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하나님의 선택(40) - 남은 자 본문
하나님의 선택(40) - 남은 자
99,4,12 이근호 (구득영 정리)
◈ '남은 자' 에 대하여 ◈
* '남은 자' 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이론이 있는데, 구원론적 접근 방법과 언약적 접근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구원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남은 자에 대해서 상당히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타락을 했지만, 남은 자들은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남은 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남은 자에 대해서 인상이 좋다 보니까,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 등에서 자기들이 남은 자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핍박을 받는 다른 이단적인(?)모임들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남은 자가 되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기존교회나, 거기서 어려움이 있어서 떨어져 나온 개척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들은 남은 자이고, 그루터기라는 것이다. 선교단체도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 그러면 과연 성경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가? 그것을 한 번 알아보자는 것이다.
*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배척한다. 믿음이 좋아서 남았다는 것이 아니고,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은 자,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알야숩"이라는 것이다.
◈ 스알야숩 -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 !
* 기존의 존 브라이트의 [ 이스라엘 역사 ] 등의 책들은 돌아온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신앙이 좋아서 남아있다는 것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아서 이스라엘이 탈락되었는가? 그렇다면 예수를 믿을 필요도 없이 고아와 과부만 돌보면 되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유대교라는 것이다.
* 그래서 성경은 인간들이 이렇게 남은 자에 대해서 필히 오해를 할 여지가 있으니까, 이 하나님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사수하겠다고 해서, 그래서 남은 자의 말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창세기를 보면, 야곱이 요셉이 오라고 하니까 가지를 아니 했는데 왜 그렇게 했는가? 그래서 유다가 화를 내는 것이다. 왜 오라고 하는데 가지를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야곱은 조상이 준 땅이라고 하면서 안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야곱의 생각은 너무나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애굽이라는 땅을 거쳐서 돌아와야만 그것이 진짜 약속된 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마태복음의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 탕자의 비유가 다 이런 흐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기가 알아서 대오각성해서 돌아오는 구원론을 생각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돌아오는 주체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잃어버림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남은 자의 핵심은 남는 것이 아니고, 돌아온다는 것이 합쳐져야 되고, 그렇게 돌아오는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돌아와서도 안 되고, 못 돌아온다는 것이다.
* 심지어 포로로 잡혀가는 것도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몽둥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갈 때도 자기 마음대로 못 가고, 올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야곱의 자손들도 70여명이 있었지만, 처음에는 안 가려고 했지만 그러나 기근이 심하게 되니 어떻게 가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 갈 때도 이렇게 잘 가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런데 가면 또 안 오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하면서 말이다. 뭔가 이렇게 낯선 곳에 갔다가 되돌아와야 하는데도 말이다.
* 이것을 말라기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말 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 이렇게 돌아옴을 구원론에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희망사항과는 별개의 것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남은 자가 의미가 확대되면서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 남은 자 ] 에 대한 연구
여느 성경 구절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남은 자]에 관한 사항도,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접근 방법이 있다.
1. 구원론 입장
구약에서 남은 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주어져 있다고 보고, 그 남은 자와 유사한 사상과 의식을 유지함으로서,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갖추려는 시도를 나타낸다. 이런 식으로 남은 자 탐구에 나서면 결국 자신과 그리고 자기 종교 집단에다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빌미가 될 뿐이다. 거의 모든 이단들이 바로 이런 토대 위에 있다. 자신들이 이 불신의 시대에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유일한 남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암시는 기존의 주류 세력으로부터 비난받는 괴로움을 그나마 보상해줌으로서 소속 집단을 내부적으로 '이탈자 - 남은 자' 도식 안에서 결속을 다지고 나아가서는 소속원들의 절대적 헌신과 순교마지 받아 내는 정치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 다른 집단은 몰라도 자기 교회나 자기 집단만큼은 역사 속에서 의미가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러한 태도는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역사적 사명까지 거들먹거리고 말이다.
* [ 이탈자 - 남은 자 ] -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가 발생을 하면, '갈 놈들은 가라!' 라고 하고, 자기들은 남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정당한 구원받은 백성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인간들의 생각을 용납하지 아니한다. 성경은 어떻게 대비를 하는고 하니, 돌아오는 남은 자와 돌아오지 않는 남은 자로 구별을 한다는 것이다. - [ 돌아오는 남은 자 : 돌아오지 않는 남은 자 ]
실제로 열왕기하 25:22에 보면 유다 땅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남게 된 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긍정적 평가에 의해서 포로 잡혀가지 않고 남은 자처럼 행세하면서 총독 그달리야를 죽인다. 그리고 애굽으로 집단 도망해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짓들은 예레미야가 말하는 남은 자 사상과 해당되는 자들이 아니다. 도리어 항복하는 것이 살길이라고 말한다.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입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렘 38:17)
그러나 그들은 이 예언을 말씀을 거부한다.
"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 곧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 거하기로 고집하면 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 유다의 남은 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 일로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셨고 나도 오늘날 너희에게 경계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렘 42:15-17,19)
* 이들이 애굽에 처음부터 간 것이 아니고 원래는 유다 땅에 있다가 애굽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러나 결국은 끝까지 하나님의 칼이 쫓아가서 자처해서 남아있는 유다의 남은 자들을 쳐죽여 버린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구원될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자기 믿음으로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흔히들 생각하는 자기가 남아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이런 구원론적인 남은 자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남은 자]를 둘로 구분 지은 것이다. 즉 포로 잡혀가는 남은 자(렘 23:3)와 유대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될 남은 자가 그것이다. 처음 집단은 하나님의 은혜로 발생된 남은 자라면 후자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남게 된 낟은 자들이다. 따라서 스스로 구원 열망에 들떠 있는 집단이라고 해서 곧 그것이 남은 자가 될 수 없다. 남은 자 되고 싶은 것과 실제로 남은 자 되는 것하고는 전혀 접촉점이 없다!
* 스스로 남은 자가 되려고 한다면 이단밖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남은 자가 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은 자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가 알아서 남은 자가 된다면, '돌아오리라' 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기가 알아서 남고, 돌아오고 다 해버리면 메시야가 왜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남은 자가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만 다시 구원될 수 있는 이유는, 남은 자의 발생 원인이 순전히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열왕기상 19:l8에 나온다.
"그러나 네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 천인을 남기기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l8)
여기서 '남긴다' 라는 표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신앙적 예언과 노력과 시도가 이미 완전히 열매 없이 무산된 상황임을 천명하는 뜻에서 남아 있는 자들이다. 이 사실은 그 당시 선지자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 라고 증언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왕상 19:10,14). 즉 엘리야가 생각하는 남은 자 개념과 전혀 다른 남은 자가 毬ご篤?의해 일방적으로 자기 시대에 7000명이라는 큰 숫자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여기서 엘리야가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왕상 19: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 19: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 엘리야는 자기가 믿음이 좋아서 자기만 남았고, 이제 이스라엘은 큰 일이 났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7000명이나 남겨두었다고 하신다.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도망을 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네가 왜 그렇게 이스라엘을 엉뚱하게 걱정하느냐는 것이다. '너나 잘 해!' 라는 것이다. 남은 자라고 하는 것은 엘리야 자신도 하나님이 남게 하신 것이지, 자기의 믿음이 특심해서 남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언약의 공동체로 따로 남겨주시는 자가 있는데, 엘리야는 지금 엉뚱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남겨둔 자가 신약의 로마서에 보면, 그대로 '온 이스라엘' 이 되는 것이다. 신약의 '온 이스라엘' 은 이렇게 반드시 남은 자의 개념에서 나와야 한다. 다른 개념에서 나오면 세대주의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엘리야시대부터 이렇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은 자의 실존이 이렇게 규정된다면 그 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등장하는 남은 자 개념도 이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이 효과 없이 외면 당하는 시대 속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이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남은 자를 언급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엘리야와 같은 잘못을 그들도 되풀이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밖에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연구 태도는 옳지 않다. 즉 선지자는 그자신의 삶의 정황에서 파악된 역사적인 국가 위기를 온 몸으로 품고, 자신이 영감으로 깨우쳤거나 혹은 전승되어지고 회자되는 하나님의 언약 말씀을 재해석해서 외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자기 민족에게 신앙의 불길을 회복차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순전히 일방적인 구원론적인 관점이다. 예언자의 자의식을 예언자들의 말씀 속에서 축출해 내겠다는 발상 자체가 비성경적이다. 그렇게 축출된 자의식돌 오늘날의 타락된 교회상이나 사회적 문제가 있는 곳에서 선지자적 감성으로 활용시켜 보겠다는 차원에서 이런 해석을 하게 되는데 이는 말씀이 지향하는 바를 전혀 모르는 소치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문제가 있는 곳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 든다는 것이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고 개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발상들이 바로 언약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살해한 직접적 원인임을 알아야 한다 전형적인 유대교 남은 자 사상이다. 이런 차원에서 남은 자 개념을 다루면 인간들의 구원에 대한 열심이나 열망으로 인해 예수님을 어쩔 수 없이 도 도태시키고 처형 시켜야 될 분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성경의 남은 자 개념은 교회 개혁이나 이스라엘 회복이나 이스라엘 구원이나 사회 정의나 신앙부흥이나 교회 부흥이나 인간 구원 아무런 상관없는 개념임을 명심해야 한다.
◈ 자기가 믿음이 좋아서 남은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남은 자' 개념을 집어 넣으셨는가? 이제 언약적 입장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2. 언약적 입장
이 입장은 남은 자 개념은 순전히 언약을 이루기 위해 등장됨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언약 자체를 이루기 위함이지 결코 언약 성취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나 개인적인 구원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은혜성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시도이다. 따라서 항상 인간들의 시도와 병행해서 나타난 그 인간들의 시도를 심판하는 기준으로 활용하신다. 그 시발점은 이사야 6장이다.
거기에 보면 '그루터기'라는 말이 나온다. '그루터기'란 몽땅 잘렸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십분의 일 정도도 아니오, 오직 '그루터기밖에 안 남았다' 라는 말은 인간 족에서 그 동안 시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루터기만 남았다' 라는 사실은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 받는 흔적만 맡았다는 堧甄? 즉 재만 남았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는가? 다음과 같은 방식을 사용하여 심판하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 하나님께서 잘라내는데,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게 할까?' 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열심을 내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를 보내는 것이다. 너희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기에 사실 이사야는 맞아죽어도 당연한 것이다.
* 그렇기에 이제 남은 역사는, 절대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어서는 어떤 경우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누가 이러한 사실을 전할 것인가? 이사야처럼 발가벗은 자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 그러면 이제 누가 구원을 받는가? 그것은 '왜 이스라엘은 몽땅 잘리게 되었는가?' 라는 것을 먼저 밝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 당시 전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아하스 왕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는 혼자 가지를 않고 자기 아들을 데리고 가는데, 그 이름이 '스알야숩', 즉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라는 것이다.
* 다윗언약 - 다윗 왕위는 참 희한한 왕위인데, 어떤 사람만 앉는 왕위인고 하니, 사울처럼 나귀 찾으러 갔다가 앉는 그러한 왕위라는 것이다. 그런 자만이 왕이 되는 것이다. 사울은 왕이 안 되려고 사양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왕답다는 것이다. 그 때 왕이 되어서 전쟁에 이긴 것이다.
* 그저 아마추어 심정으로, 처음의 마음가짐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박세리가 쳤다하면 4승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골프의 여왕이라고 하니 죽죽 떨어지는 것이다.
* 그러니 왕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고, 희생하는 자리라는 것이다(사53장).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양들의 각종 죄를 대신 짊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짊어짐의 여호와의 종으로부터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에게 약속한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 사울만 이런 것이 아니라 다윗도 마찬가지이다. 다윗은 사무엘이 왕을 세우려고 왔는데 그 현장에 없었던 것이다. 양을 치러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기로 한 자는 반드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사무엘도 그 있는 형제들 중에서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것이다.
* 솔로몬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버지 다윗이 바람을 피워서 낳은 자식인 것이다. 마치 홍길동과도 같은 것이다. '아버지라 부르게 허락하옵소서!', '그래, 아버지라고 불러라!', '아버지라 부르게 허락하옵소서!', '그래, 아버지라고 불러라!'
* 동의어 반복 -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할 수가 있는데, 동의어 반복이라는 것인데,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천당 갑니다' 라는 것도 이러한 경우가 될 수가 있는데, 예수님이 누구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천당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는데 계속 그것만을 반복하는 것이다. 제법 수준이 있는(?) 코미디 중에서 이런 것이 있다. '네 무덤에 침을 벗어라' 라고 하자, '그래, 뱉으마' 라고 하는 것이다.
* 이사야가 하는 모든 행동 하나 하나의 존재성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하나님이 남은 자만을 건지기 위해서 활동을 絿킴募?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아니고 말이다.
* 남은 자만을 건지기 위한 배경은, 기존의 남은 자라고 하는, 구원받은 자라고 하는 것을 다 잘라야 하는 것인데, 이 작업을 이사야만 한 것이 아니고, 나중에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다. 마 13장의 비유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요 12:36)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요 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요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아무도 못 믿고 못 알아듣는데, 그렇게 해야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일부러 그렇게 활동을 하시는 것이다.
* [ 누가복음의 통일성 ] 이라는 책의 좋은 점이,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 전도 - 구약의 예언된 대로 예수님이 활동을 하시는데, 그 예언된 말씀 중의 하나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전도라는 것이다.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 이 본문은 어린아이들이 잘났다는 것이 아니고, 잘난 어른들을 공격하시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시면 안다는 것이다.
* 이렇게 말하면 선교단체들은 '그러면 전도할 필요가 없겠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말씀을 오해한 것이다. 전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고, 그 전도의 내용에, '스스로 믿어서 돌아올 수는 없다' 라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전도라는 것이다.
* 왜 우리가 항상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고 하니, 요나서에 예언된 것처럼,'말씀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리라!' 라는 차원에서 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말씀 전파 = 구원" 이 아니라는 것이다.
* 구원은 우리의 전도와 상관이 없이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은 자는 따로 있는 것이다.
* 전도라는 것은, '아무도 못 돌아온다' 라는 것을 알리는 것인데, 그렇게 해도 만약에 돌아오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잘나서가 아니고, 다윗언약의 왕권을 가진 분에 의해서 조치된 사항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를 해서 돌아온 것이 아니고 말이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 지금 다윗의 위에 아하스가 왕으로 앉아 있는데, 이 아하스 왕에게 이사야가 가서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 라는 징조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아하스 왕은 이제 잘렸다는 것이다. 즉, 당신은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사야는 지금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네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너를 왕으로 인정하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남은 자 개념은 진짜 여호와가 가짜 여호와를 치는 것이다. 숨겨진 여호와가 우리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고 알 수 있는 여호와를 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구속사를 공부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자기가 십자가를 알아서 구원받은 사람도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역사를 하셔서 깨달은 자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제대로 설교를 해서 구원받은 사람도 역시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자로서 절대로 우리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 [ In Christ ] - 사도바울이 전도를 해서 구원받은 사람도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면 누가 전하리요, 전하지 않았으면 누가 믿으리요' 라는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전도자를 통해서 일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전도자 안' 에서 일을 했다고, 더 나아가서 '전도자 안' 에 있는 예수 안에서 일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일하셨다는 것이다.
*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켰는데, 그런데 그렇게 일으키신 것에 대해서,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행 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 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 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 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 3:8)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행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행 3: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교인들은 자꾸만 주님이 하셨다는 것을 믿지를 않고, 그래도 목사님이 잘 전하셨으니 우리가 믿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인도 망치고 목사도 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목사를 추종하는 종이 되고 마는데, 이것이 바로 이단의 모습이다.
*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이용해서 말씀을 듣는 것은 좋지만, 그러나 무조건 따라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보내시고 그 마음에 믿음을 주셔서 믿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남은 자' 라고 하는 것은 생가보다 훨씬 복잡하고 매우 어려운 개념이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쪽에서 길을 향하여 수행하는 모든 종교적, 신앙적 행위를 전면 차단하고 거부함으로서 심판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절대로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는 것이다. 이사야를 앞장 세워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들의 구원을 방해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사야는 민중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말만 외치게될 것이고 그들은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이사야의 복음을 거부할 것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구원은 불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략이다. 그렇다면 남은 자는 어디서 생겨나는가? 그것은 오직 이사야 선지자 입에서만 나온다. 이사야에게서만 나온다는 말은 인간들이 아무리 애써도 남은 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 '남은 자는 이사야 선지자 입에서만 나온다' 라는 것이 중요한데, 사실은 이사야와 함께 있는 것이다. 자기 아들의 모습으로 말이다. 아들의 모습인데 '임마누엘' 로 오신다는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는 것인데, 여기서 처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들이라는 것이다. 즉, 이 아들은 기존의 혈통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은 이 처녀를 이사야의 아내라고 주장을 하는데, 만약에 그렇다면 그대로 이사야의 아내라고 적어놓지 왜 굳이 처녀라고 기록을 하는 것인가? 이렇게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혈통을 부인하는 것이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는 표적으로서,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고발이라는 것이다.
* 학습세례식을 거행하면서, 제대로 질문을 하기가 주저되는 것은, 진짜 기적적으로 성령을 받아서 세례를 받는 것인지, 아니면 남들이 받으니 덩달아 받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도무지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이러한 것은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차단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말씀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돌아온다는 것이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 백성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아하스 왕으로 네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그런데 그 아기가 도대체 어디서 태어나는가? 이사야 9장을 보자.
(사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 이 아이가 이방지역이라고 무시를 했던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흑암에 빛이 비취는 것이다. 진흙에서 장미가 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누가 남은 자가 될 수가 있는가? 인간은 안 된다는 것이다.
* 지금 이스라엘이 누구에게 압박을 받고 있는가? 앗수르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 다윗의 위에 제대로 왕이 앉아있지 못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이 일을 하는데 앗수르라는 몽둥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사야 10장을 보자.
(사 10: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사 10:24)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
* 사실 아하스는 왕으로서 대단하지만, 그러나 아하스는 패망하는 왕이고, 아기인 임마누엘은 새로운 왕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사 8:9)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
(사 8:10)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은 이방나라들을 평정해야 하는데, 지금 아하스 왕은 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기가 왕이 되면 이 앗수르는 위협자가 아니고 아기가 사용하는 몽둥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벨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이방나라들은 아기 왕을 보좌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스스로 깨닫고 돌아와서 구원을 받겠다고 생각하는 이런 엉터리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말이다.
* 그러니 이 이스라엘이 망하니까, 주위에 있던 모압, 암몬, 애굽, 블레셋 앗수르 등도 다 같이 망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은퇴했으니 조연도 다 같이 은퇴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언약 공동체인 왕 같은 제사장의 나라가 있을 때에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복은 오직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다.
* 이것은 사사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주위의 나라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배치시켜 놓은 것은, 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남겨둔 도구들이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이 망하면 다른 나라도 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 에스겔 등에 보면, 유다가 망하는 내용도 나오지만, 다른 주위의 다른 나라들도 망하는 내용이 다같이 나오는 것이다.
* 그렇다면 바벨론은 왜 있어야 하는가? 역시, 남은 자를 생산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인생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 그러면 남은 자가 어떻게 돌아오는가?
* 어두움에서 빛이 되는 방식으로, 죽음의 땅에서 생명이 피어나는 그런 방식으로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은 자는 잘렸다는, 그루터기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은 자는 반드시 포로로 잡혀가야 하는 것이다. 그 망함의 흔적을 지니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반드시 이스라엘은 잡혀가야만 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돌아오는 것이다. 잡혀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돌아온다는 것인가?
* 그러면 하나님의 처소는 어디에 있는가? 놀랍게도 포로로 잡혀간 그 이방지역에 하나님의 처소가 있다고 에스겔은 말하는 것이다.
(겔 37:27)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 마태복음 2장에서 왜 예수님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사를 가는가? 호세아서의 예언된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호세아서는 남은 자는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잘려서, 망했기 때문에 자기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한데, 건져주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서 고마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이런 고마움과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모습이지, 어떻게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것인가?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말이다.
* 자기가 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한 번 해보겠다는 것은,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을 무시하는 것이고, 이것은 마치 아하스 왕이 이사야가 데리고 온 아기인 스알야숩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남은 자는 돌아온다' 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지, 그 외에는 다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제시한 전략과 전술만을 사용하시지 다른 방법은 결코 사용하지를 않는 것이다. 정말로 미련하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 이러한 것을 다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비유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말씀을 이루려고 오셨는데, 그것은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 이것을 지난 시간에, '태초의 사항을 마지만 종말에 집어 넣으셨다!' 라고 어렵게 했는데, 역사가 이렇게 흐르고 있다면 태초에 있었던 어떤 사건이 태초에 의해서 역사도 되지만, 그 역사의 의미는 태초에 의해서 마중 나간다는 것이다. 즉,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보이지 않는 흔적에 불과한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 -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했을 때, 이 '하나님 형상' 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 형상" 이 아니고, 하나님 형상이라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형상이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태초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바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짧아도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보여주는 흔적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남은 자가 해야 하는 일은, 절대로 내 힘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것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주님이 하셨다' 라는 것을 우리가 전한다는 것이다.
* 만약에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전함에 있어서, 주님이 하신 것이 보이지 않고 믿지도 못하겠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눈이 가리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또 분명하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까지도 전해야 하는 것이다.
*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누가복음 24장을 보자.
(눅 24: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눅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눅 24: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눅 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눅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의 눈을 밝히사 보여주시는 것이다. 제자들이 스스로 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은 바로 이러한 사건을 계속해서 반복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하셨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자기 아들을 데리고 아하스 왕을 만나게 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은 바로 '스알야숩' 즉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이다. 이 아들의 존재 의미는 아하스에게 던져질 이사야의 계시로서 심판 당할 유다의 남은 역사에 관한 것이다. 달리 말해서 '앞으로 진행될 유다의 멸망 역사는 이 아들과 관련지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는 것이다. 그 심판을 주도하는 것은 남은 자를 앞장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이 될 것이고, 다시 그가 돌아오기 위한 배경으로서 유다 역사는 형성된다. 왜 남은 자는 꼭 심판 가운데서만 생성되는가? 그것은 전혀 새로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언약 백성이 창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꼭 어디 갔다고 필히 돌아와야만 하는가? 왜 돌아오지 않는 남은 자는 [남은 자] 아닌가? 그것은 남은 자의 귀환을 하나님의 도래의 징표로 삼기 위해서이다. 이 성실 속에서 수행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손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손으로만 가능하다.
* 남은 자는 하나님 도래의 징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돌아오려고 한다면 없는데서 왕이 생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윗의 위에 적합한 왕으로 말이다. 그 왕의 권세는 주위의 여러 나라를 임마누엘의 편 팔로 완전히 박살을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포로 된 자들을 구출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듯이, 도둑이 와서 집주인을 꼼짝못하게 묶어 놓아야 세간을 마음대로 늑탈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그냥 믿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미 내가 얽매이기 쉬운 모든 것을 다 결박시켜 놓으셨기에 믿게 되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위에 있는 것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임마누엘의 권세는 엄청난데, 어느 정도인고 하니, 모든 다른 나라들을 몽둥이로 사용할 정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위의 블레셋, 암몬, 두로, 시돈 등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바벨론의 고레스 왕을 마치 메시야로 사용하는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레스를 기름 부은 자, 즉, 메시야라고 하고, 선한 목자라고 하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이렇게 남은 자의 폼을 잡는 것을 일반적으로 남은 자라고 하지를 않습니까?
* 답변 -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싶지만 성경에서는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남은 자는 그 은혜의 씨가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은 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아니라는 것이다. '없다, 있다' 라고 해버리면, 남은 자라는 도구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 이렇게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은 항상 구원론적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스스로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설교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을 선포해야지, 교인들을 설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여기서 이사야와 에스겔을 비교해서 한 번 살펴보자.
(사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사 45:1)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겔 37:24) 내 조상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겔 37:25)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 자, 그러면 목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목자는 언약을 체결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 고레스와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을 체결한다는 것이다. 언약을 체결해서 고레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본토로 되돌리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은 자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 장차 음?남은 자는 하나님과 권세 잡은 아기와 언약을 체결해서 돌아오게 만드는데, 그 돌아오는 것이 다윗 왕이라는 것이다. 그 역할을 지금 고레스가 하고 있으니 그는 선한 목자라는 것이다.
* 이 목자가 에스겔서에 의하면 계약 체결자로서 자기 양들을 데려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목자?가서 그냥 백성들을 데려오면 안 되고, 대표자로서 조인을 하고, 약정서에 도장을 찍고 데려온다는 것이다.
* 만약에 돌아온 자들이 진정한 남은 자라고 한다면, 고레스가 참 메시야가 되고, 그러면 고레스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가? 지금 고레스가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선한 목자로서 메시야의 역할을 하지만, 그러나 고레스가 메시야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남은 자가 있기는 있지만 남은 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 그렇게 돌아와서 그들이 무엇을 하는가? 성전을 짓는 것이다. 이것은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자들은 남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은 자는 70 이레 뒤에 하늘에서 아기 예수로 와야 하는 것이다.
* 느헤미야, 에스라 등은 남은 자의 역할을 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서, 느헤미야서, 에스라서 등에는 뭐가 없는고 하니, 제사가 없는 것이다. 제사가 아니고 말씀 중심이라는 것이다.
* 사도바울이 제사를 드려야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가? 아니다.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만찬이 제사인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의 기능인 것이다. 그래서 성만찬을 보이지 않는 말씀이라고 조직 신학자들이 주장을 하는데, 그러나 그러한 주장에는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말씀 자체가 아니고, 말씀대로 하는 순종하는 것이 아닌가?
* 이러 식으로 남은 자를 해결해 가면, 드디어 구약의 실타레가 풀리는 것이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이러한 하나님의 징조를 거부한다. 그것은 다윗언약을 인간 손에서 수행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앙 때문이다. 이 신앙은 그 당시 모든 유다 민족의 신앙을 대표한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 거부 안에서 남은 자의 역사는 구체화될 것이다. 이로서 아하스의 하나님과 이사야, 즉 남은 자의 하나님은 대결 구조로 바뀌어진다. 그리고 예언대로 앗수르 침공이 이루어진다. 그 침공과 병행해서 임마누엘 아기가 태어난다. 즉 임마누엘의 아기의 출현은, 유다의 멸망을 주도하긴 분이 다름 아닌 바로 유다의 하나님임을 증표하는 징조이다. 그리고 심판 가운데서 이 아기는 현 혈통적 다윗 핏줄인 아하스 왕가를 접수할 것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 박영선 목사는 이 '하나님의 열심' 에 대해서 인간의 열심과 반대되는 열심만으로 보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열심은 말씀을 성취하는 열심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할 수 없다는 것과 대조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홀로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꽝 !!
* 이렇게 말을 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 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행함과 행위를 구분을 못해서 나오는 것이다.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육에서 나오는 것이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움직이는 동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행함과 행위는 분명히 구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홀로 하신다는 것은, 바로 행함이라고 하는 인간의 육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이다.
◈ 결국 남은 자의 몫은 하나님의 열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러한 남은 자가 생성되는 이유는 다윗언약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남은 자는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돌아온다고 남은 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 도래의 징표가 된다는 것이다.
이 본문은, [ 아기 → 하나님 → 정사 → 다윗의 위 → 하나님의 열심 ] 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남은 자는 전혀 이스라엘과 접속되는 계통이 아니다. 전혀 무관한 또 다른 계통의 등장이다. 다윗언약을 성취하는데 있는 하나님께서 열심을 가지시고 직접 아기로 나서서 처리하시는 것이다.
* 그러니까 느헤미랴, 에스라는 남은 자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아기가 아니라, 어른인 것이다. 그들은 단지 포즈를 취하는 것이다. 말씀을 성취하는 아기로 오시는 다윗 왕이 되어야만 남은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신을 받은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아기 예수를 앉고 얼마나 기뻐했는가?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 동방박사들이 왜 하필이면 그때에 그 먼 길을 왔는가? 놀러 왔는가? 어른 예수도 아니고,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천사가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의 평화라고 한 것은, 바로 '아기 예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말씀의 성취라는 것이다.
* 그러니까 말씀을 성취하는 과정에서는, 복음서에는 아기 예수가 필요하고, 나중에 세례를 받고 난 다음의 어른 예수가 필요한 것이지, 그 중간의 청소년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에 예언된 것만 이루시는 것이다. 물론 12살 때에 성전에 가신 사건은 말씀 성취를 위해서 그 부분만 필요한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잃어버린 시절을 다루었다고 하는 '가드 오브 에덴' 은 전혀 성경적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사고 방식 자체가 악마적이라는 것이다. 말씀성취가 아니기 때문에 말이다.
* 도마복음이 필요한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필요하다고 주장을 하는 이호식 등은 이러한 구약에 대해서, 남은 자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다고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이사야 6:9-10을 철저히 준수하는 원칙 속에 있다. 즉 절대로 '돌아 올 수 없는 자' 를 배경으로 하여 '돌아오는 자' 로서 남은 자가 따로 존재하게 되는 이는 전혀 다른 언약 계통에 의해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말라기에 나와있는 내용대로 될 것이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5-6)
이 개념이 지상에 닿을 때 나타나는 것이 바로 남은 자이다. 남은 자의 원조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수행은 하나님의 열심이었고 드러나는 역사적 현상은 한 연약한 아기의 출생이다. 바로 이사야의 이런 예언들로 하여 이사야 6:9를 성취시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이사야 6:9, 53:1-3참조)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 징조의 핵심은, 전혀 다른 하나님의 등장에 있다. 기존의 여호와를 치는 여호와이시다. 이스라엘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앗수르조차도 이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하여 동원된 몽둥이에 불과하다(사10:24). '돌아오는 남은 자' 모습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이 심판 작업이 이스라엘에게 감행된 것이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이 오시는 징조이다. 다른 징조는 없다.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그루터기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구원으로 돌아오는 일은 일어나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이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돋는다. 속된 이스라엘 속에서도, 거룩한 씨가 남겨져 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길 곧 지혜와 총명의 길이요 모략과 재능의 길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길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강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사 11:1-2, 9-11)
◈ 강의가 점점 어려워지는데, 결론에서 다룰 부분이지만, 그러면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 과연 남은 자가 되는가? NO! 남은 자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 포로로 잡혀갈 때는 4번에 걸쳐서 갔지만, 돌아올 때는 3번에 걸쳐서 왔다. 그러면 이 돌아온 자들이 남은 자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이 왜 남은 자가 아닌가 하는 것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남은 자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남은 자의 폼을 보여주는 것이다.
* 기능적 이스라엘 - 그러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다 멸망당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왜 있는가? 아들의 폼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들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기능적 이스라엘' 이라는 것이다.
이 본문은, [ 이새 싹 → 거룩한 산 → 돌아오는 남은 백성 ] 이라는 내용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이새의 싹으로 태어나길 분이 수선 시온 산에 등극하면 그 능력으로 인해 비로소 남은 백성들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쫓겨남에서 되돌아 올 때沮痔?시나리오는 순전히 남은 자로서의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다.
* [ 이새 싹 → 거룩한 산 → 돌아오는 남은 백성 ] - 이것이 바로 스가랴에 나오는 남은 자의 개념인 것이다. 성전인 시온산이 꼭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남은 자도 다 절차가 있는데, 남은 자가 시온산에 돌아온募?것이다. 그것이 이미 이사야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시온산에 누군가 서있어야 되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아모스에 나오는 다윗의 퇴락한 위를 세운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모스에 나오는 남은 자라는 것이다. 성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돌아온 자들이 성전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 돌아온 자들이 B.C 536년에 성전을 재 건축하게 되는데, 이것은 B.C 605년에 다니엘이 포로 잡혀간지 70년만에 돌아오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다니엘이 포로로 잡힌 것하고, 백성들이 돌아오는 것하고, 다같이 예언되어 있는 것처럼 70년만에 돌아온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어서 예언된 대로 70이레만에 성전이 재 건축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성전을 건축하도록 그렇게 말씀이 이끌어 가고 있는가? 그것은 스가랴나 이사야를 보면, 남은 자가 성전을 건축할 때, 그 때에 성소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에스겔 37장을 다시 한 번 보자.
(겔 37:26)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겔 37:27)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에스겔에게 새 성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 성전을 요한 계시록에서는 성도라고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에서는 성령께서 성소를 지어간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윗언약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이 남은 자이고 말이다.
* 그래서 스가랴서와 학개서는 다 같이 성전건축에 개해서 말하는데, 학개서는 성전을 지으라고 말하고, 스가랴서는 비록 그들이 성전을 재건했지만 그것은 성전이 아니고, 장차 올 영원한 성전은 따로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영원한 성전을 짓을 자가 남은 자라는 것이다.
실재로 유다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깃은 모두 4차례였다.
① B.C 605년 :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들과 귀족들의 포로(단 1:1-6)
② B.C 597년 : 여호야긴 왕을 포함한 일반 백성들과 모든 방백들과 군사 만 명과 기술자들(왕하 24:14)
③ B.C 586년 : 시드기야 왕과 그 백성들(왕하 25:1-7, 렘 25:9-11)
④ B.C 581년 : 느브갓네살의 시위 대장 느브사라단이 마지막 남은 유다인을 잡아가고 성전을 불태웠다(왕하25:8-12).
다시 돌아온 형편을 살펴보면(스 1:1-2:70),
① B.C 538년 :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에 의해서 약 5만 명이 돌아왔다.
② B.C 537년 : 절기를 지키다.
③ B.C 536년 : 성전을 재건축하다.
이 때 이 귀환을 허락한 자는 바로 이방인 고레스 왕이었다. 이 고레스 왕을 두고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 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사 44:28-45:1)
이 본문에 보면, '나의 목자' 혹은 '나의 기름 받은 자' 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사야의 표현은 에스겔에 나타나 있는 다음의 하나님의 언약 계획과 무관하지 않다.
"내 조상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원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 의 하나님인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24-28)
여기에 보면,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자로서 다윗을 지목하고 있는데 그 다윗에 대해서 '목자' 혹은 '왕'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왕의 등장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내에 영원한 처소를 마련하게 된다.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포로 된 자들은 고레스 왕을 통해 고토로 돌아와서 성전을 중건하게 된다. 성전을 부수고 황폐화시킨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제는 다시 그 황폐해진 곳을 회복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시 는 것이다(사44:6).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남은 자를 통한 참된 여호와 하나님 모습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즉 남은 자의 의미는, 무에서 유를, 어두움에서 빛을 창조하시는 그 하나님의 창조성을 드러내고자 남겨 둔 자들이었다.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진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사 45:6-8)
원래부터 이스라엘은 이런 자들이어야 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로서만 존재해야 하는 자들이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롬 9:27-28)
바로 이러한 신약의 정신을 보여주고자 구약 때 유다 나라는 남의 나라로 포로 잡혀갔으며 전혀 메시야 혈통과 무관한 이방 민족의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메시야 기능을 유발시켜 다시 돌아와 성전이 중건되는 경험을 제공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만 수행되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사 10:20-23)
이 본문에 의하면, 많은 이스라엘이 남은 자로서의 이스라엘이 구분된다. 그 남은 자들이 돌아오는 것도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능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따라서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를 실행시키는 하나님은 필히 '이스라엘 없어졌음' 의 상태를 병행시키면서 남은 자를 이끌어 내신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멸망이며 가나안 땅에서의 쫓겨남이다. 그리고 유대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던 남은 자의 괴멸이다. 그리고 참 남은 자가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먼저 택한 왕이 시온 땅을 밟아야 한다. 이런 역할을 대행하는 자가 바로 귀환자들 중에서 스룹바벨이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내가 알리라 하셨느니라"(슥 4:9)
이 스룹바벨이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시온으로 되돌아오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슥 8:3, 6-8)
* 스가랴 4장 9절에서는 이 스룹바벨을 메시야로 보고 있는데, 실제로 메시야는 아니지만 메시야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8장에 들어오면, 이제는 스룹바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시온산에서 직접 하시는데, 이것이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겠다는 것이다.
남은 백성은 포로 귀환자와 그들로 통해 중건되는 성전의 모습을 통해 장차 어떠한 모습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돌아오게 된다는 점을 미리 나타내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려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너 양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미 4:6-8)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는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히리니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사 37:31-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내가 내 양무리의 남은 가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렘 23:3)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렘 31:7-8)
* 여기서 구약 학자들이 혼돈하고 있는 것은, 남은 자가 한 쪽은 포로에서 돌아온다고 되어 있고, 다른 쪽에서는 시온에서 나온다고 하니,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해서 남은 자 사상이 두 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 학자들의 한계라는 것이다. 자꾸만 언어학적으로, 문맥적으로만 보니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돌아온다는 전승과 시온산에서 올라온다는 두 가지 전승이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본인이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고, 돌아오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시온산에 서셔 가지고 예루살렘의 새 성전을 세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령도 예루살렘으로 와서,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예루살렘 중심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서에 그렇게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것이다.
* 예루살렘에서 나왔지만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진정한 남은 자는 시온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냥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을 두고 성소라고 해 버리면 세대주의가 되고 마는데,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 죽지 아니한 사도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지옥에 가는가? 죽을 때가 되면 구원받은 자들은 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죽어야 하는가? 여기서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것이다.
* 박길현 목사님이 [ 믿음으로냐, 행함으로냐 ] 라는 책에서, "구약에서의 땅은 신약에서의 하늘이다!" 라고 했는데, 동의하는 바이다. 그래서 이 땅은 왜 망해야 하는 이유가 드러나는 것이다. 남은 자가 하늘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 땅과 여러 민족들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구약에서의 땅은 신약에서의 하늘이다!
☆ [ 결 론 ] ☆
하나님의 '말씀 이루기' 와 인간들의 '자기 구원 이루기' 는 영원히 충돌되는 관계이다. 이 관계 안에서 남은 자가 발생된다. 따라서 남은 자는 혈통적인 이스라엘과 관련지을 수 없다. 그렇게되면 아하스가 믿었던 그 가짜 여호와의 신봉자가 된다. 에스라의 성전이 성전은 아니며 고레스 왕을 참된 메시야라고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남은 자의 역사적 고리를 [ 이스라엘 멸망 → 남은 자 발생 → 포로 잡혀감 남은 자로서 돌아 옴 → 스룹바벨의 성전 중건 → 이스라엘 회복 ] 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남은 자 개념이 도리어 새 언약에 의하면 부정 당한다. 구약은, 신약에 나타난 언약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구약에서 남은 자 역할을 한 그들의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은 자 되심을 보여주기 위한 인형들이 바로 남은 자로서의 유다 나라였다. 이처럼 남은 자 사상은, 언약 성취에 있어 인간의 신앙이나 종교나 정치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남은 자 사상은 다음과 같은 진행을 보여준다.
[ 인간들의 모든 구원 방식과 열망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 → 남은 자로서 예수님이 죽으심 → 부활하심 부활의 영을 보내사 남은 자 발생 → 이들도 죽음에 넘겨짐(계12:11) → 주의 증인으로 남은 자 역할 수행 완료 ]
♣ 기도 - 없음 ! ♣
* 질문 - 스룹바벨 성전이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성도라고 하셨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성전을 지으면서 참 성전이 아니라고 했는데 어떻게 성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 답변 - 참 성전이 아니라고 하면서 짓는 것은 학개 성전이다. 같은 성전 건물을 두고 말하지만 의미를 그렇게 다르게 두는 것이다. 스가랴에서는 스룹바벨이 그렇게 성전을 짓는데, 그것은 왕과 제사장이 그렇게 짓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시는고 하니, 백성들로 하여금 자꾸만 자기들이 지은 성전이 참 성전인 것으로 오해를 유발시켜서, 남은 자라고 하는 것을 잘라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스데반이 하나님은 이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 원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 질문 - 스가랴 4장 6절에 '나의 신' 으로 된다고 하는 것은?
* 답변 -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의 신으로 성전이 되어서,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 성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교회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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