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뒤에서 본 한국교회] 사도행전 1 본문
사도행전 1
05,04,0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변함이 없으신 성령님 !!
오늘은 사도행전은 하겠는데, 먼저 이 사도행전이 쓰여진 그 당시인 서기 50년이나 지금 2000년이나 성령님은 언제나 동일함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을 베드로후서 3장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라고 했고 말이다. 그러니 더 이상 세월이 흐르고 말고 하는, 그런 이야기는 주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그러므로 천년이 흐르든지 말든지 아무런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같은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깨어지는고 하니, "나는 신앙생활을 50년 했다. 혹은 5일 했다" 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들이 모르는데, 세월이 지나면 점점 더 자기가 성숙되는 줄로 알지 말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 성숙하다는 것은 성령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학원을 오래 다니면 더 고급반으로 승급하는 것처럼, 그런 지극히 인간들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마치 태권도에서 하얀띠, 청띠, 까만띠로 가듯이, 그렇게 점점 더 높은 곳으로 나갈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라, 시간에 전혀 변함이 구애받음이 없는 성령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니 당연히 !!
지금 하는 이야기를 잘 한번 들어보세요. 예수님이 가시고 난 뒤에 제자들이 혼자 남았는가?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불과 몇 날이 되지 못해서 성령님이 오셨는데,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남은 줄 알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계실 때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셨지만, 하지만 이제 예수님이 떠나고 난 다음에는 자기들이 그 뒤를 이어서 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이 말 그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님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라는 말이다.
◈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
이렇게 인간들은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서 성령님이 오셔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가 신앙생활을 한 10년 정도 하면 나름대로 더욱 더 나아지지 않느냐고 여긴다는 것이다. 즉 과거 10년 전보다는 훨씬 성화가 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실제로 자기가 생각해도 많이 달라졌고, 또 그렇게 되어야 당연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자기들의 힘으로 어떻게 한번 열심히 해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에 제 아무리 10년을 다니고, 20년을 다니고, 30년을 다녀도, 아니 100년을 다닌다고 하더라도,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변화가 있겠는가?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교회에 한 10년 정도를 다니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해야하고, 또 주님도 그것을 좋아할 것이라고 오해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처음 사랑을 버리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첫 사랑을 말이다.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다시 정리를 해보면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승천을 하면서 제자들을 그냥 홀로 남겨두지를 않고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데, 이 성령님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공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태면 시간에도 역시 구애를 받지 않고 말이다.
다만 인간들이 자기 시간에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가지면서, 즉 "세월이 이만큼 되었는데, 지금 내가 이 모양 이 꼴인가?" 라고 하면서, 자기 신세를 탄식할 수도 있고, 또한 남들보다 더 성숙의 속도가 빠르다고 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자부할 수 있고 말이다. 하지만 구원은 무엇인가? 공간적으로든지 시간적으로든지 우리 인간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빌립보서 3장에 나오는데, 3절 말씀을 한번 살펴보자.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면서 무엇을 신뢰하지 않는고 하니, 자기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알아서, 자기의 힘으로 뭔가를 해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진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고 말이다.
그러니 성령을 일단 받아서, 그 성령의 힘만을 의지해서 자기 육체를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말은, 오직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만, 그렇게 성령이 시키는 대로만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 목사님, 성령님이 시켜도 제가 거부하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대답을 하는고 하니, "만약에 성령님이 지시를 했는데, 제가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말이다. 하지만 성령님이 아무리 지시를 해도 그렇게 막상 자기가 따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님보다 자기가 더 세다고 여기는 사람인데, 그것은 그야말로 오해이고 착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제 아무리 고집이 세고 의지가 강해도, 인간은 자기 육체도 사실상 이기지를 못하는데, 예를 들어서 군대에 가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바깥 사회에서는 아무리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고 해서 매너가 좋고 먹는 것에 아쉬움이 없다고 해도, 그러나 군대에서는 배가 고프게 되면 겨우 건빵 한 봉지를 가지고도 싸운다는 것이다.
◈ 태양아, 멈추어다오 !!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자기 육체 하나라도 당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그 육체를 지으신 하나님을 이긴다는 말인가? 그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가 있다는 것인가?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혹시 자기에게 태양을 멈추는 능력이 있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멈출 수 없다면, 그 태양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는데, 즉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다. 물론 일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가? 심장에 어디 자기가 펌프질을 해서 뛰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뛰지 말이다. 오늘 왜 비가 오지 않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비가 온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이고 말이다.
◈ 산불이 나면, 36계 줄행랑을 !!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산불이 나면 어떻게 하면 되는고 하니, 도망을 가면 된다는 것이다. 산불이 나지 말라고 빌고 말고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산불이 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그런 것 말고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님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물론 나중에 천국에 가면 다 알게 되는데, "이하, 그때 나를 그렇게 인도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구나. 그때 24살 때 내가 데이트를 하면서 커피를 마시려고 했는데, 율무차를 마시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구나"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는데, 자기 커피를 마시지 않고 율무차를 마셨다고 말이다. 즉 "지금 내가 커피를 안 먹고 율무차를 먹으니 내 마음대로다. 봐라, 내가 알아서 마시는 게 맞잖아"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놀리고(?) 싶지만 말이다. 하지만 천국에 가면 그런 철없는 짓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사도행전을 보면서, 두려움은 NO !!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초조함이나 불안함이 생기면 안 되는데, 그 어떤 두려움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하, 이 모든 것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 두려움에 벌벌 떤다면, 그것이 무슨 성도의 모습이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전도를 하는데 갑자기 상대방에게 성령님이 임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그리고 사도바울이 손수건을 덮으니 죽은 자가 살아나고 말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불안해할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주께서 다 알아서 하니 말이다. 손수건을 사용하든, 발수건을 사용하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냥 박수만 치고, 그것을 보면서 주님께 감사하면 된다는 말이다. 괜히 거기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잡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계획이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낳게 하니 말이다.
◈ 두려움은 야심에서 생긴다 !!
제가 어느 책인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뭐라고 적었는고 하니 "두려움은 야심에서 생긴다" 라고 말이다. 야식이 아닌 야심 말이다. 인간에게는 그런 야망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데, 즉 자기의 야망이 무너질까 싶어서 초조하고 불안하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결핍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현실이 아니니 말이다. 바로 그런 결핍에서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딴에는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것은 그냥 성경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무엇이 생기는고 하니, "내가 이 말씀을 제대로 지켜보리라" 라는 야심이 그만 생긴다는 것이다. 자기의 야심이 말이다.
◈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 !!
여기서 요한복음 6장 28절을 보겠는데, 여기에 나오는 질문이 제가 무척이나 많이 들었던 질문인데, 너무 겸손을 떨지 말고 용감하게 누군가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 6: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저 뿐만 아니라 아마 여러분도 많이 들었던 질문이지 싶은데,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라고 말이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많이 한 질문이고 말이다. 그 뒤에 답변이 나오는데, 29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까, "일은 니가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여기에 반해서 질문은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일을 제가 하기는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라는 것이고 말이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일은 니가 하는 것이 아님을 믿어라.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시대에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니 아무런 두려움도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야심도 없고 말이다.
◈ 여보, 엄마가 되어 줘 ??
사람의 마음상태가 불안정하면 집안 식구가 참으로 괴로운데, 아이들이 어릴 때 집안에 그 아이들의 부모 때문에 분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아이들 때문이 아니고 말이다. 아이들은 집에 들어오면 불안정한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든든한 엄마 아빠가 있기에 말이다.
그런데 가장이 되면 자기가 집구석에 믿을 것이 없는데, 의무감을 가지고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니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어떤 남자들은 가정에 들어오면 어릴 적으로 돌아가고 마는데, 그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퇴행' 이라고 하는데, 이 퇴행의 일차적인 현상이 옷을 어린아이처럼 벗는 것인데, 왜냐하면 어릴 적이 그립다는 것이다. 물론 아내는 아내가 아닌, 어릴 적 엄마가 되어야 하고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여자들이 직장생활을 하다가 보니 반대가 되어서, 여자가 퇴행이 되어서 어린아이가 되고, 남편은 그 여자의 아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서 있었던 온갖 일들에 대한 모든 스트레스를 다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여보, 이리와. 발 주물러 줄게 !!
그래서 남자는 직장생활을 하는 여자를 품어주고 위로해주어야 하는데, 즉 "여보, 수고하고 고생했어. 이리와, 발을 주물러 줄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여자는 스타킹을 '휙' 하고 벗어 던지고서는, "응, 여기 여기 좀 주물러"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상상에 맡기고 말이다(ㅋㅋ).
왜냐하면, 밖에서 누르고 누른 그 욕망이 집에서라도 해소하지 않으면 폭발해서 미치게 되니, 그렇게 신랑이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지치니 집에서 짜증을 낸다는 것이다. 즉 "왜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가?" 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집에 오면 부모가 자기들을 보호해주기 때문에 그야말로 활기가 마구 넘치는데, 하지만 어른들은 그렇게 기대 언덕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시부모님을 모시고 있으면, 할머니가 계속해서 엄마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 아무튼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
아무튼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생겨야 하는고 하니,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져야 하고, 우리 마음에 안정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도행전에서는 이제 예수님은 떠나시고 성령님이 오셔서,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간섭하고 또 간섭하시기에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목회를 하든지, 학원을 하든지, 식당을 하든지, 또한 전도를 하든지, 이웃사랑을 하든지, 아무튼 모든 것을 다 성령께서 자기 몫으로 해내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우리가 이 사도행전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는데, 또한 사도바울이 말한 모든 일어난 일도, 그 어느 것도 사도바울이 개인적으로 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사도행전을 16장을 한번 보자.
(행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행 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행 16: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행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행 16: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여기 8절에 '무시아'가 나오는데,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서 이 무시아를 찾아보면, 그 다음이 해변가인 있는 '드로아' 이고, 그런데 9절에 보면,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였는데, 드로아에서 말이다. 그런데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청하여 뭐라고 하는고 하니,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드로아 맞은 편이 '마게도냐' 라는 동네인데, 바다 건너서 말이다. 현재는 '마케도니아' 라고 부르는 곳이고 말이다.
◈ 이런 환상을 누가 꾸게 하셨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환상을 도대체 누가 꾸게 했는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꾸게 하셨다는 말이다.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어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명감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 사명감이란 어떠한 듬직한 직업을 가지고서 무슨 대단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항상 인도하신다는 필(?), 그것이 바로 사명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명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꾸만 자기에게 일을 시키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러한 자기의 봉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출몰한다는 느낌,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자기가 직장을 다니든, 학원을 하든, 농사를 짓든, 돼지를 키우든,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연한 것은 하나도 없고, 또 무의미한 것도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항상 인도하고 계시니 말이다.
◈ 참새 짹짹, 오리 꽥꽥 ??
지금 이것은 마치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들을 인도할 때, "하나 둘, 참새 짹짹, 오리 꽥꽥" 라고 하는, 바로 그런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때 아이들은 찻길을 건너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성령께서 그렇게 사도바울을 인도해서 전도여행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안정감이 있고, 두려움이 없는, 그런 여유가 있는 모습이냐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은 이러한 사도행전을 보면서, 선교계획을 잡지 못해서 환장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전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지옥에 가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도를 하지 않고, 일 년에 한 명씩 교회에 데리고 오지 않으면 지옥에 보낸다고 했는가? 과연 그러한 분이 우리가 믿고 있는 우리의 주님인가?
그것은 교회의 목사가 자기 밥벌이를 하려고 만들어낸 하나님이지, 성경에는 그런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주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내용이고 말이다.
여기 지도는 조금 있다가 보고, 일단 사도행전 18장 9절과 29절 말씀을 한번 살펴보자.
(행 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행 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 바울아, 두려워 말라 !!
이것이 사도바울의 2차 전도 여행 거의 마지막 때 아덴, 즉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때 주께서 환상 가운데 이 사도바울에게 나타나서 뭐라고 하는가?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여기에 컴컴한 체육관에 있는데, 여기에 주님과 사도바울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5월 6일에 "바울아, 단단히 마음을 먹어라" 라고 말씀을 하시고, 또 6월 7일에 "걱정하지 마라" 라고 하시고, 그리고 12월 5일에도 "저기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해라" 라고 했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주님과 사도바울이 함께 체육관 안에는 시간이 흐르든지 흐르지 않든지 간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렇다면 세월이 아무리 얼마나 많이 흘렀든지 간에 이 체육관 안에서 예수님과 사도바울의 관계는 계속해서 처음과 똑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체육관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별다른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 수학 선생님, 이제 못나갑니다 !!
쉽게 설명을 하자면, 만약에 학원에서 아이들은 다 가고 원장님과 수학 선생님, 그렇게 둘만 남았다고 하면, 그런데 이 수학 선생님은 지금 몇 시나 되었는지 궁금해서 시계를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원장 선생님이 하는 말이 "수학 선생님, 이제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수학 선생님이 시계를 본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도바울도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가 시계를 본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데, 그러니 예수 안에서 한번 구원된 사람은 그것으로서 구원이 모두 다 종결되었다는 말이다. 즉 더 성장하는 것도 없고, 더 구원이 확실해지는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작년에 주님이 하신 말씀이 올해도 유효하고, 내년에도 역시 유효한데, 즉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정지된 관계가 바로 주님과의 관계이고, 또한 성령과 함께 하는 자의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 '성령충만' 이란?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서 죽는데, 그래서 바로 주님의 품에 안기는데, 그것은 바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서 죽기 이전에 그 현장에 누가 있었는고 하니, 주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충만'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다시 말해서, 그러한 죽음의 순간에도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이 오게 되면 공간적인 의미도 없고, 또한 시간적인 의미도 그만 사라진다는 것이다.
◈ 태국에 선교사로 갔으면 !!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께서 얼마 전에 태국의 밀림 속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는데, 그런데 가족들을 두고 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들을 데리고 가면 밀림 속에서 살 생각은 하지 않고,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에 자꾸만 도시로 빠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원주민들과 같이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토요일쯤에 밀림에 들어가서는 일요일에 설교를 하고 나서 그만 다음날 부랴부랴 다시 도시로 빠져 나오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 부쳐준 돈이 가치가 있어서, 도시에서도 나름대로 살아갈 수가 있는 여유가 있어서 그런 점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그런 것을 잘 알기에 가족을 두고 가기로 했는데, 그야말로 생이별이라는 것이다. '생(生)' 자가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그냥 고기보다도 생고기가 좋고 말이다. 그런데 생이별은 별로 좋지 않은데, 그렇게 태국을 갔으니 진짜로 그들과 함께 딩굴면서 살게 되는데, 그런데 그 목사님의 동생이 되는 집사님이 얼마나 섭섭해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사도행전은 그런 공간적 의미가 없어 !!
하지만 이 사도행전에 의하면 공간적인 것이 의미가 있는가? 성령 안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는데, 즉 터기에 있던, 갈라디아에 있던, 마케도니아에 있던 주님과 사도바울은 하나의 체육관에 같이 갇혀있는, 그런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그 얼마나 든든하고 두려움이 없느냐는 말이다. 다른 분도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엄청나게 섭섭해하는데, 또한 그 목사님도 태국에 가서 그래도 한번씩은 나온다고 하고 갔지만, 그래도 제주도에 간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튼 옆에서 보기에 그 얼마나 딱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무슨 주말부부도 아니고 말이다. 연말부부인가? 하지만 주님과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지 함께 있는 것이 말이다.
◈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전도여행을 !!
(미리 준비한 전도여행 지도를 보면서) 여기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보면, 수리아(시리아)의 해변가에 '안디옥' 이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거리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약 500km 정도 된다는 것이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이 안디옥에서 구부러져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구브로' 라는 섬으로 가서, 밤빌리아로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터기에도 안디옥이 또 있는데, 갈라디아 지방에 말이다. 신약성경의 갈라디아서는 이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여러 교회에 편지로 보낸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성경지리' 라고 하는데, 조금 똑똑한 교사는 주일학교 학생들에게도 가르치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제가 이런 것을 보면서 약간 염려가 되는 것이, 이것을 그대로 흉내내어서 선교를 하겠다고 나선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걸어간 발자취를 따라간다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저는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반대하는데, 방금 이야기했지만 예루살렘에서 500km 떨어진 안디옥, 그리고 거기서 지중해의 섬으로도 가야하고, 참으로 고생스러운 것은 맞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옆집에 있는 이웃에게 전도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라고 여기면 큰 오산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식에게 전도하는 것보다, 멀리 가서 남의 자식에게 전도하는 것이 더 큰 일이라고 여기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만만의 콩떡(?)' 이라는 것이다.
제가 지금 이 사도행전을 강의하면서 몇 번이나 강조하는데, 제발 공간적인 것과 시간적인 것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가 예수님을 믿은지 5년이든 50년이든, 그런 것에다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것이다. 구원은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연수를 채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멀리 가서 선교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주의 일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인가?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일을 시키고 있음을 믿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무엇을 구상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람은 계획을 짜면 그만큼 야심이 생기고, 그런 야심이 생기면 그것이 안 될까 싶어서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시는데, 우리의 머리카락도 세신 분이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여기 지도에 보면 안디옥이 두 군데 나오는데요?
터기에 있는 안디옥은 별로 유명하지 않고, 여기 바닷가에 있는 이 수리아의 안디옥이 유명한데, 거기에는 이방인들이 최초로 세운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교회는 예루살렘에 있는데, 물론 유대인들이 세웠고 말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유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조금 겁이(?) 나는 것이, 전도사들이 수련회를 하면서 학생들이 이렇게 지도를 펼쳐놓고 가르치면서 뭐라고 하는가? "여러분도 비전을 가지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외국에 전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대성학원에서 재수하는 것도 주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을 가르치면서 선교헌금을 강조한다는 말이다.
◈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
그리고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라고 하는데, 누가 영생을 주기로 작정했는가? 사도바울인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을 했으니, 사도바울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고,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그냥 주께서 시키는 데로만 하면 되니 말이다.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 내니 두려워 말라 !!
그리고 요한복음 6장 20절에 보면, 제자들이 바다에 풍랑이 일어 두려워하니 바다 위를 걸어 오셔서, "내니 두려워 말라" 라는 대목이 있는데, 또한 20장 19절에 보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라고 하고 말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성경말씀을 보면서 가장 마음에 위로를 주는 부분이 여기라고 보는데, 그 당시 제자들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기 스승이 살아오셔서, 문도 열지 않고 그냥 들어와서는 "얘들아, 나다" 라고 하면서 평강을 주시니 말이다.
(요 6: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요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지금 천주교인들이 교황이 죽었다고 불안해하는데,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인데,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왜 그런 것 때문에 불안해하겠는가? 주님이 살아계시는데 말이다.
* 질문 - 지금 그들에게 교황이 구약시대의 다윗과 같은 존재가 아닌지요?
조직을 꾸려나가려고 하면 반드시 결재를 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래서 그런 결재할 우두머리를 하나 뽑아놓았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예수님보다 교황을 더 믿는 것 같은데요?
방금 말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구약의 왕권제도를 본따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구약의 왕권제도는 인간의 공통된 심리이니, 그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뭔가가 있어야만 인간은 비로소 안심을 한다는 것이다. 진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기린이 사자에게 공격을 받으면 머리를 땅 속에 파묻는다고 하는데, 눈에 띄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말이다.
◈ 교황인가? 그리스도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눈에 띄는 교황을 하나 세워놓으면 아무런 일도 없는 줄로 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교황을 믿는 것으로 그냥 대신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항상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일하고 있음을 강조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를 못했는지 전혀 몰랐는데, 그런데 주께서 나와 만나게 해주셔서 구원을 시켰잖아. 그러니 우리 가운데는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이라는 것이다.
◈ 베드로와 고넬료는 어디로 ??
오늘 사도행전을 모두 다 하고 싶은데, 물론 너무 서두르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지금 조금은 공기가 답답한 것 같은데, 아무튼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베드로에게 천사가 임하고, 동일한 시간에 '고넬료' 라는 사람에게 천사가 임한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령께서는 공간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데, 우리가 구애를 받아서 두려워하고 난리를 피우지 말이다. 그러니 주님은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만남을 주선하시는데,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이러한 만남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께서 만나게 해주셔서 만났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만남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 만남의 '때'를 누가 조성했는가?
그래서 사도바울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라" 라고 하는 이유가, 그 '때'를 누가 조성했는고 하니,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만남의 때에서 우리가 "에이, 그래도 이 사람은 아니야"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주께서 다 의미를 가지고 그렇게 했으니,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조금 피곤해 보여서 제가 일방적으로 성경을 찾겠는데, 빌립보서 4장을 보자.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
여기 참 유명한 말씀이 나오는데, 사도바울이 자기가 그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배웠는데, 그것이 바로 13절에 나오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가 일부러 이러한 일들을 의도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기가 알아서 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고생이 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실패인가? 전혀 아닌데, 또한 자기 집안이 가난한 것이 죄인가? 그것도 역시 분명히 죄가 아닌데,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부끄러워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왜 가난하게 되면, 그때 죄를 지었을 때와 동일한 수치를 느끼느냐는 말이다. 오히려 돈이 많이 것이 죄를 지었을 가능성이 많은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돈이 많으면 성공한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곧 착함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돈이 없으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악함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서 이러한 사고방식을 익히 배웠는가? 바로 사회에서 배웠는데, 옷을 남루하게 입으면 부끄럽고, 마치 자기가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비싼 브랜드 옷을 입으면 걸음걸이도 당당해지고 말이다.
◈ 여보, 옷이나 한 벌 사줘 !!
그래서 특히 여자들은 입고 나갈 옷이 없다고 하면서 동창회도 나가지 않고는 그 화풀이를 신랑에게 하고 하는데, 문제는 바로 그러한 풍토를 그대로 교회로 가지고 와서 기도를 하게 되니, 도대체 어떤 내용의 기도가 나오겠느냐는 말이다. "주여, 돈을 많이 벌어서 제가 착한 사람임을 대외적으로 알리게 하옵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어떤 경우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뻐할 줄 아는데, 과연 그러한 자기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는 것이다. 즉 자유롭고 넉넉하고 자족할 줄 안다면, 그런 사람이 바로 자기와 같이 동일한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적어도 교회에 나왔으면 그 정도 자유는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서도 남보다 더 튀어보려고 한다면, 그렇게 되면 시간적이나 공간적으로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면서 "아, 주께서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셨구나" 라고 여기면 되는데, "나의 이런 모습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라고 하는 생각 자체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잠시나마 잊어버리기에 생기는 현상이란 말이다.
◈ 성도는 주님의 그림자 !!
지금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사도바울이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 어디를 가도 주님은 따라붙더라는 것이다. 마치 그림자처럼 말이다. 사실 실체가 예수님이고 사도바울 자신이 그림자이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그림자가 됨으로 말미암아서, 다른 사람들이 그 그림자를 보고서 실체가 있음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20절부터 살펴보자.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참 저는 이 말씀이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는데, 특히 20절에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라고 하는데, 얼마나 고귀한 믿음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21절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죽은 것도 유익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죽는 것이 모두가 다 손해라고 여기는데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의 경우에, 자기가 그렇게 죽는 것도 결코 손해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빨리 죽으면 그만큼 육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거하기 때문에 말이다. 즉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지, 육체를 입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죽음조차도 유익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과연 두려움이 있겠는가? 정신병이 있겠는가? 모든 정신병은 자기가 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오는데 말이다. 물론 이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죽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이 정신병이라고 할지 몰라도 말이다.
* 질문 - 인간이 그렇게 될 수 있나요? 불가능해 보이지 싶은데 말입니다.
물론 인간이 안 되는 것은 절대진리이고, 하지만 성령께서 되게 하시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될 때, 본인이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는데, 성령께서 되게 하셨다고 한다는 말이다. 어떤 일을 하나 하더라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결국 주께서 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6장 8절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육체를 위해서 심지 말고 성령을 위해서 심어라. 그것이 곧 생명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죽는 것도 유익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을 위해서 심는 자에게 해당된다는 것이다.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질문 - 목사님, 아직까지 저는 그렇게까지는 생각이 되지 않는데요?
그것은 제가 답변할 문제가 아닌데, 아무튼 주님은 자기 성도를 그렇게 똥개(?) 몰 듯이 몰고 다는데, 성도는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주인이 똥개에게 산책을 가지고 하면, 개가 너무 좋아서 꼬리를 치고 난리를 피우듯이 말이다.
◈ 매여 사는 삶, 그것이 곧 자유 !!
이와 같이 성도가 주님에게 매여있다는 것이 속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삶이 바로 영생의 삶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도 참된 영생을 소유해야 자유이지, 그렇지 못한 것이 무슨 자유라는 말인가? 예수님에 의해서 매여 사는 삶, 그것이 참된 자유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돈에 매이고, 가족에 매이고, 취미에 매일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게 매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취미생활을 하더라도, 즉 밤새도록 낚시를 해도 그것을 초월하면 되는데, 그런 것에 구애를 받지 않고 말이다.
* 질문 - 목사님, 저는 낚시를 가는 이유가 있는데요, 물론 전도를 하러 가는 것은 아니고, 한달 동안 공부한 성경내용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낚시가 참으로 좋은 취미인데, 얼마든지 권장할만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만약에 그런 것에 얽매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서, 박찬호에 얽매이게 되면 박찬호에 따라서 자기 인생이 그만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박찬호가 잘 던지면 너무나 좋고, 그렇지 못하면 자기 인생도 허무해지고 말이다.
만약에 프로축구에 빠지게 되면,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지게 되면 그냥 의욕이 마구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가정분위기도 험악해지고 말이다. 그것을 일명 '폐인' 이라고 하는데, 사실 프로야구에 그런 폐인들이 엄청 많다는 것이다.
◈ 욘사마, 나도 따라갈게 !!
심지어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죽게 되면 따라서 자살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만약 배용준이 한강에 투신자살을 했다고 하면, 적어도 폐인들이 십 여명은 같이 따라서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인생의 의미를 배용준에게서 찾는다는 말이다. 물론 주로 아줌마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퇴행' 이라는 것인데, 즉 처녀 때 있었던 그 낭만적인 사랑을 욘사마를 통해서 발견했다는 말이다. 지금의 남편은 옛날의 그런 자기 첫사랑을 채워줄 수가 없는데, 이것을 '결핍'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욘사마가 그런 결핍을 채워준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 것이 다 인간의 욕심이 아닌가요?
물론 인간의 욕심이 맞는데, 자기 나이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아니, 나이 쉰 살에 배용준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그러나 자기도 그런 것을 잘 알면서도, 자기에게 결핍이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렇게 얽매이는 것에 의해서 자기 환경이 변하고 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나요? 그러니 인간은 이 땅에서 고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러한데, 자기가 계획을 잡아놓고는 거기에 꼼짝도 못하고 말이다. 그런 것은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인데, 자기는 전도여행을 터키 쪽이 아닌 반대로 가려고 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그것을 막아버리고는 다른 쪽으로 길을 연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도 그때 그때 다른데, 즉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우리가 이왕 얽매이는 것, 주님께 얽매이라는 말인가요?
그것은 자기가 주님께 얽매이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에게 얽매여 있기 때문에 그런 자유함을 느끼게 되는데, 즉 그것이 납득이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주님은 결단코 자기를 믿는 자를 실패자로 간주하지 않는데, 즉 아무리 사업에 실패를 하고 거지가 되어도 말이다. 그런데 본인들이 왜 그렇게 세상을 사는 기준을 가지고서 벌벌 떠느냐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에서 뭐라고 말하는가? 자기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이고, 죽는 자 같으나 살아있고, 징계를 받았으니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며, 아무튼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사도바울은 자기가 받은 그 자유에 대한 표현이라는 말이다.
◈ 자기가 만든 회초리는 무용지물 !!
아무튼 제가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부탁을 하고 싶은 것은, 스스로 자기를 자책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이 그러한 회초리를 부수어 버렸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이지, 자기 스스로 그런 회초리를 다시 만들어서 때리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후 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질문 - 그러니 자기 나름대로의 인간적인 커트라인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지요?
물론 그러한데, 그렇다고 해서 만들지 않을 인간이 아니지만 말이다. 다만 기억할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를 때릴 회초리를 다 분질러버렸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스스로가 그것을 다시 만들어서 자기를 때리고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병자라고 할까, 아무튼 그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 해결책은 방향을 바꾸는 것인데, 주께서 하셔야 가능한 것이고 말이다.
◈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도 선교 !!
이렇게 보니 사도행전이 골치 아픈 것이 아니라, "아하, 성도는 사도바울처럼 지금도 인도함을 받고 있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바다를 건너서 먼 나라를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여기서 자기 가족과 함께 사는 것도 선교이고, 그것이 곧 전도임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10년을 믿는다고, 100년을 믿는다고 잘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 하루를 믿는다고 해서 모자라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즉 구원은 숙달되고 숙련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때 그때 인도하는 그 인도하심에 따라서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단련을 한다고 해서 더욱 더 괜찮은 신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 다시 지도를 살펴보면 !!
이렇게 해놓고 다시 지도를 보겠는데, 사도바울의 1차 전도여행 기간이 A.D.46년~48년 정도이니, 그러므로 이 시기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약 10년에서 15년 정도가 지났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보통 B.C.3년~4년 정도로 보는데 말이다. 0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올해가 2005년도이니 도대체 사도바울이 언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올해부터 15년 정도를 빼면, 1990년인데, 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있지 않아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그때는 기억하지 못하는가? 노태우, 김영삼 정부시절의 이야기이니 대부분이 기억이 생생하다는 것이다. 즉 사도바울의 그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그 당시 사람들이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말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부활승천을 하셨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과 그 공백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다. 제자들 중에서도 베드로처럼 살아있는 사람들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바울이 복음을 잘 전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그 공백을 완벽히 메워주셨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께서 사도바울을 사용하셔서 말이다.
◈ 지금 이 순간도 십자가의 현장 !!
그런데 그 성령님은 시간과 공간의 초월하시는 분이니, 그 놀라운 기쁜 소식이 비록 지금이 2005년도이지만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이 떠난지(?) 2000년 가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성령님께서 그 공백을 메워주시는 분이니, 그런 2000년 전의 십자가의 현장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십자가의 현장이 되어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런 일을 하게 되면 시간이 오래 지나고 하면 "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라고 하겠지만, 물론 결심도 약해지고 말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도하시게 되면, 그렇게 해서 성경말씀을 남겼는데, 이것을 우리에게 날마다 되풀이해서(?) 적용을 시키면 비록 2000년 이전의 이야기이지만, 지금 바로 이 현장에서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를 구원해주는 복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부활은 죽지 않고 살아있는데, 그렇게 되니 예수님에게는 더 이상 시간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더 이상 나이를 드시는 것이 아니고, 그때 그 예수님이 지금 이 순간의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부모님을 제대로 정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아하, 우리 부모님이 그 당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현장에 있었다면 구원을 받았을 텐데" 라고 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을 현장에서 실제로 본다고 믿는가?
◈ 직접 듣고 본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어떠한가?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나누어주신 떡과 물고기를 얻어먹고도 믿지를 않았는데 말이다. 예수님의 그 생생한 아람어 사투리(?)로 하는 말씀을 듣고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오로지 성령이 오셔야만 믿어진다는 말이다. 그 현장에서 직접 본다고 해서, 또한 듣는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는 말이다. 지금도 성령께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특강을 하지 않아도 믿을 사람은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 현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오직 성령께서 그 일을 하셔서 믿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경말씀은 굳이 말하자면, 성령님의 작품이고 말이다.
◈ 예수님도 없고, 성경도 없는데 ??
이 사도행전을 살펴볼 때는 다음과 같은 점도 유의해야 하는데, 성경이 확정될 때까지는 성경이 없는 것이니, 그 이전까지는 '예언'이 성경말씀을 대신해서 진리가 되는데, 그러한 예언을 풀이해주는 것을 방언, 혹은 통역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일을 인간이 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셨는데, 그것을 두고 '성령세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예언을 이야기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이 예언의 소리를 듣고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제 계시지 않고, 성경말씀이 아직 없는데 말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시대라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편지가 예언이고, 곧 성경 !!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편지가 일종의 예언이고, 즉 그 당시에는 그의 편지가 곧 성경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갖추어져 있지만, 그때는 그렇지가 못했으니 말이다. 사도바울의 말, 사도바울이 하는 것을 적은 것, 그의 편지 등등이 말이다. 그의 편지를 성령께서 활용해서(?), 즉 사도의 편지를 믿게 해서 구원을 받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편지 앞에는 항상 무슨 말이 나오는가?
여기서 고린도전서 1장 1절을 한번 보자.
(고전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전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여기 1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라거 하는데, 이것이 결코 과장이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은혜가 임한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들에게 여기 3절에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라는 것은 이미 은혜가 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편지를 하는 것이고, 또한 은혜가 임하니 교회가 된 것이고 말이다.
◈ 야, 진짜로 그렇구나 !!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런 강의를 듣고 성경을 보게 되면, 고린도전후서나 로마서 등이 새롭게 보이지 싶은데, "야, 진짜로 구원을 받은 것이 맞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고서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오늘날에도 이 편지를, 아니 성경말씀을 보고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임하는 것이 진짜로 맞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도 처음에 보면, 주님께서 사도요한에게 천사를 보내서 그 편지를 기록하도록 한 것은, 그 말씀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성경을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이고 말이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계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그런데 그러한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말이다. 바로 그 십자가 사건이, 그것이 그 당시에는 약 15전의 일인데 말이다.
◈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사람은?
무슨 말인고 하니까,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지가 15년이 되었는데, 그러므로 그것이 과거 15년 전의 일인데, 그런데 그것이 사도바울에 의하면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그 십자가가 펄펄 살았다는 것이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와서 그 십자가를 믿게 된 사람은 지금 바로 죽어도 영생을 얻는, 천국의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사람이고 말이다.
그러니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의사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중요한데, 그렇지 않다면 판사가 되면 무엇을 하고, 또 의사가 되면 무엇을 하겠는가? 성경이 이렇게 선명하고 확실하게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데,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됨으로서 너희들의 죄를 용서해주겠다" 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복된 소식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성경말씀을 믿지 않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이 성경말씀이 2000년 전의 유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역사를 초월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책이라는 사실을 전혀 믿지 않고 말이다.
◈ 성경은 유익한 참고도서 ??
다시 말해서, 성경은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단체에서 제작한 책으로서, 자기들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일종의 참고도서 정도로 여긴다는 것이다. 여기 이 학원에 있는 '해법수학' 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 정도의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나 사도들이 전도해서 3000명이 믿고, 5000명이 믿었다고 하는 것을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3000명이나 5000명에게 한꺼번에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사람들의 호응도가 엄청나게 높았다는 것이다. (??)
(행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 질문 - 그런데 성경에 보면 '믿더라' 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되지요?
물론 그것은 실제로 그렇게 믿은 것이고 말이다. 그것 말고 "호감을 갖는다", 혹은 "관심을 갖는다" 라고 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그것을 제3자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성경은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성령께서 역사하니, 새로운 환경과 분위기가 !!
다만 성령께서 역사하니 그러한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고 분위기가 유발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집단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구원은 집단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즉 "내가 어디에 소속이 되었더니, 구원이 되었다" 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 그런 가운데 사울이 등장해서 !!
그렇게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가 좋으니, '사울' 이라는 자가 등장해서 그들을 핍박하는데, 스데반을 죽이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이쪽에서 그것을 와해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을 함부로 포박할 수가 있는 권한을 가지고서 다메섹으로 내려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가는 길에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행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행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 전도여행을 하기 이전에 이미 교회가 !!
바로 이렇게 점점 핍박이 심해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흩어지게 되는데, 그러니 사도바울이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가기 이전에 이미 그들은 자기들끼리 각지에 흩어져서 예수를 믿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물론 장로도 다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고, 교회가 이미 다 있는데 왜 가는가?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받은 새로운 복음이 있는데, 그것이 곧 갈라디아서인데, 즉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사도바울은 자기가 새롭게 받은 복음을 !!
사도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가 자기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런 새롭게 받은 계시를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더욱 더 알아가도록 하는, 바로 그런 목적으로 자기를 사도로 세웠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이미 각 지역에 지점들을 모두 다 만들어놓았는데, 거기에 사도바울은 후차적으로 가서 그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그 믿음의 내용을 채워준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복음의 내용을 말이다. 정말이지 엄청난 내용들이 아닌가?
* 질문 - 초대교회라고 해서 그들이 다 구원받은 사람은 아니지요?
그것은 성경적으로 허용이 되는지 않는데, 사실상 지상에 그런 교회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데, 다만 첫째 반응이 그들이 믿었다는 것을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아하, 성령이 임해서 그들이 믿었구나" 라고 말이다.
◈ 아무튼 그 당시 분위기가 !!
물론 나중에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은 모르는데, 그런데 디모데전후서에 보면 그들이 사도바울을 핍박을 많이 하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사도바울을 연호하다가 나중에 배반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음의 파산이라고 하는데, 아예 처음부터 없었으면 파산도 없는데, 즉 믿음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만 파산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론적으로는, 처음부터 그들은 믿는 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그런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분위기와 현상들이 퍼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전도여행에 대해서 !!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이제 2차 전도여행을 보면, 1차 전도여행 때는 안디옥에서 구브로로 해서 갈라디아 지방으로 한 바퀴를 도는데, 현재 터키 지방을 말이다. 그런데 2차 전도여행 때는 어떻게 되는가? 1차처럼 갈라디아 지방을 돌려고 했는데, 그런데 환상 중에 마케도니야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들을 좀 도와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가보니 어떠한가? 빌립보, 고린도, 데살로니가, 에베소 등지에 이미 교회가 다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1차 전도여행 때의 갈라디아 지방뿐만 아니라, 2차 전도여행을 하는 곳에도 이미 다 있었다는 말이다.
이제 3차 전도여행을 살펴보면, 이때는 A.D.53년에서 57년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즉 예수님이 가신지 20년이 되었지만 그래도 성령께서는 시간과 관계없이 활동을 하시는데, 이때는 이미 사도바울도 좀 유명해졌고 말이다. 이때는 이전에 갔던 그 동네들을 한번 더 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서 체포가 되는데, 그 이전에 '두로' 라는 곳을 돌아 '가이사랴' 아는 지방에 갔을 때, '아가보' 라는 선지자가 사도바울의 허리띠를 가지고 이미 예언을 했는데,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가 되어서 큰 일이 나니 가지 말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사도바울을 보고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말렸다는 것이다.
◈ 로마로 가야 하리라 !!
그런데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자기는 체포되는 것이 자기가 가야하는 길이니 당연히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말리지 말라고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에 가서 체포가 되어서 로마로 이송이 되는데,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말이다. 그것이 바로 4차 전도여행(?) 이라는 것이다.
(행 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행 21: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행 21: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행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행 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행 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이렇게 해서 기록된 것이 그 유명한 로마서인데, 그러니 로마서가 나오려면 사도바울이 체포가 되어서 로마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바울에 로마에서 쓴 것이 아니라, 미리 자기가 갈 것임을 편지로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 보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계획인데, 그렇게 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 그때 그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 !!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어떻게 전도를 하고 어떻게 다른 무엇을 하려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봐도 말짱 도루묵인데, 그렇게 전혀 안 되는데 그런데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자기는 분명히 그 사람이 믿을 것이라고 여기고 공을 들이고 했는데, 그런데 엉뚱하게 그 옆집에서 '아멘' 하고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야 임마, 전도는 니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것이야" 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주께서 언제나 함께 하고 있음을 일깨어주기 위해서 말이다. 즉 주께서는 그때 그때마다 우리를 사용하셔서, 깜짝 깜짝 놀라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주님의 일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피곤한 가운데서도 사도행전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자들을 골라내는데 주님께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 바로 그러한 주님으로 일하심으로 인해서 저희들이 구원받았음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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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신약성경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구약은 어떻게 되나요? 구약은 성령님이 오시기 이전인데 말이다.
구약성경도 역시 성령님인데, 물론 구약에서는 '성신' 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같은 분이라는 것이다. 그 성신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성령님이니 말이다.
* 질문 - 혹시 교회에 예쁜 여자가 나오는 것이 마귀의 유혹이 아닌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까, 그런 예쁘고 똑똑한 여자들이 다니는 교회에 자기도 같이 다니면, 그런 포장되는 효과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 같은데, 유독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면 못생기고 머리가 나쁜 사람들은 마귀조차도 포기한 사람이라는 말이 되는데, 물론 집사님이 질문한 그 의도는 알겠는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불교의 터전 위해서 자리를 잡았다고 보면 되는데, 불교는 밖에서 보면 아주 심오해보지만, 그러나 막상 몇 번 다니다보면 "내가 점을 쳐줄 테니 돈을 달라" 라는 곳임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좀 배우고 똑똑한 사람이 보면 너무 천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좀 더 고상한 곳을 찾아보니, 그래도 기존의 동양보다는 서양이 무엇이든지 참신하고 세련되어있다는 것이다. 신도 수입한 신이 훨씬 더 명품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리고 교회당 건물로 고딕양식으로, 자기가 어릴 때 꿈꾸었던 그런 백설공주가 사는 곳처럼 보이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든지, 집안 분위기가 좀 개방된 곳에서 자란 사람들은 당연히 절과 같은 곳보다는 교회에 보다 더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수적인 사람은 교회에 대해서 좀 더 시큰둥한데, 아무튼 그러한 문화적인 영향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교회가 복음을 가리는 하나의 요인이 되고 말이다. 진짜 복음은 십자가의 아픔인데, 그런데 교회당 건물 같은 것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만 빠져버리고, 멋있고 근사한 예수를 찾게 되는데, 그런 것이 하나님의 아픔을 가리운다는 말이다.
◈ 사도행전, 이제 성령님이 !!
오늘 사도행전을 우리가 공부했는데, 이 사도행전의 시발점이 성령이 오시는 것인데, 그렇게 성령이 오게 되면 사도행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님은 예수님의 대타처럼(?) 등장하는 것인데, 표현이 좀 그렇지만, 일종의 멤버교체라고 할까요? 마치 프로 레스링에서 터치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빠지고, 이제 예수님을 대신해서 성령님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바로 그분이 오면서 사도행전은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에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제한이 되는데, 그런데 성령님은 영이기 때문에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시간의 제한도 받지 않고 말이다.
물론 여기서 성령님은 영이시니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좀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성령님은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성령님이고, 동일한 뜻을 펼칠 수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앞에서 이미 다 한 이야기지만, 아무튼 우리가 잊지 마라야 한다는 것이다. (녹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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