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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5강 / 요일 5:18 / 하나님께로 난 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1서

15강 / 요일 5:18 / 하나님께로 난 자

정인순 2011. 1. 15. 12:57

110114 하나님께로 난 자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안산/안양 110114a.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안산/안양 110114b.MP3

 

 

녹취:박온정

 

안양110114요일5장18-21a‘하나님께로 난 자’/이근호 목사

   요한일서5장18절-21절 할 차례입니다. :(옹기종기 모여 소곤소곤 공부해서 좋다는 안양에서의 첫 강의 소감을 피력하심-동그라미들의 폭소가 있었고, 협소한 공간에서 강의 하시는 게 좋다고 하심. 따뜻하고 소박한 공간을 제공하신 유일자 성도님께 동그란 피자 판을 대신해서 감사인사를…녹취자)

   『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 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개역개정』이래 돼있죠? 우리는 성경말씀을 보면 우리 자신을 성경말씀에 맞추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맞추려고 노력을 많이 하지만 또한 우리 자신이 생각해볼 때, 우리가 맞추려는 노력을 왜 해야 되지? 생각도 들고.

   여기「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사람이 자기 부모로부터 태어나면 그만이지 왜 하나님께로 날려고 할까…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했는데 한번 적어볼게요.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두 종류가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하나님께로 안 난 사람이 있죠. 보통 길에서 숱하게 만나는 사람, 길에서 담배피우는 사람, 이런 사람들…(특히 침 뱉은 사람들-녹취자) 밤늦게 술집에서 술 먹은 사람들 대부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시렵니까?’ 하면 부담스러워할 거예요.

   하나님께로 꼭 나야 될 이유가 뭐냐, 하겠죠. 우리 상식에 어긋나죠? 성경자체가 우리의 상식과 우리의 일상적인 용어와 안 맞게 돼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싶어도 성경의 용어 자체가 하나님께로 난 자, 이래 나오니까 부담을 느껴가지고 ‘나 그냥 살림만 살래’ 집에서 그냥 살림만 하고 살아도 좋은데 하나님께로 난 자라야 구원받는다 이 말입니다. 살림을 하시든 집에서 노시든 그건 본인 편한 대로 하시는데, ‘하나님께로 난 자’를 사람들이 무엇으로 때우냐 하면 교회 다니는 걸로 때워요. 교회 다니는 자.

   교회 다니는 자는 새벽부터 주일 저녁예배 수요예배 다 해도 여전히 그것은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니에요. 부모로부터 난 자가 그냥 교회 다니는 것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로 난 자라 하면 저 위, 하늘에 하나님 계시고 그 밑에 사람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난 자가 아니고 누구에게서 난 자입니까? 부모로부터 난 자죠? 차이를 이야기해보면 부모로부터 난 자는 어릴 때부터 같은 집에서 삽니다.

   나중에 열아홉 살 스무 살 되어 독립, 결혼하게 되면 분가하게 되죠? 그러면 헤어지게 되죠? 사람에게 난 자는 태어나자마자 처음엔 사람의 보호를 받습니다. 보호를 아무리 받고 사랑을 아무리 받아도 결국 어떻게 되겠어요? 부모는 부모고 나는 나가 되겠지요. 사람에게서 난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어린아이 때부터 엄마가 뱃속에서 나와 아기로 자라가게 되면 엄마가 아무리 꿈을 꿔도 아이의 꿈이 될 수가 없어요. 심지어 엄마 뱃속에서도 마찬가지고, 엄마는 아픈데 아이는 안 아프고, 아이는 아픈데 엄마는 안 아프고. 사람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태어나게 한 부모와 자식과 생각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한 집에서 식사를 같이 하고 같은 방에서 잠을 같이 자도 부모 따로 나 따로 인 것이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자식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사람에게서 태어났다는 말은, -이거 어려운 말인데 잘 들어 보세요- 태어나고 난 뒤에는 아무에게도 간섭을 받을 필요가 있다? 없다? 필요 없는 거예요. 태어나게 해 줬다는 것이 구애 안 받아도 되는 입장이 되는 겁니다. “어머니 태어나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생신 때 용돈 드릴게요.” 그건 일 년에 한 두 번 하고 때우는 거예요.

   나는 어머니 때문에 태어났는데 이럴 때 어떻게 할까요, 라고 늘상 물을 수는 없다 말이죠. 어릴 때는 묻겠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고 성인이 되어 “어머니 파란불인데 건너갈까요, 말까요?” 이럴 필요는 없다 말이죠. 제가 한 말은 이거예요. 사람에게서 태어났다는 말은 태어났다는 말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커버리면 아무런 의기 없는 말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부모지만 자기 생각 따로 있고 자기 생각 따로 있어 따로따로 사는 겁니다. 결국 따로 논다는 말은, 태어났다는 말이 그 사람에게 중요한 이슈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사람에게서 태어난 특징이에요. 부모가 천주교라면 어릴 때 성당 다녀줘요, 하지만 그 자식이 나중에 천주교 성당 다닐 확률은 퍼센트가 떨어지잖아요. 부모가 교회 간다, 자식이 교회 갈 수도 있겠지만 그 부모 믿음과 같다, 이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로부터 난 사람은 난 순간부터 이제는 딴사람이 돼버려요. 딴사람이 된다는 말은 낳아줬다는 셈 치더라도 ‘이제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는 그런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성경에도 나오지요? 가인이 아벨 죽일 때 아담과 하와가 관여한 적 있습니까? 없어요. 자식이 싸우는데 부모가 관여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가인이 태어났을 때 이제는 반듯하게 살아라, 아무리 강요해도 가인이 물론 ‘예, 어머니 하나님 믿고 살겠습니다.’ 하죠. 자기 딴에는 하나님 믿는다고 제사를 드려도 결국은 동생을 죽이고 저주받은 세계에서 저주받은 운명에 이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람에게 났다는 것은 오죽했으면 인류이 역사를 통해서 부모에게 공경하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얼마나 자식에 대한 애착이 강렬했으면 죽고 난 뒤에 내 제사 빠뜨리면 안 된다, 하잖아요. 그건 뭐냐면 아무리 부모자식간의 결속을 다지려고 해도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거리가 있게 마련인 겁니다. 제가 사람에게, 부모에게 태어난 자에 대해 길게 설명한 이유는요, 오늘 이야기할 ‘하나님께로 난 자’와 사람에게 난 자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며는, 부모에게 태어난 자와 확연하게 차이가 나겠죠. 사람에게 태어난 사람은 따로따로지만 하나님께로 난 자는 책임을 누가 지겠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에게 난 자의 팔자와 운명 마지막 끝장까지 책임을 다 져주시는 겁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이런 식으로 책임지는 것으로 돼있는데, 이상스럽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진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본인이 하나님께 잘해줄 때만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잘해준다고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며는, 사실은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니라 평소에 부모로부터 난 자, 다시 말해서 자기 원대로, 자시 성질대로 살다가 하나님을 대할 때는 마치 부모 대하듯이, 성경 보니까 ‘하나님 아버지’라고 돼있고 성령님으로 돼있고 예수님 **라고 돼있으니까 평소에 가정에서 자기 친척들이 자기 부모에게 해주듯이 내 쪽에서도 그렇게만 해 주면 하나님도 꺼벅 넘어가지 않겠는가? 라고 자기 맘대로 지어내서 믿는 거예요.

   오늘도 열심히 봉사했으니까 우리 부모도 복 주는데 설마 하나님도 복주겠지, 제 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나님께로 난 자를 이해 못하는지 지금부터 하나씩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게 어려울 수 있는데 제가 쉽게, 쉽게 하려고 합니다만…(보드 판 티브이 있는 곳으로 옮기느라 잠시 난리불수를. 보드 판을 지탱하는 조그만 돌멩이 두 개가 얼마나 견디어줄지 의문과 함께-녹취자 )-어려우니까 잘 보세요.-

   사람이 있고 ‘눈’이 있습니다.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본다 말이지요. 다른 사람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천신해야 되는가를 알아요. 집에서 옷을 가볍게 입고 있다가도 손님 오면 옷을 갈아입거나 가다듬잖아요. 왜 그러냐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나의 소망이 되는 겁니다. 나의 소망이 되고 ‘존재의 이유’가 되요. 부부싸움도 아이가 태어나면 잘 못해요. 내 자식이 부모를 어떻게 보겠는가, 해서 ‘우리 애들 있으니 조심하자’ 이러는 거예요.

   남이 있음으로 해서 자기 자신을 가다듬는데, 인간은 부모로부터 태어나죠? 어려서부터 점점 어른이 되죠? 어릴 때부터 갖고 있는 것을 누구한테 배웠어요? 부모에게서 배우고 친구에게 배우고 학교에서는 선생에게 배우겠지요. 그렇다면 사람의 속이 텅텅 비어있는 게 아니고 ‘부모’ ‘친구’ ‘친척’ ‘교회’ ‘교사’ 이런 것들이 들어있죠? 들어있으면서 세상에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뺄건 빼고 채울 건 채우고 수정해가면서 늙어가는 겁니다.

   이렇게 사는 인간이,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예수님이 계실 때는 평소에 부모라든지 친구 회사 동료 대하듯이 자기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수님, 저 괜찮은 사람이죠?” 하는 거예요. 괜찮다는 말은 평소에 뭔가 들어 있는 게 있다 이 말이죠. “저는 양심 하나는 끝내줍니다.” 라는 식으로 예수님께 나오는 거예요. 사람이나 부모로부터 나온 사람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때할 때 자기 것을 버리고 대합니까? 아니면 자기 것을 가지고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려 합니까?

    가지고 하죠.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평소에 친구에게 잘해주면 돌아오는 게 있듯이 교회에 뭔가 돈 갖다 바치면 복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거는 어려서 부모로부터 “얘야, 착하면 복이 오고 나쁜 일 하면 안 온다.” 라는 것이 들었다 말이죠. 그런 게 꽉 차있어 가지고 역시 우리 부모나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내가 착하다고 얼마나 칭찬해 줄 것인가, 자기 자존심 키워나가는데 신경을 쓰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 와서 예수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같은 교인들, 장로, 권사, 목사 이런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 를 가지고 교회 분위기를 따라 가려고 애 쓰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한국교회 모습이에요. 성경말씀은 하나도 몰라요. 성경 요한일서가 어디 박혀있는가 몰라요. 다만 옆에 있는 교인들이 어떻게 하느냐를 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 찬송가를 부를 때 찬송가 가락을 보면 되는데 옆에 사람이 룰루~랄라~ 박수를 치니까 (녹취 불가! 의성어 의태어 표현 부족한 녹취자) 박수를 왜 이렇게 치지?(귀염목사님)

   아, 저 권사님 집사님 은혜 받아서 박수를 저렇게 치나보다, 은혜 받았을 때 저런 박수를 치게 되면 보는 사람들이 칭찬이 오지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 가운데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은 자기와 우호적으로 봐서 친구를 삼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은 눈 마주쳐도 얼굴 피하잖아요. 자기 칭찬 받는 사람들과 같이 있다가 교회 오면 교회 와서도 마찬가지로 “내가 오늘 교회 왔습니당~ 내가 훌륭한 일 했지용?” 그러니까 새로 온 교인들도 칭찬해주고 관심을 가져달란 말야, 하는 식으로 관심 받고자 나오는 거예요.

   처음 온 사람에게 친절하게 “처음 오셨습니까? 뭘 도와드릴까요?” “혹시 애들 있으면 보내주세요, 우리 교회는 공짜로 영어 가르쳐 줍니다.” “금요일마다 등산도 가고 놀러갑니다. 같이 놀러갈까요?” 이런 식으로 좋게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걸 다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갈라디아서1장10절에「…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하는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거라는 거죠.

   성경공부 필요하다는 것도 이유가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 우리가 세상 공부도 많이 하는데 하나님께로 났으면 하나님 뜻이 무엇이며 생각이 무엇이며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나중에 천국 가서 주님을 만나도 얘기가 통하지 이거는 아무 뜻도 모르면 그냥 놀러 다니는 것 같아 안 되겠다, 하는 것을 느껴서, 말씀과 진리가 무엇인가? 느껴져서 공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경공부를 하게 되면 주변에서 “와~ 성경공부까지 하시는군여” 하는 칭찬을 노려서 성경 공부하는 경우도 꽤 있어요.

   또 목사가 “성경공부 하세요.~” 하니까 목사가 시키면 시킨 대로 하는 것도 좋은 점수를 얻겠구나, 하는 것도 노리고 하는 경우도 있다 말이지요. 그러면 성경공부를 하게 되면 성경을 볼 것 아니냐 말이죠, 어릴 때부터 자신이 듣기 좋은 소리 하는 친구와 사귀잖아요. 그 버릇이 어디 가겠습니까? 성경공부를 해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짜 핵심은 다 빠뜨리고 오해해서 얻은 자기에게 유리한 구절들, ‘능치 못하는 것은 기도와 금식 외에 없느니라’ ‘별(?) 바쳤더니 복 받았잖아, 당신들은 뭘 바쳤습니까?’ 어릴 때 익히 알던 것을 이야기 하면 설교시간에 ‘아멘, 아멘’ 해도 처음엔 몰라요. 옆에 사람이 아멘하면 ‘아 이때 아멘이라는 추임새를 넣어줘야 되는구나,’ 교회 처음 나와서는 그 모양새를 다 배우는 거예요. 이게 부모로부터 오는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거를 제가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버릴 수 없어요.

   버릴 수 없다는 건 부모가 다르듯이 사람 모습만 다른 게 아니에요. 가정환경에 따라서 자기 과거가 다르듯이 쌓여진 과거, 누적된 과거가 오늘의 그 사람을 만들어낸 겁니다. 꼭 실밥 같아요. 얘기해보면 과거가 하나하나 다 일어나요. 어릴 때 입은 상처도 담겨 있고, 그 상처가 누구에 대한 퍼부음과 복수심, 이런 것들이 있어요. 이걸 사랑으로 색칠을 해놓으니까 색조화장으로 칠한 화장발 얼굴처럼 가려진 복수심, 원한관계, 악마적인 본성이 잠복돼 있지요. 숨어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 한번 보세요. 성경에서 말씀하실 때 「성경은 너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이래 돼있어요. 요한복음5장에 나오죠? ‘성경은 곧 내게 대해서 증명(증거)한다.(요5:37)’ 이 말은 네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이 모든 일, 예수님께서 관여했겠어요? 관여치 않았겠어요? 관여했다는 거예요. 너는 네 자신을 못나게 보든, 이만하면 됐다고 보든 관계없이 내가 보는 관점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주님께서 다리를 놓을 때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 부모로부터 나서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이게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거(부모로부터 받은 것) 없어지고 주님께 온 게 아닙니다. 그러면 큰일 나요. 그러면 또 자기착각에 빠진 사람이에요. 부모로부터 가진 성질, 성깔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부모로부터 가지고 온 성격이기 때문에 남은 모르지만 나는 내 식대로 예수님 섬긴다고 하잖아요. 그것마저 주님께서 이해를 하신다니까요. ‘네가 살아온 성정과정이 이것밖에 안되는데 뭘 더 되겠냐’ 살아온 환경, 부모를 우리가 골라잡은 거 아니잖아요. 슈퍼에 가서 ‘어느 부모를 골라잡을까? 돈은 좀 있어야 되겠고,’ 유전자를 골라잡아서 엄마는 변호사 아빠는 재벌2세, 이런 식으로 내가 스스로 만든 게 아니라 말이죠. 그냥 철학적인 말로 ‘던져진 존재’ 내 던져진 존재예요.

   던져질 때도 평면에 던져지면 괜찮죠. 산비탈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떼굴떼굴 구르죠? 이걸 우리 한 평생이라는 겁니다. 구를 때 때로는 뾰족한 돌에, 더러운 흙에 묻으니까 산다는 게 얼마나 지저분합니까, 그러면 원망을 누구한테 하겠어요? 못된 것은 지지리궁상 부모 탓이고, 아버지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온 탓이고, 엄마가 반찬 못해준 탓이고, 어릴 때 짜게 먹여 성장 판을 죽여 지금 난장이로 만들고, 전부 다 부모 탓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구르는 언덕이 -이 그림은 좀 재밌을 건데,- 우리가 구르는 언덕은 표면적으로는 이미 늙어서 돌아가셨거나 요양병원에 있는 부모에게 욕(원망)은 하지만, 언덕 자체가 주님의 어깨다. 주님의 품이다. 주님이 알아서 다 지켜보고 계시다는 겁니다.(대단한 믿음입니다.-녹취자) 예수님 쪽에서는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나쁜 게 아니에요. 그거는 모든 인간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나밖에 모른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 그걸 지적한다면 이 세상에 그런 인간은 없어요. 부모로부터 온 몸인 이상은 항상 자기밖에 몰라요. 그러면 주님은 여기서부터 ‘수정 작업’에 들어가요. 고치는 작업이다 말이죠. 수정 작업, 여기서부터 중요해요. 전부 다 중요하지만 이건 정말 중요합니다. 수정 작업에 나서는데 기존 교회에서 수정 작업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행동과 우리의 굴러 떨어지는(예수님의 어깨=주어진 현실)행동을 가지고 예수를 본 받아서 우리 행동을 고쳐 나가라, 우리에게 닦달을 내요.

   그러니까 이 사람, 굴러 떨어지는 이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을 닮아보고 싶어도, 모르죠, 한 달 수입이 2억 되고 연봉이 20억 넘고 할 일 없으면 성경도 보고(심심하니까) 기도도 하고 교회 헌금도 좀 하겠는데, 집에 빚이 4억 되고 수입이라고 해봐야, 이자내기도 부족하고 사채업자 와가지고 재촉하기 바쁜데 무슨 예수를 본 받습니까, 거기다 몸이라도 건강하면 주신 몸 가지고라도 감사하죠. 온 몸이 종합병동이라,
   내과 가면 당뇨라 하지, 내과 가면 관절이라 하지, 정신과 가면 어디 스트레스 받습니까? 하지, 도대체 안 아픈 구석이 없어요. 치과 가면 이빨 하라지, 잇몸 내려앉았다 하지, 도대체 안 아픈 구석이 없는데 뭘 가지고 주님을 닮아요. 목사 지는 할 일 없으니까 맨날 성경보고 좋겠죠. 지는 교인들이 돈 대주니까 성경보고 좋겠지요. 교인은 돈을 벌어야 되요 아픈 몸을 가지고. 저소득복지대상으로 사는 입장에서 무슨 예수를 본받으라는 겁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데.

   돈만 있으면 착하게 살고! 돈만 있으면 고아원도 하지요! 지 먹을 것도 없는데 남을 줍니까, 주님을 본받으라, 어떻게 구원을 받으려고? 염치도 많지!(없지) 염치 많고 적고 간에 형편이 그런데뭐, 염치가 많아서 그런 게 아니고. 지금 내 형편이 손 벌리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에요.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아무리 많이 벌어도 돈 쓸데는 더 많이 생깁니다.

   딸래미 결혼하는데 다이아는 5부는 돼야 된다는데, 예전에는 금반지로 때웠는데 요새는 다이아바람이 불어가지고, 차도 색깔이 안 맞아서 바꿔야 한다는 둥 부자는 부자로 돈 쓸 고민이 많아요. 부자로 살면서 항상 돈이 모자라. 도대체!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예요! 본받아 가지고 천국가라 하면 천국 갈 사람이 몇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못가요! 예수님 혼자 가요!(아멘)

   결국 사람들은 교회라는 곳에서 뭔가 도움 얻을까 싶어서, 그것도 말씀의 도움이 아니고 경제인 도움. 아는 사람, 단골 좀 모아 도움도 얻고 정신적으로 위로도 받고, 죽어서도 좋은데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막장으로 굴러 떨어진 곳이 교회가 된 거죠. 그래서 다른 사람 찬송하는 거, 기도하는 거 폼 내고 흉내 내면 죽어서 좋은데 가는 줄 알고…실제로도 교회 몇 년 다니면 죽었다하니까 장례 치러주고, 염 비슷한 것도 해주니까 ‘아 천당갈 때의 저게 마지막 모습이구나’ 하는 거죠.

   장례식 치러서 천당 갈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기독교식 장례 해봤자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객사해서 독수리 먹이 돼도 천국 갈 사람은 천국 갑니다. 그런 것을 성경에서 읽고 찾아야 되요. 누가복음 16장. 거지 나사로가 갔을 때 누가 마지막을 장식했습니까? 사람이 아니고 누굽니까! 강아지! 강아지가 마지막에 했고 죽어서는 천사가 와서 받들었죠. 마지막은 강아지가 핥고 천사가 와서 받들어 모셨잖아요.

   목사님 오시고? 화려한 장례식? 없어요! 괜히 폼이나 잡고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어요. 모든 게 분위기, 기분, 이미지, 아주 온화한 이미지!(토나오죠-녹취자) 고상해 보이는 이미지. 그런 교회 분위기가 사람을 현혹해요. 교회 가니까 성가대 까운 입고 폼 잡지만 까운 사려면 돈 들고. 정말 하나님께 난 자 같으면요, 교회 마룻바닥 생각하지 말고 교회를 자갈밭이다 생각하고, 그 자리에 하나님 진짜 말씀이 뭐냐, 그것만 들려오면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 강대상 3층으로 해서 쳐다보려면 목이 아파서 졸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고, 이 모든 것이 종교적인 행사예요. 무슨 절기 지키는 이런 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시키지도 않은 건데, 인간들끼리 모여가지고 심심하니까 고상한 티를 내고 싶고. 까운 입고 폼 잡고. 성경에 ‘잠잠할지어다’ 하니까 조용하게 파이프오르간 깔고. 그런 것은 수천 년 꾸려온 아이디어예요.

   그렇다고 그거 없앤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지만 그런 건 장식품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이 옷으로 구원받는 건 아니지만 옷을 벗고 다닐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단순 거치대인 옷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은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교회가 나를 구원하는 건 아니에요. 알맹이가 예수님이십니다. 교회가 시키는 대로 행동 본 받아라, 식은 아니다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신 게 뭐냐 하며는, 아까 얘기했잖아요. ‘이해한다.’ 헌금을 해도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헌금 백 원 했는데 이천 원 주세요.’ 그런 노림수로 헌금하는 것을 다 이해한다니까요.

   나는 순수하게 헌금한다. 그따위 소리 하지 말고 ‘주여, 없는데서 했는데 주께서 챙겨주세요. 60배 100배로 좀 채워주세요.’ 그런 노림수로 한다는 것을 주께서 이해를 하신다니까요! 주님께서 길을 만들었어요. 길을 만드신 분이 안 듣겠습니까? 남이 하는 말을 어느 귀가 들어요? 우리가 듣지요? 우리가 하는 일을 누가 듣겠어요. 귀를 만드신 분이 왜 귀를 붙여놓았겠습니까, 너만 듣는 게 아니고 나도 듣는다는 말이에요.

   눈을 만드신 분이 보지 못하겠느냐, -다 보고 계셔!-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를 다 아셔요. 다 아시기 때문에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 네가 평생 살면서 너밖에 모르는 죄인이야’ 그런데 그 죄를 고쳐서 착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착하게 사는 것은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어떤 인간도 착하게 살아서 구원되는 사람 없습니다. 그냥 그것이 네 팔자고, 네 모습이고, 본 모습이다 이 말이죠.

   그 죄에 대해서, 어떤 교회는 주님은 우리 부모 같다고 하는데 부모 안 같아요! 따뜻한 형과 같다는데 형과 같지 않습니다. 주님은 죄인보다 더 죄인 취급을 받는 분. 이것이 예수님이십니다. 고상한 까운 걸치고 자비로운 얼굴 하고 있는 게 아니고 일그러진 얼굴이에요. 네가 죄 때문에 고통 받는다고 하지만 너의 죄 때문에 내가 고통 받고 있는 모습으로 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만 죄인 아니고 너를 만드신 하나님이 나도 너보다 더 혹독하게 죄인 노릇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겁니다.

   ‘이래서 너와 내가 똑같은 거야.’ 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네가 어떤 죄에 있든지 간에 죄의 깊이가 50미터라면 주님께서는 55, 5미터 더 밑에 가 있어요. 우리보다 5미터가 아니고 주님께서는 80미터 더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가 5250미터에 있으면 주님께서는 7745미터 아래서 기다리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움직임, 우리가 죄인이라고 드러나는 것은 첨부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했던 바입니다. 이 언덕이 예수님의 어깨이기 때문에. 마치 비듬 떨어지듯이 나에게 붙어 떨어지는,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면 남이고.(남이 되면 원래 지옥 가야 되고) 이 땅에서 어떠한 질곡과 아픔과 가난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주께서 의도한 거예요. 그게. 의도 된 거예요. <너는 이렇게 살아야 내가 네 죄 때문에 내가 죽어서 네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의 정으로 살라고 의도한 겁니다.
   축구에는 전반전만 있는 게 아니고 후반전이 있죠? 여자들이 축구를 몰라도 그 정도의 상식은 알죠? 전반전 끝나고 바로 축구합니까? 15분 쉬고 후반전 하죠? 우리의 보이는 인생이 전반전이라면 보이지 않는 인생은 후반전입니다. 그거는 끝나지 않은 후반전이에요. 영원히 주와 함께 있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가 전반전에 거지로 뛰다가 후반전에서는 부자와 완전 역전됐어요. 그게 누구 때문입니까, 바로 예수님 때문이에요. 우리가 왜 인생을 힘들게 사느냐 하면,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건데,- 내 인생이 미워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힘든 인생이 바로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인생을 카피(copy)하라고, 그 길로 뛰어 들라고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살게 한 겁니다.

   내 인생이 몸이 아프고 힘들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나를 천국 보내시는 주님은 이보다 더 힘들고 어렵게 사셨다는 겁니다. 그게 히브리서 2장에도 나오고 3장에도 나와요. 그걸 어려운 말로 ‘체휼’이라 하죠. 「그 어려움을 익히 감당하였다.」

   그런데 우리 인생 살아온 이것이 내가 선택해서 살아온 게 아니라 그렇게 몰아넣는 거예요. 축구선수가 공을 몰아넣어 골인 하듯이, 이렇게 가면 저렇게 가고 저렇게 가면 이렇게 가는, 처음 서울 와서 길 찾는 것처럼 엉뚱한데 가서 헤매다가 다시 그 자리에 온 것처럼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때마다 우리는 속 부글부글 끓으면서 ‘오늘 일진 더럽게 없고만’ 그러니까 주님께서 ‘왜, 너는 첨부터 일진 없었어,’ 하여튼 전반전에서는 일진 없어야 되요. 전반전에서 일진 좋으면 우리는 지옥 갑니다.

   전반전에서 일진 좋고 재수 좋으면 전부 다 마귀자식들입니다. 뛰어봐야 후반전에는 지옥 갈 거. 지옥 가기 전에 사주팔자 보는 낙 아닙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즐기라 말이죠. 맘껏. 맘껏 즐기는 가운데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왔을 때 성령이 온 사람, 진짜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 ‘십자가를 왜 지셨을까,’ 하나님이 대우 받기는커녕 하나님이라고 얘기해도 못 알아듣고 살해하고 십자가에 죽여 버리고, 이 세상 그 많은 가운데서 뛰어난 사람, 착한 사람 다 놔두고 오직 십자가에 죽었던 그분만 하나님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공자도 맹자도 아니고 바로 너! 바로 너야!

   부활의 은혜가 그거예요. 진짜로 하나님께 합한 사람은 ‘너야!’ 하고 딱 찍은 거예요. 집을 때 따라 올라오는 지남철(자석)에 쇳조각 붙듯이 따라 붙은 사람들, 그리스도의 몸 지체라는 의미에서 예수님 잡아당기니까 다 따라오는 거예요. 그걸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첫 열매가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바로 성도들. 첫 열매 다음에는 예수님 있을 때 부활한 사람, 그 다음에 이미 죽은 예수 믿는 사람, 그 다음에 살았을 때 예수 믿는 사람이 주님 재림할 때 줄줄이 달라붙어요. 그때 주위 사람들이 ‘야, 너 어디 가는데?’ 휴거라고 하죠? 줄줄이 매달려 올라가는 거예요.

   지남철 힘이 뭐밖에 없느냐 하며는, 십자가밖에 없는 거예요. 자, 그러면 교회 왔다. 교회 와서 목사님 설교 하는데, 예수님을 본받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할 때 부모로부터 본   받은 누적된 우리의 한 맺힌, 복수심 가득한, 쉽게 말해서 성질 더러운 것 가득 들어있는데 그걸 어느 세월에 뜯어 고칩니까. 어느 세월에. 한 개 뜯어 고치면 두 개 세 개 돌아와요. 세 개 고치면 열 개가 다시 돌아옵니다.

   사람이 새로운 사건을 만나면 그 새로운 사건과 사태로 인하여 성질 더러운 것이 열 댓 개 새로 또 발굴 되요. 우리 마음은 우리 자신도 몰라요. 일반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얘기를 안 합니다. 왜 십자가 얘기를 않느냐 하며는, “여러분~, 십자가 믿으면, 혹시 오늘밤에 돌아가셔도 오늘밤에 천국 가십니다.” 이렇게 말을 해버리면 사람들이 교회 봉사하거나 교회에 돈 내지 않죠. 그러면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십일조 돈 안 내도됩니까?” “돈 필요 없습니다.” “교회 달라가든지 말든지 교회 청소도 안 해도 구원받습니까?” “예수님 십자가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 나오고 5년에 한 번씩 나와도 됩니까?” “5년 만에 나오든지 20 만에 나오든지 교회 안 나오든지 그래도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어느 사람이 교회 나오느냐 말이죠. 교회 간판 따 뜯겨 나가고, ‘교회 임대합니다. 987-2570’ 교회 되겠어요? 예수님이 이야기한 성경을 어떤 식으로 편집해야 되고 왜곡해야 되냐 하면, 돈 끄집어 낼 수 있고 교회 지상 충성하게 만드는 식으로 성경을 재해석을 해줘야 목사가 밥을 먹고 살고 교회가 크게 번창할 수가 있는 겁니다.

   거기서 노리는 게 뭐냐면 하나님께 난 사람은 첨부터 주님께서 이미 아시는데, 부모가 제 자식 모르겠습니까? 부모는요, 아이들 천 명 세워놔도 자기 아이는 알아봐요. 그런데 부모가 제 자식 놓고, ‘밥 흘리지 않고 먹으면 그때는 너 내 자식 해줄게’ 이런 부모가 없심다!! 나를 태어나게 했다는 그 자체로 이미 자식이고 정박아가 되던, 멍청이가 되던 관계없이 내가 거둬야 될 내 자식이 되는 거예요. 이걸 ‘태어났다’고 하는 겁니다. 네가 알아서 하는 게 아니고, 거래해서 자식 되고 부모 된 게 아니거든요.

   그 자식이 사고치고, 합의금을 대도 여전히 부모는 부모가 되는 거예요. 이거는 네 죄가 아니고 너 같은 놈을 태어나게 한 내 죄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요새는 그런 부모도 드물지만요. 하물며! 창세전에 이미 자기 자식을 하나님이 모르겠습니까? 다 알죠. 자기 자식은요, 이 땅에서만 자식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살 자식을 만들어놨기 때문에 그 자식한테는 어떻게 되든 저떻게 되든 오직, 십자가 복음의 피를 전해서 내 자식으로 기어이 지남철에 쇠붙이 딸려 오는 그 작업을 우리 주님은 멈추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닌 사람은 어떠냐 하며는, 가짜로 만들려하는 거예요. 억지로. 만들 때 조건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십일조 해야 되고, 봉사해야 되고, 목사 말 잘 들어야 되고, 예배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광고시간이 중요해요. 광고시간에 선교사 보냈다고 헌금 내라는 광고를 하거든요. 광고시간으로 만족 못하면 설교시간에 그걸 집어넣은 사람도 있어요. 마귀자식을 만들어내겠다는 거예요. 교회에서. 양육을 통해서. 양육 많이 들어봤죠? 양육 10단계 이런 거 있잖아요. 제자 훈련. 훈육 교육을 통해서 교육자 지도자 말, 교육자는 목사, 큰 교회는 부목사 동원하잖아요.

   그런데 복음 알면 부목사와 싸우고 당회장 목사와 싸우고 얼마나 싸웁니까. 구역장까지 담임목사에게 꾸중 받게 만들고… 어디서 엉뚱한 사람 와가지고 교회방침에 어긋나는 소리 하느냐, 이런 소리 많이 하죠. 여러분 안 들었어요? (들었죠.) 마귀 자식을 하나님 자식으로 바꾸는 인간의 방식으로는 없습니다. 사람은 바꾸는 게 아니고 창세전부터 원래 내 자식이기 때문에 확인 시키는 작업에 들어가요!(아멘)

   원래 인간은 사람 몸에서 태어나가지고 행색이 원래 더러워요. 하늘나라 왕자면서도 주변에 거지에게 배워가지고 거지행세가 몸에 쌓여 있는 거예요. 진짜 임금이 와가지고, ‘너는 내 왕자인데 이래 살면 안 된다.’ ‘저는 거지가 좋아요. 거지가 편해요.’ 거지같은 근성이 뭐냐 하면, ‘행함’입니다. 행함. 내가 선한 행함을 하면 반드시 복이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누구 체면이 세워지겠어요? 누구의 자존심이 올라가겠습니까!? ‘ 시 나는 훌륭하기 짝이 없어. 이런 훌륭함은 하늘도 통한다.’는 거예요. ‘하나님도 꺼벅 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복을 받았다는 거예요.’

   사람은 행함을 가지고 보람을 갖는 거예요.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악을 행하면 또 절망에 빠져요. 내가 이런 악을 행했으니까 우리 집안을 얼마나 거덜 낼 것인지, 거덜 내더라도 너무 진하게 거덜 내지 말라고 혼자 소설 써가면서 ‘주여, 내가 교회를 두 번 빠졌는데 애가 수능 치는 것도 모르고 교회를 두 번이나 빠졌으니 주께서 벌 내릴 것이다.’ 이 선악. 선악하면 무슨 나무 생각납니까. 선악과 따먹어가지고 자시 스스로 조절해가지고 예수 본받아서 천당 가려고 교회 나오니까 목사들이 그 점을 노리는 거예요.

   ‘여러분, 선과악은 실천에 옮겨야 됩니다.’ 실천이 뭐냐 하면, 교회에 엎어지기, ‘엎어지면 교회 봉사하고 엎어지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되고 선이 됩니다.’ (뻥이야~!)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뻥이야~!) 예배 어디로 가야 됩니까 하면, 예배당가야 돼, 예배당. 그러면 증축중에 있는 것도 예배당에 해당됩니까? 곤란한 질문이죵! 그러면 땅만 사 놓은데서 예배드리면? 역시 곤란한 문제죵~

   예배당? 그리심 산도 아니요, 예수살렘도 아니요, 진짜 예배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그 자체가, 삶 자체 그걸 가지고 로마서 12장에 보면 이 마지막 때는 이 몸 안에 예수님 들어있다는 산 예배를 드려야지, 순서대로 해놓고 순저 지켰다고 예배? 주무시다가 축도할 때 깨어나서 ‘예배 때웠다, 복 줄 거야,’ 이런 식의 자기 행함에 대한 자존심. 그런 것을 강요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로 난 자는 뭘 구분한다? 그런 모습을 흉내 내고 따라가면서도 진짜 하나님이 난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보내셔서 자기자식 되게 하겠습니까, 않겠습니까, 원래부터 자기 자식이니까 자기 자식 되게 하겠죠? 모든 것이 이런 짓거리(행함, 자존심)자체가 예수님이 거저주시는 ‘언약으로 산다는 것을 모독하는 마귀적인 죄’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 난 자로 확인 되죠. 하나님께로 난 사람으로 확인되는 겁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나에게서 나올 수 없는 생각이 성경말씀을 갖고 성령께서 나에게 심어주는 겁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몸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
남을 의식하고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된다는, 교회 가면 하나님 눈치, 예수님 눈치, 목사 눈치 봐야 되는데, 우리는 눈치 볼 것도 없고 말 것도 없고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부모가(주님) 알아서 그때, 그때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어떤 생각에서인지 모르지만 그 생각이 떠오른다는 사실은 이거는 사람의 생각이 아니고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신 생각입니다.

십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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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110114요일5장18-21b‘하나님께로 난 자’/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에 대해서 지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가 이 세상에 있다는 말이냐 없다는 말이냐,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께로 난 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난 자끼리 모아 보자. ‘아, 당신들은 이래서 하나님께로 난 자’ 맞구나 라고 하나님께로 났느냐, 나지 않았느냐의 기준을 사람에게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 당신은 이런 특징 있는 거 보니까 하나님께로 난 자 맞아. 당신은 그 특징이 없는 거 보니까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니야, 구분해낼 수 있는 기준이 뭐냐가 중요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 요한일서를 신약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약속. 그렇다면 신약이 있으면 구약도 있겠지요. 구약에서 하나님께로 난 자가 있습니다. 누구냐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예요. 이스라엘 나라가 뭐냐고 딱 물으면 얼른 몰라요. 없는데서 있고 있는데서 살아나야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왜 그래야 되는데요?’ 이렇게 물을 거예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없는데서 있고 있는데서 살아나야하는데 왜 그래야 되느냐, 이스라엘 나라에 뭐가 삽입돼 들어가요. 이스라엘 되게 하는 엔진부분, 그 원형이 뭐냐 하면 ‘이삭’입니다. 정확히 하면 이삭과 아브라함의 관계인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는 하나님이다.’ 알려주는 방식이 뭐냐 하면, 아브람은 몸을 갖고 있죠? 아브람은 누구한테 물려받은 몸입니까?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서 있고, 없는데서 없는 거고 꼭 화개장터 같애, 죽어서는 끝나고 살아있는 동안에만 산다. 이게 기껏 인간들이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 약속이 오게 되면 뭐로 바뀌느냐면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요. 바뀌면서 아브라함은 무엇을 새롭게 아느냐 하면 ‘아, 이것이 원래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이구나,’라는 것을 아는데 거기에 뭐냐면 ‘없는데서 있고 죽은데서 살아나는'것인데 그 증거가 누구냐 하면 아들 이삭이에요. 이삭이라 하는 사람은 원래 없어요. 없는데 천사가 와서 약속을 주니까 약속대로 새로 생긴 사람이 이삭입니다.

   그리고 이삭을 멀쩡하게 살아가면 될 텐데 갑자기 이삭을 꽁꽁 묶어가지고 죽여 버리라는 거예요. 죽이라니까 죽였죠? 죽이면 놔둬야 할 건데 또 죽이지도 못하게 만들어요. 스톱! 대신 옆에 있는 수양을 갖다 대라. 이삭은 하나님 약속에 의하면 이미 죽은 자예요. 수양이 대신해서. 수양의 이름이 ‘여호와 이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앞으로 너희를 이끄시리라,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식으로 이끄신다는 겁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우리는 그저 눈에 보이는 것에서 그걸 키우려하고 ‘인생은 한번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죽은 뒤에 본 적이 있나, 천당 가본 적이 있어? 죽으면 눈에 보이는 이게 전부야,‘ 이런 식으로 보시죠? 가정문제 부부문제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 남편이 애를 먹이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도 있는데 우선 생각해야 될 것은요, 남편이나 아내나 그게 전반전의 문제거든요. 전반적인 문제가 되는데 얻어맞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술 먹고 때리는 게 취미인데 맞아줄 필요 없는 건 아닙니까? 그렇잖으면 후라이팬으로 같이 패든지 하면 되는데 이것도 인간의 문제에 있어서 남들의 시선 교회 시선이 문제죠. 교회 안 갔으면 교회시선 신경 안 쓰는데 괜히 교회까지 발 들여놔가지고 집사라는 것까지 받아가지고 ‘집사가 이혼 했다더라’ 하면 골치 아프고 남들의 시선 이것 때문에 억지로 참으면 화병이 생기네, 빼도 박도 못할 지경이죠.

   그럴 때 뭘 많이 생각하느냐면, 우리가 고민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람의 속성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현상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보면 사도바울은 고민하죠. 복음 때문에 갈라서려 하거든 결혼이라는 굴레에 메일 필요가 없다 이야기합니다. 누가 뭐라고 수군수군 하든지 신경 쓰지 말고 복음 때문에  얽매일 필요 없는데 헤어지기 위해서 또 과장되게 복음을 빗대어 핑계 만들지 말고…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는데서 살릴 때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원칙이 엔진으로서 움직이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생리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없는 나라예요. 이스라엘은 없고 애굽만 있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을 들고 오니까 비로소, 여기서 없는데서 있는 나라가 됐죠. 그리고 홍해 들어갈 때 사람이 물에 들어갔으니까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홍해 이후에 뭐가 됐습니까, 살아났지요? 그것을 한꺼번에 보여준 나라가 유월절 어린양이 이스라엘 모습을 담은 거예요.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아무리 무서운 하나님이 오더라도 그 심판은 피를 보고 넘어가는 거예요. 그 피가 이스라엘 내부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그게 뭐냐면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죽음이에요. 그 죽음은 양의 죽음이라고 보이지만 (양이나 염소의 죽음으로 보이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어느 분의 죽음이냐 하면, 하나님의 죽으심이거든요. 그래서 법궤를 들여다본 사람은 무서운 저주를 받게 돼있어요.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의 희생으로 너희들이 사는데 만약에 주님의 희생의 본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면 본다는 것은, 죽음을 우리 손으로 다룰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밖에 나가서 혜택만 보면 되는데 직접 인간이 관여하려하면 우리는 저주를 받게 돼있습니다. 쉽게 말해 법궤를 들여다보면 죽습니다. 죽는다는 말은 ‘너는 여기 개입하지마!’ 이거는 하나님이 알아서 할 문제라는 거죠.

   내가 용서받는데 어디서 올까? 구경 좀 해볼까? 라고 구경을 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손 댈 수가 없는, 우리가 거기서 보고 믿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너는 혜택만 받으면 돼’ 안에서 주님 혼자서 이루어 내시는 거야, 이게 복음이라는 것이고 기쁜 소식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십자가 목걸이하고 차에 달랑달랑 걸고 돌아 댕기지만 그건 하나의 심볼이니 그걸 탓할 수는 없지만 그걸 달고 다닌다 해서 십자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죠.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형에게 자식 하나밖에 없었는데 엄마가 배가 불렀다 말이죠. 옛날 촌에 같으면 산파도 오고 뜨거운 물도 떠다 놓고(어찌 이런 것까지 다 아시남요) 난리법석 가운데 아들이 안을 들여다보니까 ‘너는 나가 있어!’ 그러다가 조금 있으니까 응애~ 하면서 아이가 나오더라 말이죠. 아이는 거저 나오는 거죠? 안에서 아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네가 알 필요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그저 받은 거예요. 왜 우리는 우리 구원에 대해서 참여 못하는가? 우리가 죄인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냥 자비를 받아야 될 입장이지 지가 손 발 걷고 나와서 ‘제가 설거지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설 문제는 아니다 이 말이죠. 문제는 한국교회 교회들마다 지 구원의 문제에 나서려고 하기 때문에 이단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단이에요. 그들이 양무리 어쩌고 해도 염소 무리죠. 자기가 나서는 거예요.

   우리가 염치불구하고, 우리가 염치가 없지만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그냥 공짜로 받았을 뿐입니다. 출애굽기를 한번 봅시다. 하나님께로 난 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계속 설명합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없는데서 있게 하는 그거지요? 그런 장치를 만들어내는데 출애굽기 25장20절에 보면 그룹들, 그룹들이라 하는 것은 롹 그룹이나 친목단체가 아니고 천사를 말합니다.

   『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 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

   천사들이 어디를 집중합니까, 천사들이 자기를 집중합니까, 다른 곳을 집중합니까, 속죄소 두 끝에 날개를 연하여 봅니다. 날개를 쭉 펴서 맛 닿아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게 아니고 뚜껑을 봐요. 하나님의 진노를 커버하는 뚜껑을 속죄소라 합니다. 상자 전체는 언약궤라 하고 박스뚜껑을 속죄소라 합니다. 여기서… 이것 때문에 죄가 없어지느니라.

   온천에 가면 물이 따뜻하잖아요. 그 뜨끈뜨끈한 물이 어디서 나옵니까, 그걸 알려면 지각을 뚫고 맨틀이라는 섭씨 5천도까지 내려가야 되요. 완전히 죽습니다. 우리는 물만 뜨시면 되지 이 뜨거운 물이 어디서 오는가? 할 것 없어요. 언약궤를 만진다든지 하면 죽습니다. 죽는다는 말은 거기서 뭐가 끓고 있다? 온천에 물 끓듯이 저주가 온 우주에 퍼져나가는 날이 심판 날입니다.

   지금도 그 저주가 십자가복음을 통해서 삐져나와요. 십자가를 안 믿는 사람 같으면 저주로 이어지고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길로 이어지는 겁니다. 요한복음3장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8)-개역개정』

   구약 때 있던 하나님의 특수한 나라, 다른 나라는 인간의 노동력으로 버티는 나라인데 이쪽 이스라엘 나라는 저주가 벌벌 끊는 언약궤라는 상자가 이스라엘에게만 피가 묻혀서 용서가 되지만 그 언약궤가 다른 민족한테 가버리면 그 민족들은 완전 초토화 돼버립니다. 그게 사무엘상에 나오는데 -성경 찾으라면 짜증을 내싸서 성경을 찾을까 말까 찾을까 말까,이거 하나만 양해를 구하고 찾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 언약궤를 빼앗아가지고 자기들은 언약궤를 뺏어 이기는 줄 알았지요. 사실은 저주 덩어리를 가져갔는데, 언약궤가 이스라엘에게는 왜 저주가 안 오고 블레셋에게는 저주가 옵니까? 그거는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언약의 백성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지고 있어봐야 저주만 퍼질 뿐이죠.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가지고 가서 자기들이 거룩한 곳이라고 하는 다곤의 신전에 두니까 누가 떠밀었는지 아침에 보니까 여호와 코앞에 엎어져가지고 손목 끊어진 게 나옵니다. 머리와 두 손이 다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아 있어요. 어젯밤에 한바탕 결투를 한 모양이라, 그리고 난 뒤에 6절에 보면 그들에게 독종이 퍼졌네요. 또 장소를 옮겨봤지만 소용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이기지 못한 것, 언약궤 홀로 승리해가지고 그 언약궤를 반납합니다. 반납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이스라엘 사람도 반납할 때 그냥 상자인 줄 알고 반납 잘못했다가 여기 유명한 웃사가 언약궤 넘어진다고 붙들자마자 무려 70명이 죽었어요.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출6:19)』

   그래서 백성들이 울었지요? 언약궤를 또 옮겨야 되요. 그 말은 무서운 분과 살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무서우냐 하며는, 우리의 일체 선한행동과 악한행동을 안 볼 정도로 무서운 분이에요. 우리 몸이 건강 하냐, 건강치 않냐 어떤 행동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애가 지금 대학 들어 가냐 마냐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저주를 믿어요. 저주가 상자에서 나오는 분을 믿습니다. 온 천하에 교회고 뭐고 쓸어버리고 저주가 퍼지는 그게 마지막 심판이에요.

   그 저주를 미리 알고 있는 자를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중앙에 보면 언약궤를 추궁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어린 양의 피가 계속 뿌려집니다. 피는 일 년에 한 번씩 뿌리지만 제단에는 계속 어린 양의 피를 내게 돼있어요. 그 피를 생각할 때마다 백성들은 연기가 피어오르거든요. 재물을 드릴 때 멀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 오늘도 내 죄 때문에 흠 없는 가축들이 나까 떨어지겠구먼,’

   대충 살찐 가축을 갖다 바치는 게 아닙니다. 제일 참하고 제일 말 잘들은 워낭소리 같은 것, 태어나지 얼마 안 되는 그런 흠 없는 것에다 안수를 해요. ‘네가 내 죄를 책임져줘’ 내가 무서운 하나님과 살려면 죄가 없어야 되는데 내 행함으로 도저히 죄가 안 없어진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방식이 있으니까 내가 방식을 따르마, 양아, 소야, 염소야 부탁한다. 네가 가서 내 대신 죽어줘, 내가 또 죽었구나, 내가 날마다 죽는구나, 죄 있는 인간은 누가 됐든 하나님 앞에 죽게 돼 있어요.

   우리는 매일 죄 짓기 때문에 매일 죽는 거예요. 그 모든 절차를 십자가와 하나로 끝내버렸잖아요. 나이가 스물다섯이든 오십이든 팔십이든 십자가로 끝내버리니까 항상 하나님께 난 자는 무슨 중심으로 산다? 십자가 중심으로 산다. 죽을 때까지.

   전에 어떤 여전도사님이 결혼한 자식보고 ‘얘야, 십자가다~’ 하도 세뇌를 많이 받아가지고. 다른 사람 같으면 ‘얘야, 교회 다니라~’ 했을 건데 교회가 어떻게 저주를 없애줍니까, 교회가. 교회 가면 나쁜 짓 또 하는데. 교회란 이름으로, 장로라는 이름으로, 목사라는 이름으로! 권사라는 이름으로 구역장이라는 이름으로 또 죄 짓는데, 집에서 샌 바가지 밖에서 안 새나? 밖에서도 샌다 말이지요.

   교회가면 정수기 팔아주세요, 오늘 새로 개업했습니다, 우리 집 짬뽕 드세요. 온갖 것들이 이권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엄청납니다. 교회 장례사 하나 등록했다고 감사헌금 하면서 ‘소망장례사’ 목사는 또 찝찝해가지고 죽으면 또 저기 가야되나, 뇌물 붙이듯 감사헌금하고. 기쁨 애견사.…그런 것이 바로 우리의 몸이 외부의 시선, 눈총 보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우리의 입장인 겁니다.

   주님도 다 이해하시지만 저도 이해한 것이, 여러분들이 복음을 사랑하고 싶어도 주변에서 가만두지 않은 것 제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상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주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 저주를 생각하면 그 저주 앞에서 ‘아휴, 미안합니다, 우리 형님이 교회 가지 말라 해가지고 ’ 이런 식이에요. 핑계 댄다는 자체가 내가 참 부끄럽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만들죠. 이제 진도 한 번 나가봅시다.

   정리해보면 하나님께로 난 자의 원형은 신약이 아니고 구약 이스라엘부터 있었다, 이스라엘은 바로 하나님께로 난 자로 돼있다. 왜 난 자인가?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그 약속의 본질이 무엇이냐,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린다. 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느냐, 그것은 인간이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을 첨부터 끝까지 주님 홀로 하시기 위해서 언약이라는 것으로 개입했다.

   그때부터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는데, 이삭을 통해서 죽은데서 살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작업을 하는구나. 죽은데서 살고 없는데서 있게 하는 그 일이 바로 없는 자식, 없는 아들이 태어나서 그 아들이 죽습니다. 없는 아들이니까 사람의 힘으로 태어날 수 없는 아들이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신 거죠. 마리아는 동원시키지 마세요. 도구에 불과합니다. 자궁을 빌려준 것뿐이에요. 인간의 몸을 입은 거예요. 주도권은 성령이 쥐고 있어요.

   예수님 목숨 반은 마리아라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마리아라 하는데 인간 되고 싶은 것도 마리아 뜻이 아니고 주님께서 자진해서 인간되신 거예요. 백퍼센트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된 겁니다. 없는데서 있는 아들이 언약대로 된 겁니다. 이삭처럼 죽은 그 죽음이 이스라엘 어린 양으로 바뀌어서 하나님께로 난 자가 된 겁니다. 자, 그러면 강의 첨으로 돌아가서,

   세상 부모도 운동장의 그 많은 학생들이 있어도 자기 아이를 아는 법인데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도 우리와 의논도 않고 첨부터 일방적으로 하나님께로 난 자를 만드는 그분이 우리를 모를리 있겠습니까? 아시고 인도하시죠?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5:18 개역개정』
   우리가 우리를 지킨다는 말입니까? 누가 지킨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쪽에서 누구를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다 지켜주시는데 이 사실을 믿는 게 믿음이다 이 말이죠.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고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고 구제역으로 구덩이에 소를 다 집어넣었다 할지라도 나는 무엇의 하나님을 기뻐한다?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는 거예요. 왜!? 우리는 저주의 상자를 봤으니까. 저주 앞에 어떤 인간도 설 수 없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 저주에서 나온 저주를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써 커버, 우리가 받을 저주가 없도록, 저주가 아니라 칭찬을 합니다. 신기하죠?

   -이거 잊지 말아야 되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죄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첨부터 모든 게 죄가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사람의 죄를 없애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겁니까? 다음에 새로운 사건이 나면 죄가 또 들어오겠지요? 만약에 죄가 없는 상태에서는 뭐라 하냐면 ‘무죄’상태라 하죠. 무죄 상태라 하면 아담으로 돌아가는 셈이 되요. 통일교나 모든 개혁주의 신학에서 ‘회복하자’ 하는데 회복하면 안 됩니다. 회복하면 아담 되요. 아담 되면 또 죄짓습니다.

   무죄가 되면 안 되고요, 뭐냐 하면 ‘의인’되는 거예요. 의인. 하나님 기뻐하시는 의로움이 볼록볼록 생기게 되는 겁니다. 비어있는 게 아니고, 아멘, 믿습니다, 하고 돌아서면 죄가 또 올라오고 새로 시작되는 거예요. 감기 낫다고 해서 끝났습니까? 다음에 감기바이러스 오면 또 감기 걸리죠. 우리 생각에 은혜 받고 돌아서면 나쁜 생각 또 올라오죠. 주님께서는 자꾸 볼록볼록 올라오는 이 죄를 무죄로 바꾸는 게 아니고, 이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의인으로 바꿔요.

   의인이라 하는 것은 뭐냐면, 예수님의 공로,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의 주체로 바뀌는 것을 ‘의’라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예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바뀔 때  죄지을 때 마귀가 우리를 공격했었는데 우리는 누구 핑계 대버립니까? -핑계 대면 안되지만- 우리 몸이 원래 누구 겁니까? 나 죄인 맞는데, 주님께서 약속대로 의인되게 했어요. 라고 할 때 ‘마귀야 나하고 상대하지 말고 예수님과 상대해라’ 예수님 내 안에 계시니까 예수님과 상대하라 말이지요.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는 우리를 죄인이라 부르는데 주님은 우리를 ‘의인’이라고 하죠. 이게 이 세상 윤리도덕 공자 맹자 천자문 떼도 이런 게 없어요. 그런 것들은 전부 다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의 절제로 인간의 조심스러움으로 죄를 덜 지을 수 있다는 이런 (해괴망측한-녹취자) 교육방법으로 마치 죄를 삭제할 수 있는 것처럼, 상쇄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있는데서 있는데로 출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에게 난 것이지 하나님께 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선악적인 사고방식은 부기簿記 알죠? 부기장부. 여기 단기순익, 부채, 부채+단기수익률은 자산 되죠. 부채+자본은 자산 되죠. 사람들은 이 자산을 뭐로 보냐면 ‘주체’로 보는 거예요. 이걸 나(주체)로 봐요. 선이 있고 악이 있는데 개판이 되도, 교도소에 앉아 있어도 나는, 일단은 선인데 단지 남들보다 얼룩이 좀 더 졌다, 남들보다 안 좋은 면이 있었다, 했을 때 ‘부채負債’는 뭐가 되냐 하면, 착한일 40퍼센트, 나쁜 일 60퍼센트가 돼있어서 교도소에 갔다면 교도소에서 착한 일 많이 해 나쁜 일 400퍼센트에서 20퍼센트가 착한일 하는 쪽으로 오게 되면 60퍼센트가 되고, 나쁜 일은40퍼센트로 내려 왔잖아요.

   그러면, 내가 나쁜 일을 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나는 선한 인간입니까, 나쁜 인간입니까? 선한 쪽으로 가서 이 사람이 죽게 되면 주님께서는 저울을 달아요. ‘아, 너 착한 일 많고 악한 일 적구나~ 그러면 천국은 가되, 선한 일이 40, 나쁜 일이 60이니까 20퍼센트를 빼버리면 20퍼센트 여분의 착한일 한 것 답게, 이거는 206호에. 이거는 계급이 낮아.

   거기 가면 19퍼센트에서 올라온 사람도 있고, 어릴 때부터 똥오줌도 안 싸고 엄마 말 잘 듣고 학한 일 한 사람 이거는 90퍼센트까지 올라가는 거기는 베드로도 오고, 사도요한도 오고 교황도 오고 거기 주기철 목사님도 계시고 데레사 수녀도 계시고 훌륭하신 우리 교회 목사님도 계시고 이랬다는 거예요.(ㅋㅋ) 그게 바로 ‘양(염소) 무리 마을’ 아닙니까, 그게 바로 천당 가면 상급의 차례가 있는데 -내신 성적처럼- 하나님이 농땡이 쳐서 천당 오는 사람과 열심히 해서 천당 오는 사람 차이를 두게 마련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속죄를 모르고, 속죄가 의인되는 걸 모르고 장부에 기입하는 자기 행동에 따라서 성과급이 새롭게 주어진다는 거예요. 성과급과 수당 이런 게… 완전히 봉제공장이에요. 잔업하면 더 주는 거 있잖아요. 그래 이거는 무슨 나무 따먹었어요? 선악과 따먹었죠. 선악과 따먹으면요, 생명나무 앞에서 저주받습니다.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걸 못 버리잖아요.

   이걸 못 버리지만 우리는 이걸 뭐라 합니까, 이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이게 매일 올라와요. 올라오지만 dkfalfikerkqkfkfk… 이것 때문에 죽었잖아요. 주님께서. 그것도 우리 대신 저주를 지고 올라가가지고 ‘저주, 해결 다 했다~’ (손 터시는 주님의 모습 상상) 축구선수 박지성 선수 알죠? 박지성 선수가 한 골 넣고 난 뒤에 손바닥을 털면서 쳐요. 주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 박지성 선수처럼 손바닥을 털면서 칩니다.‘해결 했어~! 날 믿어~!’

   믿음으로 의인 되는 거예요.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교회서 성과급 주듯이 하니까 인간들마다 점점 더 위선자가 돼버려요. 자기의 잘못은 계속 더 깊은 곳에, 깊은 곳에 심지어 자기가 기도해도 안 들킬만한 곳에!(대단!ㅋㅋ) 이중인격자. ‘열심히 기도하는 나’와 기도함으로써 ‘감추고 싶은 나’ 이런 이중인격자. 마치 꾀죄죄한 팬티 위에 새 팬티 입으면 됩니까? 속에는 썩은 냄새 진동. 남 보기에는 깨끗해 보일라나? 속에는 …(이게 과연 남 얘기일까?-녹취자)

   그러니 교회는 뭐냐 하면, ‘아, 이래서 지옥 가는구나,’ 하는 걸 보여주는 곳이에요. 인간의 생각, 머리 굴리는데 한계가 있는 거구나, 악마의 최후의 모습이 종교라는 것, 기독교라는 모습, 교회라는 모습에서 ‘아, 저게 악마구나,’ 고상한 체 거룩한 체 하면서 자기 재산보더 더 뛰어난 자긍심으로 ‘보라~fkahfkfk (도대체 뭔 노래를 하시는지 모름)’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기를, 십자가 복음 외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했습니다.  교회라는 건 주님이 만들어주지, 주님이 모이게 하면 교회지(녹매교회처럼-녹취자)
   교회 간판 걸고 현판식 하고, 목사 불러다가 떡 잔치 하고, 이런 거 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뭐 준거는 고마운데- 어디 개업식 합니까? 화분 쫙 도열시키고 어떤 장사는 ‘축 개업’ 하기에 고사지내고, 교회 상량식하면서 돼지 목(머리) 대신 목사 기도하고 말이죠. 그리고는 ‘헌당식?’ 헐... 예배당에 그냥 들어가면 되요. 건축 허가내고 수건 돌리고 떡 돌리고 그럴 필요 없다 말이지요.

   이게 언약궤가 있는 이스라엘과 바깥의 다른 민족과의 (이방종교) 종교싸움이죠. 이러한 다툼이, 우리 내부의 갈등이 운영되는 이스라엘과 어떻게 다른가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시내산이 있고, (시내산 봉우리에 구름이 걸쳐 있는 그림을 그리심) 우리 같으면 시내산에 하나님계시면 올라가면 되잖아요. 등산복 차림으로 피켓 들고 다 올라가면 되는데 주님께서 못 올라가게 했어요. 여호수아도 못 올라가고 산 중간 250미터 남겨놓고(base camp) 오직 모세만 올라가는데 모세 올라간 지점에 뭐가 있냐, 구름이 있어요.

   마치, 예수님 승천하실 때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가려진 구름처럼. 예수님 뒷모습 보려고 구름사이를 기웃거릴 때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뭘 봐! 보기는 뭘 봐, 거기는 너희나라가 아니야, 다시 구름타고 오시면 너희들은 들어가는 거야, ” 결국 여기에 남겨둔 이유가 뭐냐 하면, 구원 받았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육적인 모습을 다 토해내야 될 시기가 40일이 필요하고, 이쪽(?)에도 40일이 필요한 거예요. 한쪽은 영적완성이 40일이고 하나는 육적 완성이 40일이에요.

   광야 몇 년이었습니까? 40년. 40년의 4라는 숫자는 ‘동서남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땅의 전부’ 땅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속성은 40일 속에 다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며칠 시험 받았습니까? 40일 마귀에게 시험받는데, 모세 같아요. 모세는 산 위에서 했지만 예수님은 지상에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했지만 예수님은 지상에서 마귀한테 시험받은 거예요.

   마귀가 계속 집적대면서 ‘배고프지?’ 시험받는데 땅에서 어느 인간도 구름이 있는 곳에 갈 수 없는 이유는 40일 동안 있어보니까 인간에게 나올 건 죄밖에 나올 게 없게 돼있어요. 그걸 우리가 말을 들어 익히 알지만 그 말을 들어보면 맞아요. 누가 우리에게 죄밖에 안 나오게 했어요? 누가 그렇게 죄를 알게 합니까? ‘주님께 난 자만이’ 이러한 구조, 현재 나누어져 있지만 합쳐지면 이게 다 우리 몸 안에서 나는 거예요. -오늘 강의 중에서 가장 어려운 거 하겠습니다- (ㅋ)

   우리의 몸은 ‘아담’과 ‘마지막 아담’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이죠?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 만나서 형성되죠. (드디어 보드 판을 지탱하고 있던 돌멩이도 지탱하기 힘들었는지 주저없이 쓰러지다. ) -아무튼 중요한 부분에서 이래요-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 어느 계기처, 어느 공간에서 만납니까? 우리 몸을 통해서. 성도의 몸을 통해서. 아담의 몸에서 주님의 생각이 튀어나오고, 생각이 튀어나왔다가 아담이 튀어나오고, 오호라 곤고한 몸이 나왔다가 기뻐하는 몸이 나오고. 기뻐한 몸 곤고한 몸한테는 로마서7장을 찢어버릴까요?(롬7:24)

    한때 이미 곤고했는데 지금 곤고하지 않는다면 로마서7장을 찢어버릴까요? 찢으라고 하는 게 개혁주의 신학 아닙니까! 이미 우리는 다 됐는데, 이미 우리는 성도 됐는데 뭐가 자꾸 곤고하냐, 이래 나와요.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뭘 보여주는 기능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설이 되면 떡가루를 어디서 빻습니까? 방앗간에서 빻죠? 내가 쌀을 씻어서 내가 방앗간에 맡겨 떡을 하고난 뒤에 방앗간은 불 질러 버릴까요? 내년에 또 새로 써야지요. 예수님도 나 구원 받으면 손 털어버렸는데 그러면 안돼요. ‘구원 받았으니 다 됐다,’ 이게 아니라 첨에는 물론, ‘나 구원받고 싶어요. 구원받고 천국가고 싶어요.’하게 되지만 막상 성령 오게 되면, 이제는 내 구원은 기본이고 이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된 아담의 몸을 갖고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 몸과 더불어서 살아야 되는 몸이구나, 전에는 내 구원만을 소유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지금은, 지금은 그리스도가 이런 분이구나 알려주는 몸으로 사는 거예요.

   살면서, 말씀이 그때마다 ‘아, 요한일서 말씀이 그렇구나,’ 하고 주께서 지켜주시는 겁니다. 19절에 봅시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아! 재밌지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것에 속한 것」이라고 돼있으니까, 그림으로 그리면 좋아요. 여러분 ‘돌출’이라는 말 알죠. 툭 튀어나온 것, 솟아올라 있는 것, 이번 수련회 때 했던 ‘피자 판’ 생각나지요? 피자 판=온 세상이라고 합시다.

  온 세상(피자 한 판)은 어디에 속했고? 온 세상은 악한 자에 속해 있고, 우리는 아직도 온 세상 안에 살고 있잖아요. 우리는 어디에 속했느냐, 우리는 하늘에 속해 있죠? 하늘에 속한 자의 그림을 어떻게 그리냐 하면, 돌출이에요. 볼록 볼록. 약간의 그림자를 드리운 돌출. 그림자= 복음적인 증거. 해가 지면 그림자도 늘어지는 모양.(이번 녹취 진짜 어려움 ㅋ)
돌출 모양이 만약에 10센티미터라면(너무 높은 돌출-녹취자) 평면 부분은 온 세상=악한 세상 맞죠? 10센티미터의 돌출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거예요. 또는 뾰루지. 피부트러블. 멍게.

   주변에서 ‘왜 너는 자꾸 불거져?’ 물으면 ‘나? 하나님께 속했거든!’ 같이 세상에 속했으면 참 좋겠지요. 사실 우리 몸은 늘 그래요. 남들 좋아하는 드라마도 다 보고, 하지만 그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봅니까? 10센티미터 높은데서 보는 거예요. ‘아, 요한일서5장19절이 저기 있,’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고 너희들은 세상에 속했느니…」세상 속에 속했으니까 이혼하면서 울고불고, 자살하는 이거 전반전.

   전반전에서 일어난 것들 때문에 후반전이 있는 것도 모르고 ‘못 살겠다’ 이것저것 싸우고 난리불수죠. 뻑하면 오해하고. 오해가 딴 게 아니고 욕심과 욕심의 충돌 아닙니까, 거지 나사로가 오해할 게 뭐가 있습니까, 개도 무시하는데. ‘개야, 너무 오해한다,’ 이런 거 없어요. ‘개야, 너는 너대로 살아, 나는 나대로 살게’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렇게 살면 불편해요. 가시 같은 존재가 돼가지고. 그런데 이게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데요, 우리를 이미 아신 자, 나(육)는 내 자식 모를 수 있어도 주님은 귀를 만드시고 눈을 만드신 분이니 절대로 잊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의 자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원치 않는 길을 가도록, 뾰루지 되도록 길을 이끄십니다. 이끄실 때 우리는 참 힘들어요. 남들처럼 안일하게 살고 싶은 게 우리 아담의 몸인데 이게 자꾸 삐딱거리니까 그때마다 우리는 요한일서 5장19절이 적용되는 순간이구나, 하는 것을 알죠.

   이렇게 되면 말씀은 내가 지키는 겁니까? 주님이 지켜서 우리에게 주는 겁니까. 주님이 지켜서 우리에게 강제로 입히는 거예요.(아멘) 아까 저주받은 언약궤 할 때 ‘너는 빠져 있어,’ 이 저주는 내가 저주에 들어가 풍덩 적셔서 저주를 용서하는, 저주 맞아도 이길 수 있는 효과를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주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응, 십자가 일이 있었어,” “주님 제가 십자가 좀 질게요” “아녀, 너는 못해, 나 혼자 다 하는 거야,” 해서 거저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십자가만 자랑하라」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고, 하나님께 난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일5:20 개역개정』

   이 말은 순종하라는 말인데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왜냐면 ‘언약’이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모든 이방민족이 다 알고 있어요. 모든 이방민족이 다 알고 있으니까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보냅니다. 사도바울이 외칩니다. “너희들 누구하고 있지?” “우리는 신을 믿는다아아아~” “우리는 진실하시고 자비하시고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다 하시는 분을 믿는다.”

   그래가지고는 심판에서 면죄 안 되거든? “그럼 뭐냐~” 그 보이지 않는 신, 그 분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옛날에는 너희들이 몰라도 신만 알고 있어도 묵이해 줬지만, 이 마지막 때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모르면 여러분들은 저주 받습니다. (행17장)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수준에서의 내 모습과 예수님을 아는 것의 내 모습, 이거는 하늘과 땅 차이죠. 하나님을 알고 날 알면, 행함이 동원돼가지고 지성감천이라고 착한 일 하면 복 주었지만 십자가 앞에 딱 서니까, 이것은 구원의 문제는 이미 내 손에서 끝나버린 거예요.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께서 나를 이끄신다는 것을 고백만 할 뿐이고 십자가 은혜를 자랑만 할 뿐이에요.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은 나의 옛 사람에게서 나온 죄의 덩어리고 그런 것을 고백하면 주변 사람들이 뾰루지라고 하죠. 하지만 그렇게 욕해도, 욕 하면서도 그들 마음속에서는 그것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로마서1장에 보면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했어요. 기적이 아니고, 성경으로 인도하는 게 인간이에요. ‘전에는 이 말씀이 건성건성이었는데 이제 보니까 믿어지네,’ 그러면 다른 것도 연결돼가지고 다 믿어져요.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오직 말씀 중심, 말씀 중심에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버렸고! 우리는 그것을 확인절차에 있는 거예요. ‘네가 이런 일에는 혜택을 이렇게 입었다’ 혜택 입은 거에 대해서 찬양하는 거예요. 이게 교회입니다. 드디어 요한일서 끝나는데요, 마지막에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며는,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요일5:21 개역개정』

   이 우상이라는 것은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을 우상이라 하는 겁니다. 추상적인 하나님 중심을 전부 다 우상이라 하고, 진짜 영생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게 영생이죠. 그 예수님은 십자가를 졌다는 사실. 무서운 저주의 상자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한일서를 무사히 마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장소는 옮겼지만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겠다 했사오니 주님 앞에, 우리가 거저 받은 혜택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