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우리 집 공기총 본문
우리 집 공기총 / 이근호 목사
추석 때에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다. 사람들이 밉다고 다른 사람을 살해하고 소각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그런 식으로 외부로 터뜨렸다. 자기도 자기를 포기한 입장에 남이 당하는 입장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타인이란 어디까지나 타인으로만 그들에게 비쳤다. 평소에도 늘 무관한 타인이기에 자신의 분노의 희생물이 된다 할지라도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식이다.
이번 사건을 놓고 여러모로 대책이 거론되고 있다. 가정교육, 학교교육 모두가 제대로 바른 교육을 못한 결과가 아니냐고 반성들을 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교육은 인간성 회복과 심성 교육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너도 나도 한마디 거든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사랑 이상론을 펼친다. 그들은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사회에 대해 항거했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에게 잘 베풀고 서로 돌아보고 관심가져주면 앞으로 이런 사건들은 잘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더불어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혼자서 사치하는 취미로 자기만의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 세인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 흉악범에게 당해도 동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을 정리해보면,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심성 교육에 주력하고 사회인이 되어서는 재물에 절제하는 품성으로 이웃을 생각하는 것만이 이 사회에서 흉악한 범죄를 줄이는 최선의 길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인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사회는 그 자체가 사람들의 우상으로 자라 잡는다. 사회라는 것은 개개인이 모인 것이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숭배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숭상이다. 흉악범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치를 떠는 것은, 그 범인들이 직접적으로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죽음의 위협을 가해왔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원한을 살만한 관계도 없는 쪽을 무방비 상태에서 흉기로 공격을 했다는 것은 곧 자기들에게 대한 전쟁 선포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흉악 범죄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들을 보면, 정말 타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각자 자기를 보호하는 방책으로 안심 놓고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 형성에 도움이 되는 시민 교육에 정진하자는 것이다.
과연 이런 식으로 근본적인 대책이 될까? 근본적인 대책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이 범인들이 왜 공기총을 들어야 했던가?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기대에 호응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인들은 남들처럼, 이 사회에서 당당한 자세로 살고 싶었다. 남을 지배하고 싶고 남 위에 올라서서 소위 출세라는 것을 하고 싶었다. 남자로 태어나서 성공이라는 무엇인가 맛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들의 열악한 가정 환경과 자신들의 소양이 이런 기대를 이루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맨날 타인의 지시 안에서 맴돌아 되고 남에게 지배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남들이 가진 재력과 학력이 없었기 때문에 남을 정복하고 올라서는 쾌감을 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기껏 남을 지배할 수 있는 것으로 공기총을 선택한 것이다.
공기총, 그들에게 그것은 남 위에 올라서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이 공기총이나 흉기가 그들에게 없었으면 계속해서 남의 밑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범죄를 비난하기 전에 우리들 자신들이 집에 갖고 있는 공기총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한다. 남을 정복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남을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재물에 탐닉하고 조직 내에서 세력을 확장한다면, 소위 지존파라는 그들 일당은 우리들의 모습이 확장된 것이며 하부구조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들이 가르친 우리들의 부하들이다. 두목은 우리들이다.
오늘날 교회를 보라. 지존파 일당의 양성소이다. 성공과 출세에 대한 염원들이 한데 모아 열심히 신에게 기도하고 있다. 즉 괜찮은 공기총을 달라고 한다. 있는 공기총도 스스로 부숴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자가 어디 있던가?
추석 때에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다. 사람들이 밉다고 다른 사람을 살해하고 소각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그런 식으로 외부로 터뜨렸다. 자기도 자기를 포기한 입장에 남이 당하는 입장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타인이란 어디까지나 타인으로만 그들에게 비쳤다. 평소에도 늘 무관한 타인이기에 자신의 분노의 희생물이 된다 할지라도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식이다.
이번 사건을 놓고 여러모로 대책이 거론되고 있다. 가정교육, 학교교육 모두가 제대로 바른 교육을 못한 결과가 아니냐고 반성들을 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교육은 인간성 회복과 심성 교육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너도 나도 한마디 거든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사랑 이상론을 펼친다. 그들은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사회에 대해 항거했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에게 잘 베풀고 서로 돌아보고 관심가져주면 앞으로 이런 사건들은 잘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더불어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혼자서 사치하는 취미로 자기만의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 세인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 흉악범에게 당해도 동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을 정리해보면,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심성 교육에 주력하고 사회인이 되어서는 재물에 절제하는 품성으로 이웃을 생각하는 것만이 이 사회에서 흉악한 범죄를 줄이는 최선의 길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인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사회는 그 자체가 사람들의 우상으로 자라 잡는다. 사회라는 것은 개개인이 모인 것이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숭배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숭상이다. 흉악범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치를 떠는 것은, 그 범인들이 직접적으로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죽음의 위협을 가해왔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원한을 살만한 관계도 없는 쪽을 무방비 상태에서 흉기로 공격을 했다는 것은 곧 자기들에게 대한 전쟁 선포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흉악 범죄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들을 보면, 정말 타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각자 자기를 보호하는 방책으로 안심 놓고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 형성에 도움이 되는 시민 교육에 정진하자는 것이다.
과연 이런 식으로 근본적인 대책이 될까? 근본적인 대책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이 범인들이 왜 공기총을 들어야 했던가?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기대에 호응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인들은 남들처럼, 이 사회에서 당당한 자세로 살고 싶었다. 남을 지배하고 싶고 남 위에 올라서서 소위 출세라는 것을 하고 싶었다. 남자로 태어나서 성공이라는 무엇인가 맛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들의 열악한 가정 환경과 자신들의 소양이 이런 기대를 이루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맨날 타인의 지시 안에서 맴돌아 되고 남에게 지배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남들이 가진 재력과 학력이 없었기 때문에 남을 정복하고 올라서는 쾌감을 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기껏 남을 지배할 수 있는 것으로 공기총을 선택한 것이다.
공기총, 그들에게 그것은 남 위에 올라서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이 공기총이나 흉기가 그들에게 없었으면 계속해서 남의 밑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범죄를 비난하기 전에 우리들 자신들이 집에 갖고 있는 공기총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한다. 남을 정복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남을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재물에 탐닉하고 조직 내에서 세력을 확장한다면, 소위 지존파라는 그들 일당은 우리들의 모습이 확장된 것이며 하부구조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들이 가르친 우리들의 부하들이다. 두목은 우리들이다.
오늘날 교회를 보라. 지존파 일당의 양성소이다. 성공과 출세에 대한 염원들이 한데 모아 열심히 신에게 기도하고 있다. 즉 괜찮은 공기총을 달라고 한다. 있는 공기총도 스스로 부숴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자가 어디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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