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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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4c 봄특강 - 들뢰즈와 라캉과 개혁주의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녹취:한윤범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 시간은 라캉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라캉의 선배가 있습니다. 유명한 프로이드란 사람인데 라캉은 프랑스 사람이지만 프로이드는 독일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정신과의사인데 당시는 정신과란 과목 없었고 그냥 서비스업에 종사한다는 그런 정도로 있었던 겁니다. 프로이트가 뭘 관심을 가지느냐 하면, 최면을 걸어보니까 그 사람이 최면 걸기 전에 나오지 않았던 이상한 이야기들이 나와요. 최면은 꿈이에요. 꿈속에서 뭐가 일어나는지 ‘대체효과’ 또는 대신하는 말을 대신, 용어를 바꾸는 대체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왜 인간은 뭔가 원래 했던 말 대신 다른 말로 자꾸 대체하느냐? 똑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왜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느냐? 욕설 같은 경우도 간단해요. ‘난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될 걸 자꾸 무슨 새끼야, 이런 식으로 왜 자꾸 대체하느냐? 그것을 프로이드는 억압하기 때문에 그래요. 꽉 누르는 거예요. ‘그 말을 하면 네 위신이 날아가는 거야. 그 말만은 제발. 그 말 하면 네 체면은 말이 안 돼. 깎이는 거야. 바꿔, 바꿔. 그걸 다른 말로 바꿔.’ 뭔가 누르는 억압하고 있다는 겁니다.
라캉이라는 사람은 억압을 하는데 누가 억압하느냐? 내가 나를 억압하는데서 뭐가 형성되느냐 하면, 주체가 두 개로 분리된다는 여기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에요. 이거는 그전에 다 이야기한 거고요. 주체가 둘로 분리되면서 주체가 형성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주체는 하나인데 둘로 나눠지는 게 아니고 둘이 되면서 그게 주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거예요. 주체가 둘로 갈라지는 그 모습이 제대로 된 주체 모습이란 말이죠. 그게 기존의 주체관과 완전히 다른 겁니다.
아까 밥을 먹었잖아요. ‘내가 나는 밥을 먹은 것을 안다.’ 할 때 앞에 있는 ‘나’와 뒤에 있는 ‘나’가 둘로 나눠진 거예요. 앞에 나는 밥 안 먹었어요. 뭔가 아는 수준에 있고, 뒤에 있는 나는 실제로 밥을 먹은 나가 돼요. 그렇게 밥을 먹고, 그 다음에 그 밥 먹은 것을, ‘기억 나. 그때 밥 먹었어’ 할 때 이것이 주체가 둘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게 원래 인간의 주체라는 겁니다.
원래 인간의 주체기 때문에 여기서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른데 그건 뭐냐 하면, 두 개가 된 것을 하나로 만들려고 하는 억지가 모든 정신병의 원인이 되는 겁니다. 이걸 ‘증상’이라고 해요. 징후, 증상 비슷한 말인데요. 감기 걸리면 콧물 나잖아요. 그처럼 모든 정신병은 둘이 돼야 되는데 이걸 하나인 체 하고 억지로 하나인 것처럼 우길 때 그게 문제 되는 겁니다.
대통령 선거하는데 ‘나를 찍어주세요. 국민 여러분, 제발 믿으시기 바랍니다.’ 라캉이 보면, 정신병. 왜? 하나의 자기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정신병이에요. 둘로 갈라져야 되는데. 이래야 돼요. ‘여러분, 저를 찍어주시면 제가 국회의원 될 때 저한테 기분 좋습니다.’ 이러면 정상 되는 거죠. 이걸 교회 식으로 하면, ‘주님, 저를 구원해주옵소서.’ 정신병. 반대로 했다. ‘주님, 저는 주님만 사랑합니다.’ 정신병. ‘주님 사랑해서 덕분에 구원받읍시다.’ 이게 정상.
들뢰즈는 그것을 이런 쪽으로 가지 않고, 들뢰즈는 아까 무조건 긍정적으로 봤지요. 이렇게 돼버리면 라캉은 긍정적이지 아니죠. 그 사람은 의사기 때문에 환자에게 ‘괜찮네. 집에 가세요.’ 이러면 안 되잖아요. 고치러 온 사람 고쳐줘야 돈 버니까. 이건 문제 있습니다. 차가 고장 났는데 ‘차 멀쩡하네. 그냥 가세요.’ 하면 장사 안 되잖아요.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들뢰즈는 전부다 긍정으로 본 겁니다.
들뢰즈란 사람이 긍정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있음은 나는 아니에요. 아까 계속 강의한 것처럼 나의 있음이 아니고 나보다 먼저 뭐가 있다? 그냥 있음이에요. 있음은 무슨 이미지라 했습니까? 운동이미지로 모든 전자, 원자, 분자 튀면서 그것이 여러 가지 주변의 요소에 의해서 주변의 역사라 하면 쉽게 이야기해서 부모가 키가 작다든지, 엄마가 당뇨가 있다든지, 이런 주변의 요소에 의해서 나는 키 작은 당뇨병 환자가 될 가능성으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럴 때 어떻게 부모한테 욕하느냐? 부모는 자기 잘못이 아니잖아요. 부모의 유전인자를 받아서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된 것은 너 때문에, 나 때문이라 하지 말고 전부다 긍정하자. 긍정의 모든 끌어 모을 수 있는 바탕은 있음이죠. 있음은 절대로 없음이 안 되죠. 그러니까 있음은 어디서 나왔느냐고 들뢰즈한테 물으면 안 돼요. 있음은 그 앞에 있음에서 나온 거예요. 이걸 영원히 빙빙 돈다고 해서 영겁회귀.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고, 모든 것이 그냥 흘러가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3장 생각나지 않습니까? 무슨 불 심판이 있어. 산은 있는 그대로, 자연은 있는 그대로 있는데 뭐가 중간에 강제로 끊는 게 어디 있어. 만약에 자연을 중간에 끊는다면 종말이 있다면, 종말 입장에서 왜 끊어졌는가를 소급해서 찾아내야 되겠죠. 그럼 귀찮잖아요. 차라리 종말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다가 안드로메다에 가든지 어디 북두칠성에 가든지 하여튼 살면 편하다는 거예요. 있음은 없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있음은 있음으로 환원하기 때문에 여기서 어떤 것이 이익이냐 하면, 죽음에 대한 초월이 가능하다고 보는 거예요. 죽는 것이 무섭지 않다면 세상의 다른 근심은 자연적으로 사라지겠죠.
이것이 들뢰즈의 철학이라면, 라캉 같은 경우에 정신과 의사로서 정신병을 치료를 해야 되기 때문에 여기서 정신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거예요. 정신분석이 정신병 치료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꿈을 조사해보니까 강하게 억압이 돼있어요. 억압된 채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뭐가 고장 났느냐 하면, 억압된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되는데 바꾸질 않은 거예요.
내가 본래 의도했던 의도와 그걸 기의, 기호의 의미라 합니다. 의도했던 것을 표현할 때 기호로써 표현한다고 해서 기표라고 하는 거예요. 기표를 크게 써서 S라 하고, 기의를 작게 써서 스몰 s라 하는데 그 중간에 막대기를 하나 그어요. 위에서 억누른다는 겁니다. 이게 꿈에서 본 억누르잖아요. 빙빙 돌아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걸 응축이 되는 겁니다. 누른다 말이죠. 억압할 때 가만있습니까? 반발하게 돼있어요.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그 남자 인상이 어땠어? 인상이 뭔가 창백한 것 같던데.’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럼 약간 얼굴이 피곤해서....’ ‘그거 아니야. 뭐 있는데.’ 자꾸 이렇게 되면 정상인입니다. 뭔가 확정되면 정신병이라. 미쳤어. 계속해서 바꿀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을 때 정상인이 되는 거예요.
기의가 기표에게 하는 말이, 그건 본래 의도가 아니야. 바꿀게. 바꾸는 걸 치환. 이걸 언어로 하면 환유라 하고, 응축되는 걸 은유라 하는데 이건 문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죠. 여기서 억압할 때 반박하면서 뭘 강요하느냐 하면, 다른 표현으로 바꾸라고 여기서 저항을 하게 돼요. 그러면 다른 것으로 바꾸게 되는 겁니다. 거기서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주체가 나오는 거예요.
그럼 아까 들뢰즈 철학 다시 해봅시다. 들뢰즈 철학은 주체가 없지요. 없는 이유는 주체 뒷부분에 우발적인 사건이 있다 했어요. 사건이 터지면 주체에 사건이 터지는 게 아니고 사건이 하나 나게 되면, ‘참, 그 사건이 뭐지?’라고 뒤돌아보면서 회상하는 순간 주체가 생겨버린 거예요.
애가 정신없이 공부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밥 먹어야지’ 하고 자기를 호명해주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이구. 시간이 이만큼 됐네.’ 할 때 공부하는 운동이미지에서 다시 시간이미지로 바뀌면서 지금 내가 무슨 행동을 해야지 하면서 주체가 후차적으로 보는 겁니다. 엄마가 노크하기 전까지 자기는 지금 내가 누군지를
다시 할게요. ‘나는 지금 공부하고 있는 나를 알았다.’ 여기서 뭐가 없어집니까? 나가 없지요. 이 나가 없어요. 왜? 공부하고 있는 지속만 있기 때문에. 들뢰즈 이해되십니까? ‘나는 비가 오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 할 때 당사가 비가 거기 대해서 신경 씁니까, 안 씁니까? ‘내가 비 오는데 네가 알았다, 어쨌다 시를 왜 짓느냐 말이죠. 네 볼 일 봐. 난 비 오고.’ 그거잖아요. 대자연을 억지로 ‘비야 촉촉 내려라.’ 하면, 비가 뭐라 합니까? ‘너는 잠이나 자. 촉촉 내리든 축축 내리든 내가 알아서 할게.’ 이게 자연이에요. 왜 자연을 자꾸 ‘나는 네가 촉촉 내리는 걸 본다.’ 본든 말든 비는 아무 상관없어요.
욥기 보세요.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 ‘하나님, 황무지에 비 오면 쓸데없어요. 낭비입니다. 비 모아 놨다 필요할 때 단비를 주옵소서.’ 이게 우리 마음대로 안 된다 말이죠. 주체가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자연이 주체라고 한 것은 스피노자에요. 그것도 아니에요. 자연은 아예 주체가 없다니까요. 너는 너대로 비 오고, 나는 나대로 비 온다고 시 짓고. 그렇게 흘러가는 거예요. 누가 누구를 장악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체는 바로 이렇게 되죠. 사건이 오게 되면 그 사건을 소급해서 지각이미지에서 감성이미지가 동원되고 그게 자꾸 응축이 되서 그 다음에 행동이미지가 된 다음에 드디어 그게 물질화되면서 나중에 ‘내가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지속이미지로, 시간이미지로 소급해보면 그 전체가 이미지화된 주체가 되는데 결국은 나가 아니고 나 이미지에 불과하다 말이에요. 왜냐하면 이미지로 분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조립한 거거든요. 조립하게 되면 나란 것은 없단 말이에요. 전부다 하나하나 지속이미지 밑에서 일어나는 운동이지 나라는 게 없는데도 그걸 뭉쳐서 나라고 한다 이 말이죠.
다만 내 쪽 지속, 어떤 다른 사건이 걸쳐서 너는 못 생긴 엄마 만나서 못 생긴 아들 됐고, 나는 잘 생긴 아빠 만나서, 사건의 차이지 그걸 누가 잘했나, 못했나 따지면 안 되거든요.
아킬레스라는 신화에 나오는 마라톤 선수가 거북이와 달리기하면 누가 이깁니까? 이게 기존의 동질성으로 보면 마라톤 선수가 거북이보다 빠르죠. 그래서 아킬레스란 마라톤 선수가 이겼다고 돼 있잖아요. 그런데 거북이의 체형에서는 거북이가 그만큼 걷는 게 거북이의 승리에요. 바보 같이 아킬레스가 거북이만큼 달리면 인간이 문제 있다고요. 하나님이 만든 응축되어 만든 그 지각의 범위 내에서 그 정도 달리는 것도 대단해요.
왜 둘을 붙여서 이기고 지고 하는 썩어빠진 사고방식이 오늘날 자본주의를 경쟁사회로 만들었다 이 말입니다. 수학 못하고 영어 잘하는 사람이 수학 잘하는 사람과 시험 치면 누가 이기는데? 수학이 이기잖아요. 그게 어떻게 바른 윤리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도덕이냐고 들뢰즈가 한탄스러워하는 겁니다. 서로의 지각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에 승부를 붙인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되죠.
그래서 들뢰즈를 해설한 책이나 글에 보면, 들뢰즈도 그런 게 있습니다만 바둑을 두는데 이세돌과 구리와 BC배 삼번기 하는데 여기서 바둑을 두게 되면 초보 같으면, ‘둘 데 많네. 어디다 둘까? 빈 자리 아무데나 두자.’ 이러잖아요. 이러면 패배해요. 같은 지속이기 때문에 패배, 승리자가 따로 있습니다. 바둑을 그렇게 두는 게 아닙니다. 내가 만약에 여기 두었을 때 전체 판이 새로 짜이는 거예요. 세 개가 모이면 세 개 판이 짜이고, 열 개가 모이면 열 개 판이 다 달라요. 이게 인생사라는 거예요.
열 사람이 있을 때 행동과 처신과 두 사람이 들어왔을 때 행동과 처신이 다릅니다. 교인 새로 왔을 때 설교가 달라져요. 그 사람 배려해야지 다른 사람 다 안다고 지나가면 그 사람은 무슨 이상한 이야기한다고 된다 말이죠. 순간순간 지속의 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때마다 대처방법이 달라요.
예를 들면 부모의 일관성 없는 훈계에 대해서 문제 삼습니다. 왜 아버지는 동생한테는 그렇게 하고 나한테는 그렇게 하고. 엄마가 뭐라 합니까? ‘너는 형이잖아.’ 형이 잘하면 지속의 성질의 판과 동생 판이 달라요. 이 판, 저 판이 같이 되면 개판 돼버립니다. 모든 것이 이처럼 들뢰즈는 말하기를 이게 진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철학이고 우리의 본 모습이란 거예요. 그걸 일관적으로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여기서 라캉과 들뢰즈의 그런 차이점을 봅시다. 주체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에서 둘 다 공통점이에요. 그래서 들뢰즈는 주체를 없애자. 왜? 주체를 없애야 바른 윤리가 되니까. 그런데 라캉은 지금 윤리를 의도적으로 꾸미기 위해서 없애자 하는 게 아니지 그냥 주체 없는 거라고 할지라도 생기는 걸 어떡해? 둘 중에 어느 말이 맞습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이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어느 부자청년이 와서 ‘제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라고 했을 때 자기는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십계명 자체가 틀릴 리가 있습니까. 그런데 ‘네가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르라.’ 이 말은 뭔 뜻입니까? 예수님 등장하고 판이 바뀐 거예요.
예수님 없을 때는 십계명으로 자기가 잘난 체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개입해서 예수님과 바둑 한 수 두고 난 뒤에는 완전히 판이 바뀐 거예요. 이젠 정하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정하신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아니하면 심판이 있으리라. 사도행전 17장의 말씀처럼. 이제는 완전히 질이 달라졌어요. 이젠 새 언약 시대란 말이죠. 정신이 인간이 아니고 죄 있는 육신을 가진 예수님 중심으로 판이 달라졌단 말이죠.
그래서 사울이란 사람이 바뀐 판을 죽은 자와 접신을 통해서 새 판을 받아드렸지요. 예수님도 사전에 그렇게 한 적이 있어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 금식기도하고 이런 것 하지 말고 차라리 웃어라, 즐겨라. 나는 죄인들과 함께 음식 먹겠다. 이것이 새 언약 판에 맞다 이 말이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다 지키신 율법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는 이것이 바로 새 판이다 이 말입니다. 왜? 예수님 때문에.
유대인들이 자기가 죄인이 안 되려면 어떻게 합니까? 기존 판을 유지하려면 예수님 판을 없애면 되잖아요. 그리고 제자들을 잡아 죽이면 되고. 가인이 자기의 주장을 옹호하려면 누굴 죽이면 돼요? 아벨을 죽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가인의 시도를 익히 아시고 아벨이 제사 드리고 싶은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벨로 제사 드리게 함으로 말미암아 가인에게, 사람들에게 기존의 판에서 얻어맞는 그 판이 진짜 현실이라고 이야기하고, 아벨을 죽이는 이쪽이 환상에 불과한 판이라는 것을 보여주죠. 예수님이 와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죠.
사도 바울이 그 판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했어요. 이제는 절기 같은 것 지키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절한다고 하는 것은 전부다 돈 때문에 목돈 챙기려고 한 짓이고.
다시 묻습니다. 주체가 없어야 되는가는 희망사항이고 실제로 당신 말대로 이 세상이 자연 그대로 돌아간다면 자연에서 그대로에서 뭐가 생깁니까? 부정이 생기지 않느냐? 이게 지젝이란 사람이 들뢰즈를 반박하면서 이렇게 해요. 들뢰즈는 모든 것을 긍정하자. 지젝은 긍정하는 건 좋은데 우리가 긍정하고 싶어도 반드시 부정이 생긴다 이 말이죠.
이슬람교나 개혁주의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라 하죠. 주권 때문에 누가 죽었어요?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이걸 왜 빼먹느냐? 예수님이 주권을 안 믿는 사람이 돌아가시면 이해되는데 그게 아니고 여호와의 주권, 주 되심을 이미 들은 사람에게 했다면 주권이 여호와 주권에서 구체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이동하면 되는데 문제는 이동할 때 그냥 이동하는 게 아니고 뭘 반드시 부정하면서 이동한다 말이죠. 인간이 모색할 수 있는 모든 주권은 다 악마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예수님 주권으로 몰리니까 오늘날 복음이 그렇게 인기가 없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한테 모든 것이 ‘예’가 되니까 예수님의 예가 가만있는 예가 아니고 뭘 부정한다? ‘네 속에서 기어 나오는 것은 죄밖에 없다.’라고 부정하는 긍정이 돼버리니까 참을 수가 없다 이 말이죠. 주님 가르침은 전부고 내 가르침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그럼 이야기하죠. 아무것도 아니게 하신 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라캉한테는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하면, 그렇게 되면 들뢰즈 말이 맞아요. 인간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젝이란 사람은 라캉에다 이 점을 집어넣어요. 인간이 상상에서 상징으로 넘어오면서 주체가 둘로 분리되어서 인간은 결국 늘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 이야기를 무엇이 부정적으로 만들었느냐를 집어넣을 때 뭘 강조하느냐 하면, 실재계를 집어넣은 겁니다. 지젝이라든지 라캉도 후반 철학에서는 실재계를 이야기한 거예요. 실재계가 뭡니까? 그냥 실제죠. 그럼 상상과 상징은 뭐가 된다는 말입니까? 졸지에 환상 되죠.
지젝이란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왜 사람들은 유대인을 그렇게 싫어하느냐? 유대인이 싫어서가 아니라 본인 속에 나를 싫어하는 실재 덩어리가 있어서 내 안에 나를 싫어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걸 대체하기 위해서 나는 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을 싫어한다고 바뀌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 놈만 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자기가 자기 속에 뭔가 경험이 안 될 때는 반드시 자기 대신 얻어맞아야 될 사람을, 대상을, 모델을 찾아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가끔 격하게 설교할 때는 ‘아하. 부부 싸움했구나.’ 반드시 대상을 찾아서 옮기는 그것이 뭐라고요? 그걸 뭐라고 합니까? 그게 바로 정상인입니다. 이게 뽀인트에요. 이게 정상이에요. 이걸 참아야 하느니라. 은장도로 찌르면서. 이러면 미친 겁니다. 왜 참는데? 열녀문 준다고? 열녀문 때문에 한다면 그건 정상인 되죠. 열녀문이 자기 대체되기 때문에.
사람은 반드시 분풀이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분풀이 때문에 타인을 원합니다. 자기 마누라, 자기 남편 죽으면 못 사는 이유가 있어요. 분풀이 대상이 없으니. 누굴 찾아 조져야 돼. 그게 나쁜 것이 아니고 그게 정상이라니까요.
긍정적이고 싶은 이 세상에서 부정적인 게 나오는 걸 어떡해? 그러니까 학문하는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고쳐보자 하면, 이건 강제성 있는 윤리, 도덕이 되는데 라캉은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있는 것은 그대로 있다고 인정하는 그것이 인간의 할 일은 끝나는 거예요. 그걸 고친다든지 이래서 숨기자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숨겨버리면 그건 뭐가 됩니까? 들뢰즈에 의하면 뭘 이야기한 거예요? 사회를 핍박하는 것밖에 안 되니까.
프로이드가 마지막 사상에서 쾌락을 이야기했습니다. 쾌락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짐승적인 요소가 있다.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이 꿈에서 이상한 짓을 다 하니까. 그런데 그것을 안 들키게 응축하고 그 다음에 치환, 다른 걸로 바꾸는 거예요.
그러니까 들뢰즈가 했잖아요. ‘신수 좋~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신수 좋다는, 훤하다는 말입니까, 뭐예요? ‘요새 등쳐먹고 사는구먼.’ 이럴 수도 있고. 사원이 사장님 보고, ‘신수 훤~하십니다.’ 뭡니까? ‘월급 안 주고 돈 혼자 먹으니 기분 좋지. 보너스도 안 주고 도둑놈아.’ 그런 뜻이라고요. 실제 그런 뜻으로 하는데 그게 거르지 않고 그대로 나오는 게 꿈 아닙니까. 꿈에 사장 패버리고. 난 어젯밤에 이수근 주례하는 꿈꿨어요. 갑자기 이수근이 왜 나왔어. 희한해.
그게 뭐냐 하면, 결핍된 쾌락을 주변의 것으로 끌어 모아서 기어이 쾌락의 수위를 유지하지 아니하면 인간은 짐승이 되지 못합니다. 짐승이 되지 못하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에요. 정신병자됩니다. 인간은 짐승일 때 가장 인간적인데 그 인간적에서 사회인이 되면 짐승 같은 짓을 하면 안 되죠. 왜? 그 다음에 프로이드는 죽음이다.
‘이러다 내가 얻어맞지. 돌 맞지.’ 여기서 타협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인간의 제일 밑바닥에 있는 이드라는 게 있고, 우리말로 하면 거시기. 그러니까 이건 전라도에서 많이 쓰죠. 거시기하죠. 영어로 하면, something.
그 다음에 외부에서 들었던 ‘네가 짐승인 건 인정하는데 밖에 나가면 그따위 짓 하면 안 되지.’라고 잔소리해대는 게 있어요. vox, 음성인데 이 음성이 낮에만 들리는 게 아닙니다. 밤에도 들리고 다 들려요. 무의식에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 돼.’ 하는 잔소리가 있게 되면 속에 있는 짐승 같은 이드가 ‘이래서는 안 돼. 공주는 공주다워야 돼. 신자는 신자다워야 돼. 성화돼야 된다고. 이러면 안 돼. 방종하는 거야. 막 사는 거야.’ 이런 식으로 자꾸 듣게 되면, 이게 나중에 억압에 대한 타협책을 내놔요. 적당한 선에서. 이걸 에고라 해요. 다른 말로 하면 자아라 합니다.
정신병은 바로 에고가 제대로 정립하지 않아서 자기 양심에 너무 따른다든지.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지하철 타고 와서 손 씻고, 돌아서서 손잡이 만지다가 ‘이거는 내 아들이 만진 거니까 박테리아가 십오만오천오백다섯 개지.’ 또 씻고. 돌아서서 ‘수건, 우리 아들과 같이 쓰면 안 되지.’ 다시 또 씻고.
그러면 법이 뭐냐 하면, ‘이걸 하란 말이야’라고 명령 들어오면, ‘알아들었단 말이야’ 이래 나오는 거예요. 알아들었단 말인데 그 다음에 뭐가 문제에요? 어느 정도 맞춰줘야 명령하신 분의 의도에 충족할까요? 그게 무한대로 안 되는 거예요. 계속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니까 거기서 주체가 갈라지는 거예요.
이걸 라캉은 이렇게 그림을 그려요. 내가 누군지 모른다. 이걸 삼각형으로, 모호함. 모호한 내가 본래 어떤 의도가 있어요. ‘그때 너, 기분이 어땠어?’ ‘그때 기분이 째지다, 멋있다. 그거 아니야. 그것보다 더 괜찮았어.’ 자꾸 하는 거예요. 여기에 보세요. ‘너 기분이 어땠어?’라고 물을 때 기표가 표현의 여러 가지 방식이거든요. ‘좋았어?’ ‘그것 아니야.’ ‘기뻤어?’ ‘그것도 아니야.’ ‘터졌어?’ ‘그게 적당하네.’라고 하는 그 순간 이것이 고정되면서 여기서 주체가 되는 겁니다.
‘너, 그때 기분이 어땠어?’라고 물었을 때 이게 표현을 하는데 표현은 이미 나와 있는 거예요. ‘그때 네가 홈런 칠 때 기분 어땠어?’ ‘~#$%^&*~’ 이러면 모르잖아요. 알아듣게 이야기해. 알아듣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미 기존에 나와 있는 나의 체계에서 나오죠. 그러니까 인간의 주체라 하는 것은 항상 무엇과 관련돼있어요? 이미 기존에 짜여져 있는 언어를 그걸 경과하면서 이렇게 방향이 잡히고 이거는 위에서부터 이 모호함이 ‘바로 그거야’라고 잡히죠. ‘그래 맞아. 그때 홈런 칠 때 기분 좋았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체가 이미 원래 의도했던 것과 같지 않아요. ‘아니야. 그게 아니야.’ 하고 본인만 알아요. 그래서 이걸 갈라져 깨진 거예요. ‘빗금 친 주체’($)라 합니다. 이게 라캉이론의 시발점이 돼요. 나중에 오징어 같은 그림이 됩니다. 지금 시발점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 분열된 주체로 사는 거예요. 주체니까 이게 접근이 안 되는 이만큼 간격이 갈라지죠. 결핍이 되겠죠. 결핍이 되던 말든 방금 뭐가 등장했습니까? 분열이 되던 말든 주체가 등장하죠.
이것이 바로 누가 호명하지 않으면 주체가 없다는 그 말입니다. 누가 나를 물어주지 않으면 주체가 없어요. 주체가 없으면 편하게 살겠네?? 천만의 말씀. 주체가 없으면 의미가 없어요. 누가 꽃이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그 꽃은 없는 존재가 된다니까요. ‘없는 존재로 살면 될 것 아니냐.’ 하지만 있는데 어떡합니까? 내 몸이 있는데 이 몸을 어떡하든 표현을 해야 되는데 말할 수도 없고 뭔가 표현될 수 있는데 답답하다. 적당한 표현은 없고 이걸 표현했을 때 몸은 아까 짐승의 몸, 짐승의 정체는 항상 생존욕구 아닙니까. 그건 꿈에서 안다고 했지요. 꿈에서 아니까 그걸 억압한 거고, 사회 나가서 주체로 활동할 때는 이것이 짐승으로 하면 안 되고, 사람 이름 되려면, 만약에 ‘끝내줬어’ 이러면 곤란하다 이 말이죠.
세계 20개국 정상회담 하는데 ‘체코 대통령, 이번 정상회담 어떻게 생각합니까?’ ‘끝내줘요.’ 이러면 어떻게 됩니까. ‘적어도 외교어를 써야지, 여기서 끝내줘요 쓰면 됩니까.’ ‘내가 참 대통령이지.’ 자기 집에 가면 끝내준다고 할 거예요. 하지만 거기서 그러면 안 돼요.
칠레 대통령입니까? 볼펜 넣다가 걸려버렸어요. 선물 주는 걸 넣으면 안 됩니까? 당신은 일개 당신 존재가 아니고 나라를 대표하잖아. 나라를 대표한다는 게 뭡니까? 지금 여기서 원하는 주체는 짐승 같은 볼펜 탐내서 집어넣는 집구석에서나 하는 행동하지 말고 여기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돼요. 그러면 그 대통령 출장은 피곤한 출장입니다. ‘이제 집어넣었다. 볼펜 없나? 그것 차지한다고 애먹었다.’ 이게 바로 정상인입니다. 볼펜 있는데 ‘대통령, 이것 안 하죠? 내 것 할게.’ 이것 완전 미친 대통령이라.
사람은 안 미쳤는데 대통령이라는 기표, 그 사회에 적합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경우가 뭡니까? 그 사회에 짜인 판에 따라서 주체가 하나가 되는 것이고 주체가 압축되고 이체되고 달라지고 변동할 것을 요구받는 거예요. 이것을 상징계라고 합니다. 라캉에 대해서 처음 하는 사람은 이 용어에 대해서 굉장히 의아해 할 거예요. ‘목사님, 그게 현실 아닙니까? 왜 그걸 상징으로 봐. 상징이란 없다는 건데 왜 이걸 상징계라 합니까?’ 라캉은 현실을 상징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상상계도 있고 여기 실재계도 있는 거예요. 이 세 개를 다 합쳐야 현실이란 말이죠.
그런데 사람은 뭐만 자꾸 생각합니까? 방금 상징계로 하니까 이 상징계에 견디지 못하면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되는 거예요. 도대체 그 사람은 사회생활을 못해. 한강철교에 가서 ‘나를 알아달란 말이야.’ 그러면 상징계는 질서계거든요. 경찰이 있다가 ‘아저씨. 내려오세요. 지금 교통 방해했습니다.’라고 그 사람의 말은 안 들어주고 무슨 말을 대신합니까? 그 사회에서 자동차가 빨리 운행을 해야 돼요. 자동차 안에는 기차시간 다 돼가는 사람도 있거든요. 빨리 소통을 시켜줘야 하는데 상징계에서 ‘빨리 내려오세요.’ 하면, ‘나 돌아갈래.’ 한다고. ‘돌아가나마나 일단 내려와서 돌아가든지. 교통 방해되니까.’ 그걸 그 사람은 견지지 못하는 거예요.
[박하사탕] 마지막에 ‘나 돌아갈래.’ 하는데 어떤 사람은 ‘나 돌아버릴래.’ 안 합니까. 그 말이 맞아요. 고문수사관으로 평생을 살면서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자기는 상징계에 충성했는데 뭐가 거부한다? 밑에 있는 짐승 같은 자기의 본능이 도저히 아무리 월급도 좋지만 애를 생으로 잡는 건 아니다. 그게 나중에 너무 찢어져서 자살로 끝나버려요. 왜 자살하는지 압니까? 고통은 나 때문에 생기니까 고통 없애는 방법은 나만 없애면 고통이 없어지잖아요. 얼마나 간편해요. 자기가 죽으면 자살하면 그만이니까. 그런 방법으로 생은 끝나는 겁니다. 들뢰즈 저도 죽었으니 그것도 지속이라 하겠지만.
지금 상징계를 했는데 상상계는 이야기 안 했거든요. 상상계는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어릴 때부터 상징계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고 상상계부터 생겨요. 나중에 라캉의 이론도 바뀌어서 어릴 때부터 실재계, 상징계 다 있다고 되지만 대략적으로 상상계부터 먼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상상계 이전에는 주체라는 자체가 없어요. 이 주체는 엄마가 대신합니다. 6개월부터 18개월 사이에는 엄마가 모든 걸 다 책임집니다. 영양보급부터 배설행위까지 전부다 엄마가 다 해주고 엄마가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애가 엄마 뱃속에서 나와도 다 나온 것이 아니에요. 몸은 나왔지만 그 정신세계는 여전히 엄마한테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가난애고. 가난애가 어느 날 거울을 봐요. 이걸 거울단계라 하는데.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있는 그것과 나와 동일시하는 게 있습니다. 같다고 동일시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는 거울의 모습과 자기가 동일성을 갖게 돼요. 이게 바로 자기의 주체성이 되는 겁니다. 나는 이제부터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 거울 보면 되는 거예요.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냐?’ 어른 되도 그런 짓 하면 정신병 되고 왜냐하면 상징계로 못 접어 들어갔으니까. 어릴 때는 그게 돼요. 거울보고 혼자 춤추고 좋다고 까불고 하죠.
그런데 이런 상상계주체가 형성돼요. 이전에는 애는 엄마가 대신하기 때문에 엄마가 만약에 시장가면 누가 없어요? 자기가 없어진 거예요. 막 우는 겁니다. 엄마가 돌아오면 자기가 돌아온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상상계가 어른 되면 사라질까요? 안 사라져요. 계속가요. 언제 또 만개하느냐 하면, 치매 걸리면 자기 아들보고 ‘오빠, 오빠’ 하고 있어요. 얼마나 오빠가 그리웠으면 오빠와 하나가 되고 싶으면 그런 게 잠복돼있을 때 그게 튀어나오는 겁니다. 미쳤다, 미쳤다 하지만 결국 다 미친 걸 가지고 정상인 체 하는.
상상계 하면서 이제는 자기 자신을 아는 그 순간 이제는 뭐가 분리되느냐 하면, 거울 모습 나와 동일시되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저 사람은 내가 아니야.’라고 하죠. ‘아니야’가 뭡니까? 이미 부정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주체가 형성됐다는 자체가 적이 생기고 차이가 나는 게 적인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계산에 들어갑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유리한 사람인지, 불리한 사람인지. 엄마, 아빠가 이혼한다. 이혼이 나한테 유리할까, 불리할까? 어릴 때는 엄마 없이는 못산다고 하지만 좀 크면, ‘새 엄마는 나에게 뭘 갖다 주지? 새 아빠는 뭘 주지?’ 이젠 계산해요. ‘양쪽 다 뜯어먹으면 어떨까? 나한테 유리할 거 아니야.’ 정상입니다. ‘엄마 없이는 못 살라.’ 비정상이에요.
상상계라 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저게 바로 나야.’라고 확정짓는 그게 바로 상상계에요. 예를 들면 김태원이란 가수가 강북에서 기타를 제일 잘 친다. ‘우리나라에서 3대 기타리스트 중에 하나가 자기다.’라고 생각했던 것은 상상계죠. 그게 나중에 ‘나보다 기타 잘 치는 사람이 있구나. 때려치워야지. 나는 작곡하련다.’ 이렇게 하게 되면 새로운 상상을 하죠. 일시적으로. 뭐로 또 바뀔지 모르지만. 인간은 항상 그때그때마다 자기가 마음에 꼭 드는 건 무조건 자기와 일치시키는 그런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교회에 적용시키면 확실하죠. ‘맞아. 난 구원받았어.’ 자기 따라오는 기표에다 해버립니다. 구원, 언약, 십자가 하면 확실히 들어와요. ‘그래. 나 구원받은 것 맞아. 감사합니다, 하나님.’ 할 때 이 주체는 깨진 주체에요. 그런데 ‘구원받았는데 왜 기도하니까 응답이 안 되지?’ 뭔가 구원받았으면 응답이 돼야 되는데 구원받고 교회 문 열고 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받은 감동 어디로 날아갔는지 남는 게 없어. 다 흩어지고 공중에 날아가고 남는 게 없으니까 뭐라도 쥐고 있어야 되니까 그건 기억난다. 은혜 받은 성경구절은 기억난다. 성경구절과 자기를 일치시키죠. 이게 상상계죠.
이 상상계 바탕 위에서 상징계에 있을 때는 여기서 ‘요구’를 하죠. ‘구원을 받았으면 돈을 내란 말이야.’ 구원받아놓고 돈도 안 내고. ‘구원을 받았으면 돈을 내야지.’라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인데 그것을 목사가 하지 않고, 장로님이 하지 않더라도 누가 그렇게 해요? 바로 주변에서 알아들었던 주변의 것들이 그렇게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구원받은 것이 다가 아니구나. 예수 믿는 게 구원의 다가 아니구나.’ 이게 개혁주의신학 아닙니까.
이것은 목사가 내 속마음을 대신해주기 이전부터 은근히 우리가 고대하고 있었어요. 이게 다 아니죠? 이게 다라면 그 사람은 자살할 가능성이 많죠. ‘기껏 이게 전부야?’ 왜냐하면 쾌락의 법칙에 의하면 쾌락 이전에 그 쾌락은 적응이 되어서 계속해서 나오던 쾌락이 계속해서 안 나오고 시들어버린 겁니다. 식상하죠. ‘교회는 이것 말고 다른 즐거움이 있을 거야. 그게 뭐지? 누가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 하고 기다렸는데 소설가, 시인한다는 소○○목사가 와서 ‘이웃을 사랑해야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다.’ 이러면 ‘맞아. 저거야. 내가 기다렸어. 이번 부활절 은혜 넘친다.’
다시 해봅시다. 미지의 것이 현재에 있는 기존의 것이 있어요. 타인이 없으면 내가 왜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 없이는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최초로 엄마와 나와 일치성을 갖다가 어느 날 거울 보면서 ‘엄마가 나야’ 내가 분류했기 때문에 처음 원천은 엄마 뱃속이다. 엄마 뱃속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자기 주체성이기 때문에 엄마라는 터널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항상 상상계 이전에 실재계는 같이 가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늦게 오게 되면 다시 주체성을 스스로 허물어버리고 다시 편집해서 ‘저게 바로 사랑이야. 저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지금까지 기다렸어.’ 나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렇게 기존에 있는 게 왔을 때 이렇게 거쳐서 분리된 주체가 여기 있잖아요.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모호한 것이 아니고 이렇게 돼요. 원래 출발점을 옮겨버립니다. 옮겨버리면 안심이 되죠. 출발점이 여기니까. ‘됐어. 이제 주체성 점검했어. 나는 예수 믿는 성도 맞아.’ 하는 순간 그 다음에 요구가 와요. ‘성도가 그래 살아도 돼?’라는 요구가 온다니까요. 이건 남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우리 교인한테 요구한 적이 없어요. 본인들이 자기가 자기의 요구에 마음에 안 들어서 어떻게 하면 되나요? 나는 교회 없애자 했는데 본인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 요구를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대상의 요구거든요. A를 동원합니다. 주체가 이거는 상상계 일치시킵니다. 요구에 일치시켜서 다시 겁니다. 걸어버리면 여기서 대문자 I(A)가 돼요. 이거는 주체인데 A의 깨진 것을 이렇게 하는데, 무슨 알 수 없는 요구가 왔어요. 아까 미진한 것이 여기 ‘그래 맞아. 난 확정됐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멈추지 않으니까 인간은 계속 살아가니까. 여기서 요구가 나타납니다. ‘내가 그 요구를 미처 생각 못했네. 아니야. 내가 은근히 기다렸을지도 모르지.’ 그럼 상상계와 동일시됩니다. 깨진 내가 그 요구에 ‘예. 말씀대로 법대로 하겠습니다.’ 이 법이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항상 어른들이 하는 거예요. 아까 엄마라 했지요. 엄마가 어릴 때부터 강요하고 시키는 게 있지요. 이것만 하고 쉽시다.
그래서 그것이 내 안에 들어온, 요구를 응답한 이것이 A인데 A가 뭐냐 하면, 법을 요구하는 대상입니다. 타인입니다. 그 타인이 깨진 타인으로서 내려오는데 타인은 만날 바뀌니까. 헌금했는데 이번엔 전도도 해야 되는 만날 바뀌어. 아이덴티피케이션, 이걸 동질화, 동일시하는 것, 동일시해서 내려옴으로써 그 사람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목사님 시키는 대로 했어요.’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쪽, 저쪽은 또 여기서 시키는 대로 했는지 또 갈라지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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