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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아모스 4:1-5 / 이스라엘의 타락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4:1-5 / 이스라엘의 타락

정인순 2012. 1. 2. 07:26

 

음성  동영상

 

이스라엘의 타락

이근호
2012년 1월 1일                              

 

본문 말씀: 아모스 4:1-5

(암 4:1, 개역)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암 4:2, 개역)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암 4:3, 개역) 『너희가 성 무너진 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4:4, 개역)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 일 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암 4:5, 개역)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약을 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들 끼리 정해놓은 모든 기준과 구별과 차별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아무리 차별조항을 없애도 돌아서면 어느새 구별성과 차이성을 자아내게 됩니다. 오늘 본문 처음에 나오는 ‘바산의 암소’라는 표현은 실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욕하는 겁니다.

이 사치스러운 여인들은 차등없는 하나님 관점에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차등짓기를 좋아하고 원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자신들을 돋보이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남들 눈에는 신앙으로 하자 없이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현대인들은 경제적 주체로서 매일같이 돈 때문에 움직이는 자들이지만 옛날 이스라엘은 종교적 주체가 먼저였습니다. 종교적인 행위를 보이므로서 돈도 굴러들어오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조가 퍼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이 행사했다는 종교적인 태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될 수 밖에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십일조라든지, 수은제, 낙헌제 같은 것들이 무엇이 동원되었느냐 하며는 자신들의 가치를 정당화하고 변명하는 것으로 동원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차이와 차별의 것들을 모두 삭제하고 지워버리십니다. 신약에 와서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간들의 고유함이나 개성을 모두 삭제하고 지워버리는 능력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계급을 논하다든지 자기만의 개성을 우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왜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자기만의 종교적 행위에 의미를 줄 수 없는 것일까요? 히브리서 9:12-14에 보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 누구라도 이 ‘흠없는 피’ 앞에서는 할 말을 잊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는 더 이상 수은제나 낙헌제나 십일조 같은 것은 잊어도 좋지 않을까요?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제사하면서 가졌던 그 마음가짐으로 오늘날 십자가를 이용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를 ‘잘’ 믿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난 척‘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십자가 사건은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개성이나 고유성마저 삭제당하고 지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옛날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런 제사를 드렸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 이스라엘은 나름대로 신앙의 형식을 갖추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철저히 수행함으로서 하나님으로 오는 폭력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보고, 축복을 덤으로 받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3년 마다 낼 십일조를 삼일만에 낸다 할지라도 그것이 저주를 커버할 수 없다는 겁니다.

십일조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 인하여 수혜를 받는 사람들이 매년 드리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약속의 땅에서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그 이스라엘 내부에 자리잡은 제사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아니하면 추수를 제대로 수확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제대로 추수했을 경우에 그 소득의 10%를 제사지내는데 동원된 자들에게 제공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농사 짓기 싫은 사람이 자진해서 제사제도에 참여하고 싶어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제사 제도는 이스라엘의 13지파 가운데서 오직 레위지파에게만 허락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사 행위를 위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필요치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제사를 위해서 택함을 받은 자만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은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피를 이용해서 구원받겠다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십자가 피를 증거하기 위해 선택된 자들만 구원되는 원칙입니다.

이 십자가의 의의는 옛날 제사들을 통해서도 미리 주어졌습니다. 수은제란 화목제의 한 종류로 예기치 않는 축복이나 이미 받은 구원과 은총에 대해서 드리는 감사의 제사입니다. 누룩을 넣지 않는 제물만을 드려야 했습니다. (레 7:12-14) 그러므로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를 드렸다는 것은 이미 성결되지 못한 제물을 드렸다는 말이 됩니다. (레 22:20-25)

낙헌제란 화목제 혹은 평안의 한 종류입니다. 특히 이 낙헌제는 특별한 축복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레 22:18/ 신 12:6)

이러한 수은제나 낙헌제를 드리고 , 더구나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내놓아야 될 십일조를 3일만에 내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로마서 11:33-36에 그 내막이 나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하고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구의 어떤 학원에서는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수강료를 환불해주겠다는 광고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도 성사되지 못하고 그동안 하나님께 바친 돈을 환불받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하고 주고받는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가는 이 순환구조에서 인간이 따로 이탈하여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치 경우 포석정에서 파놓은 물길같이 술잔이 어쩔 수 없이 떠내려가야 하듯이, 성도의 신앙이란 이처럼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따로 갖출 수는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위하여 우리가 있는 것이지 결코 우리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물줄기를 따로 마련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