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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4d 봄특강 - 들뢰즈와 라캉과 개혁주의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녹취:한윤범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새롭게 요구를 더러 반영해서 추가된 나의 새로운 주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출발점이 원래 모호했던 것이 모호하지 않고 s가 주체니까 주체로부터 시작해서 올라가서, 다시 합시다. 타인의 요구에 의해서 그걸 호응해서 만든 새로운 주체를 그림으로 그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겁니다. 타인의 요구니까 깨진 주체가 올라가서 요구(demand)와 상상계와 동일시해서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해서 출발했는데 이것이 S(A) 불가능한, 기표는 항상 요구해요.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이, ‘너는 나를 사랑하란 말이야.’ 할 적에 사랑하란 말이 무슨 뜻인지, 좋아한다는 말입니까, 억수로 좋아한다는 말입니까, 억수로 억불로 좋아한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것도 여러 질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이 온전치 않고 불가능한 요구가 되고, 요구를 반영하면서 생긴 것이 나는 타인에 의해서 하나가 동일시됐다 이렇게 내려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자리가 원래 무슨 자리였습니까? 모호했던 것이 주체가 만든 자리잖아요. 이 주체 자리에 지는 흐믓해 하는 거예요. ‘나는 요구를 들어줬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누구 마음대로? 이 요구와 조합되는지, 안 되는지 지가 어떻게 장담합니까?


이 기표란 것이 한 마디로 법이에요. 골자는 이겁니다. 왜 법을 지켜야 됩니까? 법을 왜 지켜야 되느냐? 일 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피조물의 마땅한 도리로서. 더 분명하게 법은 왜 지키느냐? 법이 없으면, 타인이 없으면 내 주체가 용납이 안 돼요.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안에서 주체가 분열되기 때문에 ‘아니야. 이게 다가 아니야.’ 본인이 이걸 스스로 정착하지 못합니다. 그게 정상인이에요. 이게 다라 하면 보통 미친 사람이 아니에요.


‘이게 다가 아니야. 더 있을 거야. 뭔가 남아 있을 거야. 이게 법의 전부다 아닐 거야.’ 하고 새로운 기표가 등장하면, ‘역시 그거였어.’라고 돌아서면 얼마 안 가서 ‘아니야. 그것도 아니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나는 치킨집이 하나님 주신 직업이야. 아니야. 분명히 아니야. 노래방? 노래방이야 맞아. 바보같이 기도도 안 해보고. 노래방도 아니야.’ 자꾸 바뀌다가 세월 다 보냅니다.


재미있는 것은, ‘목사님, 모든 직업 다 그만두고 목사님 강의만 듣고자 합니다.’라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뭐냐? 강의 때려치우고 강의하는데 따라다녔으면 좋겠습니다. 돈 내고. 연금 타가면서. 결국은 뭐냐? 주체가 분리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욕망하고 있는 거예요. 왜? 쾌락이란 경험하지 않은 건 전부다 쾌락이기 때문에. 직업이 우리나라에도 4만 가지되는데 어느 세월에 다 맛봅니까?


그걸 얼추 한 사람이 있어요. 성경에 나옵니다. 누군지 아세요? 솔로몬이죠. 솔로몬이 다 해놓고 뭐라 합니까? 집 짓는 것도, 지혜롭게 사는 것도, 바르게 사는 것도, 뭘 누리는 것도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것이 성경에 나오죠. 그러면 뭐가됩니까? 이게 법이 되잖아요. 우리는 그걸 경험하지 못했죠. 우리 주체가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나도 한 번 해보고 나중에 가서 이야기해야지. 헛되고 헛되니 해볼란다.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성경을 보게 되면 법은 항상 우리에게 자극이 되는 거예요. 그 자극이 요구에요. 그 요구에 우리는 절대로 거부 안 합니다. 그 요구에는 새로운 쾌락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해병대에 왜 자원입대하는데? 이미 육군에 식상한 거예요. 적어도 하려면 귀신 잡는 해병대는 해야 되는 거예요. 이것은 국가의 요구가 아니고 본인이 아다리가 맞은 겁니다. 이제는 해병대로써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되면서 ‘나는 해병대다. 평생 자부심을 가진다.’ 평생 같은 소리하고 있네. 또 뭔 일 저지를지 몰라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결혼 몇 번 했습니까? 완전 사마리아 여인 같아. 일곱 번 결혼하고 일곱 번 이혼했죠. 다른 사람들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이것도 너무 하면 장난 같아.


그처럼 인간은 엄마 몸에서 뛰쳐나와도 엄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처음에 뛰쳐나왔던 그 원줄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엄마에게서 뛰쳐나와도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귀환의 장소로 있고, 일시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쾌락을 충족하기 위해서 새로운 소리를 듣고 거기에 맞춰가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맞춰가는 이미 기존에 있는 기표, 법 체제, 이게 상징체제인데 강한 상징체제는 요구가 있어요. 현실이 아니고 상징. 상징체제는 항상 새로운 걸 요구하기 때문에 완전히 그 자체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상징이 되는 겁니다. 또 무슨 상징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상징은 뭘 집어넣어도 말이 되는 게 상징이다.


결국 치환 그 다음에 응축, 특히 치환 같은 건 바꾸기, 자꾸 말 바꾸기. 말 바꾸는 농협 같아. 자꾸 바뀌어가는 그것이 우리의 오늘날 모습입니다. 그래서 죄라는 것은 말 바꾸었다고 죄가 아니고 처음부터 죄기 때문에 조금 말 바꾸었다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이래봤다 그것은 자체적으로 죄를 해소하는 잘못된 사고방식인데 그걸 정신분석에서는 ‘변태’라 합니다.


변태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조히즘 또 하나는 사디즘. 마조히즘은 얻어맞는데서 쾌락을 느끼고, 사디즘은 때리는데서 쾌락을 느끼고. 양쪽 다 쾌락에 대한 비정상적인 상태. 쾌락을 이동하면서 즐겨야 하는데 쾌락을 정착하면서 그 쾌락에 몸을 바칠 때 이것은 바로 정신병이 되는 겁니다.


패티즘이라 하는데 이건 도착증이라 해서 두 종류가 있는데 어떤 물건을 보면서 성적인 쾌감을 느끼는 것도 있고, 그 다음에 순서가 바뀌어서 어떤 변태적인 걸 느끼고. 어쨌든 간에 대상 앞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상실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나 교회에 없을 수가 없지요. 마리아 상 붙들고 울고 나중에 마리아 눈에서 피눈물 나온다. 마리아가 우는 것 같아. 마리아 동상 우는 게 패티즘이라, 변태에요. 지는 안 울고 저쪽에선 왜 우는데. 그중에서 약한 변태, 도착증에 어떤 게 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은 우리 가정의 주인이라 해서 중국에 눈 온 것 찍어서 예수님 나타났다고 돌아다니는. 그건 치료하기가 참. 치료하는 방법은 간단해요. ‘그 그림 말고 이 그림 괜찮습니다.’ 하고 김재성 집사님 그림 갖다 주면, ‘이것 괜찮네.’ 그래야 정상이라. 빨리빨리 순환을 해줘야 돼. 빨리 순환한다고 교회 바꾸지 말고. 계속해서 순환을 해줘야 돼요.


순환하는데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는 희망을 갖고 새로운 경험을 체험하는 아주 흥분된 마음, 두근대는 것, 설레임으로 하다보면 나는 죽어야 마땅하다가 자꾸 뒤로 지연되죠. 이게 바로 인간들의 상징계라 하는 겁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는데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죽음을 아직은 아니라고 계속 즐거움을 찾아다니면서 나중엔 힘 빠져서 죽는, 그런 식으로 하는데 그게 인생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교회, 신앙 전부다 오락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오락과 취미, 지점토 만드는 것과 비슷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만약에 그 오락과 취미를 누가 와서 욕하고 부수면 이것은 자신의 즐거움을 빼앗기 때문에 개한테 밥그릇 빼앗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면 물어버려요.


여기서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다시 봅시다. 여러 번 해야 돼요. 안 그러면 잊어버리니까. 모호한 것이 기표를 거쳐서 주체가 되는데 여기에 완전하게 자기 의도함과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깨졌다. 이 깨진 것이 다시 이 자리로 가요. 출발점으로 가죠. 또 나는 여기에다가 플러스 타인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시도할 때 여기에 자기의 욕구가 반응합니다. 리비도적인, 본능적인, 짐승적인 욕구가 반응해서 그 요구를 부응하려고 하는데 그게 채워지지 않아요. 그 차이를 ‘욕망’이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욕망이 형성되려면 남들이 갖고 있는 욕구 또는 요구가 반드시 필수적이에요. 그래서 라이벌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시험이 없으면 사람이 공부를 안 해요. 점수를 안 매기면 아예 공부를 안 합니다. 점수를 매긴다는 것은 요구가 없으면 욕구가 작용 못하니까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욕구가 자극을 받아서 튀어나오고 그 결핍만큼 욕망이 된다 이 말이죠.


전교에서 1등한 애보고 엄마가, ‘너, 이번에 전교 1등하면 내가 맛있는 것 사줄게.’ 그 애는 거기서 욕망이 없어요. 왜? 슬슬해도 1등인데 뭐. 목표를 한참 높게 잡아야 돼요. 높게 잡으면 그 차이, 욕구와 요구의 차이가 높아지면 그만큼 욕망이 대단히 강렬해지죠. 죽자 살자가 하겠지요.


‘네 성적으로는 지방대학밖에 못 간다.’ ‘엄마, 나 지방대학 갈래.’ 그렇다면 공부하겠습니까? 안 하지요. ‘네 성적으로는 연고대 못 들어간다.’ ‘그래요?’ 엄마가 그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죠. 엄마와 자기는 항상 일치시켜서 그때 옛날 태어날 때 버릇 있잖아요. 엄마와 하나 됐던 그런 거예요. 그것을 발휘하기 때문에 엄마의 욕구에 따라붙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데 연고대는 못 가고 서강대 그 정도 들어갔을 때 엄마는 작전성공이죠.


성경에서 잘못된 표현대로 하면, 입을 크게 벌리면 채운다는데 목표를 높게 잡으면 그대로 되지 않더라도 얼추 중간쯤은 된단 말이죠. 처음부터 초등학생부터 들뢰즈를 이야기하며 ‘애야. 모든 게 긍정이다.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 예수님한테는 다 예가 된다. 공부 못해도 천당 간다.’ 쓸데없이 씨 뿌리는 비유 이야기해서 ‘스스로 자라나리라.’ 이러면, ‘어머님, 어머니 말씀대로 스스로 하겠습니다.’ 스스로 만날 때우는 거예요. 이게 자기 지속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성장한 애는 하여튼 쾌락의 수위가 굉장히 낮아요. 그야말로 욕심이 없어요. 꼭 오 목사님 사모님 같아. 아무 욕심이 없어. 그저 애들 뛰노는 그게 보기 좋아서. 몸이 망가지든 말든. 돈만치만 하라 해도 자기 즐거우니까 하는 거예요.


여기서 새로운 공식이 나옵니다. 이걸 다시 해볼게요.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여러 번 해야 돼요. 타인의 목소리, 타인의 기표, A가 타인이에요. S는 주체가 아니고 기표에요. 용어를 같은 용어를 써서 기표인데, A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요구하는 것도 자기가 뭘 요구하는지 몰라. 뭐 하란 말입니까? 대충 알아서 해라. 타인도 타인에 대해서 확실치 않기 때문에 그걸 충족하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충족해요. 자기 마음대로 ‘나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됐어.’라고 지 마음대로 확정 시켜버립니다. 그러니까 원래 요구하고 전혀 안 맞죠.


이게 상징계인데 여기서 상상계가 항상 깔립니다. 이렇게 시작하면서 여기서 작은 iA, A라는 그분과 일치하려고 애쓰면서 거기에 대한 일치성을 어떻게 하느냐? 그분의 메시지(m)를 받고 한쪽은 이리로 가고 한쪽은 이로로 갑니다. 이 그림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사람이 타인의 말을 들을 때는 그냥 듣는 것이 아니고 항상 타인의 말을 들을 때는 이미 그것이 지금의 목표로써 확정돼버려요. 그 목표와 일치시키는 게 상상계거든요. 일치라는 말도 재밌죠. 상상이라고. 일치함으로써 드디어 일치 성공 했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특히 이런 것은 기도할 때 많이 있죠. 기도하고 응답됨을 믿으면 이미 이뤄졌느니라. 이렇게 나올 때 그 말씀 그대로 자기가 하려고 일어서서 ‘감사합니다’ 하고 돌아서서 집에 돌아가면 되니까. 집에 안 돌아가면 얼마나 찝찝하겠어요. 스스로도 된 줄로 간주해야 돼요. 이게 바로 동일시되는 상상계가 된다 말이죠.


그런데 A에서 튀어나오는 게 있어요. 주체가 A에서 상세히 보니까 도대체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당신이 나에게 뭘 원하십니까?’라고 내가 묻는다는 겁니다. 이 말은 무엇의 종속입니까? 결국 인간은 타자에 대한 철저한 종족으로 그 안에서 주체가 형성되는 겁니다. 나에게 뭘 요구하는 타인이 없으면 주체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지 찾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에게 요구하는 자를 찾을 수밖에 없죠.


먼저 말 거는 자가 친구가 되죠. ‘저 사람의 친구 돼야 될 건데.’ 소용없습니다. 먼저 말 거는 자가 친구 되는 겁니다. 우리교인들 누가와도 말 건네지 않아요. 그러니까 왔다가 가버려요. 먼저 말 건네면 그 사람이, ‘나, 이 교회 싫어요.’ 하든지, 좋다든지 그 사람은 이 교회 온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자기가 이 교회 올 때는 이 교회에서 내가 분열된 간격을 뭔가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왔기 때문에 그걸 채워주는 하나의 창구로서 그 사람의 요구가 있어야 돼요. ‘다음에도 오시지요.’ 그러면 ‘나, 안 와요. 나는 이 교회 다신 안 다닙니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 경로에서 뭐가 생깁니까? 나는 거절했다는 주체가 확립되는 거예요.


그래서 타인이 필요해서 주체가 되지만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나라는 것을 확립시키기 위해서 누굴 동원한다? 계속해서 내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을 찾아가는 거예요. 비록 그 교회 안 나가도, ‘나는 그런 교회 안 나가.’가 곧 뭐가 되느냐 하면, 그 시점 나의 주체성이 되는 겁니다. ‘나는 저런 교회 안 가. 나는 다른 교회 갈 거야.’라고 할 때 이미 그것도 새롭게 그만한 안정성이에요. ‘주여, 저한테 이 교회 안 다니도록 응답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것도 응답을 받은 거예요. 응답받았다는 말은 계속해서 주체적인 적을 확정해가는 거예요. 하지만 여전히 내가 어떻게 달라질지 누구의 말을 순종할지, 누구 말을 듣고 어떻게 사기당해서 다단계해서 말아먹을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이 불안이 특히 부자들이 굉장히 많이 겪습니다. 저는 부자 안 되도 모르지만 하여튼. 돈이 만약에 100억 있다면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냥 놔둘 수가 없어요. 분산처리하든 꿍치고 앉아있는 사람은 정신병자 같으면 마늘밭에 묻던지 하지요. 대부분은 돈 100억 있으면 50억 더 빌려서 굴려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100억이 돼버리면 이건 분열돼있기 때문에. ‘내가 잘만 하면 150억 버는 건데. 이게 뭐고 100억.’ 분열된 이만큼 괴로움이 옵니다. 마저 채워야 쾌락이 주어지니까. 그 쾌락이 어디서 보장되겠습니까? 쾌락은 타인이 나한테 요구를 해야 되고 그 요구에 대해서 내 욕구가 다가가면서 욕망이 생길 때 거기서 새롭게 살맛이 나는 거예요. 이번에 100억으로 아파트를 사기로 했다든지 안 그러면 땅을 사기로 했다든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 즐거움에 보람찬 하루를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서 장로님이 했지만 참, ‘당신 절대고독을 아느냐’ 하는데 투자할 돈도 없어. 친구도 없어. 그 연세에 할머니 찾겠습니까만. 같이 옆에 있으면 좋겠는데. 그럴 때 뭔가 계속해서 충족되지 못한, 만족되지 못한 그것이 남아 있습니다. 힘들지요.


그러면 타인이 나에게 뭘 요구하느냐 할 때 이걸 달리 하면 아까 배웠죠. 깨진 것이 A라는 타인의 요구, 요구가 욕망입니다. 타인의 욕망, 나의 욕망은 소용없어요. 나의 욕망은 이미 이걸 구축했기 때문에 나의 욕망을 더 이상 쓸데없는 거예요. 100억 있어도 소용없어요. 150억을 갖든지 해야 돼요.


어떤 사람이 타인이, ‘당신은 그 돈으로 하늘에 복을 쌓아야지. 그까짓 썩어빠진 돈을 모아서는 되느냐?’ 하고 요구한다면 그 사람은 50억 떼어서 교회에 기부하든지 복지에 기부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건 뭐예요? 나는 드디어 구제사업을 한 나가 되겠죠. 그걸 타인이 그렇게 요구한다. 타인의 요구가 있어야 우리는 계속해서 이 차이를 좁힐 수 있는 희망을 갖고 사는 겁니다.


타인의 요구가 드디어 상세하게 됩니다. 그림 하나 그려보겠어요. 하여튼 이거는 항상 되풀이라. 미지의 것이 기표를 향하여 갑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엄마로부터 분리돼있기 때문에, 엄마로 떨어져있어도 그 분리의 고향을 찾아가기 때문에 항상 찾아가요. 여기선 이미 기존에 있는 것, 하여튼 새로운 건 없어요. 기존에 있는 것을 통과해서 나라는 것을 정립하는데 이미 이건 깨진 것, 분리돼있습니다. 그때부터 이 자리는 이 자리로 바뀌면서 여기에 타인의 요구가 주어집니다.


깨어진 나는 타인의 요구와 하나가 되는데, D라 하는 것은 요구하는, 발화라 하는데 그냥 언어라 하는데 또는 법이라 하는데 이걸 합하면 전체로 타인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요구가 자기도 몰라요. 괜히 한 소리했는데 그게 뭔 뜻인지 몰라요. 여기서 기표가 깨진 건데 깨진 것도 모르고 좋다고 이것과 하나 되는데 나는 나라는 것은 사라지고 타인과 동일시 된 이것이 주체자리에 도달되는 겁니다. 나를 깨보면 전부다 남의 법들이 와르르 쏟아져요. 해태종합선물처럼 자기 것은 없고 이 사람은 이렇게 요구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요구하고 남이 요구한 걸 쭉 적어내는 겁니다.


이렇게 가는 과정에서 항상 상상계로 같이 덩달아 간다는 것. 처음에 요구에 대해서 일치시키려고 상상하면서 메시지를 따라서 위로 하고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그래. 나는 타인의 메시지에 순응했어.’라고 하는 겁니다. 들뢰즈라는 사람은 타인의 소리를 뭐라고 합니까? 신의 소리 또는 성경말씀 이렇게 보시면 적절할 거예요.


결국 이 자체가 비 복음적이죠. 왜 비 복음적입니까? 모든 성경말씀은 누구에게 완성된다? 예수님에게 해야 되는데 이건 자꾸 자기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나는 지킬 수 있습니다.’     거예요. 그것으로 일시적으로 ‘나는 지켰어.’라고 하는 거예요. 다음에 또 다른 걸 증거해야지 하면서 성경 보면서 정복해서 더 순수하고 더 높은 경지의 신앙생활하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남이 두 시간 하면 세 시간하고, 금식 40일하는 게 주님한테 미안해서 39일 열두 시간하고. 이 짓을 계속하는 거예요.


라캉은 이걸 정상이라 하는 거예요. 라캉에선 비정상은 누굽니까? 스데반 집사죠. 사도 바울, 열두 제자 다 포함되겠죠. 특히 그 중에 최고의 비정상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사도 바울은 나 미쳤다하죠. 예수님은 미친 정도가 아니고 이건 단칼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되고. 그러니 주님 등장하면 숨이 막힙니다. 답답하기 짝이 없어요.


그걸 숨이 막힌다하지 않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엎드려서 죽은 자 같이 되죠. 사도 요한이. 나 자체가 초월된, 법적인 태생에 태어난 부모의 아담 노선과 관계없는 완전히 너무나 무시무시하고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그 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어요. 욥 같은 경우에 재를 뒤집어 쓸 뿐이에요. 그 세계에요. 모세 같으면 시내산에 올라갔다 내려온 모세도 얼굴에 광채가 나서 수건을 덮어 써야 될 정도입니다.


그러니 라캉의 이런 말이 소위 신앙인을 사칭한 가짜 신앙인한테는 아주 적절하게 세상사람 보기에 가짜라고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가 등장하면 지젝은 이걸 실재계라 하고 라캉은 칸트의 이론에 따라 경이, 경이로움, 숭고. 칸트는 절대세계는 말할 수 없다. 언어세계를 초월한다. 그냥 경이롭다고 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라캉은 뭐라는 줄 알아요? 경이롭다 하니까 라캉은 도착증세. 죽어가는 대상에 완전히 자기를 잃어버릴 때 정신병자라고 보는 겁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진짜 성령 받은 정신병과 구분을 해야 되는데 이쪽세계에서는 구분 안 해. 둘 다 정신병 의사의 면담 받아야 된다고.


이렇게 나가면 여기서 도대체 뭘 원하는지, 원하니까 주체가 밑에서부터 계속 올라가요. 방향을 잘 잡아야 돼요. 여기서 깨어진 주체는 무엇과 일치시키느냐 하면, 이것과 일치시킨다. 그 다음에 이것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s인데 아까 했지요. 그럼 이렇게 되면 이게 A로 바꾸는 순간 S(A) 기표가 돼요. 왜 바뀌느냐 하면 위쪽 논의가 주안이 되면서 이쪽 논의는 결핍을 감추어지고 대표가 돼버리고 상세한 것은 위쪽에서 논의되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될 때 여기서 알아야 되는 것은, 이쪽 노선이 쾌락의 노선이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어떤 요구를 할 때 욕구가 있단 말이죠. 욕구와 요구가 만날 때 중간에 뭐라 했습니까? 욕망이라 했잖아요. 욕망은 반드시 즐거움, 쾌락을 내다보면서 욕망을 갖게 돼있어요. 즐겁지 않는 욕망은 없어요. 심지어 얻어맞는 것도 쾌락의 일종입니다. 아까 프로이드의 기본적인 꿈속에 제일 밑바닥에 리비도, 이드의 세계는 바로 즐거움, 쾌락이에요. 쾌락이란 짐승 수준을 말하거든요.


이 쾌락이 타인의 요구에 충족되지 못할 경우에 이게 거세가 돼요. 잘라져요. 그러면 자를 수밖에 없는, 방향은 이쪽에 쾌락에서 벗어난 것도 모르고 쾌락이 즐거워서 마중 나갔다가 결국 이 쾌락이 언젠가 시점이 지나면 소멸되고 이게 사라져버려요. 그리고 이 밑에서 또 새로운 쾌락에서 또 뭔가 시도하고 또 사라지고 또 시도하고 또 사라지고.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주체자는 ‘나는 이번 쾌락으로 더 이상은 쾌락은 원하지 않아.’ 만날 이런 소리하면서 사람은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하면서 계속 가는 거예요.


전체 이야기를 한 마디로 이렇습니다. 욕망은 쾌락을 노리는데 그 욕망을 제거하고 이런 쾌락이 있다고 소개하는 것은 누굽니까? 반드시 타인이죠. 남이다. 그러니까 남을 외면하면 될 텐데 남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그 관계성이 인간의 본인이 선택해서 본인이 알아서 끊을 수가 없어요. 끊어지지 않습니다. 분리돼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거는 항상 처음에 분리된 채 있어야 분리한 의미가 있단 말이죠.


여기서 주체가 분리된 것을 항상 처음에 태어났던 그 모습과 갈라짐을 어쨌든 일치시키려고 애를 많이 쓰는 거예요. 일치시키는 그걸 사랑이라 합니다. 하나가 되는 것. 하나가 되는 이걸 정신병이라 하는 거예요. 항상 하나 되면 안 돼. 하나 되면 정신병 환자에요. 도착증.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벌벌 떨면서 성경 한 말씀에 벌벌 떨고. 여자는 강대상 올라가면 벌벌 떠는 것.


이것은 하나 됨으로서 자기로서는 거기서 사랑을 느끼고자 하지만 고정화돼버리면 정신병이 되어서 그 다음에 그 사람 주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변하지 않는 고정된 주체가 돼버려요. 그럼 이건 퇴행이죠. 퇴행이 뭐예요? 남들이 앞서가다 보니까 자기는 가만있어도 완전히 문워크라. 뒤로 가요. 뒤떨어지는 거예요.


촌에 살면 그런 현상이 있는 거예요. ‘아이고. 옷 봐라. 꾀죄죄해가지고.’ 이런 거죠. 티비 끊고, 라디오 끊고, 세상의 모든 것 다 끊고 산촌에 살고 싶네 해서 살다보면 옷매무새뿐만 아니고 말 특히 횡단보다 건너다 벌금 물기부터 시작해서 온갖 새로운 법조항을 몰라서 불이익 당하는 걸 말도 못하게 당하죠. 그래서 들뢰즈 말이 맞는 말이에요. 다같이 강물 흘러가는데 혼자 돛대처럼 있으면 이거는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하나 빠졌다. 다시 합시다. S에서 쏘면서 중간에 무슨 착각을 한다? ‘나는 타인과(소문자 i) 하나야’ 하면서 타인을 만나 요구를 부응하기 위해서 일치되기 위해서 깨진 것이 이렇게 부응합니다. 중간에 메시지를 만나면서 이렇게 흘러가서 이게 왜 이렇게 되느냐 하면, 하는 것이 다 일치되기 위해서, 상상계, 하나 되기 위해서 이렇게 나와서, ‘드디어 나는 위로되었어.’ 하고 좋다고 S에다 하든지 안 그러면 이게 바뀌어서 A하고 되든지 깨진 거니까. 이리로 가면 기표는 A의 기표가 된다. 상징계 있을 때는 그냥 깨진 거지만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이건 다시 살려주고 이거는 뭐로 바뀌느냐 하면, 타인의 요구가 되고, 상세하게 이야기하면, 이게 올라가서 계속 쏘아 올리면 밑에 S는 타인의 요구와 하나가 되죠.


중간에 있어요. 소문자 요구가 이렇게 가면서 양쪽으로 갈라집니다. 갈라져서 S(A) 이건 아까 했죠. 이렇게 해서 쾌락의 노선이 있고, 한쪽 쾌락의 노선에서 주체가 타인의 요구와 상징계에서 하나가 되면서 다시 내려와서 정착하죠. 중간에 ‘역시 나는 법대로 하나가 되었어.’라고 착각하면서 내려오는 겁니다.


여기서 올라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이 합리적으로 ‘내가 누구냐’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게 없어요. 항상 요구가 오게 되면 이성이 돌발되는 게 아니고 욕망이 작용하고 욕망은 반드시 인간의 기본적인 짐승적인 차원에서의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방향이 쾌락에서 소멸되는 방향이기 때문에 나중에 이렇게 올라가서 자기 딴에 쾌락에 ‘만족 했어’ 하지만 한 바퀴 돌고 다시 오게 되면, ‘아이씨. 기껏 이거야. 이게 즐거움이야. 재미 하나도 없는데.’ 장난감 가지고 놀다가 장난감 버리는 거예요. 이것 말고 재미있는 것 없어? 또다시 남들이 나한테 이야기하기를 기다리고 있죠. ‘뭐하면 재미있겠어?’ 이 말은 ‘나한테 뭘 요구하십니까?’ 자꾸 묻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정상인이 갖고 있는 욕망의 구조입니다. 인간의 주체 형성관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뭔가 빠진 게 있죠. 실재계가 빠졌죠. 실재계는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분열돼있죠. 깨진 주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욕망까지 돌아왔지만 결국 남과 하나 됐다는 그런 착각으로 끝나버렸는데 이런 분열된 것을 통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실재계에요. 그러면 인간 주체가 뭐냐 하면, 마스크, 가면이 되는 겁니다. 보통 가면 뒤에 진짜 얼굴이 있죠. 그런데 라캉이나 지젝은 가면이 자기 얼굴이에요. 가면뿐이에요. 가면 뜯어보면 뼈다귀밖에 안 남습니다.


인간은 페르소마죠. 매일같이 달라지는 인격을 그때마다 오인, 착각, 항상 ‘이게 나야’라는 오인의 연속 속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사회는 정상인으로 일원으로서 수용해줘요.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나는 오인한다.’ 이랬습니까? ‘나는 메시아인 줄 착각한다.’ 이랬습니까? 아니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죠. 이거는 이 사회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확정된 사람은 이 사회의 법에서 제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것도 정신병자로서.


그런데 섭섭한 말인지 모르지만 성령을 받으면 우리도 이같이 된다는 거죠. 성령을 안 받도록 노력해야 돼. 성령 안 받도록 노력해도 소용없어. 성령 와버리면 그만이니까. 성령을 안 받으면 우리는 마스크를 쓰는데 성령을 받아버리면 진짜 우리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실재계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등장해버려요.


이 상징세계에서, 이 욕망세계에서 죄의 개념은 항상 이동하는 개념이죠. 오늘도 이런 죄를 지었어. 그럼 어떻게 됩니까? 이런 죄를 지었으니까 그때는 나는 이런 죄를 지었으니까 이 죄를 안다는 자체가 자기 자신이 이미 의인이란 뜻이죠. 맞잖아요. 자기가 죄인이라고 안다는 것은, 죄가 뭔지 안다는 것은 이미 의인이란 뜻이란 말이죠. 의인들만 사는 인간들 세계에 의인으로서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서로 양보하고 자기 잘못을 당회장이 교인들 앞에 절할 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죄한다는 것은 결국 뭔 뜻입니까? 난 이 조직을 포기 못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사죄함으로써 이 조직은 옛날의 질서를 그냥 유지하겠다. 내가 유지할만한 가치 있는 어떤 나의 단체가, 내 것이 있을 때는 사죄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조직을 살리겠다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조직이 없으면 사죄가 필요 없죠. 강도가 무슨 사죄합니까. 성폭행범이 무슨 사죄해요. 사죄 안 합니다. 희망이 있을 때는 사죄하잖아요. 사죄하고 나면 자기가 의인되니까.


사회에서 의인이란 무슨 뜻인 줄 알아요? 그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상인이란 말입니다. 사회가 뭐라고 하던 나는 내 편입니다. 이러면 정신병자 돼요. ‘이 약을 잡수세요.’ ‘안 먹습니다.’ 그러면 치료가 안 돼요.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따라 줄 때 그 사람은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겁니다. 기표에서 벗어나면 안 돼요. 기표, 언어 선에서 놀아야 돼요. 여기서 이탈해버리면 엉뚱한 소리하는 겁니다. 너희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이러면 일반사회인 아니에요. 그럼 네가 알아서 잘 놀아.


이 사회는 이처럼 마스크만 있어요. 이건 삼위일체 초반기의 이론에 나옵니다. 마스크만 있다는 것은 실제로 아무도 모른다가 아니라 아무도 없는 거예요. 마스크만 있으면 부끄럽잖아? 부끄럽기는요. 기표 자체가 자기 실체를 대신하면 거죠. 늘 돌아오는 새로운 유행어,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패션, 늘 변동하는 이 사회가 내 주체를 그때마다 채워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으냐 이 말입니다.


꼭 내가 나는 뭐가 된다. 고집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그저 세월 따라 시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흘러가는 저 구름아 하면서 그냥 그 사회에서 살아가면 그게 정상인이죠. 때로는 사기도 치고, 때로는 거짓말도 하고 어차피 마스크니까. 어차피 내 모습이 뭔 줄 모르기 때문에 여차하면 바꿔치기하면 되니까. 라캉은 말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그랬다는 겁니다.


지젝이야기 조금만 하고 이번 시간 끝내겠습니다. 다음은 개혁주의이야기하고. 지젝은 처음부터 인간은 죽음의 충동이 있다는 겁니다. 죽음의 충동은 모든 것에 구멍을 내버려요. 실컷 대통령 되었다가 죽어버리면 가면이고 뭐고 사라지니까. 그래서 프로이드는 죽음의 충동이 어디서 왔는지 몰라요. 라캉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젝은 말합니다. 이렇게 모르는 것을 몰라야 된다는 거예요. 실재계를 몰라야 상징계를 마치 현실로 생각하는 그러한 정신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 같아요. ‘이 세상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살다 죽으면 그만이야.’라고 해야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진리가 뭔데? ‘진리는 모르는 거야. 숨어있는 거야. 그거는 감추어져 있어. 그거는 손대면 안 돼. 그거는 주위를 빙빙 돌 뿐이야.’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인생을 아주 편안하고 정상적으로 여유만만하게 살 수 있다. 남이 부럽지도 않고.


그런데 종교 특히 교주들은 이것이 진리라고 해버리죠. 진리는 실재계거든요. 실재계가 돼버리면 그것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지젝은 말하기를 그게 자살이에요. 주식투자할 때 분산투자해서 백만원도 하고 다른 펀드에 넣으면 되는데 정신이 죽음 충동이 도박이 되어서 대박이다 해서 몽땅 한 곳에 다 넣고 떨어지면 자살하잖아요. 이게 뭡니까? 그거는 사람보다 실재계가 더 세다를 보여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지젝은 말하기를 그런 부류 중에 한 사람이 히틀러고 나폴레옹인 거예요. 완전히 인생을 올인 해버린 겁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경산시에서 정치하고 시민 운동했는데 경북도의원 된 거예요. 주위에서 말렸습니다. ‘그 나이에 도의원이 어디고. 의원됐으니까 해라.’ 하니까 ‘아니야. 나는 이 나라를 이렇게 둘 수 없어.’ 경산시 국회의원 나와서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이 세상은 망상의 세계인데 그 사람은 망상의 세계가 아니고 실제로 이상적인 사회가 구현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비웃는 소설이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란 소설이 있어요. ‘나는 황제다’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실재계는 항상 숨어있어야 되고 드러나지 않는 거예요. 드러나지 않으면서 세상을 현실로 보지 않고 상징으로 유지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실재계에 있는 거예요.


실재계가 자리 잡으면서 그걸 √-1이라 하는데 √-1이 없거든요. 이걸 허수라 합니다. 이 안에 마이너스가 필요 없는데 그러나 이게 있으면서 복소수가 성립돼요. 복소수가 성립이 되면 로켓을 올릴 수 있어요. 로켓의 모든 경로를 계산할 수 있다고요. 물리학에는 없는 것도 집어넣는 거예요. 원래 숫자는 경험의 대상이 되는데 0이 뭐예요? 0이란 대상이 없으니까 숫자가 없어야 되는데 0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마이너스(-)도 되고 1,2,3,4,5⋯9 다음에 어떻게 씁니까? 0에 1만 더 붙이면 돼요. 얼마나 편리해요.


그래서 실재계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상으로 살려면 우리가 감히 범접하지 말고, 손대지 말고, 다가서지 말고, 그런 것이 분명히 있어주는 것이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있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다만 그것을 먼저 점령했던 놈은 잡아당겨서 죽여 버리고.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그 당시에 죽어 마땅했습니다.



이걸로 끝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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