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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하나님의 선택(41) - 새언약 15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선택(41) - 새언약 15

정인순 2011. 1. 4. 12:12

 

하나님의 선택(41) - 새언약 15
                                                                       99,4,26 이근호 (구득영 정리)


* 성경에서 말하는 의(義)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총신의 최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는 성부와 성자가 계약을 했지만, 그 이후에는 성부와 우리가 계약을 맺은 것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 안에서' 라는 의미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 그것은 바로 구원론적으로 보기 때문인데, 즉, 하나님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할 때만 동원되었다가 빠져버리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마저도 약속을 위해 사셨는데 하물며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언약을 이용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 구약에 나오는 인물들은, 시편에도 나오지만 사실 다 죽어야 할 인물들이다. 다윗 같은 경우도 사실은 율법에 의하면, 간통을 한 자는 둘 다 죽어야 하는 것이다. 다윗도 왕이지만 예외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될 대표자로서 선택을 받은 것이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을 한 번 살펴보면, 결코 그들이 잘나서 사사(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여기서 다윗이 성신을 거두지 말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성신은 창조력을 의미하는데, 뭔가 조금 모자라는 것을 도와주는 보조적인 창조력이 아니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런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력을 계속 유지해 달라는 것이다.

* 다윗 자체가, 자기는 죄인이고 자기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자기의 죄 됨을 드러내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장(場), 즉, 필드(field)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 다윗이 그렇다면, 그래도 그는 과거의 옛날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동에서 보나 서에서 보나, 과거에서 보나 미래에서 보나, 지금 현재에서 보나 똑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나 과거의 다윗이나 십자가 안에서는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역사는 흘러갈지 몰라도 십자가 안에서는 그런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인물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 남은 자 - 지난 시간에 남은 자에 대해서 강의를 했는데, 남은 자의 접근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구원론적 방법이 있고, 언약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 언약적인 방법은 인간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관해서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마태복음 10장을 한 번 살펴보자.

(마 10: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마 10:18)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마 10:19)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 이렇게 예수님께서 '네가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염하지 말라' 라는 것이다. 성령이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이 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자들을 살려주는 쪽이 아니라, 채찍질을 당해도 예수님을 증거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입을 열면 자기 방어만을 하기 때문인 것이다. - 살려주세요, 뽀빠이 !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마태복음 6장에서도, 이렇게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하는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네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너와 함께 하시는 분은 너보다 훨씬 능력이 크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계속 염려한다는 것은 함께 계시는 그 분을 모독한다는 것이다.  

* 자기의 몸이 아프다고 이 충무공의 묘에 식칼을 꼽은 무당이나, 또 그것을 무마시킨다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둘 다 미신에 푹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속(巫俗)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것이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인간은 누구나 다 이렇게 자기의 덕(德)을 이루기 위해서 행동을 하시는데, 이것을 철학적으로 인간이 외부적인 욕망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행동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 행함과 행위 - 성경에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동작의 반복이 아니라, 그것은 행위라고 할 수가 있고, 이러한 외부적 욕망에 의해 이끌려서 움직이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비전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 지난 주에 처형의 고물상 개업식에 참석을 했는데, 한 젊은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면서, 잠언서에 있는 마음의 경영은 어떻고 하면서 설교를 하고 고물상이 잘되게 해달라고 통성기도를 하는데, 그야말로 엉망이었던 것이다. 친척이었기에 가만히 있었는데, 한 아는 분이 목사님하고 부르는 바람에 목사라는 것이 알려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 젊은 목사에게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겠느냐고 한 소리를 하고, 설교 본문 또한 이런 경우에는 야고보서 4장의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고 전도를 했던 것이다.

* 아마 내가 나이가 많아 보여서 가만히 있었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목사의 아이가 세 명이라는 소리를 듣고, 목사는 백수인데 어떻게 세 명이나 키우느냐고 잔소리를 또한 하고 말이다. 목사의 직장은 교회가 아니고, 오히려 목사의 임무는 교회를 부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항상 예수님이 지금 자기 앞에 있다고 의식을 하면서 해야지, 그런 식으로 해버리는 것은 한 마디로 사기라는 것이다. 지금 앞에 있는 교인들의 비위만 맞추면 되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가 뭐 그리 대단하냐는 것이다.

* 우리가 설교를 하고 나서 교인들의 반응이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다고 생각이 들면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설교를 하는 매 순간 순간이 복음을 전하는 때임을 알고, 염려하지 말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면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25 페이지

⊙ 다윗언약에 의하면, 시온에 세워지는 성전이라는 매체를 통해 죄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책)

(사 4:3)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사 4:4)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됨이라

◈ 시온에 왜 성전이 세워져야 하는가? 그러면 한 마디로 말해서, 성전이란 무엇인가?

(왕상 7:21)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 여기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과 모세의 성막은 다른데, 성막에는 이런 두 개의 기둥이 없다는 것이다. 毬ご纛?신이 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물론 구약학자들은 이방 왕인 히람 왕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지었다고 하는 것이다. 비록 외국 기술자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야긴과 보아스 - 성전에 있는 두 개의 기둥에 이름을 붙인다고 하는 것은 인격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 "야긴-저가 세우리라", "보아스-그에게 능력이 있다" 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성전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성전이 이스라엘 속에 있는가? 이스라엘 전체를 누가 세웠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웠고, 하나님이 유지한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보았을 때, 약 30M 짜리 기둥이 버티고 섰을 때, 이것은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하셨고 그 분에게만 능력이 있지, 다른 누구의 능력은 손톱만큼도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모세도 제단을 쌓을 때에는 자연석으로 하라고 했는데, 성전을 세울 때에도 돌을 채석장에서 다듬고 딱 맞도록 해서 성전 짓는 곳에 와서 끼워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곳에서는 돌 다듬는 소리가 절대로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행위와 노력과 공적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 그래서 왕상 8장에 보면 솔로몬의 기도가 나오는데, 그 기도의 중심이 모든 이스라엘이 되어 가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만 되게 하옵소서!' 라는 것이다.

* 기도 - 기도라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를 아는 그러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 기도 따로, 내 기도 따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늘 나라를 못 간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난 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거쳐서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가능하지, 우리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사야 6장에 있는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이야기인 것이다.

(사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 우리의 신앙 고백서 - 1. 구원받을 수 없음 !!

*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육으로는 안 되고 영으로라야 가능한데, 이것은 이미 우리 손에서 떠났다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주셔야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의 성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전은 '인간이 어떻게 하는가?' 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성전언약을 보여주는 것이다.

◈ 성전언약 - '하나님이 하신다' 라고 하는, '야긴' 과 '보아스' 로 대표되는 언약이라는 것이다. 오직 능력은 하나님에게만 있으니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야긴과 보아스와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야긴과 보아스는 누구를 의미하는가? 바로 예수님인 것이다.

* 그러므로 [ 성전 = 예수님 ] 이고,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구약의 성전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 시온에 성전을 세운다 -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윗이나 솔로몬이 세운 성전은 성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이 다윗이나 솔로몬을 통해서 세우신다는 것이다. 이 성전은 장차 오실 분을 드러내기 때문에 언약이 깨어지면 성전도 깨어지는 것이다.

* 세례요한은 장차 오실 분이 나보다 먼저 계신다고 했으니, 성전을 세우게 하신 주님은 장차 오실 분이지만, 사실은 먼저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 분이 자기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성전을 세우라고 하셨고, 이 성전의 두 기둥을 야긴과 보아스라고 하라고 하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어디서 기도합니까?' 라는 것이 아니고, '누가 세웠습니까?'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일천번제 - 솔로몬이 이러한 성전을 세우기 이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철저한 복종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천번제' 라는 것이다. 철저한 헌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왜 천 한번은 안 되느냐는 것이다. 헌신된 이상 더 이상은 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헌신이 되었다는 것은 응답이 내려오는 것으로 판단을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라는 것이다.

(왕상 3:11)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 하나님은 솔로몬을 향하여, 왕상 3장 11절에 있는 것처럼,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지혜를 구하였음' 에 대해서 응답이 나타나면 끝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불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 여호와 살롬 - 이러한 불로서 응답하는 것이 사사기에 보면 나오는데, 기드온이 제단을 쌓았는데 갑자기 불이 나타나서 제물을 태우자 놀랐던 것이다. 그냥 제사만 드리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불이 내려와서 태울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이 죽을까 싶어서 겁이 나서 숨었는데, 하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때 나온 말이 '여호와 살롬' 이라는 것이다.

(삿 6:20)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삿 6: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삿 6: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삿 6: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삿 6: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 이것이 사도행전 9장에도 나온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이미 죽었어야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리시는 것은, 받아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이 때부터 사도바울은 겁을 상실한 인간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무서움을 경험했기에 사람이 두렵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는데 무엇이 두려워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 야곱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하나님을 만나고 씨름까지 해서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죽지를 않았는데, 그것보다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사야도 마찬가지이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해놓고, 그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것이다.

* 그런데 모세와 같은 경우에는 좀 특이한데, 출애굽기 4장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 사명을 받았지만 처음에는 시큰둥해하다가, 결국은 자기가 죽임을 당할 뻔한 경험을 할 때, 그의 아내가 아들을 할례 시키고 난 다음에 비로소 애굽의 바로왕에게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간 다음에는 용감했던 것이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다면, 염려나 두려움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두려움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러면 12제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성령을 받은 것을 심판 받은 것으로 간주해서, 이제는 겁을 상실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오순절의 성령을 받기 전에는 서로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가에 관심이 있다가, 이제는 자기들이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셨다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인 것이다.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 여기서 양과 이리가 서로 비교가 되는데, 이것은 서로의 생김새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 양(羊) - 양이라고 하는 것은, 염려를 하지 않는, 자기의 자체적인 방어를 하지 않는, 비록 잡힌다고 할지라도 속에 성령이 있기 때문에 살려달라고 애걸을 하지 않는 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죽여라!' 하고 나가는 자는, 도살되는 그러한 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이리(泥犁) - 반면에 이리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흉칙하고 포악한, 마누라를 두드려 패는 그런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를 하면서 스스로 자기 방어를 하는 놈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 그래서 '순결하라' 라는 것도 수녀처럼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 죽여라. 나는 죽은 놈이다' 라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성령 받은 자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이 얼마나 순결한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안에 들어 있는 성령의 생각이 제자들이 한 번 살아보겠다는 그러한 생각에 방해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 이렇게 순결하게 나올 때에 상대방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그렇지 못하고 이리와 같을 때에는 상대방을 죽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남을 살리는 사람과 죽이는 사람,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중간은 없는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여기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라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융통성을 발휘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오히려 그런 것을 공박하고 '초지일관 밀고 나가라' 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 답변 - 물론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뱀은 나쁜 뉘앙스를 가진 동물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나쁜 것을 가지고 자신과 제자들에게 집어 넣어버리시는 것이다. 기존의 생각을 뒤집어 버리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들의 곡식을 보시면서, '너희들은 넉 달이 되어야 추구할 줄 알지만, 바로 지금이 추수 때이다' 라고 하시는 것은, 이렇게 넉 달이라고 하는 것을 집어넣으시는 것은, 곡식을 보면서 먹을 것만을 생각하는 기존의 사람들의 생각을 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떡을 주자,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온다. 그러자 예수님은 떡을 주시면서,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않느냐?' 라고 공박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떡을 왜 주시느냐는 것이다. 따라오라고 해 놓고 차 버리시는 것이다.  

* 한국교회를 비판하면 사람들은 다 좋아하지만, 그러나 나중에 복음을 전하면 모두가 돌아가 버리는데,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 하나님의 선택, 225 페이지

⊙ 다윗언약에 의하면, 시온에 세워지는 성전이라는 매체를 통해 죄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책)

* 죄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특정인을 누구라고 지칭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그것은 선택에 어긋나는 것이다. 선택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고유의 권한이기에 우리가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선택하셨는데, 누가 그 지체인지는 모르는 것이다. 본인은 알지만 말이다.

⊙ 그런데 온전한 시온은 우선 사람들에게 버림받아야 하고, 둘째로 선택되었기에 부활하신 산 돌로서 재건되어야 한다. (책)

* 사실 이 점이 바르트에게 상당히 고민거리라는 것이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하는 그런 번거럽고도 고통스러운 수고를 다 하셨느냐는 것이다. 그냥 일방적으로 죄를 용서하셔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면 되지 말이다. 이것이 바르트 신학의 토대라는 것이다.

* 칼 바르트 신학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죄로 인해 버리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선택하셨기 때문인데, 여기서 예수님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매우 어려운 부분이다. 하나님이 인간인 예수님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이것을 '만인 구원설' 이라고 해서 공격을 많이 하는데, 그런데 바르트는 자기 입으로 분명히 자신은 만인 구원설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고 했던 것이다. 다만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 질문 - 박아론 교수는 이것을 만인 구원설이라고 하지를 않고, 보편 구원설적인 경향이 있다고 했는데, 그리고 서철원 교수는 바로 만인 구원설이라고 해서 반박을 했는데 ?

* 답변 - 성경에서 '보편 구원설' 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언약밖에 있는 자도 과연  구원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딤전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언약 밖에 있는 성과 계급과 인간의 어떤 각양 각색의 모든 종류(?)를 두고 말하는 것이지, 인간의 그러한 조건에 구애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겠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바르트는 유보적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지, 안 받을 지는 우리가 모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두 다 구원해도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예수님은 인간을 대표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선택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 이근호의 주장은, 하나님이 구원론적으로 선택을 하셨느냐, 기능적으로 선택을 하셨느냐는 것인데, 기능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의 하는 이야기를 좀 보완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피조물인 모든 인간을 들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하나의 긍휼의 그릇으로,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말이다. 이것은 로마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 만약에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한다면, 이것이 워치만 니 계통인데, 그렇다면 진노의 그릇을 없어야 하지 않는가?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되면, 에서도 가롯유다도 비록 악역이지만 그런 역할을 잘 수행했으니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되어 버리는 것이다.

◈ 기능적 선택 - 하나님이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하신다 !

* 그러면 이러한 신약의 이야기에 구약에도 있는가? 없으면 큰일나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구약의 언약의 완성으로서의 십자가와 부활이기에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구약의 말씀을 이루시는 차원해서 활동하시는 것이다.

* 구약에서 언약 중심이라는 것은 바로 성전 중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드시 깨어져야 될, 없어져야 될 성전을 세우시는 것이다. 이것이 스가랴서와 학개서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리고 왕도 함께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다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이 서로 연결 고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 바로 이 과정을 신령한 집이 요구한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사람들의 육에 의존해서 야기된 일이라면. 새 시온에 참여되는 자는 육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직 산 돌이신 예수님만 의존해야 한다. 여기서 믿음으로의 구원법칙이 주어진다. (책)

* 여기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육을 믿는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은 죽어야 마땅함을 항상 고백하면서, 오실 어떤 약속의 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즉, 구약에서는 오실 분이고, 신약에서는 이미 온 분이 되는 것이다.

◈ 믿음은 ? - 그러면, 믿음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인간에게서 이런 믿음이 생기면, 그것은 육이니까 안 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의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의가 구약에서는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 언약에서 하나님의 의가 온다고 했고, 아브라함 언약에서는 믿음이 의가 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이 의(義)는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사람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언약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이 아니고, 언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 떡이 이렇게 있는데, 이것이 선반 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닥다리를 이용해서 떡을 꺼내서 먹었는데, 이것을 사닥다리에서 떡이 나왔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닥다리를 세운 자기 자신이 부각되는 것이다. 떡을 만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 의는 육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의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생기는 것이다.

*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과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를 받는 것과 똑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의를 율법의 행함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이 '하라' 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 그것은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제사라고 하는 것이다.

* 율법은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고, 원래 의(義)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생긴 것이고, 이 의(義)의 주체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강의를 하고 나면, 교인들은 그만 허탈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할까요?' 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잘 왔는데, 갑자기 '띵!' 하고 충격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행함이 갑자기 동작 자체로 바뀌면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까?' 라는 식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성깔대로 하시고, 다만 모든 것은 자기 탓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라고, 또 한 방을 놓는 것이다. 너무 아픈가?

* 어제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내 죄가 무엇입니까?' 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던 것이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나쁜 놈이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까?' 라는 물음이 날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 51: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 여기서 다윗의 신앙을 엿볼 수가 있다. 왜 주께서 꺾으신 뼈로 말미암아 다윗이 즐거워해야 하는가? 주님이 꺾으신 뼈로 말미암아 모두가, 자기 자신도 꺾여진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언약대로 죄에 대한 죽음이 되는 것이다.  

⊙ 믿음의 원칙은 철저하게 행함을 배제하는 데서 비롯된다. (책)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이니까, 행함은 아예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사닥다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선반 위에 있는 떡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있고,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 그러면 목사님, "이 '믿음으로 믿음에' 라는 것을 누군가 전해야 하지를 않습니까?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까?" 라고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로마서에서는 보내심을 받아야 전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전하더라도 보내신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믿음이 우리의 행함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에 의하면, 우리의 행함은 항상 죄를 유발시키면서 진행되기 때문인 것이다.

◈ 언약을 톡! 하고 깨어보면, 한 쪽에는 의가 있고, 한 쪽에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가 한 세트가 되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를 할 때는 이렇게 한 세트를 이루어서, 병존시켜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하나님의 의만 설교를 해버리면,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믿는 나는 얼마나 대단한가!' 라고, 당장 이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라는 대목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행함에서 도출된 믿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들의 이성과 의지와 감성으로 만들어 내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믿음이 아니다. 믿음에서 주어진 믿음이다. (책)

* '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 라는 것은 모든 육에 대한 차단이라는 것이다. 공관복음이나, 요한복음이나, 바울서신이나 다 같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무시하고 다양성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이 믿음은 것은 어디에서 생겼는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는 표현 속에 발견된다. 여기서 말하는 '나타난 하나님의 의' 란 곧 예수님을 뜻한다. (책)

*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법칙만 인정하고, 이제는 다른 법칙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 즉, 예수님이 간직하고 있는 믿음이 이 지상에서 구원받는 유일한 믿음으로 등장하였다는 뜻이다. 이것이 복음이며, 기쁜 소식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책)

* 공관복음서에 있는 내용이 고스란히 그대로 바울서신에 녹아들여져 있다는 것이다.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바울서신들을 제대로 공부하려고 한다면, 바로 공관복음서들을 토대로 해서 계속해서 반복해가면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왜 12년 된 혈류병 여인을 고쳤는가? 그것은 주님의 능력으로 고쳤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기의 믿음으로 고쳤다고 하신다.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 그러면 이 믿음과 주님의 능력의 관계가 바울서신들에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로마서에 그대로 가지고 오면, 비록 병이 낫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만나도 이제는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 그래서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복음서와 서신서를 다 뗐다' 라고 하는 풍만감을 교인들에게 주어서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 준비는 항상 평소에 해야 하고 말이다. 설교를 하면서 머리 속에 마태복음을 좍 하고 펼쳐지고,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구약까지도 계속해서 펼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무엇을 뽑아 낼 것인가 하고 서로의 연결점을 살펴보는 것이다.  

* 민 22장에서 당나귀가 이야기하는 것하고, 마태복음 10장에서 '내 속에서 말하는 이는 내가 아니고 성령이다' 라는 것을 연결해서, 당나귀도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는 당나귀보다 더 못한 것인가? 당나귀는 맞아가면서도 할 소리를 다 하는데, 우리도 성령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 그러면 현대와 같은 과학시대에서 당나귀에게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바보가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당나귀의 말하는 것을 믿으면,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신 것을 비롯한 다른 모든 기적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를 믿으세요!" 라고 전도하는 것도 분명히 기적에 속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할 때는 머리 속에 이 성경을 좍! 하고 펼쳐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순발력 있게 하나씩 뽑아 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안 되면 일일이 다 원고로 써 놓고 말이다. 안 되면서 어슬프게 흉내를 내지 말고 말이다.

* 이렇게 설교를 풍성하게 하면 비판을 하려고 해도 너무 풍성하게 받아가기 때문에 비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도 많이 얻어간다는 것이다. 되지도 않게 너무 가지를 많이 벌여서 설교를 하려고 하니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25 페이지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笭척?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참 재미있는 표현이다. 복음이 언젠가 부끄러움을 당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한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산 인생이 얼마나 바보 같고 과대망상증 환자 같고 미친 사람처럼 보였渼째?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를 쫓아다니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 이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예수님만을 쫓아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하지만 사도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자기가 능력이 아니고, 복음 자체가 그러한 능력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내가 능력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그 분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은사 - 아들을 주신 이가 아들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은사도 함께 온다는 것이다. 십자가 지심의 공관복음의 사건이 우리에게 은사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사인 것이다. 이 은사는 은혜를 말하고, 은혜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생명이 그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 복음의 능력 - 넓은 길로 가고, 돈을 버는 것이 은사가 아니고, 은사라고 아들 됨의 생명이 끝까지 결합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공관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예수님께서 은사를 주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 사랑의 은사가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아들과 함께 늘 다니도록 하는 능력까지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예수님만을 높이는 능력은 일찍이 없었는데 말이다.

☞ 하나님의 선택, 226 페이지

⊙ 사도바울은 로마서 전체에서 이 복음을 율법의 행함과 대비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주어진 것은 행함이 아니라 성령과 예수님의 소원에 따라 주어진 것임을 밝힌다. (책)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 복음을 율법의 행위와 대비시키는 것은 율법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율법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심판 아래에 두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주었다는 것이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우리가 남을 비판 할 문제가 아니다. '도토리 키 제기' 라는 것이다. 내 행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 이 성령이 주어지는 자는 구약 역사를 비추어 볼 때, 오직 남은 자에게만 해당되며, 사도바울은 이것을 선택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책)

☞ 하나님의 선택, 226 페이지       6. 로마서에서의 선택

⊙ 로마서에서의 고백은 신약성경의 다른 편지들에게서도 일관되게 일치되고 있는 생각이다. (책)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 그러면 우리를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부르신 원리가 지금도 계속해서 적용이 되겠는가, 안 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밥 먹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 하나님께서 다 이렇게 하시니 우리가 무엇을 염려해야 필요가 있다는 것인가?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왜 안 주십니까? 왜 이렇게 굶게 하십니까? 왜 교회가 부흥은 커녕 줄어듭니까?" 라는 기도가 나올 수가 있는가? 사도행전 17장에 있는 것처럼, 이미 하나님께서 다 주셨는데도 말이다.

◈ 행위냐, 은혜냐? - 이것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라는 것이다. 그래서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서 왔다는 것이다. 이 '예수님을 통해서' 라는 말은, '내가 어떻게 해서 얻었다' 라는 것이 박살이 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생명은 바로 십자가의 공로라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2000년 뒤에 태어날 인간이 밥 먹고 설거지하고 하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하루 세끼가 십자가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 竪되漫?얻었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잘못된 것이다. 그 범위를 십자가의 공로로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 덕분에 이런 은혜가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밥 먹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찝찝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전혀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이다.

* 기도 처방전 - 기도를 가지고 이렇게 교인들을 협박하는 것은 사기꾼이 하는 짓인 것이다. '여러분들이 목사를 위해서 기도를 하니 피곤치 않습니다' 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설교 시간에 해야한 이유는 교인들도 이러한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기도가 기능이 되고 기술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기도 처방전' 이라는 것이 나오는 것이다.

* 영천에 있는 만불상을 보면, 그 앞에 동그랗게 생긴 것이 있는데, 그것만 쳐다보면 모든 소원을 다 들어준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민중들이 보면 그만 뽕! 하고 가는 것이다. 천주교의 마리아 상이 이런 역할을 하지는 않는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왜 우리 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을까 하고 교인들은 안타까워한다는 것이다.

* 우리의 기도는 이러한 세상적인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은 이방인들이 바알과 같은 우상에게 비는 것에 불과하고, 참된 기도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지금도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 로마서에 나타난 선택의 의미는 우선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데부터 시작된다. (책)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소리가 '하나님' 이라는 것이다. 스트레스 중에서도 스트레스라는 것이다. 마귀,  죄 등, 이런 이야기를 너무나 싫어하는 것이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교회에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제발 좀 빼 달라는 것이다. 민족통일, 북한 선교 등 이런 이야기를 원하는 것이다.

*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해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여기에다가 계속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래도 억지로 교회에 나와서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은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고,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혹시나 해서 다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싫어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얼마나 이중 인격자인가 하는 것이다.

*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온갖 악독과 살인과 시기와 질투와 분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시기는 좀 했지만 살인을 하지 않았기에 감옥에 있는 사람보다 좀 낫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 똑 같다는 것이다.

(롬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 목욕탕에 가니까, 젊은 놈이 때를 좀 밀어달라고 하는데, 노인 같으면 밀어주지만 젊은 놈이라서 '네가 알아서 하라' 라고 했다.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아서 등에 있는 때까지 밀려고 하는가 말이다. 손이 안가면 안 밀면 되지 말이다.

*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어려울 때 단결해서 서로 격려하고 잘 살아보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요구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서로 단결을 해서 그들이 잘 되었는가? 다 죽은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서로 힘을 합해서 잘 살라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살라는 것이다. 지금 받은 것을 족한 줄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 소위 인간들은 미완성이고 미흡한 면이 있어서 이 미흡한 점을 개선하고 보충하기 위해 하나님이 율법과 규칙을 주신 것이 아닐까? 반성하고 회개해서 더욱 성숙한 삶을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닐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전적으로 거부한다. (책)

* 여기에 대해서 칼 포프가 언급을 했는데, 인간은 오류를 수정해서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시행착오를 거듭해서 성숙된 자아상을 만들 수 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들이 추구하는 철학이며 윤리이며, 나아가서 유대교라는 것이다.

* 자기들이 점점 더 나아진다고 생각을 하니까, 다시 되돌아가서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세리와 창녀들은 자기를 포기했기에 천국에 가 있는데, 유대인들은 아직도 더 개선되고 발전되려고 이 땅에서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지금까지 노력한 것이 너무나 아까운 것이다.

* 신학교 교수들에게서 이러한 '불쌍히 여겨달라' 라는 그런 강의를 듣기가 힘든 것이다. 유학을 갈 때부터 믿음이 없이 가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반성은 할 수 있지만, 회개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기가 쌓아올린 그 탑을 포기를 못하는 것이다.

* 사람들은 현실을 현실로 보지를 않고 자기 마음에 맞는 것만 골라서 뽑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뽑아내서 만든 그 꽃다발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이다. '주여, 이것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라고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기에게만 맞?것을 뽑아내어 버리면, 왜곡된 비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주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 이것이 바로 현실이라는 것이다. 좁은 길로 가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무시하고 자기 꿈에 맞는 것만 골라내어서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이라는 것이다. 마귀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 율법이 인간 세계에 들어온 이유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하기 위해서이다. (책)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할 말을 잃게 한다는 것은, 욥과 하나님의 대화를 경우를 보면 알 수가 있다. 할 말을 잊게 하는 것이다. 입을 막은 자가 욥이라는 것이다. 하마가 새끼를 놓을 때, 광야에 바가 올 때 욥인 네가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엇을 안다고 하나님에게 이러쿵 저러쿵 하느냐는 것이다. 입을 다물라는 것이다. 진작 욥은 입을 다물어야 했던 것이다.

(욥 40: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욥 40:2)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 40: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 40:4)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 40:5) 내가 한두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욥 40:6)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욥 40:7)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 40:8)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 하다 하느냐
(욥 40:9)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욥 40:10)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스스로 입을지니라
(욥 40:11)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욥 40:12)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욥 40:13)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싸서 어둑한 곳에 둘지니라
(욥 40:14)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욥 40:15)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욥 40:16) 그 힘은 허리에 있고 그 세력은 배의 힘줄에 있고
(욥 40:17) 그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연락되었으며
(욥 40:18)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가릿대는 철장 같으니
(욥 40:19)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은 자가 칼을 주었고
(욥 40:20) 모든 들 짐승의 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식물을 내느니라
(욥 40:21) 그것이 연줄기 아래나 갈 밭 가운데나 못속에 엎드리니
(욥 40:22) 연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둘렀구나
(욥 40:23) 하수가 창일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강이 불어 그입에 미칠지라도 자약하니
(욥 40:24) 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에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 하나님의 선택, 227 페이지  

⊙ 입을 막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사람들의 생리는 그 터진 입으로 자기 변명과 자기 합리화와 자기 자랑을 일삼기 마련이다.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 조정으로 인해서 자신은 아직도 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죄(罪)이다.  (책)

(요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 인간은 모든 언어로 자기를 보여주고, 언어는 상징인 것이다. 상징은 대체와 함축으로 나타나고, 상징 밑에는 상상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상력 밑에는 신화가 있고, 신화의 주제는 영웅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신화 밑에는 인간의 욕망이 자라잡고 있는 것이다.

* 라캉 - 라캉은 이 욕망이 자신의 욕망이 아니고, 타인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타인의 욕망이 자기에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욕망 중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골라내어서 그것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스스로는 전혀 알 수가 없고, 남들이 말해주는 자기만 안다는 것이?

* 남들이 착하다고 하면 착한 줄 알고, 바보라면 바보인줄 아는 것이다. 주위에 각종 난무하는 나름대로의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자기를 재조립하고 또 조립하는데, 여기에 몰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하는 이론을 완전히 박살을 내고 만 것이다. - 편집자)

◈ 바둑에 졌다고 인생이 진 것이 아니다 !

* 바둑은 하나의 게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거지 나사로도 천국에 간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실패한 인생인 것이다. 찬호가 홈런을 맞는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방 맞으면 두 방을 더 치면 되는 것이다.

* 이것을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는, 마르크스가 주장을 했는데, '인간의 가치가 물화(物化)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가 그만 상품의 가치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은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상품이라는 것이다.

◈ 마르크스 - 인간의 가치가 물화(物化) 되었다 !

* 그 똑똑한 이성(理性)이 그만 인간을 스스로 물건으로 만들고 만 것이다. 발전을 외치면서, 시행착오를 해 가면서까지 추구한 과학이 인간을 그만 물건으로, 과학의 대상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에 대한 만족감이 없고 늘 염려에 차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 자신을 바꾸어 버릴까, 복제할까?' 라고 하는 것이다.

* 지금 영국의 남자들에게는 미국의 일류 대학을 나온 여자들의 난자(卵子)가 그렇게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 난자에 체외수정을 해서 괜찮은 아이를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발달로 인해 생기는 인간이 상품화되는 물화 현상인 것이다.

* 에리히 프롬 [ 소유냐, 존재냐 ] - 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한 사람 중에서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 소유냐, 존재냐 ]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성경에서는 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하나님을 만나면 거기서 멸망당하는 것을 죄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만나서는 안 되고, 오직 '예수 안에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 시므이라는 인간이 왜 죽었는가? 시므이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한 그 맹세 안에서만 자신은 존재하는데, 그런데 자기 노예가 예루살렘을 떠나 가드로 도망을 하니까, 그때 나귀를 타고 따라가서 가드에서 잡아왔는데, 그는 맹세를 어겼기 때문에 그만 솔로몬에게 죽고 만 것이다(왕하 22장).

* 나귀의 역할 - 여기서 나귀라고 하는 것은 비천하고 아무 것도 아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울은 아무 것도 아닌 나귀를 찾다가 왕이 되었고, 시므이는 나귀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잘렸고, 발람 선지자는 아무 것도 아닌 나귀에게 잔소리를 들었고, 예수님은 이 아무 것도 아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그 당시의 메시야관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신 것이다.

◈ 모든 것이 십자가의 언약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 !

* 이러한 현상을 이것을 에베소서에서는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통일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나귀나 모든 것이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단들도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다. 이러한 회전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만을 입을 다물고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엡 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엡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모든 사람은 예수 안에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관계하시지 인간과는 상대를 아니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은사를 받은 경우에만,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 그 은사의 계통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세계는 저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투여한 것이다. 하나님은 단호하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죄 아래에 있지 않는 사람은 한 삶도 없다는 것이다. (책)

(롬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 아무리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라고 했지만, 사도바울은 노골적으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죄가 인간湧?왕이기 때문에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이러한 죄의 권세 됨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율법을 집어넣어서, 인간에게는 전혀 그러한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다. (책)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죄의 권세로 인해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런 판국에 의(義)가 등장했다. 권세 자체가 뒤바뀐 것이다. 그 의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의이다. 여기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 (책)

* 이렇게 되면,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 되는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죄의 권세와 의와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와 싸우면 우리는 죄의 권세에 대해서 게임이 안 되는데, 의가 싸운다는 것이다.

* 그러면 죄는 무엇을 노리겠는가? 어떻게 되었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은 믿지를 말아 달라는 것이다. 돈도 주고, 집도 주고 자식도 주고, 애인도 주고, 심지어 교회까지도 줄 테니까, 제발 십자가만은 믿지를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기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거지 나사로이다. 이런 믿음만 있으면 우리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 [ 파우스트 ] - 여기에 관한 유명한 전설들이 있는데, 이 전설들을 정리한 것이 괴테의 파우스트이다. 결국은 계약에 의해서, 인간이 처음에는 하고 싶은 데로 하면서 살지만, 나중에는 자기의 영혼마저 다 빼앗겨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 미셀 푸코 - 미셀 푸코라는 철학자가 바로 이러한 점을 잘 말했다. 인간을 두고 잘났다, 못났다고 하지를 말고 항상 권력 속에 있음을 알라는 것이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보이지 않는 권력에 해방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잘 있다가도 김대중 대통령이 나타나면 꼼짝을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권력에 너무나 약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은 이러한 권력에 매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말이다.

☞ 하나님의 선택, 227, 228 페이지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차별이 없다는 말은, 믿는 자가 모두 외부에서 일괄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자들이지, 자기가 노력한 것을 내어놓을 자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책)

*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다 의(義)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내 죄가 무엇입니까?' 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의가 차별 없이 나에게 의로서 주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 '차별이 없다' 라고 이렇게 말하는 사도바울이 너무나 용감하지 아니한가? 유대교는 차별 투성이 인데 말이다. 층층이 7계단으로 차별을 두었는데, 차별이 없다고 담대히 선언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러한 이야기를 지금 사도바울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차별이 없는 주님 앞에 지금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아야 하는 것이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차별 없는 자들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서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을 기뻐한 그 기쁨이 저희들에게도 한 평생동안 계속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