다보니 어릴 적부터 부모는 자식에게 지고 들어갑니다. 쉽게 말해서 어린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도 수동적이지 않고 왕처럼 행세하도록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갑니다. 이런 아이들을 낮에는 기피하듯이 학교에 보냅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이라는 성인의 세계를 자기 집에 있는 어른인 ‘부모’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접근하게 됩니다. ‘악한 능동성’이지요. 이 능동성으로 인해 아이는 스스로 자기를 위한 계시를 자신이 만들어가면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즉 자기가 하는 일이기에 무조건 진리가 된다고 여깁니다.

바로 이런 속성이 반-계시적입니다. 그런데 ‘처녀 이스라엘’이 사는 땅은 그냥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의 특징은, 약속을 모르면 저주가 임하고 거기서 멸망당하고 소수는 추방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처녀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이 내포하는 있는 성격과 합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멸망 받을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의 취지를 놓치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방식으로 길갈과 벧엘과 브엘세바를 찾아다닙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면 슬픈 노래까지 지어서 그 백성들이 선지자를 통해서 듣게 하십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에 한 번도 정복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십니다. 그러나 망하게 될 날이 오는데 그 날에는 대다수가 살육되고 극소수만 남게 된다는 겁니다. 요즈음 신앙인이 극소수인 것을 염두에 두시면 실감납니다.

왜 멸망당했느냐고 따질 것이 아니라 도리어 몇 명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을 신기해야합니다. 이 극소수의 백성을 남겨 놓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남은 자란 항상 그 안에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의 새로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언약의 내용 때문에 그들은 남은 자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추방되면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는 인간들의 이익이 우선이 아니라 약속이 우선임을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는 그 어느 인간도 의인이라고 자처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자력으로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에 의해서 추방되고 다루어질 뿐입니다.

자기 딴에 평범하고 순박하게 산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입니다. “나는 평생 누구를 해코지 한 적이 없다. 누구로부터 욕얻을 먹을 이유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거될 때나 나올 이야기입니다. 즉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휘감겨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 못할 때나 나올 건방진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순수함이란 어디까지나 하나님 입장이 아니라 자기 입장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멸망받아야 마땅합니다. 이 멸망의 수순을 통해서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은 되살아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이 멸망받아야 될 자라는 의식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탕자로 여겨서 사태 파악을 말씀 입장에서 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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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11강-암5장1-6(나를 찾으라)1201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 5장1절에서6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1278 페이지입니다.

아모스5:1-6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이스라엘아’라고 명칭을 붙여놓고는 이스라엘아, 해놓고는 그 이스라엘이 그냥 세상 사람처럼 홀로 몸뚱아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휘휘감긴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 신약에 있는 성도들을 이스라엘이라고 치거든요. 오늘날 신약이 이스라엘아, 했으니까 구약의 이스라엘과 공통점이 있어야 돼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말씀의 수풀 속에서 말씀 속에서 보호받고 말씀으로 이끌림을 받는 모든 환경이 말씀의 환경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그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스라엘이라 해놓고는 너무 이스라엘답지 않은 말씀과 자기를 엮이고 연결시키는 그런 것들을 놓치고 있어요. 수요일고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현대인에게서의 민주주의 제도에 살다보니까 왕이라는 개념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에 왕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진짜 이스라엘이라면 우리에게도 누가 있어야 되느냐, 왕이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왕이라는 것은 뭐냐, 사람들이 대통령을 왕이라고 생각하는데 대통령은 선거해서 우리가 뽑는 거예요. 그리고 정치 못하고 자기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내려 서. 다른 사람 뽑을 거야,’ 그렇게들 주장들을 하는데 이건 대통령이고 하나의 직급이지, 그건 진정한 왕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왕이라 하는 것은 우리 것이 없고 전부 다 왕의 것으로 속해 있을 때 그걸 제대로 왕이라고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죽고 살고 하는 모든 것이 왕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분이 바로 왕 이예요.

 

그 왕 자리에 예수님이 오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 모신다는 것은 우리의 대통령을 모시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왕으로서 모시고 우리 것은 상실되고 날아가 버리고 철저하게 왕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왕이 얻은 것에 대해서만 우리가 살려지고 왕이 죽으라 하면 죽어야 될 그런 위치에 그런 관계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근대 민주주의 세계에 살면서도 우리는 어느 왕국에 속해있는 왕국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민주주의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게 민주주의인데, 우리 왕국에서는 오직 왕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될 이유가 있는 존재의 살아가야 될 의미와 존재의 의미가 오직 왕에게만 있어요.

 

왕에 의해서 살고 왕을 위하여 살고 왕 때문에 살고 왕이 죽는 자리에 같이 죽고 왕이 사는 자리에 같이 사는 그런 관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입니다. 이걸 현대적인 정치개념, 사회개념 갖고 이런 개념을 이야기하려하니까 정말 시대에 뒤떨어진 그런 이야기한 것 같아요.

 

이 왕 제도를 없애버리고 왕에다가 예수님을 대통령을 삼읍시다. 대통령을 삼아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제가 예수님을 대통령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쪽에서 먼저 나를 위해주신다면, 그러면 우리도 대통령을 위해서 충성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먼저 대통령이 백성을 위해 주시면 우리는 그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리라. 이건 흥정이고 거래죠. 그런 관점에서 해버리면 이건 구태여 하나님의 말씀을 동원시킬 이유가 없어요. 왜냐, 내가 중심이기 때문에 어떤 말씀이 오더라도 왕한테 이익이냐가 아니라 나한테 이익이냐를 따져보고 말씀을 보니까 이것은 성경말씀을 볼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해요. 성경말씀에 흥미를 못 느끼고 어떤 것으로 성경말씀을 채우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이런 복을 받았다.’ 그 내용으로 성경이 가득 차 있는 겁니다. 지가 왕이라. 지가 왕이 되고 말았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은 왕이 누구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건데 사람들은 이 성경말씀을 내가 이런 이득을 얻는 쪽으로 성경말씀을 보니까 왜 성경말씀을 구태여 봅니까? 그런 거 안 봐도 내 기억 속에 다 있는데요. 누가 내 동지고 누가 내 원수인지를 뻔히 다 아는데 뭘 새삼스럽게 성경말씀을 찾습니까? 그래서 자기가 신이 되고 왕이 된 이상은 점점 더 성경은 멀어집니다. 왕이 자기 처신하기도 바쁜데 언제 성경 봐서 하는 거 없이 성경을 보고 있느냐 말이죠. 내가 왕 다운 체신을 갖추기 위해서 지금 자기 돋보이기 위해 바쁜데 그렇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왕이 아니거든, 그런데 니는 내가 왕 됨을 반대했거든, 그러니 니는 당해야 돼.’ 요 내용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스라엘아, 니가 제대로 나를 왕으로 대접한 적이 있느냐.’ 이 말이죠. ‘니가 다른 옆의 나라하고 짝짜꿍해서 오히려 내가 왕 됨을 욕되게 하고 왕 됨을 싫어했을 뿐이지, 니가 언제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해 준 적이 있느냐, 차라리 니는 옆의 나라 백성으로 처신해라. 나는 너를 쫓아내겠다.’라는 내용의 이야기 예언이 아모스입니다.

 

이걸 볼 때에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아하! 우리가 성경의 현실을 잘못 읽고 있구나. 지금 내가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거기에 개의치 않고 왕이 왕답게 행실을 해버리는구나. 나는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끄덕도 없이 자기 왕 됨을 활동을 해버리면 결국은 우리는 뭐냐 하면 그 예수님 앞에서 심판받아야 될 죄인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아이고, 몰라 뵈서 죄송합니다.‘ 이 죄송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고 난 뒤에 무덤에서까지 다 호출 받아서 현재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심판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깁니다.

 

그러면 심판받게 될 때 말씀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가 말씀이기 때문에 ‘아이쿠, 목사님, 저는요, 누구한테 흠 잡힐 짓은 안했습니다.’ 그렇게 나온다는 거예요. ‘목사님은 죄인, 죄인 하지만 내가 아무리 누구한테 흠 잡히고 욕 얻어먹을 짓을 안 했습니다.’ 이래 이야기해요.

 

여건상 여행을 많이 못 다니는 여건이지만 TV에 보면 우리나라 전국 산산 곡곡, 숨어있는 골짜기 같은 거 테마 여행을 보여주잖아요. 그러면 나한테는 대리만족이 돼요. ‘아! 구례는 안 가봤지만 저 동네 구례구나. 아! 저건 무주구천동이고, 아! 저건 강원도 저쪽 동강 저쪽은 저렇게 사는구나.’ 그렇다면 제가 거기에 하나의 감정이입을 해버려요. 감정을 집어넣으면 내가 그 사람 돼 보세요. 그 사람은 절도 안 가고 교회도 없고 교회 가 본적도 없고 절에는 옛날 초등학교 때 가봤겠지만 교회는 가 본적이 없고 그런 식으로 골짜기에서 평생 감자 캐고 강냉이 키우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와서 제가 가서 ‘할머니, 죄인입니다.’ 하면 할머니가 뭐라 하겠습니까? ‘아이, 내가 평생 살면서 내가 누구한테 책잡히고 흠 잡히는 일 한 일 없어요. 내가 이 몸 이래 죽어도 하나님이 날 괄시 못해. 왜, 나는 누구한테 나쁜 생각, 나쁜 욕 한번 해본 적 없기 때문에, 집에 있는 강아지 보세요. 강아지 쫄쫄쫄 걷잖아. 내가 때 돼서 김치 국물 줘서 이렇게 잘 크는 걸, 강아지한테 물어보라고, 강아지한테 나쁜 주인인지, 강아지한테 이렇게 잘해주는데 사람한테는 내가 평생에 자식 다섯 낳아서 다 공부 시켜서 다 서울 유학 보내고 시집보낸다고 내 손 뼈마디 봐라, 훌쩍, 눈물이 난다, 정말. 이렇게 고생고생 하며 살았는데 나보고 죄인이고 전적으로 죄인이라 하고 죄인의 괴수라 하면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하는 거예요.

 

여러분, 충분히 이해되죠? 서문시장 난전에서 아침부터 나가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들 보세요. 엉덩이 이만하고 몸이 커다랗고 나이 육십 돼서 펑퍼짐하게 앉아서 장사하면서 그 찬바람 속에서 옷 세 개씩 입고 장사하는 걸 보면 대단하죠. 그래 물어보죠. ‘이 추운 날 장사하십니까?’ ‘아! 자식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라면 내가 뭔들 못할까.’ ‘자식을 위해서 뭔들 못할까‘가 왜 죄가 됩니까? 그게 짐승이 아니고 사람 같으면 당연히 해야 될 일이지만 못하는 사람이 나쁘지, 아, 자식을 위해서 찬바람 불어도 자식 공부하라고 대학 공납금 대려고 이렇게 하나라고 더 팔려고 레깅스를 중국에서 가져와서 파는 것, 이게 얼마나 갸륵하고 고귀한 모정의 세월입니까? 모정의 세월, 어머니의 마음입니까? 그걸 보고 착하다 나쁘다 하면 정말 하나님이 바빠요. 예수가 나빠요.

 

제가 강원도 할머니, 또는 서문시장 장사하시는 할머니를 예를 들었지만 따지고 보면 거기까지 멀리 갈 필요 없어요. 우리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이런 태도로 나서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특징은 말씀으로 칭칭 감긴다는 거예요. 말씀으로.

 

사람들은 동강에 있는 할머니나 산골의 할머니들은 뭐냐 내가 원하는 나일 때 나는 하자가 없는데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은 수두룩 빽빽 많아요.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그런 백성을 따로 만드는 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작업을 하면서 그들은 죄인이 돼 줘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구세주의 희생이 그들을 통해서 빛이 나고 영광을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말씀을 떼놓고 말씀의 옷을 벗어놓고 따져보면 우리 누구한테 책잡힐 이유도 없고 책잡힐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러나 말씀이 오게 되면 오늘 본문 5장 2절에 보면 이스라엘에 무슨 이스라엘이냐 하면 처녀 이스라엘, 처녀 이스라엘, 벌써 우리한테 부담 주죠. 처녀성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 훈아가 말하면 처자 이스라엘, 처녀 이스라엘, 결혼하지 않아서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스라엘, 이것이 말씀에서 내가 원했던 이스라엘이 처녀 이스라엘이었지, 과부 이스라엘이 아니었다. 이 남자 저 남자가 스쳐간 그런 이스라엘, 지저분한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거예요.

 

용어 자체가 말씀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처녀 이스라엘, 니가 과연 처녀답게 살았느냐.‘라고 따지면서 접근하면서 그러니까 니는 어떻게 하는가, 여기 2절 중간에 보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니가 살던 너에게 그동안 생계를 보장해줬던 땅에 대해서 니가 미처 니 땅도 파악을 못했다. 니가 처녀로 있을 때만 땅은 너에게 순수함에 보상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 그런데 니는 처녀이기를 싫어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혜택은,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은 축복대로 받아 챙기려고 했으니까 나는 더 이상 이 모순된 그 상황을 나는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간주하지 못하겠다. 내 백성이라고 간주하지 못하겠다 이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어떻게 처녀로 되돌아가죠? 그것은 바로 처녀 이스라엘 그때 있었던 땅의 생리와 땅의 속성, 그 속성을 되돌려주면 되겠죠.

 

이스라엘이 변하니까 땅도 변했어요. 땅이 화를 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다시 처녀 이스라엘을 생산하려면 하나님께서 어떤 아이디어로 하느냐 하면 땅이 화를 내지 않고 땅이 은혜를 주시고 사랑과 용서를 주시면 다시 처녀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가겠죠. 그것이 70년인데 70년 동안 일단 이 땅을 비워라 이 말이죠.

 

나이 서른이 다되도록 취직을 못하고 빙빙 방을 돌아다니면 그 엄마가 방 청소하면서 얼마나 짜증냅니까? ‘나 청소 좀 하게 방 비워라.’ 하면 ‘엄마, 내가 갈 데가 어디 있나?’ ‘친구도 없나?’ ‘친구도 없다.’ ‘하여튼 나가 있어. 방 좀 나가 있어. 침대 밑에도 치우게.’ 이렇게 청소를 하려면 걸 거치는 거예요. 걸 거친다는 말은 표준말로 거추장스럽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살리는 방법으로 그 약속의 땅에서 추방을 시킵니다. 추방을 해놓고 다시 출애굽, 추방을 시켜놓고 다시 거저 구원을 하는 방식으로 처녀 이스라엘 성을 그들에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방법이냐 하면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입장도 못 된다는 것을 파악하면서 하나님이 없는 세계가 얼마나 혹독한 세계인지를 맛보는 경험을 해야 되는데 그것이 우리의 한평생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내가 수고해야 겨우 밥 먹는, 그렇지 않으면 누가 돈 갖다 줄 사람이 없는 이 처절하고 냉혹한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하나님보다 세상 것을 좋아했는가를 지독스럽게 스스로 자기 것을 파악을 해야 될 그런 기회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좀 더 다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학교 학생들, 요새 학교에서 왕따 시키고 때리고 해서 자살하고 돈 뺏고 이런 일이 많잖아요. 그럴 때 늘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여튼 학교 보내는 것은 학교 건물 구경 가는 게 아니라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애가 나중에 훌륭한 성인이 될 때까지 책임지고 양육하라고 맡겨준 선생님이지, ‘니는 도대체 뭐하는 선생님이냐.‘ 이래 나와요. 선생님이 아닌 사람들은 다 이렇게 선생님에 대해서 이렇게 욕을 합니다. ’그런 애 하나 간수 못하고 내 애 하나 간수 못하면 선생님 사표 내라, 선생님도 아닌 게 선생 계속 하려는 게 선생님이야, 선생이 월급만 타면 돼, 지가 공무원이면 다야. 연금 타면 다야, 이렇게 나오겠죠.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 애들하고 지금 애들이 어떻게 다른가 보세요. 옛날 애들은 수동성이었습니다. 옛날 애들은 뭘 감을 잡느냐 하면 엄마가 해야 될 일의 연장선에서 선생님이 보합 보충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집에 있는 부모님은 부모님이고 학교에 가면 학교에 있는 부모님이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그 애들은 집에서 부모한테 양육 받고 훈육 받는 것이 이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인 것을 알아요. 그것을 세 자로 ‘수동성’이라고 하는데 수동성이라 하는 것은 지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어른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수동성 이예요. 그리고 옛날 어른들은 권위가 있었고 무게가 있었고 힘이 있어서 애들은 그 힘에 대해서 공손했습니다. 말도 함부로 아빠, 엄마 안 했습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 뜻을 펼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말을 해도 허락받고 말했어요. ‘어디 어른 앞에서 자식, 허락도 없이 말을 끼어들어. 가만히 있어. 내가 허락하거든 거기서 니 의견을 이야기해,’ 이게 옛날 법도 있고 양육 시스템이었어요. 너는 어린애, 어린애거든요. 어리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어린 백성, 어여삐 여기다. 어리다는 말은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니는 아직도 어른이 안 돼서 세상 물정을 모르니까 세상을 알 때까지 내가 권위적으로 양육을 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러한 것이 훈육 받아서 그 훈육을 아침저녁에는 부모한테 훈육 받고 낮에는 그걸 대신하는 어머니가 바로 학교 선생님 이예요.

 

그러니까 생각이 뭐냐 선생님 생각하고 학부모 생각이 같아요. 그리고 부모님이 선생님 생각하는 것이 자기하고 같은 레벨로 생각해서 ‘아휴, 내가 못하는 걸 낮에 선생님이 수고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같은 레벨로, 부사부일체죠. 선생님이나 부모님은 전부 다 같아요. 애를 때리든, 훈육하든 오히려 고맙죠. 왜, 내가 해야 될, 부보가 할 일을 대신해 주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런 수동성이 현재 지금 가정에서도 수동성이 깨져서 능동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엄마가 뭐 하노, 엄마가 스마트 폰 쓸 줄 알아?’ ‘얘야, 이거 좀 봐라 이거 어떻게 쓰나,’ ‘엄마, 이것도 모르나?’ 이건 엄마한테 배울 것도 없고 아빠한테 배울 것도 없어요. 전부다 인터넷으로 다 배워버립니다. 친구한테 다 배웁니다. 수동성이 아니고 능동성인데 그 능동성이 악한 반발하고 반항하는 악한 능동성으로 나간다 말이죠.

 

그렇다면 선생님은 뭡니까? 부모하고 선생님은 동급인데 이건 집에서도 지가 선택하고 지밖에 모르고, 애를 옛날에는 다섯 명, 여섯 명 낳기 때문에 부모가 권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형제간에 일이 있으면 부모한테 우선 치고 들어오려 하면 자기 같은 형제끼리 경쟁에서 승리자가 부모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 형, 오빠, 동생도 처리 못하면 감히 부모한테 못 대든다 말이죠. 부모는 뭐냐 형제들 싸움에 조정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엄마, 형이 때려.’ ‘동생이 어떻게..’ 하면 나설 때는 ‘어흠. 얘들아 이리 와라.’ 이게 뭔가 레벨이 부모 레벨과 형제 레벨이 구분되죠.

 

요새는 애들을 하나만 낳고 지밖에 모르고 그리고 젊은 애들은 귀찮다고 애를 낳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애를 둘만 낳아도 벌써 부담된다고 맞벌이 하고, 그러니까 물려받을 시간도 없어요. 악한 능동성을 이제는 학교에서 교육하라고 보낸 게 아니고 귀찮아서 보내요. 귀찮아서 보내고 방학 때면 부모가 골치가 아파요. 왜, 시간은 없는데 더 튀어나오니까 방학 때도 학교서 맡아줘요. 그러할 때 결국은 뭘 느끼느냐 하면 교사가 자기 집에서 일단 안 되니까 얘를 처음부터 하려하니까 만약에 제대로 하려면 누가 반발하느냐 하면 자기 부모가 교사한테 교무실에서 대들고 삿대질하고 행패 부려요. ‘그럼 좋다. 니가 못한 거 나도 방치한다.’ 이러니까 애는 기가 기고만장한 겁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말씀의 수동성에 있다가 갑자기 말씀이 없어지니까 ‘나는 나다.’로 자기가 절대자로 군림해 버립니다. 누가 아무도 갈지를 못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니 죄를 알렸다.’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지 죄가 뭔지 몰라요. 하지만 막상 여호와가 없는 그런 환경 속에 집어넣으니까 그때부터는 자기가 오직 자기만 생각하고 지가 적극적으로 반발하는 그 가운데서 자립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거기다가 말씀의 완성인 예수님을 갖다 대니까 메시야를 죽여 버리죠.

 

우리 이방인들이 오늘날 우리들이 세상에서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니 안에 갖고 있던 ‘니는 니밖에 모르고 누구한테 간섭받기 싫고 하여튼 나한테 유리한 것만 진리고 불리한 것은 물론 불리하다는 자기만 하나님처럼 군림하는 그것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 나타나라 이 말이죠. 예수님은 말씀으로 죽었는데 그 죽은 이유가 니가 워낙 말씀과 상관없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과 우리들 가운데 누가 처녀입니까? 누가 처녀예요? 누가 순수함을 갖고 있습니까? 동강에 있는 할머니? 서문 시장에 장사하는 사람? 지밖에 모르는데, 지 자식밖에 모르는데, 그래서 지 몸과 지 몸둥아리, 지 자식, 지 혈육밖에 모르는 그들로 하여금 이 죄악 된 세상에 방치해 놨다가 다시 예수님께서 십자가 가지고 다가옵니다. ’니가 안 되는 거 내가 했단다.‘라는 결과로서 통보해줘요. ’니 안 되지?‘ ’안 되죠.‘ ’니 말씀 지킨다 해도 니 이익만 챙기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니는 죄인이고 죄인의 괴수며 그걸 위해서 이미 처리반이 다 처리해 놨다. 이미 해 놓은 거야.‘ 니는 그저 순수하게, 순수하다는 말은 깨끗하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죄인인 것을 이제는 도저히 내가 부정 못하겠다. 순수하게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순수함 이예요. ’주께서 찾아와서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죄는 어찌할 수 없고 그대로 저주받아야 돼,’라는 그런 말씀 판 위에 순수함, 불 판 위에 고기처럼, 그저 지글지글 뜯기는 대로 뜯길 수밖에 없는 거기서 피할 수도 없는 그런 순수함, 그것이 바로 내가 오늘 본문에 ‘여호와를 찾아라‘ 이 말입니다.

 

여기 베델과 길갈, 브엘세바, 브엘세바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본거지거든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 받고 다른 이족과 계약 맺은 그 브엘세바, 사람들은 자꾸 옛날 과거 유적 갖고 끄덕끄덕 하면서 그걸 가지고 하나님 찾았다 하는데 그걸 찾는 게 아니고 탕자일 때 찾아지는 거예요. 탕자 일 때, 죄인 일 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인일 때 우리가 부름을 받는 겁니다. 지가 내세울 수 있는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내가 평생 책잡힐 일이 없는데.’ 이럴 때는 그건 부르심을 받은 행세가 아닙니다.

 

‘뭘 해도 나는 나밖에 몰라.’라는 고백, 그 고백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야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겁니다. 고칠 수 없는 질병, 어쩔 수 없는 상황, 버티면 버텨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서 이제는 심판 가운데 주님 십자가 가운데서 구원이 얼마나 이것이 축복인 것을 새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