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5 본문

음성5   동영상5

 

녹취:한윤범

 

20110425 봄특강 - 들뢰즈와 라캉과 개혁주의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들뢰즈와 라캉 그리고 개혁주의신학이 무슨 관계있다고 이 세 개를 약간 억지스럽게 강제로 연결시켜놨느냐 그 이야기를 잠간 해봅시다. 개혁주의신학은 어제 언급했듯이 ‘있음’에서 출발하거든요. 있다는 거예요. 있으니까 있음의 자국, 흔적이 남잖아요. 자국과 흔적을 무시하지 말자는 거예요. 자국과 흔적을 모아보면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자국은 누구의 자국이냐 하면, 인간들이 지나왔던 자국이죠. 그리고 앞으로 또 등장할 인간들. 인간들의 자국들을 하나 버리지 않고 모으자는 거죠. 모아서 뭐 할 건데? 모아서 시행착오를 거쳐서 완전한 교회를 후대에 물려주자는 식입니다. 그게 말이 좋아 후대에 물려주자는 것이지만 실제 속마음은 이렇게 건전한 역사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가장 진리답고, 가장 우수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진리에 접근한 것만 골라잡았으니까 우리 교회라 하는 것은 주님에 인정받을만한 교회고 그 교회에 있는 우리의 구원은 거의 확실시된다는 관점이었지요.


이게 들뢰즈와 라캉과 무슨 관계있느냐 하면, 들뢰즈와 라캉의 모든 철학은 출발점이 나 있음에서 출발해서 나 있음으로 갔던 겁니다. 들뢰즈 같은 경우에 주체를 없앤다 했잖아요. 주체를 없애지만 일단 나를 통해서 마이너스세계라면 이건 지속의 세계지만 플러스세계는 지상의 모든 역사 세계잖아요.


어쨌든 나를 여기 머물면 안 되고 나를 더욱더 가서 운동이미지를 분산시켜서 영원한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자고 시도하더라도 반드시 뭘 통과해야 합니까? 경험과 판단과 평가 주체가 누구에요? 나죠. 나를 경유해서 가잖아요. 이 지속의 세계를 긍정한다는 말은 결국 모든 통과했던 나 자신도 긍정해서 들어간다 이 말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나를 부정할 수 있는 요소도 이 대자연 속에는 전혀 없는 거예요.


라캉철학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의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들뢰즈는 주체는 없다는 것이고.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고 또 사건 터지면 생기다가 사라지고. 그런데 라캉은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서 주체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감추어진 정신세계, 그게 실재계죠. 실재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거고 나머지 상상, 상징에 불과하다. 실제는 아니다 이 말이에요. 우리 몸과는 관계없다 이 말이에요. 실재계에서 나온 그러한 요소로 인하여 블랙홀처럼 손에 잡히진 않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 세상의 법적인 체제, 상징적인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실재계는 뭐냐 하면, 손에 잡히지 않는 그걸 여분의 것, 잉여라고 합니다. 계속 나오는 거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은 쾌락과 즐거움, 희열 같은 걸 기본적으로 인간은 노리고 하는데 아무리 거룩한 일, 구제를 목적으로 해도 즐거움을 기대하면서 하는데 즐거움이 오히려 유지되지 못하고 자꾸 거세가 되는 겁니다. 제거가 돼요.


왜 제거되느냐 하면, 남이 날 못 되게 굴어서가 아니라 우리 주체 자체가 자기 스스로 분열되기 때문에 분열이 여분을 채우기 위해서 ‘당신은 나에게 뭘 원하는데요?’ 자꾸 물어가면서 접근한다니까요. 저쪽에서 우리를 압박하고 구박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자신이 타인을 빌미로 해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더 여분의 것, 내가 시들해져버린 나의 즐거움보다 더 풍부한 즐거움이 있을 타인에게 자꾸 다가가서 ‘뭘 해드릴까요? 뭘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대로 해드릴게요.’


그렇게 해서 실재계에, 블랙홀에 어느 정도 양도 측정 안 될 정도로 많이 남아있는 그 즐거움에 더 만끽하려고 시도하는 그런 가운데서 인간은 주체가 비로소 형성되는 거예요. 주체가 있어서 끌어 모은 게 아니고 내 주체는 항상 분열된 입장이니 분열을 일치시키려고 하는 그 과정 중에 하나가 바로 여분의 것, 잉여의 것, 남의 떡이 더 좋아 보인다고 남의 교회가 재미있어 보이고, 남의 가정이 더 행복해 보이고. 그런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광주에 어떤 가정에 딸 둘과 병든 아빠, 늙은 엄마와 채소가게하며 산다. 굉장히 행복해보이죠. 그런데 광주시내가 아니고 무인도에서 네 식구가 살면 행복할까요? 행복하지 않죠. 아가씨가 채소가게 하는 이유는 다른 희망, 자기가 모델이 될만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갖고 있는 즐거움과 여분의 쾌락을 놓치기 싫어서 따라붙는 그것이 자기 분열된 주체와 현재 있는 것을 항상 타인의 것을 동질화시키는 것을 주체로 생각하고 돌아서면 또 여분의 것이 깨진 주체로서 다시 돌아오는, 이 여분의 것을 뭐로 메울 수 있다? 바로 남이 갖고 있는 요구가 그것을 채워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장된 채소가게 아가씨가 묻지요. ‘혹시 채소가 상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묻는 건 뭡니까? 그때 어떤 업소의 주방장이 ‘예. 이번 채소는 괜찮습니다.’ 할 때 아가씨가 하는 중요한 멘트가 있어요. ‘웃으면서 이야기하세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바로 내가 원했던 것은 당신을 인하여 나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이에요.


목사가 심방을 갔는데 ‘목사님, 주일날 만났는데 왜 왔어요?’ 문 탁하고 닫는 것과 ‘목사님, 안 그래도 기도 중에 기다렸습니다. 누추한 곳에 오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다시 갈게요.’ 할 때 목사에 어느 것에 더 보람을 느끼겠습니까? 후자겠지요. 안 갔으면 얻지 못할 쾌락을 내가 찾아가는 어떤 교인이 있다는 점이 나로 하여금 더욱더 그전에 느끼지 못한 쾌락을 한 번 더 얻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돌아서서 ‘나는 역시 훌륭한 목회자야.’ 그게 뭐냐 하면, 타인과 동질화되죠.


이게 얼마 가지 않고 다시 이것도 식상해. 이것도 만족하지 못해요. 솔로몬이 천 명의 아내를 거느려도 만족하지 못하듯이 목회자가 교인 천 명 있다고 만족하지 않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소유라 하는 것은 있으면 그걸 사수하는데 급급해서 불안해서 살지를 못해요. 적어도 이 정도 레벨인데 천 명 목회하다 다섯 명 목회하는데 도저히 이거는 갈 마음이 없어요. 아무리 거기에 소박한 행복이 있다할지라도 마음에 없어요.


그런데 강제로 교회에서 스캔들 있어서 쫓겨났을 때 다섯 명에게 오게 되면, 그 사람 뭐라고 하겠습니까? ‘역시 목회 많이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야.’ 다섯 명에 대한 자기 정당화에 나서지요. 그게 새로운 소박한 행복이기 때문에. 그러면서 다섯 명에서 세 명으로 줄면 기분 나쁘고. 천 명에서 다섯 명 됐다가 다섯 명에서 일곱으로 두 명 늘어날 때 이것도 새로운 기쁨이에요. ‘맞아. 하나님께서 첫사랑을 잊지 말라 했는데 내가 너무 교만했어.’ 오만 성경구절 동원해서 그걸 정당화하는 거예요.


지젝은 이야기합니다. 라캉도 이야기하죠. 뭐냐 하면, 인류와 실재세계는 근접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항상 검은 호수 같아서 빠지면 안 되는 호수 같아서 주변에서 맴돌고 있는 겁니다. 돌다가 세월 다가고 치매 걸려 죽어 버리고. 여기에 절대로 근접할 수 없는 겁니다. 성질 급한 사람은 뛰어드는데 그걸 자살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래 사느니 죽어버리지.’ 하고 실재계에 뛰어들 때 이건 프로이드가 말한 인간에게 죽음의 충동이 있었다. 그게 실재계에요.


이건 바로 히브리서 2장 15,16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죽음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 악마가 쥐고서 평생 동안 쥐었다 폈다 하는 거예요. ‘여차하면 죽여 버려. 자살해버려. 너는 백날 해도 내 손에서 못 벗어나는 거야. 죽음에서.’ 그 말은 뭐냐 하면, 불교에서 크게 실수한 것은, 죽음을 이기겠다는 자체가 이미 라캉의 입장에서는 실재계한테 졌다는 걸 뜻하는 거예요.


실재계와 상징계 경계선에 죽음이 있잖아요. 실재계는 죽음의 아가리를 벌리고 오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넘어서 죽으면 된다는 것과 죽음이 무엇인지 아는 것과는 큰 차이 나죠. 갑자기 어려운 것 해버렸는데.


지금 죽음, 실재계, 블랙홀한테 나는 소멸되고 완전히 깨져버리고 죽음에 들어가는 것과 들어가 보니까 죽음의 어떤 세계인지 아는 것과 같다, 다르다? 달라요. 그러면 불교는 죽음의 세계를 전혀 모르고 ‘아이고. 죽으면 그만이지.’ 자기 문턱만 바라보니까 출발점이 있음에서 그냥 없음으로 끌려들어가는 그걸로 있음 세계의 한계죠. 한계란 말은 문턱까지만 알고 그 너머의 세계는 전혀 모르면서 다만 이쪽에서 바라볼 때 문턱 넘어가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식으로만 기껏 그거에요.


그러면 적어도 죽음을 이기자면 문턱만 알면 안 되고 죽음의 세계를 몽땅 다 알 경우에는 죽든 살든 그건 나중 문제고. 인간은 있음에서 왔기 때문에 기껏 아는 게 있음의 세계기 때문에 있던 것이 없어질 때 없어진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모르는 상태란 말이죠. 다만 내가 모르는 죽음이란 이상스럽게 당기고 있고 그 죽음의 세계는 있음과 반대니까 그 반대된 몸은 갖고 있고 서로 가기 싫은 몸이 죽음한테 끌려가고 있으니까 이 몸이란 자꾸 버티는 식으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어요. 버티다 안 되면 마치 뭔가 큰 배려나 하는 것처럼 마치 인심 쓰는 것처럼 ‘그래 죽음아. 내 죽어줄게.’ 마지막 버티다 안 되면 그따위 소리하는데 죽음이 그걸 알지요. ‘어디 핑계대노. 힘없으니까 나한테 딸려왔지.’


개혁주의에서 문제라 하는 것은 그 흔적을 있음에 있는 인간들에서 그 흔적을 주어모아서 그것으로 역사를 만드는데 이 역사는 죽은 자를 위함이 아니고 현재 있음, 나의 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역사를 진리라고 인정한단 말이죠. 그렇다면 이 역사는 결국 자기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의 역사기 때문에 고정된 상징질서체계가 되겠죠. 상징질서에 필요한 것은 언어로 만든 법입니다.


법을 하게 되면 여기서 생긴 것이 두 가지 변태가 있죠. 하라, 하지 말라는 변태가 작용한다는 겁니다. 하라, 하지 말라가 그냥 법인데 이게 왜 변태냐 하면, ‘하라’ 하면 한다는 게 변태를 유발하고, ‘하지 마’ 하면 하지 않는 게  변태를 유발하는 거예요. 변태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하라는 거예요. 그 변태 중에 하나가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아내가 이혼하면서 이혼증서 써주는 것, 그 짓 왜 하느냐 하니까 모세가 그렇게 하라 했대. 인간은 모세의 말에 순종하는 게 아니죠. 아내와 이혼하고 싶어 환장한 자기한테 순종하면서 누구한테 핑계 댑니까? 모세 법에 그렇게 돼있대. 그걸 예수님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네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잖아요. 추악과 간음과. 주님은 속에 드러나는 간음을 이야기하는데 저쪽에서 법에서 상징세계에서 이야기한 간음을 자기는 위반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바깥에서 들어가는 게 더러운 게 아니고 아예 네 속에서부터 모세가 증서를 써주라는 네 속에부터 어쩔 수 없이 간음죄를 피할 수밖에 없는 그런 뜻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뭔 뜻이냐 하면, 모세가 이혼증서 써주라는 말은, ‘내가 한 말은 핑계 댈 수밖에 없겠지.’라고 양으로 이야기한 거란 말이죠. 모세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이 그렇게 한 거죠.


인간은 법주면 법으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무슨 핑계 댑니까? ‘나 이 정도로 착합니다.’라는 새로운 핑계거리를 구입한 것밖에 안 돼요.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할 수밖에 없지요. 라캉도 다 아는 이야기에요. 어딜 속여? 하여튼 ‘말씀 순종했습니다.’ 하는 건 완전히 아주 변태라니까요. 그것으로 자기의 분열된 주체를 감추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신학의 문제가 뭐냐 하면,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 하잖아요. 그런 건 있지요. 처음에 루터, 캘빈 나왔을 때 기존의 모든 제도와 형식을 무시했던 재세례파 있지요. 그래서 그들은 좌로든 우로든 치우치지 않으면 중간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그림 봅시다. 같은 수평선에서는 좌, 우 아니면 중간은 진리 될 가능성이 많아요. 판이 수평이 될 경우는 그런데 이 판이 다른 판일 경우에는 이쪽 판 따로 있고, 저쪽 판 따로 있는데 아무리 중간이라도 중간은 허공이지 판이 다른 게 자기 판이 되는 게 아니란 말이죠. 판을 몰라.


이걸 언어적으로 이야기했어요. ‘나는 마작도 아니하고 장기도 안 둔다. 그래서 바둑 둔다.’ 바둑이라는 것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중간에 세웠죠. 그러면 ‘나는 마작도 아니하고 장기도 안 두고 바둑도 안 둔다.’는 그 사람 어디 갔습니까? 이건 판이 달라서 그래요. 들뢰즈의 철학에 의하면 이 판이 다 다른 판이다. 아킬레스와 거북이 판이 다르다했지요. 다른 거예요. 성경에는 어느 교회에 대해서 문제 삼는 게 아니고 질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습니까? 판이 달라요. 오늘 숫자로 헌금 이런 것으로 계산하지만 그게 달라요.


개혁주의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이기 때문에 교회가 있음을 있음으로 유지해야 되죠. 교회가 하나의 자체적으로 주체가 된다니까요. 교회됨의 모델이 되는 여러 가지의 기표가 있겠죠. 그것이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교제하고 그 다음에 예배드리고, 교육하고, 전도하고 이런 게 있지요. 그 기표에 내가 걸어서 ‘역시 우리 교회는 예배를 잘 드리기 때문에 참된 교회 맞아.’라고 나오더란 말이죠.


이게 무슨 논리냐 하면, 바로 예배갱신주의 교회들 안 많습니까. ‘예배를 회복하라’ 그 구호 아래 커튼 바꾸는 거예요. 때마다 커튼 바꾸는 게 예배 회복하는 것 아닙니까. 사순절, 오순절 챙기는 게. 그렇게 해서 다른 교회는 예배를 회복 못했는데 우린 예배 회복했으니까 우리는 참 된 교회 맞다고 하는 거예요. 앞뒤 커튼 바꿔봐야 교인 확 줄면 뭐라고 합니까? ‘목사님은 왜 교인수 신경 안 씁니까?’ 그럼 여기다 하나 더 보태죠. 우린 전도하니까 우린 교회 맞다고 나오겠죠. 전도 훈련시키니까. 기존의 라캉이론 그대로 따라가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있음에서 실재계에 접근하기 위해서 뭔가 있음에서 얻을 수 있는 그 교회 출석함으로서 그 교회 소유하고 그 교회 당회장 목사로서 어울릴 수 있는 그 쾌락이 실재계에 의해서 자꾸 거세가 됩니다. 거세란 제거하는 거죠. 제거시키는 그것에 따라서 ‘그럼 저는 뭐 하기를 원합니까?’ 거세시키는 실재계에 자꾸 묻는 거예요. 왜 자꾸 묻느냐 하면, 모자란 것을 채워주는 잉여와 여분의 것을 미지에서 새로운 완전한 그 무엇이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걸 라캉은 신의 세계라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교회 봅시다. 성경에서 교회는 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의 피로 시작하죠. 자전거 타이어 바람 빠졌을 때 바람 넣지요. 그러면 쭈글쭈글한 타이어가 있는데 여기에 바람을 넣으면 탱탱해지지 않습니까. 그럼 A지점, B지점, C지점 있다면 처음에 A지점에 바람에 들어와서 전체가 다 퍼지겠죠.


교회의 시작이 하나님의 피 흘림이죠. 이걸 새 언약이라 하는데 하나님의 피가 들어오면 그 교회 전체가 예수님의 피로 가득 차있죠. 이게 역사 필요합니까? 여기 주체 필요해요? 주체는 피 흘리신 주체로만 되면 되죠. 바람 넣는 주둥이를 이걸 머리로 해서 머리만 있으면 몸은 머리에서 자라나느니라. 또는 주체는 머리를 향하여 자라날 때 에베소서에서 한 지체로 자라나죠.


이 말은 자라나고 키우는 모든 원 힘은, 실제 본질은 지체에서 나온다, 안 나온다? 지체에서 나오면 안 되죠. 지체에서 나온다면 그 교회는 자기 지체의 지체 교회 되겠죠. 그런데 머리 되신 지체되려면 지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섞일 수가 없죠. 베드로의 순교가 주님한테 거부당한 것처럼. 베드로의 순교를 받아들이면 베드로는 영원히 천국에 못 갑니다. 왜? 천국에 갈 수 있으려면 그것은 천국에서 받아주는 교회가 돼야 돼요. 교회에 사람 모으는데 엉뚱한 문제 붙들고 해봐야 합격이 안 되잖아요.


공무원시험에 역사과목이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역사 안 나온다 해서 그 학원 다니는 사람들 다 떨어지잖아요. 과목이 다르잖아요. 교회 목회자로서 교회를 생각할 때 항상 교인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가, 교인들이 할 수 있는 과목은 뻔합니다. ‘재봉틀하세요.’ 이러면 합니다. ‘십자수 하세요.’ 해요. ‘점심 반찬해오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 일에 붙이는 사람 있으면 약간 도와주면 돼요. 한 달에 두 번 돌아오는 것, 세 달에 두 번 돌아오게 하면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에 있던 구원되는 조건에 그런 과목이 안 들어가 있다니까. 전도, 예배 이런 것 하나도 안 들어가 있어요. 전도, 예배, 봉사, 헌금 이런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가 그것이 타인을 통해서 발산될 때 우리의 전도가 아니고 예수님의 전도, 우리의 헌금이 아니고 예수님의 헌금, 우리의 예배가 아니고 주님의 예배, 신령과 진정한 예배, 우리의 기도가 아니고 주님의 기도 이것이 전부다 퍼져서 주님의 것으로만 바깥에 발산되고 증거 되는 그리고 그 힘은 오직 하나님의 피에서 나온다는 것이 합격될 수 있는 교회다 이 말이죠.


개혁주의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시작된다고. 신앙고백이 뭐냐 하면, 결국은 그동안 건전한 내용이기 때문에 모든 교리들을 수집한 거예요. 교리는 어디에 속합니까? 라캉에 의하면 상징질서에 속하죠. 교리는 명령법으로 돼 있잖아요. 사도신경보세요.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그 다음에 뭡니까? ‘내가 믿사오며’ 성경말씀도 그렇지만 그 말 자체가 전부다 명령으로 돼 있어요. ‘믿을래, 안 믿을래?’ 이 말 아닙니까. ‘믿습니다’ 돼버리면,


어제 라캉 다시 해봅시다. 하룻밤만 지나면 다 잊어버리니까. 이게 기표라 합니다. S라 표현합니다. 주체도 s라 하지만. 기표는 이게 없어요. 그냥 기표는 여러 가지 나열돼있어요. 마치 백화점에 물건 진열하듯이 여러 가지 기표가 있는 거예요. 여기에 뭔가 모호한 주체, 모호한 주체라 하고 깨어진 주체라고 하고, 주체가 기존에 있는 분열과 메우기 위해서 타인을 원하는 겁니다.


그냥 혼자 교회 와서 ‘수리수리’ 이렇게 하면 못 알아듣잖아요. ‘뭐, 말을 해라.’ 자기가 지어내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되고 싶은 게 당신이 갖고 있습니다.’ ‘말을 하라니까. 뭘 줄까?’ ‘어어어.’ ‘그런 것 없어. 말을 하라니까.’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은 본의 아니게 어디에 종속돼야 한다? 기존 타인이 만들어놓은 응축, 상징질서에 종속이 되면서 그쪽에 있는 단어 하나를 골라잡아야 된다니까요.


‘나는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을 믿습니다.’로 시작되지요. 언어 속에 들어가죠. ‘믿습니다’ 하는 순간 그것이 주체로 되는 순간 ‘그래 나는 믿는 거야.’라고 내려와 버려요. 타인의 기표가 여기서 타인과 나를 동질화시키면서 이 자리가 주체 자리인 거예요. 나중에 주체 자리가 두 개니까 분열돼있지만. 주체 자리가 이렇게 해서 깨진 채 올라가지만.


‘나는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것 예배 끝나고 나가면서 ‘믿으면 내가 마음에 걱정이 없어야 되는데 믿습니다해 놓고 왜 갑자기 집안에 가스 켜졌는지 걱정되지? 믿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야. 본래 의도가 있을 거야.’라고 잉여와 여분, 뭔가 일치됐다고 생각했는데 내 자신 속에 있는 짐승, ‘믿습니다’ 해서 잠시 기뻤잖아요. 믿습니다하고 그냥 가면 되는데 그게 재미가 없는 거라.


프로이드, 라캉 이야기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은 믿습니다하고 남들 보기 좋아하는 그것이 일시적으로 남들이 ‘믿어요? 집사님, 이제 구원받았네.’ 그 소리 들을 땐 좋았는데 그 즐거움, 기쁨이 들뢰즈는 그걸 뭐라 합니까? 감성이미지라 했잖아요. 뭔가 기쁘고 즐거운 거예요. 그게 이제는 시들해지는 거예요. 처음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노래 부를 때는 눈물 흘렸는데 그것도 246번 부르니까 그때 그 기분이 안 나오잖아요. 여분의 잉여, 쾌락이 그리운 겁니다. ‘야. 이게 다가 아닌데.’


그런데 옆에 집사님은 좋다고 같이 사도신경 해놓고 기뻐서 울어요. 이장희 말대로 저게 내 자리인데. 내가 있을 자리가 저 자리인데. 지는 울릉도에 살면서. 송창식과 김세환과 세시봉에서 불렀던 저 자리가 내 자리인데. 하여튼 사람들은 남이 하는 건 다 자기 자리로 봐. 내가 여기서 강의하는 것 얼마나 부러워하겠습니까? 저게 내 자리인데~ 특히 목사가 탑차 운전하는 사람. 저게 내 자리인데 탑차가 뭐고? 용인까지 왔다가고. 난 바꾸고 싶어. 설교테이프 들으면서 월수 300 이상 보장되면.


잉여가 생길 때 여기에 욕망이라는 것이 쾌락과 관련돼있고 쾌락은 자꾸 타인에 의해서 거세당하는 느낌이 든다 이 말이죠. 나는 나름대로 만족하는데 남이 갖고 있는 걸 보니까 더 좋은 것, 좋은 게 아니고 사실 좋다는 말이 더 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을 갖고 있을 때 이미 현재 갖고 있는 것은 그 사람에 의해서 거세당하는 거예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이고, 철도 없어라. 이게 뭐가 좋다고. 저게 더 좋은데.’


어떤 직장의 20대가 취직만 시켜준다면 하거든요. 취직하고 난 뒤에 한 20% 이상의 사원들이 6개월 만에 자진 퇴직을 하는 거예요. 왜 그래요? 문턱 넘는 데만 급급했지 거기서 하는 일이 돈 놓고 돈 먹기, 누가 돈을 100을 받아와야 50을 준다는 그런 조건을 생각도 안 한 거예요. 다단계만 다단계인 줄 알지 일반회사도 다단계라는 사실을 생각 못한 겁니다. 교사가 힘든 일할 때 돈 천만 원 받아도 아깝지 않은데 월급은 천만 원 안 되더라 이 말이죠. 그럼 그 오백은 누가 들고 가느냐? 자본주의 연구하고 난리에요.  


일단 문턱만 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이건 흔히 있는 일이에요. 백수들끼리 모임에서 올해 반드시 취직한다 해서 취직했단 말이죠. 취직해서 양복 빼입고 첫 출근하면서 증 보여주면서 친구들한테 취직했다고 하고 싶은데 막상 들어가니까 친구 만날 시간이 없어. 일을 직사게 시키기 때문에. 만날 아침부터 쿠사리 들으면서, ‘대학 나왔나? 전공 뭐야?’ 친구한테 자랑하고 싶은 게 아니고 말리고 싶은 거예요.


이건 검사도 마찬가지에요. 말이 있잖아요. 판사는 일찍 출근해서 제 시간에 퇴근하는데 검사는 일찍 출근해서 돈도 못 벌고 밤 열한 시에 간다고. 변호사는 늦게 출근하고 돈은 더 많이 벌고. 변호사도 지하철 성추행하면 변호사 되는데. 퇴직해서 뭐 할래? 간단하죠. 퇴직해서 신학교 가서 목사 되면 되지. 경험도 많겠다, 인생경험도 많겠다, 슬슬 농담으로 시간 다 때우고 복 받는다는 소리하면 되잖아요. 참 쉽죠.


현재 욕망에서 취직만 하면 애인과 결혼할 수 있다 했는데 막상 취직해보니까 지금 결혼은 귀찮아. ‘자기, 결혼 언제 할 거야?’ ‘완전 쫄다구 되서 바빠. 업무 파악도 안 돼.’ ‘그러지 말고 왜 자꾸 못 만나?’ ‘만날 시간이 없다니까.’ 완전히 새로운 판에서 기존에 있던 모든 짠 판은 다 무효가 되고 삭제가 되는 겁니다. 그만큼 새로운 즐거움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해야 되죠. 그러면 그 사람이 여자친구 못 만난다고 퇴직하고 다시 백수하게 되면 여자친구가 안 만나주죠. 여자친구는 남자가 아니라 남자가 버는 돈을 보고 했는데.


광주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너 없으면 나 없다.’란 말의 솔직한 말은, ‘네 돈 없으면 내 돈도 없다.’ 그런 뜻이라고. 돈을 집어넣으면 돼요. 이걸 사랑이라고 하는데 결국 이 세상에서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나에게 얻는 잉여분, 여분의 것을 더 노리고 접근하는 시도에 불과한데 이것을 세 자로 정-상-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라캉에 의하면 죄인이 있다, 없다? 죄인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이걸 죄인이라고 규정한 의인은 실재계에 들어가면 안 되는 실재계에 들어간 인간이기 때문에 미친놈이 돼요. 상징세계는 실재계란 검은 연못에 어느 누가 뛰어들지, 뛰어내리는 순간 제명이 되었어요. 지워버렸으니까. 미친놈 되면 인간이 아니니까 전부다 들어갈까, 말까 이런 상태에 있는 거예요. 솔로몬이 여자 천 명이 되도 소용없어요. 여자 백날 밝혀도 소용없어요.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된 거다 말이죠.


라캉의 이런 이야기를 들뢰즈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현재 있음과 있음 또는 동질성과 동질성 사이에 그 틈새 사이로 특히 라캉과 지젝은 잉여, 여분의 것을 이야기했지만 들뢰즈는 우리가 핍박했던 우리가 무시했던 그 틈새 사이로 삐져나오는 새로운 창조성, 그래서 이것까지도 긍정하자는 거고, 라캉과 지젝은 그게 아니고 그것은 부정적인 것이 엄연히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이것이 어떻게 윤리적으로 전환되는 문제는 우리가 논할 문제 아니고 부정적이 있다는 그것을 통해서 그 주체가 스스로 유동하고 춤추고 있는 주체라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이쪽에서 말하는 실재계지만, 진짜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부터 시작하죠. 있음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어디로 향합니까? 화살이 꽂혀있으면, ‘네가 나를 죽였잖아.’ 하고 피가 찾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피가 앞에 뾰족해서. 그것으로 나를 죽인 자를 찾아갈 때 찾아가서 그것이 그 사람에게 꽂힐 때 구원입니다.


‘주여, 제가 바로 주를 핍박하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께만 범죄 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땡 잡았어요, 완전히. 그 남편 미필적 고의로 해서 CSI에 나오는 그 사람들한테 다 걸리게 돼있어요. 나단 선지자가 그런 역할 했는데. 살인하고 간음하고 땡 잡았어요. ‘나는 주께만 범죄 했습니다.’ 너는 죄인이라고 치는 그 순간 작살의 줄을 따라가 보니까 다른 사람이 나온 것이 아니고, 타인이 아니고 원래 나의 주인이었어요. 그분이 창조주기 때문에. 창조주가 창조주 자신한테 작살을 쏜 걸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겁니다. 다윗은 창조주의 가지고 지체기 때문에.


그것을 다윗은 이것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해한 겁니다. 언약 안에 있는 인간은 어떻게 애써도 노력해도 언약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 타이어가 바람을 집어넣으면 타이어가 자기가 알아서 바람 빼고 넣고 하는 그런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주어진 언약의 바람은, 피의 효력은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들뢰즈와 라캉의 차이죠. 들뢰즈는 긍정이기 때문에 능동과 창조를 이야기했는데 라캉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개혁주의신학이 근본으로 지적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신학이기 때문에 그 교회가 구원될 교회 맞느냐 하는 문제를 이야기한 겁니다. 진짜 성경의 교회는 출발이 하나님 피로 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피가 스스로 칼로 자살한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 피는 피를 흘리게 한 가해자가 더불어 있지요. 그렇다면 교회가 뭡니까? 전부다 가해자가 되는 거예요. 그 가해자가 됨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라고 여기는 것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자랑할 것은 자기가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핍박한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 그것도 느긋한 마음으로, 감격스런 마음으로. ‘나는 주께만 죄지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 방식을 사용할 때 라캉과 들뢰즈 철학을 하게 되면 나타나는데, 주께서는 기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말씀으로 하는 거죠.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칼 바르트는 여기서 계시를 세 개로 나눈 겁니다. 전하는 계시로 이야기했는데. 여기에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함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분류할 수 있느냐 하면, 라캉의 이론에 의해서 말씀을 법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주체, 아까 라캉 했지요. 뭔가 오게 되면 변태가 되죠. 말씀 들으면 가만있지 않죠. 그걸 어떻게 합니까? 지키려고 하지요. 바로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주체가 되는 거예요. 그런 짓을.


지금 지젝과 라캉의 잘못은 예수 그리스도를 실재계에 접하기 때문에 이거는 정신병자가 아니냐? 이런 쪽으로 나가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의도적으로 미친 사람으로 왔어요. 심지어 주님은 바알세블, 마귀의 왕으로 봤단 말이죠. 이것은 실재계가 너무나 어리석게 어떤 인간의 지혜로도 십자가를 알지 못하게 해요. 물론 자기 있음, 자기 교회 있음으로 신학하는 개혁주의신학은 말할 것도 없이 십자가에 대해서 완전히 차단되는 거죠.


이거는 구원이 안 되는 시험방법, 재봉틀, 자수 이런 걸 시험 친다고 가르치니까 전혀 이건 안 되죠. 어떻게 하면 됩니까가 아니라 찾아온다니까. 작살처럼. 누가요? 자기 피를 가지고 성령을 통해서 찾아가죠. 교회란 것은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아닙니까. 사도행전 20장 28절. 출발점이 이미 교회가 만들어졌어요. 만들어진 쭈글쭈글한 교회가 팽팽해지면서 피가 넘치도록 오는 겁니다. 자기에게 도달된 사람한테는. 안에 온통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어요. 지 피는 소용없고.


그 피가 있다는 말은 우리는 철저하게 죽을 때까지 가해자로 살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율법에 의해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게 분명히 드러나는 겁니다. 율법은 바로 라캉 또는 들뢰즈처럼. 불교 쪽이라든지.


라캉이나 지젝은 실재계가 있다는 게 아니에요. 실재계가 두어야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이 발생된다고 했지 실재계가 어디냐고 묻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묻는 게 아니라면서 지젝은 약간은 그런 뉘앙스가 딴 생각 있는 것처럼 비춰서 주변에서 철학자들이 공격해대는 거예요. 그 실재계 실체를 내보세요. 그러면 지젝은 ‘실재계는 실체가 없는 겁니다.’ ‘없는 겁니까, 못 밝히는 겁니까? 분명히 이야기하세요.’ 그러다 나중에는 없다고 장담은 못하겠고 밝힐 수 없다고 나오죠. 하여튼 무조건 알 수 없는 잉여의 세계가 있는데 그게 우리 주체나 정신세계를 구성한다. 지금 인간의 정신세계의 구성은 그런 식으로 밝혀지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피가 오게 되면 새 언약으로 오게 되는데 사람들은 뭐라고 우깁니까? 새 언약을 거치지 않고, 우리가 아는 단어가 뭐죠? 죽음이죠. 죽음이니까 죽음은 저주스럼에 포함 안 되죠. 이 세상에서 우리 있음을 저주해버리면 아예 처음부터 없어야 마땅하다 이 말이죠. 있게 했다면 그 있음 자체가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라고 이해되는 겁니다.


‘김정일은 죽어야 돼.’ 하지만 김정일한테 물어보세요. 자기의 있음이 축복이죠. 내가 있음에 북한인민들이 잘 살고 있잖아요. 비록 30퍼센트는 영양실조지만 하여튼 70퍼센트는 건강하잖아요. 어느 누구한테 물어보세요. 살아있는 게 축복이지. ‘내가 왜 죽어? 나라가 있다면 축복받은 나를 먹여 살리는 책임은 나라에 있다. 나라가 하는 일이 뭐냐? 이명박이 하는 일이 나 같은 인간 먹여 살려야지.’


이게 뭐냐? 이미 있음 자체가 축복으로 보는 거예요. 축복이기 때문에 당연히 죽을 때도 축복스럽게 죽는 게 마땅한데 예수님의 피는 축복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저주를 이야기했다고. 이 세상에 어떤 철학도 저주를 현실화시키면 교회고, 신학이고 산다는 자체가 의미 없어진다니까요.


있는 걸 어떻게 잘해보자고, 있는 걸 어떻게 구원시켜보겠다고, 있음에서 나쁜 걸 제거해서 좋은 쪽으로 나가자. 이건 말이 되는데 ‘너 같은 인간이 왜 있는 거야’라는 말 자체는 있게 해놓고 이제 와서 저주하십니까? 앞뒤가 모순됐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모순된 게 아니고 십자가의 저주를 위해서 그들은 생겨나서 지옥 가야 되고, 천국의 은혜를 위해서 긍휼의 그릇을 입기 위해서 그들은 이 땅에 십자가 통과해서 은혜를 받아야 되고 비록 이 땅에서 목숨은 사라져 없어지더라도 영원히 살아야 되고. 그런 겁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주님의 용서를 받아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그래서 이 이야기가 철학이나 자기가 인간이라 여기는 사람한테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거예요.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것은 우리는 또다시 순교할 대상자로 분류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짓을 한 게 아니고 자꾸 예수님 피를 공급해주니까 이거는 내 인생도 내 마음대로 못해요. 그리스도의 피가 오니까 나를 반대하는 사람보고 나도 당신 이해하거든. 나도 당신 같은 사람이니까. 저쪽에서 하는 말이, ‘빨리 거기서 나와.’ 이러고 있어. 나오려야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 또 어디로 갈 건데. 순환구조에 뺑뺑 돌아서 어지러워서 치매 걸려 죽는데.


주는 성령을 안 받을 수가 없어요. 와 버리면 예수님의 피가 거기에 온통 차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한데 그 죄가 어느 정도냐 하면, 주께만 죄졌는데 그것이 저주받아 마땅한 거예요. 그런데 이 저주성은 바로 십자가에 죽은, 저주를 받을 필요도 없는 분이 받은 그 저주와 같은 류의 저주에 우리가 합류된 겁니다. 세례란 이름으로, 성령과 연합된 이름으로. 다윗은 미리 연합됐고 우리는 나중에 연합됐고.  


그 저주에 합류해보니까 그때부터 우리는 들뢰즈처럼 나의 창조도 의미 없고, 라캉처럼 나의 주체도 의미 없고 오직 주님께서 날마다 살려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체만 우리 안에서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다. 그 문장이 법으로 작용하지 말고 피로써 우리는 피가 있기에 피 때문에 내가 바로 주님을 죽인 핍박한 가해자라는 고백이 평생 동안 이어지면서 우리는 외부로 예수님의 피만 증거되면, 바로 교회가 뭡니까?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성령께서 그걸 하나님이 친히 지켜내시는 교회, 그것만 천국에 합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른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 수도 없이 태어난 목적도 이유도 모른 채 남의 것이 부러워서 남이 갖고 있는 행복과 즐거움이 내 것으로 이전하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다가가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속이고 하나의 마스크, 가면처럼 가면 쓰고 저희들의 순환되는 되풀이 되는 인생이었는데 그 속에 주께서 십자가로써 작살로 꽂혀서 피가 우리 속에 순환되기 시작하니 주여, 아무리 살아도 죄인이고 일년을 살아도 죄인이고 천국 가도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의인되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내 것이 없는 오직 주의 것만 구원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사오니 성령 받아서 주님의 증인으로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저서 & 기타(이근호) > 들뢰즈와 라캉과 개혁주의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0) 2011.04.28
3  (0) 2011.04.28
2  (0) 2011.04.28
1  (0) 2011.04.28
개혁주의 신학과 들뢰즈와 라캉 철학의 관계  (0) 2011.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