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101112요일4장20절a
2010-11-24 00:29:09 녹취 : 박온정
요한일서4장1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개정4:19 』그 다음에 상당히 어려운 말 나오지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그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두 가지 해석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두 가지 해석을 할 수가 있는데 어떤 해석이 있냐 하면 여기, 사람 대 사람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 이 말입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사랑했을 때 1단계 이웃을 사랑하고 난 뒤에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 한해서 어떤 자격이 주어지느냐 하면 2단계 하나님 사랑할 자격이 주어진다, 이렇게 보통 해석을 하게 돼있죠?
이것은 1단계 안 거치고 2단계부터 성급하게 ‘나는 하나님 사랑한다,’라고 나오게 되면 1단계를 안 거쳤기 때문에 이것은 사랑한 것이 아니고 거짓말 하는 것이다, 라고 해석을 해 내요. 이런 해석에 있어서 문제점이 뭐냐 하며는, 사랑을 행하는 주체가 누가 됩니까? 우리 인간이 되겠지요? 1단계와 2단계.
인간이 되기 때문에 사람이 누구를 사랑한다 할 때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결정을 누가 내립니까? 본인이 내리겠지요. 이정도 하면 사랑이고 이정도가 안 되면 이건 사랑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겠지요. 촌에 있는 부모께 용돈 보낼 때 49800원 보내면 사랑 아니고 5만원 보내면 사랑이다. 이거는 구가 그렇게 결정하냐면 자기가 결정하는 겁니다.
한 달 수입이 2천만 원 되는데 5만원 보내면 사랑입니까? 그거는 껌 값도 안 되지요. 그래서 보이는 이웃을 사랑할 때 보이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결정을 본인이 내리기 때문에 사랑했다고 하는 순간 여기는 사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이미 잔재돼 있던 법이 나와 버리죠. 법이. 이정도면 사랑이다, 하는 자기 법이 나오지요? 이런 자기 법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우기면서 그 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해봤자 이거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사랑이 아니고 자기 사랑으로 ‘나는 하나님 사랑했었어,’ ‘내 법에 의해서 합당하게 나는 사랑했었어,’ 라는 식으로 정당하게 나설 거라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 하나님 사랑이라 할 때 우리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그 하나님이라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가 지어낸 거예요. 자기가 만들어낸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덩달아 뭐도 함께 만들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이 뭐로 만들어내느냐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어떻게 섬기는 것이 기쁘게 하는 것일까? 라는 그 법도 누가 만드느냐 하면 본인이 만들어요.
십자가마을에 어떤 분이 제게 질문 하나 했잖아요. 자기가 돈도 없는데 어느 양로원으로 가야 하느냐고 했잖아요. 그걸 보고 제가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누가복음이 생각나요. 형에게 동생이 있는데 형이 아버지 재산을 약속의 유업에 의해서 다 가져갔어요. 이거는 자기 법에 어긋나는 것이고 그건 동생을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의 몫을 강탈당했으니까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답변 란에 올리듯이 형이 내게 돌아올 유산을 다 가져갔을 때 스승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똑 같은 질문과 답변을 하는 거예요. 억울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이 뭐라 했냐 하면,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이 아니다」이 말이죠. 항상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그냥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이렇게 하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섬기는 것이다,’ 라는 법이 동원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걸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오게 되면, 되레 질문자가 지적을 받아요. 예수님께 질문할 건지 안 되는 건지 합당한 질문인지 분간도 못하고 질문했다고 오히려 추궁만 당하고 지적만 당할 뿐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답변했잖아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 자체가 십자가 앞에서는 질문이 안 되는 겁니다. 갈 곳이 없다는 거예요. 자기 있는 곳은 갈 데가 아니고 뭐냐 말이죠. 자기 있는 그곳이. 왜 어디로 가야 됩니까. 자기는 예수 믿기 때문에 불교에서 운영하는 곳에 못 간다 하는데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을 깨닫는 게 예수 믿는 거거든요. 이런 질문은 예수님을 자기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궁금한 것은 그 사람이 예수 믿는다 하고 하나님 믿는다 할 때, 그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 믿기, 예수 잘 믿기가 어떤 나름대로의 법칙을 가지고 법칙 안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마 이럴 겁니다. 하나님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 것이다. 불쌍하게 되면 주께서 안 불쌍하게 만든다, 이래도 되겠지요. 그들이 생각하기를. 그러면 뭐가 불쌍한 겁니까? 불쌍하다, 안 불쌍하다는 것을 인간은 자기 처신에 의해 만들어낸다 이 말입니다. 제가 하는 말은.
불쌍하다 안 불쌍하다, 를 제가 수십 번 이야기 했습니다만 트레이닝복만 입고 있어도 우리 전목사님도 아프리카 가면 중산층에 속합니다. 트레이닝복만 입고 있어도 아프리카에서는 중산층에 속할 때 뭘 가지고 불쌍하다, 불쌍치 않다, 로 되어 있느냐 성경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모르면 그게 판검사가 돼도 불쌍하고 탕자가 되어 재산 다 날아가도 아버지를 알면 그것이 유복한 가정이고 전혀 불쌍하지 않고 복된 귀한 시민이 되는 겁니다.
세상에 불쌍한 것 중에서는 예수님이 젤 불쌍하죠. 그 다음에 스데반집사와 사도들이 불쌍하고 사람들이 불쌍하지 않으려고 예수님을 미워했잖아요. 이거는 진짜 예수님을 만났을 경우에는 누구든지 이 지경보다 더 나쁜 지경이 안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처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예수님은 그런 잣대로서 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 할 때 이 사랑의 대상은 남이 아니고 누구에 의해 한다는 말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한다는 겁니다. 네가 불쌍한 것을 알아? 네가 네 주제를 알아? 라고 지적하는 그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 속에 숨어있는 죄까지 다 들추어내서 우리가 얼마나 일방적으로 우리 위주로 살아간다는 것을 다 노출시키는 그런 버거운 사랑.
그 버거움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외면해버리고. 외면하면 또 쫓아오죠. 쫓아오면 죽여 버리고.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이웃사랑 나왔을 때는 누가복음 10장인가에 나오죠? 이제는 성경구절도 못 외우겠어요. 선한사마리아 비유라고 돼있어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남들이 다 그렇게 말을 하니까 해야 되는가 싶어서 하지만 -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라는 거 알지요? 주제가 뭐냐 하면, 주제는 율법을 어떻게 지킵니까? 가 주제였고 약간 주제에서 나가보니깐 이웃을 어떤 식으로 사랑해야 됩니까, 라는 이게 포인트 아닙니까?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느냐’ 사랑이란 개념은 재껴두고 이웃이 무엇이냐, 그 질문을 한 거예요. 이웃을 사랑하라 에서 사랑은 알고 나는 아는데 이웃이 누군지 모르겠다 해서 조금 더 힘들게 질문한 거예요.
그런데 서기관이 누구보고 따지냐 하면 예수님과 대화한 거예요. 예수님과 대화 할 때 이웃이 누구냐고 할 때 이웃은 이러하다. ‘네 이웃은 나다’라고 할 때 너무 이게 논리적으로 너무 멀잖아요. 그렇죠? 간격이 너무 떨어져 있잖아요. “이웃? 네 이웃은 나야” “율법? 내가 율법 지켜서 왔어” “이웃 사랑하는 사람 보고싶다고? 날 봐!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날 앞에 두고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냐고 묻는 게 말이 되나?”
하나님이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냥 오신 게 아니에요.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고 율법 완성하는 것 속에 이웃을 사랑하게 돼 있고, 그래서 사랑의 대상이 누구란 말입니까? 사랑의 대상이 바로 주제파악도 안 되는 우리 자신이잖아요. 사랑하게 되면 요한일서의 말씀처럼「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그게 화목제물이라는 것이 딱 맞아 들어간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요한복음10장은 십자가 지시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 이후라도 성령이 아니면 몰라요. 일단은 이전이니까 역시 모르게 되죠. 십자가의 의미도 모를뿐더러 성령이 와야 십자가 의미를 알게 됩니다. 논리가 없기 때문에 미리 보게 되면, 이웃, 사랑, 하나님, 예수님 할 때 우리가 그냥 이웃, 사랑, 예수님, 하나님 하게 되면 우상이 되는 겁니다.
다시 얘기할게요. 내가 개념을 생각하게 되면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뭐가 있냐 하면 법체제가 있어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법체제가 있다 말입니다. 법체제를 총동원해서 이거 하면 예수님 섬기는 것이고 이정도 하면 이웃이 되고 이정도 하면 사랑이 되고 이정도 하면 하나님 섬기는 것이다. 빈속이 아니라 옛날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들이 꽉 들어차 있는 것으로 들이밀게 돼 있어요.
우리가 대신해서 한 것이 누가복음10장에서 누굽니까? 서기관이라는 사람이 우리 대신 질문을 해 줬잖아요. 여기 율법사도 있어요. 율법을 어떻게 지킬까? 율법이 나름대로 있는 거예요.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지킬 때 어떤 법적인 것을 행사하면 됩니까? 라는 것은 나는 이정도 돼야 율법 사랑이고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 나름대로 잠재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사실은 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것이 자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주위에서 주입시킨 것이고 환경에 의해 교육된 것들이죠. 이 사람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예수님과 이야기 한 거예요. 지금 이웃사랑을 말할 때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주어진 거예요. 하나님 성부께서는 성자사이에 이 모든 율법이 다 들어갑니다. 이걸 가지고 약속이라 하고 언약이라 하는데 이런 경우에 무슨 언약이라 하냐면 ‘모세언약’이 되겠지요.
모세언약에 이웃사랑, 신명기에 나오지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신6:5) 있죠? 그 내용이 먼저 창세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사이에 그것이 이미 연결돼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쭉 잡아 댕기면 거기에 진드기처럼 쭉 따라 나가는 게 뭐냐 하면 율법이 따라 나가는 거예요. 그 율법관계, 언약 적 관계, 약속관계에 의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찐득찐득하게 안 떨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하신 모든 일은 결국 모든 율법완성을 위한 일이에요. 십자가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다 이루었다 했지요? 제가 언젠가 얘기했듯이 십자가를 믿게 되면 뭘 다 믿는 것이다? 율법을 다 이룬 것이 된다 말이지요. 이러한 이웃사랑의 혜택을 입은 사람 중에 누구냐 하면 간음하다 잡힌 여인, 그 사람이 엄청난 혜택을 받았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율법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문젠데 간음한 여인은 율법에 해당되지 않잖아요. 왜냐면 예수님이 아니니까. 그러면 율법 밖의 인물이니까 율법이 없을 수밖에 없지요? 문제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만 율법을 어겼다고 우기는 바리새인들이 문제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던 그 율법을 땅에 글로 써버린 거예요. 여기에 율법에 죄 없는 자가 누구인가 쓰니까 다 도망갔잖아요.
도망갔다는 말은 아까 질문한 사람처럼 갈 곳이 없다 이 말입니다.ㅎ 도망가봤자지 도망을 왜 갑니까. 참 이상하죠? 그렇게 지적을 받았으면 돌 놓고 ‘잘못 되었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하면 구원받을 건데, 도망가긴 왜 도망을 갑니까. 예수님과 안 놀겠다 이 말 아닙니까. 그래서 질문/답변을 할 때 마음에 안 들다 하더라도 삐지고 도망가지 마시고 왜 그런 답변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는 그런 기회가 되어야 해요.
질문 자체가 그동안 알았던 예수 믿는 거하고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잘못된 질문이라는 지적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도망치기 바빴잖아요. 가봤자 어딥니까. 가봤자 자기 집에 가지요. 가봤자 거기서 늙어죽잖아요. 늙어 죽으면 어디 갑니까? 늙어죽으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오잖아요. 갈 곳도 없어요. 우리가 교회 나오는 걸 대개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 나가봐야 갈 곳이 없습니다. 교회 안 나와 봤자 갈 데가 없다니까요. 교회가는 시간에 야구장에 가도 소용없어요.
그 간음한 여인이 혜택을 입었잖아요. 혜택이 뭐냐 하면,「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그 근거가 예수님께서 어디에 근거해서 남을 용서하는 근거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했던 그 모든 율법을 이루어버리면 모든 약속은 예수님 임의로 할 수 있는, 그런 예수님이 완성한 말씀이 됐을 때 이것을 성경은 한 글자로 하면 이것을 <주> 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오른편을 통해서 하는 이름이 말씀을 유포 시킵니다. 유포시켜 놓으면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내 <주>에게(시편110편) 모든 걸 다, 율법을 어기는 모든 것들은 다 지키라 할 때에 그 때 오른편, 주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주의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앞에다 두 자를 붙여 <심판 주>입니다. ‘심판 주’라 하는 것은 구원한다, 저주한다 를 결정할 수 있는 자리가 주의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간음한 여인에 대한 최종판결을 사람이 내립니까, 주님이 내립니까? 주님이 내리지요. 예수 믿는다는 게 내 행위로 운명이 결정되는 게 아니고, 내가 구원 될지 안 될지, 내가 구원받고 싶다고 구원되는 게 아님을 믿는 게 예수님을 믿는 거예요. 이미 내 운명은 그쪽 손에 넘겨놓았습니다. 그걸 저는 믿습니다. 왜? 주님은 심판 주니까!
주님께서는 여자 옆에 어떤 심판 주도 없음을 모두에게 물었으니까 “너를 고소하는 사람들은 다 어디갔지?” 라고 묻지요. 그러자 여자 하는 말이 뭐라고 하냐면 “아무도 없나이다.” “너를 정죄한 자 어디 갔느냐?” “아무도 없나이다.” 성도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우리 곁에는 아무도 없어요. 계속 묻는 거예요. 두 시간 있다가 또 물어요.
“집사님 곁에는 누가 있습니까?” 주님은 아무도 없다고 하셨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래도 이웃사랑은 해야될 것 아닙니까. 이웃사랑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과하여, 예수님을 거쳐서 이웃사랑이라는 그걸 설명하려는 겁니다. 그냥 사랑해버리면 내가 생각하는 내가 스스로 심판 주가 되어서 발생시키는 법적인 체제가 있어서 나는 이정도 하니까 복 받았고 이정도 하니까 벌 받았다는, 이 경계선에서 법과 징계를 받는, 내 나름대로 심판 기준이라고 간직하겠다 할 때 주님께서 “네가 심판 주 다 해라 네가” 그래서 사람은 그 기준에서 떨어지면 인간취급 않고 그게 또 높아버리면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기준이 우리한테 어떻게 있는지를 모릅니다. 이게 어려워요. 우리는 평소에 법적인 기준을 내가 만들어냈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몰라요. 모르는데 성경말씀이「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오면서 같은 교회에서 복음 안다고 사랑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내 쪽에서 사랑하는 법적인 사랑과의 마찰을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경솔하게 사랑도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우겨댔구나’ 그 경솔함을 주께서 노출시키는 계시로써 지금도 이 성경말씀은 유효합니다.
계속 이야기해봅시다. 「네 주위에 누가 있느냐?」“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라고 해서 구원 하느냐 정죄하느냐 결정은 우주에서 오직 주 되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10장에 봅시다. 우리가 “내 이웃이 누굽니까?” 할 때 -이런 것이 상당히 어려워요. 예수님을 크게 그리겠습니다. 서기관은 작게 그리겠습니다.- 서기관이 묻습니다. 서기관은 나름대로 자기가 율법의 주체로 봐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라는데 내 이웃, 나의 이웃 서기관의 이웃이 누구십니까? 물었어요. 방향이 서기관에서 먼저 예수님께 이렇게 나오죠? 그런데 진실은 우리가 십자가의 영을 받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지요?
그러면 이 이웃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누가 임의로 정해요? 주님이 임의로 정하죠? 예수님이 지옥 갈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로마서9장에서는 그리 안됐어요. 로마서9장에서는 하나님이 에서도 사랑하고 야곱도 사랑하십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형제간인데. 그것도 쌍둥이인데. 처음부터 인류는 싸우게 돼있어요. 처음부터 모든 인류는.
인류의 내막은 계시에 담겨있지 인간이 인류문화를 연구한다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숨어있는 계시가 등장할 때 에서와 야곱은 싸웠고, 야곱은 약속의 노선이었고 에서는 혈육의 노선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 노선이 인류입니다. 인류는 그 두 가지 노선 외에는 없어요. 이것이 인류에게 그렇게 궁금했던 비밀입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그 두 가지 외에는 다른 노선이 없어요. 약속에 속한 노선과 혈육에 속한 노선. 혈육에 속한 노선은 율법의 저촉을 받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저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또 장담할 것은 뭐냐 하며는, 나중에 천국 가는 사람은 오직 성경책에 기록된 사람뿐이고 행함책에 기록된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행함 측에서 천국 가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는 생명책이고 하나는 행함 책입니다. 이것도 저는 장담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걸 안 믿어요. 자기 내부의 체계에서는 그게 안 나오니까. 아이디어가 안 나와요. 이것은 하나님 속에 비밀로 나오지 G20 회의 할 때 포도주 건배나 했지 우주의 비밀은 안 나옵니다. 천국의 비밀은 안 나와요. 경호원 부르고 돈만 썼지.
예수님 쪽에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서기관들에게 차단시키는 거예요. 차단. 이걸 가지고 철학적인 용어지만 <인식의 단절>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인식하는 것과 끊어지는 것. 하나님과 주님은 내가 생각한대로 존재할 것이라는 그 인식 자체가 거절, 차단돼버리는 거예요.
누구를 이웃이라고 합니까?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 답변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되레 주님이 이 사람에게 물어요. 누가 그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합니다. 그 말은 서기관 이 사람이 무슨 사람이 됐느냐 이 말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안 되면 너는 아무리 애써도 너는 이웃을 모른다 이겁니다. 강도 만나봐야 이웃을 안다 말이지요. 강도의 이웃이 아니고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입니다.
그러면 강도의 이웃하고 강도의 이웃이 누굽니까? 돈 많은 사람이 다 강도의 이웃이죠? 지금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은 뭡니까. 다 빼앗기고 얻어맞았지요. 누가 이웃이 되겠습니까.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은 뭐냐 하면, 이웃을 생각하기보다 억울함이죠. 억울함. 굉장한 억울함인 거예요. 왜? 왜 나를? 왜 하필이면 나를? 하필이면 그 많은 자식들 중에 왜 내 자식을? 그 많은 남자 가운데 하필이면 이 남편을? Why? 그 많은 인생 가운데 하필이면 내 인생. 그 많은 부모가운데서 하필이면 이 부모 밑에 태어났느냐는 겁니다.
결국 억울함을 호소하겠지요. 억울함을. 이 억울함을 호소할 때 이미 이 사람은 무슨 자격이 안 되는가. 하나님의 율법을 거론할 자격이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거예요. 억울할 잽이 되냐 이 말이에요.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 뜻대로 존재하는데, 존재케 해놓으니까 내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왜 하필이면 나냐, 따질 수 있는 그게 되냐 이 말이지요. 되지를 않죠.
그러니 이웃을 얘기하고 율법을 얘기하는 자격자 자체에서 우리는 탈락입니다. 우리는 건드리면 분통 터트리는 겁니다. 우리 몸 자체가 분통이고 그대로 반발이에요. 하필이면 왜 나를! 심지어 모기 한 마리에만 물려도 그 많은 가족 중에서 왜 하필이면 나를 모기가 물도록 하나님께서 모기의 비행경로를 그렇게 조종했느냐 말이지요. 왜 그렇게 하느냐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인식 판 자체를 뒤엎으려고, 인간의 모든 인식 자체를 뒤엎으려고 여기 요한일서에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는 이 바탕. 이 말씀도 율법이거든요. 이 법도 하나님 법 아닙니까. 누구든지 하나님 사랑한다하고 형제를 미워하게 되는 인식 자체를 뒤엎으려 하는 거예요.
강도만난 자리에 서지 않으면 이웃이 안 보이니까 결국은 무슨 문제냐 하면, 자기를 보태지 말고 자기의 본래의 자기자리 있잖아요. 본래의 자기 자리로 찾아갔을 때 비로소 율법의 정신이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래의 자리는 무슨 자리냐 하면, 이거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리, 이거는 악을 바락바락 내세우면서 하나님에게 대드는 자리에요. 왜냐! 우리의 자리는 악마의 자리기 때문입니다. 뱀에 의해서 사주 받는 자리고 뱀에 의해서 조종 받는 자리기 때문에 우리의 외침은 곧, 우리의 악마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해서 외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입만 벌리고 무슨 행동을 해도 전부 다 이건 뭐냐 하면, ‘이래서 나는 하나님이 싫단 말이야!’ 라는 그런 뉘앙스를 띠고 행동하고 말하게 돼있어요. 기도회도. ‘내년도 예산 신청 기도회’ 이 내용이 성경 에스겔에 나옵니까? 예레미야에 나옵니까? 어디에 나옵니까. 신명기에 나옵니까? 내년도 예산 신청 기도회. 어디 나오죠?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좁은 길로 갑시다.」라는 말은 어디에 나옵니까? 마태복음7장에 나오죠. 우리 좁은 길로 가도록 다 기도합시다. 하자 없지요? 예산이 적을 때는 방향이 무슨 길이 됩니까. 좁은 길에서 방향이 넓은 길이 되겠지요. 제목을 조금이 아니라 2천5백억 줘버리면 널널한 길이 되겠지요. 떵떵거리며 큰소리치는 길이 되겠지요. 결국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하는 일이 하나도 내 맘에 안 든다는 뜻이에요.
하나님 하시는 일이 하나라도 제대로 일 하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일 같은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꼭 기도를 않으면 응답 안 해줘, 이렇게 무능한 하나님이다 이 말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세 자로 하면 뭡니까. 억울함 이라는 거예요. 알아서 딱딱 정해주면 이런 기도하는 수고 안 해도 되는데, 이순재 씨가 하는 대사에 ‘못난 놈’ (하나님 죄송합니다 ㅋ) 못난 무능한 하나님을 둬가지고 이 똑똑한 우리가 힘들게 됐죠. 클클^^ 기도해줘야 해요. 얼마나 게으름뱅이 같으면 기도해줘야 눈 뜨고 나오겠어요.
그게 결국 인간은 말씀이 완성된 자리로 가야될 건데 말씀과는 관계없이 내 속에 있는 욕망이 원하는 자리, 마귀가 요구하는 자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모든 돌이 만지는 대로 금덩어리로 변하고 모든 돌이 떡으로 변하는 자리, 그리고 ‘소문 듣고 왔지롱~!’ 하면서 문전성시를 이루는 그거. 그리고 세상 모든 권력들, G20의 모든 권력들이 내 앞에 오는, 그런 모든 것에 결부된 하나님, 그리고 거기에 동원된 하나님, 그런 식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유도하기 위한 나의 법적인 조치. 이런 것들이 이 세상의 신앙입니다. 실제상황입니다.
이걸 생각해야 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부러 힘들게 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은 이 모든 피조물로 주로서 존재를 받는 것,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것, 감사를 받는 것, 찬양을 받는 것이 하나님 일에 전하는 목적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께 찬양이 되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보내는 그 본래의 자리가 있어요.
그 본래의 자리는 우리가 만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만들어준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에 들어가면 그것이 하나님께 유일하게 영광이 되는, 소통이 되는 그런 조명발을 받는 빛을 받는, 복음의 광채가 비로소 눈에 확 들어옵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샤워기 앞에 가야 물을 받지요, 멀찍이 하면 샤워기 백날 틀어도 물 안 오잖아요.
하늘의 복이 쏟아지는 그 자리를 주님께서 만들어놓은 자리인데 그 자리가 뭐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강도만난 사람 같은 처지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아니라면 항상 하나님께 원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인데 진짜 탕자라든지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은 이게 억울한 것이 아니고 우리 조상 선악과 따먹어 우리가 마귀의 종이 되어서 이러한 대우는 마땅히 받을 처참한 대우 받는 게 맞습니다. 라고 그 자리에 섰을 때 비로소 이 자리에서 진정한 이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게 누굽니까? ‘누가 나를 구원하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세상 사람들 바쁘다고 그냥 지나갈 때 예수님이 우리를 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서기관이 묻지요.「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웃이 누구냐고 물을 자격이 된다? 안 된다? 아예, 자격조차 안 된다 입니다. 대저 너는 내가 만든 자리에, 주님이 가신 그 길에 따라가지 않고, 주님이 동쪽으로 가면 자기는 서쪽으로 가 있으면서 자꾸 묻는 거예요. ‘이웃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율법을 자기가 들고 있다 이 말이지요.
자, 그렇게 돼보면 내 이웃이 누굽니까? 율법을 지키겠습니다, 라고 입을 벌려서 이야기하는, 그리고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 했던 그 바리새인들이 결국 누굽니까. 누구의 훼방꾼이에요? 예수님의 훼방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훼방꾼이 되요. 하나님 사랑은 여기 오늘 본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하나님 사랑이 됩니까, 안 됩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은 물음이에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노라,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쉽게 해결 됐지요? 하나님이 보여야 사랑하지, 라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말입니다. 핑계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형제가 있잖아요. 형제. 형제를 사랑한다는 말은 이게 사람을 사랑한 게 아니에요. 형제란 말은 남이 아니라 한 가족, 패밀리, 한 가족이라는 뜻이잖아요.
가족이라면 어떤 관계에 있을 때 가족이라 합니까. 그거는 부모가 한 분일 때 가족이라 하는 겁니다. 이 쉬운 걸 가지고 또 어렵게 이야기? 부모가 공통 부모라고 하면 형제라고 하지요. 예수님이 주가 되시죠? 그러면 예수님을 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이 사람들은 형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형제와 형제 아닌 자, 형제와 형제 아닌 자를 구분해야 됩니까? 구분하지 않아야 됩니까? 해야 되지요.
이거는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고 제 논리에 억지로 꿰맞추기 위해서 분리시키는 게 아니고, 요한일서 자체가 이미 분리하고 있습니다. 사람 대 사람, 인간 대 인간으로 분리하고 있어요. 요한일서 4장4절에 보면『4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5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개역개정』
저희와 우리를 어떻게 합니까. 구분하지요? 다시 말해서 7절에 보면『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이렇게 돼 있어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형제와 형제 아닌 자를 분리를 해주야 되요. 이 분리를 형제 아닌 자를 사랑 안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탈락한 게 아니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 사랑이 될 수 없다 그 말이지요.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은 형제 사랑을 통해서 구체화 되는 겁니다. 형제사랑과 하나님사랑이 1단계 2단계 있는 게 아니에요! 형제사랑이 곧 하나님사랑이니깐 그걸로 족하죠. 그러면 형제사랑하려면 내가 형제를 사랑해야 되는 내 속에 법이 동원되면 안 되겠죠. 그렇다면 우리와 형제 사이에는 공통적인 주님이 계시지요. 주님이 십자가 지셨기 때문에 항상 주님의 일이라는 것은 지상에서는 십자가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왜냐면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능력이라 하는 구원의 능력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잖아요.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지 부활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에요. 부활은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이 되게 하기 위해서 뒷받침해주는 환경을 두고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다시 쉽게 말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 다시 살아났음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여망이고 희망사항이기 때문에 이거는 구분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기능이 전적으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잖아요. 그 ‘죄’ 라 하는 것도 평소에 윤리 도덕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 자리가 평소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했던 그 자리다! 하는 것을 고발하는 자리가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사람에게 떠밀려서 죽었으니까. 떠밀려서 죽은 죽음이 그대로 우리에게 되돌아와서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 앞에서 ‘맞습니다!’ 우리는 나밖에 몰랐고, 나밖에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공격했습니다! 라는 자백을 받아낼 게 아니냐 말입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강도가 되고 강도만난 사람은 누가 되겠어요? 강도만난 사람은 예수님이 되겠지요. 우리의 이웃이 되는 거예요. 그분은 우리의 이웃이 되고.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던 법적인, 이것은 사랑이고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라는 모든 법적인 계기에서 사랑을 우리는 항상 만들어내요. 만들어내는 이유, 그게 주체의 형성과정인데 우리는 어떤 사건이 지나고 나면, 그 사건을 내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 사건을 나를 위한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결국은 주체라는 것을 연결시켜요. 결부를 시켜버려요. 결부를 시켜버리면 ‘그 사건은 말이야, 나를 구원할 사건이야. 아, 기분 좋아!’ 자기영광을 위해서 자백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서 앞자리에 앉아 은혜 받았다고 하면 ‘나도 은혜 받았다’ 해가지고 같은 자리에서 일어난 사건 갖고 주체가 두 개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위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모든 자기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이것을 다시 십자가 앞에 가야죠. 가게 되면, 십자가에 가서 십자가 형태로 건너온 게 아니고 십자가에 가서 우리는 소멸되어 버리죠.
소멸되게 되면 십자가 뒤에 숨어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은혜를 주시고 형제들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우리에게 무슨 은혜를 주시냐 하면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형제는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줘버립니다. 그러면 둘이 사랑하면서 영광은 누가 받습니까? 이런 능력은 주님한테 십자가에서 나왔음을 공히 증거 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의 복음을 알았을 때 저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는 형제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 간단한 문제예요. 홍홍^^ 형제 아니라고 치면 되요.
기어이 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어디 빚쟁이도 아니고.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렇게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안 됩니다. 우리사랑가지고 하면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데 우리사랑이 아니고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주님께서 나온 은혜고, 그런데 저 사람에게 사랑이 온전한지 모르지만 나는 형제를 사랑했는데 저쪽에서 먹혀들지 않으면 이거는 주님께서 저 사람을 사랑 않은 게 되요.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은 사람을 우리가 왜 사랑합니까. 이게 말 되는 얘기에요? 이게? 생각해 보세요. 야곱이 에서를 사랑했습니까? 사랑하지 않았죠? 에서는 야곱을 사랑했습니까? 그러면 둘 다 사랑하지 않으면 되요. 그런데 어느 날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누구를 사랑합니까? 형을 사랑하지요? 그런데 형은 야곱을 사랑합니까? 않습니까? 사랑하지요? 일곱 번 절하지 마라, 너에 대해 감정 없어! 할 때 야곱은 형이 나를 사랑한다고 보지 않고 어떻게 봅니까. 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개과천선’ 인간 바뀌었다는 걸 보여줘요.
이것을 가지고 뭐라 하냐면 이걸 가지고, <야곱언약의 실행>이라고 봅니다. 언약의 실행! 그런데 지금은 야곱언약의 실행이 아니고 새 언약의 실행, 십자가의 실행이거든요? 복음을 전할 때 누군가 듣고 꼭 복음을 들을 의무가 없어요. 내가 복음 전하는 것은 내가 주께 받은 사명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지, 내가 이렇게 전도하는데 네가 왜 안 받아줘?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보통 지하철이나 어디 부산역이나 또 서울역이나 예수 믿으라고 고함지르는 거, 그거 사랑 아닙니다! 만약에 이러면 사랑이죠. 서울역에서 누가 담배피우고 있으면 (속삭이듯이) ‘아저씨! 예수 믿으세요.’ 이거는 사랑일 수 있는데 ‘예수~ 믿으세요!’ 메가폰 쥐고 고함을 지른다는 말은 너 한번 당해봐라! 이거거든요. 이래도 반응하지 않아.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에요 도전.
특히 새벽에 서울 지하철 타는데 새벽 다섯시에 전도하는데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하나의 미신이에요. 어떤 미신이냐면 이 시간에 이런 전도 않으면 나에게 벌 내릴 거라는, 귀신한테 쓰인 거예요. 이 짓 않으면 벌 받을까 싶어서. ‘정죄함이 없다’하는데 무슨 벌을 받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뭘 하든지 간에 좋은 말도, 좋은 전도도 심지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쾡과리다 했어요.
더 깊이 얘기하면, ‘이건 사랑입니다!’ 해도 그건 사랑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 사랑으로 다가섭니다. 저는 사랑으로서 천사의 말을 하는 겁니다. 해도 톤이 올라가면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감정실려서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안 알아줘! 그래서 부교역자들이 복음 전하다가 교인들이 안 따라주면 사표내고 나오는데 지 사표 내는 거하고 복음전하는 거와 아무 상관없어요.
사람이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아야 사랑인데, 이익이란 게 뭡니까. 결국 내가 복음 전하면 남들이 팬클럽 만들어가지고 ‘목샤님! 목샤님!’ 이래줘야 어떤 보람이 있다 여기는 것 그것도 이익 챙기는 거죠. 우리는 강도만난 사람에 불과한테. 강도만난 자가 갑자기 재벌2세처럼 행세해서는 곤란하다 이 말이지요. ㅋㅋ 그렇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강도만나야지요.
강도만난 사람이 졸지에, 갑자기 재벌2세 돼가지고 스포츠카 타고 다니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개척교회 하면서 댓명 교회 할 때는 그렇게 겸손했더니만 한 50명 되고 난 뒤에 목에 힘주고 돌아다니면 기가 막히죠? (양아치 수준-녹취자) 그러니까 제가 늘 한 이야기가 뭐냐 하면 복 받은 거요? 그거 저주받은 겁니다. 이 땅에서 복 받은 거요? 달라 해서 받은 복도 그거 저주 받은 거예요.
강도만난 사람의 신분을 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보다 큰 저주가 어디 있어요, 그래? 저주가 좋다고 커피 석잔 먹어가면서 저주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잖아요. 땅을 치면서 저주 달라고! 왜 하필이면 이러느냐고 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도구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보다 더 큰 이웃사랑이 없어요! 밥 퍼! 준다고 이게 사랑이 아니고 복음 증거 해야 되요. 왜? 간음한 여인에게 돈 천만원씩 줘봐야 그거 사랑 아니에요. ‘나는 너를 정죄치 않는다’ 이보다 더 큰, 죄인에게 용서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전한 그것이 전도입니다.
십분 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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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101112요일4장20절b
2010-11-24 14:51:06 녹취 : 박온정
안산101112요일4장20절b / 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자, 이래서 21절까지 했습니다.『요일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개역개정』하나님은 반드시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주님을 앞장세워서, 이 시대는 주님을 앞장세워서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 안에서 오기 때문에 새 언약 안에서의 특징이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을 이 땅의 표본조사에서 구분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에게만 이게 해당되기 때문에 이런 내용,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형제사랑을 통해서 구체화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예, 말 끄집어낼 필요 없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들통 나는 거지요?
그렇다면 하나 물어봅시다. 왜 하나님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겁니까? 질문 어렵죠?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주 안에서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 사람은 내가 선택했습니다. 저 사람은 내가 선택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할 수밖에 없죠. 왜냐면 자기 아들의 희생이 담겨있기 때문에.
「사랑이 여기 있나니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일4:18」이렇게 돼있거든요. 자, 그러면 한 가지 더 물어보면 이러한 사랑, 이런 사랑이 왔을 때, 사랑이 어떤 감정으로 어떤 의제로 어떤 이성으로 어떤 합리성을 가지고 ‘사랑이 왔다,’ ‘안 왔다’ 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 까요? 사랑은 보고 싶다, 짜릿하다 단지 우리 인간들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러한 인간이 느끼는 사랑을 하나님 사랑, 주님의 사랑 앞에서는 그것을 느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왜 없느냐 하며는, 사랑은 주님께 속한 사람과 속하지 않은 사람은 구분되거든요. 주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께 속한 사랑을 아무리 납득하려해도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보고 싶다,’ 이런 식으로 연결시키면 연결이 안돼요. 왜냐면 사람이 연애할 때는 다 보고 싶지요. 예, 심지어 노래가사에 보면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은데, 보고 있으면서도 또 보고 싶은 건데요.
그런데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었더라도 6개월만 지나면 이혼한다고 난리잖아요. 만약에 주님을 그런 식이라면 아무리 보고 싶어도 6개월 지나면 나, 주님 안 본다.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이 갖고 있는 감정을 그대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느끼는 사랑으로 연결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그걸 가지고 뭐라 하냐면, 성령 안에서의 사랑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성령 안에서.
이 사랑은 성령이 와야 (요한일서4장13)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룬다 했어요. 성령을 집어넣어요. 성령을 집어넣으니까 일반인들은 난감한 거예요. 사랑은 다 사랑이잖아. 우리가 누구 사랑하듯이 그렇게 사랑하면 되잖아!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아니거든?’ 이러거든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랑은 우리 동네는 안 통하거든?’ 그렇게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러면 어떡해?’ ‘성령에 의해서만…’ ‘그럼 성령은 뭔데?’ 성령은 또 뭐야?
결국 성령 온다는 말은 하나님 사랑과 우리 사이에는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밀어부칠 수 있는 그런 사랑으로서의 사랑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우리와 우리 사이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반드시 매개체로서 누가 등장해야 되요? 성령이라는, 쉽게 말해서 어르신네가 와야 된다 이 말입니다. 더 쉽게 알기 위해서는 이렇습니다.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는데 단무지가 더 필요하다 이 말이죠. 단무지 필요할 때 홀에서 써빙하는 사람에게 ‘아주머니 단무지 하나 주세요.’ 할 때 그 아주머니가 무슨 역할을 하냐면 성령의 역할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주방 가서 단무지 하나 가져오는 식이다 말이죠. 그럴 때는 주방장이 단무지 안 주는 거예요. 너는 뭘 달라고 할 자격이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는 우리에게 주시게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왜 그러냐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누가 계셨습니까?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되고난 뒤에는 아버지와 자기 사이에 있었던 그 성령님은 방향을 돌려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일하는 게 아니고 이제는 예수님이 택했던 사람에게도 동일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업적들 효과와 축복들을 이제는 우리의 축복으로 돌리는 겁니다. 이걸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아브라함 자손이면 그 유업을 이을 자다,’ 해서 이걸 상속이라 했어요. 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 아들이 받을 상속을 다 받는다, 고 돼있습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미리 약속하기를 아브라함 자손은, -잘 들어보세요.- 아브라함 자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고자 하는 약속을 모두 다 참여될 수 있는 사람이 아브라함 자손이다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 해놓고(갈3장) 자손들이 먼저 나오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자신이 먼저 나와요. 단수. 한 명이 먼저 나오고 한 명이 다수가 됩니다. 이거는 어떤 다수도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수 있다? 없다? 일체 받을 수 없다! 그런 뜻이에요.
그리고 한 명이 누구냐면 예수님으로 돼있고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받을 수 없는, 받을 자격이 없는 다수에게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과 더불어서 예수님이 얻었던 모든 혜택과 영광과 모든 하늘의 복락을 우리는 같이 누리게 돼 있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누리면서 이 신분이 ‘율법의 종’에서 종도 날아가고 율법도 날아가는 율법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율법이냐 아들이냐, 가 아니라 ‘율법의 종이냐’ ‘아들이냐’ 이렇게 되요. 이런 말 어렵죠? 종이냐 아들이냐 도 아닌 율법의 종이냐 아니면 아들이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면 종이냐 아들이냐 하면 이 아들도 율법의 저촉을 받게 돼버려요. 율법의 저촉을 받는 아들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은 동일하게 우리도 율법에서 벗어나는 거예요.(아멘)
더 이상 율법이 주는 정죄에서 우리는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에서는 반드시 저주가 오거든요. 그 저주는 우리를 비켜갑니다. 마치 피를 바르면 저주가 그 집은 타고 넘어가듯이. 율법이 ‘너는 간음했지?’ ‘너는 살인했지?’ 율법이 오지도 않을뿐더러 예수님 보고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이것이 엄청난 실제고 축복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걸 잘 안 믿으려고 해요. 아직 내부적으로 자기 법이 있으니까.
내 기준의 법을 지키면 나는 복 받을 것이다! 안 지키면 나는 저주 받는다는 내부적으로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가 지어낸 그 기준, 경계선이 있어요. 이걸 넘어가면 벌 받을 것이고 이걸 넘어가면 복 받을 것이다, 라는 자기 기준이 있어요. 그런 것이 있어가지고 하나님 아들을 잘 모르죠. 특히 교회에서 헌금문제 나올 때 흔히 일반교회에서는 헌금문제를 구약에서는 강제로 했지만 신약에서는 ‘자발적으로 하셔야 됩니다.’ 자발적으로 하셔야 됩니다, 라는 말을 왜 하는데!
‘자발적으로 하셔야 됩니다.’ 하면 무슨 법이 생기겠습니까? 자발적인 것과 아닌 것에 대한 기준을 또 세우겠지요. 그래서 목사의 임무는 헌금을 어떻게 하시냐는 것이 목사의 임무가 아니고 예수님만 증거 하면 되요. 그런데 목사들은 이래요, 예수님만 증거 하니까 돈이 안 들어오더라, 합니다. 제가 글에 썼지만 복음 전해서 돈을 회수돼야 될 건데 회수가 안 되니까 하나님께 골로새2장을 들고 나와요.
그러면 자기가 복음 전할 때 이미 돈 될 복음이라고 노리고 깔고 복음을 전하는 게 되잖아요. 그걸 우리 주님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아멘) 교인들은 모르죠.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너를 알 수 있나?- 사람은 사람에 대해서 몰라요! 모르지만 주님은 다 아시잖아요.(아멘) 이거 전하면 돈 될 거야! (속셈, 노림수) 깔고 전하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맞장구 쳐 줄 의무 없습니다.
자, 5장 봅시다. 요한일서5장『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아, 어렵다. 정말 어려워요. 한번 적어보겠습니다.「예수께서」그다음에 나오는 용어가 뭐죠?「그리스도」「 믿는 자」그 다음에 뭐죠?「하나님께로 난 자」죠. 요한복음6장을 그대로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요한복음6장에 보면 주님께서 사람들을 -이건 이번 주일에 설교할 건데 미리...-사람들을 자기 주변에서 다 떨쳐 보내는 용도로서 오병이어를 행하셨어요. 자, 이래도 안 떨어질래? 하면서 오병이어를 한 거예요.(아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이카루스에 대해서 전에 얘기했죠? 가짜 날개를 달고 태양 가까이 가니까 날개가 다 녹아버린 것처럼.
예수님한테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인간은 자기를 몰라요, 자기가 가짜 신자인지 진짜 신잔지 모른다 이 말이죠. 모르면, 친절하신 우리 주님께서 ‘너 가짜 맞거든?’ 하는 것을 티를 나게 만들어줘요. 우리주님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들에게 그들의 요구한 바를 들어줌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요구한 것을 얻었기 때문에 주님과 결별하게 만드는 전략을 주님께서 세우신 겁니다.
우리가 설교 듣다보니까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우리가 어디서 양식을 먹습니까? 할 때 어린아이가 도시락을 가져왔습니다. 떡을 줬어요. 배불리 먹었어요. 그들이 배불리 먹기 전까지는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흠모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한 거였어요. 아까 사랑 나왔지요? 인간이 할 때는 이 정도 하면 사랑이겠지, 하고 나타낸다 이 말이지요. 본인도 몰라요. 자신도 그게 사랑인 줄 알았는데 막상 흡족하게 주님한테 혜택 입고난 뒤에는 더 이상 그들은 주님과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소경 10명이 주님께 눈 뜨고 난 뒤에 가버렸잖아요. ‘아이구, 고맙습니다.’ 하고 다 가버렸다고요. 다만 돌아온 한 사람이 이상하죠. 그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자예요. 세상에 속한 사람은 기적 받고 다 가버립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우리도 기적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사람은 존재 자체가 기적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온 게 아닙니다.
제 아내가 어젯밤에 이런 얘기 했어요. 펀드해서 수입 오르고 안 오르고는 이거는 하나님께 달려있지!(폭소) 이거는 완전히 하나님께 달렸다 이러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 얘기해요. 주식도 마찬가지고. 사람이 살아온 것이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 죽는 자리에 가 있고 않고는 이거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참새가 떨어지고 안 떨어지고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사무엘상2장에 나오잖아요.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케도 하시고. 이거는 사람 손에 달려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기적을 많이 받았지만 사람들은 그 기적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는 점점 더 주님과 다른 길로 가버리죠. 그래서 주님께서 오병이어 행해서 다 떠나게 만들어요. 이제 남아있는 사람이 12명이죠. 이 사람들도 가야돼요. 왜?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 “가지 왜? 너희들도. 다 갔는데. 뭣 때문에 남아있냐 뭣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보내지 아니하면 절대로 내게로 올 수 없다고 돼있어요. 이 말은 열 두 제자에게 그대로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열 두 제자야, 너희들도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나에게 붙일 수 없는데 내가 너희 열둘을 택했다는 겁니다. 너희도 가야되는데 내가 너희를 열두 명을 택했다는 거예요. 택했을 때 너희 중 하나는 마귀니라. 마귀를 택한 거예요.
마귀를 마귀라고 보지 말고 나쁜 천사라고 봅시다. 나쁜 천산데 주님은 천사를 부릴 수 있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2장에 나와요. 천사를 부릴 수 있는 분이 천사한테 부림을 당하는 분으로 하실 자유가 있어요. 마귀한테 놀림을 받고 마귀한테 조롱을 받는 그 자리에 놓일 수 있는 자유가 주님한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악마를 부릴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마한테 수모를 당하는 위치로 왜 갔습니까?
악마와 다투려하는 게 아니에요. 거기에 누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택한 자를 건지시기 위해서. 만약에 얼음장 밑에 사람이 있다면 얼음장을 깨고 들어가야 되잖아요. 추운 날 주님이 웃통 벗고 들어가야 되는데 들어가기 위해서 차가운, 더러운 세상에 주님께서 타고 들어온 거예요. 타고 들어올 때 얼음장 밑에는 뭐냐면,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죄인으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죽지 않고 얼음장 밑에서 튀어나갈 수 없어요.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이 세계에서는 죽어야 튀어나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죽음의 세계예요. 어느 누구도 이 죽음 밖으로 못 나간다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얼음장 밑의 악마의 세계가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는 걸 주님의 합당한 조치가 되는 겁니다. 지금 그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욕심들을 내지 마시고, 살아있는 것도 참 기적이다. 전목사님 볼 때마다 늘 그런 생각합니다.
산에 올라가서 안 미끄러지고(바위 타다가) 바위를 탈 힘을 주신 것도 기적이니까, 그리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떨어지면 그것도 기적이고.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내게 올 수 없다」할 때 거의 백이면 백이 ‘나 구원 받았다’는 쪽으로 해석을 해버립니다. 아! 실망스럽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번잡스럽게 온 사람들 오병이어로 떼어 보내고 ‘너도 갈래?’ 라고 이야기했고 ‘너를 선택했다’라는 어려운 상황의 이야기가 ‘나 구원받았다’ 그 이야기 듣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모든 세상 돌아가는 건 아버지와 아들사이에서 결정 난다는 그걸, 이야기하려는 관심사가 거기 있는데. 예수님의 관심사는 아버지와 아들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것은 굴러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사람들은 그렇게 힌트를 주고 싸인을 그렇게 줬건만 그걸 보면서 ‘그럼 난 구원 받았네’ 자기 구원받은 것만 생각한다고요. 그러니까 아까의 요한일서5장에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 구원받았어.’ 라는 그게 아니고 예수께서「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라.」초점이 어디 있습니까? 나 구원받는데 있는 게 아니고 세트가 어디 있어요? 예수님은 그리스도다! 거기에 관심 있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 교회부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성장에 있는 것도 아니에요. 살림살이 나아진 게 문제가 아니고 관계없이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은 주님이고 강건함 가운데서도 주님은 주님이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3절『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무겁지 않으면’을 다른 말로 하면 가볍죠.「내 짐은 가벼움이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짐은 가볍다」조건이 하나 있어. 내게 배우라.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총괄하는가 보라. 내 짐은 가볍다. 되어 있습니다. ‘가볍게 살자’ 이 말이죠?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 계명을 지키는 힘 같은 것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리스도는 그냥 노시는 겁니까? 지켜보고 ‘잘하나 보자,’ 하며 지켜만 봅니까? 아니면 예수 믿는 사람 속에 그 힘이 함께 역사하는 거예요. 같이 일하겠지요.
일에 있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다.’ 라는 것을 모든 바닥에 기어가는 개미를 통해서도 집에 있는 거미줄을 통해서도 일어나는 어떤 모든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아 주님은 이래서 그리스도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주님의 사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아까 질문했잖아요. 이웃을 내게 붙여줄 때 항상, ‘주님은 이 사람을 왜 붙여줬을까?’ 생각하는 거죠.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오게 되면 ‘죄 지었느냐, 내가 지 안 지을 것이다’ 이걸 생각해요. 그러면 상대방은 뭐가 되냐 하면, 나의 의로움을 이해서 하나의 테스트용도로 내게 온 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람보다도 내 잘남과 착함을 유지할 수 있느냐, 바짝 긴장상태에 돌입되죠. 그런데 우리는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용서는 주님 때문에 용서받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대하든 간에 복음으로. ‘당신의 그러한 것까지도 주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라고 그냥 받아줘야 되요.
그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요. 성경에 나온 이야기에요. 성경에 나온 이야기인데 쉬운 예로 들어서, 두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밥에 콩이 있어요. 콩이 있었는데 한쪽 사람은 밥에 든 콩을 다 발라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콩을 너무 좋아한 거예요. 골라내는 것 다 자기 달라는 거예요. 예, 상당히 좋은 친구들이죠?
사람을 만나게 되면 콩을 좋아하는 사람이 굉장히 미안해하면서 ‘저, 실례지만 콩 하나 먹을 수 있어요?’ 라고 미안해하는 거예요. 왜 미안해할까요? 이 사람도 나처럼 콩 좋아하는 사람인데 내가 달라고 하니 얼마나 기분 나쁘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의외로 ‘콩요? 가져가세요.’ 라고 반가워한다고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똑 같이 인간들을 만나게 해서 내 입장에서 상대방을 보는 것이 얼마나 헛다리짚는가를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혼자 계시는데, 전화를 했어요. “어머니, 식사했습니까?” 응, 응, 하면서 말을 돌리는 거예요. 우리 집에서 모신다고 반찬을 다 가져와버렸거든요. 그런데 가신다 해가지고 그냥 가셔서 반찬도 없는 상태여서 반찬 없는데 어떻게 식사하셨는가 묻는데 말을 않는 거예요. 평소에 어떠냐면, 어머니 통장에 있는 돈 드릴 테니까 맛있는 거 사드시라고 당부했는데 안 듣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추궁을 해보니까 ‘고기 사먹었어’(모기소리) 미안해하시는 거예요. 반찬 없어서 고기 사먹었다고.
우리 어머니 생각은 아들이 늙은 사람이 고기나 사먹는다고 욕하는 걸로 오해를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원하고 있는데. 돈 있는 거 뭐합니까, 돈 짊어지고 가는 것도 아니니 사드시라해도. 그런데 어무이는 그런 생각이 아니고 ‘고기만 좋아하는 욕심 많은 노인이라 욕하겠나’ 자기 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자꾸 만나게 하는 거예요.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만나게 해가지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항상 일방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는 것을 항상 깨닫게 만들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는가? 상대방을 배려한다 하지 말고 자신 있게 자기 입장을 먼저 얘기해요. ‘나는 이렇습니다.’ 하면 화를 내든 그쪽에서 반응을 보고 수정할 건 수정하면 됩니다. ‘아 내가 저 사람을 오해했구나,’ 알면 되니까. 항상 이렇게 자신의 의사를 자신만만하게 확, 드러내는 게 좋습니다. 혼자서 온 세상의 3차대전 다 일으키지 말고. 고민하지 말고.
특히 지난 주 수요일 예배 드렸잖아요. 남자는 남자 사정을 알고 여자는 여자 사정을 알기 때문에 여자가 갑자기 삐져 집에 간다는데 왜 삐졌나 보니까 ‘짧은 치마를 입었는데 좌식 구조의 식당에 왜 들어갔느냐, 너는 나를 너무 몰라’ 그래서 남자가 치마를 입어봐야 알죠. 모르거든요. -헐^^ 이런 낭패라니.-
그래서 자주 누가 왔을 때는 ‘하나님께서는 왜 저 사람을 붙여줬을까,’ 내가 무식하고 일방적인 의견을 갖고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하죠. 그 대신 그 사람에게 호응을 기대하지 말고. 내가 호응했을 때 삐지는 경우가 80퍼센트가 넘어요. 왜 그리 솔직해! 당신은 뭐가 그래 잘나서 그리 당당해! 이렇게 삐지는 경우가 10이면 8개가 다 그런 쪽이고. 두 가지 정도가 새롭게 이해했다 이러지 보통은 너무 솔직하면 그걸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끼는 경우가 있죠.
그 다음에, 강의가 어려울까 싶어서 쉬운 이야기를 했는데 녹취한 사람 애먹겠네요.(녹취자는 덩달아 재밌는 정보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개념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솔직하게 살아가는 것을 무겁게 여기지 말라 이 말입니다. 숨기는 것이 더 어색하고 비정상적이지 ‘나 이런 생각입니다’ 할 때 무거운 게 아니고 그게 사랑이다 말입니다. ‘나는 이런 생각입니다’ 드러내는 그것이 뭐라고요? 사랑이다 말입니다. 그 개념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리고 4절에 보면「하나님께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이긴다는 말은 결국은 뭐냐면, 기죽을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진리를 다 알아버렸는데. 진리가 뭐죠? ‘너나 나나 다 죄인이고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값 주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믿음 준 사람, 피가 곧 구원의 능력임을 믿는 사람. 그 사람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지옥 가는데 노선은 달랑 그 두 사람밖에 없다. 이미 모든 것을 아는 이상은 한 사람도 기죽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의 요령인데요, 누군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느냐 안 돌리느냐 그 기준을 보세요. ‘ 저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지,’ ‘복음을 알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경범죄로 판사 앞에 섰거든 ‘판사 저 인간이 복음을 알까?’ 이렇게 보면 기죽을 일이 없다니까요. 예? 어떡하든 잘 보여서 형량을 집행유예로 풀려나려는 그런 생각하지 마시고. ‘ 저 인간은 복음을 알까? ’ 그리고 그 계명은 무거운 게 아닙니다. 왜? 본인이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사람 쳐 죽일 수도 있어요. 또 주께서 상황을 만들어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고의가 아닌 살인이라는 게 있잖아요. 성경에. 우연히 길 가다가 발로 돌을 차는 게 아니고 돌에 발이 부딪힌 거죠. 찼는데 돌이 핑 날아와 가지고 할머니 뒤통수 맞아 죽는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그 가족들이 멱살 잡을 수 있다 말이지요.
그럴 때 ‘잘못 했습니다’ 이런 예상은 되지만 기죽을 필요 없다 말이죠. ‘저 인간 복음을 알까?’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 영광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예수 믿는 사람답게 바르게 사느냐, 이게 목적이 아니에요. 예수 믿는 사람이 자존심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거는 오히려 복음을 가리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의 자존심은 필요 없습니다. 간음하다 용서받은 여자가 무슨 자존심을 내세웁니까. 이미 소문 다 나버렸는데. 무슨 자존심을 내세워요. ‘나 용서 받았단 말이야, 어딜 건드려!’ 이럴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건 객기죠. 오버. 오바.
하지만 ‘너 우리 어머니 왜 죽였어!;’ 멱살 흔들 때 속으로, 겉으로 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당신은 주님의 영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게 되면 기죽을 필요 없다 말이죠. 경찰서장을 만나든, 판사 앞에 서든, 의사한테 서든 죽으면 그만이죠 뭐. 어떤 의사는 나무라는 의사가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 말은, 광야에서 주님이 배고프다는 이유 때문에 마귀한테 기죽지 않았습니다.(주님이시니 그렇죠-녹취자)
빵 좀 먹어봤으면… 빵 좀 주세요. 이러지 않았어요. 예수님은.「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야 말씀으로 산다.」이렇게 당당하게 맞서듯이. 그리고 세례요한이 쟁반에 목 베일 때도 기죽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의 얘기는 지난 주일날 이야기 했지요? 주일 오전 설교 때 했잖아요. 물주머니 안에는 약속이 가득 차 있는데 약속을 터트리는 순간 내가 살고자 하는 것 때문에 세례요한인 것이 아니거든요.
그 다음에 5절에 보면『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여기서. 지금 하나님이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럼 예수님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러면 지금 세상이 보고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있죠? 여기 중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돼야 된다? ‘세상을 이긴 자로서 살아가야 된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 믿는 자 속에 누가 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데 ‘속했다’ '안 속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판명 하냐면 세상을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들 속에는 세상을 이긴 주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티가 난다 이 말이죠. 세상을 이겼다 이 말은 기죽을 필요 없다. 이렇게 되겠죠? 이것도 사랑이니까. 이걸 가지고「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진리를 네가 가졌다는 말이 아니고, 너희를 마음대로 부린다 이 말입니다. 여기 갔다가, 서울, 대전, 부산 찍고 하듯이, 진리가 너희를 가지고 자유롭게 논다. 이 말이에요. 그걸 가지고 내 맘대로 한다는 그게 아니고 우리는 ‘나’라는 무거운 짐에서 내가 벗어나는 거예요. 나와 그 판사와의 사이에 누가 힘이 더 세냐, 가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죄인으로서 십자가 앞에 세워버리면 내 안의 그리스도, ‘예수님께 영광 돌리는데 판사 너는 뭐하고 있어!’ 라는 식으로 기죽을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나는 너보다 태권도를 더 잘해! 이 말이 아니거든요. 나는 지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는데 너는 뭐하고 있냐! 이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명절날, 추석날 설날 와가지고 전을 지지는데 첫 째 며느리는 집에서 살림만 하는 주부고. 둘째 며느리는 가까이 있어서 직장 생활 하지만 늘 도와주는데 세 째 며느리는 저 멀리 있는데 전문의사라 합시다. 그래서 큰집에 용돈 많이 준다고 칩시다. 그리고 집도 사줬다고 칩시다. 하지만 집 사주고 용돈 주는 건 좋은데, 전은 지저야지! ㅋ 그 말이에요.
네가 판사거나 의사인 건 다 좋은데 주님께 영광은 돌려야 될 것 아니냐고. 영광을! 다시 말해서 ‘나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지, 판사 검사가 된다고 해서 그것을 죄인을 대체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네가 목사인 건 아는데, 목사지만 죄인으로 살아야지, 목사입네! 하고 사는 건 그건 영광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목사한테 기죽지 마라, 이 말입니다. 목사 치고 믿음 있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십자가마을 목사님들 빼놓고 누가 있어요?!
이거는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못되게 구박한 시어머니 같으면 기 안 죽는데요, 의외로 너무 잘해주는 시어머니, 시집올 때 아무것도 해온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파트 사주는 시어머니, 그런 시어머니 앞에서는 본의 아니게 기죽고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안 믿는 거예요. 꼭 뭔가 얻어 챙기는 게 있으면 사랑이라고 반대로 얻은 것도 없이 구박만 하면 미워 죽어요.
그래서 며느리와 시어머니 관계는 돈의 관계입니다. 딴 관계 아니에요. 얼마나 유산을 남겨주느냐 그 관계입니다. -솔직하게 까놓고 얘기를 - 세상에 자기 빼놓고 형한테 주고 자기 빼놓고 자기 형제 줘보세요. ‘우리 집 오기만 해봐라!’ 있는 것 형한테 다 줘버리고 빚만 쟁여놓고 곤란하거든요. 그래서 시어머니는 훌륭하다 하지만 하나님 영광을 모르고 주님 십자가 복음 모르면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분도 있어요. 졸음 오는가 싶어서 자꾸 엉뚱한 소리 합니다만. 며느리의 시아버지가 교회를 안 다니는 거예요. 나이가 92살인데 다른 형제들이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또 시아버지 고집은 최씨 황소고집이네. 나이 많음에도 기도 안 죽고 기가 오히려 더 살아있어요. 치매인데.(치매니까 그럴 수도-녹취자) 형제들이 못 모신다고 다 나가떨어지니까 천사 표 며느리가 ‘나 예수 믿기 때문에 이 모든 십자가를 나 혼자 질게’ 이래 나오는 겁니다. 그러지 마라 했거든요. 동생들 죄인 만들려고 환장을 했냐 그러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런데도 동생들은 다 기대하고 있다. 왜? 나는 예수 믿으니까. 92살 된 아버지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모르는 죄인으로 보면 되요. 죄인으로. 그러면 죄인은 뭘 해야 되는가, 죄인은 벌 받아야 되죠. 고집 부리면 매 맞아야 되죠. 맴매해야 돼 맴매! 어릴 때는 어른이 자식을 교육시켰지만 어른 되면 자식이 어른을 교육시켜야 되요. 왜냐면 그게 짐승이거든요. 짐승. 동물의 농장 봤죠?
짐승은 우리 열어주면 더 날뛰어서 안돼요. 왜? 이거는 사람 미워서가 아니라 본인의 주제파악을 위해서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꾸 들어주면 안돼요. 자꾸 들어주면 한도 끝도 없다니까. 그거는 내가 늙어도 그렇게 해 줘야 돼요. 이거는 됩니다. 이거는 안 됩니다. 분명하게 해줘야 되는데 천사표가 돼버리니까. 마지막...몇 년 산다고... 구박을 받아봐야 된다니까요.(ㅋㅋ) 그런데 혼자 그걸 감당해 천사표라 천사표.
쌍방울표 사장 얼마 전에 죽었지만 천사표는… 형제들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혼자 감당할 수 있더라도! 일부러라도 그 역할을 맡겨줘서 살아있는 주둥이로 ‘아이구, 형님, 효부입니다.’ 그런 소리 듣지 말고, 직접 너희들이 강도만난 자가 되어 가지고 지옥 같은 씨름을 해보고 진짜 모시는 게 뭔지를…어른 모시면 온 집안이 치매 다 걸리거든요.(리얼...) 천사표에게만 맡기지 말고 한번 다 해봐라 말이죠.-반응이 없는 걸 보니 다른데 다 맡기는 분만 모인 것? 천사표 모인 줄 알고 했는데 내가 오해를...-ㅋㅋ
그 다음에 5장 6절부터 나오는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게 뭐냐면 구체적인 것, 세상을 이겼다는 구체적인 것은 항상 역사 속에 하나의 물질적인 모습으로 이미 흔적을 남겨줬다는 것입니다. 그 흔적이 뭡니까, 세 가지죠? <물과 피와 성령이죠!>
물과 피는 물질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성령이 들어와 버려요. 성령이. 자 그러면 물과 피와 성령, 이게 뭡니까. 하고 따로 떼어놓으면 해석이 안돼요. 물과 피와 성령이 예수님을 뭐로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 되게 했던 그 모든 경과된 과정, 거기에 개입했다고 보시면 정답입니다. 물세례 받았지요. 그 다음에 십자가 피 흘렸지요. 그 다음에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셨지요.
우리에게 성령 주시고 피 흘려주시고, 물속에 참여시킴으로서 죄 속에 참여하시고. 이러한 작업을 구체적으로 남기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니까. 성령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하신 일이 우리와 관련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을 성령께서 해요. 성령은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성령 보혜사가 오게 되면, 내가 하는 일이 너희와 무관한 게 아니라 다 너희를 위한 일인 것을 너희로 하여금 진리 가운데 깨닫게 하고 이끌어내고 인도하고, 너희들을 책망하시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러면 어려운 거 조금 더 해봅시다. 그렇다면 성령이 왔을 때 우리가 책망할 때 양심적 책망인지 경험상에서 우러나는 습관적 반성인지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감사하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할 분이 없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 보낼 수 있고 천국 보낼 결정권이 예수님께 있음을 알고 구원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아니면 꼭 뭐가 살아나느냐, 무엇에 의해 존재 의미가 살아나느냐 하면, ‘나’라는 주체가 반드시 살아나게 돼있어요. 주님께 감사하면서도 감사하는 나를 대단하게 여기는 것! 그거 성령 아닙니다!! 감사할 수 없는 존잰데 주님 때문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릴 때, 한창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고 있는 겁니다. 덮친 거죠. 성령께서.
그래서 늘 성령에 충만하라, 이 말은 늘 하나님께 영광 돌려라, 이 말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처럼 억울하게 느껴지고 모든 세상이 더럽게 느껴지고, 죽고 싶고, 짜증나고, 하나님이고 뭐고 다 귀찮고, 이럴 때는 무엇을 깊이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거든요. 자기를 잊으면 되는데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에 있는 육적인 사랑이라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결국은 자기 영광을 위한 쾌락에 의한 용도였습니다. 잠시 상대방을 이용한 거예요. 내가 벌인 사랑의 작업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상대방은 여기에 잠시 끼어든 거예요. 내가 나에게 온 사랑은 보상 없이 물러갈 내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너 날 떠나기만 해봐라’ 하는 미움이 증가하죠. 그걸 가지고 애증의 관계라 합니다. 사랑과 증오는 사실은 화투짝처럼 같이 가는 거예요.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점점 더 미움이 저주의 강도가 커지는 법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보면 여러 군데 나와 있어요. 암논이 배다른 누이동생 다말을 그렇게 사랑했는데 사랑하고 난 뒤에는 ‘너 때문에 내 체면이 구겼다,’ 는 겁니다. 결국은 뭐였습니까. 자기가 그 여자를 사랑할 때는 정신이 사랑했다가 나중에 그 여자를 정복하고 난 뒤에는 ‘우쒸, 별것도 아닌데 괜히 건드렸네.’ 하는 후회감 때문에 ‘네가 왜 내 앞에 얼쩡거렸어!’ 그것도 잠시.
그렇게 좋다고 즐길 때는 언제고 그 다음에 정복하고 난 뒤에는 ‘저것도 인물이라고...에구...내가 뭐에 쓰였지?’ ‘저렇게 못생긴 것이 그때는 왜 그렇게 예쁘게 보였나 몰라,’ 여자는 또 감시한다고 돌아다니면서 째려보면서 남들에게 물어봐 싸지, 그래서 어떤 남자들은 자기 아내를 조수석에 못 앉게 뒷자리에... 앞자리에 있으면 잔소리가 많아서 화가 나가지고. 성질나면 과속을... 그리고는 남편한테 운전배우지 마라고 충고를...ㅋ
사람의 사랑이라 하는 것이 손해 보기는 싫다 이 말이거든요. 사랑하면서 얼마나 투자하겠습니까. 투자금 다 뽑아내려고 ... 주님은 우리를 사랑할 때는 우리 자신으로 돌아올 자리를 없애버리는 겁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 것이라,-갈2:20 개역개정」손톱하나 발톱하나 내 것은 아예,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창세전부터 이미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지요. 그게 뭡니까. 물과 피와 성령 공통점이 뭐냐면, 내 것은 있다? 없다? ‘내 것은 없다’ 는 거예요.
있으면 물로 성령으로 다 죽여 버립니다. 지금도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찾아오실 때는 근본적으로 네 인생이 아닌데 고민은 왜 네가 고민하느냐! 아파도 내가 고민해야지 왜 네가 고민하느냐! 쓸데없이 왜 네가 고민하느냐! 이 말이죠. 흰머리 났다고 거울 보면서 흰 머리 뽑는다고... 그런데 얼마나 주님께 원망하겠습니까. 왜 나오게 하십니까. 아직 나올 나이도 안 됐는데. -오늘 쓸데없는 소리 많이 한 것 같은데, 듣는 분들이 피곤해 하시니까 그냥 이물 없게 한 겁니다. -
자, 이 셋이 합하여『증언하는 것이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이렇게 돼있죠? 셋 다 뭡니까? 셋 다 예수님께서 지금 구체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그 증거가 셋이지만 한 분! 하나. 예수님이 살아서 지금 이런 활동을 하신다 그런 뜻입니다. 자,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요일5:10 개역개정』이렇게 활동하는 모든 활동은 우리 잘났다,
우리 구원받았다, 그걸 증거 하려는 게 아니고, 우리를 앞장세워서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 안산 땅에서 또는 서울 땅에서 살게 하시는 그 증거의 이유가 뭡니까. 우리를 증거 하는 게 아니고 누구 증거 하라고요? 예수님 증거 하라고! 이런 인간도 있단다. 하나님께 속한 이런 인간이 실제로 21세기에 존재한다.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 살아계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인데 우리는 남들과 비교하다보니까 얼마나 절망하고 내 인생에 대해서 굴욕적인 것을 느끼는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제는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물과 피를 통해서, 감사로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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