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암 3:9-15 / 이스라엘 수도 공격 11122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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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이스라엘 수도 공격 본문 말씀: 아모스 3:9-15
녹취:이한례 08강-암3장9-15(이스라엘 수도 공격)111225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 3장9절에서15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1277 이지입니다. 아모스3:9-15 “아스돗의 궁들과 애굽 땅 궁들에 광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거하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궁들이 파멸되며 큰 궁들이 결단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인간들이 희망하고 있는 소망의 모든 것을 무산시키고 박살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하나님은 제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뭘 듣고 싶어 하는지를 익히 아시고 그걸 피해가는 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과연 그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있는 믿음 가지고 나를 믿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들에게서 나온 믿음이라는 것은 너희 좋아라고 믿은 믿음이지, 하나님 좋아라고 믿는 믿음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상당히 이질적이죠. 질적으로 다른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갖고 있던 죄에서 발생된 믿음을 갖고 나오지 말고 너를 죄라고 지적해주는 그 능력이 너를 거쳐서 나오는 믿음으로 나에게 그 믿음을 보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결단 나도 마땅합니다.‘라는 것을 깨우치게 했던 그 능력에 섞여서 너희들은 나에게 나오라.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네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뜻대로 되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는 주기도문 하면서도, 저는 주기도문 하면 섬뜩섬뜩해요. 거기에 ‘뭐가 아니요.’가 나온다고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리라.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니요’로 이어져 버려요. ‘하늘의 뜻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것이 정상적인 성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늘의 뜻이 너에게 이루어진다. 실천에 옮겨라. 이러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목사님, 그러면 구원이 없습니까? 그 다음 나오는 질문이 ‘그렇다면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게 없습니까? 천국이 텅텅 비는 자리입니까? 천국은 예수님 혼자 남아있고 다른 사람 아무도 그 근처 얼씬도 하지 않는 텅 빈 공간입니까?’ 그렇게 질문을 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12절에 보면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돼 있습니다. 다수보다 소수를 건진다는데 왜 주님께서는 여기 비단 방석 몽땅, 침상 전체, 여기 침대 자체로 구원하면 될 텐데 왜 침상 모퉁이, 걸상에 앉은 비단 방석 끄트머리, 모퉁이, 끄트머리, 왜 그렇게 극히 소수 일부를 왜 자꾸 거론하시느냐 이 말이죠.
우리교회 교인들은 다 구원받는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우리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안심하겠습니까? 왜, 등록했기 때문에, 어떤 단체 등록하고 어떤 시스템에 들었다는 말은 그 시스템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 빠짐없이 배제되는 사람 없이 몽땅 구원받는다 하면 우리는 그 시스템 자체, 교회 자체를 얼마나 신봉하고 사랑하겠습니까? 그런데 교회 나온다고 등록한다고 다 구원받습니다. ‘아닙니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한다면 어쩌라고?
교회 등록한 걸로 안심 푹 놓고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었는데 교회 나온다고 구원받지 않는다면 어쩌라고? 여기서 제 2의 작업에 나서야 된다는 말인가. 그러면 교회 등록으로 구원 못 받는다면 그럼 어쩌라고? 뭘 추가적으로 뭘 해야 된다고? 요구받게 되니까 안절부절 이예요.
그만큼 우리들은 나 중심의 어떤 넓은 울타리를 쳐서 나 곁에 붙은 울타리가 나를 고스란히 편안하게 모셔가기를 바라는 심보가 우리가 평소에 우리한테 있었다 하는 것이 발각이 되죠. 특히 이스라엘이나 유다 같은 경우에는 어떤 교회라는 조직에 등록하고 시스템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고 이건 핏줄 자체가 아브라함 핏줄이라고 여기니까 세상에 이것은 출생했으면 모태신앙이고 모태신앙이면 천국신앙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얼마나 편리합니까? 대단히 기쁘잖아요. 조상 하나 잘 만나서 아브라함 조상 밑에 그 핏줄을 받아서 이거는 자동적으로 고상하고 거룩한 민족이 되고 말았으니 그 자만심과 우월감은 하늘을 찌르죠.
2차 대전 때 나찌 히틀러가 2차 대전을 일으킨 이유가 뭐냐 하면 독일 백성 가운데서 이질적인 핏줄을 가려내기 위해서 2차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유대인들을 가려내는 거죠. 기존 정권이 자본주의에서 미흡하니까 체제를 독점체제로 만들어서 자본주의도 발생시키면서 여기에 국민들의 표를 히틀러가 얻기 위해서 뭔가 희생양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 이 여러분 돈 다 가져갔습니다.’ 그 한마디에 독이 올랐으니 마치 촛불 집회와 똑같은 거예요. 안철수...선동해 보세요. 이 명박이 농민을 죽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 촛불 집회로 모이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 하면 내가 태어난 내 자리, 이 자리가 자동적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그런 멋진 자리가 없을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앉은 방석을 그 의자 침대를 그것을 부숴버립니다. 그 이유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오늘 본문 14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궁들이 파멸되며” 이래 돼 있죠?
거기에 보면 “벧엘의 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자, 오늘 본문 이야기를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스돗이라는 말은 요새 말로 팔레스타인, 블레셋 땅이죠. 그 다음에 애굽 땅의 궁들, 애굽 나라 사람들에게 알아라. 사마리아 산들에 일어나는 큰 통곡소리와 파멸의 소리를 들어보라, 이 사마리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것이 이스라엘을 둘로 나눠서 한쪽은 유대나라고 북쪽은 북쪽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 수도가 사마리아예요. 그 사마리아에 BC784년에 앗수르 대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한번 쳐들어오고 그 다음에 12년 후에 BC722년에 결정적으로 결정타를 날려 버리면 이스라엘은 다 파멸하고 맙니다.
문제는 그 이스라엘에 뭐냐 하면 유사 여호와 종교가 있었던 거예요. 유사 여호와 종교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나라를 지켜주신다는 그런 증거물을 가라(가짜)로 사이비로 하늘과 땅이 접촉되는 그러한 형식의 종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면 앗수르가 쳐들어 온 것은 그것은 그들이 쳐들어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있을 곳에 엉뚱한 하나님의 제단이 있으니까 그걸 부수기 위해서 이스라엘 자체적인 힘으로 부수지는 않아요. 사람이 자기를 부정하진 못하잖아요. 사람은 지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때리지 못하니까 강제로 ‘야, 니는 내가 준 자리가 아니고 니가 임의로 조작해서 만든 자리야, 그거 부숴, 못 부숴? 안 부숴? 내가 부숴줄게. 니 힘으로 안 돼? 그럼 내가 외부의 힘을 빌어서라고 내가 진짜 구원의 자리로 바꿔줄게.’해서 외부의 힘을 빌린 것이 앗수르입니다.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려요. 이건 사람이 안 때리면 정신을 못 차리는지 몰라요.ㅎ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고, 왜 때림이 없으면 사생아지, 남의 자식이지 내 자식이 아니라는 말이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나오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릴 때는 무엇 때문에 때린다는 이유를 설명해줘요. 그게 뭐냐 하면 ‘단‘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접촉을 해야 되는데 접촉할 수 없는 단을 만들어 놓고 그 장소에 사람들을 모이게 해놓고 하나님께 경배하게 했으니까 그 자리, 모이는 접선 자리가 잘못된 거예요. 구원이 안 되고 지옥 가는 자리에다 사람들을 모아서 천국 간다고 사기를 친 겁니다.
이게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 되겠죠. 물론 다른 교회가 되겠죠. ‘그래서 어떤 교회에 가면 좋습니까?‘ 할 때 우리들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것을 다 부숴버리는 교회가 좋은 교회예요. 사람들은 다수의 힘을 기대하고 원하고 좋아하고 있어요. 어느 누구도 자기가 소수가 되기를 싫어해요. 요번에 대구 수성구에 중학교 2학년 애가 따돌림 당해서 죽었잖아요. 너무 혹독하게 당해서. 우리 제수씨가 중학교 2학년 담당인데 이해합니다. 학교 가기가 싫다는 거예요. 중학교 2학년, 도대체 감당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중학교 2학년이 그 중학교 2학년 이예요. 이건 뭐 감당이 안 될 정도예요. 건방만 늘어가지고 말릴 수도 없어요. 애들이 만든 자리가 그 자리가 어른들한테 배운 자리인데 그게 힘을 모으는 자리고 내가 크게 되는 자리고 큰 자리에 자기 자리를 잡는 거예요.
제가 TV 잘 안 보는데 어제 우연히 또 크리스마스라 해서 연예대상 시상식을 얼른 보니까 안 보려고 했는데 보여서 봤어요.ㅎ 거기에 보니까 신보라라는 개그 코미디언이 이렇게 자기 시상에 멘트를 했어요.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 피, 피, 피뿐입니다.’했어요.ㅎ 그 전 세계 우리나라 중개방송 되는 자리에서.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 피 뿐입니다.’라고 운을 뗐어요. 여자 코미디언이. 제가 놀래버렸어요. 제가 상 받은 게 자랑하고 싶은데 내가 일기로는 성경에 보니까, 주님께서 지시하기를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마라’ 하니까 그게 딱 박혀가지고 아! 이때 조심해야 된다. 그래서 먼저 운을 떼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 외에는 자랑할 게 없습니다.’ 해놓고 그 다음에 ‘우리 부모님 감사합니다.’ 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걸 그분은 모르죠.
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접촉하는 자리는 우리가 만들은 내가 원하는 내가 필요로 하는 자리에 절대로 오질 않습니다. 우리는 죽이는 자리에 오시는 거예요. ‘너는 죽을 놈이야.’라고 나를 발각시키는 그 힘을 가지고 주님 앞에 우리는 나갈 수가 있어요. 그 힘이 없으면 우리는 주님 앞에 만날 수가 없습니다.
벧엘이 뭐냐, 창세기 28장에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신 그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집이예요. 하나님과 통하는 집입니다. 거기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요. 그 구멍은 우리가 드릴로 드르륵 뚫는 구멍이 아니고 ‘하나님, 어디 계시는 거야?’하고 우리 쪽에서 뚫는 게 아니고 주님 쪽에서 자기 아들을 하나 쏘옥 보내기 위해서 자기 아들 하나 들어올 구멍을 낸 거예요. 요단강에서 주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마가복음에는 하늘이 찢어지고(갈라지고), 하늘이 열리고 그 사이에 성령이 내려와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해서 예수님에게만 내려오는 그 자리, 그게 바로 인자가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약속된 하나님의 유일한 자리입니다.
구약이란 자리가 고정돼 있어요. 야, 이거 어려운데 이것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사무엘하 7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을 짓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들을 이동하고 움직이며 너희들을 데리고 다녔지만 지금부터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너희들을 고정된 자리에다 내가 내 이름을 두신다는 거예요. 고정된 자리가 뭐냐, 자리, 지리적인 장소고 공간적인 자리가 아니라 ’내가 다윗 가문을 내가 내 손으로 만들어서 다윗 가문을 내가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 이렇게 돼 있어요. 다윗 가문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윗 가문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가문? 다윗 가문이 아닌 쪽은 하나님의 접선 하는 장소가 아닌 것을 날려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옛날 어린애들이 놀던 우리나라 좋은 전통적인 유산 중에 어떤 놀이가 있느냐 하면 작대기를 모래 위에 세워놓고 모래를 살살 헐면서 작대기 넘어뜨리는 사람이 벌칙 받는 그 자리가 있죠.
주님께서는 그 하나하나 그 초점을 보이기 위해서 하나하나 제거하는 작업에 나섭니다. 우리의 구원 문제는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구원 받았다고 우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출처를 찾아가는 그 노정, 그 여정 가운데서 우리는 구원에 합류돼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이야기하는 사람만이 구원받은 사람 이예요. ‘나는 구원받았다. 나 알아줘, 나는 복음도 안다. 그거 다 안다, 가지 마라, 다 아는 이야기다.’ 이런 소리하게 되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 아니에요. ‘어디서 구원받았습니까? 뭐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십자가’ 그러면 십자가를 이야기하란 말이죠. 당신 이야기하지 말고.
사람들끼리 비교하는 것이 인간의 재미잖아요. 그런 재미나는 이야기하지 말고 그건 오락이고 ‘니 잘났나, 내 잘났나,’ 하는 건 오락이고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의 행동은 오락이 됩니다. 그냥 노닥거림 이예요. 정치고 그렇고 시골 의사도 노닥거리고 안철수도 노닥거리고 김정일도 노닥거리는 거예요. 김정일은 너무 놀다가 과로해서 죽은 거예요. 시찰 다니고 너무 놀다가.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노는 자에서 주님에게 혜택을 입은 자라는 주님의 증인되게 하기 위해서 매일 삶 속에서 우리는 노는 것 속에서도 이 노는 힘이 이 은혜가 어디서 왔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그러한 기회를 항상 성령을 통해서 열어주는데 거기에 우리가 강렬하게 저항하니까 우리는 항상 귀싸대기 맞아가면서 그쪽으로 가게 돼 있어요. 항상 얻어맞게 돼 있어요.
이사야 6장에 보면 그 하나님의 접선 지점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고 성령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고정된 자리가 북쪽 나라 날아가 버리고 남쪽 나라만 남았는데 남쪽 나라 가운데서 유다가 다 구원 받느냐, 아니라는 거죠. 그 점이 이사야 6장 13절에 나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나님께서 잘라내고 잘라버리고 십분의 일 그것도 많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그 지점으로 항상 우리의 초점을 그 지점으로 모으면서 평소에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도록 그렇게 자꾸 우리를 그곳으로 몰아넣어요. 몰아넣으면 그 몰아넣은 데 배제되는 것들은 정말 우리가 애써 노력해서 얻은 것들 이예요. 그것들이 자꾸 날아가 버리면 우리는 아까워서 ‘아이쿠, 그거 날아가면 안 되는데, 아이구,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거 놓치면 안 되는데.’ 계속해서 우리는 내가 내 성과 내 노력과 내 고상함의 결실들에서 그것들에 미련을 두고 있음을 가져갈 때 발각당합니다. 가져갈 때.
애가 중학교 2학년 친구가 하나를 괴롭혀서 못 견뎌서 자살해 죽었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심정은 죽은 애 부모 심정만 헤아리지 말고 그렇게 괴롭혔던 애의 엄마나 아빠 심정으로 헤아려 봅시다. 그게 만약에 내 자식이 남의 애를 그렇게 애먹였다면 우리 부모 심정은 어떻습니까? 간단하죠. ‘애들 크면서 그럴 수 있지, 뭐.’ㅎ ‘애들 크면서 그럴 수 있지, 애가 크면 늘 중학교 2학년도 아니고 늘 중학교 3학년도 아닌데, 죽은 애가 심기가 약하고 남들은 다 견디는데, 지만 못 견디고 다른 애들이 다 괴롭힌 게 아니고 그 애만 괴롭혔다는 것은 그 애가 만만하니까 그런 건데 왜 그리 니가 만만해, 지가 만만한 게 문제라. 다른 애들은 견디는데 지는 못 견디고 꼬박꼬박 돈 갖다 주고 용돈 갖다 주고 숙제 해주고 지가 병신이지, 내가 손 안 대도 다른 애가 손대서 죽을 애다.’ 라고 가해자 부모가 생각할 수가 있는 겁니다. 왜, 지 자식은 아직 잃어버리지 않았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께서는 자기 독생자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거 이해할 수 있는 인간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이해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자기 아들 잃어버린 아픔을 주고 그 대신 그들이 아파하는 것들, 뺏어버릴 때 ‘주여, 이거 귀한 건데 왜 뺏습니까?’라고 할 때 ‘니가 귀한 거 그것이 바로 결국은 니 중심의 잘못된 하나님의 접촉 자리를 니가 잘못되게 설정하고 있다. 내가 너를 진짜 살리고 구원할 수 있는 근거, 진짜 근거, 하나님과 접촉점을 주기 위해서 이것 주고 이것을 빼앗아요. 그러면 우리는 빼앗김을 통해서 ’나는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만끽하는 그런 행운을 얻게 되고 그것을 새삼스럽게 파악해서 행운을 얻게 되고, 아! 내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주신 것은 다 주님의 것으로 주셨다는 것을 짧은 시간이나마 그것을 다시 깨닫게 되죠.
제가 왜 이렇게 짧은 시간, 몇 초, 몇 초 이야기하는 이유가 그런 은혜를 받아도 그것이 잠시 뒤에 하나의 새로운 고형 화, 콘크리트 조각품처럼 굳어져서 그것을 근사한 나의 제 2의 자아로 우상처럼 섬기게 됩니다. ‘나 은혜 받았어. 너희들하고 달라. 나 얼마나 대단한 놈인데, 대단한 존재인지 모르지? 나 은혜 받았어.’ 그걸 신봉하게 되니까 주께서는 그것마저 뺏어가는, 결국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그 중심이 여러분 속에 있다면 여러분은 벧엘 속에 있는 사람이고 여러분은 거룩한 남은 백성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실은 우리 것이 없는데 우리는 내 것 있어야 남한테 기 안 죽고 산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는 재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사는 재미가 내 것으로 살지 말고 내 것은 없고 다 주님의 것이라는 그 재미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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