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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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서
05,03,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천사는 육체가 없어 !!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천사에 대해서 질문을 많이 했는데, 천사와 인간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면, 천사는 육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천사가 육체가 없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천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피조세계를 천사에게 맡긴 적이 없는데, 자기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게 맡겼지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천사보다 인간이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천사중심이 아니라, 인간과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 세상을 편성하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인간을 섬기는 종이고 말이다. 그러니 천사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는 데로만 한다는 것이다.
◈ 사도요한의 감격스러움 !!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사도요한이 천사에게 절을 하려고 하니까 천사가 말리는데,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사도요한의 입장이라면 사실 그 마음이 얼마나 흡족하겠는가? 절을 백 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이다.
(계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계 22:9)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지금까지 자기가 복음 때문에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즉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또한 천사가 있어서 그런 일에 수종을 든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에게는 전혀 먹혀들지를 않았는데 말이다. 오히려 이렇게 자기는 외딴 섬에 유배를 와있고 말이다.
그런데 천사를 직접 만나고 보니, 자기가 한 그 모든 이야기가 다 맞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평소에 자기가 한 이야기가 맞을 때 참으로 즐거움을 느끼는데, '빙고' 라고 할까? 아무튼 그렇게 맞아떨어졌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와 그렇게 일치하게 될 때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 - 흔들리지 마 !!
이것을 디모데후서 3장에서 사도바울은 "확신 가운데서 거하면서 살아라. 흔들릴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하는데, 즉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진리의 말씀이고,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딤후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질문 - 천사가 하나님의 시키는 데로만 한다면, 그러면 악마는 어떻게 되나요?
악마도 역시 하나님이 시키는 데로 하는데,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그러한 역할을 주었다는 것이다. 즉 악마는 예수님의 일을 가리우는 역할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이다. 천사의 경우도 역시 그런 역할을 맡은 것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되어있는데, 그러니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천사보다 인간이 더욱 가깝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 중심으로 보는가? 당연히 예수님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이 천사보다 더 높다는 것이다.
◈ 인간이 천사보다 예수님에게서 더 가까워 !!
그러고 보니, 높다는 표현보다는 가깝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은데 말이다. 즉 천사는 성도가 예수님을 섬기도록 뒤에서 도와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사를 대할 때 바로 대하면 안 되고, 반드시 예수님을 거쳐서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천사에게 묻기를, "나에 무엇을 도와줄 것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가?"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다면 악마다 더욱 더 악마다운 이유가, 하나님의 선택된 자를 더 빛나게 하기 위해서 라고 이야기해도 되나요?
물론 당연한데, 악마의 역할이 바로 예수님을 가리우는 것이고, 그것이 곧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하고, 성도를 성도답게 한다는 것이다. 아주 간결하고 적절한 표현인데 말이다.
* 질문 - 창세기 시대에 (3장 이전인 1장에서?), 즉 천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천사들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나요?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나누어주는 책자에 보면, 천사가 타락해서 사단이 되었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 천사들은 지옥의 무저갱에 갇혀있다고 보는데, 그런데 필요에 따라서 거기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대로 악마는 천사가 타락한 것이 맞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얼마나 세밀하고 정확한지, 피조물인 타락한 천사가 아무리 수작을 부려도, 전혀 하나님의 약속이란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이 세상은 '약속' 이란 방정식 속에 !!
바로 그 약속이 무엇인고 하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전쟁을 하는 틀, 그것을 일종의 방정식(?)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거기에서 전혀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방정식의 특징이 바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인데, 악마도 벗어나지를 못하는데, 우리 인간들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좋던 싫던 간에 이 싸움판에 끌려들어왔는데, 그러니 우리가 이 싸움판에서 그 어떤 일을 하던지 간에, 앞으로 우리가 어떤 계획을 잡아도, 그것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전쟁하는 방정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 질문 - 악마도 피조물이고 인간도 피조물인데, 그러면 악마는 인간의 속성을 다 알고 있겠네요?
물론 100% 다 아는데, 왜냐하면 천사는 영적인 존재인데, 영은 육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이 계시는 줄은 마귀도 안다고 했는데, 그리고 주님의 백성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악마도 알게 때문에 그것을 훼방한다는 말이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 질문 - 천사의 영적상태와 악마의 영적상태가 부딪치는 것도 다 알겠네요?
물론 서로가 다 아는데, 그래서 성도가 마귀의 시험에 들면 천사가 와서 도와준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하나님은 영의 세계를 다 장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래서 누가복음 4장에서 귀신이 뭐라고 하는가?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직 자기들이 박살날 때가 아닌데, 그러니 예수님이 너무 일찍 온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도 다 알고 악마도 다 아는데, 하지만 이것이 악마가 안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아니까, 그래서 악마는 더욱 더 우는 사자와 같이 설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눅 4: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눅 4: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질문 - 그렇게 안 되는 것을 안다면, 악마가 굳이 울부짖을 필요가 없지 싶은데요?
왜냐하면, 그렇게 울부짖는 것이 바로 악마가 맡은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악마가 만들어진 것이니 말이다.
* 질문 - 그래서 악마에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인가요?
물론 악마에게 그런 것은 없는데, 사실 인간에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인간들이 다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고 말이다. 모든 피조물은 다 하나님이 시키는 데로만 하도록 되어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에게 떡을 나누어주니 그만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되어있는데, 이것도 참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인데,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이 가룟유다에게 악마를 집어넣은 것이 되니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유다야, 이제 니가 할 일을 해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요 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요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그러니 예수도 알고 마귀도 알고 인간만 모르는데, 인간은 육에 속했으니 영의 일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심리적 상태를 두고 '영적' 이라고 하면 안 되고, 우리가 몸부림을 쳐야 되니 그렇게 표현을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마귀가 들으면 웃기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마귀가 보는 영적인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하는 일이 영적인 것이고, 나머지는 다 육적인 것이란 말이다. 사실 그런 마귀의 생각이 맞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우리 인간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네요?
당연히 그러한데, 인간은 처음 창조할 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창세기 3장에 나오듯이 그렇게 타락하고 난 뒤에는, "우리 인간은 선악과고 뭐고 간에 이제는 우리 마음대로 이다. 지금 선악과가 어디에 있노? 대구 팔공산에 있나? 선악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라고 하는데, 물론 악마가 들어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는 인간만 만든 것이 아니라, 선악나무와 생명나무를 같이 만들었는데, 그러니 결국 인간은 꼭두각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나무와 생명나무를 가지고 인간을 조절하면서, 그런 법칙을 증거하라고 말이다. 선악나무가 무엇이며, 생명나무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바로 그것을 증거하고 보여주는 역할로서 피조물로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 인간을 만든 목적은, 선악과 생명나무가 무엇인지를 !!
다시 말해서, 인간이 그 나무들을 즐기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선악나무가 얼마나 무서운지, 또한 생명나무가 얼마나 좋은지를 보여주는 의미에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들은 그런 성경의 내용을 완전히 무시하고는, 즉 "선악과 같은 소리하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에 불과해" 라고 하면서, 그것을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아이디어로 간주한다는 말이다. 사실이 아닌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고 무엇을 즐기면서 잘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장치 속에 집어넣었는지, 바로 그것을 알자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데, 우리 인간들이 어떤 장치 속에 들어있는지를 아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 라는 것에서 출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선악의 체제를 전혀 모르고서 살아가는데, 그렇게 모르고 산다는 것은 성도가 아니라는 의미인가요?
그런 사람은 이미 육적인 사람인데, 전혀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살아가면서 선악체제와 생명나무의 실체를 알면, 그 사람은 복음적인가요?
그런 사람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사람 인생의 주인공이 누구라는 말인가? 그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주님의 택한 백성이고, 성도라는 것이다.
마치 된장국이 펄펄 끓어 넘치는 것이 아니라, 냉동실에 넣어서 완전히 얼려놓은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해서 얼린 된장국을 보면, 멸치도 있고, 콩나물 대가리도 있고, 또 애호박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뭔가를 함께 더불어서 모든 것을 다 굳혀서 틀을 잡아놓았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그것은 순간적이지 않나요?
그것이 일종의 원리이고, 주께서 지속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지속적인 문제는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고, 그 이후의 문제이고 말이다. 아무튼 본인이 그런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성화론자들은 조연도 없이 어떻게 주연이 빛날 수 있느냐고 하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그러면 당신들이 말하는 틀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면 그들이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동태가 되어서 굳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그만 살아서 펄펄 뛴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신이라는 것인데, 자기 옆에 하나님도 있고, 예수님도 있고, 성령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마귀도 있고 말이다. 자기가 동태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
* 질문 -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마치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 인생이니까 자기가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창세기 1장부터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인간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인데, 하지만 마귀가 자꾸만 인간에게 그렇게 "니 인생은 니가 주인공이다" 라고 주입을 시킨다는 것이다.
* 질문 - 목사님은 성도의 삶이 있다고 보는지요?
당연히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인데, 물론 그런 증거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은 인간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고 말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 자체가 삶이기 때문에 그런 방법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성도라고 해도 인위적이고 자위적으로 터져 나오지 않나요?
그것은 자기 기분에 그러한 것이지, 정말로 인위적이고 자위적으로 나온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 말이다. 물론 그런 것이 있을 수는 있지만, 성도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처음부터 자기를 위한 삶이 없기에 말이다. 그러니 질문을 이렇게 해야 하는데, "창세기 1장에서 아담을 위한 삶이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당연히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제가 궁금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복음을 깨달았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뒤에 발생하는 것들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는데, 즉 자기가 하는 것은 복음적이고, 상대방은 비복음적으로 말입니다. 그런 것이 성도의 길은 아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는 않은데, 자기가 주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뿐이고 말이다. 그것을 창세기 2장으로 표현하자면, 성도의 목적은 생명나무를 증거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도대체 성경이 무엇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질문을 "이 사람이 그것을 알아요?" 라고 하면, 하나님이 만든 모든 환경은 다 날아가 버리고, 관심이 그 사람에게 집중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질문도 그렇고, 답변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철수도 있고, 영희도 있는데 말이다. 즉 "이 사람은 어때요?" 라는 것은 성경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저의 경우에, 저는 항상 복음밖에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기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하고 말입니다. 목사님도 저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제가 그렇게 항상 복음만 생각하고 입을 열어도 그런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제가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러한데,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의 개인적이 구원이 문제가 아니라, 즉 성경의 관심이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있는 책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바로 그것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런 것은 구원파에서 강조하는 것인데, 물론 인간은 누구나 다 그런 의구심이 있고 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구원은 우리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에서 일으킨 사건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 우리의 생각하는 방향자체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은 자기가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이 아니고, 또 가기 싫다고 안 가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래서 성도의 삶이 있어야 하는지, 없어야 하는지 헷깔리는 것 같아요?
본인이 생각하는 성도의 삶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구원이라는 것은 전혀 우리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즉 주님이 하신 일을 끌어당겨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혀 우리들의 착각에 불과하고,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말이다. 외부에서 일어난 바로 그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말이다.
* 질문 - 그것을 아는데도 왜 자꾸 그런 착각에 빠지나요?
마귀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닌데, 아무튼 본인의 그런 착각을 남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다 그런 과정을 겪는 것이고 말이다. 다들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 이제 공관복음서를 !!
집사님이 방금 한 질문이 오늘 강의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닌데, 오늘 공관복음을 이야기할 것인데, 방금 한 이야기들이 다 나온다는 것이다. 오늘은 어렵게 하지 않을 것이니 조금만 관심을 집중하면 되는데, 다들 피곤하지 싶은데 말이다.
십자가 사건이 공관복음서라고 할 수 있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뒷부분에 나오는데, 앞부분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십자가 사건이전에는 예수님과 사람들의 만남이 나오는데, 도대체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무슨 일이 오고가는지, 그것이 바로 공관복음서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기 이전에 말이다.
◈ 예수님은 욕쟁이 할배 ??
우리가 그 어떤 죄를 짓든지 간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난 다음의 이야기이고, 그 이전에 예수님과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느냐는 것이다. 거기서 놀랍게도 예수님은 '욕' 밖에 하지 않는데, 즉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이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관복음서 앞부분에서 예수님과 인간의 모든 관계는 "너희들이 내가 원하는 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천국이고 뭐고 다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를 한번 살펴보자.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 내용이 얼마나 잔인한가? 도대체 이렇게 냉혹하고 차가운 말씀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23절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라고 한 다음에 뭐라고 하셨는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에 대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 인간은, 그 누구도 반석 위에 집을 지을 수 없어 !!
그것은 바로 그 누구도 반석 위에 제대로 지을 수가 없고, 모두가 다 모래 위에 지은 집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씀하신 산상설교는 아무도 지킬 수 없는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반석과 모래 위의 집으로 멋있게(?) 마무리하신다는 것이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그리고 인간이 과연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낼 수 있는가? 그것을 빼겠다고 하는 자들이 바로 절에 있는 중들인데, 그들이 과연 자기 눈에 박혀있는 들보를 빼었는가? 그런 들보를 빼겠다고 하는 그 자체가 곧 또 하나의 들보인데 말이다.
* 질문 -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능력에만 관심이 있고, 자기 구원에는 관심이 없었지 싶은데, 그러니 "내가 구원이 됩니까?" 라고 하는 질문이 참으로 시건방진 질문이라는 말이지요?
◈ 예수님, 제가 어떻게 구원이 좀 될까요?
당연히 건방진데, 제가 여기서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뱀이 배가 고파서 자기 꼬리를 먹는데, 그러면 그 뱀은 어떻게 될까요?" 라는 것인데, 누가 답변을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오른손이 범죄를 했다고 해서 찍어서 내버렸다면, 그러면 오른손이 없는데, 그러면 나머지 왼손을 가지고 죄를 짓지 않는가? 도박을 끊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자기 손가락을 자르는 사람도 있기는 한데 말이다.
◈ 손과 발을 다 잘라도 안 돼 !!
그렇게 해서 손과 발을 다 자른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은 죄에서 해방되는가? 그만 뇌를 다쳐서 손과 발을 꼼짝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면 그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가? 그런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러면 무엇을 잘라야 하는가? 머리를 잘라야 하는가?
지금 예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죽이는 것이 너무나 심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뭐라고 하는가? "주여,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것은 마치 옛날에 망나니가 칼을 들고 목을 치려고 하는데, 그런데 죄인이 그 망나니에게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어요?" 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려고 오셨는데, 바로 그것은 새삼스럽게 무슨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인간이 처음부터 죽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셔서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신다는 것이다.
◈ 아하, 나는 안 되는구나 !!
다시 말해서, "왜 나는 이 땅에 태어나서 지옥에 가야 되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점점 자라면서, "아하, 이래서 지옥에 가는구나", "아하, 이래서 산상설교를 지킬 수가 없구나" 라고 말이다. 만약에 그 아이가 16살에 산상설교를 처음 들었다고 하면, 그런데 9살 때 그것을 어긴 것은 어떻게 해결을 하겠는가? 이미 다 지나갔는데 말이다. 설령 타임머신을 타고 간다고 해도, 9살의 그놈이나, 16살의 그놈이나 지키지 못하는 것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맹세하지 마라" 라고 했는데, 그러나 인간은 아침에 눈을 뜨고 하는 짓이 맹세가 아닌가? "술을 이제 끊을 거야. 담배를 그만 피워야지. 다시는 야동을 안 볼게" 라고 하지만, 돌아서면 땡기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컴퓨터에서 지웠다가 다시 다운을 받았다가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인터넷의 '양무리 마을'에서 말하는 것도, 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지요?
양무리 마을은 무엇인고 하니, 마치 아이가 남의 집 벽에 낙서를 하고 도망치는 것과 같은데, 그러니 '낙서하는 인간들' 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근호는 오줌싸게(?)" 라고 말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시기와 분쟁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곧 육신의 열매라는 것이다. 자기들은 아무리 아이디를 '홀리조이' 라고 해도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그런 시기와 분쟁은 누구나 다 있는 것이지요?
물론 누구나 다 있는데,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다. 또한 그런 모습은 항상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지난 설교시간에 무슨 예화를 들었는고 하니,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실화인데, 어느 집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잘 모시고 있는데, 매일같이 이부자리를 보살펴드리고, 또 정성을 다해서 식사도 차려드리고 말이다.
그런데 옆집에 어떤 며느리가 이사를 왔는고 하니, 시어머니와 남편을 위해서 밑반찬과 건강식품을 무려 천 가지나 준비하는 여자가 왔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천 가지의 반찬을 말이다. 이것이 TV에도 나오고 했는데, 그러면 기존의 그 착한 옆집 며느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 질문 - 그런 시기와 분쟁이 늘 나타나는가요?
우리 인간은 늘 나타나도록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타내고 말고 하는 것은 주님의 소관이지, 자기가 나타내고 싶다고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렇게 항상 잠재되어있는데, 다만 성령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그런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시기와 분쟁이 없어지는 게 아니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목사님의 말씀은, 자기 처지를 분명히 확인하는 방향에서 자유를 말씀하는 것이죠? 즉 자기가 죄인일 수밖에 없고, 주님의 공로만 드러내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 '자유' 란, 살던 동네가 바뀌었음을 !!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자유' 라는 것은, 옛날에 살던 동네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살던 동네가 바뀌었다는 말이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악마의 종이었던 옛날 동네의 모습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저 친구들은 그러한 자유를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목사님이 지난 수요일에 자유를 행글라이더를 타고 가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본인이 죄인임을 자복하고 깨닫는 차원으로 말입니다. 전혀 자기 능력에서는 그런 자유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 '행글라이더' 라는 비유가 적절한데, 우리가 행글라이더를 타고 가면, 그것은 바람에 의해서 목적지로 가는 것이지, 거기서 타고 있는 사람이 콧구멍을 후비든지, 아니면 귓구멍를 후비든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어차피 행글라이더는 바람을 타고 목적지를 향해서 날아가는 것이니 말이다. 바람을 타고 말이다.
◈ 성도는 예수님의 능력에 올라타고서 !!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능력을 타고 가고 있는데, 거기서 손톱을 깎고 발톱을 깎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런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을 가지고 왜 신경을 쓰냐는 말이다. 예수님이 다 알아서 자기의 능력으로 데리고 가는데 말이다. 이미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서 제대로 된 예수님의 바람을 타고 있는데 말이다.
물론 자기가 행글라이더를 타면서 "내가 이렇게 콧구멍을 후벼서 되겠나?" 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고, 그것은 하나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 그렇게 성격이 다르니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인간의 성격은 왜 다들 다른가요?
그것은 환경 때문에 그러한데, 사실은 다 같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환경에 따라서 성격이 바뀔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런 바뀐 성격은 너무나 많은 다양성이 있기 때문에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아시지 말이다.
* 질문 - 그런 면에서는 교육이 필요할 수도 있지 싶은데요?
그래도 교육이라는 것은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교육은 상대방에게 자극을 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니, 까불면 맞는다" 라고 말이다. 아무튼지 인간의 교육은 별 다른 의미가 없는데, 그때 그때마다 형벌을 내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교육이란, 상대방에게 자극을 주는 것에 불과해 !!
인간은 그 근본이 변화되지 않는데, 아무리 열심히 교육을 받아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변화되게 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두 알아서 하시는데, 그것을 우리는 믿으면 되고 말이다.
* 질문 - 물론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아는데, 그런데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들이 너무나 다양하니 말입니다. 그것은 왜 그렇지요?
그것은 재자 말하지만 각자의 환경이 다들 다르니 그러한데, 그렇다고 이런 환경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가 없고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가 다 선입관이 있는데, 이 선입관은 자기 역사와 전통에서 나오고 말이다. 그런 자기 역사가 누적이 되어서 선입관이 형성되는데, 그런데 학교 선생님들이 어떻게 그런 개인의 역사까지도 다 알겠느냐는 말이다. 3살 4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다.
어릴 때 부모가 이혼했다고 아이가 엉망이 되는가? 물론 연속극에는 그런 경우들이 나오지만, 사실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아이들을 양쪽에 가서 용돈을 두 배로 타서 쓴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것은 사람마다 모두가 다르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 선입관을 오랜 훈련을 통해서 획일화를 시킬 수는 없나요?
* 질문 - 그것은 히틀러나 김일성이가 이미 다 시도했던 교육방식인데, 물론 어릴 때는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먹혀들지만,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사랑' 이라는 감정이라든지, 그렇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면 과거의 그런 획일화된 선입관은 와장창 다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그렇게 망나니로 놀던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기의 그런 흔적들을 모두 지우고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상담심리' 하고 하는 것도 그러한 선입관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어쩔 수가 없겠네요?
상담심리는 커미션을 챙기기 위해서 일종의 구라를 치는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현대교육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랑' 인데, 인간이 그런 사랑을 하게 되면 아무리 난폭한 사람이라도 순한 양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이 선입관을 바꾸는 가장 좋은 요인은 사랑인가요?
물론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사랑이라고들 하는데, 하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아집이나 정복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동물적인 본성, 정욕 등이 응어리져 있다는 말이다.
◈ 이제 다시 진도를 !!
그건 그렇고, 이제 진도를 좀 나가보면, 공관복음서 앞부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이전의 행적들이 나와있는데, 그것이 인간들과 나눈 대화들인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즉 "너희들의 본질은 구원을 해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처음 태어날 때부터 천국과는 전혀 거리가 먼 존재이다" 라는 것을 낱낱이 들추어내는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오른쪽 눈이 보고 범죄를 하면 빼버려라. 그것이 너의 온 몸이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 라는 것은, 처음부터 아예 작정을 하고 "지옥은 너희들을 위해서 만들었다" 라고 하는 말씀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선포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다 아우르고 있다는 말이다.
(마 5: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 예수님의 기적은, 인간의 예상을 짓밟아 !!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도 우리 인간들이 예상한 것은 하지 않는데, 즉 우리가 전혀 상상지도 못한 기적을 베푸심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해서 기적을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예상이 무참히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의미인데, 즉 "아하, 예수님은 내 예상대로 해주시는 메시야가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말이다. 구원도 전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하시는데, 그래서 구원도 역시 기적이란 것이다.
* 질문 - 그런 기적이 다반사로 일어납니까?
물로 성도에게 그러한데,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이다. 성도에게 은혜가 아닌 것이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구체화가 되면 또 깨부수어 버리는데, 하지만 그렇게 부수어져도 인간이 만만치 않아서 또 뭔가를 만들게 되는데, 그러면 또 부수어 버리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행글라이더를 타게 되는데, 이미 구원이라는 바람을 타면서 말이다.
◈ 인간은 하루에 거짓말을 250번이나 ??
인간은 공상을 하루에 2500번 정도를 하는데(?), 실제로 누군가가 조사를 해보니 하루에 사람은 250번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조사했겠지만 말이다. 제 생각에는 250번을 더하지 싶은데, 하지만 공상은 이것보다도 10배는 더 한다는 것이다. 공상은 0.1초 사이에도 10번이나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공상은 자기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인가요?
그것이 아니라, 이미 선입관이 있기 때문에, 즉 자기 나름대로 온 몸으로 느껴온 정보와 거기에 대한 역사가 그러한 공상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과거가 말이다. 굳이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공상을 많이 하지 않으려고 하면 정보를 차단하면 안 됩니까?
사람이 공상을 많이 하지 않을 때는 당장 눈앞에 주어진 과제가 있을 때, 즉 "이 과장, 여기에 있는 이 서류를 오늘 중으로 모두 다 정리해" 라고 했을 때 말이다. 그렇게 자기에게 호되게 주어진 과업이 있을 때는 공상을 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작업이 모두 다 끝나고 나면, "오늘 어디서 한잔할까?" 라고 하면서 슬슬 공상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저 같으면 그런 술에는 취미가 없으니, "오늘은 너무 예쁜 마누라 생일인데 빠리바케트에 가서 케이크나 하나 사서 가야지" 라고 하는데, 물론 가게에 가보면 그만 문을 닫아서 허탕을 치지만 말이다.
◈ 아빠, 빵이 너무 맛있어요 !!
그런데 아이들의 경우에, 뭔가 아버지가 맛있는 빠리바케트 빵을 사가지고 올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 있는데 빵을 사서 오면, 사실상 먹으면 예상한 만큼 맛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도 않고, 오히려 시험을 조져서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있는데, 그런데 사가지고 오면 그것이 얼마나 맛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아이는 "아빠, 다음에 또 사오세요" 라고 하지만, 하지만 그것보다 더 고급스러운 빵을 사와도 다음에는 그런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항상 우리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을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성도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불신자들에게는 자기들의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고 말이다.
◈ 예수님은 기존 메시야관을 깨부수는 작업에 !!
지금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이전까지의 모든 일들은 이미 인간들이 예상하고 상상해놓은 하나님관과 메시야관에 대해서 주님은 깨부수는 작업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말인가? 십자가를 자기 전까지 계속해서 부수어 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공관복음서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계속해서 논쟁하고 부수고, 또 논쟁하고 부수고 하셨다는 말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입에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들이 튀어나오면서까지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의 "야, 이놈의 개새끼들아" 라고 하는 욕보다 더 심한 욕이 아니냐는 말이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야 한단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예수님은 지금도 그렇게 일을 하시나요?
◈ 예수님, 제 아버님이 그만 !!
물론 예수님은 지금도 이런 말씀으로 일을 하고 계시는데, 그것을 마태복음의 경우에 십자가 전까지 그 어느 말씀을 가지고 해도 인용해도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8장에서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때 제자 중에 하나가 "주여, 제가 가서 제 부친을 장사하게 해주세요" 라고 하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우리들의 반응은 어떠하겠는가? "예수님이 왜 저러시지? 아버지의 장례도 못 치르게 하고, 완전히 불효자식으로 만드는 것 아닌가?" 라고 하면서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잘 치러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효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데, 그것이 당연한 예상이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예상도 모조리 다 박살내고 만다는 것이다. 꼭 우리가 미리 생각한 것만 골라서 그렇게 부수어 버린다는 말이다.
(마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 질문 - 그런데 목사님, 구약성경의 십계명이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한 말씀과는 어떻게 되나요? 혹시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요?
◈ 참된 부모공경은, 예수님을 믿는 것 !!
부모님의 장례식을 잘 치르는 것이 부모공경이라고 누가 생각을 하는가? 아버지의 시신을 잘 거두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그것이 하나님이 생각하는 부모공경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예상이고,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예상을 무참히 짓밟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진짜 제대로 된 부모공경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우리는 또 다시 "아하, 부모공경은 그렇게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만 믿으면 되는구나" 라고 하면서 시어른 밥도 안 해주고 교회에 가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우리의 상상이고 말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모든 상상을 다 부수고 부모를 사랑하게 함으로서, 즉 예수님 쪽에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우리 부모를 우리가 사랑하도록 해놓고는, 바로 그 사랑을 두고서 부모공경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부모공경을 우리 행함으로 하겠다는 것을 상상으로 여겨서 그것을 부수어 버리고, 우리가 부모공경을 하기는 하는데,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함이 동원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부모공경을 하도록 할 때, 그 공로가 예수님에게만 돌아가는데, 그럴 때 비로소 십계명의 부모공경을 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 질문 - 목사님, 너무 복잡한 것 같은데요?
전혀 복잡하지 않는데, 만약에 집사님이 연초에 계획을 세우기를 "주님, 우리 학원에 많이도 말고 200명만 학원에 아이들이 오게 해주세요" 라고 했다면, 한 달에 약 천만원 정도만 수입이 들어오면 되겠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만 400명을 보내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상이 완전히 깨어지는데, 물론 초과 달성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바로 이것을 통해서 주님은 집사님이 미리 계획을 세운 그 200명이 탐심이었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사실은 숫자가 200명이든 400명이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탐심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버리면 탐심이고, 그것이 겨우 2명이라도 말이다. 그러니 주님이 2명을 주던 200명을 주던 그것에 감사하고 은혜로 여긴다면, 그것은 탐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 결국,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도록 !!
이러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 십자가 사건 이후의 사도바울이 말한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다" 라는 말씀이 생각나지 싶은데, 바로 예수님이 그것을 이야기하려고 십자가 이전의 우리의 상상들을 모두 부수는 직업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요?
지금 우리가 공관복음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장차 십자가 이후에 모든 것을 다 그렇게 하시는데, 하지만 십자가 이전까지는 기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다 부수어 버리기 위해서 우리들을 모든 것을 다 까밝히고 계신다는 것이다. 즉 "니 눈의 들보를 빼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도저히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없는 것만 골라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로 가라고 하는데, 인간이 좁은 길로 무슨 재주로 간다는 말인가? 우리 눈에는 좁은 길은 전혀 길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
만약에 저에게 성경말씀 가운데 지키기 제일 어려운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라는 대목을 고르지 싶은데, 그야말로 사람이 환장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돈이 있으면 그런 염려를 하겠는가? 어떻게 쓸까만 염려하면 되지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 돈이 있다가 한번 돈이 없어보라는 것이다. 이혼을 하지 않고 견디는 부부가 얼마나 있는지 말이다. 매일같이 빚 독촉에 시달려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사는 것인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말이다. 그야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 아하, 처음부터 나는 아니구나 !!
그러므로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 쪽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성경말씀 전체가 우리에게 "이제 무엇을 하라" 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처음부터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이제 성령으로 거듭났으니, 즉 새 생명을 얻었으니 새로운 삶을 살자. 그러니 좁은 길로 가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도 역시 상상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무슨 수로 새로운 삶을 산다는 말인가? 우리는 매일같이 모래 위에 집을 짓고, 또한 넓은 길로만 걸어가는 자들인데 말이다.
◈ 그냥, 돈 많은 사람에게 시집가세요 !!
제가 광주에서 강의를 하면서 뭐라고 했는데,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대목에서, 어느 젊은 아가씨에게 말하기를 "너무 고민하지 말고 돈 많은 사람에게 시집을 가세요"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심이니 말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기도를 하면 그렇게 하지는 않는데, 돈은 없어도 믿음이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믿음도 있고 돈도 많은 사람을 만나게 줄 것이라고 예상을 한다는 말이다. 즉 착한(?) 선택을 했으니, 돈도 보상을 해주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런 것을 그냥 두겠는가? 그러한 인간의 상상을 깨부수는 것이 주특기인데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그런 본성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해도 좀 그렇다 싶어서 숨기고 싶어도 도저히 되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막으면 저기서 튀어나오고, 저기를 막으면 또 다른 곳에서 터지고 말이다.
◈ 돈 많고, 젊고, 샤프하고, '나'만 사랑하는 남자 !!
요즘 사람들이 어떤 배우자를 원하는가? 일단은 돈이 많고, 젊고 샤프하고, 너무 늙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또 존경을 받을 만하면 좋고 말이다. 또한 친정 식구들에게까지 잘해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이고 말이다. 그런 남자가 다른 여자를 쳐다보지 않고 자기만 사랑해줄 때, 그것을 '빙고' 라고 하는데, 다른 더 좋은 조건이 있는가? 굳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남자라야 되는가?
* 질문 - 그러니 인간이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자기를 위한 것이네요?
그러니 그런 것이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데,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너 자신을 미워하라. 그것이 사는 길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저히 지키지 못할 말씀만을 골라서 하시는데, 그야말로 그런 것을 지적하는데는 족집게 도사라는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 족집게 도사는 부적을 팔아먹는 도둑놈들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하게 우리들의 죄를 드러내는 족집게 도사라는 말이다.
여기서 요한복음 7장 7절을 같이 보겠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라고 하시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기들을 악하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아마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예수님은 부정적인 분이다" 라고 하겠지만,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을 두고서 악하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 결국은, '선악과를 왜 따먹었는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종합해보면 "선악과를 왜 따먹었는가?" 라는 것인데, 왜 원래 하나님께서 만든 그 모습이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렇게 맨 날 자기밖에 모르고, 또 행복하게 해달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어겼으니 죽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도 살려고 하니 그것이 무슨 추태냐는 것이다.
* 질문 - 목사님, 사실 저는 선악과가 생긴 것도 모르겠고 맛도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요?
그러니 그것이 죄가 되는데, 자기는 보지도 못했고 맛도 못 보았다고 우기니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창세기 3장에서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인간들은 막무가내로 오리발을 내민다는 것이다.
방금 집사님이 참 멋있는(?) 표현을 했는데, "목사님, 조는 보지도 못했고 맛도 못 보았습니다" 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키우는데, 그것이 종말 때가지 계속해서 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따먹은 인간도 같이 키워가고 말이다.
◈ 집사님, 선악과 맛을 좀 보실래요?
그런데 그 선악과를 맛도 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지금 제가 가르쳐 드릴 테니 맛이라도 한번 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이 세상의 '선악체제' 라는 말이다. 선과 악으로 구성된, 즉 "이것이 선이고, 이것이 악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한다고 할 때,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틀린 일인가?" 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데,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가?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맛있게(?) 먹었기 때문에, 즉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증거라는 말이다.
우리가 만약에 붕어빵을 사서 먹었다면, 다음부터는 그런 빵을 먹으면 "이것이 그때 붕어빵보다 맛이 있을까? 없을까?" 라고 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우리 인간은 "이것이 선일까? 악일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나는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
그것은 깡패세계에서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그들도 "이것이 맞을까? 틀릴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자기가 법을 만드는데, 그런데 그렇게 법을 만들어놓고도 그것을 넘고 싶어서 환장을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인간은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라고 하는데, 즉 지금 자기가 있는 곳이 아닌, 저 건너편이 굉장히 궁금하다는 말이다.
옛날에 시골에 서커스단이 오면 꼭 아이들은 입구가 아닌 개구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천막으로 쳐놓았으니 그 안이 너무나 궁금하다는 것이다. 서커스도 보고 싶지만, 그 뒤에서 배우들이 옷을 갈아입는 것도 궁금하다는 말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잠언서 9장 17절에도 보면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물론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자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잠 9:17)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 선(線)은 넘어야 맛이 !!
인간이 그렇게 선을 넘는데서 즐거움을 맛보는데, 그 맛이 얼마나 짜릿한지 말이다. 220볼트의 전기 맛은 맛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을 넘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리는데, "나는 선을 넘지 않아서 착한 것은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이렇게 내 마음이 답답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이 그렇게 착하게 살아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그만 '결핍'을 느낀다는 것이다. 뭔가 아쉽고 모자람을 말이다. 그래서 기어이 그어진 선을 넘고야 마는데, 그래서 또 다시 다른 선을 긋고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담배를 하루에 한 갑 이상을 안 피우기로 했다면, 그래서 그것을 달력에다 표시를 하는데, 물론 처음에는 신이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그만 그것을 어기게 되면, 다시 법칙을 정하는데, 한 갑 반으로 말이다. 그 이상만 안 피우면 되는 것으로 룰을 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로 해도 마찬가지인데, 즉 점점 피우는 양을 줄여나가도 똑같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선악과를 먹어도 제대로 먹은 것이네요?
◈ 선과 악은 인간의 영원한 동반자 !!
그러니 인간은 선악과에 완벽하게 물이 들었는데, 그러니 사람이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결핍이 되고, 또한 아무리 악하게 살아도 결핍이 있다는 것이다. 착하게 살려고 해도 더욱 더 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또한 아무리 악을 저질러도 또 악이 저쪽에서 부른다는 것이다. "애야, 어서 이리 오너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착한 일을 해도 악한 것이 유혹하고, 또 악한 짓을 해도 선한 것이 자기 마음을 쿡쿡 찌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과 악은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함께 가는데, 영원한 동행이라고 할까? 아무런 그렇게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엄마, 이제 그만 울까?
어린아이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부모가 이야기하기 이전부터 이미 그것을 알아서 자기가 법을 만드는데, 너무 울었다 싶으면 "엄마, 그만 울까?" 라고 하면서, 자기가 알아서 그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알아서 조정하는데, 그것이 모두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선악과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는데, 마치 붕어빵을 틀에서 찍어내듯이 말이다.
다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이 선을 행하면 악이 부르고, 악을 행하면 선이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항상 '결핍'이 만들어지는데,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목말라 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무슨 드라큐라도 아닌데 말이다.
◈ 아, 목말라, 목말라, 목말라 !!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는데, 그 여인의 특징이 무엇인가?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르다는 것이다. 남자를 5명 정도나 알았으면 이제는 만족할 만한데, 그런데도 목이 말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6번째 남자를 사귀고 있는데,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는데, 물론 겉으로는 욕을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6명이 아니라 600명을 알아도 목이 마르고, 평생 남자 한 명만 알고 지내도 역시 목이 마르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러한 선(線)을 선과 악이라는 인식 때문에 선이 요청하고 악이 요청하는데, 그것을 아무리 자기 허벅지를 바늘로 찔러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인간은, 윤리적 마약 중독자 !!
하지만 한 번을 찌르면 두 번을 찔러야 하고, 또 두 번을 찌르면 세 번을 찔러야 하는데, 마치 마약을 맞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윤리적 마약 중독자(?)' 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 인간들이 바로 '성화론자' 이고 말이다. 그러니 점점 더 위선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서 우리에게 법을 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들로 하여금 "이 정도만 하면 선(善)이 아니겠는가?" 라고 여기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지상으로 투입이 된 분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 유대인들이 나름대로 무엇을 만들었는가? 일종의 '테두리'를 만들었는데, 즉 "여기 안에 들어오면 선이고 밖으로 나가면 악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그 테두리를 압박을 하는데, 그러니 결국 예수님이 만든 테두리에는 누구만 남는가? 예수님만 홀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혼자 의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외친 복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만 의인이고, 테두리밖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다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구약에서 노아홍수 때, 방주밖에는 홍수로 심판을 받아서 난리가 났지만, 그러나 안에는 심판이 없었던과 같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의가 있으면 복이고, 없으면 저주가 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폭을 아주 좁혀놓았는데, 그렇게 하니 예수님만이 의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죄인이라는 것이다.
◈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가는 것, 그것이 곧 기독교 !!
그런데 인간들은 무슨 짓을 하는가? 예수님이 설정한 그 선(線) 밖에서 서로 멱살을 쥐고 "누가 누가 더 착한가?" 라는 시합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를, 그리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자기 테두리 속에다 넣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생뚱맞은(?) 일이냐는 말이다. 바로 이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가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고 기독교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잊으면 안 되는데, 즉 이것이 예수님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심판주' 라는 것이다. 즉 심판주가 하는 것이 모두 심판의 기준이 되는데, 심판주가 맞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다 맞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너무나 좁다고 불평을 터트리면서 끙끙거릴지 몰라도, 하지만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이다. 심판주인 예수님은 바로 그 식으로만 심판을 하니 말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니 말이다.
◈ 예수님의 심판기준에 누가 부합하는가?
그러니 여기에 해당이 되지 않는 인간들은 다 벌을 받게 되는데,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도대체 그러한 주님의 기준에 누가 부합하겠는가? 그렇게 모두가 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만 하는데, 그런데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어떤 자가 등장하는가?
일단 산상설교는 여러분들이 다 안다고 치고, 다 알지요? 산상설교는 "이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다 지옥에 간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 말씀을 지킨 사람만이 천국에 가는데, 누가 다 지켰는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마태복음 8장의 문둥병자 경우에 !!
여기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문둥병자가 나오는데, 그는 자기 죄 값으로 문둥병에 걸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구원을 받는 것도 누구 덕분인고 하니, 오직 예수님 덕택이라는 말이다.
(마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 8: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마 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제가 처음에 강의를 할 때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이전의 내용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는데, 물론 요한복음도 그렇지만 말이다. 물론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조금 나오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십자가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십자가 이전에 있는데 말이다.
지금 마태복음 8장에서 문둥병자가 자기가 나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 물론 자기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 문둥병자도 태어나면서 선악체제를 가지고 있기에 당연히 죄인데, 그런데 그 문둥병자가 난데없이 나음을 입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 의를 문둥병자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이 문둥병자에게 의로움을 주니 !!
다시 말해서, 문둥병자가 의로운 게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의로운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의로움을, 즉 십자가의 능력을 베풀어주니까, 그 문둥병자가 나음을 입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바로 그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우리가 완벽한 죄인이 되어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완벽한 이루심이 우리에게 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힘으로 구원이 되면 안 되니 말이다. 이해가 됩니까? 저만 고함을 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데 말이다.
여기서 마태복음 8장 16절과 17절을 보겠는데, 제가 읽습니다.
(마 8: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 십자가 사건 이전이 이미 그 의미가 !!
여기 17절에 보면,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곧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사건 이전에 이미 십자가의 의미가 다 드러났는데,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것은 바로 그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한 게 아니라, 예수님 쪽에서 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지는 일이 일어날 때, 그 사람 쪽에서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문둥병자가 나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가 그 사람에게 담겼기 때문에, 그 사람에 죄에서 해방이 되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산상설교를 다 지켰는가?
산상설교를 지키는 제대로 것은 전혀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데, 우리는 때려죽여도 지키지 못하는 인간들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지나간 과거에 지은 죄를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설령 타임머신을 타고 가도 안 된다는 말이다.
◈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의(義)로만 !!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그 이루심의 의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셨기 때문에, 바로 그 의로 인해서 우리가 졸지에 의인이 되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졸지에 말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나무의 법칙인데, 그러니 예수님 속에는 선악과나무도 있고 생명나무도 있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선악체계도 알고 생명체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체계도 완벽하게 지키는데, 그래서 생명나무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의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후에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십자가 이후에도 가능하지만, 그러나 그 이전에도 이 십자가 사건을 미리 앞당겨서 믿게 되면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처럼 말이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예수님 이전 시대의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지금 마태복음 8장에서 문둥병자가 등장했는데, 그렇게 그가 문둥병자가 되었다는 것은 마땅히 자기 죄로 인해서 죽어야만 하는데, 그런데 졸지에 나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자기 의로 나은 것은 분명히 아닌데, 그런데 알고 보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의를 퍼주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의가 이 문둥병자에게 전달되니 그 문둥병자기 졸지에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이전의 일인데, 십자가 사건은 마태복음 27장에 가야 일어나고, 문둥병자 사건은 마태복음 8장이니 당연히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십자가 사건에 가면 그렇게 퍼주는 것을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태복음 7장 12절과 8장 17절을 한번 찾아보자.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산상설교를 지킬 사람은 누구밖에 없는가?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사랑을 실천하도록 시켜서 그것을 다 이루었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이 자기 의를 우리에게 대접해서, 죄밖에 없는 우리를 의인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께서 하신 두 가지 일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는 우리를 완전히 까밝혀서 우리를 완벽한 죄인이 되게 하신 것이고, 두 번째는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님이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이 두 가지 일을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만이, 이것을 두고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런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아하, 주님이 그런 일을 해내셨군요. 저에게 그런 일을 퍼부었군요" 라는 것을 믿는 자가 바로 천국의 백성이라는 말이다.
◈ 누가 유일한 의인들인가?
다시 말해서,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자기의 공로로만 우리를 구원했다고 하는 사실이 믿어질 때, 그러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의인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죄인으로 남아있는 자들이고 말이다.
물론 행위적으로 보면 우리는 의인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죄만 짓다가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관계로 보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우리는 의인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간단한가? 우리의 행위로 보면 평생 죄만 짓는 죄인이지만, 그러나 믿음의 관계로 보면 의인이라는 것이다.
◈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행위로만 !!
이러한 예수님과 관계를 두고서 '예수님의 행위' 라고 하는데, 인간의 행위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바로 그 예수님의 행위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행위는 죄이고, 예수님의 행위는 의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행위로 의인이 된다고 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행위로만 의인이 된다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지무지 싶지요?
그러니 찬양을 해도 죄고, 설교를 해도 죄고, 성경공부도 역시 죄고 말이다. 하지만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죄를 용서함을 받았기에, 그래서 찬양을 해도 의가 되고, 설교를 해도 의가 되고, 성경공부도 역시 의가 된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죄' 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 쪽에서 보면 죄이고, 인간 쪽에서 보면 의가 되나요?
인간 쪽에서 보아서 의가 되는 것은 아니고, 죄는 죄이고 의는 의라는 것이다. 단지 인간들이 그렇게 자기들의 죄를 의로 오해를 할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전혀 구원을 받지 못한 놈들인데, 물론 성화론자들이 여기에 해당되고 말이다.
* 질문 - 아까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율법을 온전하게 이루신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인데, 그리고 십자가 사건 이전에도 십자가의 의를 퍼주는 사건도 있고, 8장에 나오는 문둥병자의 경우에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사람이 "그러면 십자가 사건이 없이 예수님만으로도 구원이 되네" 라고 질문을 한다면, 뭐라고 답변을 해야하나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문둥병자와 같은 자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문둥병자가 병이 나았다는 것은, 그의 병이 나았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런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즉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어떤 사람이 병이 낫든지 말든지, 그러한 병이 낫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영적으로 눈을 떴다고 말할 수가 있는데, 바로 그러한 사람이 구원을 받은 자라는 말이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일단 마태복음 7장 7절과 8절을 보자.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 과연 누가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는가?
여기 7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라고 하는데, 과연 그 누가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가 있는가? 아무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라도 주님의 이러한 말씀을 도저히 지킬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씀을 지킨다고 하게 되면, 우리 인간은 "죄에서 의가 나온다" 라고 하는 모순에 빠져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분명히 우리는 완벽한 죄인인데, 그런데 이 말씀을 지키게 되면 죄인에서 그만 의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행위가 오게되면,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때로는 우리가 성령을 구하고 주님을 구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이다. 전혀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성령께서 하시면 우리의 입에서 "주여, 제가 주의 뜻대로 일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인이니 말이다. 그러니 이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습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하셨다는 말이다.
◈ 인간 행위는 죄, 예수님의 행위는 의 !!
그러니 우리 인간 행위로 하게 되면 모든 것이 죄이고, 예수님의 행위로 하게 되면 모든 것이 의가 되는데, 그런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우리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행위라는 말이다. 물론 그런 모습은 그때 그때 다르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구하는 것은 죄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언제나 자기 중심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열심히 구하고 지옥에 가고, 또 구하고 지옥에 가고, 또 구하고 지옥으로 가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그렇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만 예수님께서 친히 이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분의 공로가 우리에게 유입되어서,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찾지 않고, 두드리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 !!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 십자가 사건 이전의 모든 주님의 행적은 망치를 우리를 두드려 부수는 것인데, 즉 "너희들은 죄인이 맞잖아. 그래서 이 말씀 하나도 지키지 못하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순간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는고 하니, 분명히 죄인인데 예수님의 손길이 뻗어나서 구원받는 일들이 십자가 사건 이전에도 일어나더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인 이사야서에 보면, "여호와의 손길이 누구에게 뻗쳤는가?" 라는 말씀이 여러 군데에 걸쳐서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오직 주님께서 그렇게 해주셔야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즉 그러한 주님의 손길이 뻗어진 자들에게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심리상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실제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바로 그것인 줄 압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해도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 중에 죄인이고, 선과 악의 체계에 완전히 갇혀서 꼼짝도 못하는, 그것만 따지고 살아가는 정말로 불쌍한 존재들인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의를 베풀어주심으로 말미암아서, 죄를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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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아까 목사님이 십자가 사건 이전이라도 그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앞당겨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마태복음 8장의 문둥병자를 예로 들었는데, 그러면서 예수님이 그 자의 몸은 나았지만, 구원은 받지 않았다고 하셨는데요?
제 말은 문둥병자가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한 것이 아니라, 즉 문둥병자가 구원을 받았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문둥병자는 탤런트로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담당했다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과 그 의를 미리 보여주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었다고 해서 모두 다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닌데, 모든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는 역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8장의 문둥병자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순간에 있고 말이다.
* 질문 -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질문하면, 얼마 전에 "믿음 이후의 거듭남인가? 아니면 거듭남 이후의 믿음인가?" 라는 것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은 마치 "동전의 앞면이 먼저인가? 아니면 뒷면이 먼저인가?" 라는 것과 같은데, 왜냐하면 사실상 동전의 앞과 뒤는 인간이 정해놓은 것이니, 그러니 동전의 어느 것이 먼저냐는 것은 성경에서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설명할 때 믿음으로도 설명을 하고, 또한 거듭남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고개를 돌려서 동쪽으로 볼 수도 있고, 서쪽으로도 볼 수 있는데, 그러니 그런 순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 논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행함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강조하기 싶기에, 그래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 같아요? '양무리 마을' 이란 사이트에서 그런 논쟁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이 벽에 낙서하는 것을 가지고 너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데, "아하, 이것이 인간들이 놀이라는 모습이구나" 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 낙서하는 재미도 없으면 그들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그러니 너무 다그치지 말자는 것이다.
2008,11,10, 오후 10시 21분에 마침.
청주에 교회가 한 군데 있다고 연락이 왔는데, 마누라왈, 땡 !!
05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31 - 남성과 여성, 공관복음서2
05,04,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나님도 좀 봐주면 안 되나 ??
아마 질문내용을 녹음이 안 되었지 싶은데, 방금 집사님이 한 질문을 요약하면, 아들이 아버지가 세차하는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그만 어리고 미숙하니 실수로 윈도우 브러쉬를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가 아버지의 차를 흠집 내려고, 그런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아직 철이 없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기 때문에, 아버지도 아이를 벌을 주려고 하다가 그만 타이르고 용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경우에도 인간이 신이 아니니 실수도 하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니, 얼마든지 용서해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르지 않도록 교육을 시켜주고 타일러주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더욱 더 그렇게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집사님의 질문이 아니고, 그쪽에서 그렇게 질문을 한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 하지만, 과연 그 기준은 어디서?
물론 그러한 주장이 일리가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제가 주장하는 것은, 그렇게 나름대로 잘해보려고 하는 것이 선인데,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악이고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기준을 누가 정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인간 본인이 정했는데, 그렇게 본인이 정해놓고는 본인이 "잘하려고 하는데, 왜 그렇게 합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들이 자기들이 살아가는 그 삶의 영역 속에서, 그러한 가운데 자기가 풍물로, 또는 교육을 받은 것에서 여러 가지 기준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인간들 속에는 그만 타인의 욕망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욕망은 라캉의 표현이다?)
◈ 성경은 우리 인간의 삶의 현장, 그 자체를 공격 !!
그러나 성경은 어느 특정 개인을 두고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방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이러한 장(場)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그 전체를 공격함으로 말미암아서, 이것 말고 전혀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말씀인데, 그러니 이 성경은 어느 한 사람을 붙잡고서 멱살을 뒤흔드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즉 "지금 니가 살아온 터전을 뒤돌아 봐라. 그 터전이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가? 아닌가?" 라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고 생각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모든 것이 자기 선에서 마무리되기를 원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더욱 더 깊이 들어가서 그 배후까지 살펴보게 하는데,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는 그 기준조차도 문제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다시 한번 촉구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것이다.
◈ 사건을 통해서 구원의 의미가 !!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표현하자면, "사건을 통해서 구원의 의미가 나온다" 라고 하는데, 물론 사건은 만남 자체가 사건이니 수많은 사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건들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가 나오도록, 즉 자기 반성(?)을 촉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인간의 자기 배후를 생각하지 않으면 자기 정당화가 되고 마는데, 그래서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의 의는 생각하지 않고, 매일같이 "저도 이만하면 잘했지요?" 라고, 자기 의만 자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속에 자기 의가 있으면 불안해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지켜내야 하니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반에서 이번 시험에서 일등을 했다면, 그 다음 시험 때문에 자기는 그만 초조해지고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또 다시 일등을 해야 한다는 요구사항이 주위로부터 주어지게 되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꼴찌인 학생은, 아무리 불안하고 초조해도 그래도 일등을 단 한번이라도 해보는 것이 소원이겠지만 말이다.
만약에 어느 야구선수가 이번 시즌에서 타율을 3할을 쳤다고 하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3할 이상을 쳐야한다고 주위에서 그렇게 말들을 하니, 정작 본인은 얼마나 답답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슬럼프가 오고 말이다. 축구도 이렇게 4강에 들어놓으면, 다음 월드컵 감독이나 선수들은 엄청 힘들다는 것이다. 최소한 8강은 들어야 하니 말이다.
◈ 고맙게도, 처음부터 새로 다시 !!
그래서 주님이 참 고마운(?) 말씀을 하셨는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주겠다" 라고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기준 자체를 아예 처음부터 제로로, 즉 없는 것으로 쳐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처음부터 새로 다시 시작하자는 말이다. 즉 "아니, 너에게 그런 착한 면이 있다니?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구나" 라고 말이다. "너는 당연히 착해야 돼"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새롭게 무(無)에서 다시 출발하자는 것이다. 새롭게 말이다.
지금 교황이 까닥 까닥 죽어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교황이 부러울지도 모르겠는데, 자기가 죽는다고 전 세계에서 중계방송을 하고 난리를 피우니 말이다. 하지만 교황 자신은 참으로 피곤한데, 그냥 조용히 죽도록 내버려두면 되는데, 그렇게 마구 떠들어대니 죽고 싶어도 시끄러워서 죽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너무 '붕' 하고 뛰어주는 것도 좋지 않은데, 그냥 조용히 어느 강원도의 할머니처럼 주님의 품에 앉기는 것이 최고이지 말이다.
◈ 진주야, 이 엄마의 못다 한 꿈을 !!
인간들이 떠드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만든 환상 때문에 그러한데, 즉 자기가 미처 이루지 못한 욕망을 대신해서 이루어달라고, 그렇게 해서 떠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정작 본인은 참으로 힘든 노릇인데, 사실 집에 있는 아이들도 다 그런 부모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불철주야로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교재 '뒤에서 본 한국교회'를 살펴보겠는데, 지난 시간에 공관복음서를 했는데, 그 내용을 잠시 정리하면,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 어떤 인간도 이 성경말씀의 단 하나의 구절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키라고 하는 목사들이 있다면, 물론 사기꾼으로 보면 되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들은 전혀 지키지 못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지키지 못하는 말씀을 주셨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어떤 점에서 그렇게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못난 놈인지를 깨우치라고 주셨다는 것이다. 즉 "니 자신을 알렸다" 라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초등학생에게 수학의 미분적분 시험을 치는 것과도 똑 같은데, 그러니 아이들은 사실상 그 질문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것조차도 몰라서 헤매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너는 초등학생이지, 적어도 대학생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 '나'도 하나님이 되고 싶어 !!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기만 지킬 수 있는 이 무시무시한 법을 왜 우리 인간들에게 주었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아, 너는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제 말이 맞지요? 그런데 구약을 보면 인간이 무엇이 되고 싶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그만 선악과를 따먹고 쫓겨났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말씀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기본정신은 무엇인고 하니까, 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신이다" 라는 것인데, 물론 신이 아닌데 선악과를 먹었기에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만 신이 아니라 자기도 신이라는 것이다.
◈ 샤르트르 - 자유가 인간을 더 무겁게 한다 !!
이것을 좀 더 풀이하자면,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가 말한 '자유' 인데, 즉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음으로서, 그 자유가 인간을 더 무겁게 한다" 라고 주장했다는 말이다. 좀 어려운가요?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이전까지 인유를 찾아서 목숨을 걸었는데, 그래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샤르트르는 인간의 실존을 연구하면서 밝혀낸 것이,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은, 즉 그렇게 인간이 뭔가를 선택해야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무거운 짐이더라는 것이다.
◈ 김 이장, 지금부터 6개월 내에 새 프로젝트를 !!
촌사람들에게 그런 경향들이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즉 남들이 자기에게 뭔가를 시키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하라고 하면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회사의 기획팀장을 시켜서, "김 이장, 지금부터 새로운 프로젝트를 짜보세요. 그래서 6개월 내에 실적을 보고하세요" 라고 하면, 그만 멀뚱멀뚱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시켜만 주세요. 잘 할게요" 라는 식인데 말이다.
하지만 회사가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지금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이 연초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연구해서 실적을 가지고 와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회사의 수익을 위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수익이 나는 일을 한번 제대로 잘 해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사도 돈을 벌어야 하니 말이다. 즉 '돈 놓고 돈 먹기' 라는 것이다. 월급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수익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월급을 나누어주던지 말던지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멀뚱멀뚱한(?) 시골사람을 팀장을 시킬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신입사원들은 시키는 데로만 하면 되는데, 은행에서 창구에 있는 신입 여직원에게 "미스 김, 프로젝트를 하나 짜오세요"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입출금이 모두 마감이 되고 정리가 되었으면 어서 퇴근해" 라고 하지 말이다.
◈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
아무튼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게 되면 그 자유가 부담이 되는데, 그래서 시키는 데로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그렇게 해놓고는 탓은 전부가 남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인데, 누군가가 자기에게 시키는 것을 원하면서도, 하지만 책임은 피하려고 하고 말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것을 성적(性的)으로 표현해서 '매조키스트' 라고 하는데, 즉 얻어맞는데 쾌감을 느끼는 것이 인간인데, 또 그와는 반대로 때리면서 쾌감을 얻는 '새디스트'도 있고 말이다. 구스타브 융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나누면 안 되고, 남성형과 여성형으로 나누어야 제대로 본다는 것이다.
◈ 현대의학은, 남성은 여성에게서 !!
현대에 들어와서 여자들이 사회에 진출해서 남자들이 놀란 것이 있는데, 여자들은 당연히 '여자' 라는 범주를 만들어놓고, 즉 "여자는 그럴 것이다" 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남자보다 더 센 여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고, 또한 남자들 중에서 여자보다 더 약한 남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놀랐다는 것이다.
현대과학에서 주장하기를, 남성 호르몬을 '안드로겐' 이라고 하고, 여성 호르몬을 '에스트로겐'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원래는 여성인데, 난자에 정자가 결합을 하면서, 그때부터 남성으로 분리가 된다는 것이다. 즉 처음에는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고학 계에서도 최초의 인간은 여성으로 보는데, 즉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고 해서 키가 150정도가 되는 여자가 최초의 인류라는 말이다. 이것을 유명한 고고학자 '니케(?)' 라는 사람이 발견을 했는데, 그렇게 여성부터 시작해서, 거기에서 분화가 되어서 남성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인간의 세포에 있는 미토콘드리아를 조사해보면, 그 안에 있는 DNA는 핵 속에 있는 DNA와 달라서 그 계열이 모친의 것으로, 그렇게 계통을 밟아나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미토콘드리아 안에 있는 DNA는 복제가 되니, 그것을 조사해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 그런데, 성경은 남자에게서 여자가 !!
그런데 성경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남자가 먼저 태어나고 그 다음에 여자가 남자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과학이 발달하기 이전까지는 그 성경말씀이 맞다고 믿었는데, 그런데 현대과학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여자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남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 그런 남성과 여성의 호르몬이 모두 다 끊어지고 나면 남자나 여자가 서로 얼굴 모양이 비슷해지는데, 그러니 결국은 이 뇌하수체에서 만들어지는 호르몬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호르몬을 바꾸면 남자도 여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리수의 경우에도, 그렇게 여성 호르몬 주사를 맞으니 피부가 탱탱해지고 여자의 성징들이 뚜렷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의 누드사진을 보면 남자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ㅋㅋ). 분명히 염색체는 여성의 'YY'가 아닌, 남성의 'XY'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우리는 교과서에 나오는 그런 인류고고학의 주장들을 인정해야 합니까?
물론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북경원인 등등, 그렇게 해서 200만년 전부터 나오다가 인간 비슷하게 생긴 것이 50만년 전부터 네안데르탈인으로 해서 나오고, 그리고 5만년 전부터는 크로마뇽인이라고 해서 비로소 인간으로 봐준다는 것이다. 즉 인간으로 보는 것이 크로마뇽인의 5만년 이전부터라는 말이다.
◈ 잠시 고고학 특강을 !!
5만년 이전에 있던 것들을 '원인류' 라고 해서, 인간과 본질이 비슷한 동물들이고 말이다. 그것을 인간으로 보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분 부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불을 사용한다든지, 매장을 한다든지, 또한 도구를 사용한다든지 말이다. 이것을 다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중에서 어느 한가지만 사용하더라는 것이다.
이론 유인원(類人猿)은, 말 그대로 인간과 비슷하다는 것인데, 고고학에서는 이들은 인간으로는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로마뇽인의 5만년 그 이후부터 인간이고 말이다. 인간 그 이전에 있던 어떤 괴물들인데, 그들은 인간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유물을 통해서 흔적이 발견되는데, 그들의 유적지 옆에 곡식을 태운 흔적이 있다든지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200만년 전 쥬라기 시대에 공룡이 있었는데, 이러한 공룡의 화석이 5만년 그 이후의 크로마뇽인의 화석이 같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도저히 자기들의 주장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이 발견되면 안 되는데 말이다.
◈ 노아홍수 사건으로 와장창 !!
그러니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노아홍수 때 이러한 인간과 유사한 괴물들이 공룡과 함께 다 쓸어 담겨서 화석이 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노아홍수 때 모두가 땅 속에 파묻혔다고는 하는 것이 오히려 맞는 주장이 아니냐는 것이다.
제가 쓴 '과학의 정체' 라는 책에 보면, 보통 과학자들이 우주의 역사를 200억 년으로, 그리고 지구의 역사를 50억 년으로 보았는데, 또 인간은 200만년 정도로 보고 말이다. 하지만 그 책에 보면, 우주의 기원을 오랜 기간으로 잡는데 대해서, 그 근거가 희박하다고 거기에 대한 반박을 무려 32가지나 실어놓았다는 것이다. 즉 그 책의 주장이, 지구역사가 의외로 그렇게 긴 기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인간들은 왜 그렇게 긴 기간으로 만들어 놓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거짓을 말입니다.
과학이 무엇인고 하니, 현재에 통하는 법칙을, 그 기본이 물리적 법칙인데, 그것이 이러한 역사 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워놓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가설(假設)' 이라는 것은 진짜와 가짜를 모두 포함하는 것인데, 달리 다른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으니, 달리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탄소동위원소법칙은 오류가 없나요?
그런데 그 현재의 법칙이 무엇인고 하니, '탄소동위원소법칙' 이라고 해서, '탄소(C)' 라는 물질의 반감기를 사용해서, 그것이 우주 속에 남아있는 것과 지금의 것이 차이가 나면 그 반감기를 가지고 적용시키는 것인데, 물론 현재는 그 이론이 맞다는 것이다.
그것을 고고학의 유물에도 적용시켜서, 그 유물 속에 있는 탄소의 반감기를 계산해서, "아하, 탄소가 이 정도가 남아있으니 몇 년이다" 라고 해서, 그렇게 유물의 연대를 추적해서 측정을 한다는 말이다. 요즘은 이 탄소 말고도 다른 것을 가지고도 하는데, 니켈도 있고, 아무튼 10여가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가설이 1000년 정도는 정확하게 맞는데, 그런데 그보다 더 오랜 된 것은 맞을 확률이 엄청 떨어진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고 하니, 1000년보다도 더 오래된 1500년 정도의 것이라고 해도 그 정도는 다른 고고학적 증거물로 연대를 알 수 있는데, 역사책을 통해서든지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것이 '탄소동위원소법칙'과는 맞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그 기간이 1000년 정도 아래의 것은 역사적인 문헌이라든지 다른 증거와 맞추어보면 제대로 모두들 맞아떨어지는데, 그런데 그 1000년 이상의 것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기간의 오차가 계속해서 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그것이 맞지 않는 줄 알면서도 다른 대안이 없으니, 그냥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이 그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없는 타임머신을 타고 갈 수도 없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그냥 모른다고 넘어가면 되지 않나요?
과학자들이 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이 자기들의 밥벌이가 되니, 자기들의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의 행동에는 반드시 그 밑에 돈이 있는데, 물론 겉으로는 진리가 어떻고 하지만 말이다.
* 질문 - 그렇다면 그 기간이 몇 억년이 되면 오류가 엄청날 텐데, 그래도 그런 주장을 하나요? 무슨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렇게 장난치는 여분의 자리가 많아야지 연구비를 타낼 수 있는 핑계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연구를 수행하는 전문인력을 양성하려면 십 수년이 걸리는데, 심지어 실험실의 비커 하나라도 흔들려고 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전문가가 아니라 거짓말 집단소가 아닙니까?
그런 것은 아니고, 하나씩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 가는데, 이것이 맞으면 그 다음 단계로, 또 그 다음 단계로 말이다. 그리고 '가설' 이라는 것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는 그것이 맞는데, 그런데 과거에는 아무도 그렇게 가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순신 장군의 팬티가 무슨 색깔인지, 그것을 연구해서 얼마든지 연구비를 타낼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서 "예, 빨강색입니다" 라고 결론을 내고는 자기는 그 돈으로 놀러가 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연구해서 "아닙니다. 노랑색입니다" 라고 해서 또 연구비를 타내면 되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분야는 없는데서 새로운 창조를 해야 돈이 된다는 것이다.
◈ '나'를 건드리지 말라 !!
지금까지는 상식적으로 아시라고 말한 것이고, 아무튼 창세기를 보면 남자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쫓겨났는데, 그 추방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신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신만이 신이 되는 것을 거부했는데, 즉 자기도 신이 한번 되어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인데, 여기서 건드린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심판을 의미하는데, 즉 "나를 심판하지 말라" 라는 것이다.
◈ 프로이트는 말하기를 !!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그것이 아니라,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성장과정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어린아이들 속에는 '이드' 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에고' 라는 것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잠재되어 있던 초자아가 점점 크면서 '에고'에 합류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드' 라는 것은, 그야말로 동물적인 욕구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을 '리비도' 라고 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기 종족의 번식을 위한 성욕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의 DNA 자체에도 욕망이 있고 말이다.
우리는 보통 인간이 DNA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는데, 그런데 챨스 도킨스에 의하면 DNA가 만들어낸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DNA가 오히려 인간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DNA의 본능이 바로 복제인데, 일종의 암세포라고 보면 되는데, 그것은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불치병으로 여기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암세포는 그야말로 왕성한 창조력과 번식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의 세포는 과거에 암세포였다 ??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인간의 세포는 과거에는 암세포였다고 주장을 했는데, 그런데 길들여진 암세포는 그만 온순한 세포가 되어버렸고 말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못된 세포 하나가 다시 발작을 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온 몸에 퍼져서 암이 번지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학급에 못된 놈이 하나 있어서 다른 아이들을 물들이는 것과도 같은데, 그러면 다른 아이들이 그것을 견제하면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도 평소에 눌려있던 그런 것이 있었기에, 그만 그것이 부럽다는 것이다. "나는 어머님 말씀도 잘 듣고 착해야 돼" 라고 하다가 말이다. 그렇게 되면 학급 분위기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을 '집단암시', 혹은 '집단최면' 이라고 하는데, 즉 선이 악을 감당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는 사람들이 악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인간에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시바(?), 나도 신나게 하고 싶은데, 그것을 니가 먼저 스타트를 끊는구나. 물론 나도 동참할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도 엄마가 와서 "근호야, 니 뭐하노?" 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 '이드'는 제거가 되지 않고 평생을 함께 가는데, "AC, 기회만 한번 와바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초자아인 양심은, 이 양심을 라캉은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건 양심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라고 했는데, 즉 "너는 이렇게 되어야 훌륭한 인간이야" 라고 세뇌를 시킨다는 것이다.
◈ 김정일과 욘사마 !!
북한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어떤 세뇌교육을 받는고 하니, "김일성 수령님이 시키는 데로 해야 돼" 라고 말이다. 그래서 김일성이 죽었을 때 대성통곡을 한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말이다. 그리고 김정일이 방문을 하면 감격해서 그야말로 기절을 하는데, 욘사마(?)의 인기는 비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아줌마는 김정일과 사진을 찍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자기 아이가 자는 바람에 찍지를 못했는데,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후회' 라고 바꾸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미친 집단이 지구상에는 없는데, 그 어떤 종교단체보다도 더하다는 말이다.
◈ 김정일은 욕망의 분출구 !!
그래서 정신 심리학자들은 북한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 북한 인민들은 자기들의 욕구를 분출할 길이 없으니, 모든 것을 영웅 김정일에게 맞춘다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욕구를 분출할 길이 없으니 말이다. 우리나라는 프로야구나 프로축구도 있고, 영화관도 있고, 그것이 양에 차지 않으면 인터넷에는 야동도 있고, 또 나이트클럽 '카네기'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그런 것을 다 자본주의의 암적 요소라고 해도 다 통제를 해버렸는데, 그런 것은 가진 자들이 즐기는 것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도구라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들의 욕망을 풀 곳은 김정일밖에 없는데, 그래서 김정일을 보면 흥분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야말로 난리를 피운다는 말이다.
그러한 욕망을 충족할 때, 그것이 '에고(자아)' 인데, 그것이 부각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누구인지 분명해진다는 말이다. 그 순간에 자아는 절대자아가 되는데, 즉 '신'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김정일과 사진을 찍었다면, 그것은 김정일이 자기를 알아준다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김정일도 알아주는 존재이니 말이다.
◈ '신' 이란, 욕망이 충족된 상태 !!
그렇게 절대자아가, 즉 신이 되는데, 그렇게 신이 된다는 것은 모든 욕망이 최고조에 달한 때이고, 즉 모든 욕망이 충족된 상태라는 것이다. 바케쓰에 물에 넘치는 순간인데, 바로 그렇게 짜릿한 순간에는 그야말로 '뽕'하고 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절대자유를 느끼고, 그렇게 절대자유를 느끼면서 절대 신을 느끼고, 또 그렇게 절대 신을 느끼니,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투박한 서민들이 집에 올 때 소주 한잔을 걸치는데, 먼지가 날리는 힘든 곳에 일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씻어낸다고 하면서 돼지비개에 소주 한잔을 하고 말이다. 그렇게 술에 취하면 집에 와서 아이들과 마누라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워놓고는 새벽 2시까지 잔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순전히 자기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어릴 때 어떻고 저떻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알아 달라는 소리라는 말이다.
◈ 쉽게 말해서, 인간은 개 !!
그러니 직장에서 상사에게 그렇게 당하다가 술만 들어가면, 술이 바로 마약인데, 왜냐하면 중독성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한 사람은 일단 술만 들어가면 대뇌피질의 작용이 중지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서 시상하부가 발달하는데, 이 시상하부는 진화론자들에 의하면 파충류가 발달한 것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그냥 인간은 개라는 말이다.
여기서 대뇌피질은 이성적인 것, 즉 판단력과 윤리 도덕적인 부분인데, 그런데 술을 마시면 이 부분이 연결하고 있는 뉴런의 시놉스(신경?)이 끊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변형계(?)에서 멈추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개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전봇대만 보이면 오줌을 누게 되고, 물론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양심적인 가책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마누라가 밥상을 차려와도 발로 차버리고, 잠자는 아이를 깨워서 괴롭히고 말이다. 그리고는 아침에 일어나서는 전혀 모른다고 발뺌을 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그것이 '이드' 지만, 현대생물학에서는 변형계가 발달한 대뇌피질이 끊어진 상태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인간이 아침에 일어나면 "마누라, 어제 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목이 왜 이렇게 뻐근하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왜 그런 현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나요?
이 사회에 나가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는데, 그런데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만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그 순간만은 신이 되는데, 그러니 술을 마실 수밖에 없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그렇게 되면 술로 해소할 수 있는 것을 다른 것으로 해소하게 되는데, 경마나 경륜, 그리고 도박으로 할 수도 있고, 물론 건전하게(?) 등산이나 낚시나 바둑 등으로도 가능하고 말이다.
* 질문 - 혹시 목사님은 이런 강의로 그런 것이 풀어지나요?
물론 강의로 푼다고 하면 좀 곤란하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즉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굳이 푼다고 하자면, 그렇게 푼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다면 술과 담배도 전혀 하지를 않고, 취미생활도 별로 관심이 없고, 성경말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요?
인간의 욕망이 변형되면, 그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또 환경운동과 같은 NGO 활동을 통해서 푸는 사람도 있고 말이다. 물론 정치를 통해서 푸는 인간도 그렇고 말이다. 방금 질문한 것을 헤겔은 아주 간단히 말했는데, 두 글자로 '노동' 이라고 말이다.
◈ 사람은 할 일이 없어서 농사를 짓는다 !!
그래서 제가 "사람은 할 일이 없어서 농사를 짓는다" 라고 했는데, 물론 농사를 짓는 사람이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할머니들이 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텃밭에서 일을 하는가? 그런 일거리도 안 되는데 말이다. 집에 그냥 있으면 아프다는 것이다. 어디로 놀러 가는 것도 가끔씩 가야 재미가 있지, 매일같이 가면 지겹다는 말이다.
* 질문 - 목사님은 지금까지 술을 마시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데 술을 마셔도 조용히 먹고 집에 가서 술 주정도 하지 않고 그냥 자는 사람도 있잖아요?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모습이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 것인데, 그 사람은 술 주정이 그렇게 자는 것이란 말이다. 꼭 누구에게 피해를 준다고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제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다보니 그런 것이고 말이다.
프로이트는 사람들의 이런 술 주정에 대해서, 그것은 인간의 상흔, 즉 마음속에 있는 과거의 상처라고 했는데, 즉 그런 상처의 정도에 따라서 술 주정이 조금 순한 사람도 있고 심한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술만 취하면 자기 첫사랑을 이야기하는데, 마누라가 옆에 있던 없던 간에 말이다. 왜 그런가? 자기 첫 사랑에 대한 아픈 추억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상흔(傷痕), 즉 과거의 상처는 주로 어릴 때 가족들에게 받는다고 했는데, 아버지로부터의 언어적이든 물리적이든, 그런 폭력과 같은 것이 말이다. 또한 지나친 학대나 괴로힘을 당하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부모들의 지나친 싸움 등이 상처가 되기도 하고 말이다.
* 질문 - 목사님께서는 사람이 술을 먹는 이유가 그 당시에 신이 되고 싶어서 그렇다고 하셨는데,
절대자아로서 자아 폐쇄적이고, 또한 취해서 자게 되면 그 자체가 평화(?)이니, "신이다, 아니다" 라는 그 자체를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신이 되고 싶다" 라고 하는 것은, 신이 아직 되지 않았으니 그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안락사(?)' 라고 할까요?
* 질문 - 그것이 욕망의 충족상태인가요?
물론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데, 잠이 오면 자기 편하게 그냥 자면 되고 말이다. 가족들이 불편하든 말든, 그것은 자기에는 전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행동이 신이 되려고 하는 일종의 과정이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술을 마시면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나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것은 자기의 상흔 때문에 그러한데, 과거에 받은 상처가 심하면 많이 괴로워하고, 상처가 작으면 작게 괴로워하고 말이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가 다 자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튼 주어지는 것이 평화라는 말이다.
◈ 이제 다시 진도를 !!
다시 진도를 나가겠는데, 그렇게 해서 인간이 신이 되려고 했는데, 하지만 낙원에서 추방된 상태이기 때문에 어찌되었던 간에 자기 힘으로 스스로 살아야하는 과제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에덴동산의 특징이 "그냥 주시는 데로 받는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에덴동산에는 인간의 노동이 없는데, 즉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에덴동산을 채집시대로 이야기하는데, 수렵시대 이전의 단계인 채집시대라는 것이다. 그냥 열매를 채집해서, 즉 따서 먹으면 되는 시대라는 말이다. 이에 반해서 수렵은 찾아다녀야만 하는데, 채집은 그냥 주어지는 것을 따서 먹으면 된다는 말이다.
* 질문 - 목사님은 방금 에덴동산에는 인간의 노동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에덴동산을 관리하는 것도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헤겔에 의하면 노동이라는 것은, 자아가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을 두고 노동이라고 했는데, "아하, 내가 이 정도까지 되는구나" 라고 자기를 확인하는 것을 두고 말이다. 그래서 배관공이 배관을 잘하면 "역시 나는 배관공으로 왔다구나"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질문 -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할 일이 있다는 차원에서 노동이라고 할 수도 있나요?
에덴동산에서는 할 일이 없는데, 왜냐하면 만약에 에덴동산에서 할 일이 있다고 하면 천국에 가서도 역시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국에서 차등이 생기게 되는데, 즉 누가 일을 잘하고 못하는지 구별이 되니 말이다. 즉 같은 과제가 주어지면 반드시 등급이 생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 자기 반에 찰흙을 주면서 얼룩말을 만들라고 같은 과제를 내게 되면, 반드시 잘 만든 학생이 있고 그렇지 못한 학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에도 엘리트반이 있고 열등반이 있다는 말인가? 학교에서도 그러한 반을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마음의 상처를 주었는가? 아마 공부를 못하는 학생 같으면 그런 천국을 천국으로 여기지 않지 싶은데 말이다.
물론 '일'의 개념을 넓혀서, 인간이 움직이는 것조차도 일로 보면 그렇겠지만, 사실은 "일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의 목적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무엇 때문에 일을 했느냐는 말이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왔을 때는 무엇 때문에 나왔는가? 자기 힘으로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형벌로 보는 것이 창세기 3장이고 말이다.
◈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지 !!
그러므로 인간은 그 자체가 이미 저주받은 존재인데, 왜 저주를 받았는가? 그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이 에덴동산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만약 부잣집에서 그냥 호위호식을 하면서 자란 놈 같으면 이 세상이 좋다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달동네에서 매일같이 힘들게 자란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대한 응어리가 지게 되는데, 그래서 이를 악물고서 "나도 돈을 벌어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모은 돈을 사기를 당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피해자가 되는데, 하지만 피해자는 반드시 가해자로 돌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너도 한번 당해봐라" 라고 하는데, 즉 사회 전반에 대한 알 수 없는 복수심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몸이 아픈 사람은 건강한 사람에 대한 복수심도 있고 말이다.
◈ 이제 본론인 공관복음서를 !!
그러니 이것은 결국 인간은 저주받은 몸이라는 것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나는 저주받은 몸이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여기에 집어넣으면, 즉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을 내놓아라" 라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겉옷을 빼앗아 가면 속옷까지 내주어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또 "누가 돈을 꾸려고 하면 그저 주어라" 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우리 인간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우리 인간을 너무나도 잘 아시면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우리 인간은 그것을 할 수 없어야 하는데, 만약에 그것을 우리가 해낸다면 주님의 십자가가 그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왜 그런 황당한(?) 말씀을 !!
아무튼 이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그러한 것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그런 것을 지옥에 갈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 인간들이 도저히 지키지 못할 말씀만 하시는데,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본래적인 위치가 곧 저주를 받아서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가? 그것은 너무 위장을 잘하기 때문인데, 우리가 마귀에게 제대로 배운 것 중에 하나가 철저하게 자기를 기만하는 수법인데, 즉 "나는 착하다, 교회에 다닌다, 술과 담배를 끊었다, 여자를 끊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그래서 교회에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자기를 기만하는 노래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차라리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복음적이라는 것이다.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사랑타령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니가 나를 사랑해주어야, 나도 너를 사랑해줄게" 라는 것인데, 즉 "당신이 나를 사랑해주면 훌륭한 사람이야. 그렇지 않으면 인간도 아니야" 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왜 그렇게 하는고 하니, 이 세상의 모든 기준이 바로 자기 사랑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이기주의적인 모습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그런 노래를 부르면 얼마나 감동이 오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서 있는 사람이니 앉아 있는 사람이나 다같이 눈물을 줄줄 흘리는데, 보통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을 세워놓고는 그런 노래를 부르는데, 소위 '축복송' 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 술집 대신에 교회를 !!
그런 것이 전부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빙자해서 절대신인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인데, 그러니 술집에 가는 대신에 교회에 간다는 말이다. 술집에 가면 돈도 많이 들고 같은 술꾼들이 노래를 불러주지만, 그러나 교회에 가면 점잖은 목사님과 예쁜 성가대원들이 그렇게 자기를 위해서 정성껏 노래를 불러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어떻게 되는가? 순간적이나마 자기의 욕망이 달성되고, 또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간다고 하니 그 무서운 사후의 세계도 보장이 되고,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실상이라는 말이다.
◈ 예수님왈, '니 자신을 알렸다' !!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우리 인간들이 지키기 불가능한 말씀을 들이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자리는 저주의 자리가 합당하다고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의 택한 백성은 그런 저주가 합당한 상태에서 그냥 두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에스겔 37장을 보면 해골이 나오는데, 그 해골들이 사람이 되는데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을 주니, 그 말씀에서 능력이 나와서 그 능력이 이 해골들을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에스겔서에 의하면 그러한 말씀이 완성된 상태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주님의 사랑' 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사랑이 아닌 주님의 사랑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따내려고 하는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로지 주님의 사랑이 덮쳐와야만 해결이 되는 것이지 말이다.
(겔 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 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 잠시 '사랑과 전쟁'을 감상하면 !!
우리 인간에는 이런 모습이 있는데,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은데, 자기가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밥을 해주고 냄새나는 속옷을 빨아준 자기 남자가, 그만 다른 여자와 히히덕거리면서 있는 현장을 발견했을 때, 그만 그 사람은 눈이 뒤집히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할지 자기도 모르는데, 그때 가까운데 흉기가 있으면 곤란하고 말이다.
물론 자기가 발로 차버린 인간이 그렇게 할 때는 조금은 덜한데, 아깝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남자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한 경우에는 당연히 그 보상이 자기에게 와야만 하는데, 그런데 다른 여자와 놀아날 때, 그것은 인간이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남자들은 여자의 '질투'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별 것 아닌 것처럼 지나가려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여자가 다양한 직장생활을 하게 되고, 남자처럼 퇴근을 하면서 술도 마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카페에서 다정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자기 아내를 보았는데, 그런데 앞에 있는 남자는 자기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업상(?) 아는 남자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그만 남자가 자기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즉 남자는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 이후로는 자기 아내가 무슨 짓을 해도 하는 짓마다 모두 밉다는 것이다. 말 한마디 한 마디마다 일일이 시비를 걸고 싶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신구(?) 선생님을 찾아가게 되고 말이다.
◈ 이 놈의 인간아, 죽어라 !!
이것을 신약성경인 산상설교에서는 죽이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는데, 즉 인간은 자기 사랑을 빼앗기에 되면 그런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집착' 인데, 즉 많이 사랑한다는 것은 많이 집착한다는 것인데, 그러니 사랑한다는 것은 모두가 거짓말이고, "너는 내 꺼야" 라는 것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 것이 남의 것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상대방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 속박시키는 것이란 말이다. 프로이트는 그러한 힘을 두고서 '리비도' 라고 했는데, 그러니 그 힘은 철저하게 자기 소유로 고정시키는데 동원되는 힘이라는 것이다. 자기 것으로 말이다.
◈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
그것이 바로 사랑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랑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사랑의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주 이기적인 목적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얼마나 지독한 사랑인지, 전혀 우리 인간들이 하는 사랑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심지어 자기 아들을 어떻게 하셨는고 하니, 저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자기 아들로 하여금 그 저주를 대신 가로막게 해서,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들을 뽑아내어서 하늘나라에 심어놓으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 지독한 사랑이 이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사랑이고, 산상설교에 나오는 사랑이고, 곧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런 십자가의 사랑으로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성도에게는 무엇이 포함되는가? 예수님을 믿는 인간에게도 원래 리비도가 들어있는데, 즉 자기 사랑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과는 정반대가 되는 아주 이질적인 새로운 사랑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희생적인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말이다.
◈ 성도의 삶은, 치고 박고 싸우는 과정 !!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사랑이 서로 어떻게 지내겠는가? 서로 싸우겠는가? 아니면 사이좋게 잘 지내겠는가? 그야말로 매일같이 치고 박고 싸우는데,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말이다. 즉 성도가 성도로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런 과정이라는 것이다.
* 질문 - '에고이즘'이 '아가페'와 반대되는 것이 아닌가요?
에고이즘 밑에 비리도가 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동물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무조건 자기 새끼를 낳음으로 자기 영원성을 확보하려는 말이다. 만약에 자기 자식이 없으면 그대로 끝나게 되니, 목숨을 걸고 자식을 번식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도 아기를 낳지 못하면 괴로운데, 그런데 아예 결혼을 하지 않으면 그런 괴로움도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둘 다 자기 자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물론 이런 것이 인간의 신비로운(?) 점이라고도 할 수 있고 말이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주로 여자들이 많은데, 결혼을 하게 되면 자기 자유를 잃게 되고, 그렇게 매인 몸이 되어서 잔소리를 들으면서 사느냐는 것이다.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인데,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면 그런 자유가 아닌 의무감에 사로잡힌다는 말이다.
◈ 결혼이란, 밥 도, 마 자자 ??
그래서 결혼한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하는가? 다들 행복은 길어야 3개월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신혼여행을 가서 싸우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이고 말이다. 사랑은 대부분이 3개월인데, 특별한 경우에는 6개월이고 말이다. 그 다음부터는 서로가 의무감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결혼하기 전에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너는 내 꺼야" 라는 것인데, 즉 "내가 그만큼 공을 들였으니 나에게서 도망가면 죽어. 그러니 너는 내 노동의 대가야. 나의 위대함은 네가 나와 결혼을 함으로서 확인이 되는 거야"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자기의 위대함으로 그런 사랑과 결혼으로 확인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인간들끼리의 사랑은 별 의미가 없네요?
방금 이야기했듯이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있는데, 그러나 그 사랑이 자기 위대성을 확인하려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위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외치는 사랑은 아무리 좋은 말로 꾸며도 결국은 자기 욕망이고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결혼을 빨리 하고, 적은 사람들은 결혼을 미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결혼을 하기 힘드는데, 그런 욕심이 젊을 때만큼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철이 들고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인데, 즉 "내가 결혼해서 상대방을 불행하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라고, 실제로 노총각들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 나이가 들면 철이 좀 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
우리교회에도 늦게 결혼한 분들이 좀 있는데,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보면, 자기 한 몸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면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미안한지, 그래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말 시건(철?)이 났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더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이가 들면 자기 때문에 남들이 피해를 보는 것에 대해서 민감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이가 많아서 결혼을 한 사람들은 일찍 이혼을 할 가능성이 많은데, 왜냐하면 흠뻑 서로에게 빠지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면서도 서로가 엄청 조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조심하다가 보면, 그것이 부담이 되어서, 말로 함부로 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차라리 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는, 어떻게 보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이 맞기도 한데, 왜냐하면 서로에게 배려를 해주니 말이다. 그래서 서로가 좋은 친구로 남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내막을 파헤쳐 보면, 양다리를 걸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해서 결혼을 했던, 아니면 고고하게 혼자서 살던지 간에, 그것이 하늘나라에서 보면 그야말로 도톨이 키재기에 불과하지, 그것이 무슨 그리 대단하게 차이가 나느냐는 것이다. 인간들끼리는 키가 좀 크고 적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똑같다는 말이다.
◈ 공관복음서를 다시 정리하면 !!
오늘 공관복음서를 끝내겠는데, 다시 정리를 해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 자신이 훌륭한지 그렇지 않은지, 그런 것은 남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전부가 다 똑같다는 것이다.
◈ 홀로 가신 길에서 이웃사랑을 !!
그렇다면 이 공관복음서의 나머지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홀로 가신 길' 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전혀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데, 그런데 홀로 가면서 모든 것을 다 지키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홀로 다 지킨 것이 '이웃사랑'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복음 10장을 한번 살펴보자.
(눅 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이 본문은 유명한 말씀인데,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어떤 계명이 크냐고 물으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하는데, 그 율법사가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그래도 율법사이니 하나님의 사랑은 좀 아는데, 그러면 이웃사랑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즉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대목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가 계속해서 강의를 해온 바에 의하면, 지금 이 율법사는 율법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데,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런데 율법사는 오해하기를, 자기가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러니 이 율법사에 의하면, 그 이웃이 누구인지 그것만 알면 이웃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의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말이다. 그것이 율법사의 백성들에 대한 임무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그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한 예를 들었는데, 그것이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라는 것이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더 적합한데 말이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거기를 3명의 사람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어떤 사마리아인이 말이다. 여기서 제사장은 목사라고 할 수가 있고, 레위인은 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을 그냥 강도를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냥 지나갔는가? 길을 가던 사람에게 누가 강도짓을 했는가? 전혀 자기들이 아니라 당연히 강도라는 것이다.
◈ 이 목사님,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
예를 들어서, 우리 옆집에 도둑이 들어와서 다 훔쳐갔는데, 그런데 그것을 제가 통장을 털어서 갚아주어야 하는가? 아무리 이웃이지만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두고 잘못했다고 하기에는 곤란한데, 자기가 강도가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제사장과 레위인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모범적인(?) 행동이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3번째 사나이인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마치 자기가 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것처럼, 피해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다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즉 싸매고, 치료하고, 그 당시 병원인 주막에 데리고 가서 추가비용이 대한 보증까지 다 해주고 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마리아인이 그렇게까지 행동한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옆집에 도둑이 들어서 모두 다 털렸는데, 그런데 제가 그 집에 가서 모두 다 보상을 해주고 위로금까지 주었다고 한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마음의 근거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화재보험사의 직원도 전혀 아닌데 말이다. 제 말이 좀 어려운가요?
◈ 사마리아인도 역시 탤런트 !!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했는데, 아까 제가 뭐라고 강의를 했는고 하니, 말씀은 그 자체에서 능력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러니 이 사마리아인의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 사람을 데리고 무엇이 이웃사랑인지를, 바로 그 참된 이웃사랑을 이 사마리아인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해서 이 지상에 펼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마리아인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 알맹이는 누구인고 하니, 이 비유를 의도적으로 끄집어낸 예수님이 바로 그 사마리아인의 자리에 있어서, 그야말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마치 강도를 만난 자와 같은 우리들을 예수님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전혀 고쳐주지 않아도 되는데 몸소 다 치료해주시고 싸매어 주셨다는 것이다.
◈ 그러면 '구원받았다' 라는 의미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것을 성취하는 차원에서 그 사랑을 무상으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킬 때, 비로소 우리는 나음을 입는다는 말이다. 이것을 두고 성경말씀은 "구원받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요?
그러니 강도를 만난 사람은 무엇을 했는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평소처럼 볼일을 보러 자기 갈 길을 간 것이지 말이다. 그러다가 강도를 만나서 그냥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데 분주하고 움직여서 그 사람을 치료하고 여비까지 다 챙겨준 것은 사마리아인이 다 했다는 것이다.
◈ 결론은, 예수님의 이웃사랑 !!
사실은 이 사마리아인은 없고, 예수님이 비유로 지어낸 이야기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 본인이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은 이 지상에서 이웃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작업인데,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사가 이 말씀을 이해했는가? 못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자기는 강도를 만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이루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서 과연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인간의 사랑은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웃을 사랑하기는커녕 착취하고 소유하려는 자기 욕망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 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 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 10: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눅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눅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눅 10: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눅 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질문 - 그런데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목사들이 그런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하면서 교인들을 토닥거리지 않습니까?
사마리아인이 되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데, 왜 그것을 모르고 그런 짓을 하는지 말이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자기가 마치 이러한 예수가 되어야 구원을 받는 줄 알고, 그것이 바로 인간이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하는 '자기 의(義)' 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의를 강조해야 자기가 남들보다 더욱 더 튀고, 또 그렇게 튀어야 복을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서 이렇게 잘 살게 되었으니, 남들보다 더 떵떵거리면서, 더욱 더 큰소리를 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 인간은, 자기를 자랑하고 싶은 욕망에 의해서 교회를 !!
그러니 결국은 인간이 교회에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결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보다 더 튀기 위해서 간다는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만큼 신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아서 이렇게 잘산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또한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에 의해서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다.
* 질문 - 우리가 이러한 목사님의 강의를 듣기 전까지는, 사마리아인을 닮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 닮을 사람이 따로 있지, 그런 사마리아인을 닮아서 집안을 말아먹을 일이 있는가? 정말 그렇게 몇 번만 하고 나면 아마 마누라가 다들 도망가고 없지 싶은데 말이다.
◈ 6개월 짜리 사랑 이야기 !!
예를 들어서, 아무리 남의 자식이 예뻐 보여도 자기 자식이 낫고, 또 결혼을 할 때도 자기 마누라가 제일 예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결혼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유효기간이 최대 6개월에 불과한 도파민의 효과일 줄 누가 알았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6개월이 지나면 비로소 자기 마누라 얼굴이 제대로 보이는데, 물론 실수한 것이 아니고, 다만 마누라는 장인과 장모를 반반씩 닮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주 냉정한 판단이 가능해지는데, 그렇게 해서 6개월이 지나면 사랑이라는 감정 대신에 대뇌피질에 의한 이성이 동원되는데, 그때부터는 남편으로서 자기 여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무작정 사랑하는 것은 연애시절이나 결혼 후 6개월이고, 많이 잡아서 6개월이고 보통 3개월 이내라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내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면 안 되지" 라고 하는 의무감이 튀어나오는데, 그때부터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함부로 하지 않고, 술도 절제하고, 또 담배도 밖에 나가서 피우고, 그러다가 옆집 아줌마에게 야단을 듣고는 끊고 만다는 것이다.
◈ 어머, 이 전도사님 이러지 마세요 !!
이것이 바로 이성적으로 나오는 것인데, 그렇게 이성적으로 나오면 이 사회적인 입장에서는 좋은데, 왜냐하면 총각 때는 그놈의 도파민 때문에, 길을 걷는다든지, 커피숍에서든지,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뽀뽀를 마구 하다가, 막상 결혼을 하고 나면 장소도 가리게 되는데, 물론 저나 여러분은 아득한 옛날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기억이 좀 납니까?
모두가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런데 여자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신랑만 바라보다가도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신랑은 버리고 자식만 바라보게 되는데, 두 가지 모두는 안 되니 말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바가지를 긁는데, "니 새끼니 당연히 니가 벌어서 키워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여자는 남편보다는 자식이 우선 !!
그러면서도 아이러니 하게도 자기 새끼라는 소리는 결코 하지 않는데, 그렇게 해서 남자가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그냥 갈라서자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여성의 보호본능인데, 남편이 아닌 자식을 보호하는 것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 새끼이니 말이다.
* 질문 -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데, 옛날에는 이혼이 적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시어머니들이 며느리들에게 앙갚음을 해서 그러한데, 자기 남편과 자기 시어머니에게 당한 것을 말이다. 그것을 새로운 후배에게 퍼부어 버린다는 것이다. 즉 당한 것을 그대로 돌려준다는 말이다. 또 이혼을 하게 되면 사회적으로 매장이 되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일 큰 문제는 그 당시에는 여자들이 이혼을 하게 되면 살 길이 그만 막막해진다는 것인데, 그런데 요즘은 어떠한가? 사회가 여성인력을 필요로 하게 되니까, 그러니 여성을 집에서 마구 놀리면 안 되는데, 국가에서는 그런 여성을 사회로 나가게 해야 국가 경쟁력이 생기고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여성들이 돈을 벌게 되면서 이혼이 급증하게 되는데, 경제력이 생기니 굳이 남자에게 시달리기 싫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그렇게 계속해서 이혼이 증가하다가 작년에 비로소 줄어들었는데, 그것은 이혼을 할 사람들이 대부분이 다 구조조정이 되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 질문 - 저는 여자가 돈을 벌려고 나가는 것에 반대를 합니다. 데가 이렇게 살펴보면 실제로 남자보다도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런 여자는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것이 곧 타인의 욕망인데, 즉 여자로 하여금 밖에 나가서 돈을 벌게 하는 것은 못난 놈이라고 하는 생각하는 말이다. 물론 남자들이 여자들이 일을 좀 못해도 덮어주는 경향도 있고 말이다. 남자들만의 일종의 우월감이라고 할까? 아무튼 여자들보다는 자기들이 그래도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특별대우를 받고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여자들은 월급은 다 받으면서 일은 그만큼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좀 힘이 드는 것이 있으면 남자들에게 다 미루고 말입니다. '아웅' 하면서 말입니다.
남자가 되어서 여자와 경쟁할 필요가 없는데, 그것이 오히려 열등감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어디 싸울 데가 없어서 여자와 싸우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여자와 경쟁을 하겠다는 것은, 자의식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러한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하는 말이다.
◈ 남성은 대가 없는 퍼줌이고, 여성은 받음의 대상 !!
그러므로 남자는 뭔가를 항상 퍼주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지 않고 "어디, 이 가시나가 까부노?" 라고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나중에는 여성 자체가 그만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부생활도 역시 문제가 되는데, 겁이 나서 어떻게 동침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남성은 대가 없는 퍼줌이고, 여성은 그것을 고맙다고 삼키는데, 그것을 두고서 남자가 툴툴거리면 안 되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남자라는 말이다. 남자는 자기가 열심히 애를 써서 여자에 다 주었는데, 그것을 여자가 날름 받아먹었다고 하면, 그러한 모습이 예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가 아닌 남자이니 말이다.
* 질문 - 저는 그것이 예쁘지 않던데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것은 집사님의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이렇게 사회생활을 해보면, 여자의 경우에 자기 능력은 되지 않으면서 자꾸만 여자라는 것으로 밀어 부치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기획안을 짜도 남자가 한 것이 더 좋은데도 여자 쪽이 선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웅'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말입니다.
* 질문 - 여성인력이 공무원 중에서 선진국은 10%가 넘는데, 우리나라는 불과 5%도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국가차원에서 선진국 수준인 10%로 맞추려고 하다보니, 여성에게 인센티브를 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자 공무원들은 박이 터지고, 반면에 여자들은 탄탄대로라는 것이다.
* 질문 - 여성이 그렇게 갈수록 힘을 많이 발휘한다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것인가요?
이 세상은 경제원리로 움직이는데, 그래서 여성들을 집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 좋은지, 아니라면 그냥 그대로 집에서 가사나 하도록 두는 것이 좋은지, 거기에 대해서 선진국들은 일찌감치 집밖으로 데리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 선진국들이 우리보다 서너 배의 국민소득을 올리니 우리도 여자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자는 것이다. 그것이 경제원리에 맞지 않느냐는 말이다.
왜냐하면, 국가도 역시 돈이 있어야 자기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남자이냐? 여자이냐?" 라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느 쪽이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는지, 무조건 거기에 맞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 질문 - 물론 제가 아까 직장여성에 대해서 나쁘게(?) 이야기한 것이 다는 아니고, 저는 70% 정도는 그렇다고 보는데, 그러니 그 나머지는 아주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능력이 있는 여성들을 우대해주는 것은 좋은데, 그러나 능력도 없는 자들까지 동등한 대우를 해준다는 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손해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저도 집사님의 의견에 공감하는데, 예를 들어서, 우리가 학원을 운영하면서 교사 선생님을 뽑아서 일을 시켜보면 그런 것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남자이냐? 여자이냐?" 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능력이 있고 일을 잘하는 사람을 계속해서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남자이냐? 여자이냐?" 라는 것이 아니라, "남성형인가? 여성형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과거에 일본에 그러했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여성권력이 엄청나게 커져서 그들이 나라를 다스리다가 보니까, "아하, 여성은 여성이 할 일이 있고, 남성은 남성이 할 일이 있구나" 라고 해서, 사회구조가 지금과 같이 거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당장 일본처럼 할 수는 없는 것이, 아직도 일본과 우리는 국민소득이 최소한 몇 배는 난다는 말이다. 그래도 밀어 부쳐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데, 물론 그것은 국가가 알아서 할 문제이고 말이다.
◈ 도대체, 공관복음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제 오늘 성경공부의 결론을 내어야할 시간인데, "공관복음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라고 누군가가 물으면, "우리 인간은 자기가 신이 되려고 하면서도 이 성경말씀을 지키려고 했는데, 그러나 성경말씀 자체가 그런 인간의 태도를 고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고, 즉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우리를 강도를 만난 자로 간주해서 그렇게 되는데, 그 모든 일을 예수님이 그렇게 다 하시고 그분이 우리를 '너는 내가 찜했어' 라고 하는, 그런 예수님의 강력한 십자가의 사랑에 의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사도행전을 하면서 살펴보겠는데, 그리고 그 해석들이 어떻게 보다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의(義)로 나아가게 되는지, 그것은 사도바울의 로마서 등을 살펴보면서 하겠다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진도를 좀 빨리 내지 싶은데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변화가 있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혀 변함이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의해서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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