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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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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4b 봄특강 - 들뢰즈와 라캉과 개혁주의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음성2   동영상2 

 

녹취:한윤범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들뢰즈가 영화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영화가 예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술과 다른 과학과 차이를 두자는 겁니다. 과학은 나를 이롭게, 유리하게 하고 과학은 하나의 대상이 되는 거죠. 과학이 대상이 되면 나는 항상 굳건해야 돼요. 뭘 연구한다는 것은 내가 흔들리면 안 되잖아요. 이게 자꾸 흔들리면 대상을 초점을 제대로 공격 못하기 때문에, 분석 못하기 때문에. 일단 나는 굳건함 이걸 전제로 하는 겁니다. 네가 굳건하다는 근거를 대라 하면 근거는 없고 나는 무조건 굳건하고 안정돼있고 흔들리는 대상을 타켓으로 삼겠다는 이게 과학이라는 겁니다.


예술의 특징은 뭐예요? 특히 들뢰즈는 영화를 언급 많이 하고 미술도 언급하는데. 예술은 대자연이 갖고 있는 한 부분, 대자연이 요동치고 있다고 보거든요. 이 세상은 항상 요동치고 있다고 보는데, 이 요동치는 한 부분이 불거져 나오는 게 바로 예술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있지만 여기서 같이 불거져 나올 때 내가 작품하는 것이 아니고 작품 안에 내가 들어있는 겁니다. 나는 무엇을 그렸다가 아니라 ‘나는 같이 느낀다. 내가 느낀 것은 이거다.’라고 보는 겁니다.


들뢰즈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기존에 예술은 어떻게 보는가? 화가가 있고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는 거예요. 바깥의 나무를 보고 집을 보고. 그러면 이거는 자연의 일부를 담은 것이 되잖아요. 담아버리면 화가는 이 속에 들어가지도 않고 항상 작품을 보는 게 아니고 화가에게 소급이 되겠죠. ‘뭔 뜻이야?’ ‘내가 그렸어.’ 결국 자연을 그려봤자 자기 자신의 동질성은 그대로 내놓은 것밖에 안 돼요. 옛날에는 예술을 이렇게 봤단 말이죠. 그렇게 보게 되면 사실주의 작품밖에 안 된다. 사진 나오고 난 뒤에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대자연 안에 같이 들어가면 자연이 그림을 그리고 나는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자체가 자연의 예술솜씨가 되죠. 집사님, 그렇습니까? 자연이 나로 하여금 안 그리면 안 되도록, 도대체 참을 수 없는. 특히 이것은 그림 그리는 것도 되지만 작가들, 작품 할 때 한두 장 찍는 게 아니에요. 수백 장을 찍어요. 그냥 느낀 대로 자기가 자연에 함몰해서 그렇게 될 때 그것이 바로 과학과의 차이점이 되는 겁니다.


과학은 나한테 유리한가, 불리한가가 되지만 불리한 것은 없애버리겠죠. 이것은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따지지 않고 들뢰즈는 이걸 긍정합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나한테 안 맞아.’라는 말을 하지 마라. 우리는 대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전체를 긍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긍정하는 쪽으로 나가야 된다는 것까지 이야기했죠.


이제부터 슬슬 풀어봅시다. 그렇다면 영화로 영화도 예술이니까 예술을 통해서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본다’가 되면 앞에 뭐가 같이 붙습니까? 누가 보는데? ‘내가’ 내가 보면 이 대자연의 움직임과는 전혀 안 맞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니까 대자연이 갖고 있던 원래와는 벌써 떨어져나가죠.


이쪽에서 내가 나무를 본다면 나머지 집은, ‘그때 그릴 때 집 있었나?’ ‘집? 기억나지 않는데.’ 이미 집은 잘라버렸어요. 그러면 집은 안 보고 나무만 봤을 때 제대로 된 나무를 봤을까요? 안 되죠. 집 없이 나무를 보면 일방적으로 자기가 집을 삭제하고 나무를 봤기 때문에 온전한 나무를 볼 수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고 나무가 나를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걸 ‘보기’라고 해서 이건 어려운 것 하지 맙시다. 그냥 쉽게 합시다. 보여진다. 어디에서 보여지는 거예요. ‘나무야. 너 보기에 어때?’ 하고 나무한테 묻는 겁니다. ‘고양이야. 네가 보기에 나는 어떻게 보여지는데?’라고 묻는 거예요. 이게 윤리에요. ‘내가 보기에 당신은 내 영 타입이 아니야.’ 이렇게 하지 말고, 선보러 가서 ‘아가씨에게 저는 어떻게 보여집니까?’ 이렇게 그 사람이 보여진 대로 그것이 내 모습이 되도록.


그럼 나는 어떻게 압니까? 보여질 때 비로소 나는 규정되잖아요. 그러면 나는 나 혼자 살면 안 되죠. 아무도 나를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없으니까. 어떻게 해요? 나를 보여주는 차이성을 내가 멀리하면 안 되고 항상 가까이 해서 다른 사람이 날 이렇게 보는, 자꾸 묻는 것, 그렇게 물어가는 것. 그런 가운데서 어떤 좋은 점이 있느냐 하면, 바로 평소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그것이 남한테 보여주는 삶을 삶으로써 이것이 전부다 수정작업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너는 성질이 급해.’ ‘알았어. 그렇구나. 몰랐어.’ 항상 나를 지적해주는 타인들을 일부러 맞닥뜨리는 모든 사건 가운데서 비로소 ‘보다’라는 부정사, 보여지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고 ‘보다’만 성립되는 거예요. 여기서 시간이 날아가 버려요. 과거는 보았다가 아니라 과거도 지금 보다, 미래도 보다. 모든 것이 시간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시간 자체가 사라져버리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흘러오는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가 또 긍정할 수 있습니다. ‘이건 다 운명이야. 팔자야.’라고 하는 겁니다. 들뢰즈는 그걸 운명이라 하지 않고 ‘반복’이라 합니다. 그 반복이 왜 지금 일어나고 있는가? 원래 주름진 것이 활짝 펴니까 이렇게 된 것이다.


‘반복’이란 같은 것을 되풀이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같은 나라는 것이 일곱 살 때, 아홉 살 때 성질이 스무 살 때, 사십 살 때, 오십이 되면 접혀졌던 것이 만개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나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내 본성이, 접혀졌던 것이 세월 따라서 그리고 지속에 따라서 점차점차 꽃이 활짝 피는 것처럼 세월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꽃을 피우는 겁니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구나.’ 그런데 그것이 내가 관리했으면 그 공로가 나한테 오는데 나는 수동적으로 펼쳐졌을 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저 사람이 나에게 충고한 것도 그 사람의 펼쳐짐의 일부가 되어서 전에는 충고 안 했는데 지금 충고하는 걸 보니까 그 사람의 속성 가운데 덜 펼쳐진 것이 이제 펼쳐져서 나의 펼쳐짐과 만남이 이뤄져서 그런 충고가 오고가는 겁니다.


둘이 연애한다. 여자 쪽에서 미처 못 펼쳐졌는데 나를 만나자마자 자극 받아서 펼쳐지고 나도 그 여자가 펼쳐질 때 서로의 펼쳐짐이 하나가 될 때 이건 바로 대자연의 지속의 잠재성에 합치된, 대자연의 운명과 일치된다는 이것이 바른 윤리가 된다는 거예요. 이건 어렵지 않죠. 진짜 어려운 게 남았어요. 쉽게 설명하니까 안 어려운지 모르지만.


뭘 자꾸 들뢰즈가 기피하는지 아시겠지요. ‘내가 너와 사귀는 것 많이 봐줘서 하는 거야.’ 이런 소리 하지 말란 말이죠.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결혼하자 할 때 상대방에서 ‘노’ 하는 것은 결국 나는 펼쳐졌지만 저쪽에선 아직 나를 좋아한다는 부채살이 적게 펼쳐진 거예요. 그걸 술 처먹고 와서 염산 뿌리고 하면 안 되죠. 기다림의 미학 또는 느림의 미학. 기다리란 말이죠. 기다리면 내가 펼치더라도 저쪽에서 펼치더라도 그것마저 긍정하란 말이죠. 모든 게 긍정이죠. 꼭 티베트불교 같아.


여기서 어려운 게 어떤 거냐 하면, 잠재성에서 지속이 됐잖아요. 그럼 지속이 어디 있느냐 할 때 여기는 ‘있느냐’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있다’라고 할 때 있음 자체가 주인공이 돼요. 주체가 된다고. 주체를 죽처럼 녹여서 잠재성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어떤 개체나 이런 것이 성립하면 안 돼요.


그러면 방울토마토와 성경책이 같단 말인가? 달라요. 다르면 개체가 없다며? 실체가 없다며? 이건 왜 그래. 그 설명을 들뢰즈가 하는 겁니다. 들뢰즈는 현대물리학을 다 참고해요. 양자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오늘 이것까지 설명하네요. 이것은 고전적인 옛날부터 내려온 물리는 물체가 있고, 물체들이 어떻게 역학적으로 서로 당기는 힘이 있느냐 그런 걸 연구해서 필요한데 사용했는데. 물이 떨어지면 물 에너지가 얼마고, 그걸 터빈 돌리면 전기가 에너지가 몇 킬로와트 생긴다. 전부다 물리적으로 생각했는데


양자론은 더 깊이 들어갔어요. 어느 정도 깊이 들어갔느냐 하면, 누가 이걸 본다는 겁니다. 교재에 나와 있습니다만 누가 본다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그 한계가 8페이지에 있는데 제가 잠시 소개하게 되면, [인간의 시각은 실질적으로 4x10⁻⁵~7x10⁻⁵cm의 파장으로 전파되는 방사선에 제한된다. 한편 청각은 16,000~20,000Hz의 주파수대로 한정된다.] 그러니까 인간은 냄새 맡는 데는 개만도 못한 존재에요. 그렇지요. 그러면서도 인간이 과학을 논한다? 그거는 지속 가운데 일부만 차용하는 거죠.


그래서 물리학 할 때 거기에 머물지 않죠. 더 작게 내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눈으로 못 보는 것을 현미경으로 보면 되고, 현미경이 안 되면 전자현미경, 전자현미경도 안 되면 이제 서로 상호작용에 의해서 더 깊이 들어갑니다. 깊이 들어갈 때 작고 작은 최고로 작은 그 동네, 양자론의 세계라 합니다. 작고 작으면 그게 그거지. 똑같은 게 아니에요. 양자론의 세계는 희한한 놀라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것은 지상에 우리가 실체로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그쪽에선 설명이 안 돼요.


예를 들어서 문이 하나밖에 없는데 빛의 입자인 광자 두 개가 나중에 보니까 따로 따로 도달돼있는 것,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안에 고양이가 하나 있는데 이 고양이가 죽었을까, 아니면 살았을까 판정 못했는데 ‘아마 죽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 죽어있고, ‘살았을 거야’ 생각하면 살아있고. 이렇다는 거예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죠.


이게 양자론입니다. 물리학에서 양자론 없으면 원자력발전도 못해요. 이걸 확정되지 않은 불확정성. 이걸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인간이 너무 작은 세계에서는 내가 뭘 본다는 것도 그쪽에서 조정한다. 안 봤으면 빨간색인데 ‘이게 무슨 색깔일까?’ 보는 순간 이게 파란색으로 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 봤을 때 무슨 색깔이냐는 것은 영원히 모르죠. 안 봐도 빨간색, 봐도 빨간색이면 그건 아무 문제 될 것 없습니다. 분명히 안 봤을 때 빨간색이 아닌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럼 몰래 보면 안 되냐? 몰래 보면 몰래 보는 그 시선 따라서 보게 돼있으니까.


그래서 양자론을 도입해보면 여기는 운동밖에 없는데 운동이라 하면 기존의 동일성에서는 누가 운동하는데? 입자가 운동하잖아. 입자가 운동하는 게 아니고 ‘운동이미지’라 해요. 전체는 분위기를 운동이미지라 해요. 처음에는 운동이미지밖에 없어요.


양자론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바닥에서 튑니다. 모든 4차원세계가 높이, 깊이, 넓이 그리고 플러스 시간이 막 튀게 돼서 여기는 미래가 되고 과거 되고, 과거가 미래 되고, 현재 되고 지 마음대로에요. 작은 입자세계에서는 진짜로 그래요. 이것을 크게 확대시킨 게 블랙홀이라는 겁니다. 블랙홀에 들어가면 노인이 아이 되고, 아이가 노인 되고 엉망진창이라. 그런 세계가 실제로 우주에 블랙홀이 있다는 겁니다. 기존의 물리체계가 통하지 않는. 검은 구멍이라 해서 우물처럼 시커먼 줄 아는데 그게 아니고 기존의 체제가 완전히 달라져요.


그것 생각하면 꼭 그것 같아. 부활 때는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고. 이쪽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있습니다. 심지어 우주가 펼쳐져있으면 두 개의 우주 가운데서 보통 우주선 타고 멀리 가잖아요. 그렇게 할 필요 없어요. 여기다 구멍을 뚫어서 이쪽에서 이쪽으로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이걸 웜홀, 벌레가 가는 구멍이라 해서 갈 수 있어요. 이것만 뚫으면 내가 여기 있으면서 뉴욕에 가 있습니다. 같은 차원에서 겹쳐서.


지금 그런 것까지 생각하는데 어쨌든 들뢰즈가 생각하는 것은 여기에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전부다 운동만 있다는 거예요. 그 운동이 응축이 되어서 바로 지금의 신체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할 때 그걸 여러분들이 그 정도는 이해하지 하지만 사실은 이해 못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있어요. 왜냐하면 운동이 신체가 돼버리면 우리는 항상 나라는 것이 운동이미지로 구성이 됩니다.


구성이 되면 나가 아니고 나라는 게 없어요. ‘나-이미지’가 돼요. 나가 돼버리면 스무 살 때 나나 서른 살 때 나나 그 인간이 그 인간이 될 텐데 나라는 것도 스무 살 때 나와 사십 살 때 나가 달라요. 내가 나를 변하게 만든 게 아닙니다. 가만있어도 변하는 거예요. 그걸 이십 살 때나 서른 살 때나 같이 취급하면 또다시 동질성에 빠지는 거예요. 외부의 모든 지속이, 외부의 모든 운동이 현재 나를 가만두지 않고 자꾸 시달리는데 어떻게 그 나가 나일 수 있어요. 시달리죠.


시달리는 나-이미지를 두뇌라고 합니다. 들뢰즈가 이런 소리할 때 뭘 의식하느냐 하면, 기존의 심리학과 정신의학을 전부다 공격하는 거예요. 두뇌가 생각해? 두뇌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에 있는 신경세포를 계속해서 치면 다른 운동이미지들이 쳤기 때문에 나는 두뇌로 ‘이제는 밥을 먹어볼까? 오줌을 눌까? 공부를 해볼까?’라는 계기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두뇌가 하는 것이 아니고 두뇌이미지와 바깥의 운동이미지의 숨어있던 차이, 만나기 전엔 몰랐던 잠재돼있던 차이가 두뇌와 배고픈 배 쪽 세포가 에너지가 없데요. 몸의 이미지와 만나서 충돌되면서 숨어있던 그것, ‘배고프다’라는 새로운 운동이미지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정확하게 보자는 거예요. 제대로 보자는 거예요. 속이지 말고.    내가 기분 나쁘다니까. 네가 기분 나쁜 게 아니고 네 이미지가 기분 나쁘지. 다른 이미지 만나면 다 잊어버려요.


예를 들어서 이빨 아프다 하면, 이빨 아픈 것이 두뇌 이미지에서 이빨 아프다 해요. 갑자기 땅 사 놓은 것이 도로 나서 보상을 받게 되었을 때 그 순간에 이빨 아픈 게 없어지고 할렐루야가 튀어나오죠.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보상이라는 새로운 이미지와 만나면서 두뇌 이미지가, ‘난 이빨 아파야 돼’ 고집하더라도 새로운 이미지가 오면 내가 원치 않는 다른 이미지가 거기서 튀어나온다니까요. 그러니까 나는 내 주인이 될 수 없고 들락날락 건드리면 건드리는데 따라서 성질 다 나오는 것 같아요. 접혀있던 운동에너지가 펼쳐지면서 온갖 것들이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건 자기답지 않은 거예요. 자기가 없는 자기답지 않는 게 있어.


흔히 사람들이 필름이 끊겼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남편은 술만 안 먹으면 좋은 남편인데. 술만 마시면 개데.’ 그건 맞지요. 두뇌이미지가 술 운동이미지 만나버렸으니 개 돼버렸지요. 물론 개 이미지가 화내요. 개라는 게 없어요. 개 이미지밖에 없어요.


그 과정을 밟아나갑니다. 그 밟는 순서 이야기할게요. 처음에 운동이미지입니다. 운동이미지가 지각이미지로 바뀌어요. 지각이미지라 할 때 이미 주체는 없는 거예요. 운동이미지가 지각이미지를 응축에 의해서, 수축에 의해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지각이미지에서 지각된 것을 자기 보존하려는 정감이미지. 왜 이렇게 하는지 설명해드릴게요.


운동이미지 다음에 지각이미지고, 지각이미지 다음에 정감이미지고. 중간에 응축과 수축으로 돼있어요. 응축과 수축은 내 수축 아닙니다. 나는 없으니까. 외부에 있는 운동들이 여기서 수축되는 거예요. 정감이미지에서 그 다음에 행동이미지가 되고, 행동이미지에서 마지막 남아있는 시간이미지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당신이 왜 이런 순서를 적었는지 물어야 될 것 아닙니까? 이걸 거꾸로 추적해가면 알 수 있어요. 아까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하는 것처럼 인간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자기 기억에 의해서 판정을 해요. 그래서 만약에 시간을 잊어버리면 내가 누구냐를 같이 잊어버려요.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 계속 발전하고 있는데 그래서 영원회복, 영원토록 한다. 운동이미지가 시작할 적에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시간을 갖는 게 아니죠. 시간 속에 인간이 있으니까. 인간이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과거에 나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다 해서 시간의 지배 하에서 자기의 연속을 수용하게 돼있습니다. 그건 이유가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흔히 말해서 필름이 끊어질 때 그 순간에 자기는 어디 있습니까? ‘어제 당신 술 많이 처먹고 온 걸 아나?’ ‘내가 그랬나?’ ‘그래서 담벼락에 오줌 눈 걸 아나?’ ‘내가 그랬어? 가 보자.’ 전봇대에 오줌 눠있다. ‘니가 그랬다.’ ‘그런데 기억이 안 나지?’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기억이 인간을 만들어내요. 그래서 기억이 안 좋은 정박아 이런 사람들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줄 몰라요. 그 대신 예민한 사람은 정신병 돼요. 너무 예민한 사람은 만날 나는 나폴레옹이다, 나는 나폴레옹이다. 자기밖에 몰라요. 그것도 라캉할 때 나올 겁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을 잊어버렸으면 좋겠는데 기억이 너무 심할 때는 자의식이 강하고 기억이 좀 옅을 때는 잘 잊어버려요. 시간 따라 조정되는 겁니다. 그래서 공부 열중할 때는 자길 잊어버리죠. ‘시간이 이만큼 됐네.’ 이러면서 다시 반짝 깨죠. 깬다는 말은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미지 밑층에 보니까 행동이미지 위층에 보니까 정감이미지, 이건 쉬워요. 쉬운 것부터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면회시간, 교도소 가 있는 남편과 아내가 만날 때는 면회시간이 그렇게 짧아요. 짧으니까 정감이 우선입니까? 시간이 우선입니까? 시간이 우선이죠.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 따라서 시간이 짧아지면 어느 것에 포함돼있다는 말입니까? 인간의 정감도 전부다 시간이미지 안에 포함이 돼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나?’ 하는 순간 다시 나에게 돌아오잖아요. ‘이번에 면회시간 너무 짧았어.’ 하고 ‘내가’ 느끼는 거예요.


결국은 인간의 정감이미지에 따라서 만약에 시간은 ‘나, 5분만 할 거야.’라고 하는 순간은 정감이 너무 삭막해요. 그런데 그 일에 몰두하다보니까 몰두한다는 말은 그만큼 기쁘다, 즐겁다보니까 시간가는 줄 모르죠. 설교가 이랬으면 참 좋겠어요. 진짜 50분해도 5분 만에 지나가면 정감이미지가 강렬한 거예요. 끝나고 난 뒤에 다시 자기로 돌아와서,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나?’ 모든 것이 지속 안에, 시간이미지 안에 있다고 보면 돼요. 시간이미지 안에서 운동은 튄다. 계속해서 뭔가 부단히 움직인다. 인간도 없고, 동물도 없고, 개도 없고, 소도 없고 전부다 이미지의 응축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자체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영혼과 육체의 구분, 선과 악의 구분 모든 이원론을 없애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요. 이원론이 있으면 자기를 항상 의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영혼과 육체는 어떤 관계냐? 이것이 들뢰즈 이전까지는 수천 년 철학 가운데 해결 못해서.


‘목사님, 육체 안에 영혼이 들어있습니까? 육체 죽으면 영혼은 어디가 놀고 있습니까? 노는 게 육체 없이 노는 겁니까?’ 만날 질문을 이렇게 한다는 자체가, 이미 모든 게 하나의 이미지인데.


정감이미지는 주체가 등장하면 이것을 정신이라 하고, 지각이미지 이런 것을 자기 주체가 등장하면 물질이라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주체 자체를 없애버리면 그러한 두 가지의 구분은 없는 겁니다. 특히 지각이미지에서 정감이미지가 상당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지각했으면 응축과 수축에 의해서 지각은 그 다음부터 기분 좋다, 기분 더럽네, 즐겁다, 상쾌하다 항상 그쪽으로 응축이 돼있어요. 햇빛이 오는구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따스해. 봄인 것 같아.’ 또는 다니엘 세 친구처럼 풀무불 들어가면서 ‘아이고 뜨거워라.’ 사우나 들어가면 ‘뜨거워라’ 하죠.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들뢰즈 대신해서, 여러분이 인간이라고요? 인간 같은 소리하고 있네. 여러분은 감정에 놀아나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정감에 놀아나는 존재지 내가 인간이다? 보세요. ‘나는 인간이다’라는 똑같은 말을 해도 그 톤과 억양과 뉘앙스와 그 느낌과 발음과 모든 것이 ‘나는 인간’이라는 그 발음, 말하는 행동 그 밑바닥에 뭐가 있습니까? ‘너, 그것 무슨 뜻인데? 난 인간이란 말에 기분 나쁘게 들리지? 너, 기분 좋게 이야기했나? 기분 더럽네.’ 항상 기분이 돼있죠. 똑같은 말이라도 ‘나도 인간이다’ 할 때 이제 사람 됐구나. 사람이 언어만 듣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언어와 더불어 언어는 껍데기고 깔려있는 건 정감이죠. 감정. 동양철학에 보면 일곱 가지 감정이 있다고 했잖아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그 감정이 일어날 때 인간은 주체, 나라는 게 감정 따라서 감정을 지배할 수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인간의 주체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그냥 주체이미지라 하자. 몸도 몸의 이미지고. 정감이 응축이 되면 행동이 되고, 행동 되면 시간을 느끼는 주체가 되는 겁니다. 시간에 응축이 된 게 기억과 추억이 응축이 되니까.


그렇게 설명하게 되면, 결국은 우리가 일곱 살 때 내가 20년 전에 느꼈던 과자 맛을 본다든지 안 그러면 이 향기는 옛날 군대생활 철책선할 때 꽃향기인데 시내에서 30년 만에 처음 맡아본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갑니까? 다시 지각으로 가죠. 지각으로 가는 것은 운동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향기를 뿜어내는 화학물질에 의해서. 화학물질은 인간이 아니잖아요. ‘화학물질아, 내 근처로 오지 마라.’ 할 수 없잖아요. 화학물질은 지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모든 물질은 운동이니까. 이제 이해되십니까? 모든 물질은 인간 간섭 받아서도 안 되고 간섭할 필요도 없어요.


모든 원자, 분자, 전자가 운동하고 있고 저쪽에서도 운동하고 있는데 그 꽃향기가 필 때 ‘맞아. 저건 내가 군대생활 때 본 거야.’ 할 때 뭘 느낍니까? 운동이미지에 의해서 지각이미지를 느끼면서 ‘그때 기분 좋았어.’ 무슨 이미지입니까? 정감이미지. ‘그런데 코가 간질간질했어.’ 지각이미지. ‘그때 내가 꽃을 따는 건데 못 땄어.’ 무슨 이미지입니까? 행동이미지. 이게 전부다 지속이미지 또는 시간이미지 속에 모두 같이 어울려서 돌아가는 거예요. 거기 무슨 주체가 있느냐 말이죠.


윤리나 도덕이라는 이러한 깊은 내막을 전부다 거둬내고서 이 나라에 필요한 일꾼을 만들겠다고 교육을 시켜요. 그래서 들뢰즈는 말합니다. 독일의 히틀러 말을 듣던 관료들, 그들은 왜 히틀러의 말을 듣고 오백만 유대인을 죽였습니까? 이유가 뭡니까? 정감이미지가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현실감을 배웠죠. 무슨 현실감입니까? 우리 게르만민족은 유대인을 쳐부수는 것이 신의 뜻이죠. 그러니까 신은 여기서 나옵니까? 안 나오죠. 신이 나올 수 있는 출처는 한 곳밖에 없어요. 주체.


그럼 신이라 하는 것은 뭡니까? 나와 나의 동질성을 인정해주기 위해서, 격려해주기 위해서,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나의 구미에 맞는 새로운 확대된 어떤 이미지를 만들잖아요. 그러면 그 신은 나를 비추는 그걸 투사라 합니다. 건물 옥상에서 배트맨 있으면 하늘에 배트맨이 투영되죠. 내 모습에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을 투영한 것이 신이기 때문에 그 신은 주체만 다 빼버리면 신도 없는 거예요.


들뢰즈가 마지막에 위암 걸려서 아팠을 때 병원 창문 열고 자살했잖아요. 너무 힘들어서. 나라는 이미지가 소위 이런 철학도 모르는 의사들한테 하나의 시체해부용으로 한다는 이게 말이 안 된다. 인간은 어차피 죽게 마련이고 인간에게는 죽을 수 있는 여유가 항상 있다고 본 거예요. ‘네가 자살해서는 안 돼.’라는 명령조차도 하나의 동질성에서 나온 명령이죠. 그 명령에 자기가 동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전쟁이란 개념을, 모든 개념이 다 바뀌는 거예요. 국가가 벌이는 걸 전쟁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국가가 이웃 나라 치는 걸 전쟁이라 하지 않고, 전쟁이라 하는 것은, 이 국가에서 차이 나서 ‘너 같은 인간은 국민 되지 마. 어디 국민이야.’ 발로 차버리는 거예요.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추방된 차이 나는 서로 다른 이 자들이 기존에 있는 동질성을 공격하는 걸 전쟁이라 보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유목주의.


그리고 이걸 공격했을 때 이걸 차지하면 안 돼요. 차지하면 동질성 되니까. 그냥 깨는 거예요. 계속 깨는 거예요. 들뢰즈가 왜 이걸 주장하느냐 하면, ‘전 세계의 모든 권력에 속한 사람들이여, 끊임없이 여러분들의 정해진 노선에서 탈주하세요. 이탈하세요.’ 그것이 이 사회를 만드는 윤리입니다. 들뢰즈의 윤리는 탈주, 벗어나서 질주하는 것, 동으로 가면 서로 가고 서로 가면 동으로 가는 거예요.


이 정신을 그대로 구현한 사람이 진중권 씨라고 4대강하면 4대강한다고 시비 걸고, 소고기 들여오면 소고기 들여온다고 촛불집회하고, 모든 것에서 시비 거는 거예요. 그 사람이 이번에 또 하나 시비 걸었어요. 서태지와 이지아 이혼한 것도 괜찮다고. 모든 것을 하여튼 기존에 뭔가 옹색하게 하나로 모으려 하는 것을 계속해서 들쑤셔서 해체시켜나가는 거예요.


해체시켜나가면 그동안 제 값을 못 받던, 숨어있던, 천대받던 다시 말해서 노래는 잘하는데 인물 못 생긴 것들은 김태원 통해서 위대한 탄생으로 다시 태어나야 돼요. 그럴 때 이 사회는 부유해지고 그때 사회는 참된 진보, 하나의 질로 진보되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무시당했던 것들이 더불어 상생하는, 서로 있는 사람 뜯어서 없는 사람한테 나눠주는 상생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오직 탈주밖에 없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이상적인 사회에서 또다시 머물지 말고 탈주하라.


탈주할 때 어떻게 탈주하느냐? 횡단하라. 보통 선배들이 이야기하는 길이 아닌 곳에는 가지를 마세요. 하잖아요. 들뢰즈는 반대입니다. 길이 아닌 곳만 골라서 찾아가게 되면 거기서 새로운 그동안 발휘하지 못한 창조성이 발휘될 것입니다. 전부다 군에 가는데 나는 군에 못 가겠다고 버티는 것, 그걸 들뢰즈는 창조성으로 보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예’할 때 혼자서 ‘아니오’라고 내미는 것, 그걸 창조라고 합니다.


창조를 억누르지 마라. 항상 창조가 없으면 이 자연에 근접할 수 없다. 왜? 자연 자체가 운동 이미지로 날마다 창조하고 있는데 이 건방지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 그 자연을 지 마음대로 자기 동질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임의로 자연을 파괴하고 그걸 자기 것으로 삼아버리고 물을 댐으로 막으니까 동식물들이 다 죽어버리고. 왜 자연 스스로의 창조성을 훼손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제 점점 환경운동까지 가죠. 환경운동 가고 개량한복까지 입어야 되고 수염도 길러야 ⋯


동양철학은 그냥 자연스럽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동양철학과 차이점은 여기선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요. 창조성을 발휘하라. 그럼 창조성을 발휘하는 기본의 힘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그냥 이미지에요. 이미지는 바로 욕망에서 나온 거예요. 욕망은 곧 창조가 되는 거예요. 그럼 기준은 뭐냐? 기준은 좁은 길로 가야 되기 때문에 현재 피어오르는 창조성과 욕망을 억지로라도 억압을 해줘야 돼요. 억압을 해줘야 질서가 잡히죠. 그러니까 그게 누구를 위한 질서죠? 기존에 이익을 챙겨먹을 대로 다 뽑아먹는 너희들만의 이익이죠. 그들의 이익 때문에 설움 받는 천대받는 사람의 이익은 대변하지 않죠. 이 말은 자본주의에서 아주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토지공사에서 보너스를 줬죠. 누구 좋으라고 준 보너스입니까? 직원들 가족들 좋으라고 준 거지 일반 서민들 좋으라고 준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 토지공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본주의에 의하면 돈을 한쪽으로 몰아주어야 그 사람이 소비를 해야 못 사는 사람과 더불어 소비가 장려되어서 같이 살아가는 사회가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그 말이 맞아요. 쿠바에 카스트로가 더불어 살려다 망했잖아요. 지금 이해 안 되십니까? 가까운 북쪽나라에 누가 있습니까? 김정일. 김정일이 더불어 살려다 망했어요. 무슨 마약해서 더불어 삽니까.


자본주의사회는 그 사람의 것을 그 사람의 노동을 빼앗아서 힘이 한 곳에 몰리면 그 힘이 그 사람이 나중에 갖고자 하는 힘보다 더 많은 힘을 부수로 얻어먹을 수 있어요. 주인이 먹는 상에서 떡이라도 오는 겁니다. 줘야 와요. 왜냐하면 걷어내는 재주가 창조고, 그 재주도 없으면서 돈을 쥐고 있는 것은 창조에 위반하는, 창조에 반하는, 창조에 대항하는 허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같은 돈을 나눠줄 때 이건희한테 10억 주고 다른 사람 10억 주면, 이건희는 10억으로 100억 키운다니까. 100억 얻는 것이 내가 20억 얻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요. 이게 바로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 아닙니까. 없는 놈은 있는 것도 빼앗기고 있는 놈한테 더 주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왜 정답이 되느냐 하면, 사람마다 능력이 달라서 그래요. 그래서 들뢰즈는 말합니다. 도대체 그 능력이라는 게 어디 써먹기 위한 능력이냐 말이죠. 누구 좋으라고 능력이란 말이죠. 사람이 10억 얻을 걸 돈 잘 버는 사람한테 줘서 20억 받으면 10억보다는 20억이 낫지만 전에 100억 갖고 있는 사람은 200억 갖고 있는데. 차이가 전에는 10억에서 100억이고 90억밖에 차이가 안 나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나한테 20억 떼어주고 자기는 내 돈으로 200억 되었으니까 180억이 차이 나죠. 사람은 차이 나는 만큼 그 차이로 인하여 더 서럽죠. 왜? 인간은 정감이미지니까. 북한 사람들 기분 좋아요. 다 못 사니까. 그런데 한국의 어떤 모델은 자살했어요. 밥 못 먹어서요? 천만의 말씀. 옛날 인기와 지금 인기가 차이가 있으니까.


들뢰즈를 끝내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은 창조다. 창조를 막지마라. 그런데 그 창조는 어디서 이룬다? 기존의 동질성을 할 때 미래를 위해서 현재는 질서가 깨지고 문란하고 시리아에서 또는 이집트에서, 리비아에서 하는 것이 지금은 그 나라에서는 수천 명이 죽었기 때문에 혼란스럽지만 후대는 뭐라 하겠는가? ‘그때 우리 선배들이 공격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아직 가다피의 15억 재산에 노예가 되어서 살 것이라고 아마 후회할 것이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라 할 때 기피하게 되면 뭔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창조성을 주는데 들뢰즈가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그것은 대자연은 인간보다 위대하기 때문에. 위대한 자연을 위대하지도 못한 자기 손아귀에 쥐었다 폈다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위대한 대자연을 위대하게 만들 때 우리의 본래의 이미지로서 대자연과 더불어 영원할 수 있어요.


왜? 뭐가 사라지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이 자기 동질성이 없으면 죽음이 두렵지 않죠. 그런데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악마가 뭘 쥐고 우리를 힘들게 합니까? 죽기를 무서워하는데 들뢰즈는 그것마저 죽기 무서워 안 하면 되잖아. 안 죽게 하면 헛된 것도 없잖아. 안 죽는 방법은 저쪽에서 날 치기 전에 내가 나를 쳐버리면 없애버리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무아론’입니다. 불교입니다.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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