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하나님의 선택(43) - 새언약 17 본문
하나님의 선택(43) - 새언약 17
99,5,24 이근호 (김진철 정리)
◈ 성경과 철학과의 차이점
* 성경은 개인적인 것에 관하여 계속 추궁해 들어가는 반면에 일반서적이나 철학이 말하는 것은, 기독교라는 집단주의라든지 교회, 국가, 민족, 남북통일, 쌀 보내기 등 외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심사숙고해 본 적이 있는가? 성경은 개인적인 육신과 그리스도와 단독으로 대면하는 것에 치중하는 반면에, 신앙서적이나 일반서적은 외부적인 것에 관심이 많이 갖고 있다. '왜 사람은 외부적인 것을 가지고 신에게 나아가고자 하는가?' 하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 그 이유는 공간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초월성을 자기 주변에 있는 공간을 통해서 접근해 가려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자아를 축으로 해서 점차 바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깥으로 나아가면 자아에 대한 관심사가 자동적으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 목사가 자기가 구원받을 생각을 안 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를 아담하게 할까?' 라는 것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자기 걱정을 안 하고 교인들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바깥으로 나아가니까, 그 다음에는 교회 말고 민족이라든지 국가에까지 관심이 확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에 대한 관심사는 없어지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불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 즉, 성경은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신학서적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기독교 땅 따먹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 영역을 놓고 누가 더 많이 점령해 가는가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자기 영향력을 그 곳에 얼마나 많이 발휘시키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향력을 주면 줄수록 자기에게 힘이 되고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아성취인 것이다.
* 헤겔은 이것을 두고, 자기의 노동의 결과를 통해서 자아를 발견한다고 했다. 만약 자기가 의사이라면, 그 의료 하는 행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인간들은 남들과 경쟁하고 비교하는 가운데서 성경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차별성에 나아간다는 것이다. 화투장에는 안쪽의 그림을 다르나 밖의 그림은 동일한 것과 같은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인간도 동일하게 보신다. 하나님은 제사장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에 동일하게 보시는 것이다. 제사장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하는데, 성경을 바라보면 다 똑같은 인간이 되니까, 인간은 자기의 비전 꿈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톡톡 튀고 싶은데 성경은 그런 여지를 인간에게 주지를 않는 것이다.
* 인간은 끊임없이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인간의 육신에 대한 공격을 한다. 자기만의 재주와 품위를 챙길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개성을 살리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 왜 사람들이 교회에 안 나오는가? 그 이유는, 사람들이 교회에 안 나오는 것은 바빠서가 아니고, 자기만의 개성을 돋보이게 해주지 않을 때에는 교회에 출석을 안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교회이든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직분을 주면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자기만의 개성을 살려주기에 거기에 보람을 느끼고 나오는 것이다.
* 제자훈련의 허구성 - 이것을 넉자로 제자훈련이라고 하는데, 젊은이들에게는 개성을 살려주는 일을 시키면 그 청년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바람이 나서 교회에 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나이가 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성경은 보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떤 인간이든지 다 똑같이 취급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은 마치 화투의 뒷장처럼 똑같은 것이다. 그야말로 밋밋하기가 짝이 없다는 것이다.
* 종교법 - 종교법을 만들자는 의견이 獵쨉?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반대하는 사람은 인간의 신앙의 자유를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찬성하는 사람은 국가 발전에 사용되어야 할 돈이 사이비 교주에게 다 가니 국가적인 재정적인 손실이 있으니, 이런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교단들이 다 찬성을 한다. 왜 찬성을 하는가? 그것은 자기들이 기득권을 자기가 잡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기득권자들이 법을 만들어서 자기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 종교법을 만들면 안 되는 이유? - 그러나 개신교에는 성경보다 더 초월한 법은 없는 것이다. 국가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기에, 그래서 성경은 믿는다는 것은 어떤 권세자나 환난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권력보다 더 높은 권세의 의해서 조종을 받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의 경우라는 것이다.
* 만약에 종교법을 만들면 성경이 국가법에 예속되는 것이다. 종교법을 만들자는 것은, 내가 세운 교회에 교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힘도 동원시키겠다는 의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말씀도 없고, 부활하신 주님도 없고, 오직 국가의 권력자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찬성을 하는 것이다. 자기 힘의 누수가 일어나는 것이 두려워서 국가의 힘으로 유지하려는 것이다.
*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매일같이 주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묻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권세를 믿느냐, 아니면 국가와 헌법의 권력을 믿느냐' 라고 말이다. '가족이라는 혈연 단체를 더 사랑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더 사랑하는가?' 리는, 이것을 주님은 매일같이 묻는다는 것이다.
* 새언약 - 그러나 마귀의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가족도 국가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새언약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가지고 자신의 피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돌려서 나누신 것은, 피를 나눈 관계는 눈에 안 보인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지금 그런 피를 받은 자들과 여기에 함께 계셔서 교회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노회와 총회법이 없어도 말이다.
* 이런 믿음도 없고 성경에 대한 존경심도 없는 사람에게는, 자기 집단을 지키기 위해서 법을 추가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만민중앙교회의 사건과 종교법을 만들자는 움직임을 통해서,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런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가?' 라고 말이다.
*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방해하는 자가 누구인가? 성경을 보지 않고 외부적인 것에서 이것을 보면, 그것이 공산당, 이슬람교, 불교 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놀랍게도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 즉 육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육신 -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서 육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육신이 성령이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육신이라는 것이다.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성령의 일을 방해한다는 이 이야기는, 사실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현실을 해석하는 하나의 Key가 된다는 것이다.
◈ 현대인의 특징 -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
* 그래서 현대인들은 예수도 안 믿고 아무도 안 믿는 것이다. 다만 이용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겠다는 이러한 현대인의 사상을 죄에 종속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 죄인 됨 - 여기서부터 성경은 해석이 되는 것이다. 성경해석은 '내가 왜 죄인인가?'에서 출발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죄인' 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 내가 죄인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죄의식과 죄인 됨을 아는 것은 다른 것으로, 죄의식은 공포심을 말하는 것으로, 그래서 '나는 공포심이 있으나 없으나 나는 죄인이다' 라고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인 됨의 의식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28 페이지
⊙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성도의 육신을 죽이는 쪽으로 활동한다. 죄와 의는 인간이 행사할 수 있는 윤리적 차원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둘 다 인간을 지배하는 권세적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책)
* 성경은 인간은 권세적 위치에 있다고 한다. 즉, 성경은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죄가 무엇인가를 동반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죄가 ゾ昰寬「?이야기해 주고 그렇게 해줌으로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을 밝혀주어야 바른 설교가 된다는 것이다.
(롬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 인간이 내 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계시는 '자기가 죽는다' 라는 사실이다 !
* 사망이 왕 노릇 한다 - 이 사실은, 인간이 내 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계시는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나에게도 죽는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가!', '주님을 만?기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가!' 라는 것은, 사망이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이 고백이 나온다. 사망의 왕 노릇이란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아무리 돈을 가지고 위장을 해도 인간은 그 돈 안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 대우 자동차인 레간자를 선전하는 C.F를 보면, '에어백이 두 개 있나? - 없다', 'ABS는 있나?- 없다' 라는 대사가 나오면서 겉에는 양복을 입었지만, 안에는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실 인간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밖에 외투만 걸치고 있는 인간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인간이라는 시체에다 돈으로 걸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도 없고 믿음도 없다는 것이다. 부자가 천당 가기 힘들다는 것은, 돈은 천당 가는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시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시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는 것은, 먼지가 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 '사망이 왕 노릇을 한다' 라는, 이러한 진리 때문에 일어나는 유일한 현상이, 바로 '내가 죽는다' 라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을 통해서 성경은 진짜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참 다운 생명의 주를 만나야 하는데, 그 날이 바로 자기가 죽는 날이라는 것이다. 그 날에야 비로소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고백했던 것이다(고후5:8). 나에게도 이렇게 제대하는 날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은 것이다. 그 날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거꾸로 매달려도 시간은 가는 것이다. 아무런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그래서 드디어 인간에게는 언젠가는 영원히 죽지 않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빨리 오면 좋은데, 늦게 오도록 유도하는 것이 우리 자신인 것이다. 아부하고 권력에 고개 숙이고 살아보려고 눈치를 보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사망에게 자꾸만 절을 하는 것이다. 죽어가면서 우리는 자꾸 외투만 걸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잘 살지만, 지옥 가는 사람을 부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신자 됨 -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안 가진 것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남들에게 없는 것을 내 놓으라고 하신다.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것, 사망이 왕 노릇을 하는 데서 생산될 수 없는 것을 내 놓으라고 하신다. 이것을 가지고 신자라 한다. 이것이 제사장이 있다는 새언약인 것이다.
* 유월절 죽음의 사자와 왔을 때에, 이스라엘이 살아 남은 것은 어떤 이유인가? 문설주에 자기 자식의 피를 바른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양의 피를 바른 것이다. 이것만이 죽음의 사자를 이기는 것이지, 자기가 기도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기도 - 기도는 일종의 노동이라 했다. 만족하는데 무슨 기도가 필요한가?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해 놓고 사람들은 자기의 불만과 한을 터트린다는 것이다. 기도를 하려면 주님이 만족하도록, 주님의 뜻대로 쓰임을 받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 외에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 다시 한 번 정리를 하면, 성경에는 사회적인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죄가 확산되고, 그 죄는 아담과 하나님과의 약속 위반에서 오는, 그래서 죄에 대한 확산과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철학자들이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이것을 발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21세기의 모습 - 이러한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가 반복되는 것이 오늘날 21세기인 것이다. 죄는 동일한 죄를 짓는데, 그것이 계속해서 확산되는 것이다.
* 우리가 이 죄에 대해서 철저히 분석하지 못하면, 이 사회에는 나쁜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도 있다는 오류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좋고 나쁨이 같이 있다고 한 것은 아담의 죄의 결과이고, 오로지 나쁜 것밖에 없다는 것은, 제대로 죄를 깨닫고 난 다음의 아담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 어제 사택에 어떤 아가씨 한 분이 찾아 왔는데, 아마 목회자 사모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같은데, 그것도 모르고 '목사는 다 이단이다' 라고 하자, 그 아가씨가 하는 말이 울먹이면서 '다는 아니지 않느냐' 라고 하는 것이다. 사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를 못하는 것이다.
* 이 아가씨의 경우에는, 목사를 하나의 직업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 아가씨가 만약에 '목사 중에는 나쁜 사람도 있지만 다는 아니지 않습니까?' 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좋고 나쁨이 같이 있다고 하는 아담의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죄인이기에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자, 그 아가씨는 화가 났던지, 사실 그것이 본인의 주특기이지만, '기도는 안 해도 됩니까?' 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를 시킨다' 라고 답변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대화가 된 것이다.
* 바로 그 기도는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기도인 것이다.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며,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주시는 생명이 아니면 목사든 장로든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신자라면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며, 그래서 오직 새언약만을 드러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독립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해서 결혼에 매이지 말고 '그리스도를 과연 내가 믿는가?' 하는 것으로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고, 그 아가씨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이해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 사람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다른 사람은 나빠도 자기는 안 나쁘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늘 외부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나에게 관심을 두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죄인인데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목사인 나부터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교인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괜히 목회를 한다고 폼을 잡지 말고, 남을 도와준다고 설치지 말고, 나 자신부터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목회는 주님이 하시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은 '나 자신이 바로 죄인이다' 라고 지적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 주님은 '권세자나 사망이나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아는가?' 라고 물으신다. 우리는 예수님께 철저하게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쪽에 종속되면 다른 쪽에 종속될 수 없는 것이다. 두 주인을 못 섬긴다는 것이다.
* 종속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발람의 당나귀인 것이다. 당나귀가 발람 선지자의 말을 듣지를 않는 것이다. 발람 선지자의 채찍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을, 지금 자기 앞에 채찍이 아니라 칼을 들고 선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보았던 것이다.
* 그리고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평소에는 그냥 살아가다가 중요한 때에는, 꼭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다른 사람의 말은 안 듣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의 상관이라고 해도 말이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부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을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라고 하는 것을, 우리의 주인 되시는 분이 당부하셨다는 것을 결코 잊지를 말고, 언젠가는 그 분을 만나게 됨을 명심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설교를 할 때에는 '이 설교를 아무도 안 믿는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적이고 멋있는 설교를 모든 사람이 듣고 다 아멘 할 것이다' 라는 태도가 아니고서 말이다. 자기가 설교를 잘하려고 의식을 하게 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안 되고, 아무도 안 믿는다는 마음으로 독기를 품고 자신을 집어던져야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29 페이지
⊙ 따라서 뭘 하라고 한다고 해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권세에 몸을 맡기는 관계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책)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毬ご途?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 죄(罪)란? - 아예 어느 한 권세에다 몸을 맡기는 관계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라고 할 때에, 그 죄가 무엇인가? 도대체 죄의 개념이 무엇인가?
*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무조건 죄라는 것이다. 세상 권력에 고개를 죽이는 것도 죄라는 것이다. 의의 반대가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면 나머지는 다 죄라는 것이다. 예수님만을 이야기하지 않을 때에 전부 다 죄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심 윤리성도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이 극복된다면 사실 대단한 것인데,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와 함께 계실 때에 남들이 뭐라고 하는 지를 다 아셨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수준이 그것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세리와 창기와 격리함으로 의를 유지하고 도덕을 유지하고 사회 질서의 거룩성을 유지하려는 수준은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 세리와 창기를 안 만나고 따로 떨어짐으로서 자기 나름대로 거룩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 하는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세리와 창기와 함께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그 자체가 거룩이 되는 것이다.
* 거룩 - 그러면 무엇이 거룩인가? 예수님에게 있어서 거룩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바로 거룩인 것이다. 예수님 자신의 거룩이 아니고 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은 주님이 보시기에 똑같다는 것이다. 화투의 뒷면처럼 말이다. 다 같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쁜 사람에게서 따로 나왔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요한 3서에 이단을 멀리하라고 되어 있는데, 이단을 멀리하는 것은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단은 다른 예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차라리 그럴 것이면 세상 밖에 나가 살아야 하는 것이다.
* 이런 도덕성과 윤리성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런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체면이라는 것이 발목을 잡고 놓지를 않는 것이다. '네가 그런 짓을 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명성은 하루아침에 다 무너진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것이다.
* 도대체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무엇인가? 무너질 사랑 탑인가? 정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저지른 죄의 열매인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철저히 망가지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안 망가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망가져도 되는 되 안 망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이 망가진 자리에서 주님은 우리를 만나신다고 하는 데도 말이다. 보통 고집이 아닌 것이다.
* 욥과 거지 나사로를 생각해 보라. 주님은 우리를 그와 같은 망가진 자리에서 만나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인서 13장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에서 만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철저하게 깨어진 상태에서 말이다.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
(히 13: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지는구나', '내 인생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는구나' 라고 할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가 왕 노릇을 하는 이 세상에서 천당 가는 유일한 개구멍이라는 것이다.
* 사람은 아직도 자기에게 애착이 있고 미련이 있기 때문에 멋있게 보이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좁은 길을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남들에게 칭송과 주목을 받는 넓은 길을 좋아하지, 좁은 길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고통까지 남들에게 멋있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 '개척교회를 한다고 저렇게 고생하는구나'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남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좁은 길이 아니고, 넓은 길이라는 것이다. 들의 잡초처럼 그냥 소리 없이 사라져야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 '델마와 루이스' 라는 영화에서, 이것은 페니미즘(여자도 마음대로 남자를 골라잡을 수 있다는 사고)의 영화인데, 그래서 9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한참 가부장적 제도가 판을 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인데, 마지막 장면을 보면, 그랜드캐넌에서 두 여자가 자살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두 여자가 결국 죽으니 그 영화에서 아무리 그들이 멋있어 보이고 가부장적 제도에 대행해서 싸웠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이 죽음으로 끝나니 '결국은 실패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 바로 이 점을 우리가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렇게 한국교회를 비판하다가 저렇게 비참하게 죽게 될 줄이야, 그래서 인간이 참 불쌍하다' 라는 생각을 극복해야 磯募?것이다. 거지 나사로가 되어도 괜찮다고 하는, 망가져야 한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신 길이 아름다운 길이 아닌 것이다. 많은 포장을 해서 그렇지 실제로 보면 아름답지가 않다는 것이다. 오죽 했으면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갔겠는가? 그리고 가룟 유다가 배반을 했겠는가? 자기들의 예상과는 너무나 차이가 났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21장에서, '그래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실 그때에 베드로는 어떤 상태였던가? 그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고기를 잡는 기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병을 고치고 할 때에는 무엇인가 되는 줄로 알았는데, 그러나 인간들이 기대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에, 그리고 '죽는 것도 네 원대로 죽지 못한다' 라는 바로 그러한 죽음의 상태에서, 드디어 주님의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베드로의 일은 진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 사도행전의 마지막에 어떤 장면이 나와야 근사하겠는가?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드디어 로마의 황제까지 변화시켜서 로마 황제의 충실한 제사장이 되었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멋있는 사도행전의 마무리가 되지를 않겠는가? 그러나 사도행전 마지막을 보면, 사도바울은 전세방에 있다가 끝났다는 것이다.
* 그래, 사도바울의 이러한 비참한 최후를 보여주기 위해서 다메섹에서 주님이 나타나셨는가? 그 다메섹 도상에서는 바울은 이제 자기는 무엇인가 크게 되는 줄로 알았지만,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주기철 같은 사람은 기념관이나 있지, 바울에게는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더라도 주님은 물으시는 것이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이것을 몽땅 드린다고 하는 것이다. 드릴 때에는 나는 죄의 병기였다는 마음으로, 나는 철저하게 죄의 노예였다는 그런 자세로, '이 죄의 병기를 주께서 의의 병기로 사용해 준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습니다', '주께서만 사용하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주님 만 있다면 저는 족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 이 마음이 바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은혜 안에 있는 것이 병이 낫는 것이 아니고, 형편이 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 생각하는 정신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만 생각하는 그런 정신 자세 속에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29 페이지
⊙ 은혜의 상태라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늘 죄에 대하여 죽어 있는 상태이다. (책)
* 죄에 대하여 죽어 있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왜냐하면 죄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죄를 모르기에 죄에 대하여 죽어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다. 죽음이란 말은 '상대하지 않는다' 라는 뜻인 것이다. 나는 너하고 안 논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나는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 죽어 있다는 말은 선악체제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선악체제와는 상관이 없는 팔자로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이다.
* 죄에 대하여 죽어 있는 자는 '무엇을 해야 한다' 라든지, '무엇을 할까?' 라고 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죽었기 때문인 것이다. 선악에 대해서 죽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선이고 악인지' 라는 것에 대해서 이미 관계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 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선을 이루지' 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이렇게 죄에 대해서 죽어 있는 자는 '내가 무엇을 할까' 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의에 대해서만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바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내가 독자적으로 어떤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누구로부터 종속 당하는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이 바로 살아 있다는 것이다.
* '네가 전에는 죄에 대하여는 살았더니' 라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죄에게 꼼짝 못한다는 의미라는 것이. '의에 대하여 살았다' 라는 말은, '무엇을 할까' 라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의 병기가 되고 예수의 증인이 될 수밖에 없는 팔자라는 것이다. 이것을 성취시키는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것을 성취시킨다는 것이다.
* 설교 - 그러면 설교는 무엇인가? '누가 의에 대하여 산 자인가?' 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보여주는 것이다. '감사합시다' 라고 선동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다윗은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 하나님의 선택, 229 페이지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우리 속에 하나의 우물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우물을 그 사람이 지배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물이 그 사람을 도리어 지배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 여기서 단절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땅에 속한 사람은 위엣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위에 계신 분이 성령을 하염없이 줄 때에만 위에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이것이 요한복음 4장에서, 유대인이라는 제자들과 사마리아 여인과 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모르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그 속에 생수가 늘 나오는 어떤 우물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땅에서 속한 사람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물을 길러 와놓고는 물을 길지 아니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위에 것은 땅에서 아무리 율법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5장에서는, 땅에 것을 가지고서 하늘의 것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땅에서 속한 사람들의 자기들의 영광만을 취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 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 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지만 사람들은 영접치 아니했는데,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저 사람처럼 될 수 있다' 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영접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갖고 싶은 영광을 그 사람이 받으니까, 나도 어떻게 하면 저 사람처럼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 사람을 환영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만을 이야기하니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자기의 영광을 쟁취할 수 있으면 좋은데, 예수님은 그렇지 아니하니까 배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일체 자기의 영광을 포기해야 되고, 일체의 자기 영광마저 계산해 넣는다면 절대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자기 영광을 이미 포기한 자이다 !
*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영광을 이미 포기한 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내 영광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내 영광도 챙기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을 취한다면 그 사람은 가짜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오신 분의 이야기인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그 이후에 훌륭한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또, 실로암에서 눈을 뜬 사람이 그 이후에 잘 되었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이 나중에 재벌이 되었다는 말도 물론 없는 것이다.
* 이렇게 'Happy ending' 으로 끝나는 것을 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관심이 예수로부터 벗어나서 세상 영광, 자기 영광에 관심을 둔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잘 되었다는 것은 성경에는 전혀 없는데, 그런데 간증 집회에 가면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없는 것이 간증집회에 가면 많이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솔로몬은 나중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로 인생을 끝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욥의 경우에도 나중에 하나님이 새로운 자식을 주었지만, 전에 죽은 자식들이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다는 것은 이미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했다는 것을 말한다.
☞ 하나님의 선택, 229, 230 페이지
(롬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인도자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위탁한다는 것이다. 영의 인도함이 없는 자는 필히 자기가 자기를 인도하려 든다. (책)
*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자체적인 선행이나 행함으로는 용납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특징은, '나는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라는 것이다. 자기 독자적으로 어떤 행동에 나서는 것은 이미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으로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원(原)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
*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분이셨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드러냈던 것이다. 사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가 아닌가의 기준은 바로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이 사고방식과 견주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 사도바울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고, 사도바울과 다른 생각을 가지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절대적인 기준은 성경이라는 것이다. 다른 종교법이라는 것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조직이든지 그 조직을 위해서 법을 만들면 그 조직이 우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단이 생기는 것이다.
* 견인(牽引) - 성도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견인(牽引)이라는 것이다. 칼빈주의의 성도의 견인(堅忍)이 아니고 말이다.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필히 자신의 모든 것을 위탁한다는 것이다. 영의 인도함이 없는 자는 필히 자기가 자기를 인도하려 든다는 것이다. 종속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교인들에게 무엇인가를 자꾸 시키는 것이다. 자기가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의 경험을 그대로 내뱉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니까, 기도하니까 복을 받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도를 안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의 모든 내용은 성경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 안에서만 자기 아들이 존재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성경을 바라보고 성경의 뜻을 증거하는 것이지, 자기 나름대로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서 남들보다 뛰어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도한다는 그 기도 자체가 기준이 아니고 오직 성경이 기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 만민중앙교회의 신도가 하는 말이 '이재록 목사가 라스베가스에서 다름 목적이 아니고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 도박을 했는데 무엇이 나쁜가?' 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분이 잘 한 것도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다. 그 잘한 것이 바로 그 분이 기도를 하면 놀라운 기적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분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가? 왜 이것을 MBC에서 이야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재록 목사의 도박과 여자문제, 그리고 돈을 강요하는 것만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 자, 그러면 이재록이만 돈이 필요하다고 했는가? 다른 회사의 재벌은 안 그런가? 절에서 사월초팔일에 연등을 달아서 우리가정이 잘 되고 평화를 기원하고 하는 것은 만민중앙교회와 똑같지 아니한가? 이현주 목사는 석가탄신을 축하하는 설교(?)를 했고, 수녀는 연등행사에 같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의 수원의 어느 성당에서는 '할렐루야, 석가 탄신을 축하합니다' 라고 하지를 않았는가?
* 그럴 것이면 양심대로 살면 되지 종교가 왜 필요한가? 결국 종교란 국가가 하지 못하는 어두운 구석에 구제와 자선 사업을 하니까, 국가가 경제적으로 권력적으로 보호해 달라는 것이다. 내가 세운 종교이기 때문에 내가 이 집단을 통해서 영광을 얻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 것이다.
*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서 사는 자들은 하나님과 성령을 들먹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행위의 보조자나 협력자로만 사용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주도권이 자기에게 있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도권이 주님께 있다면 오직 주님만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30 페이지
⊙ 인간 자신이 그렇게 잘 났다면 무엇 때문에 인도자가 따라붙겠는가? 인도하시는 분이 인도함을 받는 인간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징계하고 꾸지람을 하고(히 12:8) 날마다 죽이면서 인도하는 이유도 인간들에게는 나올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책)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주님께서 검사하는 기준이 우리 속에 박혀 있어야 기독교 신자인 것이다. 그 기준이 확실히 박혀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이 측정하는 기준은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검사하는 기준이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인도하시는 분이 칭찬을 한다면 왜 인도하겠는가? 이제는 내 혼자 잘 해 보라고 할 것이다. 원수갚는 것을 내게 있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심판하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꾸지람을 받아야 하고 징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날마다 우리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맏아들 - 인도를 받아야만 될 이유와 목표는 결코 인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맏아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 그러면 맏아들이 되는 데 우리가 왜 필요한가? '많은 형제가 왜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맏아들이란 모든 사람이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빌2:5-11).
◈ 신자가 필요한 것은 맏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기능과 사명과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이다 !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아들자랑 -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아들을 우리도 같이 기뻐하게 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미리 알게 되었고, 부름을 당하고,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맏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 이것이 조직신학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 조직신학의 구원론은 '자기들은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 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구원받는 것이 어떤 계기와 바탕을 가지고 구원론이 형성되었는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자기 구원만을 받아서 챙기고 도망치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연금을 들었다' 하고 끝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 신학' 이 필요한 것인데, 그러나 못 알아듣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 '미리 정했다' 라는 것은 이미 결정이 서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맏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지, 인간을 구원해 주려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론적 선택이 아니고 계시론적인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것을 칼빈과 바르트가 모른다는 것이다. '칼빈주의 예정론'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조직신학적인(구원론적인) 예정론에 불과한 것이지 성경적인(선택론적) 예정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인간을 구원하려는 종교적인 예정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교에서 말하는 예정론과 꼭 같은 것이다.
* 칼빈이 알미니안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예정론을 정립함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언급하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구원론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선택론이 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이 구원을 받는데, '행위인가, 믿음인가' 라는 대비는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원론 자체를 포기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31 페이지
⊙ 이런 자만 영화롭게 하시는데, 그 이유는 아들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미리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책)
* 하나님은 아들이 모습이 있는 것만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내어놓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내비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다. 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이 죽음의 사자 앞에서 어린양만 내세웠던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은 어린양의 피로서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슥 3: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 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 아들의 형상 - 우리가 스스로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사가 사단 앞에서 우리의 이 세상의 더러운 옷들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 입힌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들의 형상繭遮?것이다. 예수님의 피로 흰옷이 입혀지는 것이다.
* 우리를 그렇게 조롱하고, 우리가 인간의 행함의 의미를 두지 않고 예수님만을 찾는다고 그렇게 우리를 비난하고 욕을 했던 선악적인 체계의 죄를 갖고 있는, 아담의 범죄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그 사람들 앞에서, 요한 계시록의 성도들은 값없이 주시는 어린양의 피로 흰옷을 입혀지는 것이다.
◈ 모든 인간의 구원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계약의 의해서 이루어진다 !
* 모든 구원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계약의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자리에 섰다고 할 때에 얼마나 승리감에 기쁘겠는가? 무슨 자기 행위를 자랑하겠는가? 피를 흘린 주님의 옷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귀를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망가져도 괜찮다는 것이다.
⊙ 왜 아들의 형상을 본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장자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들 중에 일부를 택하신 이유는, 자기 아들을 장자로 내세우기 위한 필요한 조치였고, 그것이 다윗에게 약속한 언약대로 성취하는 일이다. (책)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 이름을 장자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다윗언약대로 다윗언약을 성취를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솔로몬도 다윗도 아니고, 오직 다윗의 후손 어떤 메시야가 올 터인데 그 분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31 페이지
⊙ 다윗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장자가 되는 이스라엘의 왕의 공로에 의해서 백성들이 혜택을 누리는 체제를 완성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체제 안에서는 율법 행함의 원칙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모든 공로는 다 장자의 것이다. 이 원칙은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책)
* 아브라함의 솜씨는 기껏해야 이스마엘이기에 아브라함의 솜씨는 당연히 추방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율법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 자신이 추방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아브라함이 추방을 당하지 않은 것은 이삭 때문인데, 이삭 때문에 약속의 계열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은 것이 아니고, 세 천사가 낳았다는 것이다. 이 세 천사가 통보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세 천사는 나중에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이삭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자식인 이삭 때문에 살아남게 되고 복을 받은 것이다. 거꾸로 자식이 아버지에게 복을 준 것이다. 야곱이 이삭에게, 요셉에 야곱과 자기 형제를 살리는 것이다. 미래에 나올 인물이 과거의 인물을 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아담부터 모든 인간은 악마의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기존의 아담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으로 인하여 다시 사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비롯한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이 말이다. - '그 마지막 아담을 찾아라'
* 이 점에 대해서 칼 바르트가 밝혔는데, 그 분을 선택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 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우리가 선택되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아담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과 같은 말인 것이다.
⊙ 믿음의 계열을 세운다는 것은 오직 한 분에게만 모든 운명을 걸어 놓은 삶을 말한다. (책)
* 믿는다는 것은 오직 한 분에게 종속되고 매여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 오신 메시야만이 믿음의 대상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의는 외부에서 주어진 의라는 것이다. 은혜가 은혜답게 위해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상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아담이 되셔서 모든 의와 모든 은혜가 그 분과 하나님의 뜻에만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고 선악과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었고 오직 주님의 생명만 연관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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