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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하나님의 선택(38) - 새 언약 13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선택(38) - 새 언약 13

정인순 2011. 1. 4. 12:09

 

하나님의 선택(38) - 새 언약 13
                                                                       99,3,8 이근호 (구득영 정리)


◈ 안식일에 대하여 ◈

(출 31: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 이 안식일이 신명기가 되기 전에 레위기에 보면 제사와 함께 안식일이 나오는데, 사실 안식일에서 레위기가 중요한데도 별로 언급을 하지 않지만, 그러나 레위기에서는 안식일과 제사를 언급하면서 자꾸만 같이 붙여서 말하고 있다. 안식일에 대해서는 레위기를 제대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레 23: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 23:2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레 23:25)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레 23: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 23:27)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레 23:28)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 고난의 떡 - 하나님께서 6일 동안을 노동을 하고, 하루를 안식하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하루를 안식을 하라고 해놓고서 왜 '괴롭게 하라' 라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괴롭게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번째 유월절에 누룩이 들지 아니한 무교병을 먹었는데, 이것을 일명 '고난의 떡' 이라고 한다. 고난에 동참하지 아니하면, 즉, 고난의 떡을 먹지 아니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괴롭게 함과 제사 -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에 제사를 드렸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제사는 제사장들이 드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자신을 괴롭게 한 것이다. 괴롭게 함과 제사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 레위기 4장에 보면 속죄제가 나오는데, 이 속죄제의 특징은 자기 죄를 뉘우칠 때에 한해서만 제사를 드릴 때 죄가 용서되는 것이다. 뉘우침이 없는 죄는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속죄가 되지 않는 것이다. 요압이 제단불을 잡았지만 죽었던 것이다.

* 예수님이 십자기로 우리 죄를 씻어주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깨닫는 범주 안에서인 것이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괴롭게 함으로 죄를 깨닫고, 그래서 주님의 하나밖에 없는 제사가 온전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 볼테르 - 하나님은 죄를 씻어 주는 전문가이다 !

* 윤리주의자들 - 그런데 윤리주의자들의 나쁜 점이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괴롭게 한다는 것을 빠트려버리는 것이다. '하나님, 우리가 죄를 지었으니, 그냥 씻어 주세요!' 라는 식이다. 그래서 볼테르가 이렇게 비꼬았던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죄를 씻고 나서,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다. 성경의 안식의 흐름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 "어떻게 창조의 안식한 날이 우리를 괴롭게 한 날로 바뀌느냐?" - 그것은 안식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토대를 쌓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데, 이 제사의 의미를 부각시킴으로 말미암아 진짜 창조 때의 알맹이를 우리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게 되는데, 우리가 이런 사실은 알았지만, 이 창조의 토대가 무엇인지는 몰랐는데, 죄를 짓고 난 뒤부터는 안식일에 자신을 괴롭게 하고,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창조가 하나님의 의(義)와 희생을 통한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6일 동안 일하시고 하루를 쉬었던, 그러한 영원한 안식의 규례를 양보하지 않고,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사를 드리고, 괴롭게 함으로서 말이다.

* 문화사명주의자들 - 그래서 자연계시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적합하도록 우리를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게 하시는 것이라는 문화사명주의자들의 주장은 허구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휘파람을 불고 노는 날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성경에 기초하지 아니한 인간들의 이러한 주장은, 인간 편의적인,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이지 성경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 진정한 안식일은 단순히 쉰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일로부터 단절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쉬는 참된 의미인 것이다.

◈ 참 안식일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산물은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만 주어지는데, 우리에게는 이러한 의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의로 말미암아서, 제사에 의해서 의가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어지는데,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안식일이고, 약속의 땅에서의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괴롭게 하라고 하신 것인데, 이 괴롭게 하는 대표적인 것이 유월절이고, 그래서 유월절에는 무교병(고난의 떡)을 먹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의 모든 것은 이 고난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갈비를 먹으면서 '안 주셔도 되는데' 라고 하면서 금식을 것이다. 이것이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누룩을 떡에 집어넣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을 위한 떡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참 된 양식이 고난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날마다 일깨워주는 것이다.

* 그래서 유월절에만 고난의 떡을 먹지만, 사실은 다른 모든 절기들도 이 유월절의 열매에서 나오는 것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로 지켜지는 것이다.

(레 26:10) 너희는 오래 두었던 묵은 곡식을 먹다가 새 곡식을 인하여 묵은 곡식을 치우게 될 것이며
(레 26:11)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레 26: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 장막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전 3장에 보면, '너희를 성전으로 삼고 그 안에 거하겠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탭絿척?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이렇게 장막을 세우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레 26:14)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레 26:15)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
(레 26:16)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레 26:17)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레 26:18) 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할지라
(레 26:21)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무조건 너희들의 편이 되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영역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제 너희들은 죽었다(?)라는 것이다.

*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십자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하고, 착하고, 출세를 하느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십자가의 흔적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 사람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이 그 사람 속에는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재앙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이다.

◈ 예수님의 사명 -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했던 것이다. 즉, 예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이 어떠한 길을 가야 하는 지를 보여줄 사명을 띠고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보여주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 레위기 26장에 근거해서 말이다.

◈ 약속의 땅 - 이러한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땅이라는 것이다.

(레 26:42)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레 26:43)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레 26:44) 그런즉 그들이 대적의 땅에 거할 때에 내가 싫어 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며 아주 멸하지 아니하여 나의 그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라
(레 26:45)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열방의 목전에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 들어가서라도 이 '출애굽' 이라고 하는 원리는 사라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이사야서에 나오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한 땅이 그만 애굽 땅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 출애굽을 마지막에 완성하는 분이 누구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서 이 땅은 애굽이 되어버리고, 부활의 세계는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의 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 더 나은 도성인 예루살렘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이러한 원리는 바로 뉘우침이다. 고난과 제사라는 것이다. 이것은 원래 창조할 때부터 이러한 원리 위에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1장에는 나타난 있지 아니한데, 나중에 알고 보나 이 창조의 토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 창조의 근거 - 모든 것이 예수님을 근거로 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다 예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 길쌈을 하지 아니한 들의 백합의 아름다움도, 참새가 날아다니는 것도, 모든 것이 다 주님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성도들은 오죽하겠는가?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하나님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자기 아들을 중심으로 창조를 하셨고, 이것이 마지막에 다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드러남에 도구들이고 말이다.

* 그런데 구약을 전공한 사람들이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원리를 찾아내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구약을 이스라엘의 구원을 중심으로 구약을 보니까 그러한데, 아무리 해도 유대교 수준에 밖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유대교는 자기들 구원을 중심으로 보니까, 그리스도가 귀찮은 것이다.

(눅 19: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눅 19:46)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눅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눅 19: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는데, 그들은 물론 바리새인들과 뇌물의 고리로 연결된 사람들인데, 이 장사꾼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미워하겠는가? 자기들의 생계를 가로막으니 말이다.

* 자기가 어떤 사업을 하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 '목사님!' 하고 다정하게 부르지만, 그 사업체가 우상인 것이다. 하나님이고 다 뒷전인 것이다. 여자들도 아이를 낳으면 교회에 안 나오는데, 이런 원리인 것이다. 요즘은 임신만 해도 안 나오지만 말이다. 교회에 나와도 말씀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 이런 입장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생각해 보라. 장사꾼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미워하겠는가? 성전을 바라보는 안목이 예수님과 차이가 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가 성전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중심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전을 고수하려는 의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를 못하기에, 이런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을 우리가 이런 유대인들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내어쫓았다는 것은 성전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성전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왜 성전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는가? 그것은 자기들의 구원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전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원리는 그리스도 중심이지, 유대인들의 구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성전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과연 예수님이 고맙겠는가? 우리에게 미운 가시가 되는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 예수님은 자기 자신만을 고집하는데 반해서, 우리는 다른 것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미운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괴롭게 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미운 것이다. 내가 미운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레위기를 출애굽의 원리에 의해서 해석을 하자고 말은 쉽게 하는데, 그런데 출애굽의 원리를 구원으로만 생각을 하니까, 이 레위기가 풀리지를 않는 것이다.  

(레 16:29)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레 16:31)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 구원받을 목적으로만 생각을 하는 자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겠는가? 하나님의 괴로움에 동참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안식일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안식일에 당구나 치고 놀면 되지, 왜 괴로워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안식일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 그러나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괴로움이 어떤 차원에서 괴로워해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고난의 떡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비를 뜯으면서도 금식을 하고, 코를 골고 자면서도 철야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聆玖?된다는 것이다.

* 이것을 신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자기를 괴롭게 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언제나 기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환경을 변화시켜달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변하는 것이다. 자기의 꿈과 비전과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즉, 자기를 괴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삶인 것이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자기가 상당히 어려움이 있다고 하소연을 하는데, 자기가 스스로 괴롭게 하는 자세가 아니면 도와주지를 못하는 것이다. 레위기에 보면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경우에만 속죄제가 된다는 것이다. 회개를 해야 비로소 용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고집을 부리면서 투덜거리는 것은, 멀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내 팔자야!' 라고 하는 사람을 도와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상담을 하면서 우리가 대답해줄 수 있는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괴롭게 하라!' 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기도에 대해서도, 오직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내 자존심은 부수어지고,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여져야 하는 것이다.

* 신학교에 자식을 보낸 부모는 말려도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이다. 목사 안수를 받으면 더하고 말이다. 그런 부모가 나와서 과연 어떻게 기도를 하겠는가? 자식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인가? 그런 부모의 기도는, 자기 자존심이고, 자기 아들의 자존심이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은 아니지 않는가? 아니면 말고.

* 이런 이야기를 새벽기도 시간에 하면, 그런 사람은 이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이제는 기도원에 가는 것이다. 그런 곳에 도망을 가서도 또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다.

◈ 안식일의 충돌 - 안식일이라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하고 유대인들하고 계속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충돌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다' 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자기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으로 잘못 착각을 했고,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졌다고 하니까, 그런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안식일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괴롭게 하는 것보다, 자기들이 편하게 살기 위해서, 오히려 그 괴롭게 하는 원인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14 페이지

⊙ 안식일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무시하는 메시야도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고 할 수가 있느냐고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다. 성전을 무너뜨리겠다는 자도 과연 진정한 메시야라고 볼 수가 있을까?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했다. (책)

⊙ 바리새인들은 계속 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하면서, 그 법안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를 않았다. 이로서 유대인들의 핏줄에 입각한 권위는 예수님 앞에서 무가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책)

*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들에게 '징벌' 과 '저주' 와 '심판' 이 주어졌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속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한다면, 그들에게도 징벌과 저주와 심판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역시 동일하게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신다면 우리에게도 징벌과 저주와 심판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괴롭게 하고,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 어떤 부산의 대학교 4학년 학생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왔다.

* 질문 - 우리 집에 제사를 드리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니면, 추도예배를 드리면 됩니까?

* 답변 -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죽고 예수님과 단 두 사람만 남았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때 과연 이러한 질문이 성립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님하고 단 둘만 남았다고 생각을 하고 살면 됩니다.  

* 질문 - 주일에 시험을 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답변 - 주일은 인간이 만들었기에 쓸데없는데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 하나님은 주일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만들었다고 해서 다 때려부수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마라는 것이 아니고,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라디오를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서 억지로 부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편리에 의해서, 일요일에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도 안 가고 집에 있으니까 모이는 것이다. 다만, 주일이 안식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 아마 이 학생은 '제사를 드리면 안 된다' 라는 식의 답변을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인가?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의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의(義)는 어떻게 되는가? 이 학생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보다는 집안 식구나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른 것을 의식하면서도 믿음이 있는 것으로 보이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가족들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교인들이 없다고 생각을 하면 되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야 주님이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무율법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책)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이 말은 우리가 의를 이룬다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괴롭게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의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혼인잔치에 신랑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 바로 새 시대의 모습인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는 것이다.

◈ 새 술은 새 부대에 ! - 그런데 이 신랑만으로 만족을 하지 못하고 불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신랑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다. 신랑이 없을 때는 화를 내고 울고불고 할 수가 있지만, 신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퉁해한다면 새 시대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요즘 젊은 학생들은 H.O.T 나 핑클의 노래가 있으면 충분한데, 그들이 공연하는데 가서 현철이 보고싶다고, 설운도를 나오라고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은 일부러 즐기지도 아니하는 술을 드셨는가? 그것은 예수님 자신만 있으면 모든 것이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로 끝나는 것이지, 걸어가라고 하면 걸어가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해야' 라는 사고 방식은 옛 시대의 것이라는 것이다.

*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육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도 끝장났다는 것이다.

⊙ 이미 실체가 왔으면 그림자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책)

(골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여기서 절기나 월삭, 안식일 등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구약율법에 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한꺼번에 다 버리려고 하니까 너무나 허전하고 아쉽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고 있는 것이다.

* 사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이다. 계속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자라오다가, 복음을 알고 난 뒤에 한꺼번에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다 버리려고 하니까 너무나 허전하다는 것이다.

* 이런 것이 바로 일종의 징크스라는 것인데, 모든 인간은 종교적이라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이 죄인이 되었는데, 인간이 죄인인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하나님을 빼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기의 윤리와 의를 집어넣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린 그 포만감으로 끝내고 싶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사를 제대로 드려서, 자기 몸을 희생하셔서 베풀어주신 그 은총보다는, 내가 멋있게 드린 그 예배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마치고 싶은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이러한 다툼은 오늘날에도 중단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들 속에서 계속되는 것이다.

* '기존의 이러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와 월삭을 다 버린다면, 그러면 무엇으로 목회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러면 한국교회는 다 엉터리인가 라는 것인데, 한국교회가 다 엉터리가 된들 우리가 왜 신경을 쓰는가? 엉터리가 아닌 예수님 한 분만 있으면 되지 말이다. 한국교회가 신랑이 아니고, 예수님이 신랑임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쓸데없는 애국심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 기존의 이러한 것으로 말미암아 폄론(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안식일은 그림자인데, 왜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가 하는 것이다. 문을 닫고 안 닫고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 것인가?

☞ 하나님의 선택, 215 페이지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 여기서 의문은 율법에 해당하고, 영은 그리스도에 해당한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는, 사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지만, 인간이 죄인이 때문에 율법과 그리스도가 대립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에게 쉽게 다가오고, 그리스도에게는 거리를 두는 것이다.

* 자기를 괴롭게 할 생각은 안하고, 자기를 감추기 위해서 율법을 취하는 것이다. 영을 받지 아니한 사람은 반드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할 때에도, 바리새인들과 이 죄인에 대한 개념이 다른 것이다. 신랑을 빼앗겼다고 아파하는 사람은 영을 받은 사람이고, 신랑이 없어도 율법이 있으면 된다고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 예수님은 율법이 곧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책)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요 5: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요 5: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 성경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가?

* 구약과 예수님 -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있는가? 하나도 없다. 문자로만 보니까 전혀 안 나오는 것이다. 모세가 만나를 준 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자기 살과 피를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과연 구약에 있는가?  NO !!

* 구약학자들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구약을 인용하는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서 너무나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미쳤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자, 그러면 일단 하나의 공식처럼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 라고 해놓고 성경을 한번 찬찬히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성경 중심' 이 아니고, '그리스도 중심' 밖에는 안 되지 않느냐고 공박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그런 선입관을 가지지 말고 제대로 보자고 해서 아무리 문자적으로 살펴보아도, 유대교 수준의 해석밖에는 안 나오는 것이다.  

◈ 구약이나 신약이 그리스도만을 증가한다는 사실은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전혀 모르는 것이다.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종교성 - 여기서 반틸의 접촉점이 박살이 난다. 반틸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종교성이라는 접촉점을 주셨다고 했는데, 위의 본문에 의하면 접촉점이 전혀 없는 것이다. 김영한은 존재성을 가지고 언급을 했지만, 그것도 거짓이 되고 마는 것이다.

◈ 십자가와 성령 - 하나님과 인간이 접촉점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외부적으로는 십자가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증거는 성령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 십자가가 하나님과 인간을 떼어놓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누구인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도무지 함께 할 수가 없음을 말이다. 그리고 성령은 이 떼어놓음을 영원히 떼어놓는 것이다.

*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령이 깨닫게 하셔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스스로 마음을 돌이켜 구원을 받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목회를 잘해도, 상담학, 심리학, 교육학 등을 동원해도 인간을 구원받게는 못하는 것이다.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이다.

* 그래서 11절을 보면, '사람의 사정을 그 사람의 영이 아니면 누가 알리요,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모른다' 라는 것이다. 사람의 사정은 모르면서 하나님의 사정을 어떻게 안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인간의 종교성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 외에는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하는 말이 '십자가' 라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십자가가 아니라 인간을 전하는 모든 간증집회와 같은 것은 추방시켜 버려야 하는 것이다.  

(고후 3:6)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 여기서 의문(儀文)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로서 인간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영은 예수님이 성취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못하고 예수님이 친히 이루신다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 됨을 깨닫게 해서 죽이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살리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15 페이지

⊙ 유대인들은 왜 율법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을까? (책)

(요 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요 6: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 영과 육 -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자기하고 같은 육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던 것이다. 자신의 육을 통해서 육으로 나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이었다. 영이란 말은, 눈에 안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육으로 와도 여전히 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으로 오신 영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육들 속에 이러한 영이 들어오니 전혀 알아보지를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육이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죄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 기구를 타고 높이 올라가 보면, 평소에는 아무리 높은 산이고 건물이라고 하더라도 밑에 있기에 다 낮게 보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부활에서 쳐다보면, 인간의 윤리와 선한 양심 등이 참으로 보잘것없는 육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평소에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기도나 전도 등이 너무나 무가치해 보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도, 밑에서도 이러한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16 페이지

⊙ 육의 안목으로 율법을 해석해 왔기에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비율법적인 자로 여겨서 죽이려고 한 것이다. 영과 생명으로 된 자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있다. 그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앞으로 오게 한 자들, 즉 선택된 자들이다. (책)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 예수님의 말씀은 영과 생명으로 된 자들만이 알아들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16 페이지         [  5. 육과 영 ]

⊙ 이처럼 선택이란, 육의 세계를 벗어나 영의 세계에서 살게 한다. 육의 세계 가운데서 영의 세계 안으로 뽑혀 나온 자들이다. 그리고 육의 세계를 사이비한 거짓 구원체계라고 가차없이 공격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따라서 육이 영을 사로잡아 올 수도 없고 임의로 불러오게 할 수도 없다. 영은 육에 비해서 바람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책)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기도나 구제, 그리고 십일조 등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육이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쓰레기더미를 폭파해서 컴퓨터가 만들어지는 것이 더 쉬운 것이다. 폐지를 태운다고 해서 백과사전이 되는가?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절대로 자기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 그래서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인도하시는 분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언쟁을 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심했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영적인 것만 튀어나오는 것이다.

◈ 오늘도 영이면 내일도 영이고, 오늘 영이 아니면, 내일도 영이 아닌 것이다.

* 영에 속한 사람은 성깔대로 살아도 그것이 영적인 것이 되고, 육에 속한 사람은 아무리 온유해도 육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원숭이가 시간이 가면 사람이 되는가?

* 그런데 하나님은 영의 사람을 이상하게도 육의 사람들 속에 집어 넣어버리는 것이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우리도 우리끼리 모이면 참 편하고 좋겠지만, 지방교회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를 않는 것이다. 자꾸만 육의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것이다. 영의 사람은 육의 사람들에게 포위를 당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놀림감이 되고, 항상 낯선 사람이 되는 것이다.

* 목사가 교회를 옮기면서, 이번에는 괜찮은 목회지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그러나 꼭 시비를 거는 권사가 있고 집사가 의외로 있는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준비를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당황하지를 말고 그런 사람에게 복음만을 전하면 우리의 임무는 다하는 것이다.

⊙ 성령의 행함, 즉 믿음은 육체의 행함과 대비가 된다. (책)

(갈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행위의 대결이 아니고, 율법의 행위와 믿음이다. 믿음에는 행위라는 것이 붙지를 않는다. 행위를 거부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에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고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 모든 육적인 사람은 나를 인하여 내가 즐겁고, 영적인 사람은 예수님을 인하여 내가 즐거운 것이다.

* 가장 육적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 놀랍게도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정말 이상하지 아니한가? 이러한 것이 순교자 운운하면서 고상한 기독교인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런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만 즐거워하는 것이지, 자기가 순교하고 낙타무릎이 되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찬양이라는 것도 구약을 보면, 그리스도만을 즐거워하는 것이지, 꼭 가스펠 송을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육적인 노래에 불과하다. 육적인 사람은 무엇을 해도 육만 나오는 것이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을 꼬시려고 하는 것도, 육적인 것이고, 그리스도를 교회에서 추방시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17 페이지

⊙ 믿음이란 육의 세계에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태도이다. 육에 대한 부정을 갖고 있는 모습이다. 오직 영으로(비육체 개념이 아님) 오시는 분에게만 기대를 거는 것이다. (책)

* 여기서 아무 것도 의지를 하지 않는 것을,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라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말을 못 알아듣는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들인데,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과거가 있고, 의지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과거가 없는 것이다.

◈ '과거' 라는 것에 대해서

* 실제로 인간에게는 과거가 없는데, 기억된 현재만 있을 뿐인데, 이것을 과거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의 수학여행이 재미있었다는 기억은 있지만, 실제로 가보라면 아무도 안 가는 것이다. 재미는 무슨 재미, 그 여관방에서 열 명씩 자라고 하면 기겁을 하는 것이다. 여고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아주머니에게도 실제로 여고생이 되라고 한다면, 공부 때문에 기겁을 하는 것이다.

* 사람마다 자기의 과거가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은,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의 과거 중에서 제일 좋았던 것만을 현재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함에도 이러한 과거를 간직한다는 것은 바로 육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 왜 사극을 보지 않는고 하니, 사극이라고 하는 것은, 진짜인줄 착각을 하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드라마는 엉터리임을 알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니 나 자신이 어제 하루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를 그대로 재생할 수가 있는가? 못하는 것이다. 어제 일도 그대로 재생을 못하는데, 백년 전의 일을 기억해 낼 수가 있겠는가?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똑 같은 마음가짐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때 데이트할 때 그렇게 아름다웠던 골목을 지금 가보면, 과연 그렇게 아㎢牟錢楮? 당장에 '팔 빼!' 라고 하는 것이다. 감정이란 그런 것이다. 같은 곳에 두 번 가는 것을 용납하지를 않는 것이다. 여행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도, 자기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이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17 페이지

⊙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줄 때에 성령을 받으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영으로 활동을 하셨다. 인간의 육의 무능력을 다 밝혔다. (책)

* 세례를 받은 분은 세례요한 자신도 아니고,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 외에 나머지는 다 육이라는 것이다. 영이 없는 인간은 육의 행동만을 하게 되고, 이런 육의 행동은 다 죄라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어떻게 죄인인가?' 라고 할지 몰라도, 육이니까 죄인이라는 것이다. 심한 것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 성령께서 이 인자의 고난을 근거로 하여 인간 세계의 육을 집중적으로 공박하신다. (책)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 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성령의 역할 - 여기서 심판이라는 것은 판정을 내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라는 것은 같은 말이다. 죄를 모르니 의도 모르고, 그러니 무엇이 죄인지 의인지를 구별도 못해서 판단을 내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 똑같이 인간 세상을 책망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데, 다시 말해서, 성령은 이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인간 세상을 보시고, 너희들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육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설치지 말라는 것이다.

* 강의 도중에 부산에서 편지한 학생을 예로 들었는데,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세상의 육적인 사람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예수님 앞에서 내가 홀로 피고인으로 있다고 생각을 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육적인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육이 되고 마는 것이다.    
* 남들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막무가내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 주님의 말씀이 과연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목회자는 남의 말을 안 듣기로 유명한데, 예수님의 말씀조차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설쳐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종도, 자유자도 아니라, 바로 깡패(?)라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지가 그렇게도 인기가 많은가?

◈ 오직 주님의 말씀에만 관심을 가지자 !

* 사실 진정한 목회자는 말씀만을 사모하고 전하면 되는 것이다. 자격증이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종이지, 신학교에서 배우고 머리에 손을 올리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냐는 것이다. 겉멋(?)에만 혹해서 목회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18 페이지

⊙ 만약 율법을 행함으로서 의롭게 된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헛것으로 만드는 작당이다. (책)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우리는 '율법도 지키고, 예수님도 믿고' 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의로운가를 판정을 내리려고 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그리스도 자체가 의(義)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에게 참여하기만 하면 의가 되는 것이다. 껸萱?행위라는 것은 내 쪽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믿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만 발생하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이 사도바울에게 질문하기를, '예수님을 믿고 되를 지으면 죄인인가, 의인인가?' 라고 했었던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죄인이 된다면,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다는 말인가?' 라고 도로 반문하는 것이다.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라는 데서 우리는 그의 담대하고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회사 사장이라면, 그 아들을 취직시키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주식도 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고 말이다. 만약에 취직을 못시키면, 그렇다면 아버지는 사장이 아닌 것이다.

* 하늘나라는 누구의 나라인가? 아들의 나라이다. 이 아들이 넣어주겠다고 하는데, 누가 시비를 거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이라도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인임이 드러나도,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신랑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신부야 신랑만 잘 만나면 되지, 다른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 여기서 우리가 다른 것을 다 버리려고 하니까, 왠지 허전하고 찝찝한 것이다. 그래서 추도예배를 드려보면, 기존의 제사에 젖어있었던 사람들은 너무나 섭섭해하는 것이다. 자기들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 허전함이 바로 아직도 나로 인하여 즐거운, 자기 과거에 얽매여 있는 육적인 모습인 것이다.

◈ 과거는 없다.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현재만 존재 할뿐이다 !

(롬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롬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 하나만을 바라본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만 믿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나도 의로운 것이 되어 버리지 아니하면,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인가? 선택한 자가 엉망이라고 취소하는 그런 예수님은 없다는 것이다. 강도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는 것이다. 죄인을 용서해 준다고 욕을 듣는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인 것이다. 십자가의 피는 괜히 흘리신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18 페이지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이러한 심판에서 살아남을 자는 누구인가? 여기에 택한 자를 향한 선택의 진기가 발휘된다. (책)

(마 24: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 24:31)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 큰 표적과 기사의 특징이 육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육적인 것이 떠나가면 복도 떠나가고 믿음도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십자가가 표적이 아니고, 내가 뭔가 소유했던 병 고침과 많은 재산 등이 표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인 것이다.

* 택한 자들에게도 이러한 것으로 미혹을 하지만, 택한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십자가 외에는 알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18 페이지

⊙ 심판이 필연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따라서 택했기에 따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은, 택함이 없이는 그 어떤 인간도 살아남을 수가 없음을 뜻한다. 선택의 효과는 이처럼 멸망과 저주와 심판 가운데 비로소 확연하다. (책)

* 심판이 확정되어 있다는 것은, 심판의 기준도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잘만 하면 심판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것은 육적인 표적과 기사가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인 것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이 들어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육적이며, 오직 주님이 함께 있음으로 인해서 영적인 사람이 되었음을 아는 것이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 명료하고 확실한 이 복음이, 육적인 사람들에?어리석고 우매하게 들리고, 화를 치밀어 오르게 만드는 악한 시대에 저희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말을 하든지 간에 항상 그리스도와 두 사람만 남았다고 생각을 하고, 주님께서 시키는 데로 살아가는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