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하나님의 선택(42) - 새언약 16 본문
하나님의 선택(42) - 새언약 16
99,5,10 이근호 (구득영 정리)
☞ 하나님의 선택, 227 페이지
⊙ "입을 막는다" 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 (책)
* 입을 막는다고 하는 것은, "심판 아래에 있다" 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심판의 효과가 떠들고 까불도록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입을 막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입을 막고 있다고 착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이미 심판이 임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냥 겸손하게 입을 막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 몰라서 까부는 것이나, 알고서 입을 막고 있는 것이나, 둘 다 똑같이 심판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입을 막고 있는 것에 어떤 가능성을 주어버리면, 그것은 종말에 와서 주님의 이름의 능력에 의해서만 구원이 되는, 그런 구약에서 약속한 방식대로 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정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의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를 보자.
(요 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 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요 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예수님이 여인에게 먼저 물을 달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고 하니, 여인이 먼저 예수님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해야 하는 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먼저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여인이 예수님에게 물을 주지도 않았고 말이다. 즉, 여자가 예수님에게 해야 하는 것을, 여자에게 먼저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당해야 할 심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 입을 다물게 하는 방식 중의 하나가 바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 여기에 대해서 과연 여인이 입을 다물었는가? 입을 다물기는커녕, 의아해 한 것이다. 이것을 '낯설다' 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데, 이 낯섦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도 이런 주장을 했는데, 본인도 동의를 하는 것이다.
◈ 위기와 심판 - 예수님이 이린?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으로서 다가오는 것을 위기로(바르트), 심판으로(불트만) 본다는 것이다.
* 징계와 심판의 차이점 - 하나님께 얻어맞는 것이 심판이 아니고, 그것은 아는 사이에 일어나는 징계라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고도 이해를 못하는 것을 심판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 낯설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이다.
* 일천번제 -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① 자기 수명과, ② 재물과, ③ 원수가 죽는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라고 하셨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을 세상의 삼위일체(?)라고 할 수가 있다.
* 솔로몬이 이렇게 일천번제를 드릴 때, 솔로몬에게는 확정된 어떤 상황이 있는데, 이것을 철학에서는 규준(規準) - 이것이 옳다고 하는 어떤 원칙 -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솔로몬은 이렇게 규준과 자기의 마음을 맞추기 의해서 일천번제를 드린 것이다.
*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기준이 없이 오히려 반대로 '① 자기 수명과, ② 재물과, ③ 원수가 죽는 것을 구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에게는 이렇게 확정된 기준이 있었는데, 이것을 권위라고도 할 수가 있는데, 솔로몬에게 이러한 기준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일천번제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
* 제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물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가인의 경우에 문제는 바로 이러한 죽임이 없었고, 아벨은 죽임이 있었다는 것이다.
* 언약대로 시행하옵소서 ! - 제물은 살이 쪘던지 그렇지 않든지 죽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만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확정된 심판 자체에 자아를 위탁하는 것, 즉, 하나님의 심판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심판대로 시행하옵소서!'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사실은 언약대로 시행해 달라는 것이다. 언약대로 하면, 택한 자는 구원을 받고, 택함을 받지 못한 자는 지옥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행에 자기 자신을 맡겨야 하는 것이다.
* 목사의 임무 ! - 그러므로 목사가 해야 할 일은 너무 싶은 것이다. 그냥 언약을 전하면 되는 것이다. '주께서 약속대로 하십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 이렇게 약속대로 하는 것이 솔로몬에게는 낯선 상황이 아닌데, 심판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이다.
* 지난 주 토요일에 전화가 왔는데, [ 기독교의 허상 1 ] 을 읽고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만흥 장로의 [ 십일조의 혁명 ] 은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박만흥 장로가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 중간에 다리를 놓아서 십일조를 깨기는 깨는데 좋은 곳에 사용하자고 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생각을 하지 않지만, 그 사람은 그것밖에 모르지만 말이다.
* 십일조를 가지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쓰지 말고, 선한 일에 쓰자고 다리를 놓는데,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다리를 놓는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접근하는데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이쯤 왔으니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더 멀어졌는데도 말이다.
* 돈에 대한 집착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동의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돈을 잘 쓰고 못쓰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여전히 돈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과는 관계가 없고, 여전히 유대인의 수준밖에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성경에서 입을 막는다고 해서, 겸손하고 가만히 있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입을 막는다는 것은, 이 자체가 심판 아래에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언약에 맡기는 것이다.
*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를 다시 보자
*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 라고 하는 것이다. 여자의 관심이 갑자기 '내가 저 양반에게 물을 얻어먹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저 분이 나에게 줄려고 하는, 내가 저 분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이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생수라고 하는 갑자기 목마르지 않는 것이 나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접근을 했다가, 몇 마디 대화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여자가 예수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달라고 하는 것이다.
* 심봤다 ! - 그 때에 예수님이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여자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하는데, 여자로 하여금 심판 아래 두게 하는 '네가 남편이 다섯인데 아직도 네 남편이 네 남편이 아니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여자는 나름대로 육적인 노력을 했다는 것으로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메시야가 와서 그냥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그렇게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생수를 먹지도 못하고 물동이까지 버려 두고 가 버린 것이다. '메시야 봤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우리가 이러한 사건을 보면서, 이렇게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뿐만 아니고, 예수님의 전 공생애를 걸쳐서 다 해당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공생애가 다 연결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이 다 관련이 되는 것이다.
* 그렇게 해야 설교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는 십자가대로 따로 놀고,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까지도 다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노아 홍수 사건도 십자가까지 다 당겨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는 아들을 통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이 땅에 강림하신 사건보다도 더 충격적인 사건이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 되면 모든 관심사는 끝난 것이다. 오직 그 분에 대한 관심사가 우리의 모든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그 분이 너무나 낯설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도록 말이다. 타인(他人)으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입을 막는 것이다.
◈ 율법 중의 최고의 율법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
* 십자가는 보면 이해가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막상 십자가에 다가서면 전혀 이해가 되지를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는 종말 때에 아들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준 것이 바로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율법 안에 한 인격이 들어있는 것이다. 사건 안에 인격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가 함부로 '무엇을 하지 말자' 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히스기야처럼 목숨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자', '베드로처럼 세 번 부인을 하지 말자' 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인격을 알고 죽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아니고, '이런 것을 하지 맙시다' 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건과 인격을 연결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속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전체를 조명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간에 그것을 다 하는가? 설교를 하면서, 심방을 하면서, 새벽기도를 하면서, 사건에서 인격을 찾아낼 수 있는 고리를 꾸준하게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사도바울이 그렇게 했던 것이다. 율법으로 입을 막는다는 이것 하나를 가지고 로마서 1장과 2장에 걸쳐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전부 하나로 압축을 했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로마서 1장과 2장에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전체를 다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베드로에게 기가 죽지 않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베드로가 생각한 것보다 자기가 더 예수님을 생각하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같은 성령을 받은 자로서 사도바울의 이러한 루트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목회자는 설교할 때에 부담을 느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하는 것이다. 항상 준비는 하되 설교시간에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고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다. 새벽기도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중력을 느끼지 못해도 오는 잠을 다스려서 본문을 펼치는 순간에 설교가 튀어나와야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렇게 되도록 평소에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27 페이지
⊙ 자기 세계를 구축해 놓고 그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은혜로 준 것을 마치 공로의 결과로 여기는 것이다. (책)
* 고통 -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인간의 본능, 곧 인간이 욕구와 충동 곧 피하고 싶은 행동은 고통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즉,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심리학에서 강하게 주장하는 것인데,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라는 주장이 이런 것이다. 그런데 이 쾌락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즐거움을 말하는데, 이것을 진리라고 한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의 진리는 수학적인 것이지만, 그리스의 진리는 내가 온 몸으로 행복을 느끼면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차이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 못을 박기 위해서 망치로 때리는데, 그냥 못을 박으니 잘 안 들어가서 뒤를 납작하게 박으니 잘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 과학에서는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철학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과연 행복한가?' 하는 것이다. 현대 과학자들이 그리스의 철학을 다시 보는 이유는 과학이 행복이라고 추구했는데, 그런데 이 과학의 극단이 행복이 아니라 자기 파괴라는 것이다. 마약, 자살, 광란적인 음악 등으로 말이다.
* 예를 들어서, 질 좋은 꽃을 만들기 위해서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서 쫓을 키운다. 그런데 질 좋은 꽃을 만들기 위해서 모차르트 음악을 식물에게 들려주면서, 자기에게는 광란적인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다. 모차르트 음악을 자기에게는 적용 안 시킨다는 것이다. 인간은 더 큰 자극적인 것을 요구한다. 가사 내용도 더 자극적인 것이다. 인간은 한번 자극을 받으면 더 큰 자극을 요구하는 것이다.
* 교인들은 이렇게 큰 자극을 요구하고 있는데, 자극적인 설교를 하지 않는 분이 바로 박길현 목사이다. 아예 자극을 줄 줄을 모르는 것이다. 또 서문강 목사인데 그 양반은 로이드 존스의 말처럼 설교를 40분을 채우는 것이다. 더 이상 설교를 줄이는 것은 마귀의 짓이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교인들이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도무지 듣지를 않는 것이다. 물론 교인수가 적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 완전주의 - 김홍전 목사의 설교는 성프란시스코의 시절처럼 경건주의를 추구한다. 그래서 음악도 오직 경건한 음악만을 듣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고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죄 용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상적인 인간으로 그 형상을 본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즉 완전주의라는 것이다. 정관 수술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도무지 양보가 없는 것이다.
* 현대인이 원하는 것은 고통으로부터 해방이다. 고통이란 일반적으로 육체적인 고통인데, 이 육체가 자극을 받으면 자극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고통이 배가 고파서 고통이 아니고, 술을 먹을 시간에 술을 안 먹어서 고통이 되는 것이다. 육체가 단순히 처음 욕심이 없을 때에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육체의 욕구와 갈망이 새로운 양식으로 확산되고 증〉홱募?것이다.
* 상류층의 잘 사는 여인들이 입는 밍크코트 하나가 일억이다. 이것이 사치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데, 본인이 이천 만원자리 밍크코트를 환갑 빌미를 대어서 사러 갔다가, 옆에 있는 일억 자리를 봤기에 자기가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치인줄 알면서도 자기가 고통스러워서 잠을 못 자기에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입는 것이 아니고, 이억 자리 밍크코트가 나올 때까지 옷장에 넣어놓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런 생활 방식이 오늘날 교인들이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설교를 듣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 옷을 사는 것이 사치인줄 아는 것처럼, 내가 죄인 줄 알기에 그런 이야기는 그만 하자는 것이다. 알기는 아는데 내 몸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내 야망과 욕구가 채워지지 아니하니까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 일반학문을 공부하는 이유는? - 그러므로 우리가 왜 일반학문을 공부해야 하는고 하니, 모든 인간이 '무엇이 자기 분이 안 차서 고통스러운가?' 하는 것을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 사회, 경제 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요즘 대출을 받아서 뮤추얼 펀드에 투자를 하는데, 이것이 '묻지마 투자' 라는 것이다. 그냥 투자하는 것이다. 증시가 5%의 이윤을 기록할 때는 은행에 넣어 두는 것이 행복했지만, 그러나 주가가 올라가면서 증권이 더 돈을 버니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잊기 위해서 주식에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금요 철야 기도를 하는 것이다. 잘 되게 해 달라고 말이다.
* 이것이 바로 수(壽)와 재물과 그리고 원수가 망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합하지 않는 일천번제인데, 그 자체가 저주이고 심판인 것이다.
*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 것이 심판이 아니고, 자기가 알아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저주이고 심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멀어진다는 그 마음가짐 그 자체가 저주라는 것이다. 마음 속에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이 나오면 그 자체가 이미 저주 자체인 것이다.
* 그래서 솔로몬은 이런 마음을 죽이기 위해서 일천 번이나 자기를 죽이는 것이다. 철저한 자기 부정이다. 자기를 죽이는 것이다. 즉,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주의 종이 되어야 해!" 라고 하는 마음이다. 주님은 자기의 마음이 합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천 번까지도 말이다. 실제로 일천번의 번제를 횟수를 맞추어서 그대로 드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솔로몬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사도 바울은 죄의 권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죄의 권세 됨을 확인하는 방법은 그 안에 율법을 집어넣어도 그것을 의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음을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책)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율법으로 의를 만들지 못한다는데, 더 나아가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다. 없는 진노까지 발생시키는 것이다. 율법이 없는 곳에 범함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찾아왔다는 말은, 없었던 저주까지 다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반기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반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언약대로 ! - 율법이 없을 때는 죄인이 아니었는데 율법이 옴으로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심으로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작업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언약대로 하신 것이다. 언약대로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 언약대로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 예를 노아에게서 찾을 수가 있는데, 노아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 노아에게 심판을 행하시는 것이다. 지금 노아는 관람석에 앉아서 주님이 하시는 쇼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직접 자신이 심판 속에 있는 것이다.
* 이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인데, 이스라엘도 유월절 어린양을 직접 잡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원수가 죽는데 기뻐한 것만이 아니고, 이스라엘 본인도 직접 심판 안에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성도가 되었으면 반드시 자신해서 하나님이 주신 고통 속에 들어가는 것을 당연시 여겨야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처럼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오는가?' 라고 하지 말고, 나에게는 고통이 와야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 예배 - 시련 안에 있어야 자기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솔로몬에서는 '일천번제' 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에게는 예배이다. 그래서 예배가 고통스러운 것이다. 잔소리를 들어야 하니 말이다. 일반 사람들은 고통으로부터 해방이 그들의 목적이지만, 성도는 고통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다니엘과 세 친구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것을 면제해 주시지 않았고, 아예 사자 굴을 없애주시는 것도 아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풀무 불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만의 원리가 아니고,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다 적용되는 모든 성도에 주어지는 구원의 원리인 것이다.
(출 6: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출 6: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因)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 인(因)하여 : 곤(困)하여 - 사실은 한자가 같은 것이 아니고 다름.
(요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困)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 여기서 모세는 장차 올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무조건 모세를 추앙하는 것이 아니고, 모세 자신이 무엇을 느껴야 하는고 하니, 자기가 말하는 말의 내용과 자기의 경험과 일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 이것은 에스겔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못 알아듣는 말을 전하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 말을 안 듣는다고 네가 전하지 아니하면 그 죄책을 에스겔에게 묻고, 그 백성들이 듣던지 안 듣던지 네가 전하면 묻지 않겠다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장차 올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지금 이런 설명은 바로 구약의 사건들 속에서 예수님의 인격을 어떻게 뽑아내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 어떤 분이 말하기를 같이 공부하는 분 중에서 설교 시간에 무엇을 하자는 소리가 왜 그렇게 많으냐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 같지는 않는데 왜 그런가 하고 하소연을 하기에 이런 원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의 말이 다 맞다 라는 것은 아니고, 목사가 평소에 교인들의 생각을 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왜 이런 설교가 튀어나오는고 하니, 아직 말씀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되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를 대충 때우려고 하는 것이다.
* 이렇게 항상 구약에는 고통이 들어 있는데, 그 고통은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시키는 것이다.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앞에 있는 선지자들은 예수님이 보내신 분들이다. 그냥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참여하는 그 연결고리를 다 일일이 찾아서 설교해야 하는 것이다.
◈ 설교자의 자세 - 이 설교를 하고 나면 나는 이제 죽었다 !
* 이런 항상 마지막이라는 모습이 있으면 생각하지도 아니한 아이디어가 새록새록 튀어나오는 것이다. 예배 후의 엉뚱한 생각을 하면 설교가 안 된다는 것이다. 교인들은 또 이런 것을 잘 알고 말이다. '내 인생이 이렇게 뭉개지는구나, 그러면 뭉개지지 뭐' 라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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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 여기서 율법은 율법만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모든 계시, 곧 구약전체를 이야기한다. 레위기뿐만 아니라, 선지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 그래서 샌더스의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아는 것이다. 김지찬 교수같이 해서는 설교에서 고통이 나타나지 않는다. 기계적인 기능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 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자기 변호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박사학위를 가지고 남을 눌리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동국대 교수들은 박사가 아닌가?
⊙ 죄의 권세로 인하여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런 파국에 의(義)가 등장했다. 권세 자체가 뒤바뀐 것이다. (책)
* 모든 성경해석은 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아니라, 죄 때문에 우리는 입을 막을 수밖에 없는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죄의 권세가 어느 정도로 인간들을 장악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교만과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가를 추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차적인 방법이다.
*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 - 이것이 사도 바울의 방법이다. 그는 로마서의 1-3장에서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입을 막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목회자는 이 작업을 설교시간에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의 권세를 설명해서 교인들이 '망할 자는 바로 나구나!' 라는 고백이 나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 드디어 죄의 권세로 인하여 인간이라는 주체는 망가지는 것이다. 여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은혜 위에 은혜인 것이다. 이것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사람에게 ㅔ「? 이 사람은 은혜 위에 은혜 되신 주님의 생명만 귀한 줄 알고 그리스도에게만 영광을 돌릴 때에, 이것이 설교의 끝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설교자가 죄의 권세를 추적하는 지적(知的)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교회에 옥수수 박사인 김순권 박사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고백이 나오게 해야 하는데, 그 사람은 지금 자기가 아프리카를 살리고, 또 북한을 살리는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목회자는 그 사람의 입에서 그런 고백이 나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고백이 안 나오면 은혜 위에 은혜로다 라는 고백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 이런 경우에 로마서에서 유대인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 된다. 이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 속에 현대인의 종교적인 것이 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도사들이다.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다 들어 있고, 이것이 유대교의 교리이며 삶의 표준인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모든 전력과 노력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유대교의 자식이 오늘날 교인들, 옥수수 박사라는 것이다. 유대교를 공격하면 다 공격하는 것이다.
* 우리나라의 윤리 도덕을 주장하는 사람을 공격하면 그것이 바로 유대교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밥 퍼주는 사랑, 나라 사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곧 유대교인 것이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이웃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모든 것이 다 거짓이라고 설명해야 한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창조 과학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창조 과학회를 공격하면 된는데, 그러면 창조론은 무엇을 했는가? 진화론을 공격했다. 그래서 이것들을 다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론과 진화론 둘 다 유대교에 불과하며, 다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니 목회자는 평소에 이 공부를 해야 한다. 특히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 현대에는 과학에 비하면 모든 학문은 시녀인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토익과 컴퓨터만 공부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관심은 언제나 시장성이기 때문이다. 즉, 수(壽)와 재물과 원수가 죽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세속적 삼위일체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의 관심은 언제나 시장성이다 !
* 그런데 이런 학생들이 교회에 와 있다. 이들이 믿는다고 하면, 이들에게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고백이 나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장성이 있는 것만 찾는다. 목회 세미나도 마찬가지이다. 돈이 안 되는 성경공부는 아무런 의가 없는 것이다.
* 이것들이 다 죄가 남긴 파편들이다. 경기의 착시 현상과 같다는 것이다. 지금 이런 인간들이 교회에 와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이런 인간들이 추구하는 현대의 모든 현상을, 뮤추얼 펀드, 코스닥, 나스닥 등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가지고 패를 다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시간이 힘이 드는 것이다.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골에 있어도 어디에 놀러갈 시간이 있는가?
* 교인들은 자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설교자의 한마디를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허점을 보이면 안 되는 것이다. 교인들은 그 말을 듣고 곧바로 변명할, 반격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그것까지도 알아서 미리 찍 소리도 못하도록 받아쳐야 하는 것이다.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설교는 하나의 전투이고, 설교자는 교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 어제 중고등부 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는?" - 1)악하기 때문에(상대적으로 악하다는 것), 2)성질이 날 때에만, 3)취미이다. 정답은 3)번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을 잊기 위해서 반드시 죄를 지어서 그 쾌감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 죄란 일탈, 곧 위치이동이다. 자기 자리를 잠시 벗어나는 것이다. 유다서에 보면 마귀에게 배운 것이다. 항상 '해!' 라고 하면 안 하는 것이다. 청개구리와 같은 것이다. 일탈함으로 지금까지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 죄를 안 지으면 사람은 사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죄를 지어보는 것이다. 심심한 것은 고통인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이다.
* 그래서 운전을 하면서도 괜히 여자 운전자를 바짝 뒤따라 가보기도 하고, 중앙선을 넘어보기도 하고, 핸들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1단 기어를 넣어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안 들어가지만 말이다. 한 번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마음을 푸는 것이다.
* 이런 생각을 가지고 철학 책을 보면 모든 철학은 바로 이런 인간의 죄를 짓고 싶은 생각을 감추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윤리와 도덕이 더 그러하다. 자기가 죄를 짓고 싶은 쾌락을 자기 속에 감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더욱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 그러나 성경에서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고 네게는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다. 주님은 우리의 속을 다 아신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인간 속에 있는 모든 죄의 권세를 다 끄집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 끄집어내는 잘리는 것이다. 내 인생 이렇게 망가지는 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각오하시고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27-228 페이지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이제는 - 여기서 '이제는' 라는 말이 나오는데, 로이드 존스는 '이제는'을 가지고 세 편의 설교를 했는데, 그야말로 뽕 가는 것이었다. 마치 처음 복음을 대하는 듯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제는' 을 가지고 '이미' 로 보았다는 것이다.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오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선물은 항상 위로부터 온다(약1:17). 요한복음 3장 31절에서,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데, 그 내용은 36절에 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늘에서 보고들은 것의 전부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 오직 아들자랑 ! - 하나님의 관심은 환경 문제도 아니고, 전도하는 문제도 아니고, 교회부흥 성장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관심은 하나밖에 없다. 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예수님은 한 평생 전한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 있는 내용이고, 위에서 내려오시는 분이 전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구원론적으로 이것을 해석했다. 지금까지는 죄인이었는데 이제는 의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이제' 라는 것을 수평적인 시간 구원론적인 과정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계속 위에서 오는 것이다. '이제' 라는 것은 개인의 구원의 그 다음 단계인 성화단계라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이제' 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죄가 그대로 있고 이제는 위에서 의가 와서 그 의가 우리를 덮치므로 죄를 덮어씌우는 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는 것이다.
*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위에서 내려온 것을 수평적으로 전환시켜서 나름대로 설명을 했지만, 그러나 이것은 전환이 안 된다는 것이다. 도무지 전환되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는 위에서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유가 되었으니 '예수 안에서' 라는 것을 예수의 의를 소유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을 이해를 못한 것이 되고, 그러기에 예수 안에서를 예수의 의(義)를 소유한다는 그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는 소유가 없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의를 소유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 성경신학의 세계 П 참고
* 로이드 존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고방식, 즉 그 구원적인 사고방식이 틀은 변하지 않고 내용만 바뀐다고 본 것이다. 틀은 그대로 있고 그 속에 죄가 담겨 있었는데, 죄가 권세로 그 사람을 사로잡았는데, 이제는 의가 왔기에 그 의가 담겨 있다고 본 것이다.
* 구원론의 맹점 -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의가 오면 틀 자체가 박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기 전의 방식은 '내가 어떤 것을 믿어서 어떤 것을 소유해서 의인이 된다' 라는 구원론적 틀이라는 것이다. 이 틀이 그대로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론의 가장 큰 맹점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구약의 언약을 모르기 때문이다. 언약을 하나님과 인간과의 흥정으로 본 것이다. 바로 신명기 28장에 대한 오해로 발생하는 것이다.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 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 그런데 성경은 언약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이지, 하ご蹈?인간과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께서 하셔서 그 선물을 죄인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지 우리 인간하고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인간의 오해 - "내가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싶었는데 죄 때문에 못 지켰다. 그런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이제는 내가 새 사汰?되어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데 죄가 너무 커서 못했다. 이제는 의가 들어왔기에 할 수 있다"
* 이러한 대표적인 사람이 워치만 리이다. 아직도 이런 수준에서 맴도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다' 라고 나오는 것이다. 워치만 리 계통에서는 '이제는 내가 의를 행할 수 있다' 라고 보지만, 그러나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주께서 의를 이루신다고 하는 것이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현상론적 이해의 문제점 -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기에 우리가 주체가 되는 것이 분명히 없는데, 그런데 워치만 리는 우리가 이제 의를 행한다고 한다. 자기가 주체가 되는 현상론적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계시가 아니고 인간이 어떻게 하는지 그 현상을 수집해서 계시로 만드는 것이다.
* 워치만 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고 변화를 일으키는가에 관심을 갖고, 그 변화되는 것 중에서도 좋은 것을 다 수집하여 변화의 꽃다발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처럼 본 받아야 한다고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현상이 나타나더라 그래서 우리도 본 받아야 돼!" 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 자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 가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 그러나 성경은 "... 대신, ... 안에서, ... 의" 이다. 모든 것은 주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도 주의 은혜로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에 증거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 나도 괜찮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교인들은 나도 인류에 괜찮은 인간이고 도움을 주는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것에 자긍심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 이것은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있는데, 양심으로 못했던 것을 예수의 도움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니 자기가 행복해 지는 것이다. 이것은 에피쿠로스 학파가 추구했던 쾌락이고, 본질적으로 모든 철학이 추구하는 바인 것이다. 사실 이호식 씨도 자기는 나름대로 성경을 이야기하는 줄 알지만, 그러나 사실은 철학에 불과한 것이다.
* 질문 -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로마서 강해를 그렇게 뛰어난 복음적인 책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 답변 - 그 책에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이 자꾸 나오는데, 그 분은 그 당시 20C 초의 경건주의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론적인 모습을 버리지를 못하는 것이다. 미국의 청교도들과 연관을 시켜서 교인들에게 틀에 박힌 조직신학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에는 루터교와는 달리 칼빈주의의 영향 아래에 있는 경우에는 성경신학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로마서 강해 1,2,3권에서는 잘 나가지만, 4,5,6권으로 나가면 경건한 사람들의 현상을 수집해서 나열하는 현상론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27-228 페이지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차별이 없다" 라는 말은, 믿는 자는 모두 외부에서 일괄적으로 받은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자들이지 자기가 노력한 것을 내놓을 자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책)
* 차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 개개인의 차별이 있다고 해도,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차별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믿음이 약한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차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오직 義 ! -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강한 사람, 적은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그래서 그 사람이 구원을 받는지 못 받는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말고, 오직 주님의 의만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관심사가 오직 하나님의 의만 바라보는 것이다. 주일을 다른 날보다 더 귀하다고 하는 사람도 천당에 간다고 해 달라는 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관심이 없고, 누가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오직 주님의 의만 바라보자고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차별이 없는 주님의 의만 바라보자고 하는 것이다.
◈ '차별이 없다' 라는 것은 인간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한다고 하는, 그런 수근거리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니까 율법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믿음과 율법 - 하늘에서 오신 분이 유대인들을 보고 한 말씀이다. 오직 아들을 믿어야 하는데, 믿는다는 것이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것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로 율법을 굳게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믿으니까, 새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율법을 서서히 지켜볼까'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 자체에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 포함이 되는 것이다. 마치 잡채와 오뎅의 관계라는 것이다. 잡채를 먹으면 그 속에 오뎅도 들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 안에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고, 또 친히 율법을 다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의가 되는 것이다. 이 율법을 떠난 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 인간이 만들어 낸 의가 아니라 주님이 이루신 의이다 - 가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것이다.
* 율법 외에 한 의인데, 이 의는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을 이루심으로 주어진 의라는 것이다. 원천이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선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의가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된 것이다. 의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 그런데 사람이 왜 이것을 인정을 못하느냐 하면, 지식으로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나쁜 짓을 해도 되네' 라고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인데, 자꾸만 옛날 틀, 즉 전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와 지려고 하다가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와 지려는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 이런 사람은 결국 구원을 못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원을 못 받았기에 옛날 틀로 예수님을 믿는 것도 집어넣고 행함도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훈택 교수처럼, "믿음+행함" 이라는 이상한 공식이 나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는 날마다 죽는 것인데 무슨 주체가 있는가?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라 주님의 몸인 것이다. 이것을 주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님의 성전인데 자꾸만 자기 성전이라고 우기는 것이 인간이다.
* 구약에서의 성전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라는 것에 달려 있다. 그 속에 언약이 있으면 성전이고, 언약이 없으면 성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멋있는 건물이 아니고 말이다. 신약에서 언약이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다. 이렇게 언약이 있다는 말은, 이제부터 언약대로 시행하시겠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언약대로 시행하는 도구가 우리들의 몸이라는 것이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우리 안에서 시행하면 우리가 몸이 성전이 되는 것이다. 신약에서 새언약이 들어 있으면 성전이고, 들어 있지 아니하면 성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약궤를 모시는 하나의 수레라고 보면 된다. 우리는 왕을 태우는 가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주님께서 우리를 귀히 보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는데, 괜히 우리가 기가 죽어서 돈이 없다고, 수명이 짧다고 남에게 기가 죽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너무 세속적인 태도인 것이다. 산은 진리도 아닌데도 산이 좋아서 산에서 묻히는 등산가도 있는데, 우리는 왜 그러한 소원이 없는가?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에게 묻히고 싶어하는 모습이 있어야 당연하지 아니한가?
☞ 하나님의 선택, 228 페이지
⊙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난 뒤의 모든 율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준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데 가뿐히 성공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의미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참된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귀결이다. (책)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성령이 하시는 역할은 율법의 완성인데(롬 8장), 그 일은 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앞장 세워 나가는 일이다. (책)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이 들어가면 안 되고, 하나님의 의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평생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롬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 그러면 인간은 모세 이후에는 죄를 안 짓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끝까지 사망이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망이 왕 노릇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가입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에게 없는 죄까지도 만들어 내는 것이다.
* 진노와 긍휼의 그릇 -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두 가지로 사용을 하시는데, 하나는 율법을 주어서 모든 인간은 다 죄의 권세, 곧 사망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시는 것인데,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고 긍휼의 그릇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여주시는데, 공의와 자비를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세상을 쥐고 흔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주심으로 모든 사람의 입을 막아 버리고, 의를 주심으로만 오직 사랑하시는 자에게만 구원을 받는 사랑이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여기서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그 사랑이 느껴지는 것이다. 독생자를 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다. 독생자를 준 것으로 사랑을 알려고 하면 사랑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 독생자를 주지 말고 차라리 돈이나 한 뭉치를 주어서, 그래서 사랑하게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참 사랑이라고 하면, 어떻게 믿는 자만 구원하느냐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 이러한 퉁기는 현상은, 처음부터 사랑이 없으면 무슨 핑계라도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독생자를 주셨구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독생자를 줄 것이 뭐 있나, 그냥 올라오라고 하면 되지' 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주의 말씀은 사랑 없음을 보여주는 낯선 행동이 되는 것이다.
◈ 모든 주의 말씀은 사랑 없음을 보여주는 낯선 행동이다 !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을 크게 볼 수 있도록 하옵소서. 자신의 구원이나 행복에 관심을 두지 말고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께서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계시는지를 크게 알아서 우리가 도구인 것을 분명히 확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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