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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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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4a 봄특강 - 들뢰즈와 라캉과 개혁주의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음성1  동영상1 

 

녹취:한윤범


시작하겠습니다. 


성경 한 구절 볼게요. 사사기 6장 32절에 보면,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단을 훼파하였은즉 바알이 더불어 쟁론할 것이라 함이었더라”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바알이라 하는 것이 허구에 불과하다. 허구에 불과하다면 허구로 남겨두면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허구인데 관여 안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꼭 인간이 바알단을 훼파해야 될 이유가 뭔가? 그것은 이스라엘 땅이 약속의 땅인데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생존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은혜의 출처가 여호와로부터 나온다고 그들은 알고 있어요. 여호와로부터 은혜를 받아서 생존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안다고 해서 과연 그 백성들이 은혜의 출처를 아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우리가 생존하는데, 땅이 있는데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것이 어떤 대가에 의해서 생존하는데 은혜가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원천, 원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건성으로 알고 있지만 이 자리에 바알 신이 있단 말이죠. 이 사람은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덕분에 살아가지 바알 덕분에 살아가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순간 이 바알을 깰 이유가 없다니까요. 바알은 허구니까. ‘바알은 상관없습니다. 바알 안 섬깁니다.’ 그렇게 되면 과연 원천을 제대로 아는 거냐 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산다는 자기 자신이 원천일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바알을 그냥 허구니까 우상은 허구잖아요. 아무것도 없는 거잖아요. 그럼 놔두면 된단 말이죠. 바람과 같이 공기와 같이 놔두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우상을 깨는데 누굴 동원시킵니까? 인간을 동원시켜서 그게 허구임을 지적하게 만들죠. 그런데 막상 기드온이 깨니까 그냥 허구를 깬 겁니까? 아니면 불안합니까? 대낮에 못 깼죠. 밤에 몰래 깨잖아요.


그건 뭘 의미하는 겁니까? ‘하나님, 이제 아시죠. 전 절에 안 갑니다. 그러니까 은혜만 팍팍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는데 막상 하나님이 허구라고 여기는 것들과 밑바닥에서는 어떤 두려움, 공포 아니면 그들에 대한 이용, 그들에 대한 의지, 그들의 혜택, 이런 것을 은근히 노리고 있다는 것이 들통 나죠.


이 우상, 바알 누가 세웠습니까? 바로 인간에서 흘러온 인간의 어떤 의도 때문에 세워진 거잖아요. 세워놓고 하는 말이, 자기가 관리해놓고, ‘저건 허굽니다. 우린 부처 안 믿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하는데 우리는 부처를 믿는 게 아니라는 그 의도나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삽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하나님 때문에 산다고 하지만 막상 교회라는 허구를 깰 때는 뭔가 ‘손대지 마. 그것 보통 밑천 들어간 게 아닙니다.’라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그것, 그것은 바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알지를 못하죠. 뭘 모르느냐? 대가성, 그 대가가 어디서 나오는가를 모르는 겁니다.


받아 챙기기는 챙겼는데 그것만 되게 좋아하고 실상은 우리에게 은혜가 주어지기 위해서 허구적이 아닌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나는 허구가 아니라고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저쪽 부처는 허구고, 나는 진실이야.’라는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허구라고 여기던, 진실이라고 여기던 그걸 손대고 부정함으로써 진실로 하나님은 하나님 됨을 원천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 부정하면서 끊어나가면서 인간이 거기 가담하다보면 나중에 그 부정하는 작업에 대해서 누가 불만을 갖고 있느냐 하면, 평소에 하나님의 혜택과 은혜를 듬뿍 받는다는 본인이 도리어 허구를 허구로 제거하는 작업에 훼방꾼으로 등장하죠. 그렇게 평소에 ‘하나님 은혜로 삽니다. 나는 하나님 은혜 아니면 못 삽니다.’ 그렇게 해놓고 막상 우상 삭제작업에 나서니까 누가 극구 거부하고 반박하느냐 하면, 바로 우리 자신들이 거부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내가 이만큼 했는데, 이만큼 드렸는데 이것밖에 복을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해서 평소에 은혜의 원천은 하나님만이 원천자가 아니고 거기에 나도 많이 기여한 것을 왜 안 알아주느냐는 식으로 등장하죠.


그렇게 되면 오늘 우리 주제가 되는 도대체 인간 속에 철학이 허구입니다. 이건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고린도후서에도 나오고. 그냥 철학이 아니고 ‘헛된’ 철학이죠. 누구 앞에서 헛된 철학입니까? 방금 우리가 배웠잖아요. 바알 앞에서 여호와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헛된 철학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냥 ‘나는 이제부터 철학하고 안 놀아.’라는 걸로 헛된 철학을 이미 청산할 걸로 그렇게 자꾸 간주하는 거예요. 사실은 헛된 철학이 이쪽으로 몽땅 옮겨진 줄 모르고. 거의 다 옮겨졌는데. 그 옮겨진 내막을 지금 제가 소개하는 겁니다. 개혁주의신학이란 이름으로 옮겨진 철학.


개혁주의신학은 여러 번 했지만 전부다 하나에요. 역사지요. 역사는 몸의 긴 그림자. 노을 끝에 서게 되면 우리의 그림자가 길게 느껴지죠. 태양이 바로 위에 있으면 짧게 느껴지죠. 젊은 애들은 역사라는 게 없어요. 지금 당장 무엇에 자기의 힘을 과시할까 정신없지만 연세가 팔십이 넘고 하면 역사가 노인이 되면 긴 역사가 되죠. 원래 겨울철에는 그림자가 깁니다. 여름에 한참 활기찰 때 열기가 있을 때는 짧고. 그처럼 인간의 긴 그림자가 역사라 할 때 이 역사철학이 그대로 개혁주의신학에 들어가 있음에도 자기는 하나님 덕분에 산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개혁주의신학이 헛된 철학이라고 손댈 때 근거가 있어야 되겠죠. 이 근거를 기드온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인간이 우상이라고 헛되다고 이미 간증이 된 것을 깨는데 손수 참여시킨다. 지시를 하는 거예요. 지시를 하게 될 때 여기에 분명히 우상인 줄 알면서도 나와서 깨고 보니까 뭔가 도망치는 게 있더란 말이죠. 겁나서 벌벌 떨더란 말이죠. 마을 중앙에 있는 바알, 아세라 상 누가 깬 거야? 할 때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있는 겁니다. ‘이러다 내가 죽지. 이러다 내가 생존 못하지.’


방금 생존은 누구한테 있다? 여호와한테 있다고 해놓고 이 일을 자기가 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먼저 시비 걸고 나옵니다. 결국은 헛된 철학은 하나님의 시비 거심이죠. 이 시비 거는 것이 계속해서 새로운 철학이 나와 유행하면 거기다 시비 걸고, 새로운 사회적 사명 나오면 거기다 시비 걸고, 모든 언어와 개념들이 나오면 거기다 시비 걸어요. 언어와 개념은 나중에 들뢰즈하고 라캉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시비 거심이 멈추질 않습니다. 활동성이 있죠. 하나님의 시비 거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철학이라는 것이, 인간이 지어낸 모든 것이 십자가를 어리석다고 모독하는 용도로만 그들이 사용되기 때문에 십자가로 비빔밥을 해놔도 그것이 결국은 몇 분 지나지 않아서 곧장 철학으로 변하는 겁니다. 철학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십자가 신학조차도 철학으로 변모되는 계기가 뭐냐? 무슨 힘으로써 그렇게 될까?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이 두려워서 그들은 주님과 동행하기보다는 십자가신학을 쥐려고 하고 소유해야만 안심하는, 소유하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는 그 이유가 뭐냐 말이죠.


소유하려면 접시에 담겨야 하는데 그 접시노릇을 톡톡히 주체가 하죠. 주체에서 뭐든지 십자가든, 언약이든 담기면 그걸로 안심하고자 시도하는 철학적 본성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우상은 뭐냐? 바깥의 헛되다고 욕하는 그것에 참여시켜서 우상파괴에 참여하는 인간 몸으로 우상의 의미가 전이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죽인 자는 바알이라는 몽둥이도 아니고, 바알이라는 쇳덩어리, 구리덩어리가 아니라 누가 예수님 죽였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그렇게 천국에 가까이 가 있는 것처럼 인정되는 바리새인들, 율법사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렇다면 마지막에 십자가 앞에서의 우상의 정체는 폭로되었죠. 바로 인간이 우상이었다.


그럼 제자들은 왜 달려들지 않았느냐? 기껏 베드로가 하는 것은 칼 들고 말고의 귀를 베는 건데 그건 두려움이죠.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베는 그 순간 행동을 함으로써 평소에 예수님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최후의 마지막 그래도 약간 칼은 있어야지 나름대로 평소에 살아왔던 것이, ‘역시 힘이 있어야지 사람은 안심이 돼. 힘이 없으면 불안해서 못 살아.’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도 늘 그런 생각을 품어왔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마지막 보이는 무기는 칼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기의 헌신이 최후의 무기였습니다. 주께서 그 무기 안 받잖아요. ‘순교해서 날 따라 오겠다고? 네가 순교해봤자 너는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해.’ 순교해봤자 못 온다는 말은 몸을 다 바쳐봤다 그건 우상에 불과한 거예요. 결국은 그 우상 덩어리로 예수님과 동행했고, 재산 다 바쳐서 삼년 동안 주의 제자로 살았고, 제일 예수님과 가까이 했지만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몸을 우린 아담으로부터 공히 저도 그렇고 다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철학을 벗어날 수 없어요. 다만 어떻게 해서 어떤 언약이든, 신학이든 용어야 기똥차지요. 그 좋은 용어들이 이 몸이 살아있는 한, 이 접시 담기면 어떻게 그것이 도대체 몸에서 어떤 작용을 해서 곧장 우상으로 변하느냐 말이죠. 변하면 성령께서 가만있습니까? 다시 와서 새로운 어떤 사건을 맞닥뜨리게 해서 평소에 우리는 너 없이는 내가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자기 속내를 톡 튀어나오게 만들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활동하는 것과 예수 믿는 우리가 활동하는 것과는 엄청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렇게 하고 들뢰즈 철학에 들어가겠습니다. 들뢰즈란 서양사람 이름이죠. 프랑스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뭐가 그렇게 지금 4,50년 동안 대단하냐? 뭐가 대단한 게 있다고 유명하고 이 사람을 거론해야 되는가? 그 사람이 다른 철학자들과 차이 나는 게 뭐냐? 딱 하나 있어요?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거예요. 이게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면, 접시에 담길 때, 이게 나죠. 내가 접시에 담기면 그냥 담기는 게 아니고 일단 담기면 ‘나의 것’이 돼요. 나의 것이니까 여기 앞에 ‘나’가 있죠. 뒤에 ‘것’이 있죠. ‘의’ 이걸 동일시 또는 동질성이라 합니다. 이 동질성을 들뢰즈는 거부하는 겁니다.


사람이 세상에 대한 진리, 이 시대에서 과학이 진리니까, 과학을 안다 해놓고 그 과학을 공부하고, 배를 만들고, 여기 교재에 나왔듯이, 새로운 의약품을 제조하고, 뭘 해도 결국 그것은 다 각자각자 ‘나의 것’으로 끝날 때 이게 무슨 오늘날 우리 인간에서 찾을 수 있는 윤리와 도덕이 제구실할 수 있는 철학이냐 말이냐? 이게 무슨 윤리냐? 자기 주먹, 자기가 흔드는 게 무슨 윤리냐 말이죠. 동질성이니까.


여기 ‘나의 것’에다 ‘국가’를 집어넣읍시다. 예를 하나 들어봅니다. 아버지와 나 사이는 내가 아버지를 선택할 수 없어요. 아버지가 고정돼있으면 나는 자동적으로 고정돼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것은 홍길동 이야기고, 결정된 거예요. 그런데 국가를 봅시다. 국가는 한 번 태어난 거기에 자기의 시민권을 얻지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국가가 배신할 때는 국가에 메일 필요 없어요. 국가를 내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국가보다 내가 더 센 거예요. 국가가 나를 실망시킬 때 나는 떠나는 겁니다. 전에 핸드볼 여자 선수 이민 갔잖아요.


그런데 국가가 나의 것 할 때 이게 사람들이 들으면 말이 안 돼요. 인구가 4,800만입니다. 4,800만이 자기 것입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이웃집 아저씨도 자기 것 아닌데 4,800만 대한민국 국민이 다 자기 것 아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국가를 끄집어내버리면 국가는 나의 것, 태극기 앞에서 눈물 흘리며 감격스러워 울지요. 왜 그러냐 하면, 이것이 4,800만 성격 다 다르더라도 어제까지 싸웠더라도 대한민국이라는 태극기 앞에 전부다 이렇게 하고 있단 말이죠. 이게 바로 동질성이 되는 거예요.


동질성이란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내가 속하든지, 그쪽이 내게 속하든지 어쨌든 간에 ‘나는 한 통 속이고 싶다’는 데서 나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 국가가 성립되게 되면 뭐가 깨지게 됩니까? 바로 일본과의 윤리성은 안 되죠. 그러면 인류를 살릴 수 있는 완벽한 진리, 다시 말해서 온 인류와 더불어 함께 있는 완벽한 진리에는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일본과 한국이 싸우면 우리는 한국 편을 들죠. 축구를 해도. 왜냐하면 한국은 나의 것이라 했으니까. 그러면 여기서 뭐가 빠진 거예요? 대한민국은 내 것이라 할 때는 이 앞에 반드시 일본은 나의 나라가 아님이 빠졌죠. 그래서 들뢰즈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뭔가 저것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 잘라내는 토막 내는 부분을, ‘일본이 물에 잠기든지 몰라.’ 하고 뭔가 내 쪽에서 나한테 필요 없다고, 나한테 해롭다고 잘라내는 게 있어요. 그게 ‘차이’라는 거예요.


치이를 무시하고 일단 내 것 된 것은 존중하죠. 성경에 나오잖아요. 마태복음 6장에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 둘 다 좋아한다? 성립이 안 되죠. 둘 다 미워한다? 이것도 성립 안 되죠. 한 쪽을 사랑했다는 말은 뒷발로 다른 쪽은 차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들뢰즈가 기독교를 공격한 거예요. 들뢰즈의 스승이 있습니다. 니체란 사람. 니체가 그렇게 기독교를 공격하는 겁니다.


기독교 나라 된 유럽이 아프리카를 잡아먹은 것은 이유는 단 한 가지, 아프리카는 토속종교지 기독교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건 잡아먹는 것이 하나님 뜻이 되는 거예요. 왜? 함족이니까. 그것도 예수도 안 믿는 족이니까. 독일 사람들이 유대인을 죽인 것은 유대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기독교 독일이 유대인 오백만 죽이든, 육백만 죽이든 아깝지 않아요. 왜냐하면 짜투리, 버리기로 작정한 인종이기 때문에 그걸 버릴 때 확실하게 버려줘야 그것이 더욱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죠.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 핍박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었습니까? 대충 어설프게 잡은 게 아니고 확실하게 사람 많이 죽였어요. 그래야 하나님과 자기는 동질성이 유지되죠. 이러한 동질성이 인류를 각자각자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그것의 극대화가 자본주의인데 자본주의는 자기한테 이익이 최고의 진리입니다. 나한테 이익 없으면 자본주의시장 자체가 형성이 안 되니까.


얻어놓고 난 뒤에 베푸는 것은 소용없어요. 일단 이건 네 것 아니고 내 것, 내 것 챙겨놓고 그 다음에 베푸는 것은 지도층의 배려인 거예요. 배려해준다는 말은 그만큼 지도층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고 지도층끼리의 동질성은 유지되는 겁니다. 어디에 한복 입고 신라호텔에^^ 거기에 어떤 멤버십이 있는데?


그래서 들뢰즈는, 우리가 쓸데없다고 버린 그 차이를 그냥 쓸데없다고 버렸기 때문에 진짜 진리와 점점 멀어지고 독아적이다. 나의 독립적이다. 오직 나만이 우뚝 솟는 식으로 살아간다. 그게 [천 개의 고원] 고원이 천 개. 만 명 같으면 만 개 되겠죠. 각자각자. 물론 천 개의 고원을 들뢰즈가 부정하는 건 아니고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이 시대를 다 뭉개고 기독교로 통일하면 그게 독재가 되죠. 그걸 파시스트라 하죠. 파시스트란 말 알죠? 이태리 독재.


그러니까 방법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천 개의 봉우리를 인정을 해주자. 그런데 연결점이 안 되면 인정이 안 되잖아요. 왜냐하면 연결점 없으면 이쪽 봉우리와 이쪽 봉우리를 잡아  당길 수 없잖아요. 봉우리 자체를 연결고리로 하자. 그러면 모든 동질성을 동질성이라 하지 말고 차이1, 차이2, 차이3으로 해서 전부다 차이라고 하자. 차이라고 했을 때 어떤 윤리가 성립될 수 있느냐 하면, 현재 만약에 차이2가 나라면, 나라고 여기는 것도 깨어져서 독립할 때 우린 어떻게 돼요? 그걸 존중해줄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왜냐하면 자기도 언젠가 여기서 또 떨어져나갈 수 있으니까. 떨어져나가면 또 존중해주면 될 것 아닙니까.  


이게 들뢰즈가 지향하는 들뢰즈의 철학이라는 겁니다. 다같이 존중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겁니다. 내가 당신의 의사를 존중해준다 하면, 그건 들뢰즈의 윤리 철학이 됩니까? 안 돼요. 왜? ‘내가’라고 할 때 이미 뭘 전제했습니까? ‘내가 너 용서해줄게’ 할 때 듣는 사람 기분 더럽습니다. 대번에 돌멩이 들어요. ‘건방지게 니가 뭔데 감히 날 용서해줘.’ 그러면 뭘 어쩌란 말인가?


‘나’라는 것을 제거를 하자. 각자 나의 봉우리에서 이게 차이가 지면 나라는 자체를 없애버리자 말이죠. 그래서 들뢰즈가 알랭 바디유와 다른 철학자들한테 비판받습니다. 이걸 일원론이라 합니다. 원리가 하나밖에 없는. 이건 뭐냐 하면, 이걸 나라고 하지 말고, ‘나’라는 게 주체거든요. 나라는 것을 녹여서 아예 죽으로 만들어요. 각설탕을 국자에다 연탄불에 해서 뽑기 하는 것처럼 그러면 각설탕이 다 녹아서 액체가 되죠. 그래서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것은 액체인생. 액체보다 더한 것이 ‘기관 없는 신체’라는 유명한 말을 한 거예요. 지젝은 이걸 반대로 ‘신체 없는 기관’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만.


내가 널 용서한다는 것이 성립 되지 않는 윤리가 되게 하자. 아예 나 자신을 없애버리자. 어떤 사람은 이걸 듣고 그건 불교 아닙니까? 바로 그게에요. 불교입니다. 들뢰즈의 책에서 자기가 불교고 뭐고 간에 다 참고의 대상은 되지만 자기가 불교에 전적으로 매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불교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공격한 사람은 들뢰즈가 아니고 지젝이란 라캉 쪽 사람이 아주 공격했습니다. 지젝은 말하기를 나를 없애려면 ‘나는 없다’ 이래서 없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없다’는 인간이 어디 있는가 찾아보자 하면 숨어서 ‘나는 없다’ 이게 말이 돼요? 타조가 고개 숙이고 나는 없다면 말이 안 되잖아요. 지젝이란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타인이 없으면 나를 없앨 수 있는 그런 바탕도 마련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라캉이 발견한 겁니다. 최근에 강조한 거예요. 나라는 것은, 나는 여기 있다고 백날 우겨도 그것은 반드시 타인을 의식해서 나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고 본 겁니다. ‘나는 저 사람 아니거든.’라고 표현해서 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란 말이죠. 그런데 불교에선 말도 안 되게 ‘무아론’ 내가 없는 것. 내가 없다니. 내가 없다고 말하는 너는 어디 있는데? 이게 사기란 말이죠.


이러한 점에 대해서 들뢰즈가 어떤 대책과 해결점을 내놨는지를 설명할게요. 나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지금까지 들뢰즈가 제시한 걸 정리해봅시다. 이 세상이 이렇게 악하게 된 것은 동질성 시도. ‘어디까지가 내 것이야? 어느 사람이 내 편이야? 내 권한은 어디까지야?’라고 자기가 여기 세워지고 거기다 힘을 끌어 모은 동질성, 이 동질성 때문에 이쪽 집, 저쪽 집 전부다 이렇게 해놓고 서로 교류가 없으니까 약자는 죽으나사나 약자고, 강자는 더욱더 강해지는 잡아먹고 삼키게 되었다. 그러니까 동질성을 없애야 된다.


없앨 때 여기서 베풀어주면, ‘여기 있다. 가져 가.’ 이러면 베풀어주는 걸 받아도 기분 더럽다 이 말입니다. ‘네가 뭔데 이렇게 하느냐?’ 그래서 들뢰즈의 대책은 나라는 주체를 없애버립니다. 어떻게 없애느냐 하면, 주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주체 이전에 뭐가 나왔느냐 보는 거예요. 주체 이전에 사건을 두고


그런데 이 사건은 뚝 떨어진 사건이 아니고, 불트만이나 칼 바르트는 사건이 신에서부터 오잖아요. 그런데 들뢰즈는 그걸 인정하지 않아요. 신에서 계시 온다는 걸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면 사건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 여기서 ‘잠재성’이란 유명한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거는 ‘지속’이라는 쭉 가는 것, 지속된다. 한결같이 쭉 가는 것. 잠재성에서 나오는 지속으로 인하여 사건이 나오고, 그 사건이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중요한 점을 하니까 천천히 하겠습니다.


강물이 있는데 강물은 흐르니까 지속이죠. 옛날의 동질성으로 봤을 때는 인간이 여기 있다 합시다. 이러면 쉽습니다. 강물이 흐른다고 할 때 누가 보기에 흘러요? ‘나’ 나가 또 생겨버렸잖아요. 아무리 말을 빨리해서 강물이 흐른다 해도 누가? ‘나’가 된다고. It's raining. 비가 온다 할 적에 그냥 비 오면 되는데 앞에 'It' 그것, 주체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강물이 흐른다 할 때에 강물이 흐른다 하지 말고 강물에 들어가는 거예요. 강물이 흘러가는데 그 강물 중에 하나가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라는 강물도 있지만, 너라는 강물도 있고, 그녀의 강물도 있고, 아저씨의 강물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뭘 느낍니까? ‘여러분들이 합쳐서 하나의 강물이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 아저씨가 나한테 ‘돈 10만원 빌려주세요.’ 하면, 우리 보기에는 나에게 이 아저씨가 돈 빌리러 오는 게 되지만 들뢰즈는 어떤 다른 질의 강물이 다른 강물한테 돈 빌려달라고 이야기한 게 된단 말이죠. 그러면 이건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로마서 8장에 나오잖아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또 불교로 이야기하면 모든 것이 우리의 만남은 인연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인연이라는 말과 우리의 만남은 하나님의 예정된 뜻이라는 것과 차이점이 뭡니까? 똑같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만남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것은 결국은 그 접시 위에 주의 성경말씀은 철학이 되고 우상이 돼버린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은 누구를 위해서 통일되게 돼있다? 예수님으로 통일되는데 우리는 살다보면 이것도 인연입니다. 참 ‘인연’은 불교 말이다. 달리 바꾸면 옳지, ‘하나님 뜻입니다.’라고 하면 결국 그 주인공은 나 좋으라고 하나님께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심이 되는 거예요.


이것이 이기주의라 하지만 이것을 철학을 공부해보면 전부다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있는 납득이 되는 쉽게 말해서 십자가를 또 다시 어리석게 만들 수밖에 없는 이해가 되는 하나의 내가 갖고 있는 나에서 나온 철학이다.


가만있으면 십자가를 다 믿어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너를 정죄한다 하면 그 다음부터 그 십자가는 안 믿고 괜찮은 십자가를 믿게 되죠. 그리고 진짜 십자가는 항상 우리에게 ‘그따위 십자가 누가 믿어?’ 어리석음으로 계속해서 손에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겁니다. 왜 그렇게 빠져나가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예수 믿는 나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로 구원받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믿는 나로 인하여 구원받지 못하게 자꾸 빼는 겁니다. 왜 우리가 십자가 믿는 것으로 구원 못 받습니까? 우리는 본인도 모르게 이미 바알과 결탁된 철학자기 때문에. 철학요소가 들어있다 이 말입니다.


좀 더 이야기해봅시다. 이렇게 지속이 되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 들어오는가? 지속은 비동질성이고 여러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이걸 제가 아까 차이라 했지요. 모든 걸 차이라는 용어 속에 죽처럼 녹아버려요.


동질성으로 가버리면 어떤 상태가 되느냐 하면, 시간론에 있어서, ‘타이밍 멋지네. 맞아. 이 시간은 내가 커피 먹을 시간이야.’ 서울에 있는 윤○○집사님과 이야기했는데 자기는 기도하는 시간을 알람을 해놨답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알람을 했을 때 오후 2시인가 그랬어요. 그 시간은 누굴 위한 시간이죠? 자기를 위한 시간이죠. 그러면 자기란 동질성을 위한 시간이죠. 그 시간에 남이 뭘 하든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그 시간은 내가 기도만 하면 되니까.


시간 또는 시각 이런 것들이 결국은 그 시간 안에서 주인공을 위한, 섬기기 위한 시간이라면 결국 그 시간은 타인을 위한 배려가 되지 못하고 타인을 핍박하는 일방적인 자기 시간이란 겁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런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해서 유명한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란 작품으로 시간이 아니라 지속이라고 설명해요.


그러면 들뢰즈가 설명한 걸 제가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이건 흔히 우리가 느끼는 거니까. 희한한 걸 우리로 행하라는 게 아닙니다. 들뢰즈는 행하라는 게 없어요. 있는 그대로 보라는 거예요. 자꾸 내 중심으로 보게 되면 차이성을 핍박하고 ‘저리 가’ 하고 나와 상관없다고 깨지니까.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결혼식 파티에 참석해서 과자 하나를 먹는 순간 그 사람은 일곱 살 때 먹었던 그 과자 맛이 생각나면서 일곱 살 때 과자 먹던 정경이 확 머리에 다 떠오르는 거예요. 들뢰즈는 ‘바로 저거다.’라는 거예요.


강물 같이 흐르는 이 시간에서 나는 현재 시간은 과자 먹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과자를 먹는 순간 그 맛을 느끼는 20년 전, 30년 전 사건이 오면서 과자 맛뿐만 아니고 그때 과자를 주던 돌아가신 이모님 원피스까지 생각이 다 나버려요. 생각난다는 말은, 지금 우리는 나 중심의 하나의 시간을 잡았지만 원래 시간은 없고, 여러 가지 다양한 질의 기억들과 추억들이 나란히 강물에 흘러갔더란 말이죠.


그런데 나도 그중에 같이 휩쓸러 가다보니까 그걸 따라서 지금까지 알았던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전부다 기억된다는 것은 지나온 과거라는 것이 없고 과거는 바로 내 밑에 있는 거예요. 과거는 현재에선 지나가지만 절대로 지나는 것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 나와 더불어 가는 이걸 시간이라 하지 말고 ‘지속’이라 하자 말이죠.


들뢰즈가 별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경험들을 하고 있는데 지난 20년 전 과자 맛 알아서 지금 도움이 됩니까? 안 되죠. 우린 그것을 뭔가 삭제하면서 20년 전의 과자 맛은 지금 도움이 안 되니까 그걸 핍박했죠. 그걸 제거해서 나머지로 지금의 진리라고 우기는 것은 진리에 대한 모독이라고 보는 겁니다.


서로 다른 질이 한 덩어리 되어서 지속 속에 같이 살아가면서 마치 너는 나를 위해서, 너는 나를 위해서, 전부다 나를 위해서 하고 상대방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은 나를 위해서. 부부싸움도 마찬가지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잖아요. 만약에 애가 세 명이고 부부가 두 명이라면 그 식구 하나하나가 전부다 ‘나를 위해서’ 하는 잘못된 교육에서 나오는, 잘못된 교육의 원천이 뭐냐? 네 스스로 서라는 동질성 철학에 바탕 한 교육철학이 지구 현재 인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냥 공자, 맹자로 아버지를 공경하라면 안 돼요. 왜? 아버지를 공경하면, 아버지 공경한 주인공은 누굽니까? 자기잖아요. ‘나 아버지 공경하니까 유산 가운데 내가 제일 많이 차지해야 돼.’ 분명히 나온다 말이죠. ‘형들은 아버지 치매 걸려도 전화 두 번 걸고 끝나고 나는 나 할 일 다 했다. 마땅히 아버지 유산 반은 내가 가져야 된다.’ 할 때 ‘오냐, 그래라.’ 하는 형제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게 미쳤나. 법에 고소해서 똑같이 받아내지. 결국 아버지는 지속 속에 사라지고. 지속 속에 살아진 아버지가 한 10년 뒤에 다시 떠올라서 그때 미안해서 ‘아버지!’ 소주 까고 그러죠.


제가 광주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제사제도라는 것이 조상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에 지속된 아버지에 투자했던 자기의 위치를 계속 유지할 때 뭔가 떨어져나간 결핍을 보충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계속 제사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한테 너무 허전하기 때문에 제사지내는 겁니다.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여기 계시고, 아버지, 낙지 좋아하시던데(사실은 자기가 좋아하면서) 이것 드세요.’라고 효도 노릇하는 이유가 죽은 아버지 동원시켜서 자기의 자아성을 흩뜨리지 않고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 짓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자식도 본받을 때 자식은 제사 드리는 만큼은 아무리 자식이 본다 해도 아버지가 제사장 되는 제사에는 컴퓨터게임 적게 하고 일찍 옵니다. 그만큼 질서 잡히는 거예요.


그래서 들뢰즈가 말합니다. 결국 가정에서 질서잡기가 넓혀지면 국가에서 질서잡기, 학교에서 질서잡기, 군대에서 질서잡기 그것이 해병대 패는 거고, 결국 파시스트, 폭력주의자, 독재주의자를 온 천지에 전염시키고 구제역처럼 오염시키는 동기가 된다는 것이 들뢰즈의 하소연입니다. 뭐 복음 치우고 들뢰즈 철학 따르시든지^^


그렇다면 교회에서 개혁주의신학에서 성화론 이야기하면서 성화론의 구체적 내용으로 어깨동무하면서 ‘사랑하는 형제~’ 이렇게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믿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결국 십자가 믿는 우리끼리 이상적인 공동체를 일궈보자. 그 안에서는 동질성이 되겠죠. 다른 질은 용납이 안 되죠.


이 모든 것이 바로 순간순간 나라는 게 나왔는데 나라는 것은 바로 사건 터지고 난 뒤에, 사건 터질 때는 나가 없어요. ‘그게 무슨 사건이지?’ 뒤돌아보는 그 순간 나가 생겨요. 학생이 열심히 공부할 때 나를 잊어버려요. 그때 엄마가 ‘밥 먹고 해.’라고 부르는 그 순간 공부하는 나가 체험이 되죠. 그러면 그건 하나의 사건이잖아요. 엄마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돌발적인 다른 질의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는 소급해서 ‘지금까지 내가 뭐했지? 공부했지. 엄마, 책 더 보고 갈게.’라고 자기의 주장을 하는 겁니다.


자기주장을 할 때 나오는 게 언어죠. 언어인데 주로 vox, 발화, 말 하는 것, 말로 이야기하죠. 이건 어려운데 자기가 말 한다. 또는 몸짓으로 한다. 또는 말을 안 하고 --- 이렇게 한다. 전부다 말인데 넓게 보자는 겁니다. 넓게 보면 그게 ‘기호론’이 돼요. 기호론이 되면 결국 인간은 언어라는 문법체계에 잡힌다는 겁니다. 들뢰즈하는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 


제가 실제 있었던 건데 전화로 ‘여보세요’ 할 걸 ‘여보’ 했단 말이죠. 버릇이 돼서. 그건 말실수죠. 그런데 실수라고 잡아내는 그 체제가 내 뜻이 아니고 나를 둘러싼 언어체제, 그걸 랑그라고 해요. 언어체제가 그렇게 한 거예요. 그리고 언어체제 상 실수한 게 되잖아요. 그런데 내 본심은 ‘여보’라고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은 게 돼요. 그럼 누구 잘못입니까? 언어체제 잘못이에요, 내가 잘못이에요? 언어체제가 잘못된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언어로 강요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미 같은 언어체제에 동의해야 같은 편으로 쳐주는 또 동질성이 거기 있는 겁니다.


그 언어체제에 잡히는 그 순간 우리는 다시 한 번 ‘저, 말실수했어요? 안 했어요?’ 하는 동안 나가 튀어나와요. 그러면 그 앞에서 실수를 줄여야지 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어떤 지속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만의 공간, 자기만의 시간을 또다시 챙기는 거예요. 바보같이. 일기 쓰자. ‘오늘은 여보세요라고 할 걸 여보라고 했다.’


일기를 쓰게 되면 그건 다른 차이를 핍박하게 되죠. 어떻게 핍박합니까? ‘일기장 좀 보자.’ 하면, ‘안 보여줘.’ 일기 쓰도록 도와준 건 누굽니까? 난데없이 전화한 그 사람도 도와줬고, 숱한 사람들, 일기 쓰도록 밥해 준 엄마도 있는데 그런 것 다 치우고 일기는 내가 썼다고 자기가 모든 일기 한 장 쓰기 위해서 도와줬던 많은 에너지와 도움들을 다 차단시켜버리고 그것은 그 사람의 몫인데 그걸 누가 가져옵니까? 내가 가져온 거예요. 나는 일기 썼다. ‘이건 내 일기야.’ 하고 또다시 자기한테 소유하면 소유하기 위해서 나라는 접시가 필요하니까 또 주체가 되죠.


이 주체는 없앨 수 없지만 항상 사건 터지고 난 뒤에 소급되니까 사건에서 주체 만드니까 다시 우리는 사건에서 오는 나에게 오는 방향성을 사건 배후로 바꾸면 된다. 그건 항상 숨어있는 잠재성이라서 ‘내가 잘못됐구나. ‘여보세요’ 해야 되는데 ‘여보’라고 했구나.’라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또다시 5년 뒤에, 10년 뒤에 또 나오는 거예요. 왜? 잠재성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여보세요’만 나오는 게 아니고 ‘가시나야’ 이럴 수가 있다고요. 이건 자기가 아홉 살 때 심었던 단어가 같은 강물의 흐름에 있다가 전화 받고 난 뒤에 지금까지 욕 한 적 없는데 욕이 튀어나온다 말이죠. 그걸 반성하죠.


그러니까 반성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반성한다는 것은 또다시 ‘가시나’라는 단어에 불과한데 이것이 욕이라고 누가 지적해요? 그 동네 동질성에서 이걸 지적해요. ‘그건 욕이니까 하지마라.’ ‘나는 ㄱ에다 ㅏ에다 나밖에 안 했어.’ ‘그래도 욕이야.’ ‘아니 나는 ㄱ에다 나에다가’ ‘욕이라니까.’ 누가? 우리 편이. 그럼 말 안 들어? 말 안 들면 동질성에서 안 놀아. 왕따 돼버렸잖아요.


이게 들뢰즈 철학입니다. 그렇다면 교재 중심으로 해봅시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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