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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하나님의 선택(37) - 새 언약 12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선택(37) - 새 언약 12

정인순 2011. 1. 4. 12:08

하나님의 선택(37) - 새 언약 12
                                                                       99,2,22 이근호 (구득영 정리)


◈ 왜 유대인들은 성전제도를 계속 고수할 수밖에 없었는가? ◈

*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제하고 종교 조직체를 따로 만들어 놓은 이유가 있는데, 죄를 용서받는 장치에 대해서는 자기들이 아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구약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 출애굽기에 보면 다섯 가지 제사가 나오는데 -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함 받는 것이다. 그리고 고의로 지은 죄는 제사가 소용이 없다. 실수로 지은 죄와 잘못을 깨달은 것만 용서를 받는 것이지, 전혀 그렇지도 않고 뉘우침이 없고서는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 이러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이 문제가 모세 이후에는 "어떻게 생존하는가?"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 생명에서 생존의 문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생명과 생존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 [ 기독교 허상 1 ] 참고

* 우리가 목회자로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내가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설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남을 비판하고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세상을 하나님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자 하는데, 인간도 역시 자기 나름대로의 꿈과 포부를 가지고 설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이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라고 질문을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살아가시는 방식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눅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어린아이의 의미 -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고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양다리를 걸치지 말고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하늘나라이든지, 세상을 선택하든지 말이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아버지 앞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천진난만하게 노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아무리 자존심을 상하고 심지어 욕을 들어먹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느긋하게 살아가는데, 그것은 하늘나라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 마태복음 13장의 예수님의 비유도 이런 차원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밭을 사고 보석을 사는 것이다.

*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설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으로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세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인 것이다.

* 성전제도 - 이러한 유대인들이 성전제도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은 달리 그 어떤 다른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에게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죄를 사하는 것을 가르쳐 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모세의 율법(제사법)을 빼버리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마치 유대인들에게 성전제도처럼, 그 어떤 원리라고 생각하는 예배가 일정한 순서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약성경에서 예배에 대해서 말을 하지만 그 순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순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라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신약성경의 핵심이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지,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라는 것이지,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매일 모인 것은, 성령으로 이미 변화를 받아서 모인 것이지, 모였기 때문에 변화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고린도 전서에서는 이러한 모임을 놀랍게도 '예배' 箚?하지를 아니하고 '말씀' 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복음전파라는 것이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리라는 구약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사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가 남긴 설교가, 말씀 자체가 지금 온 땅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다. 사도의 권위가 아니라, 말씀의 자체 능력으로 말이다.

* 이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신령한 노래로 찬미를 하고, 떡을 떼고, 잔을 나누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서로 돌아가면서 말씀을 서로 나누었던 것이다. 그 기초는 오직 그리스도가 주신 말씀의 권세에 의해서 말이다.

* 사도와 목사의 차이점 - 사도는 말씀이라는 분에 의해서 자기가 뽑혀서 움직이지만, 그래서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자에게 영생을 베푸시는데, 그런데 목사는 목사 자신이 목사의 권위로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그 예로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왔을 때, 빌립이 그에게로 간 것은 말씀이 그렇게 인도를 하신 것이지, 빌립이 스스로 알아서 간 것이 아니다. 빌립이 성경을 해석했을 때, 그 내시가 깨닫는 것도 말씀의 능력이지 내시가 똑똑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 말씀 자체의 능력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 권위를 넘겨받아서 일을 하는 것인가?

* 말씀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은 성전제도와 같은 것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유대인들이 성전제도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달리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다.

* 모세율법에 제사를 드리라고 되어있기에, 그들도 이러한 제사를 끝까지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사를 계속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려고 오셨다고 하신다.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율법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도 없고, 율법을 예수님이 완성하러 왔다고 하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우리 같으면 무슨 방법을 사용하겠는가?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예수님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면도 있지만, 자기들의 처지도 함께 들어있는 것이다.)

* 오늘날 목회자들도 이 말을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하는 말이 '미쳤다!' 라고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말씀 자체의 능력을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목사들이 말씀 자체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말로만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것인가?

* 도대체 장자교단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가? 말씀을 자기들만이 이양해서 받았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래서 성노회, 성총회라고 하는데,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성노회, 성총회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 있는가?

* 권세 -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을 건지는데, 사람이 없어서 낙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받을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내어서 일을 추진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누구를 보내어서 일을 하시는 것을 권세라고 하는데, 권세라는 것은 보내는 분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 분이 자기의 권세로 일방적으로 밀어 부친다는 것이다.

(마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즉, 유대인들의 죄를 사하는 장치인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옛 포도주, 옛 부대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자신의 권세로 죄를 사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포도주는 묵은 것이 좋다는 것은 말은 맞지만, 그러나 새 포도주는 새 부대가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 포도주를 옛 부대에 담는 자들이 있으니, 오늘날의 목사들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전이니, 제사이니, 안식일 대신에 주일이니'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러한 말을 목사들이 왜 싫어하는가? 목사다움에 대한, 목사로서의 자기의 존재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목사의 권위도, 이양되는 말씀의 권세도 다 사라지고 없으니, 누가 좋아하겠느냐는 것이다. 미친놈들을 빼놓고는 말이다. 그러면 목사도 필요 없고, 예수님이 혼자서 다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 보내심을 받은 자의 특징 - 사도들이 자신을 뭐라고 고백을 했는가? 보내심을 받아서 왔다는 것이다. 절대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권위만을 높이면 되는 것이다.

(고전 3: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 도대체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가 자기보고 욕하는 것이다. 누가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왜 인간의 이름이 거기서 튀어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내심을 받은 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는 십자가를 지지도 아니한 자기에게 제발 관심을 가지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 그러면 사도는 언제 권위가 있는가? 바른 말씀을 전할 때만 권위가 있는 것이다. 박영선 목사가 처음에 바른 설교를 할 때는 그에게 말씀의 권위가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임할 때가 중요한 것이다.

* 구약시대의 제사장도 옷을 입을 때만 제사장인 것이다. 그래서 아론이 죽으면서 자기 아들에게 옷을 물려주는 것이다. 이것을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예수의 옷으로 입혀졌다고 하는 것이다. 이 옷을 세례에다 적용을 시키는 것이다.

*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단순히 2000년 전에 하셨던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있는 현장에는 늘 반복되어야 할 말씀인 것이다. 육이면 육답게 자신을 알면 되는데, 육인 인간이 건방지게 자기 존재의 가치를 가지고 반항한다는 것이다.

* 목회자와 말씀 - 목회를 하면서, 교인이 떠난다든지, 남들이 욕을 하고 이단이라고 해도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목회자가 제일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말씀의 새로운 용솟음이 없음을 알았을 때이다. 그럴 때는 과감하게 제대로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 목회자는 그냥 다른 직업을 구해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설교의 밑천이 없다든지,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경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대한 원천이 고갈된 상태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계속 목회를 한다면, 자기 힘으로 하려고 설쳐되니까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 헤매고 있으면, 교인들도 금방 아는 것이다. 목회라고 하는 무거운 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의 모습이다.

☞ 하나님의 선택, 210 페이지

⊙ 예수님을 배제하고 그 자리에 종교 조직을 배치해 놓은 이상, 필연적으로 율법을 버리면 선택도 무산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탱해야만 겨우 유지되는 선택이라면 애초부터 선택된 자가 아니다. 무효화되는 선택은 처음부터 선택이라 할 수가 없다. (책)  

⊙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메시야라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을 했고, 어디서 신학공부를 했는지, 어디서 율법을 가르칠 자격을 받았는지를 따졌다. (책)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십자가가 보여주는 것은 표적을 배제하고 인간의 지식을 배제하는 것이기에, 십자가가 있는데 더 이상 기적을 바라지 말고,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십자가가 있는데, 더 이상 방언이나 병 고침 등의 기적을 바란다는 것은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증집회 등으로 요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조용하게 믿어지는 것이다.  

◈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  - 이러한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그냥 '예수님 최고!' 라고 하지를 말고, 바리새인들의 입장이 되어서 말씀을 보면 되는 것이다. 그들은 대대로 제사장의 집안에서 자랐고, 그렇기에 이렇게 율법을 가르치고 제사를 드려야 자기들의 위치와 생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목회자로서 이러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 왜 기존의 목사들이 바리새인들처럼 반발을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름대로 열심히 목사들의 하는 것을 너무나 무가치한 것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가 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본질이 또 하나 드러나는데, 그것이 바로 역사와 전통이다.

◈ 역사와 전통 -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유혹이 바로 역사와 전통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면 먼저 이단이라고 보면 된다. 주님은 단 하루 전의 것이라도 인정을 하지 않는다. 어제의 신앙이 ?┛?아니고,  '지금 주님을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은 물어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주님과 나와의 관계이지, 내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의 의지력으로 하는 것은 자기 믿음이지, 주님과는 상관이 없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 질문 - 선택된 자가 타락할 수가 있습니까?

* 답변 - 없다. 왜냐하면 그 관계가 자기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 질문 -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타락을 합니까?

* 답변 - 물론, 타락을 합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의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출발하는 사람은 타락이 없어도, 자기로 시작을 하면 타락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생명책에서 지워진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 답변 -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누가 지워지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성도의 견인이라는 면에서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 답변 - 그렇지 않는 것이다. 내 쪽에서 출발한 종교적인 현상을 가지고, 선택이니, 견인이니 라고 하면 안 되고, 주께서 하심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 [ 복음의 회복 ] 참고

* 질문 - 베드로의 경우에는 그가 타락한 것으로 볼 수가 있지를 않습니까?

* 답변 - 베드로는 믿다가 실패를 해야 한다. 그래야 성령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실패한 경험이 있어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 역사(歷史)와 또 다른 계시 - 인간에게는 역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또 다른 계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무서운 점인데, 아예 계시기 없으면 겸손하기라도 할 것인데, 뭔가 이렇게 하나를 가지고 있으니 폼을 잡는 것이다. 사실 마귀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집사로 있을 때에는 겸손한데, 자기의 역사가 쌓여서 목사, 장로가 되면 목이 곧아지는 것이다. 노력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집권자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바는, 예수님의 모든 활동과 설교가 전혀 정통성이 없으며, 믿어서는 안될 질 나쁜 것이라는 것을 폭로시키는데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종교나 사회질서의 차원에서 예수님께 단호한 조치를 내리더라도 민중들의 소요를 무마할 수 있다는 것인데, 결국은 권위 문제였다. (책)

⊙ 예수님이 정말 유일무이한 구원의 권위자인가, 아니면 기존의 종교조직이 여호와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구원의 기관인가에 대한 결정을 대세의 힘에 의지했다. (책)

* 즉, '예수님인가, 교회인가' 하는 것이다. 둘 다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둘 다를 인정해 버리면 또다시 권위의 순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대세(大勢)를 이용해서 밀어 부치고자 했다는 것이다.

◈ 막 11장에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언급한 이유는?

(막 11:27)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막 11:28)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막 11: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막 11: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막 11:31)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막 11:32)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막 11: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이 본문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하기를, '이런 일을 하는 권세를 어디서 받았는가?' 라는 것이다. 아마 그들은 권세는 무슨 권세라는 대답을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지금 예수님에게 정규 신학교도 졸업하지를 않았느냐 라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 이러한 질문의 태도는 서기관들이 민중들을 의식해서 하는 것인데, 민중들에게 예수는 신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않은 자이니까,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도 귀담아 듣지 말라는 것이다.  

*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서냐? -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답변도 민중들을 의식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을 예로 들어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느냐, 사람에게서 왔느냐?' 라고 도로 묻고 계시는 것이다.

* 이것은 예수님이 섭却鄂記?권위를 인정하는 차원이라기보다는,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니까,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이용해서 그들의 시비를 박살내시려는 것이다.

* 지금 민중들에 제일 인기 있는 선지자는 세례요한이었던 것이다. 그가 민중들의 소리를 대신해서 하다가 죽은 것처럼 자기들에게는 보이고, 그야말로 고난받는 구약의 선지자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당시의 세례요한이야 최고의 권위 있는 스타(?)였던 것이다.

* 지금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정말로 나의 권위가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고, 뭔가 다른 속셈을 가지고 민중들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냐' 라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세례요한의 권위가 '사람에게서' 라고 하면 자기들의 입장이 곤란해지고, 그렇다고 '하늘에게서' 라고 하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님의 권위가 하늘에 합세하기에, 그만 예수님의 권위가 제대로 인정되어버리는 것이기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는 것이다.  

* 이렇게 말씀이 상당히 복잡한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목회자로서 인내하면서 숲부터 시작해서 나무로 접근해가야 하는 것이다.

* 재건파에서 주장하기를, 자기들은 배신하지 않는 옥중에서 순교한 자들로부터 세례를 받았기에, 자기들만이 정통성을 지닌 장자교단이라고 주장을 하는데, 이러한 말씀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지적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이러한 유혹을 물리칠 수가 있고 말이다.

* 아마추어들이 설교를 하면, 항상 자기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주장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장로들을 설교를 시키면 거의 이런 수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할 말 없고 !!

☞ 하나님의 선택, 211 페이지

⊙ 남의 권위와 권세에 대하여 물으려면 그 묻는 자신들의 권위부터 먼저 검증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저들의 권세의 출처를 따졌다. 그 방법은 자신들의 권위가 스스로 하늘에서 왔다고 생각을 하는지, 아니면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권위인지를 알아보면 된다. 이 점을 가지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되물었다. (책)

* 지금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하늘, 하늘이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민중들을 더 의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질문에 대답하지를 못하는 이들을 보고 꾸짖으시는 것이다.

* 목회자의 임무 - 목회자는 교인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소신 있게 말씀만 전하면 되는 것이다. 교회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말씀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숫자에 얽매이는가?

◈ 다윗의 인구조사 - 참고로, 다윗이 숫자를 헤아려서 하나님에게 벌을 받은 것은 단순히 다윗만을 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가지고 이스라엘 전체를 치려고 하시는 것이다.

(삼하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 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던 다윗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시켰다는 것이다. 왕이 자기 백성을 치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당했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제대로 해서 벌을 받지 않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복수심이 생기는 것이다.

◈ 모든 인간의 행동과 의식 속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분에 대한 복수심이 들어있다 !!

* 그래서 인간의 기도는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복수심이고, 성경을 보아도 그런 불만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기 만족이 안 됨으로, 그 분을 풀지 아니하면 정신병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래서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데모인 것이다. 기도를 함으로 신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고, 다른 사람에게는 믿음이 좋은 것으로 인정을 받고, 이 얼마나 좋은가 !  

* 본론으로 돌아가서, 유대인들이 이렇게 주장을 하는 것은, 자기들은 선택이 되었다고 주장을 하고, 예수님은 안 되었다고 주장을 하시는 것이다. 이런 충돌이 지금 막 11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모세율법이 있고, 제사가 있는데 어떻게 선택이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고, 예수님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선택이 되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 그래서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론에서 시작하면 안 되고, 기독론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 예수 안에서 선택 - 인간은 자기가 선택되기를 주님께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다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창세 전부터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예수 안에서의 선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칼 바르트가 그렇게 강조를 했지만 목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해서 공부를 안 하기에 이런 소리를 처음 듣는다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선택을 위해서, 하나씩 제거를 하고, 배척을 하고, 거부를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뽑는 작업이 아니라, 자르고 자르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뽑는 것이지만, 이 세상에 그것은 잘라 버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석자로 '버린 돌' 이라고 한다.

* 버린 돌 -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는 것은, 인간은 참된 택한 자를 버릴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인간의 선택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인가의 선택은 하나님의 선택과 반대방향인 것이다. 이렇게 버린 돌이 자기들끼리 모인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택한 자는 그렇게 모이게 된다는 것이다.  

◈ 선택과 십자가 - 그러므로 사람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선택된 자가 아니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면 그 버림받은 증거는 무엇인가? 바로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이고,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버림받음을 자기의 삶으로 받아들일 때, 그 사람이야말로 십자가를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처럼 나도 건축자의 버린 돌이라는 것을 날마다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다.

* 이렇게 선지자가 고독하다는 것을, '선지자는 고독하다. 그러면 고독하다고 선지자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가 있다. 고독한 사람은 노숙자이다. 술집에 가보면, 어디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 이 땅의 현상을 가지고 접근해서 하늘에 손대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사고는 땅에서부터 출발을 하는데, 이것이 총신 신학교 교수들의 한계이다.

* 기독교 윤리의 문제점 - 기독교윤리에 대해서 토론을 한다는 말이 있는데, '기독교윤리에 대한 계시의 위상' 이라고 이미 A4 용지에 9장을 다 적어놓았는데, 할 말이 없도록 글을 적어 놓았다. 이 기독교윤리의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이 구원을 받은 자인가?' 라는 현상학적으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 사고방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버린 돌의 모습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 사고방식 자체가 없어지는데, 그런데 기독교 윤리주의자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전에는 악령이 임해서 제대로 못했지만 이제는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선하게 살 수가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거와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는 구원받았다' 라고 주장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것이 잘못된 점이라는 것이다. 사고의 틀이 바뀌지 않고서도 착한 일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임을 자랑하고 싶다는 것이다.

* 그러나 성경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태초에서부터 선택되었음을 말하는 것이지, 선한 일을 하는 인간의 현상을 두고 인간의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언급하지 아니하고서 기독교를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권성수, 정훈택 교수 등의 글을 보면, 이러한 선택에 대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이 선택이라는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모든 시작을 이 땅에서의 현상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초부터가 아니고 말이다.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가 하늘에 속해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태초에 보니까 이미 우리가 하늘에 속한 자였다는 것이다.

* 시간의 차원을 넘어서 사나 죽으나 언제나 주와 함께 있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와 아직' 이라고 하면 안 되고, 이미 하늘에 속한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즉, 자기의 구원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자기 아버지가 문방구를 할 때는 그래도 어린 마음에 지우개 하나라도 더 가지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러나 나중에 자기가 문방구 주인이 되면 그런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것에 연연해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것이 이제는 다 자기 것임을 아는 것이다.

* 성령의 열매 - 이것을 성경에서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 비록 자기에게 그런 여유가 있어도, 지우개 한 두 개 더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임을 알기에, 시시한 이 땅의 것을 가지고 싸우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월급 좀더 많이 받으면 어떻고, 적게 받으면 어떠한가?

* 마치 어린아이처럼, 하늘나라가 너무 좋기 때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꾸만 그 나라만을 사모하는 심정이라는 것이다. '나는 세리와 창기와 같이 토색하지 아니하고 간음하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며 ...' 라고 하면서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상한 심령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그러니 지금 한국교회가 얼마나 이단인가를 실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들이 원하?것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면서 장단을 맞추어 주는 것이 목사이고 말이다. 즉, 교회라는 종교단체에 빌어 붙어서 먹고 살아가는 것이 목사라는 것이다.

* 정말로 제대로 된 주의 종이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결코 그러한 민중의 요구 조건을 인정해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외롭고 고독해고, 아니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말씀만을 외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잘 알 수가 있는 것이다.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고,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권세로서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 주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은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게 되어있지,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높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분이나, 목사 등의 존재의 의미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가수 김종환에게서 묻고,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는 자가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이다.

* 도대체 사도바울이 누구를 증거했는가? 그는 그리스도만을 증거했지, 자신을 증거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의 시대를 완전히 오판해서, 새 언약의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만든 종교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 그야말로 인간의 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13 페이지

⊙ 유대인들은, 권위란 조상 때부터 대대로 형성되어 내려온 권위라야 인정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흐름의 말단에 서 있기에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심사할 수 있는 역사적 정당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땅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공격하신다. (책)

(마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 사실 이 본문은 예수님은 유일하게 먼저 유대인들을 공격하신 부분이다. 까마득한 손자뻘이 되는 사람이 어떻게 주(主)가, 윗사람이 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말을, 그리스도를 주라고 한 것을,  너희들의 땅의 해석으로 한번 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도 따지고 보면 우리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칼빈과 루터의 신학을 배우고 있는데, 과연 이러한 질문이 유대인들에게처럼 난감하지 아니한가?

* 여기에 대해서 김영한 교수는 부흥사 같은 이야기라고 일축을 해버린다. 바로 이것이다. 땅의 해석으로는 이렇게 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알 수가 없다고 하는데, 철학과 해석학 등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김영한 교수에게 질문을 하니까, 그것은 부흥사에게 가서 물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부흥사는 학적인 권위가 없고 자기들은 학적인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도 무시하는 학적인 권위가 왜 필요한가?

* 지금 바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이러한 학적인 권위를 앞세우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니 김 교수 같은 사람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학생(민중)들에게 더 호감을 얻고자 하는 수단으로 해석학 강의를 하는 것이다. 아니면 돈이든지. 너무 심했나? 성경이 어찌 이렇게 적확한지(!)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말이다.

* 어느 교회의 모 목사가 이근호가 곧 교회에서 잘릴 것이라고 말을 하는데, 성도가 곧 교회이기에, 그렇기에 교회에서 성도가 잘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튀어나오는지,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이 양반은 내가 성전이고 교회라는 것은 믿지 아니하고, 민중들이 모이는 민중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관심이 하늘이 아니라, 민중을 의식하고, 자꾸만 엉뚱한 곳은 바라보는 것이다.  

* 김 교수는 예수님의 질문에 나름대로 대답을 했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은 어떠했는가?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라는 것이다. 어떻게 감히 대답을 하겠는가?

⊙ 후손은 조상의 권위에 종속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율법해석에 큰 차질을 빚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율법해석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상이 메시야가 되는, 후손의 권위에 종속되는 식으로 율법이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

* 여기서 조상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사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신학적 전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서운 것인데, 사람을 질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야만이 율법해석의 권위자이며, 그 메시야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내가 내 율법을 내가 알아서 해석을 하는데, 내 것을 가지고 내가 마음대로 하는데 너희들이 왜 시비를 거느냐는 것이다. 너희들이 '율법, 율법' 이라고 하면서도, 제대로 하나라도 해석을 하느냐는 것이다.

◈ 메시야 싸움 - 결국은, '예수님이 메시야인가, 아닌가?' 하는 싸움인 것이다.

* '인간이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고 착하게 사는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싸우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속에 있는 추상적인 존재이기에, 구체적인 것이 아니기에, 텅텅 비어있기에, 인간의 모든 욕망을 담을 수가 있는데,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기에, 도저히 인간의 그러한 야망을 담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  - ① 인간의 욕망을 담을 수 있는 하나님
             ② 도저히 인간의 욕망을 담을 수 없는 하나님    

* 과연 민중들이 어느 하나님을 좋아하겠는가? 물론 1번이다. 그래서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 것인데, 왜냐하면 교회는 이러한 민중들의 욕심을 채워주기 때문에 말이다.

* 그러면 뎬允?누가 예수님을 믿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망치로 뒤통수를 때린 사람만이 믿는 것이다. 성령에 얻어맞았기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구체적인 하나님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하는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는 이 싸움이 한참 진행 중인 것이다.

*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 이 땅의 삶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기도는 항상 유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좀 더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I.M.F나 국가와 민족이 문제가 아니고, 이 땅에 그만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야 하는 것이다. - 하늘나라가 보여요 !!

☞ 하나님의 선택, 213, 214 페이지

⊙ 율법을 문자적으로 받아드리지 않더라도 선택된 자라고 할 수가 있을까? 메시야 되는 분이 오셔서 하는 선택만이 완전한 선택이다. (책)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이러한 주님의 활동영역을 우리가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우리가 인정 안 한다고 일을 안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한 주님을 우리가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주께서 살리시는데, 건방지게 우리가 손을 거기에 갖다 댈 수가 있는가?

* 선택받은 사람은, 주님의 완벽한 선택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지, 자기의 구원받은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구의 모 교회에 가서 이 내용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선택받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 안식일에 대해서

* 안식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안식일이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행위에서 나온 법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어떤 원리에 의해서 창조를 하셨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 창조와 거룩성 - 일반적으로 '안식일은 창조행위의 반복이다' 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은 맞는 것이다. 얼마 전에 출 31장을 보면서, 하나님의 창조성의 근원을 발견했는데, 안식일에 노동하는 자를 죽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 31: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 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출 31: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출 31: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 31: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출 31: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 하나님의 창조행위에는 하나님 자신의 거룩성이 담겨 있고, 이 안식일을 지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복하는데,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자이기에 죽여 버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거룩성을 무효로 돌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아마 여러분은, '목사님,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라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이 내용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하실 때, 오직 거룩함만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지 아니한 것은 모조리 죽이는 심판행위로 나서시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지금까지는 사실,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시고 멸망시키는 것이, 왜 그렇게 하셔야만 했는지가 궁금했는데, 이렇게 되면 그렇게 하시는 것이 너무나 합당하다는 것이다.

* 자연계시와 일반계시 -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너무 이렇게 일방적으로 나가면 자연신론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자연계시가 따로 있고, 지옥과 심판을 하시는 특별계시가 따로 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지금 주장하려는 것은, 창조라는 것은 자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지 아니한 것을 박살내시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시와 일반계시를 맏건漫??안되고, 하나로만 보아야 하는 것이다.

* 찬송가 460장을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주의 뜻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나 지금 본인은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단순히 사는 것이 주?은혜가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성에 참여하는 것이 주의 은혜라는 것이다.

◈ 창조의 참 뜻 - 일반적으로 창조라는 것을, 없는데서 무엇을 만든 것으로 보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거룩하게 될 때, 비로소 창조되었다고 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라는 것 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거룩하지도 아니한데 살아있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가? 김정일, 전두환, 노태우 같은 놈들 말이다. 이런 놈들이 눈에 보이지만 하나님의 창조로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 창조와 심판 -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시간에 상관없이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존재의 의미로, 살려두기 위해서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에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보여주는 심판행위로서 창조를 하신다는 것이다.

* 창조와 구원 -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감사하자!' 라고 주장했는데, 그러나 본인의 주장은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택함을 받아서 거룩을 입어 구원을 받은 모습만이 제대로 창조된 피조물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러한 소리를 듣고, '그것은 창조가 아니고 구원이다' 라고 할지라도, 본인은 구원과 창조를 그렇게 따로 나누고 싶지를 않다는 것이다.

* 창조와 죽음 -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를 하시고 7일에는 쉬셨는데, 그런데 출 31장을 보면, 안식일을 반복함으로 말미암아 6일도 안식일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는 생각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소에 너무 고생을 하니까 7일에 쉬는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쉬는 것이 안식일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왜 죽여야 하는 것인가? 그럴 필요가 없지를 않는가? 죽이는 것은 창조를 무효로 돌리는 것이 아닌가?

◈ 그러므로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죽도록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를 더 일했다고 죽이는 것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얼마나 일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거룩하게 여겼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만드는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여주는 행위라는 것이다.

*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은혜가 아니고, 살아있어도 그것은 지옥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아는 것이,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살아온 것도 은혜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더 큰 은혜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 더 나아가서 신구약을 전체를 통틀어보면,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창조를 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아는 놈인가, 그렇지 않는 놈인가?' 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창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보면 골로새서 1장에서, 예수님이 태초의 창조의 주체라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심판 주' 의 자격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몸이 건강하다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기본이고, 거기에다가 건강하고,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축복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6일 동안 아무리 병이 났고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러한 창조의 거룩함을 모른다고 한다면, 그는 제 7일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구약의 죽음 - 마지막으로, 구약에서 죽음이 가지는 기능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뜻이 아닌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주님의 깊은 뜻을 다시 한번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그냥 오늘날 우리를 존재하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창조하시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동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줄을 압니다. 그 은혜로 천국가게 된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 예수님은 택한 백성이 아니면 사람 취급을 아니하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