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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아모스 2:4-9 / 유다의 죄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2:4-9 / 유다의 죄

정인순 2011. 12. 11. 15:36

유다의 죄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1년 12월 11일                             

 

본문 말씀: 아모스 2:4-9

(암 2:4,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것에 미혹하였음이라』

(암 2:5, 개역)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암 2:6,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암 2:7, 개역)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암 2:8, 개역)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암 2:9, 개역) 『내가 아모리 사람을 저희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지 아니하였느냐』

유다나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와는 다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불러주심’에 의해서 나라가 된 나라입니다. 이 불러주심에서는 그 어떤 인간적인 차별도 허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는 인간들이 나름대로 구워되기 위해 자기 입장에서 기준을 만들어내는 모든 기준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애굽에서 나오면서 발휘된 무차별성은 어린양의 피로서 보여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를 구분하신 기준은 사람들의 몸이나 개성에서 나오는 차별화가 아니라 오로지 어린양의 피입니다. ‘구원받을 자, 그 사람의 몸의 솜씨’가 아니라 ‘다른 몸의 솜씨’입니다. 몸이 다릅니다.

몸이 다르기에 자기 몸을 내세울 수는 없는 겁니다. 이점이 다른 민족과는 다릅니다. 다른 민족들은 혈통 뿐입니다. 이 혈통 속에서 죽음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엄마의 죽을 고통 없이는 자식이 태어날 수 없는 겁니다. 이 죽음의 고통으로 인해 엄마는 자식을 제 2의 자기 인생이라보고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겁니다.

즉 자신의 것을 몽땅 자식에게로 다 이전시켜 놓은 기분인 것입니다. 비록 자식들은 이 사식을 알 리가 없습니다. 죽음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새로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혈통만 죽음이 개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는 몸에도 죽음이 들어있습니다.

구원받을 자의 몸을 희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해주시는 분의 희생이 살려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된 자들 끼리는 그 어떤 차별성과 우월성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공통적인 것을 쳐다보면서 살게 됩니다. 즉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되었습니다”는 소식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필요적이고 공통적인 요소가 유다와 이스라엘 나라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닏. 이방민족들이 파고 들어온 겁니다. 이방민족의 특징은 ‘힘 모음’과 관계있는 신입니다. 많이 가진 자가 축복받은 자가 된다는 원리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항상 처음 애굽에서 나올 때의 원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애굽에서 살 때, 모두들 종이었고 가난했었습니다. 게을려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난했고, 다들 가난하기에 서로의 것으로 서로를 향해 모독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가난이요 종이라는 일관된 처지 때문에 남을 깔볼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초기 출애굽 상황을 그 이후에도 유다와 이스라엘 나라에 지속적으로 삽입해 오고 있었는데 이는 무차별성적 구원을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방나라가 들어오고 난 뒤에, 유다와 이스라엘은 변질되었습니다. 다른 요소, 다른 원리가 난무하면서 교회 내에 차별화가 일어났습니다.

부자는 스스로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자부했고 가난한 자들은 그런 부러워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정작 차별없이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는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유린당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가난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자들의 존재는 강하고 부한 자들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그 가난으로 줄곧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자의 먹잇감이 되어 형편이 전보다 더 악화되게 마련입니다. 즉 돈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현 경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날이갈수록 더욱더 가난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부자들의 재산은 자신들이 얻을 만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노려서 빼앗기에 얻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런 횡포로 인하여 무차별적 구원원리가 유다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지배원리가 되지를 못했습니다. 당연히 언약적인 징벌과 저주가 주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차별적 구원과 어린 양에 의해서 조건없는 구원의 원리는 범죄한 가운데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유다는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컬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았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재판장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물을 받고 의인을 정죄하고, 빚을 갚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을 종으로 판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타락한 자들은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조차도 탐을 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자’란 아무런 도움도 옹호자도 없는 참혹한 환경에서 빈곤으로 허덕이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가난하게 된 자를 말합니다. 악해서 가난해야 하고 욕심으로 인해 가난해야 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 14:1, 72:12-13, 82:3-4, 113:7)

가난한 자의 겉 옷은 그들이 이불로도 사용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겉옷을 전당잡혔을 때, 그 옷은 밤이 오기 전에 그 사람에게 되돌려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출 22:25/ 신 24:12) 그리고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죄를 범한 자에게 중한 벌금을 부과하여 부당하게 받은 벌금으로 자신의 육욕에 탕진했다는 말이 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과 자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다른 식으로 원래 원리를 축복이 유지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의 등장은, 차별없이 불러주시는 구원이 이제는 역사와 공간을 넘어서서 천상까지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즉 땅에서 하늘까지 이어지려면 멸망, 혹은 죽음, 혹은 심판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야 합니다. 참으로 말해서는 매일같이 일어나야 합니다. 매일같이 죽고 매일같이 살아나야 합니다. 어린 양의 죽음이 실제로 우리에게 작용하게 되면 우리는 그 십자가 원리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차별없이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부러워하지 말고 우리의 자존심조차 챙기기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어주시옵소서. 십자가만 보이도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이한례

 06강-암2장4-8(유다의 죄)1112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 2장4절에서8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1276페이지입니다.

아모스2:4-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것에 미혹하였음이라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너가 이런 죄를 지었기에 내가 벌한다. 이런 죄를 지었기에 내가 보고 그만두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오늘날 현대인의 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을 나처럼 짙게 체험하기가 곤란하다는 거죠. 평소에 훈련된 것이 나 자신만을 위해서 훈련됐기 때문에 뭐든지 판단해도 내가 판단하고 벌을 내려도 내가 나한테 벌을 내리는 거죠.

 

옛날에 13세기 때 중세에 편파고행이라는 게 있습니다. 편파고행이라는 게 뭐냐 하면 채찍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기 몸을 자기가 자기를 때리는 식으로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겠다는 집단들이 있었어요. 대단하죠. 다빈치코드라는 그런 영화에 일부 나오는데 자기가 자기를 때리는 거예요. 왜냐 하면 죄는 육체에서 나오기 때문에 육체를 때려 버리면 ‘못된 나, 나는 못됐어.’라고 때려버리면 내 육체가 내가 때리는 그곳에 ‘다시는 나쁜 짓 안 할게, 다시는 나쁜 짓 안 할게.’ 이렇게 해서 죄를 적게 짓는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무어냐,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벌을 내리기 때문에 결국은 이 나라가 망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죄 있는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죄가 넘쳐나면 망한다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죄가 많으니까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듯이 결국 우리나라를 죄 때문에 망하게 하는 거죠. 안 망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의로운 열 사람이 자기 죄를 안 짓게 되면 의인 열 명이 포함돼 있는 국가와 나라기 때문에 열 명을 바라보고서 다른 데를 심판하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들의 공상입니다. 상당히 좋은 아이디어죠? 내가 보니 미쳤어요.ㅎ 보통 미친 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뭐가 문제냐 하면 벌 받아도 마땅하다는 생각을 추호도 본인은 안 갖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하나님, 니가 뭔데 내 일에 합니까? 하나님이 벌 내릴 죄 같으면 나도 그거 감안하고 있습니다. 나도 벌 받은 짓은 내가 알아서 챙깁니다.’ 그런데 때리기 전에 나를 때림으로써 하나님한테 얻어맞기 전에 내가 알아서 처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미안해서 못 때리잖아요.ㅎ 생각하는 꼴이 꼭 아이들 소꿉놀이 하는 수준이잖아요. 그런데 그 수준이 다른 사람 보기에는 대단한 믿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기껏 끄집어낸 아이디어가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겁니다. 교회 늦게 와서 미안해서 헌금하나 더 내는 그 수준 이예요. 주님하고 우리하고 언제 소꿉놀이 했습니까? 그래서 어떤 영화에 보면 다닐 때는 몸이 벌겋게 다녀요. 나중에는 뭐가 자랑거리냐 하면 누가 더 벌거냐가 자랑거리예요. 누가 더 벌을 많이 받았는지가 자랑거리가 돼 버렸어요.

 

유다와 이스라엘의 특징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불러주셔서 구원된 사람들이예요. 다른 나라는 혈통과 혈통이 있음으로써 거기에 부모 있고 자식 있으면 그 게 나중에 모이면 나라가 되는 겁니다. 씨족이 커지면 부족이 되고 부족이 커지면 부족 국가가 되는 겁니다. 가야 역사, 신라역사, 고대 역사를 공부를 한번 해보면 어떻게 씨족 중심에서 국가 중심으로 번져나갔는지 나옵니다. 용산 국립 박물관에 가보면 그 과정이 다 나와 있어요.

 

인간에게 혈통이라 하는 것이 이것은 지 맘대로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태어난 걸 어떻게? 부모를 내가 정합니까? ‘당신 부모 하세요.’ 지가 정합니까? 부모는 내가 있기 전부터 존재해서 부모 있으면 내가 있는 겁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강제로 떼어냅니까? 따라서 이미 혈육이 있고 혈육이 대를 이어버리면 인간의 힘으로 혈통이라는 것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혈통 때문에,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기 때문에 모태신앙, 유아세례 받아서 그래서 구원받는다는 인식에서 우리가 벗어나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성경에서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라고 백날해도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우리 아버지가 육에서 영으로 거듭나면 자식은 자동적으로 거듭난 자녀 되는 것처럼 다 그렇게 이해들을 하고 싶어 해요. 육이니까. 육이라는 확실한 증거 있잖아요.

 

그런데 유다도 마찬가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주셔서 구원했건만 뭐를 잘라버리느냐 하면 불러내었다는 의미가 잘라져 버렸어요. ‘뭐 아버지 때나 불러줬지, 뭐, 우리는 아버지가 부름 받아서 살기는 이 땅은 우리 땅이다, 내 땅이다.’ 이렇게 돼 버린 겁니다.

 

애굽에서 불러내어서 이스라엘이 약속에 땅에 갈 때, 그 불러낼 때 혈통적으로 불러낸 것이 아니고 언약으로 약속으로 불러냈거든요. 약속으로 불러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약속 안에 있어야 니는 히브리인이고 이스라엘이지, 약속 밖에 나오면 아무리 내가 애굽에서 나왔다 한들 너희 아버지, 엄마가 기적을 체험한들 관계없이 너는 애굽이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다른 민족은 혈통으로만 유지되는 민족인 반면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혈통에다 불러내심을 보태서 하나님의 약속 속에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약속의 백성, 언약의 백성, 거룩한 백성이라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나라에 없는 게 있어야 돼요. 불러내서 줬다 할 때 불러 낼 때 모든 인간이 애굽의 종 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사전에 인간적인 조건이라는 게 필요치 않습니다.

 

구원받는데 조건이 필요 없다는 말이 이게 인간들이 평생 들어도 지치지 않는 권태롭지 않는 짜증나지 않는 복음 중에 복음이죠. 조건 없이 구원된다는 거예요. 차별 없이. 이 말은 조건을 만들 필요가 있다? 없다? 조건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저 사람은 잘 생겨서 구원받기 좋겠다. 나는 못 생겼으니까 구원받기 힘들다.‘ 이런 조건이 없이 불러줬다는 것은 다른 근거에 의해서 벌어진 거예요. 다른 근거에 의해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구원받은 겁니다. ‘우리 집 어린양은 이쁘더니만 이쁘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셨다. 우리 집 어린양을 잡았는데 이쁘지 않아.’이러면 말도 안 되죠. ‘남의 양의 피는 윤기가 나던데 우리 집 양은 비실비실해서 핏기가 영 없어.‘ 이런 걸로 주께서는 그걸로 지옥 가고 그렇지 않습니다. 자꾸 어린양의 피는 한결같은 그것을 볼 줄 알아야 되는데 그 한결같음에서 눈을 자꾸 떼버리고 다양성, 개성, 나만의 것, 이런 것에 눈을 돌려버리니까 자꾸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보지 못하고 우리 중심으로 차별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래서 자식들이 부모가 하는 말 중에 안 믿잖아요. ‘어느 자식이나 귀한 집 아닌 자식이  없다.’고 하면 애들은 안 믿어요. ‘에이, 전에 반찬 갈치 중간은 형 다 줘버리고 머리 부분, 꼬리부분, 동생 먹으라 하고, 에이 차별이 없긴 뭘 차별이 있지,’ 그때 엄마가 섭섭한 거예요. 이미 차별이 없다는 것을 믿으면 될 텐데 갈치 토막 놔두고 새삼스럽게 차별이 있는지 없는지를 자기 비위에 맞춰서 보니까 이게 기분이 나쁜 거예요. 나중에 커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은 대학 보내줬으니까 아버지 유산은 나한테 다 줘. 나는 고등학교 밖에 안 나왔어.’ 이렇게 계속해서 자기중심으로 나온다는 말이죠.

 

이게 부모 입장에서 섭섭한 이유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혈육을 만든 것은 죽음 없이는 생식 기능이 안 돼요. 다시 말해서 혈통을 잇는다는 것은 두 엄마의 죽음이죠. 엄마가 죽을 요량하고 애를 낳으니까 ‘니 낳고 나는 죽어도 좋아.’이런 죽음이 게재된 채 자식을 낳았는데 태어난 자식은 거기서 뭐가 느껴지지 않느냐 하면, 엄마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느껴지지가 않아요. ‘누구한테 태어났나?’ ‘엄마가 나를 낳았지.‘ 그걸로 끝 이예요. ’어떻게 낳았지?’ ‘몰라.’ ‘내가 엄마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의 혈통도 죽음을 포함해야 새로운 피조물, 생식이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부름 받은 자를 구원하는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것도 이건 죽어가는 그러한 무가치한 인간의 생명이 아니라 몸 간에 엄마 목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나무의 목숨을 담고 있는 분의 죽음과 함께 죽음으로써 그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 너희 집에서 키운 1년 된 어린양을 잡아라 이 말입니다.

 

너희들이 생명 죽은 것은 너희들이 아니고 사실은 너희 속에 아무 흠 없는 어린양이 너희를 살릴 것이다. 이러한 언약 적 요소가 있어야 그것이 바로 유다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 뽑은 이유가 뭡니까? 숫자 12는 뭘 의미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안 죽었다 이 말입니다. 이제부터 진짜 이스라엘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예요. 옛날에는 어린양 때문에 애굽에서 나왔지만 이제는 그 어린양이 누군가를 보라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예수님을 어린양에 집어넣게 되면 옛날의 어린양은 땅에서 키우던 저희 집에서 키우던 어린양이지만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어린양은 하늘에서 계시던 어린양입니다.

 

따라서 그 어린양이 삽입돼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원리가 이런 원리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애굽에서 끄집어냈잖아요. 그 애굽이라는 지리적 공간적 문제, 시간적 문제를 이제는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지상에서 천상까지, 지상에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그것과 점차 뭐까지 연결시키느냐 하면 하늘의 영원한 시간도 공간도 없는 하늘의 묵시세계로 연결시키고 연결시키는 그 중간에 이스라엘 나라가 게재돼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아까 이야기했듯이 부모가 죽어야 자식이 태어나는 것처럼 이스라엘에 죽어야 새 생명 얻는 겁니다. 다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 속에 함께 죽은 분에 의해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분에 의해서 이스라엘도 아니고 이방인이 이스라엘 몸을 입는 그 죽은 분의 생명이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가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면서 하나의 이스라엘 이름으로 새로 새겨진 이름으로 우리는 우리 생명 되신 예수님의 생명의 세계에 합류해서 살게 되는 겁니다.

 

자, 이런 원리로서 제가 방금 죽 이야기했는데 그 원리 중에서 한 가지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차별이 없다는 이 점을 왜 차별이 없는가, 다시 한 번 복습을 하면 부름 받았기 때문에 그렇다. 부름 받은 근거는 니가 부자냐, 가난 하냐 상관없이 어린양을 근거로 해서, 우리 몸이 아니고 이 몸 가지고 얼마나 착하고 내 몸을 어떻게 때리고 ‘니 얼마나 맞았는데? 얼마나 때렸는데? ’나는 세 찰, 나는 네 찰‘ 이런 거 가지고 하는 게 아니고 다른 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몸으로 구원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겁니다.

 

참, 그걸 보면 세상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예수 십자가 모르는 사람은 정말 불쌍해요. 그 사람이 내세울 것은 자기 행함밖에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남한테 기 안 죽으려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한테 기 팍팍 죽어도 괜찮아요. 아! 자존심! 박살나도 괜찮아요. 왜, 이미 괜찮게 돼 버렸으니까. 자존심 같은 거 빼놔도 괜찮아요. 연세 많은 분은 뭐든지 있다면 머리가 정신이 없어서 다 빼놔도 괜찮아요. 다 빼놔도 괜찮아요. 정신, 혼을 다 빼놔도 괜찮아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나 때문에 내가 사는 식은 이제는 포기하자 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는 다른 죄와 달라요. 뭐냐 하면 ‘가난한 자를 왜 학대했느냐’고 나옵니다. 이것은 가난의 의미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지가 게을러서 가난한 것을 가난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잠언 서에 보면 게을러서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징벌로 돼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난케 하신 것에 대해서 그것은 뭐를 흔적으로 보느냐 하면 옛날 출 애굽할 때 아무 조건 없이 어린양 때문에 출 애굽 했던 그 당시가 옛날 그때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계속 된다는 사실을 주변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가난하게 된 사람의 존재를 통해서 파악하라는 겁니다.

 

여기 구내에 가면 산성이라는 동네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물 탑이 있어요. 물 탑이 있고 그 옆에 생활사 박물관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에 가보면, 저도 가끔 거기에 가보는데 가끔은 가 봐요. 일부러는 안 가지만. 온 동네 다 돌아다니니까 가보는데, 어릴 때 만화책, 옛날 도시락, 옛날 어렵게 살던 우리 50년대, 60년대 생활상을 그대로 다 있어요. 처음에 나왔던 설탕, 삼양사 설탕, 온갖 것들이 다 있어요. 거기에 어른들이 애들을 데리고 가요. ‘봐라, 우리가 이렇게 살았다.’하고 젊은 애들한테 까불지 말고 스마트폰 사달라고 하지 말라고 이렇게 힘들게 살았다고 말을 하죠.

 

그런데 그렇게 구경하면서 자식을 교육시키는 그 광경을 그 구내 산성면에 사는 현지 주민들이 볼 때는 같잖죠. ‘어이쿠, 이 동네 살기 싫어서 도시로 도망가 놓고 이제 와서 남한테 훈계 한다고,’ 또 콩 같은 게 있어요. 콩하고 콩국수 하는 힘들게 살던 걸 그걸 보면 부끄럽죠. ‘아! 저렇게도 사는구나.’

 

욕심내서 다 투자해서 돈 놓고 돈 먹기 식으로 투자해서 뭔가 욕심이 부풀어서 까불다가 왕창 망하는 것, 그런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 보니까 남들이 이쪽을 전부 다 침범하는 식으로 뺏어 가는 식으로 그렇게 돼 버려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가 계속 달리지 아니하면 결국은 멈추는 사람은 달리는 사람에게 지게 되기 마련이거든요. ‘아이고, 니는 노력해라, 나는 요것으로 만족한다.’ 이러면 언제부터 옆집 가게에서 흡수통합해서 가게는 날아가 버립니다.

 

애들 보고 ‘ 아이고, 나는 학원 안 보낸다.’ 이러면 학교에서도 ‘자, 여러분 이거 학원에서 다 배웠죠? 오늘 진도 나가고.’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 그걸 무슨, 선행시험이라 합니까? 질문도 나오지 않았는데 미리 학원에서 벌써 2학년 때 3학년 것을 다 가르쳐 주니까 학원 안 다닌 애들은 3학년 걸 3학년 때 보지를 못해요. 선행학습이 돼서. 학원 다니라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 이 자본주의 사회서 그냥 논다는 것은 퇴보를 의미하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세상이 그렇게 휘몰아 간 거죠. 그러다 보니까 가진 자라 하는 것은 없는 사람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가진 자가 발생되지 않게 돼 있습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데 그 당시에도 그래요. 6절에 보면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완전히 도가니죠. 마을에 정신지체 소녀가 있으니까 온 동네 70대 노인들이 다 달려들어서 다 겁탈하고, 도가니 이야기 아닙니까?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힘없다. 가난하다. 약하다.’라는 것이 그걸 ‘지배하라, 뺏어라.’고 준 것이 아니라 옛날 그때 그 시절을 니 마음속에 잊지 말라 이 말이죠. ‘너희들도 옛날처럼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난을 문제 삼아서 너희들을 뺏거나 가지거나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잖아.’ 이 말입니다. 가난해서 하나님께 바칠 제물이 없다고 내가 너희들을 지옥 가라고 한 적이 있더냐. 이 말이죠. 그러면 묻지도 않고 너희들보다 더 가난하고 너희들보다 더 희생적인 어린양 하나 잡아서 그 피보고 너희를 넘어서 구원했지 않느냐, 그래서 구원 받았는데 그게 바로 목숨이고 생명이었는데, 그 목숨 바쳐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 됐는데 왜 그러한 흔적을 너희들이 이방나라 본받아서 그걸 제거해야 되느냐 이 말이죠.

 

특히 여기에 8절에 보면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이 제사장이란 사람은 재판장, 옛날에는 같은 업무를 했습니다. 나라에는 질서가 있어서 서로 서로 개인 간의 의견 차가 있을 때에는 재판을 해줬습니다. 유명한 것이 솔로몬의 재판이죠. 둘 다 잘났다는 거예요. ‘저 애는 내 애다, 니 애다.‘라는 난처한 입장에서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을 해서 자기 본 엄마한테 아들 돌려준 사건이 있잖아요. 그처럼 이 세상에 보면 전부 다 개인 위주기 때문에 어떤 의견충돌이 생길 때에 그걸 재판을 해줘야 되는데 그 재판할 때 그 기준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 기준은 누가 거저 받은 것에 대해서 거저 받았다고 아직도 이해하느냐가 기준이 되는 겁니다. 고 자비의 원리 원칙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언약 백성으로 지탱하게 만드는 원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과 유다에 이방나라 풍습이 들어왔습니다. 이방나라 풍습이 들어왔다는 것은 뭐냐 하면 옛날의 자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대신에 힘으로 밀어붙이는 신이 된 거예요. 큰 것, 많은 것, 그것을 축복이라고 간주하는 그런 신이 그런 여호와, 그런 예수, 그런 삼위일체가 교회 내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사람들에게 경쟁적으로 ‘아! 복을 안 받았으니까 가난하게 되었구나. 그러니까 내가 복 받은 사람,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사람 티를 내려면 남들만큼이나 돈을 가져야 되겠구나.’ 있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고 없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고, 저주받은 사람은 살아서도 가난하게 되고 죽어서도 지옥 가고. 그러니까 교회에서 간증을 만날 해서 헌신 예배 하면서 불러대는 목사나 그 간증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은 부자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가난하게 되었습니다.’라는 소리를 남발하니까 자기 욕심과도 맞아 떨어지고 그러니까 사람은 ‘나중에 돈 벌어가지고 교회 보란 듯이 땅땅거리며 그때 교회 찾아올게.‘ 이래서 교회 나갔다 들어왔다 한다 말이죠.

 

이것은 바로 교회에서 누굴 우대 하느냐, 소위 잘 사는 사람을 우대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잘 산다는 게 뭣을 의미하느냐 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잘 산다는 것이 이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사람이라 하는 것은 어떤 행동에 나서려면 반드시 남에게 피해를 주게 돼 있습니다. 그때는 그게 피해인 줄 모르죠. 그러나 돌이켜 봐서 지난 세월들을 돌이켜 보면 형제간에도 내가 잘 사는 것 때문에 동생들이 얼마나 치었으며 나 때문에 형제들이 얼마나 치었다는 것을 돌이켜서 보면 다 아는 거예요.

 

니가 부모 되면 자식 키워보면 부모의 마음을 알리라. 그래도 모릅니다마는 옛날 부모들을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했다 말이죠. 니가 나중에 자식 키워보면 니가 얼마나 속 썩였는지 알 것이다 이 말이죠. 커도 몰라요. 커도 지 자식 챙기느라 부모 마음을 안 챙깁니다. 돌이켜 보면 내 하나 부시럭거리고 움직일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굉장히 큰 피해를 보는 겁니다. 이거는 간증을 해야 되겠어요. 간증 못하고는 못 내려가겠습니다.

 

옛날에 비산동에 한 방에 삼촌 3명과 조카 3명, 6명이 한방에서 잤어요. 이불은 달랑 한 장입니다. 아무리 힘이나 서열상 누가 힘을 발휘하느냐 하면 삼촌이 힘을 발휘해요. 이불은 한 장인데 6명이 끼어 자니까 겨우 매미같이 붙어 있는데 새벽 2시나 3시가 되면 큰 삼촌이 한번 굴러버려요. 지 살겠다고, 지는 보면 갑자가 따뜻한 거예요. 지는 신의 축복인지 알아요. 축복이 아닙니다. 남은 지금 저주 받고 있어요. 벌벌 떨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책상 속에 기어들어가고 가관입니다. 남자 6명이 자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일어났다. 아침에 된장을 끓이는데 된장에 소고기 넣고 주잖아요. 그러면 삼촌이 ‘숟가락 놔, 숟가락 놔,’ 지가 먼저, 완전히 조폭이라니까, 고기를 저는데 젓는 것도 슬슬 저어서 물결을 만들어서 물결 속에 튀어나오는 수저에 있는 고기를 윤곽을 보고, 이건 내가 먹고, ‘이제는 니 맘대로 해라. 이렇게 삼촌들이 조폭 부리듯이 했다 이 말이죠. 지금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까?ㅎ

 

사람이 군대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런 일이 없는데 군에 가면 꼭 사람 하나 없다 하면 밤중에 옆에 자는 사람 채우고 지는 얻어맞고 이름은 지워놓고...그저 내가 살아야 내가 사는 거예요. 만약에 양보하면 죽는 세상, 그래놓고 의인이라고요?ㅎ 아이고, 그래가지고 뭐가 의인인데? 우리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입히고 있는 중입니다. 뒤돌아봐서 세밀하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펄럭거릴 때마다 먼지 낼 때마다 다 피해를 입혀요. 담배 피울 때는 ‘어이, 담배 냄새 좋지?’ 이럽니다. 지가 담배 끊어보세요. 피우는 담배 냄새가 얼마나 독하고 격한지, 피울 때는 그걸 모른다니까요.

 

사람은 지식이 늘어나고 생각이 깊어질수록 ‘아! 내가 남한테 본의 아니게 피해 입힌 피해가 엄청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바로 우리의 낮은 자리, 우리의 원래의 자리는 주님 보시기에, 사람보기에도 그런데 우리 자신이 돌이켜 봐도 자신이 웃기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자기가 어떻겠습니까? 참 무지몽매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대신해서 생명으로 대신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겁니다. ‘유다야 이스라엘아 그거 잊어버리면 니 벌 받는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벌 받아 망했습니다. 그 망한 걸 다시 보면서 우리는 회고하면서 ‘예수님 십자가뿐입니다.’라는 고백을 다시 한 번 하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살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 성격, 남 가졌다는 것으로 핑계 삼을 수 없고 우리 주님 앞에 참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익히 아시고 어린양 준비해 놓으셨으니 그 여호와 이레를 우리가 무시하지 않는 참된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