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100709요일3장24절a
요한일서 3장24절,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인간은 변하지요, 변하는 우리가, 만약에 작년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했다면, 작년의 나 자신하고 올해 또 변하지요? 작년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했다, 하지만 그 사항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올해 나 자체가 변했다면, 그 변한 나를 내 안에 계시도록 해주는 우리 주님도 같이 변해야 될까요? 안 변해야 될까요? 질문이 어렵죠?
무슨 말인가 하면요, 예를 들어 이런 게 있지요, 남자가 “나는 당신을 사랑해,” 하면 여자가, “오늘만 그렇지?” “아니야, 나 내일도 사랑할거야,” “변함이 없어?”“그래, 변함이 없어.”오늘 나는 당신을 사랑해, 라고 했을 때, 그거는 “나는 오늘 같은 맘이라면 절대로 변하지 않아,” 그러면 오늘 결심했던 마음이 내일은 그 마음이 아니잖아요, 내일이면 내일의 내가 또 만들어지기 때문에, 낼 되면 또 여자가 묻기를...“당신 아직도 나를 사랑해?” “미쳤나, 내가 사랑하게.” “어제 얘기 했잖아,” “어제는 어제의 내가 아니잖아, 어제는 그랬었지, 하지만 오늘은 또 달라,” 이런다는 말이지요.어제 나에게 “당신 나 사랑해?” 묻던 그 여자는 어제의 그 여자가 아니야 너는.’ 어제 나에게 묻던 그 여자가 오늘은 아니라니까,‘ “너 변한 건 생각 않고, 자기는 변한 거 생각 않고 왜 나만 닦달하는 거야,” 라고 할 수 있다 그 말이지요.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문제는, 매일 같이 변하는 나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요지부동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나, 하는 그 문제입니다. 우린 날마다 달라지고, 어떻게 달라질지도 모르고, 해괴망측하게 달라질 수도 있는데, 왜 성경은 일관되게 주 안에 거하게 된다고 이야기 하냐, ‘그거는 우리의 달라짐과 같이 주님께서 달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달라지지 않은 게 아니고, 우리 달라짐과 같이 더불어 달라지는데, 주님이 달라진다,하는 그것을 뭐라 하냐면,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 성령을 요한복음 3장에서는 ‘바람’같다고 했지요? 성령은 한결같지만, 우리 역사속의, 우리 인간속의 성령은 한결 같은 모습이 아니에요.
성령은 이런 분이야, 한다면 그건 성령이 아닙니다. ‘왜냐면, 바람을 그릴 수 있는 그림은 없어요.’ 바람 불어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건 그릴 수 있지만, 바람 자체를 그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바람 부는 현상을 그리라면, 오늘은 가지가 왼쪽으로 흔들리는 그림을 ‘찰칵, 하고 사진 찍을 수 있고, 낼 되면 또 오른쪽으로 흔들리면 ’찰칵, 되지요.그러면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성령이 임한 사람이 왜 자꾸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으로 헷갈리는 거야,” “어느 쪽이야, 분명히 해,” 그러면 뭐라 하겠습니까, “성령이 원래 그래, 바람 불면 원래 그래.”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내가 성령 받아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거는 큰 오산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잡은 성령 자체가 달라진다면 우리도 달라져야 같이 하나 되는 겁니다. 한쪽은 달라지는데 한쪽은 안 달라지면, 둘 중에 하나가 결국, 가짜라는 뜻이지요.
성령은 늘 변합니다. 왜 변하냐 하면, 인간이 늘 변하기 때문에. 늘 인간이 변해요. 왜 인간이 늘 변하냐 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변해야 될 시간과 공간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변한다면 당연히 인간도 변해야 됩니다. 개 키워보시면 아시겠지만, 개도 늙어가고, 늙어가는 개가 주인보고 뭐라 하냐면, “남 이야기 하지 마세요, 주인님 당신도 늙어 갑니다.” 같이 늙어가죠. 같이 늙어간다는 것은, 성령께서 이 세상을 고정적으로, 그대로 두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계획대로 변천을 일으키면서 세상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철학자들이나, 도 닦는 사람들, 노자, 장자, 동양철학 서양 사람들은 변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확고하고 이렇게 우수하며 이렇게 도를 깨우쳤다,” 하고 고함지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도를 깨우쳤다, 하는 건 어제 깨우친 거지요.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에요. 되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이고 싶지요. ’왜!‘ 달리 다른 소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믿지 않고 예수님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하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래서 기껏 찾는 것이 ‘주체’라는 거예요. ‘주체 불멸설’ 어제의 내가 바로 오늘의 나다. 오늘 나를 찾으면서 어제의 나,로 자꾸 연결시키고 싶은 거예요.
그건 본인 마음이고, 본인의 소망이고, 주위 식구들도 압니다.“아버지 달라셨습니다, 아버지 달라졌어요.” “무슨소리야, 일관되게 어제의 그 아버지야,” “아닙니다, 아버지는 몰라요. 아버지가 벌써 옛날의 아버지 아닙니다.”옛날의 아버지는 이만한 거 가지고 성질 안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치매 있는 것 같아요. 많이 달라졌습니다. 현대 철학은 그걸 발견했어요.인간의 자아는 달라지고 싶지 않다고 소망할지라도, 인간의 몸이 그냥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현대의학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발견한 게 뭐냐면, 아무리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싶어도 몸 아프면 모두 헛방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세상이 아름답더라도, 이빨만 앓아버려도 세상은 살기 싫어집니다, 꼴보기 싫어요. 아무리 귀여운 손자라도 자기 몸 아프면,
손자고 뭐고 다 귀찮아요. “가라, 가라, 병원 찾아오지 말고 가만 놔둬라, 다 귀찮다.” “아버님 귀여운 손자에게...”“재롱이고 뭐고 귀찮다니까.” “간병인 두고 오지 마라, 며느리고 자식이고 다 소용없다, 간병인 내가 돈 모은 걸로 댈테니까, 아예, 아버지 없다 생각하고 오지마라,” “오면 귀찮다, 알랑방구 뀌는 것도 귀찮고, 위선 떠는 것도 귀찮고, 유산 받으려고 오는 것도 귀찮고, 가라, 내 돈은 나 아픈데 털어 쓰고 갈 테니까 기대하지 말고 가라”‘ㅋ ㅋ ㅋ
다시 이야기 할게요, 성경 해석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그동안 오류가 있었습니다. 내가 어떡하면 안 변합니까,를 그걸 노리면서 성경해석을 본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면 안 변할 수 있습니까. ‘너는 변해!’ ‘아뇨, 나 고집 세거든요? 절대로 우리의 신앙은 변하지 않습니다.’ ‘안 변하려고 안변하는 거 붙잡으면 저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도 변하는데?’ ‘나도(하나님) 변하는데?’ ㅋ ㅋ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이 복음이요 묵시 세계에서는 다 이루었습니다.
완료 상태에요, 다시 말해서, 변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묵시가 역사에 침투하는 그 순간부터 역사가 묵시를 붙잡을 수가 없어요., 왜? 변하는 묵시기 때문에... 왜 변하는 묵시일까요? 사람 자체가 날마다 달라지기 때문에, 달라지는 인간에게 하나같이 보인다면, 그거는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는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가고 싶은데, 저와 여러분들의 그림자가, “선풍기 있는데로 갑시다 ” 하는 거예요. “주인님 혼자 가세요, 나는 시원하게...” 이런 아이디어가,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가 인간 속에 있어요.
“난 20대 젊은 모습 갖고 싶어,” “미쳤나, 몸이 60인데 무슨 20대야,” “아니야, 아직도 20대야.” 여성들에게는 항상 그런 게 굉장히 많아요. 절대로 몇 학년 몇 반이라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계속해서 뭔가 붙잡으려고 해요, 옛날 좋았던 그거, 좋았던 그걸. 그러나 성령님은 아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네가 존재하는 순간 남에게 피해 준다는 거.’ ‘본의 아니게 남에게 피해를 주고 본인도 남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줘요,‘ 내가 사랑을 해줬는데 미움으로 갚을 때 그 자식이 미워져요. 자식을 잘 키웠는데 자식이 부모의 은덕을 모르고 좋아하는 여자 친구 남자 친구에게 푹 빠져 있을 때, 질투적인, 미운 거예요.
밉다는 것은, 결국 자식이라 하는 것은, 나는 이런 경우에만 밉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자식을 둔 거예요. “내 사랑을 감히 못 알아보다니,” “내가 준 사랑의 그 정도만큼 그 분량만큼 그것을 온전히 네가 일치되게 느끼지 못하다니, 이 괘씸한 자” 결국은 뭐냐면,.. 어렵게 가봅시다 이왕. 남이 나를 정한다, 정한다는 말은 규정한다. 남이 나를 규정해요.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규정하면 백날 해봐야, 착각입니다.
가을에 단풍이 들어서 차를 타고 가면서 “단풍이 너무 아름답다!” 하고 있는데, 뭐가 “빵빵~!” 합니다. “뭐야?” “신호 떨어졌어요, 빨리 가세요.” 합니다. 갑자기 단풍을 보는 순간, 20년 전 아름다웠던 기억을 하는 순간, 현실에서 착각으로 잠시 벗어나 보는 거예요. 현실은 지금 사거리에서 신호 받아 빨리 가야될 입장인데, 괜찮은 음악 나오고, 단풍 지니까 지금 내가 운전하고 있는지, 창가에 앉아 커피 마시고 있는지, 잠시 분간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로 받잖아요? 하나님 은혜 받아, ‘여기가 천국이니...’ 하고 있는데. ‘엄마, 밥해~!’ 하잖아요. 천국 맞아요, 우리가 예수님 믿는 백성 맞는데, 현실은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니까요 현실은. 현실은 천국만 즐기고 성경만 즐길 것이 아니라 밥을 할 때는 밥을 해야 되고, 청소 할 때는 청소해야 되고, 택배 올 때는 집을 못 비우고, 택배 오면 갑자기 분주해지고, 답장해야 되고, 은혜 받고 싶은데 왜 그리 할 일이 많은지...‘
이게, 그 많은 변화까지 주님의 일관된 손에 고정되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어떤 변화라도 하나의 확고한 ‘다 이루심’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게 어떤 변화든... 변하는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변하는 환경과 더불어 같이 변해도 주님 안에서 무관한, 상관없다고 믿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나는 안 변해야 돼,” “나는 안 변해야 돼,” 이거는 마귀의 시험든 거예요. 오뚜기는 발로 차버려도 괜찮잖아요. 백번 차도 일어나고, 천 번을 차도 다시 일어나는 겁니다.
성경말씀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타락하고 싶어도 이미 타락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아무리 타락하고 싶어도 타락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면, 어떤 자가 지옥 간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얘기할게요. 우리가 아무리 타락하고 싶어도 타락이 안 되는 이유는 ...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에 의하면,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 그걸 멸망 받을 사람... ‘어제, 서경수 목사님 본문에도 나왔어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거기서 뭘 놓치고 있냐면, 멸망하는 자가 십자가 때문에 새롭게 발생된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나타나지 않으면, 다 점잖은 사람이고 전부다 훌륭한 사람이고 괜찮은 사람인데, 운전하면서 ’멸망했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같은 인간인 줄 알았더니만 멸망하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 받은 자가 아니고,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불러주는 자와 멸망 받는 자,로 이렇게 연결되는 거예요.
멸망 받는 자와 안 받는 자가 연결되는 게 아니고, 멸망 받은 자와 안 받은 자, 하면 전부 멸망 안 받으려할 거 아닙니까. 그게 또 자기가 멸망 안 받기 위해 용을 써도 안 되요.그게 아니고, 멸망하는 자 있고, 그 다음에 불러줘야 멸망이 안 되는 거예요. 멸망이...... 이것은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일단 없다고 치고, 십자가 앞에 사람 한 명도 없어요. 십자가가 발생되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기준에서 멸망 받아야 될, 십자가를 어리석게 봐야 될 사람들이, 무리가 탄생하는 거고, 없는데서 십자가 능력으로 새롭게 불러 준 사람 한 무리가 등장해야 되요. 그러면, 십자가 언제 졌느냐, 십자가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가?
그렇게 되면, 십자가가 2천 년 전의 사건이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십자가 계획이 마련되어 있지요, 2천 년 전에 일어날 십자가가 되풀이해서 일어났다면 서기 100년 서기 200년 되풀이해서 십자가가 일어나 주어야 거기서 새롭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등장하는 것처럼...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십자가 사건이 2천 년 전 사건이 아니고 100년 후에 또 성령께서 십자가를 주시면 100년 후에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생길 게 아닙니까. 그러면 200년 후에 또 생기겠지요. 그거 이해 되지죠?
거꾸로 가봅시다 거꾸로. 거꾸로 가면, 500년 전에 십자가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생기죠. 예레미야나 엘리야... 계속 가보자고요 창세전까지. 그러면 야곱은 사랑 받기로 작정되었고, 에서는 미워하고, 맞잖아요.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작정된 그 순간에 이미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십자가가 역사속의 사건인 동시에 역사와 상관없는, 전 역사를 다 통제할 수 있는, 역사를 다 덮고 있는, 다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변하지 않는 거예요. 제가 하나교회에서 한 이야기를 여기서 다시 할게요.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얘기하면 아마 기억이 나실 겁니다.’ 예수님을 ‘알파요 오메가‘라 했잖아요. 나는 시작이요 나중이다. 나중이라는 건 세상 끝이다,죠? 이걸 막대라고 봅시다, 막대자석... 막대자석인데 막대자석에 쇠가 붙을 때 앞부분만 붙을까요? 아니면 중간에도 붙을까요? 중간에도 붙지요? 그러면 끝부분, 4/3 지점에도 붙을까요, 끝만 붙을까요? 다 붙지요? 그러면 여기 쇠가 있다면, 막대자석이라면 앞부분에도 쇠를 당기는 속성이 있지요?
첨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지요. 이것을(분필 또는 묵펜) 자석의 속성이라고 보자 말이지요. 그러면 창세전에도 이런 것이 발휘될 것이고, 창세기 후에 100년에도 발휘될 것이고, 그러면 지금 2010년이니까, 마지막 2200년에 멸망한다면 발휘될 것이죠?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 속성이 역사속에서 툭, 튀어나온 게 뭐냐면 십자가에요, 왜냐면, 그분이 다 이루었다,했으니까.
제가 이야기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걸 그대로,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했다 이말이지요.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 언제 돌아갔습니까. 또 십자가 얘기 했다 말이지요. 아브라함이 이삭 바쳐서 십자가 이야기고, 출애굽기의 어린양의 피 발라라, 하는 요한복음 이야기도 십자가이야기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십자가이야기가 결국은, 모든 전 역사를 다 털어서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커버한다는 말은 막대자석은 고정되어 있지만 역사가 변화되고, 변화되고, 흘러가고, 흘러가고, 흘러가는 겁니다. 왜 그러냐면 죄와 의가 충돌되어 계속 얼켜야 되니까, 얼키고 설켜야 되니까,
여기서 어떤 인생은 살아나야 되고, 어떤 사람은 죽어야 되고, 여리고성은 무너져야 되고, 홍해는 갈라져야 되고, 변하잖아요, 하지만 이 변화라는 것은 이미 확정된 변화예요 확정된 변화. 변화의 양태는 달라도 속성은 어때요? 일괄적이다, 속성은 하나같이 변함이 없다 이말이지요 속성은...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태어났으면...할 거 없어요. 2천 년 뒤에 태어나도 십자가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 당시에 태어나 예수님 손 만졌다고 뭐,‘ 떠밀렸다고 더 은혜 받는 거 아닙니다. ’에구,‘ 나도 삭개오처럼 키 작아 나무에 올라갔음 좋겠다, 예수님 지나갈 때 올라가면 되겠다, 이런 걱정할 필요 없어요, 키 안 작아도 괜찮아요. 세리 아니라도 괜찮고, 예수님 집안에 오셔서 대접 안해도 괜찮아요. 예수님의 피 믿으면 그 속성이 그 속성이니까! 삭개오처럼 ‘네 집에 오늘 구원이 이르리라,’는 말 듣습니다.
사도바울 앞에서 복음 믿은 사람은 다 삭개오예요, 다 세리고, 다 창기요, 다 구원 받은 사람이예요.열 두 사도가 색깔이 다 다르더라도, 그들이 외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 밖에 없어요.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가 사도바울이 피박줬잖아요.후배가 선배에게 피박주고 대단하죠, ‘기강 잘 서겠다 참,’‘‘사도 내 질서가 엉망이다,’ ‘교회 내 질서도 엄격한데, 사도세계 질서는 엉망이네요,’ 후배가 선배에게 면박주고 바로 얼굴 앞에서 ‘그건 복음 아니거든?’ 했다 말이죠. ‘무슨 율법이고, 무슨 할례를 행해!‘ ’왜이러십니까 베드로 양반, 왜 이래요?‘ ‘주님께 헛된 죽음 만들려고 하십니까?’ 마구 나무라죠? 베드로가 잘못 됐다, 이겁니다.나중에 베드로가 칭찬하기를...
사도 바울의 편지 함부로 풀면 안 된다, 그거 영적인 편지다,‘ 속성을 놓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속성을 봐야 될 걸 나의 속성을 믿으니까 마귀의 시험 드는 거예요. ‘에구,,목사님 저는 아침 다르고 점심 다르고...‘ ‘네가 원래 달라, 원래 달라...’ 중요한 것은 우리만 날마다 달라지는 게 아니고 성령도 우리의 보조를 맞춰서 같이 속성을 늘 보도록, 죄에대해서, 의에 대해서, 늘 책망하면서 늘 보듬어준다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타락해도 성령께서 찾아오십니다. ‘그 정도로 성령은 변신에 강해요!!’ 성령께서는 변신에 강합니다. 어떤 때는 소년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아버지 가장의 모습으로! 십자가 복음을 들이대는 겁니다. 어린애가 지나가면서 십자가 얘기를 할 때 그것이 새롭게 들려지고, 어떤 할머니가 찬송가 부르면 늘 아는 찬송가지만, 찬송가 듣고 성령의 역사가 되어, 내 마음에 다시한번 주님의 속성 때문에 구원 받았지, 내가 완벽하고 내가 흔들림이 없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흔들림이 도리어, 흔들리지 않은 주님을 증거하는 셈이지요.그럴 때 히브리서6장의 말씀, 하늘로서 비춤을 얻고, 비로소 해결 되는 것입니다.성령의 하나님 비춤을 얻고, 할 때 성령을 소유하려 하면 반듯이 타락합니다.
주님께서는 진짜 성령의 뜻은, 나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멸망 받은 자와 부르심을 받은 자, 주님 좋으라고 내가 호출되었다는 걸 아는 자라면, 나의 행동의 정확함을 믿다가는, 이건 마귀의...백번 타락합니다. 술 끊었다, 술 끊었다, 몇 년째예요, 십년 째, 다음 날 죽은 걸로 끝나는 거예요. 담배 끊은다고 몇 년 째, 오 년 째, 그 다음날로 끝나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걸 붙잡지 말고, 내가 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 붙들림 당할 때, 그 사람은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주님을 증거하는 삶으로 가는 겁니다.
성령을 한번 받았다고 좋다고 그걸 소유해 돌아다니면 그 소유로 끝난 겁니다.나의 구원론을 위한 성령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반듯이 예수님을 위한 성령이지, 나 구원하라고 주는 성령은 없어요. 나는 구원 되지 말아야 되고, 이미 구원 되신, 예수님의 변함없는 속 안에 있을 때만 예수님의 구원이 나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다시 할게요.
나의 구원은 포기 하세요. 주님의 구원이 나를 덮칠 때 그것이 바로 나의 구원입니다.주님의 구원... 그러면 주님이 어떻게 구원 하는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가지고, 우리의 관심사로 하여금, 예수님의 다 이루심에 관심 두며 살게 만들죠. ‘자, 지금까지는 여러분 다 아신다고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해 봅시다.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한 줄 우리가 알지요. ‘이제부터는 어렵습니다, 정신 반짝 차려야해요.’ ‘제가 한번 물어볼게요.‘ 성령이 인간에게 먼저 왔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께 먼저 왔습니까.
예수님께 먼저 왔지요? 성신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 준 거니까. 신약에 성령께서 오신 것은 예수님께 먼저 왔다 말이지요. 그러면 누구는 배제되느냐 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물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세례는 못 받았거든요.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는 것도 있고, 오순절 날 성령 오셔가지고 부어준 거 있잖아요, 성령세롄데...
결국, 성령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배제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독점적으로 잡았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일을 하실 때는, 예수님께 왔다는 그 정보, 그 내용을 취소 않고, 그걸 듬뿍 담게 되겠지요.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 영>이라고 합니다.자... 그런데, 예수님께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저거는 좋은 거다, 저거는 나쁜 거다, 우리가 판단하잖아요. 그 판단은 성령의 눈으로 보면 값어치도 없어요.
그 판단은 성령이 임한 분, 예수님이 저거는 나쁜 거야, 저거는 옳은 거야, 판단해 줄 때 비로소, 판단이 되고, 그것을 듬뿍, 성령께서 그 내용을 담았지요. 그렇다면 누구한테나 성령이 오게 되면, 뭘 보게 되느냐 하면, 내 눈에 보기에 저게 옳고 저건 나쁘다 하는 것을 포기해야 됩니다. 그 논리에 의하면. 예,‘ 포기 해야되요. 우리가 판단을 하게 되면, (이게 어려운데) 내 안에 내가 있는 셈이 되어 버립니다.
이게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입니다. 우리가, 내가 누구를 판단한다 할 때 그 판단과 그 자리는, 내가 판단한다면 이 자리가 나의 자리가 됩니다. 만약에 이 자리가 주님의 자리가 된다면, 내 판단을 제치고 누구 판단이 나옵니까? 예수님의 판단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아까, 전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성령 받을 때 그 누구도 예수님의 뜻을 알았다? 몰랐다? 예수님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르지요? 우리는 모르는데 예수님은 안다는 것이 성령 받고 난 뒤에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이런게 어려운데, ‘왜 우리는 모르냐,’ 성령 받으면, 예수님을 보니까, 우리는 우리 혼자 있다고 여겼거든요. 태어날 때부터...아무리 만져봐도 내 팔뚝이고 우리 거였는데, 예수님 보니까, 마귀자리였어요. 우리 자리가 아예,‘ 없었어요. 이거는 성령 받은 예수님 눈에만 띄는 겁니다.
우리 자리는 없고, 마귀 자립니다. 예수 안 믿는 가정 있으면, 예수 안 믿는 가족은, 자기 자리라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시아버지가, 얘야, 교회 가더라도 너는 제사 드려야지, 제사 드려야지, 한다 이말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저 시아버지는 자기 뜻에 의해서 평생 제사를 들여야 집안이 잘 되는 모양이다, 하는데, 진짜 성령 받으면, 우리 시아버지 자리는 자기 맘대로 하는 게 아니라 마귀가 시킨다, 이렇게 나와요. 왜냐면, 예수님이 그런 해석을 가졌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몽땅 그 내용을 가지고 알려주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노인네가, 우리 집안의 어떤 노인네도 그렇고 할머니도 그렇고, “너는 교회 간다는 걸 내가 들었다마는, 가거라 교회는, 가러라마는, 이 제사만큼은 양보 없다, 우리 집안에서는 양보 없다,” 하잖아요.
그러면 시어머니께 물어요. “어머니 제사 왜 드려야 되는데요?” “제사 안 드리면 우리 집안 망한다,” 이러거든요. “망하는 증거가 있습니까?” “어,어...어른에게 말대답하는 거 봐,” 하면서 억지로 나가는 거예요. 어른에게 말대꾸 한다고. “어디서 시집온 며느리가 시어머니 이야기에 따지냐,”
제사가 없으면 두려움, 공포, 이런 겁니다. 우리 요한일서 한번 했잖아요. ‘사랑이 없으면 주름이 생긴다고.’ 사랑은 뭘 덮나니? ‘모든 심판과 두려움을 덮나니’ 사랑이 없으면, 뭔가 받은 사랑이 없으면, 긍휼과 자비가 없으면, 항상 그 자리는 뭘로 출렁출렁 거린다? 걱정 근심과 두려움과 공포와 초조와 불안으로 항상 철벅철벅해요. 둘째가 잘되면 셋째가 걱정되고, 항상 절벅절벅...걱정이 늘어나요.
그 말이 뭐냐 하면, 항상 내 자리가 걱정 근심 떠날 날 없는 마귀가 가져다 준 더러운 자리예요. 그래서 그걸, 마귀가, 조상숭배 했다는, 조상에게 뭔가 정성을 다했다는 거예요. 정성을 다 했을 때 정성 덕분에 기분상 뭔가, 두려움도... 조상님께서 뭔가 봐주겠지,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예수 믿는 며느리 들어갔는데, 교회 가지마라 하는데, 교회 가지마라 고 말렸던 며느리 때문에 사업이 잘되고 불치병 앓은 시아버지 병이 낫고 하면, ‘야..네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있구나,’ 하잖아요. 그래, ‘네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있구나,’ 해도 문제예요. 그것도 신앙 아닙니다. 잘됐구나, 한다는 말 자체가 여전히 주님이 보는 세상관이 아니고, 여전히 못 되었을 경우에는 교회 못 가게 한다는 두려움이, 여전히 두려움이 있는 거예요.
나 있는 자리가 마귀 자리라는 생각은 않고, ‘나를 괜찮게 해주는 신이라면 섬길 용의가 있다!‘ 자기 자리를 포기 못한다는 것은 교회 가서 잘되어도 마찬가지로 그 자리는 마귀자리예요. 그래서 오늘 날 교회는 마귀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겁니다. 악마가 돼지 잡아줘가지고 교회 세워주면 되겠네요. 가만 생각하니, 말이 괜찮은 말이네요. 구약 성경에 나옵니다. 악마의 터 위에!! 산당! <더러운 우상 숭배 터> 위에 예루살렘에 세워지는 거예요.그러니까 계속 망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거기 계시지 않고. ‘여러분, 우리 교회 짓고 집안 다 망합시다. 이런 사람은 없잖아요. <돈 내서 교회 잘 지으면 집안 잘 되게 해 주십니다> <ㅡ 목사님 농담
그렇다면 어려운 거 다시 해봅시다.오늘 어려운 거해서 죄송합니다만, 먼저 어려운 거 해 드리고 나가겠습니다.마귀자리에 있는 인간을, 마태복음에서(12장28절)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이제 않습니다.가구를 빼내듯이 하는 거예요. 가구가 우리를, 악마가 쥐고 있는데 도둑이 들어와서 우리를 가구 빼가듯이 빼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할 때 마귀 자리를 나의 자리로 바꿔주잖아요.이게 마귀 자리거든? 이거는 내 자리, 이러거든요?두 개의 안목을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예수님이 보는 새롭게 보는 이 자리를 마귀 자리로 봤던 자리를 성령께서 오면 그대로 인수받게 되지요.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있는 자리는 뭐도 알고 뭐도 안다? 마귀 자리가 어떤 것인 줄을 알고 그리고 주님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아는 거지요.
이렇게 되면... 만약에 하나 물어봅시다. 마귀 자리가 없으면 예수님이 피를 흘리는 일이 없지요. 그렇잖아요, 지옥 갈 사람이 없으면 천국 갈 사람도 없습니다.시소 알지요? 시소가 공중에 뜨려면 어떻게 뜹니까, 누가 반대편에서 눌러줘야 뜨잖아요.누가 지옥 가는 그 힘으로 우리는 천국으로 튕기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 가잖아요? 누가 하나 지옥 갔어요. 공짜 없습니다. 지옥 가 줌으로써 튕겨 나오는 거예요. 인간은 상상도 못할 아이디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등장하면 졸지에 뭐가 생긴다? 멸망 받을 자가 생기고, 보조 맞춰서 누가 생긴다?부름 받은 사람 하나가 생기는 거예요.멸망 받은 자와 부름 받은 자 둘 외에는 없어요.십자가를 증거 할 수 있는 사람이 태어난다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한쪽은 멸망 받아야 되고, 한 쪽은 부름 받아야 되고. 두 종류니까 세상 사람들 수십억 되어도 그걸 다 제거 해버리고 단 두 사람만 남겨둡시다. 두 사람만 남겨둔다는 말이 창세기 4장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잖아요.
두 사람 맞잖아요, 두 사람... 창세기4장에 나옵니다. 누굽니까, 가인과 아벨밖에 없어요.가인이냐 아벨이냐 둘 밖에 없어요. 서로가 서로를 정하는 겁니다. ‘네가 있으면 내 신분이 결정됐고, 내가 있으면 네 운명이 결정된 거예요. “너 지옥가나? 감사합니다, 나 천국갈게요.” 이런 뜻이다 이말이지요.어떤 목사가 이런 소리 하면 우리가 구원 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비율이 5:5라는 뜻은 아니에요. 예,; 노아 홍수 때 인구수가 몇 백만 되어도 갈 사람은 몇 명입니까. 8명이예요. ‘0.000001퍼센트도 안 되요 이건. 하지만, 두 종류의 숫자가 문제가 아니에요.
파리가 구더기 천만마리 낳는다 해서 그 중에 인간이 태어나는 건 아니잖아요.구더기가 새끼 까도 구더기고, 구더기 많은데 구더기 무시하지 말자, 이런 거 없어요.백날 까봐야, ‘여기 구더기 있네,’ 하지 ‘구더기님 계시네, 이런 소리 않잖아요.’^^그러나 사람은 달랑 세 사람 있어도 무시 못 하잖아요.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예수님 십자가 다릴 때 양쪽에 십자가 몇 개 였습니까. 두 개지요.그런데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이 막대자석의 최종 속성이잖아요.두 강도가 다 지옥 갔습니까?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한 쪽은 낙원에 가고 한 쪽은 지옥에 갔잖아요. 결국 십자가 전경, 그 사건은 인류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드라마의 진수, 모든 창세전의 계획,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옆에 있는 강도를 구원하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그만한 권한이 있고, 내 죄 사하는 권세를 나는 가졌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그냥 배치물로 필요해서 서로 다른 길을 가야 될 피조물 둘이 한 짝, 세트를 이뤘어요. 셋 세트가 된 거지요. 햄버거, 콜라, 감자 튀김처럼요.^^
햄버거 종합세트처럼 짝이 맞춰져야 되요. 예수님과 우리하고 지옥 가는 사람들.(짝, 찾으세요, 지옥 가는 사람 찾아봅시다)(나 천국 보내기 위해서 지옥 갈 사람들 ㅜㅜ)(찾아보세요, 많이 있을 겁니다.)다들 많이 갖고 있어요. 숫자를 따지지 말고. 그런류의 사람들 있을 겁니다.(고맙다고 악수하세요.ㅋ ㅋ ㅋ)
가룟유다가 없으면 예수님이 올라가지를 않아요. 가룟유다가 마귀 아닙니까, 가룟유다 도움으로 예수님이 튕겨 올라가는 거예요. 마귀가 예수님을 팔아먹어야 됩니다.
우리의 자리, 우리의 자리가 바로 예수님을 파는 자리지요.어제 서경수 목사님 잘 지적했듯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예수님 죽으신 것이 죄인으로 죽은 겁니다. 의인으로 죽은 겁니다.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하지만, 본인은 죄 없고, 하나님은 죄 있다하고,그 죄는 어디서 올라오고 어디서 맡은 거예요? 구원 받을 자기 백성을 위해서 죄를 졌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첨에는 깨끗하게 했는데 어쩌다보니 죄를 지어가지고 죄 짓고 난 뒤에어쩌다보니 죄지어 가지고, 죄짓고 난 뒤에 ‘에구~ 용서해줘야 되겠구나’ 해서 나중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줄까, 내가 대신 돌아가실게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중간에 모의해가지고 계획 잡아서 하지는 않았다 말이지요.
첨부터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죄지어야 될 사람들이 첨부터 작정해 태어나야 했어요.그러니까 침례교와 같은 경우에는 잘못된 거지요.예수님이 좋은 분인데 우리가 죄지으니까, 우리를 용서해주기 위해 좋은 분이 아니고, 첨부터 예수님은 피 흘려서, 자신의 피 흘려야 주가 되요, 피 안 흘리면 주가 안 되기 때문에주 되심을 위해서 피를 흘려야 되고, 피 흘리기 위해서는 피 흘리게끔 죄가 죄지은 인간들이 세트로 이 땅에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신학은 예수님의 피를 예정했다고 보지 않고 그냥 예수님이 예정 되었다 이래요. 피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존재 중심인 거지요.존재 중심인 것 같으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델이 될 뿐이죠, 모델...맨날 모델 해보세요. 예수님을 오해하죠. 안보니까 자기 맘대로 상상하죠, 실제로는 예수님 피 얘기 한 사람을 핍박해놓고 자기는 예수님을 대게 사랑한다고 해요.소자한테 잘못한 것이 곧 나에게 잘못한 것인데 예수님의 피 복음을 증거한 사람을 그렇게 미워해놓고 자기는 주여, 주여, 하고 있다고요. 무슨 주가 그런 주가...ㅋ ㅋ 주님의 말씀은 거부하고 무슨 엉뚱한 주를 제조해가지고 섬겨요, 그런 우상을 섬기면서... 자기 과신이죠.
다시 한번 첨부터 해봅시다.예수그리스도께서, 첨부터 죄인으로서 죽어야만 주가 되심을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의인이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요인도 창세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어요. 따라서, 죄인이 등장해야 되고, 등장된 죄인을 위해서 피를 흘려 줄 때 비로소, 주께서 ‘다 이루었다’가 되는거에요. 예수님이 세 살 때 다 이루었다가 아닙니다.일곱 살 때 다 이루었다가 아닙니다.성전이 우리 아버지 집이다, 할 때 다 이룬 게 아니에요.물 흐려놓고 다 이룬 게 아닙니다. 병 고쳐놓고 다 이룬 게 아니에요.병 고쳐서 다 이루었다고 하면 이초석이나 요새 은사주의 그 사람들이 맞는 말이에요.그 사람들에게 기적을 원하면 물 흐려 보라하세요.물 흐린 거 심하다 싶으면 독사 한 백 마리 그들 집에 다 풀어보세요.백군데 물려가지고 퉁퉁 부어가지고 한번 있어 봐요,독을 물릴지라도 해를 입지 않은지 한번 해보란 말이지요.
십자가가 뭐냐 하며는요, 네가 죽어도 사는 이유가 ‘너는 원래 죽은 몸이거든? 살았는데 뱀 물려갖고 죽어서, 죽어서 낫는 게 아니고 원래 죽은 놈이 죽어가지고 죽어가는 거예요. 뱀 물려 죽든 뭐에 죽든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살려낸다는 겁니다.‘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살려내는 거예요.
산다는 기준은 천국 기준이어야지 이 땅에서 산다는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그거는악마에 자리에 있을 때, 우리가 죽기 싫어할 때, 우리가 망상에 사로 잡혀서 죽고 살고 하던 그 시절이고, 성령 받았던 예수님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성령 받을 즈음에 알았던 모든 것이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지게 되면, ‘아하,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지금 죽은 거고, 예수님 때문에 내가 지금 죽어도 사는구나!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 과장이나 오버한 게 아니고, 이게 실재구나 실재, 라는 것을 느끼죠.
네가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하는 거... 잠잘 수는 있어요, 잠잘 수는...오랫동안... 무덤 속에서 잠잘 수는 있고 화장되어 잠잘 수는 있는데, 죽는 일은 없다 이 말이지요. 왜냐면, 산자의 하나님, 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손대서 죽은 자가 없다, 이 말이거든요.
살아있는 하나님이니까, 살아있는 하나님이 손대면 이 물도 살아버려요. 여러분 물이 산다니까 이상한가요? 여러분, 물보다 해골이 살기 힘들어요. 해골도 살면...인간이야 75퍼센트가 물이니까.항상 성경을 해석할 때 내적을 가미해버리니까 예수님을 이용하려 하는 거예요.‘이케요? 저케요?’ 참하게 믿어보려고. 참하게 믿는 것은 필요 없습니다.성령이 오게 되면, 참하게 믿든 안 믿든간에, 성령이 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 받은 거예요. 주님이 관리하기 때문에요.
그러면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는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되는가? 방금 얘기 했습니다.예수 안에서 살게 된다. 예수 안에서 살게 된다, 그 말은 뭐냐, 가만있는 것이냐.인간은 가만 못 있다했죠? 어떤 변화가 일어나죠? 그 변화를 가지고 뭐라하냐면 23절에 봅시다, “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우리에게 예수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변화하는데, 그 변화 자체를 뭐라 하냐면, 그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놀이동산에 보면 빙빙 도는 타는 거 있죠, 그거 고정되어 있습니까, 변화됩니까? 변화되지요? 미국 갔다, 한국 가면 변화됐잖아요. 변화돼도 주님은 한결 같죠.
이게 바로, 예수 믿고 난 뒤에 뭐 할 거냐, 주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은 줄이 “어디를 가도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이 관계가 안 끊어짐을 아느냐, 이말입니다. 이미 주신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이 사랑인 것이네가 강조하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무슨 짓을 해도 사랑은 끊어지거나 취소, 거두어가는 법이 없음을 네가 인정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늘 변해야 되지요, ( 또 미국 가셔야 되요, ) 어디를 가도... 일본이나 북한을 가도, 사랑은 어디를 가도 나의 어느 지점을 가도, 내가 나이가 많아지고 치매에 걸려도, 사랑은 한결 같구나,를 보여주는 것이 성도의 삶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되지도 않은 이단 삼단들 오단들 온갖 핍박과 억압과, 주님 이거 너무 심합니다 하는, 그런 온갖, 몸의 아픔과, 가정의 우환과, 교회 분란과, 억울한 일과 심지어, 신혼부부가 죽는, 실수와 실수투성이, 내가 착각해가지고 남에게 피해를 주어, 가해자가 되어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되더라도,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환란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어떤 것도 이 사랑을 끊을 것이 없음을 네가 믿으면,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조석으로 우리에게 온갖 사건들이 터집니다.
‘엄마, 파출소 지구대에 와 있어,’ 왜! 술 먹고 사람 패버렸답니다. 합의금 2천만원 달랍니다. ‘지금 수능공부 하고 있는데 이런 전화가 오네, <가슴이 덜컹~덜컹~ >우리가 악마의 자리에서 기대했던 사랑은 뭐냐면,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그저 행복하고, 돈 무더기로 벌고, 공부하면 공부 잘하고, 말 잘 듣고, 아이가 갑자기 말 잘해가지고, ‘엄마 나 목사 될래,’ 이러는데, 이거는 반대로, 어디 안 아픈 구석이 없고, 남편 술먹고 와가지고, 더 이상 못 살겠다고 고함 지르고...
아무리 놀이동산이 재밌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이렇게 어지럼증 들 정도로 심하게 돌아갈지라도 주의 사랑은 어떻다?성경말씀은요, 변함이 없는데 변함없는 성경이 우리에게 닿을 때는 우리는 변화무쌍한 인생을 산다는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왜! 성령이 보조를 맞춰주기 때문에.
늘 우리가 낙담할 때 오셔가지고 보조를 맞춰 하시는 말이, ‘네게 준 사랑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보여줄 삶이 되는 겁니다. 어제 서경수 목사님이 얘기 했던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네가 젊을 때는 네가 원대로 갔거니와 네가 나중에는 팔 벌리고 남이 너를 데리고 갈 것이다. 띠 떼고 갈 것이다.
우리가 할 게 없지만, 그러면 띠 떼고 갔을 때 현상은 뭐냐, 우리가 감당 안 되는 사경에 집어넣어서, 사랑이 너희가 변화한다는 그 변화의 아슬아슬함보다 듬직한, 더 큰 십자가 보혈의 피가 주는 변함없는 사랑, 내가 너를 이런 경우에도 사랑했다, 피를 봐라, 오죽 사랑했으면 네 대신, 내가 대신 죽겠느냐, 하는 그 사랑이 크게 보이는 그것이 주님이 증거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ㅡ십분 쉽시다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안산100709요일3장24절b
둘 째 시간 시작 합시다, 4장1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는 자기 맘대로 거짓 선지자 못합니다. 배후에, 참된 영이 아니고 악한 영이 있어야 거짓 선지자가 나오는 겁니다. ‘자기가 도 닦고 연구하고, 이래서 거짓 선지자가 안돼요. 세상은 자기가 되고 싶은 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반듯이 자기 자리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돼있어서, 아무리 거짓 선지자, 참 선지자가 되고 싶어도 안돼요,
많은 목사들이 신학을 알고 복음을 팔고, 칼뱅 루터가 어떻고 해도 본인이 끌고 가는 게 아닙니다. 자기는 바로 가고 싶어도 그렇게 안돼요, 거짓 선지자가 되어야 할 사람은 되어야 합니다. 꼭, 무당이 무당병 들어가지고 무당 안 하면 아파 죽을 것 같은데 무당 되어 신내림 받고 깨끗이 낫는 것처럼, 바로 똑 같은 현상입니다. 한국교회 목사는 마귀 안 들리면 목사가 될 수가 없어요. (오늘, 과격한 발언들이 많이 나오네~^^ )
마귀가 안 들리면 목사 자체가 안돼요, 일반 성도는 몰라요, 목사 안수 받을 때 어떤 절차를 거치는지... 그냥 신학교 나오면 목사 안수 주는 거 아니에요, 심사 합니다. 선배 목사가 보기에, 정말 자기와 같이 마귀적이 아니면 목사 안수를 안 줘요. 만약에, 예수만 믿고, 예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 절대 안 줍니다. ‘네가 교회란 집단, 노회란 집단에 대해서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묻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미국 감리교회가, 미국에 감리교 신학교가 있거든요. 신학교에서 목사 수급을 할 때 현재 노회에 있는 자금을 계산해서 목사 수급을 해요. 일반 교인들은 이 이야기를 몰라요. 일단 목사가 되면 목사가 어느 교회를 송부하는 게 아니라 노회가 그 교회를 송부합니다. “당신들이 목사를 원합니까?” “예, 원합니다.” 그러면 년봉 최소 15만불 이상 줘야 되고, 차고가 딸린 방 4개 이상의 사택을 제공되야 됩니다.
그리고, 안식년부터 월차 다 있어야 되고, 그런 조건이 구비될 때 그 노회가 자기가 속해 있는 목사를 파견시켜요. 파견시켜버리면 그 목사는 거기 가서, 일 년 간은 세롭다고 좋다고 해요, 밑천 다 떨어지면 교인들과 티격티격 하잖아요. 그러면 교인들이 다른 목사 보내주세요, 한다 말입니다. 그러면 노회에서 그 목사 빼버리고, 이쪽에 있는 목사를 박아 넣어요. 목사는 1년 치만 설교 준비 하면 되요, 돌아 댕기는 거예요. 교인들 맘에 맞으면 오래 있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그 많은 돈은 헌금을 하느냐, 헌금 하는 게 아니에요.
미국의 교단들은 교인들이 갖고 있는 재산을 교단에 헌납합니다. 천주교와 비슷해요.
헌당을 해서 구원 받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돈 바쳐서 용서 받는, 천주교의 면죄부와 똑 같아요. 부동산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교회에 헌납함으로 말미암아, 확실하게 천당 간다는 도장을 팍팍, 찍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매미채 돌리는 푼돈 이거는 돈 얼마 안돼요, 목돈을 챙겨야 해요. 부동산은 자체가 가격이 올라요. 목돈 챙기기 때문에 노회는 자금이 넉넉하고, 넉넉하게 되면 신학생 졸업생을, 신학교는 2부로 있어요, 학부가 있고 대학원이 있어요. 학부 다니고 대학원 나와야 목사 될 수 있어요. 그래서 학부에는 누구도 발을 딛지만 대학원 뽑을 때는 노회의 자금을 계산해서 뽑아요. 자금이 얼마 안 되는데 2,30명 뽑아 버리면 걔들 연봉 15만불 못 주거든요. 그러니까, 자금을 계산해서 부동산 얼마 받아 챙겼나 계산해서 필요한 인원을 뽑아서 수급을 하는 겁니다.
소위, 편한 좋은 교회는 목사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음악 목사, 관리 목사, 여러 가지 심방목사가 있기 때문에 목사는 일주일에 설교 한번만 하면 되요. 오후에는 딴 교회 하면 되니까. 수요일도 딴 교회 하면 되니까 한번만 하면 되요. 그런데 좋은 교회 가려면, 그 오야붕, 교단의 오야붕에게 줄을 잘 서야 되요. 한나라당, 민주당과 비슷한 거예요. 줄을 잘 서면 좋은 자리에 배치가 되요. 배치가 되면 목사는 설교 한번만 하면 되고 나머지는 교인들과 같이 골프 치러 다니고, 요트 놀이하러 다니고, 온갖 좋은 거 하면서 한 몇 년 지나면, 딴데, 좋은데 보내주세요 하면 바꿔지기 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사가 되면, 평생 누릴 건 다 누리고 지옥 가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구약에서는 뭐냐, 거짓 선지자, 양성된 선지자, 신학교에서 교육받은 선지자라고 합니다.
성령은 없어도, 신학교에서 교육 받고 학점 따면 목사가 되는 목사. 직업으로서 하는 목사.
그게 거짓 선지자예요. 그런데 진짜 선지자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런식으로 목사 세운 적이 없다고 외치는 자.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는 성령이 와야 감독자가 됩니다.
성령이 와야, 부동산 헌납해서 세운 게 교단이나 교회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도달 되야만, 그 사람이 교회됨을 인정하기 때문에 성령 받은 목사는 강단에서 오직, 피 받았습니까? 피 받았지요? 하는 예수님의 피 밖에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어떤 본문을 가지고라도. 그래서 이렇게, 삯군인지 거짓 선지잔지 대강 분간 되지요?
성령이 제일 먼저 누구한테 왔다했습니까? 예수님한테 왔지요? 예수님한테 한번만 왔습니까? 옛날처럼 성직자는 갔다 왔다 이러지 않고, 성령께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어디로 몰아넣습니까?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다 이룰 때까지 계속 몰아넣었지요?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뭘로 기도했습니까. 성령의 힘으로 기도했고, 십자가 감당하게 된 것도 히브리서 보면 성령의 힘을 받아서 고난을 감당했어요. 인간적인 힘으로 감동 못했어요. 성령의 힘으로 그걸 감당했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성령이 오게 되면 뭐만 증거해요, 그리스도의 그 공로, 십자가에 있었던 그 내력과 거기 담겨있는 내용만 이야기 하겠지요. 그 성령 받은 사람이 참된 선지자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네가 영이 있다 하는 것은, 영이 있는데, 마귀에도 있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주위 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질 때 마귀가 팔짱끼고, ‘너는 너대로 하라,고 가만히 있었습니까, 어쨌습니까. 예수님 하는 일을 첨부터 으르렁~ 훼방하려고 했지요. 광야에서 했잖아요,’
“어이~ 당신이 메시아라면 돌이 떡되게 해봐라, 어이~! 배고프제 어이~!”계속 “어이~ ”하면서 야유 놀리는 거예요.주님 복음 전하면 “어~이~! 듣지 마,” 이런 식으로 기적 베풀면 인기 있을 건데, “너 뛰어 내려봐라, 이 세상 모든 권력 내것인지 알지?”
“내게 절하면 같이 다 줄게, 나한테 절하면...” 예수님 하신 말씀이, ‘하나님 말씀으로 충분하다’ 하나님 말씀 들어야 충분한 게 아니고 “하나님 말씀<만>으로도 충분해!”
그 말씀이 나로 하여금 죽인다 할지라도, 말씀 때문에 살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오고,그러니 너희는 말씀을 들으라, 하고 마귀와 세 번째 시험에서 그걸로 끝났지요.그런데 마귀는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십자가 죽을 때까지 계속 따라오고, 그것도 끝나지 않고 나중에 제자들에게까지 따라오죠. 이미 예수님을 놓쳤으니까.
닭 쫓던 개처럼 놓쳐 버렸으니까. 여자가 낳은 아들은 놓쳐버렸으니까,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려고, 강가에서 옛 뱀, 용이 “이제 너하고 붙자,” 하고 예수 믿는 소자들에게 또 따라 붙습니다, “에이~ ” 실제로 그래요, 복음 전하면 “에이~!” 합니다. 그 소리 하지 마라고...“여러분, 십자가에서 다 이뤘습니다,” 하면 “에이~! ” 한다니까요.
저는 한 두 번들은 게 아닙니다. 여기 장로들 목사들 초빙해놓고 설교하면 뒤에 몸둘바를 모릅니다. “저 인간 차비 줄까 말까,” 그이야기 하고 있을 겁니다.(ㅋ ㅋ ㅋ )
거짓 선지자는 본인이 그렇다는 걸 몰라요. 언제 아느냐면,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영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기가 거짓 선지자인 걸 알고, 거짓 선지자 티를 냅니다. 참 선지자를 핍박 할 수밖에 없습니다.종용히 불러서 이야기하죠,‘나가 줘~!’
꼭 이렇게 같은 인간들끼리 모이면 윤리 도덕 경쟁합니다. “네가 더 착해 내가 더 착해! 테레사 수녀가 더 위대해! 한경직 목사가 더 위대해,!”마귀들끼리 자랑합니다. 거기다 복음 전하는 사람 데려다 놓으면 한경직이고, 손양원이고 전부 다 마귀 돼버렸어요. 목사인데도 불구하고 복음 전하면, 결국 그들은 탄식하는 거예요. ‘우리가 죽일 놈 하나 놓쳤다, 이거예요. 목사 안수 안 줄 놈을 주었다고, 그들은 마귀 입장에서 그렇게 후회하는 거예요. 후회하면서 압박을 줘서 기어히 목사 자리를 빼버립니다.
그래서, “너희가 복음을 전하고 핍박을 받거든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당연한 일을 가지고 네가 이상히 여기느냐? 당연한 일을,”혹시, 네가 이 세상 말고 딴 세상, 성경 세계 말고 다른 세계를 현실로 간주하고 있지나 않느냐 이 말이죠. 그게 아니거든요. 우리가 성경세계 말고 다른 현실시계 살고 있지 않습니다. “내 복음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선지자들도 그와 같이 핍박 받았느니라 복이 있다” 그 세계 말고 다른 세계는 없습니다.이 세상에 없어요.
이명박이 대통령이다. 그것만 현실이 아니에요. 기아 타이거즈가 16연패 했다, 그것만 현실 아닙니다. 복음을 알면 마귀가, 달려들게 되어 있고, 그게 성경대로 현실입니다.우리가 이 세상에 가져온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리라, 이것도 현실이고요. 부자보고 천국 가라는 것은 낙타보고 바늘귀 들어가라는 것과 똑 같은 소리다.그것도 현실이고, 어느 성경말씀 하나 현실 아닌 거 없어요.그 현실을 묶어 보니까, 그 속에서 피가 흘러요, 그걸 짜보니까 피가 뚝뚝 흐른 거예요.
그 피를 가지고 뭐라 하냐면, 여러분 아시지만, 그 피를 가지고 세 자로 하면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걸 두 자로 새기면? 신약. 그게 잘못 되었어요. 새 언약이라 하면 신약만이 아니고 신구약 다 합쳐서 새 언약이라 해요. 신구약 다 합쳐서 구약도 새 언약적으로 해석해 줘야 해석이 되요. 창세기부터, 아니, 창세기 전부터, 그러니까 요한복음에, 창세기 전부터 새 언약에 비춰서 이걸 짜버리자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이라고 하면, 교회 예배 마치고 나오면요, 짜면 피가 나와야 되요. 주 예수님 피가 나와야 되지, 자기 낯 자랑하면 예배 잘못 드린 겁니다. 자기 자랑 나오고, 그런 거 나오면 안돼요. 피가 나와야 그 피를 세상에 나가 증거 할 수 있지요.
거짓선지자 한번 봅시다. 거짓선지자는 구약 때 양성했다고 그랬어요. 그럼 양성했으면 다 나쁘냐. 이 문제 였어요. 그러면, 엘리사와 엘리야만 선지자고 나머지는 다 거짓선지자냐? 아니면 거짓선지자도 그 중에 일부 있느냐? 다 거짓선지자냐?엘리사와 엘리야만 선지자고 자동적으로 모두 거짓선지자가 되느냐?
구약 때는 새 언약 시대가 아니고 언약 시대입니다. 언약 시대 에는요, 어떤 특정 개인이 지옥 갔다, 천국 갔다 결정되는 언약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피를 안 믿으면 무조건 지옥 갑니다.예,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피를 안 믿으면 무조건 지옥 가요.
구약에서는 무조건 지옥 간다, 무조건 천당 간다 에 초점이 있는 테마가 아닙니다.그게 주테마가 아니에요. 옛 언약은 언약을 인간과 더불어 이루어나가는 과정입니다.언약이 완료가 안 됐어요. 언약이 완료가 안 되고, 아까 막대자석 비유와 좀 다라보이지요?한번 예를 들어볼게요.
식당에 보통 몇 시에 문 엽니까? 예를 들어 10시에 문 연다고 합시다.그러면 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들은 10시에 오면 되요 안돼요?적어도, 장보고 하려면, 주인은 7시정도, 종업원은 9시정도에는 와야 될 거 아닙니까.9시정도 와야 준비도 하고 양파도 다듬고 하잖아요.양파 다듬고 감자 다듬고 할 때, 맛이 있다 없다 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죠.왜냐면, 음식을 만들기 전, 재료 준비 과정이기 때문에.“오늘 감자탕은 참 맛있어” 하려면 감자탕이 나와야 “맛있어,” 해야지감자탕 만들기 준비 단계거든요, 준비단계. 준비 될 때 주방장이 10시 정각에 “감자탕 두 개”하면 “맛이 왜이래” “어, 맛있다” 말이 나오잖아요.신약에서는 이미 완료된 음식을 그냥 맞는 겁니다.
구원은 공짜가 아니라했죠? 구원은 공짜가 아니고, 천국 가는 건 공짜가 아니고 뭘 대가로 구원 받는다고 했습니까. 누가 내대신 지옥을 가 줘야 되고, 시소를 땡겨 줘야 올라간다고. 그러니까, 준비단계에서는 누가 지옥가고 천당 가는 게 아니라 이런 사람은 지옥가고 이런 사람은 천국 간다는, 양파나 감자 다듬기입니다. 구약은.사울이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사울 같은 인간은 지옥 간다.아람 같은 인간은 지옥 간다,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 신약에 오면 가룟 유다는? 지옥 가지요.예수를 사랑하지 않은 인간은 저주 받을지나, 예를 들면, 감자탕은 이미 완료가 되었어요.하나님께서 언약을 만들었는데, 양파 까고 감자 깎을 사람이 누구냐, 다른 민족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민족만 사용한 겁니다.감자 깎을 때 자기가 구원 받은 백성이라고 기분 좋았지요.
그런데 양파 깔 때 눈 따갑다고, 감자고 뭐고 다 치워버리고 감자 깎아야 할 종업원이 옆 중국집에 가 짜장 만들어요. 하나님께서는 귀한 포도 맺으라는데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들포도를 맺어요. 들 포도. 들 포도가 어디서 온 겁니까?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에서 왔잖아요. 하나님은 감자탕을 만들라고 했는데 주변에 피자집, 스파게티집, 짜장면집, 분식집,그게 맛있다고 자기 집 종업원이 거기 가서 일해요. 감자 깎으라니까, 중국집에서 짜장면 뽑는 연습하고 있어요.
왜 뽑냐고 하니까, 그쪽 중국집이 더 맛있다고 하잖아요. 그래 주님께서, “내가 네 주인이거든?” 저쪽 중국집 바알 아저씨가 멋있게 생겼다는 거예요. 우리 주인은 영 맘에 안 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감자탕 집 아들이 “우리는 감자탕만 외쳐야 됩니다” 하는 선지자가 누구냐면 참된 선지자예요. 준비 단계에서 결국 주님한테 인간은 협조 했다 안 했다? 협조 한 게 아니고, 뭘 시켰는지는 알지만 율법이 우리에게 뭘 요구 하냐, 감자 깎아라, 양파 까라, 시킨 건 알지만 이거 감자 안 까고, 저쪽 음식이 더 맛있어서 면 뽑는 연습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면, 진짜 장차 일꾼 될 사람들을 뽑아서 감자탕 집을 폐업을 해버립니다.완전히 폐업을 해가지고 “네가 그렇게 자장면 먹고 싶어 하니까 보내버렸다”자장면 한두 번 먹으니 맛있거든요. 아침 점심 저녁 자장면 먹으려니 미치고 환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이나 다니엘 예레미야는 “주여, 언제 옵니까” “70년만 있다 오자 70년만” 70년만 있다 다시 오는데, 다니엘이 기도했어요.“하나님, 70년 아직 안됐습니까” “아, 다 됐네,” 70년 다 됐다는데 나중에 70년을 주는 게 아니고 70이레를 줘버렸어요. 저쪽 중국집에서 감자탕 집 오는 게 아니라, 감자탕 집은 없고 하늘나라 저쪽에 있는 거예요. 올 필요도 없어요. 다니엘은 안 가요, 옛날 집 안가는 거예요. 그런데, 가는 사람이 있어요. 가서 감자탕집 해도 또 중국집 돼버리고, 뭘 해도 장사가 안 돼요, 파장 분위기예요. 나중에 중국집 감자탕집 불놓아버리고 하늘나라 감자탕이 내려오는데 새로 올 사람이 없어요.
구약 성경에 기록되게 되면 하나님의 성신의 입장에서는 완제품이 아니고, “이거 믿으면 구원 돼, 이거 믿으면 지옥 가 이것 믿으면 천국 가” 완제품이 아니라 그것 만드는 과정의 성신께서 관여하는데 이걸 구약의 성신은 뭐라 하냐면, “언약의 신” “옛 언약의 신”이 바로 성신입니다. 옛 언약의 신이기 때문에 요즘의 성령같이, 신약시대의 성령같이 그런 활동은 안 해요.
옛 언약은 뭐냐 하면, 인간에게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가르쳐주고 율법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역할이에요. “율법대로 살아야 돼” “살아야 돼”라고 하죠.성신이 임하게 되면, 성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전쟁에서 승리케 해요. 그리고 또 하나, 성신이 임하게 되면 그들이 죄를 알고 회개케 해요. 그러니까 성신이 율법을 결국 지키려 해도 율법을 못 지키는 것은 율법을 지켜 승리하면 이 승리가 누구것이냐 하면, “성신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다,” 하게 만들어요.그리고 그 와중에서 “우리가 진짜 나쁜 놈입니다. 우리 힘으로 이스라엘이 된 게 아니군요. 라는 뜻으로 회개케 하는 일을 하죠. 이것을 기능적 이스라엘, 기능이란 뭡니까, 사용하는 겁니다.성신이 오게 되면 사용하는 거예요. 기드온이 성신이 임하니까, 어디에 사용했죠? 전쟁에 사용했지요. 기드온이 아무런 무기도 없이 사용됨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안 믿은 죄가 됐군요” 하고 깨닫게 하는 거예요. 깨닫는 거 얼마 갑니까? 얼마 안가요. 왜 그러냐면,
다음에 또 기능으로 사건이 터질 때, 그때만 성신이 오기 때문이에요.성신은 여기 머무는 게 아닙니다. 사울에게 성신이 와서 머물러버리면 사울이 어떻게 되요.구원 받아요. 그럼 사울에게 성신이 임했습니까 안 임했습니까? 임했지요.사울이 왕이 될 때는 먼저 혈육 가족과 떼어놓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나귀를 잃어버리게 만들어요. 나귀 찾아 삼만리 가다보니까, 저쪽 혈육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 삼촌이 찾아오라는데” “삼촌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게”
너는 성신 받아서, 사사가 되어라, 어떤 기능인이 되어라, 성신 받고 나서 전쟁에 승리하잖아요. 사실은 그게 왕이 아닌데, 사사인데 사람들은 “왕을 주소서” 사사니까 어려울 때마다 왕 달라고 하기가 귀찮거든요. 그래서 듬직한 왕이 하나 있으면 두 번 다시 우리가 적에게 밀리지 않아도 될 텐데, 사사만 있으니까, 사사가 죽으면 또 쳐들어오고, 사사가 엉뚱한 놈 있다가 또 죽으니까 또 밀려오고. “사사가 살 때까지 평안했다”고 사사기에 나와요.
사사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나라가 평안하다. 그러면 안 죽어야 될 것 아닙니까.안 죽는 방법이 뭐죠? 사사의 자식을 또 사사 만들고, 사사의 자식을 사사 만드는 방법이 무슨 방법입니까. 딴게 아니고 그게 바로 왕이지요. 세습제. 그 식대로 해달라는 거지요.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입장은 누구 입장이냐, 하나님이 왕임을 인정 안하고, 이스라엘이 편한 것, 지들만 편한 것, 쉽게 말해서 구원 받아서 고생 안하는 것만 생각하니까.하나님을 그따위로 잘못 해석하고 그따위로 이용하는 겁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와 똑같아요.
성경에서의 보는 관점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다루냐, 이래야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내 편한 대로 다룰 수 있느냐, 노하우, 스킬, 기술... 목사에게 이걸 가르쳐 달라며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섬기면 복 받습니까.’“네가 사사해 네가. 네가 하나님 앞에 사사해”원치 않은 길로 가야돼 네가, 인간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달라고 난리에요.
성신 이야기는 이만큼 어려워요. 아직 성신 이야기 안 끝났습니다. 지금 중간쯤 왔어요.성신의 기능은 율법을 만들어 나가는 기능이고, 율법이 완성이 아니고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만들어 나가는 과정 속에 개입하기 때문에 무엇의 허약성,아무리 하려고 해도 인간은 하나님께 보탬이 된다? 안 된다? 전혀 안 된다는 걸,새 언약 만드는데 재료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에다 우리 피 보태서 새 언약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 땀방울에 우리 땀방울 보태서 새 언약 되는 게 아니에요.이 말은, 새 언약 시대가 일단 되어버리면, 우리가 구원 받을 때 예수님 십자가에다 우리의 행함을 보태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 땀 흘리며 기도할 때 우리 땀 보태서 구원 되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이지요. 왜냐면, 새 언약 시대가 넘어갔기 때문이죠.
그러면 옛날의 성신이 옛 언약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 왔다면, 그것도 한시적으로 왔다면 사울 같은 경우 왔다가 악귀 들렸거든요. 왜? 기능이니까.다시 할게요, 기능이란 말은 나 좋아라고 쓰겠다는 거예요. 장난감 만지다가 재미없으면갖다 버릴 때, 장난감이 딴소리 하면 안돼요. 왜 저를 안 쓰십니까, 이런 소리 하면 안돼요.우리는 장난감이다 말이죠. 그러면 신약에 성령이 옵니까. 성령이 우릴 구원하러 온 게 아니라니까요. 구약의 성신처럼 우리를 사용하되 영원히 사용하기 위해서.
그런데 안 믿는 불신자도 성령의 혜택을 입어요, 비가 오고 안 오는 것도 성령의 역사인데요. 성령의 참여함이 되고 버림 받아요, 왜냐면 기능적이니까.저쪽은 계속해서 옛 언약적으로 기능적으로 놀고,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새 언약의 성령이 저촉이 되어서, 그야말로 성령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 가서도 면류관 받아야 할 기능인으로 가는 거예요. 어린양 주님을 섬기는데 하자가 없도록요.
이스라엘 백성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자기들이 나오고 싶어 나왔겠습니까?어떻습니까, 아. 못 살겠다 나가보자, 이랬습니까? 아니죠. 나오겠다는 견해, 아이디어는 누구의 일방적인 겁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이죠.하나님께서 저들을 끄집어내서 약속의 땅에 데려다 놓고, 데려다 놓은 그들을 통해서 예배를 받아야 되겠다, 라는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그냥 일방적으로 끄집어 낸거예요.
그 뜻을 히브리인들은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성신이 임해서이것이 애굽이고, 이것이 회개할꺼리고, 애굽적인 속성이고 이것이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약속이야. 새로운 약속과, 익히 아는 인간의 자기 사회생활의 노하우와 항상 대비시키죠.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우리의 옛 사람에서 나오는 아이디어와, 주님이 주신 천국의 생활,천국 생활인 것을 자꾸만 서브시키죠.
삼층천 올라갈 때 사도바울이 자기가 누군지 모르지요? 그 짧은 순간은요, 천국의 주님이 사랑의 긍휼과 “걱정하지 마라, 나 너 용서 했어 손 털어, 네가 네 걱정할 필요 없어”
그 소리 듣는 순간, 짧은 순간이지만 나를 잊어버립니다. 근심걱정 잊어버리고 내 자리를 잊어버려요. 어디서나 천국이라는, 아골골짝 어디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느 곳도 천국이 돼요, 짧은 순간 그렇게 돼버려요. 그게 성령의 새 언약 기능의 효과입니다.그때 나오는 것이 무슨 열매냐면 성령의 열매라고 해요.성령의 열매는 남이 나에게 잘해줄 때 나오는 열매가 아니고, 남이 나를 비난해도,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형제애 우애와 인애가 터져 나오고, 그게 없으면 항상 중심은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 일에 방해하면 화내고, 잘해주면 좋다고 까불고 이렇게 되죠.
성령께서 우리한테 박히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정과 욕심을 못 박았다 해놓고 박아버려요. 그냥 우리한테 “잘해라?” 하고서 박는 게 아니고 우리를 어디로 데려갑니까, 십자가로 데려가서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박아 놓고, 올려다보니까 성령의 눈금에는 내 피가 아니고 내 죄가 더불어 용서된 예수님의 피가, 눈금이 올라 온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눈금이 쑤욱 내려가 있어요. 올라갔다 내려갔다, 성화론 같으면 계속 올라가야 되는데 올라갔다 내려갔다... 변화되죠, 우리만 변화되는 게 아니고 주님도 우리와 같이 보조 맞춰 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항상 우리를 성령의 기능에 의해서 새 언약의 증인되게 하시죠.
새 언약의 증인이라는 말은 히브리서 마지막에 나와요. “너희는 새 언약의 증인이 되라”히브리서 13장 20절에 보면, 영원한 새 언약,“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영원한 피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그 하나님의 우리로 하여금 뭘 즐거워한다?예수그리스도의 언약의 영원한 피를 즐거워하도록, 우리에게 조치를 취하신다는 말이지요.성령께서 이런 조치를 우리에게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봅시다. 요한일서4장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영이라고 다 믿지 말고” ‘옛날부터 성령, 신비로운 어떤 초월의 세계에서 하고 싶은, 신비로운 일들 많이 시도한 모양이에요,‘ 그래야 종교 장사가 되니까, 점포가 커지니까.장사 잘되니까, “여러분 신기한 거 보고 싶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시면 삼층천 올라갑니다.” 이런 이야기가 많았던 모양이지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회개가 일어나고, 우리가 우리됨은 누구 승리로? 하나님의 승리로, 예수님의 승리로 돌아올 때 그게 성령 받은 거예요. 구약에서는 이게 잠시지만 성령은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이것이 계속 일어나게 하시죠. 거짓선지자 얘기 해보죠,그러면, 엘리사, 엘리야 두 사람 뿐이냐, 엘리야 때 한 사람만 선지자고 나머지는 거짓선지자냐, 남은 자 7천명이 있지요 엘리야 때에. 어떻게 남았습니까, 자기 행해서 남은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남게 해서 남은 자가 됐죠? 남은 자는 자기 행함으로 남은 것이 아니고 은혜로 남은 자이기 때문에 남은 자라고 로마서에 나와 있거든요. 대비해 놨어요.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은혜는 무엇의 반대다? 인간의 행함의 반대라는 말이죠.
거짓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독자적으로 거짓선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지느냐 하면, 참된 선지자가 여기 있네, 라고 지목해주기 위해서 거짓선자지는 거짓선지자 노릇을 해야 됩니다. 거짓선지자 지 담대로 안돼요, 자기 성질 자기가 못 지킵니다.
예레미야 뺨을 때려야 돼요, ‘때리고 싶은데 내가 참는다‘ 이런 거짓선지자는 없습니다.참된 선지자를 보여주기 위해서 거짓선지자가 있어야 되는 것처럼, 예수님이 오실 때 예수님만의 참된 메시아를 보여주기 위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주변에 배치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늘날, 말씀대로 되려면 성도의 말에 대해서 비방하고, 틱틱거리고, “참 웃기네”하고 모욕하고, 모독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슬슬 등장해야 됩니다. 슬슬 등장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여, 우리의 소원은 주와 함께’ 그겁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고, 그냥 올라가는 겁니다. 이런 말이 술술 나와야 되거든요, 자식도 필요 없고, 부모도 필요 없고, 나는 주님이 계시면 최곱니다. (이런 표현이...)
너무나 주님을 사랑하기에 ‘여자를 미안해서 사랑 못해’ 사랑하는 분 따로 있기 때문에 여자를 보고 “자기 나 사랑해?” 하면 “아니거든?” “왜?” “왜?” “난 사랑하는 사람 따로 있어” 다른 여자가 있는 게 아니고, 나는 주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차마 거짓말을 못하겠어. ‘제가 누구한테 들은 이야깁니다. 진짭니다.‘진짜 사랑하는 자가 있으면 그 앞에서 세상적 사랑은 다 시시해 보이는 거예요. 시시해 보이면 어떤 점이 좋으냐면, “ 그러면 헤어진다, 나 간다” 그러면 “ 가라~” 하지요.
헤어짐의 아픔이 덜해요. “가자~”그 뒤에 미안해지지요. 마음을 바쳐 사랑했는데...'정주고 마음 주고 다 줬잖아요’ 얄미운 사람, 정주고 마음 주고 다 줬다니까요.'아~얄미운 사람’ 정주고 마음 주고 돈 주고 다 줬는데 준만큼 사랑 해달라는데, 말이라도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다는 아니거든?” 이래야 돼요.주님을 너무 사랑하기에, 차라리 혼자 지내고 싶지요. ‘참~ 사도바울이 독하지요?’사도바울이 독한 게 아니고 사도바울이 그렇게 되도록 계시하신 예수님이 독합니다.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다, 하지만 차선책으로 도저히 욕정을 못 이기거든, 못 이긴 척 하고 해라, 하지만 마음은 여자에게 뺏기지 마라, 여자 좋아하다가 주님께 소홀할까 겁난다.‘정주고 마음주고‘ 그러지는 마라. 진짜 정주고 마음 주고는 따로 있다니까요. 이 말은, 세상이 너를 실망케 하더라도 낙담치 말라,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이 말이지요.삶이 너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푸쉬킨 시에 나오잖아요, 러시아 시인.설움의 날을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인생은 다 헛된 것 지나가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 지리니’
드라마 나오는 꼬라지 보면 기가 찹니다‘ 나오는 것마다 옛 언약이예요.나오는 게 전부 다 거짓선지들입니다. 점잖고, 훌륭하고, 인격적이고, 공부 많이 했고, 다 거짓선지자예요. ‘거짓선지자 특징이 나왔네, 거짓선지자의 모델은 바리새인입니다.거짓선지자의 진짜 모델은, 거짓선지자로서의 메시아! 그들은 메시아를 모델로 삼아서 바리새인 되었고, 바리새인의 뿌리가 거짓선지자가 되는 거예요.예수님의 피를 빗겨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부가 거짓선지자입니다.
‘왜?’ 예수님은 자기가 본받아야할 인물이고 예수님처럼 희생하고 봉사하면 구원 받는 줄 아는 사람들. 그런 자는 교회서 젤 훌륭한 게 목사고 목사보다 약간 못한 게 장로고, 좀 더 못한 게 집사가 되어서, 교회가 단단한 법적인 영적 카리스마를 갖출 때 교회가 안정성을 구축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산당이죠.
어제 서경수 목사님 산당 얘기 했죠? 행함의 큰 산당, 이러다보니까 거짓선지자는 필히 등장해야 되죠, 필히. 왜! 뭣 때문에! 거짓선지자가 상대한 사람이 참선지자기 때문에.그래서 남은 7천명은 거짓선지자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엘리야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요.엘리야를... ‘하나님, 엘리야 지켜주세요’ 하지만 엘리야는 몰라요.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 있다는 건 모르고, ‘하나님, 혼자 남았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를 모르니까, 자기만 남았다는 거죠.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너처럼 하나님 은혜로 남아있는 자가 7천명 있다는 거예요. 우리 같았으면 ’또 입바른 소리 한다‘ 할건데, ’7천명 같으면 좀 도와주지~‘
그러나 그 사람의 기능은 그게 아니고 기도해주는 기능. 입 다물고 참아야 되는 기능이 또 있어요. 왜냐, 감자깍는 구약이기 때문에 그래요.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은 같이 울고 같이 웃고, 미국에 있는 누군가 핍박을 받으면 한국에 있는 우리가 가슴아파요. 복음의 인터넷, 인터넷은 유비쿼터스입니다. 인터넷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이 의미가 없어요, 인터넷이니까. 가상의 세계가 더 현실적이라는 게 인터넷 세계예요.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을 대신할 정도가 아니라, 진짜 현실로서의 행세 하는 그게 오늘날 가상세계입니다. 제가 3D 티브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전자 마트 안경코너에 비치되어 있어서 봤습니다. 진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에요. 더 놀라운 사실은요, 고화질보다 3D를 보면 진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요. 그래서 머리가 아픈 거예요. 왜냐면 익숙한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오래 보면 머리 아픈 이유가.적응 못하는 이유는 두뇌가 진짜 현실만 봤는데 진짜보다 더 현실다운 것에 적응하려니 갑자기 애너지가 많이 드니 오래 보면 머리가 아픈 거예요.3D를 보다가 고화질 일반 평면 티브이 보면요, 사람이 미치게 되는 거예요.진짜 현실은 현실이 아니고 3D, 인간이 만든 가짜 현실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모든 젊은 아이들 정신병이 그겁니다. 집에 있는 부모님은 부모가 아니고, 드라마에 나오는 부모가 더 부모처럼 느껴져서 자기 부모한테 욕을 하는 이 현실, 가상현실이 우선이예요.진짜 선지자인 사도바울은 진짜 현실을 이야기하죠. 그거는 뭐냐,
하나님마저 죽이는, 하나님마저 살려두지 않은 이 더러운 세상, 악마의 세계, 이걸 이야기 하니깐 그 인간들은 그게 무서워서 거룩한 집을 짓고, 거룩한 음악을, 메시아의 헨델을 연주하고, 모든 고상하고 거룩하고 윤리도적적인, 바자회 열고, 동티모르 아이들한테 축구공 보내는, 나이지리아에 돈 모아서 점심값 보내고 합창단 모집하고, 인간이 꾸며낸 가상 윤리 가상 천국을, 진짜 비참한 십자가의 천국을 대체하잖아요 교회가.진짜 무서운 세계입니다. 정말 무서운 세계예요. 그러면 그 가상 세계, 가상 천국을 하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한 자 밖에 없어요. 뭐가 필요합니까. 딱 한 자로 <힘>이죠.
자본주의사회에서의 힘은 어디서 나온다? 돈! 설교 마지막 말씀에 무슨 이야기를 해야한다? 결국은 설교 실패하고 뭐 내라? 돈 내라, 힘내라, 힘내야 당신네들 살기 힘든 이 세상 말고, 진짜 천국 보고 싶지요? 그 천국 만들려면 뭐가 필요하다고? 돈이 필요하니까 돈 주시면 여러분이 원하는 그 천국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착한 일 하고 아프가니스탄 선교사 보내서 순교하게 하고, 그거, 젊은 아이들 돈 주면서 아프가니스탄 갑니다, 가지말래도 가요! 그렇게 해주겠다는 거예요. 남아도는 게 선교사니까, 선교사도 돈 주면 안 갈 리가 있겠습니까. 중국의 선교, 돈만 주면 선교 다 돼요.
중국 사람은 복음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보내주는 돈을 원해요. 돈만 있으면 교회 세우고 다 합니다. 공무원들 매수 하고 전부 다 허가 받고, 학교 허가 받고.첨에는 교회 복음 전한다는데, 복음 전해가지고는 오래 못 가요, 병원과 학교 세워야 됩니다. 미국 감리교회와 남침례교회, 장로교가 우리나라 선교할 때 그 사람들이 복음 들고 온 게 아닙니다. 병원과 학교 들고 온 거예요.
그리고 밀가루와 설탕, 초콜릿, 초콜릿에 어른이고 양반이고 다들 뿅 갔습니다. 세상에 이런 맛만 먹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했어요. 옛날에 초콜릿 하나 먹으면요 이제는 더 살 필요 없어요. 5원 짜리 초콜릿, 젊은 사람은 몰라요. 비닐에 싸여있는 거 미군부대 거쳐 나온 거 그거 하나 먹으면요, 꿀은 더 이상 맛없어, “초콜릿 이거 먹어야 돼,”‘헬로껌~!’ 하면서 쫓아 다녔습니다. 그게 천국이에요. 그게 천국인데 무슨 천국을 갑니까.
바로, 교회 계명대학교 (계명대학교 또 나온다)에서 세운 선교단체에서 계속해서 구제품 쏟아지는 겁니다. 목사 자녀들 무료로 외국 유학 보내고, 학교 세워서.국가 입장에서는 자금 없는데 학교 세워주니 고맙고... 그게 바로 구약 때, 거짓선지자가 했던 거고, 권력이 힘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회에 나오면 정치권력과 결탁이 되어버립니다.소위, 종교부 장관자리가 기독교 영향을 입혀가지고 그 밑에 부장급들, 1급 2급 공무원은 전부 기독교 신자로 박아두고 불교 추방하고 기독교 신자로서 기독교 나라 이룰 때 그 목적을 두고 목사는 대통령, 기독교 대통령, 장로 대통령 세우려는 것입니다.
왜? 민중들이 원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는 천국을 원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려면 힘 보여야 되고 힘 보이려면 최고 권력자가 있어야 되니 기독교 대통령 세워야 되잖아요. 그래야 목사도 살고, 방금 이야기 한 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다에서 온 짐승이 땅에 온 왕들과 양들, 거짓 어린양들과 결탁해서 진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을 힘으로 밀어붙이는 고난의 현장을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준 겁니다.
이미 사도요한에서 그 모습을 보였습니다. 2절에 봅시다. “하나님의 영이 이것이니 곧,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였나니” 이거 예수님 육체로 오신 것 이야기 했지요? 다신 한번 이야기 할까요? 예수 육체로 오신 것은 육체로 보여준 게 뭐냐? 중요합니다. 5장 6절7절요. 육체로 와야 하는 이유가 뭐냐? 메시아가 육체로 와야 되는 이유가 뭐냐, 세 가지로 나와야 되기 때문에. 세 가지는 뭡니까? 6절에 보면,
이는 물과 피와 임하신자, 또 물과 피와 성령만이 뭘 증거한다? 이분이 진짜 예수님이다.그렇게 말해도요, 예수님께서 육체라 해서 물과 피 나왔지요? 물과 피 나오는 그것을 물과 피 또는 성령 예수님 나왔던 그 십자가 말고 또 세례요한에 받았던 물세례를 포함해도 괜찮아요. 암튼 예수님이 육체를 위하여 움직였던 세례요한이나(육체로 온 세례요한) 예수님의 십자가 피 성령 이걸 합쳐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례요한과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 육체에서 뭐가 나온다? 피가 나온다. 예수님의 피가 나온다.왜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냐면 요한일서에 보면 예수님의 피! 피 때문에 네가 용서 받았다는 겁니다. <피> 때문에. 예수님의 화목제물 때문에.
예수님의 피를 중심으로 해서 물과 성령을 배치를 해서, 물과 피와 성령으로 해서 예수님은 육체로 왜 오셔야 되는가, 왜 메시아는 육체로 와서 피를 흘려야 되는가를 보여주게 하는 것이 성령의, 모든 인간이 구원 받는, 영원히 변치 않는 유일한 근거가 됩니다. 다른 근거는 없어요. 예수님 훌륭하신 분,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 다시 오실 분,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 다시 오시는 건 좋은데 ,근원적으로 진짜 당신이 예수님 믿는 거 맞나? 할 때는 피 흘리심과 나의 구원과 관련시켜 줄 때 진짜 메시아다 그 말입니다. 누구든지...(요한일서에 나온 이야깁니다) 자기가 죄 없다 하는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라? 거짓말하지요. 요한일서1장7절에 뭡니까,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실 터이니” 해놓고 뒤에 “죄 없다 하는 놈은 거짓말 하는 자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모든 이 세상이 악한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부각하기 위해서, 그걸 증거 하는 사람이 우리가 고난 받기 위해서, 그런 자들을 배치를 해놨기 때문에 기죽지 말고, 꿇리지 말고, 그럴수록, “오호, 반갑다 마귀야!” 해가지고 마음껏 예수 피를 전하자 이 말입니다.
ㅡ 기도하겠습니다. ㅡ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졌다는 것이,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것이, 죽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날마다 저희에게 새롭게 들리고, 깊이 있게 들려서 그것만이 유일한 현실인 것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ㅡ아멘ㅡ
2010-09-01 20:35:47 녹취 : 박온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