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101008요일4장7절a
요한일서 4장7절:『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여기 ‘사랑하자’ 명령돼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속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기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했을 때는 그 테두리가 전제되어 있지요? ‘하님께만 속한 자리’ 그 자신이 어떻게 행하느냐를 보지 말고, 우리가 이렇게 형제로서 만난, 주선하여 만든 자리 있잖아요. 그 자리는 우리가 만듭니까. 주님의 사랑이 만들었죠. 예를 들어 우리가 찜질방에 가면 손님이 장작 들고 가지는 않잖아요.
손님은 5천원~7천원 내고 들어가면 밑에서 후끈후끈, 열기가 바닥에서 올라오지요. ‘어,,이~ 션하다,’ 하고 누워있으면 되잖아요. 만약에 거기서 찜질방에 간 사람들 목적이 밑에서 올라온 열기에 몸을 지지기 위해서 갔는데, 거기서 누가 소준 한 병 먹고 떠들어 대면 시끄러우니까 나가라고 하지요. ‘내가 당신 자랑 듣기 위해 여기 온 건 아니다’ 말이지요.
그럼 누구열기?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바닥의 뜨거운 전기 열기를 맛보려고 먼데서 왔는데, 소주 한 잔 먹고 들어와 가지고 갈 줄 알았는데, ‘왜 날 안 알아줘, 나도 대단한 사람이다’ 이러하면 시끄럽다고 나가라고 해야 되겠지요. 그게 뭐냐면, 6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죠?
이것은 뭐냐면, 여기에 한 그룹이 있는데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을 하자는 겁니다. 구분을 하면 자기중심에서 ‘내 편 아니면 다 나가라’ 이러는 수가 있거든요. 이걸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진리’가 하늘이 아니고 지상입니다. 진리가 지상에서 고정화되면 정치가 돼요. 모든, 심지어 교회뿐만이 아니고 하나의 사업이라든지 국가도 항상 내세우는 게 ‘진리’입니다. ‘정의로운 사회,’ 정권 바뀔 때마다 정의로운 사회 하죠?
이 정의로운 사회, 소외된 사람에게도 살맛이 나는 사회, 강자만 잘 사는 나라가 아니라 없는 사회도 혜택을 받고 사는 사회를 정권 바뀔 때마다 이구동성으로 얘기합니다. 복지예산을 확대한다든지, 이것은 바로 진리를 외치는 데에 있어서 교회나 정당이나 정치단체나, 그리고 학교의 교원이 뭡니까, 나쁜 일 하자, 이런 건 없잖아요. 뭐예요. ‘진선미’ 바르게 살고 참되게 살고 성질하자, 훌륭한 민주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서 좋은 말 하잖아요.
그런데 교회 가면 뭡니까 돈 빼먹잖아요. 교사나 교원은 ‘바르게 진실 되게’ 해 놓고 그 밑에서 담배 태운다, 담배 피우면 연기도 나쁘지만 담배를 피우게 되면 건강이 남보다 더 빠르게 해치잖아요. 이러면 건강 보험료가 올라가요. 그 사람이 담배를 끊었으면 쓸데없이 보험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될 보험료가 담배 피우는 게 유행이 돼버리면 건강한 사람이 지불해야할 비용이 증가하는 겁니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은 담배 값을 올리는 겁니다.
그러면 담배를 아예, 없애면 될 텐데 싶겠지만, 담배를 없애면 수입에 문제가 되고, 또 기호식품 어쩌고...아무튼 제가 지금 이야기 한, 단편의 교사이야기는 명확한 겁니다. 개인이 그 모토에 얼마나 맞는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담배피우는 교사가 백명 같으면 백명 다 담배 피운다 할지라도 교원은 뭐냐면, ‘담배피우면 건강에 나쁩니다’를 교실에서 가르칠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학교든 정당이든 어느 단체 모임이든 간에, 그 추구하는 모두는 모두 진리를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할머니 계모임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이렇게 해서 우정과 단결을 추구하자, 이렇게 되어 있지 ‘묻지마 관광가자’ 이걸 모토로 걸지는 않습니다.
이거 해서 어려운 사람 돌보고, 혹시 계원들 가운데서 못사는 사람에게 보태주자, 이런 건전한 취지를 걸어놓고 뒤에서 놀든지 말든지 하지만, 어쨌든 진리를 추구하는데, 이 진리가, 진리에 대해서 추구하겠다고 나설 때 이걸 뭐라 하냐면, ‘주체’라고 합니다.
‘인간의 주체’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의 모임을 가지고 공동체라 하잖아요. 집단, 집하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집단과 집합을 구분해서 한 거예요. 우연히 만나는 걸 집합이라 하고 의도해서 만나는 걸 집단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인간들이 모인 곳이 하나의 무리, 집단을 이루잖아요.
내가 그 모토대로 산다 안 산다를 떠나서 어떤 집단이 되어버리면 ‘나’라는 주체가 내가 가입한 공동체 단체는 ‘나’ 주체를 대행해 주는 겁니다. 대행. 대행해준다는 말은, -잘 들어보세요- 내가 담배 피운다는 걸 건강에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못 끊고 피우고 있지만 이 모임 자체는 담배 피우는 것을 장려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건강한 시민을 위해서’ 라는 걸 모토로 하는 것에 대해서, ‘나’ 주체는 동의하는 겁니다.
처음 교회 온 사람, 성경에 대해서 뭘 알겠어요. 아무것도 모르죠. 세상 살던 그대로 죽어서 좋은 데 간다고 왔는데, 사람 죽는 것은 한번 정한 거고, 죽으면 심판 있대서 쫄아가지고 왔다 말이죠. 왔을 때, 비록 자기는 성경도 모르고 행동 어떻게 하는지를 몰라요. 하지만 모토는 뭡니까. 천국의 삶을 위해, 거룩한 삶 위해, 모토를 잡는 거예요. 비록 내 꼬라지를 볼 때, 목사님 말씀에 비추면 형편없는 인간이지만, 그것 때문에 그 교회를 떠납니까?
안 떠나지요. 왜 안 떠납니까. 내가 못하는 그 일을, 그 진리라는 것을 대신한 교회라는 건전한 단체가 내가 이룰 수 없는 것을 해 주리라 믿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게 천주교의 이상이에요. 우리는 다 같이 부족하고 모자란 인간이지만 이 교회를 세우신,-천주교 누가 세웠습니까? 베드로가 세웠어요 - 베드로가 이미, 베드로가 예수님의 하청업자예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반석’이니 네 위에 무엇을 세우라? 교회를 세워라, 해 놓고 교회만 세우고 너는 손 떼라, 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제가 이번 로마 가서 다 봤어요. -쿼바디스! 어디로 가시나이까. 손 떼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계속 교회 책임자로 누구 세웠다? 베드로에게 책임을 맡긴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1대 교황이 돼요.
어제 이런 강의 했는데, 어제 어려운 강의 많이 했어요. 이런 이야기 기억해보세요. 여러 가지 다수가 공통점을 만들어낼 때 <공통점을 만들어낸 개념들이 또 하나의 다수를 이룬다.> 기억나십니까. 기억나죠? 교황들은 누구의 대행자? 그리스도의 대행자지요. 목적은 하나밖에 없어요. ‘교회를 교회답게 건전하게 유지하라’는 목적으로 교회를 세웠잖아요.
그러면 교황들이 완벽한 인간들입니까? 천주교도 그렇게 생각 않습니다. 교황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있어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일반 성도나 신부와 달리 하나의 유형을 만들어요. 상위 유형. 상위 유형을 만들면, 그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가 추구할 모토의 구성원으로 집합, 부분집합으로 단합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보다 부족한 교황이지만, 베드로가 교황 제도를 만들었다는 그 모토에 교황들끼리 하나의 주체로서 행위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 가는 이유를 아시겠어요? 완벽해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건 뭐냐면,
너도 부족하고 나도 부족하지만 이 공동체를 구성케 하신 하나님의 성령이라 할까요? 그 하나님의 뜻을 반영해서 우리가 이런 모임이 있다는 자체에 존재의 의미를 두면, 그것이 부족한 내 주체를 대행할 수 있는 새로운 덩어리 주체로서 주께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교회가 됩니다. 맞습니까? 맞는 거예요?
지상에서 고정화 될 때 그들은 뭘 보느냐 하면, 인간의 주체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식으로 고정화 되지 아니하면, 주체는 대상을 모호하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자> 너무 너무 모호해요. 그런데 “예수님의 몸은 교회라” 너무 확실해요. 왜 부동산이 거기 있고, 등록카드도 쓸 수 있고, 가끔 봄과 가을에는 성만찬에 떡을 먹고, 잔을 들잖아요. 입맛에 포도주 맛이 감돌잖아요. 감각으로 오잖아요. 천주교는 ‘화체설’ 을 주장했지만...
얼마나 땡깁니까. 눈에 보이는 식으로 고정화 돼죠. 여러분 천주교 신자가 성당 들어갈 때 뭐하죠? 천주교 신자 성당 들어갈 때, 마리아 면사포 쓰고 들어갈 때부터 시작해요. 들어갈 때부터 천주교 형식에 맞는 행위를 하지요. 미사 드리고 나갈 때도 하지요. 그럼 절에 깔 때 뭐합니까. 절에 갈 때 멀찍이에서 두 손 합장해 고개 숙이지요. 그러면 그걸 중이 없앴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뭐 할 대상이 사라집니까? 영원한 제사가 없지요.
천주교 신자 집에 가면 안방에다가 안방에다 마리아상을 설치해 놨어요. 묵주 마리아 모가지에 걸어놓고, 차 안에다가도 걸어놓고, 불교신자는 연꽃에다가 염주 돌돌 감아 걸어 놓고 기독교 신자는 십자가 달랑달랑.
전에 얘기 했듯이 요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제사지낼 때 평범한 안방이다가 갑자기 제삿날 되면 티브이 있던 자리가 귀신 올 자리가 되어가지고 병풍을 딱 쳐버립니다. 그러면 평소에 있던 세속된 공간이 제삿날 그 시각에 열두시도 좋고 아홉시나 열시로 땡겨가지고 땡기는 그 시간이 거룩한 시간이 장만되고 거룩한 공간이 형성돼가지고 수고한 여자들은 멀찍이 서 있고, 놀았던 사람은 술 한 잔 받혀 휘익휘익 돌려 절 한번 하고, 그렇게 하지요.
왜! 주체라 하는 것은 고정되고 내 주체를 대행하는 것이 고정되고 지상에서 눈에 보이는 게 아니면 ‘주체형성’이 안 됩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1장 여러분 다 기억하지요. 뭐랍니까.『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것이, 요한일서가 어렵다는 이유가 이렇게 그들이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본 바요, 들은 바지만 그 제자들의 시대가 떠나고 난 뒤에, 그 뒤에 신앙공동체는 뭘 봤다 말입니까. 뭘 봤다.
뭘 만지고 뭘 들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요한일서 강의가 이렇게 어려운 거예요. 제자들은 좋겠다, 만지니까! 들었으니까! 만지니까! 제자들은 말합니다. 만지고, 밀고 땡겼다고해서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멘!) 예수님 당시에 군중들이 떠밀고 해도, 그건 믿음이 아니었어요. 만져도 소용없어요. 만져서 확인하겠다는 것이 ‘예수님을 대상화’ 한 겁니다. 내가 있어 ‘대상화’ 한 거예요.
그런데, 요한일서에는 뭐라 하냐면, 우리가 여기 있고 대상이 여기 있어, 내 쪽에서 대상쪽을 휙, 움켜쥘 수 있는 능력은 주님께서 거부한다는 겁니다.-어제 강의 했지요?- 십계명이 코앞에 있어도 우리는 십계명을 모르고 지킬 수가 없다 했지요. 그러면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우리 속에, 우리 허락도 없이, 우리가 고대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확, 째버리고, (가슴을 째버리고-녹취자) 들어와 버린 거예요.
제가 요새 책을 책고 있는데 책 내용에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밀가루 포대를 면도날로 쫘악 그으면 뭐가 안에서 터져요? 허연 가루가 팍, 쏟아지지요? 주님께서 면도칼 들고, 예리한 도루코 들고 그어버려요. 그어버리지 않으면 뱃가죽 때문에 계속해서 내 쪽에서 법을 지키려고 시도한 거예요. 지키려고. 지키려고 시도한 걸 십자가라는 날카로운 면도날을 가지고 그어버리고 들어와 버리니까, 전에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의식이라면 이제는 배 째고 들어와 버리면 구원받을 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분이 나를 강탈해 버렸어요. 겁탈했어요 겁탈. 겁탈해 버렸어요.
우리는 하나의 믿음이라 할 때는 항상 믿음의 대상을 염두에 두어요. ‘믿음의 대상’ 할 때 믿음의 주체는 누굽니까. 믿음의 주체는 주체답게 항상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진리를 추구해도 그 진리를 추구함으로 해서 주체가 형성되어 있어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과 이야기할 때 뭐라고 물었습니까. 재판하기 전에. 재판하기 전에 다지고 다지는 거예요. 내가 재판을 잘 하냐 못 하냐, 엉뚱한 걸 건드려 내가 저주받지 않을까, 걱정돼가지고 묻는 거예요.
‘진리가 무엇이냐’ 물을 때 예수님 답변을 못해요. 그것은 빌라도가 예수님께 질문할 쨉이 안되고,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빌라도가 구원받으려면 예수님이 빌라도를 째고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진리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진리는 예수님이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게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라고 하는 거예요. 새 언약은 코앞에 들이대도 그걸 할 수가 없어요. 그걸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할 때 ‘사랑하자’라는 그 말이 성립되려면 그 밑에 바닥이 형성돼야 되요. 바닥은 제가 찜질방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해석했지요? 그게 뭡니까. ‘사랑받은 거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말이지요. 우리는 본의 아니게 주님의 사랑 안에 그냥 끌려 들어오는 사랑의 포로, 그냥 끌려 들어오는 겁니다. (잠시 사적인 대화? 궁시렁 궁시렁)
요한일서에서 논리상 어려운 것이, 사도요한이 말하기를 우리가 본 바요, 들은 바요, 손으로 만진 바다. 이야기를 했고, 그리고 그 생명을 너희에게 전한다, 할 때에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들었기 때문에 믿었다고 오해하잖아요. 그러나 사도요한이 계속해서 논리 전개를 하는 것은, 여러분 보기에는 우리가 보았기 때문에 믿고 들었기 때문에 믿은 줄 알지만 그게 아니고, 우리가 보았던 그 분, 우리가 손으로 만졌던 그 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셨기에 오늘날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그 사건이 동일하게 여러분에게 구원사건으로 주어집니다. 주어지는데 여기에 관여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성령님이 이렇게 관여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관여할 때는, 방향이 예수님 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당하는 것은 부정당하고 차단되어야겠지요. 차단하면서 요한일서에서 이걸 뭐라 하냐면, 이걸 가지고 ‘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에 보면 ‘죄가 없다는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라? ‘거짓말 하지 마라’ 했어요.
어제 강의한 것 중에 중요한 거 말했기 때문에 잠깐 소개하면, 인간이 결국은 어디로 갑니까. 흙이 되지요. 저는 이것을 <인간은 무너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인간은 무너져야 마땅하고. 인간이 무너질 때 어제 강의 할 때 이걸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제시한 언약’이라고 했지요. 흙이란 말을 두 자로 하면 ‘죽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로마서에 우리가 죽는 이유가 뭣 때문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죄 때문에 죽지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요?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 어디에 고정되었습니까. 지상이 아니고, 언약은 하늘에서 오니까 고정되어 있다고 했지요. 하늘나라에 계신 분이 어린양이라서 죽음을 듬뿍 담고 있는 양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표현했다 했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필히!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런데 왜 나대냐 이 말입니다.
왜 착하게 살려고 왜 그리 나대냐 이 말이지요. 착하게 살면 이 언약이 수정될까봐? 그런 걸 기대해서? 왜 수정이 안 되고 이탈이 안 되냐 하면, 이건 하늘나라에서 고정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어제 고정되었다는 말을 많이 한 거예요. 구약의 다수가 결국 모두 부정당하고 오직 성령께서는 예수님께 오지 않습니까. 다수에서 하나, ‘하나’에서 ‘다수’라고 할 때 뭐가 문제라 했습니까.
‘다수’에서 부정당하고 ‘하나’라 할 때 하나에서 다수로 간다? 안 간다? 안 간다 했지 않습니까. 보통 신학자들은 다수ㅡ> 예수님ㅡ>교회ㅡ>성령ㅡ>오순절, 이렇게 보거든요. 이게 아니라 말이지요. 그럼 뭐냐, 다수에서 하나로 왔으면 ‘하나의 반복’이에요. 하나의 반복.
이게 어렵지요. ‘하나의 반복’과 차이점이 뭐냐 하면, 다수가 주어지면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성령 받은 것은 자기가 원할 때 성령주시는 자, 되기 위해서 성령 받았다 해서 그 대목을 보면 마치, 반드시 우리에게 성령이 올 것을 기대해도 될 만한 사항처럼 느껴지죠. 예수님 성령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겠다고 기대하는 그것이 뭐냐, 다수에 해당되는 겁니다.
사람의 주체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고정성이 있을 때 주체가 돼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인간의 주체를 모릅니다. 고2 때, ‘엄마 나 기타 칠까? 공부해서 법대 갈까? 아니면 용접기술 배울까?’ 할 때 헷갈리잖아요. 내가 갈 진로가 어디로 가야 할 순간에 자기 주체성이 형성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엄마가 이야기했습니다. ‘너는 법대가!’ 법대 가면 걔는 주체성이 형성 됐지요. 왜? 기타, 용접공 날라 가고, 뭐가 고정됐습니까.
법대 가는 게 고정됐으면 그 순간부터 걔는 뭐냐, 자기가 추구해야 될 진리가 되는 겁니다. 이제 이해되지요? 주체는 반드시 진리가 있을 때에만 주체가 되고, 만약에 뭘 해야 될지 모를 때는 정체성에 혼란이 와버려요. 혼란이. 그런데 얘가 고2때 했는데, 고3때 갑자기 난치병이 걸렸습니다. 병원에서도 판명치 못할 병에 갈렸다. 그러면 법대 가는 게 진리로서 깨져버리지요.
그래서 멜 콩트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의 주체성은 지금까지는 내가 뭘 추구하느냐, 내가 소망하는 게 뭐냐, 비전이 뭐냐에 따라서 주체가 형성된다고 했는데 나는 그것을 반대한다. 인간의 주체는 어디서 나왔다? <몸의 건전한 유지>에서 나온다고 본 겁니다. 건전한 유지. 내가 무엇을 추구하느냐, 내가 뭘 하느냐는 기본적으로 ‘내가 법대를 가기 전까지는 이 몸은 건장할 것이다’라는 것을 일방적으로 우기면서 그 다음에 건강한 몸으로 간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몸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법대고 기타고 용접이고 다 날아가 버리죠? 뭡니까, ‘행복 전도사’ 이름 뭐였죠? 최윤희? 그 사람 부부가 자살했잖아요. 남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전하고 본인은 자살했다고요. 자살한 이유가 하나밖에 없어요. 몸이 아파서!
‘들뢰즈‘라는 학자도 자살했어요. 몸이 아파서.
치매 걸린 사람을 돌보면, 나는 치매 안 걸리고 다른 사람 치매 걸린 거 보이죠. 그런데 뭘 발견해야 하냐면 아까 ‘언약’이 뭡니까. 우리는 지금도 무너지고 있어요. 결국은 치매 걸린 사람 돌보는 순간 내가 바로, ‘치매에 걸려 있다’ 잠시 치매 걸리는 것이 심화될 뿐이는 것을 아는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이 문제예요. 왜 우리는 아픕니까. 우리가 아픈 이유는 ‘죄’ 때문이죠. 죄 때문에 몸이 아픈 거예요. 흙에 속한 몸은 무너져야 하는 겁니다. 무너짐을 아는 이 사람은 땅에 고정된 게 아니고, <하늘에 고정된 언약의 노선>에 들어갔기 때문에 생명책에 이 름이 기록된 구원받은 사람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하늘에 고정된 예수그리스도를 하늘에 있는 그 고정됨을 사람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지상의 고정으로 전하는, 요한일서가 보여준 겁니다.
나는 무너져가고 있을 때, 어제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가 죽고 싶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니고, 주의 뜻이 죽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싶다고 해서 우리가 이만큼 살아온 것이 아니고, 주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그것도 죽지 못해서. 죽지 못해서 살아왔다가 주니므이 언약이 마감될 때 주님이 회수해 가잖아요. 이런 ‘언약적 안목’ 세상을 볼 때 언약적 안목을 봐야 돼요.
그래서 어제 강의에서 마지막 때, 전쟁이 일어나는데 일곱 인을 뗄 떼마다 하늘에서는 전쟁이 벌어지는데 그 전쟁의 적이 누구라 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적이에요. 그건 뭐냐면 우리가 흙에 속한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여기서 반 복음적입니다. 이 땅에서 확립된 주체를, 주체를 확립하고자 하는 이 시도가 하늘에 고정된 하늘의 언약을 계속해서 거부하고 미워하고 핍박하는 식으로 나갔고, 그 핍박의 결과가 예수님을 죽였고!! 그걸로 인하여 예수님은 죽었다는 표시를 갖고 ‘어린 양’이라는 모습으로 하늘나라에서 지금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어제, 저에게 휴거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성경적으로 뭐가 문제인지 그걸 지적해 주셔야 됐어요. 그게 문제가 된다면. 제가 보기에는 문제가 없다고 보이는데, 아마 그 사람은 무엇이 옳고 그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 써먹느냐, 그걸 생각하니까 그 사람은 절망을 느낀 모양이죠. 확실히는 모르지만. 질문 하나 했다고 그 사람을 다 파악할 수는 있다는 건 교만이지만. 그냥 우리가 한번 풀이해본다면, 그것을 어디다 써먹을 것이냐를 가지고 그게 막혔을 때 울분, 분노다 말이지요.
그런데 요한일서에 보면, 모든 것이 언약대로 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 어디에 속해 있다, 로 손을 털어버리자 이 말입니다. ‘어디에 속해 있다’ 에 대해서. 자 그러면 ‘사랑’ 해봅시다. 이 사랑의 자리에서, 아까 찜질방에서 열기가 오르죠. 찜질방에 열기가 오려면 주인이 밑에서 뭘 땠습니까. 장작을 땠지요. 주님의 사랑, 껍데기만 사랑사랑 하지 말고 밑에 뭘 땠어요. 여기에 땔감이 필요한데 이게 바로 ‘죄인’이라는 겁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라 했냐면, ‘화목제물’이라고 했어요. 화목제물. 어디에 나오냐 하면, 여기 4장 10절에 나오지요? 다 같이 읽어봅시다.:『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이라는 자리에 우리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나갈 수밖에 없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분리, 분리라는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을 정할 때 사도요한은 사랑인데, 사랑 밑에 어떻게 해서 사랑이 만들어졌다 했습니까? 바로 화목 제물, 화목제물 앞에 뭐가 붙습니까. 그냥 화목제물이 아니고 뭐를 위한 화목제물? ‘죄’를 위한 화목제물. 그래서 죄라는 땔감이 없으면 사랑이 태어나지 않지요. 그러면 다수에서 하나, 하나에서 다수로 하는 게 아니고, ‘하나의 반복’이라는 말은 이 하나가, 십자가가 온 통으로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뭘 접수하게 되는 겁니까. 바닥에 있는 사랑만 접수하는 게 아니고 바로 밑에 뭐가 있지요.
우리의 죄 때문에 주께서 ‘희생’했다는 이것이 들어오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우리가 그게 들어오게 되면, 졸지에 우리의 역할은 뭡니까. 우리의 ‘죄’ 때문이 있고 주님의 역할은 화목제물 역할 하게 되면 죄와 화목제물이 만나면 사랑으로 뜨끈뜨끈 하게 되지요. 이것이 모든 성도에게 다 째고(밀가루 푸대를 째고 들어오듯이) 들어오기 때문에 다수가 아니고 ‘하나’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하나의 반복 때문에 ‘나는 구원받았다’ ‘너만 구원받았나, 나도 구원받았다’ 라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계신 분을 내 놓으면 전부 다 하나가 되지요. 그래서 다수에서 다수가 부정되고, 하나에서 다수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어디로 간다? 다시 하나로 귀환되게 되어 있지요. 발, 손, 어느 것이 귀하다, 이럴 수 없어요. 왜? 한 성령을 마시게 되면 우리는 모두 한 머리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만 증거 하게 되어 있고, 영화롭게 하게 되어 있어요.
어제 강의하면서 뒤쪽에서는 인상들이 울긋불긋 해서 ‘내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지더라고요. 그걸 보면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도와주는 거예요. ‘차근차근히 논리적으로 해라’하는 주님의 싸인처럼 느껴져요. 인상이 울긋불긋 하는 걸 보면서 ‘아 내가 너무 비약했나?’ 하면서 다시 정신 차려 다시 한 번 설명 더하고 그러죠. 그래도 울룩불룩 인상이 사라진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만.
예수님에게 관심 없는 사람은 예수님께도 그래요. 성경공부 하면서 예수님 어떤 분이냐? 알고 싶어요. 이런 마음이 아니고, ‘이거 배우면 얼마나 효과 보겠나’ 하고 일어서면 예수님만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렇게 미울 수밖에 없고. 그렇게 밉게 되면, 어제 강의 끝나고 나가서 차에 치여 죽어도 죄의식 안 받아요. ‘저주’받아 죽었다고 하지요. 바로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뭘 받는다? 저주받는다. 나무에 달린 것이 하나님 뜻이잖아요. 신명기에 이야기 하죠? 나무에 들린 자마다 저주를 받기 때문에 결국 ‘예수는 저주받아야 될 자’를 우리가 저주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흠이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에 대해서 말려들었다. 말려들었다, 박수치는 겁니다. 말려들어봐야, 마귀는 맨날 주님이 파놓은 함정에 항상 말려들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없으면 주의 일이 안돼요. 동반자에요. 주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말려든 사람이 있어야 돼요. 아까 한 어려운 거 다시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죠? 눈에 보이죠? 저주받았잖아요. 죽었으니 눈에 보이죠? 이 두 개 합해서 성경해석에 의하면 눈에 보이는 ‘고정적인 실현’이죠. 이걸 누가 본다? 그러니까 우리의 주체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하다.
스데반집사가 신명기에 보면 죄인을 돌로 쳐 죽이라 했지요? 사울이란 사람이 볼 때에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뭐든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여러분들 알지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돌로 치더라도 돌이 스티로폴로 바뀌어 얼굴에 맞아도 근지럽다든지 이래야 될 건데 실제로 돌이 날아왔고, 그 돌이 실제로 중립적으로 움직였고, 돌에 맞아 죽었다 이 말입니다. -이란 여자가 간음했다고 돌에 맞아 죽는 일도 있는데 - 돌에 맞아 죽을 때 처참한데, 이렇게 맞았을 때 사울은 이 모든 것이 허락된 자체에 대해 의롭다고 본 거예요. 허락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주체가 정당하기 때문에 허락했다고 본 거예요.
근데 이 사실이 나중에 사울이 바울이 되고 난 다음에 뭐냐 하면, 주님께서 스데반집사 죽음을 허락한 것은 주님의 고정된 것,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확정짓기 위해서 이렇게 허락 하신 거예요. 허락하신 거예요. 확정짓기 위해서. 그래서 사도바울은 모든 것을 소급해서 생각한 거예요. 소급해서 생각하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가 될 수밖에 없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것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수밖에 없다는 죄인과 은혜의 구조를 가지고 십자가와 더불어서 복음을 전파한 겁니다.
이런 것까지고 어떻게 개혁주의 신앙이 나올 수 있습니까. 이게 복음인데. 하도 어려운 거라 다섯 번 했는데 여섯 번째 또 합니다. 사람의 주체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고정된 것을 봤을 때 하나님의 은혜, 축복, 또는 내가 이렇게 의롭기 때문에 주신 것으로 보는 거예요. 당회장 뽑는데 한 백명 왔는데 자기 혼자 됐다, 할 때 어느 목사의 일가친척 가족분 중에서 이건 주의 뜻으로 된 것이지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볼 거 아닙니까. 그러나 저는 이렇게 봅니다. ‘네가 거기서 목사된 것은 네가 그동안 몰랐던 네 죄인됨을 까발리기 위해서 그 자리에 앉았다 이 말입니다.
그거에 대해서 동의하고 ‘어떤 죄가 있지?’ 하고 나오면 그 사람에게는 십자가 피만 남을 거고, 그게 아니고 내가 기도 많이 했다고 한다면 강단에 서서 십자가 피를 갈라버릴 거다 말이지요. 하나님의 피를 갈라버린 거예요. ‘여러분 나처럼 기도하면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 댄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걸려들었다~♪♩걸려들었다♬’그거예요. 당회장 목사된 것이 남보다 더 의롭고 기도 많이 해서 앞으로 하늘나라 확장에 쓰실 종이 되기 위한 정당성, 그걸 마귀가 했는데 마귀가 그런 짓을 하도록 허용한 것은 그것이 바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하나의 흔적으로서 보인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의 주체는 뭘로 지배를 받아야 하느냐, 이름 없는 분에 의해서 부정당하는 식으로 요한계시록은 진행됩니다. 이름 없는 분이 누구라 했죠? ‘어린 양’ 증거가 있어요.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서 기능만 있고 지상에서 이름이 없어요. 그리고 지금도 하늘나라에서는 ‘어린 양’으로 있지 이름은 없어요. 결국 이름 없는 자가 이름 있는 자들로부터 살인을 당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걸려들었지~♬ 걸려들었지~♩’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을 다시 해봅시다. 사랑은 따끈따끈한 찜질방이다. 죄인이 죄인을 뭘로 둘러쌌습니까. 하나님의 화목제물은 제사에서는 마지막 제물입니다. 화목제물 안에 속죄제를 제일 먼저 드려요. 속건제 드리고, 그 다음에 번제 드리고, 그 다음에 화목제 드리거든요. 화목제 드릴 때는 앞에 무슨 순서를 다 거쳤다? 모든 제를 다 거쳤다는 것에 대한 싸인으로서 화목제물 드리는 겁니다.
그 안에는 뭐가 들어있어요? 이러한 우리의 죄 문제가 다 해결됐고 그 다음에 우리가 헌신하는 문제, 번제는 헌신입니다. 최초의 제사는 번제였습니다. 남기지 않고 다 드리는 거예요. 나중에 그게 세분화해서 번제에서 갈라져 나오죠. 이 모든 것이 화목제물로 수납되면서, 화목제물 단계에 들어가면 뭐냐면, ‘내가 받으마’ 지상에서 일어난 그 고정성은 반드시 이런 일을 성취하신 주체에 대해서 하늘에 있는 고정된 주체, 하나님께서 ‘내가 받아줄게’ ‘내가 받으마’ 라고 하신 거예요.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 차이점은 한쪽은 ‘받으마’ 다른 한쪽은 거부하는 것. 아벨이 얼마나 의롭고 착해서 제사를 받았을까요? -그런 게 어려워요- 아벨의제사가 완벽하고 착해서 받은 게 아니고, 아벨을 통해서 새로운 의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신 겁니다. 만약에 이 컵이 더러운데 모든 사람은 컵이 더럽다고 안 먹으려는데 어떤 사람이 ‘그럼 그 컵 내가 마실게’ 하고 ‘내가 받으마’ 마셨다면 다른 사람 배려하고 이걸 수용했다는 그 행위가 소급해서 그 사람에게 도달되죠.
그래서 로마서 10정에 보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는 모르고 실컷 율법에 열심 있어가지고 자기 의를 세우려는 거죠. 유대인들은 교체가 안 되는 거예요. 교체가. 이것도 쥐고 저것도 쥐고 둘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옛 술에 새 부대가 섞인다고 보는 사람이고 새 부대에 옛 술이 담길 수 있다고 오인한 사람들이에요. 오인한 사람들입니다. 술은 새 부대가 필요하고 술이고 부대고 새로 갈아치워야 됩니다. -에고, 오늘 강의 참 어렵긴 어려운데-기왕 어려운 거...-
시간이라 하는 것은, 사건과 사건 적어도 두 개의 사건이 있을 때 그 간격을 가지고 시간이라 하는 거예요. ‘당신 나이 몇 살입니까?’ 시간을 물었죠? ‘시간 얼마입니까?’ ‘나는 70입니다’ 태어나는 사건과 지금 내가 숨쉬고 있는 사건 사이의 시간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냐면, 나는 처음이요 나는 나중이고, 그런데 이 시간은 예수님의 시간이죠. 그런데 인간의 시간은 뭡니까. 내가 기억하는 그 순간부터 -보통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하는데 왜 안 되느냐 하며는, 태어난 지 한 살 되었을 때 기억이 안 될 그 시기에
‘어이, 영철아’ ‘누구신지요?’ ‘너 한 살 때 내가 너에게 이런 도움을 주었다’ ‘잉? 나 기억 안 납니다’ ‘에이, 생각해봐’ ‘헐...저는 한 살 때 기억 안 납니다’ ‘너 아플 때 돌봤는데’
이러면 사건이 사건화 되지 않겠지요.
‘영철아, 너 놀이터에서 네 살 때 넘어진 거 알지? 그때 옆에서 너 병원에 보냈...’ ‘아...이야기 하니까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 사람은 영철에게 시간적 의미로 개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어떤 시간을 할 때는, ‘그때 아저씨 만난 게 언제였더라?’ 할 때 ‘그때 애 임신할 때, 그때 그 아저씨...’하잖아요. 시간을 기억할 때는 기억할만한 그 시간에 어떤 사건들이 있어야 돼요. 근데 그 사건이 옆 사람도 동의한 사건입니까? 사건 아닙니까? 아니죠.
자기 임신한 거 온 동네 사람 다 알아야 될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인간의 시간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시간을 논해도 자기 주체 안에서만 시간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주체가 나만이 아는 시간이라고 하지 말고 그걸 확대해버리면 브라질 사람이나 아르헨티나 사람에게는 광주항쟁이 별 의미 없어요. 그런데 전라도 사람에게는 광주항쟁이 중요한 사건이에요.
개인이 아니라, 광주사람 자체가 주체 확대, 눈에 보이는 고정된 ‘광주항쟁’(목사님께서는 광주사태라고 하시지만 녹취자는 끝까지 광주항쟁으로 씀 ㅋ) 그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간증집회 하는 건 뭡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자기에게 의미 있다고 하는 것을 뽑아서 일방적으로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자기중심의 논리를 집어넣어가지고 ‘내가 이런 은혜 받았다’고 할 때 자기 사건도 아닌데 더러 ‘나도 기도해서 그런 사건을...? ’
그런 사건을 유발하는 계기가 뭐냐 하면, 바로 ‘방언’이라는 겁니다. 방언 사건은 딴 게 아니에요. 주체 흉내 내기입니다. 주체 흉내 내기로 큰 공동체적 주체를 만들기 위한 전략입니다. 비스무리하고 상위개념의 공통점을 찾아내서 하나로 묶으려는 거예요. 방언하는 사람 다 모여라, 너희들이 참된 교회다. 성령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뭐가 되겠습니까.
“십자가 복음을 아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라는 공동체와 어떻게 되겠어요. 충돌을 일으키죠. 그러면 그 쪽에서 뭐라 하겠어요. 복음을 아는 것 그건 맞기는 맞는데, 복음을 알려면 성령 받아야 되고, 받았다 안 받았다 를 손에 쥐려면 뭘 해야 한다? 고정된 주체가 ‘울랄랄라 야끼라바끼라사끼라’ (조용기 목사 방언-녹취자) 해야 공동된 주체를 또 주장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 보면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신자도 아니면서 그동안 얼마나 신자인 척 하여 왔는지 성경을 너무 얕봤어요. 너무 얕봐가지고 성급하게 적용하려고 너무 덤벼들었어요. 이발 학원 나와 가지고 자기 아버지에게 실습한다고 머리 쥐어뜯어놓고 ...
빨리 해봅시다. 사건이 있을 때 시간이 있지요. 그러면 시간의 의미 있습니까 없습니까. 의미가 없어요. 이 사건이 이렇게 마감된다. 다른 말로, 이렇게 주어진 언약이 완료된다고 보여줄 때만 사건에 효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사건으로 인하여 시작이고 나중이고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건으로 모두에게 전달되죠. 그런데 인간의 사건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기억나는 사건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자기 역사로 보는 겁니다. 자기 역사로.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이 기간을 AD200년 사람이 해석할 때는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자기 시대에 맞춰서 해석하겠지요. 서기 500년 경우의 해석은 자기에게 맞춰서 해석하겠지요. 어떤 게 맞습니까. 둘 다 틀렸지요. 왜냐, 자기 역사 속의 주체들을 납득을 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납득을.
그러나 이런 역사를 통해서 모두에게 다 정답이 되는 이 해석은 하나밖에 없어요. 어린 양의 그림자다. 예수님 십자가의 그림자다. 이거는 시대가 오천년 뒤에도 마찬가지예요. 십자가 피로서 말미암아 흰 옷을 입고 천국 간다. 이 논점에 대해서는 이의 달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하면 맞기는 맞는데, 사람이 납득하기에 적용이 안 되잖아. 그들이 알아듣는 그들의 역사에 맞춰야 되지 않겠느냐 할 때에, 그걸 왜 맞추느냐 이 말이지요. 손으로 만지고 들어도 그 당시에 안 믿었는데 제대로 믿은 것은 오순절 성령이 와서 믿었어요. 내가 대상을 볼 때는 안 믿었지만, 주님이 우리를 대상으로 볼 때는 믿어지는 거예요. 왜! 주님께서 면도칼로 째고 들어오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하나가 우리에게 반복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왜 납득시키려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구원은 주님의 실패한 게 아니고, 주님은 자기가 구원할 사람을 안에서 구원합니다. 목사가 나선다고, 대모한다고 구원 안 된 사람을 구원시켜주는 게 아니에요. 엄마가 교회 안 간다고 해서, 지옥 간다고 해서, 아쉬워하지 마세요. 그냥 불쌍히 여기면 되지.
십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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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101008요일4장7절b
요한일서 ‘사랑’에 대해서 해봅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Julia Kristeva 1941- ) 라는 세계에서 유명한 여자 철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쓴 <사랑의 역사>라는 게 있습니다. 철학과 문학가운데 나오는 모든 사랑을 분석하는 그 책을 읽고 요약한 건데, 그 사랑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입니다. 그리고 신은 자기가 만들었으면 자기가 만든 것에서 책임을 져야 된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도 그렇지만 중세 때, - 중세라 하면 로마가 둘로 쪼개집니다. 원래 로마는 일찍이 갈리아지방의 민족에게 점령당해요. 그런데 진짜 기독교에, 신학에 푹 빠져가지고 하늘나라를 해보겠다는 것은 원래 로마가 아니고, 망하고 난 뒤에 ‘동로마’라고 따로 만든 나라가 비잔틴이에요. 비잔틴 로마.
거기에서 각종 예술과 기독교 관련 모자이크가 쏟아지기 시작한 거예요. 철학도 거기서 나오고. 330년인가 그쯤 되는데, 망하고 난 뒤에 비잔티움 동로마, 현재의 이스탄불이 수도인데요, 거기에 나왔던 그 신의 사랑이라는 게 근본적으로 뭐냐면, 창조주는 자기 피조물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겁니다. 그게 기본이에요.
왜 그런 걸 했느냐 하면 로마가 망하고 난 뒤의 제국들의 백성들을 다시는 망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로 뭉칠 필요가 있잖아요. 제가 아까 이야기하던 중 빠진 게 있는데 진리를 주체가 지향하게 되면 정치화 되죠. 정치라 하는 것은 ‘힘의 구심점 만들기’예요. 그러니까 대한민국 이런 정치만 생각하지 말고 ‘계모임’을 생각하면 돼요. 그렇지 않으면 ‘가정’ 가정에는 누가 있어야 돼요?
가정에는 가장이라는 힘의 구심점이 있어야 되지요. 가장을 보통 부인들은 뭐라 합니까. 당신은 우리 집안의 기둥이라고 하죠. 기둥에 기스걸리면 기둥 가운데가 부러지죠. 보약 멕이며 당신은 기둥이다, 이렇게 되죠. 이게 뭐냐 하면 정치화되죠. 주체가 하나의 힘으로서 자기의 힘을 주체에게 위탁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원하는 주체화를 당신이 내 대신 달성해 달라,는 겁니다.
아까 비잔틴 신학이 뭐라 했습니까? 비잔틴 신학이 중세철학, 신학이라 했는데, 신학이 철학이고 철학이 신학이에요. 신은 어떤 것이 신이다? 신은 우리를 사랑해 줄 때만 신이 되는 거예요. 영국 국가 제목이 뭐죠? 영국 국가는 ‘여왕이여 영원하소서!’입니다. 왜 우리는 영원하면 안 됩니까? 왜 여왕만 영원해야 되요. 여왕은 무엇을 대표해요? 여왕은 영연방을 대표하죠. 호주부터 해가지고 영국연방을 대표한다 이 말이지요.
이게 뭡니까. 힘의 구심점을 여왕에게 모으는 거예요. 태국의 국무총리가 그렇게 해도 태국 왕이 한번 휙, 하면 조용해지잖아요. 태국 왕 나오는 뮤지컬도 있죠? 영화도 있고... 정치화 되는 겁니다. 이게 중세철학이라 했지요? 그러면 중세철학에서 이게 아니라고 나오는 것을 무슨 운동이라고 했습니까. 이것을 ‘종교개혁’이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을 할 만한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는 그걸 비잔틴 로마교회라고 해요. 비잔틴 로마교회. 로마교회가 이 시대의 천주교라...천주교의 무엇을 봐서 루터가 개혁해야 된다고 합니까. 교회가 뭐가 됐어요? 교회라는 주체는 그리스도 몸이라는 주체가 정치화 되죠. 정치화는 뭘 힘의 구심점으로 피라미드 정치가 되지요.
제일 정점에 누가 있습니까? 교황이 있고, 날 때부터 세례 받으면 모든 백성들이 뭐가 되요. 세례 받았기 때문에 신자가 되요 신자. 이런 나라를 무슨 나라? 하나님나라로 보는 겁니다. 교황 위에는 누가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예수그리스도가 있고, 마리아가 있고,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님과 교회, -눈에 보이는 교회사에- 마리아가 중간 매체로서 힘을 도와줘요. 마리아가 죽은 자들을 통솔하고 있지요. 그것도 정치화 되어서.
마리아가 기도하라 하면 앞에 있는 성인은 전부 기도해야 되요. 왜냐면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거든요. 신의 어머니. 베드로 이거 아닙니다. 마리아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1900년대에 마리아는 성이 없다. 마리아는 아담의 죄가 스며들지 않은 무염이라는, 오염되지 않은 마리아에요. 여인이... 천주교는 결국 여자를 믿는, 천주교는 언약을 모르니까 눈에 보이는 마리아를... 예수님은 가버렸으니까 마리아를 믿는 겁니다.
이렇게 정치화 되는데, 여기서 힘의 구심점이 형성되지요. 그러면 루터가 종교개혁 할 때, 왜 개혁한 거예요. 괜찮잖아요. 모든 백성의 구원화, 그럼 됐지뭐, 안산 시내 전체가 신자다 해봅시다. 그걸 왜 개혁해요. 그거 미친 사람 아닙니까? 안산시민 전체가 날 때부터 신잔데, 그게 하늘나라 맞잖아요. 전도할 것도 없고. 날 때부터 세례 주어버리는데.
그 당시 전부 다 신부를 존경하고, 예를 갖추고. 뭐가 문젠데? 다 누구 좋아라고 하는 겁니까. 이 사람들은. 다 누구 좋아라고? 하나님 좋고 다 예수님 좋으라고 한 건데 루터가 왜 나선 겁니까. <루터가 미친 거 아이가?> 교회가 잘되고 있는데 왜 나와요! 교회가 부흥이 안 되면 나서도 좋아요. 교회가 부흥되는데 나서긴 왜 나서냐 이 말이지요.
-내가 성질나네. - 교황이 뭘 지었냐 하면 성당을 지었어요. 자금이 달리네, 천재들한테는 수공비가 많이 들어갑니다. 그 당시에 성당들을 많이 지어야 될 이유가, 온 백성들이 신자가 되다 보니까, 무엇이 상대적으로 열등을 느끼냐 하면, 신부하고 주교에 대해서 존경하면서도 열등의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같은 인간인데 우리를 지배하고 말야 ”
이렇게 계급이 있는 것이 신의 예정된 뜻이기 때문에, 고해실에서 누구에게 죄를 고백하지요? 신부는 삐딱하게 앉아 있고, 누구에게 갑니까? 고해성사 하면서도 ‘지가 뭔데!’ 하다가 요한복음에 보면 “내가 죄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아, 그렇구나’ 그런데도 기분 나쁜 거예요. 그러면 뭘 해야 됩니까. 신앙심을 높여버리면 성가대장도 해줄 수 있지요. 왜냐면 그 당시에, 이 자체가 힘이기 때문에, 힘이라는 건 ‘돈’이거든요.
교회, 각 영지에 교회 하나씩 있습니다. 거기는 월급을 받게 되어 있어요. 역시 돈이 들어가야 되는데, 월급받기 위해서 그 자리에 가려면 다른 사람보다 신앙심이 돈독할 때 넣어주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글자를 모르니까, 특히 여자들이나 남자들은 라틴어를 모르니까, 신부처럼 공부해서 출세는 못하고, 그 대신 하는 게 뭐냐면 신비주의로 나가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 받으면 되는 거예요. 은혜받기 위해서 어디가야 됩니까? 은혜가 나온다고 소문난 명승지를 가야 됩니다. 명승지를. 요새 절에도 버스를 대절해서 할머니들 명승지, 절마다 가는데 거기 자주 가는 사람은 불교계에서 돋보이게 되고, 그 사람은 결국 그 절에서 중요한 요직을 맡게 되요.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요직이 뭡니까? 재정부잖아요.
재정부장을 만나면 주지 중들도 재정부장의 허락을 받아야 되요. 그래서 어떤 중들은 재정부장을 죽여 버리잖아요. 신문에 났잖아요. 중이 투자를 해서 절을 지어 장사를 하는데 둘이 싸우다가 절을 차지하기 위해서 죽여 버렸어요. 그런 일이 많아요. 옛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스님이 은혜를 받으려면 명승지를 찾아가야 하잖아요.
명승지를 찾아오니까 명승지에 필요한 기념품가게, 화장실 만들고, 하나의 관광레저타운을 형성하겠지요. 거기에 또 자금을 투입하는데, 이 성당을 어느 쪽에서 많이 큰 성당을 짓느냐에 따라서 각처에서 손님들이 대절버스가 많이 오는 거예요. 제가 지금 쉽게 얘기하는 겁니다. 이해되지요?
그러면 기독교의 가장 요지중의 요지가 어디가 됩니까. 베드로의 첫째 교황의 무덤이 있는 곳에 걸맞게, 남이 따라올래야 따라올 수 없는 건축을 해야겠지요. 순례에 반드시 필수코스로 잡기 위해서 바티칸에 거대한 성전을 짓는데, 문제는 그 화려한 대리석, 그 장인들,그 직공들, 기술자들 (목사님 이거 모두 같은 말ㅋ) 임금과 재료값은 어디서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그래서 그 당시에 돈이 없지만, 그 갈리아 지방, 모든 나라에 공문을 보내가지고 각출하라는 서한을 보냅니다. 각출 공문서에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은 사랑을 해주는데, 그 사랑을 지상에서의 축복이 아니고 죽고 난 뒤에 연옥에 가서 빨리 빼주는 사랑을 베풀 수가 있다는 겁니다. 연옥에 가도 인간 안 되는 인간이 있거든요.
일단은 패자부활전에 보내놓고 그 다음에 가족들 중에 돈을 넣어 미사를 열게 합니다. 미사를 열어 뜨거운 탕에서 빨리 빠져나오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리 죄 지어도 빼주고 안 빼주고는 누가 합니까. 후손들이 성당에다 얼마나 빽을 많이 쓰냐에 따라서, 그 점을 노려 면죄부를 만든 겁니다.
그 기본이 뭡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어쨌든 간에 살려주기 위해서 안 믿고 죽은 사람까지 얼마나 사랑했으면, 혼내주는 것을 면해줄 것이라는 그 계산에 의해서 연옥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림퍼스reimburse(변상하다, 상환하다, 갚다)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겁니까. 어쨌든, 믿었든 안 믿었든 간에, 나라 전체가 그렇게 해서 모든 신자 만들면 됐잖아요. 그런데 루터가 왜 나온 겁니까. 루터가 개혁했다 하니까 무조건 루터 편들지 마세요.
루터는 뭘 봤기에 나섰습니까. 루터가 십자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요. 어떤 사람은 친구가 벼락 맞아 죽어서 알았다는 사람도 있는데, 벼락 맞은 사람이 한 두 사람입니까. 그래도 십자가 몰라요. 십자가를 알았는데, 십자가를 안 거하고 깽판 놓는 거, 지금 교회가 다 되어 가는데 그걸 깽판 놓는 거와 연관성이 어떻게 되는가,
숨어있는 것. 어디에 숨어있다? 십자가 뒤에 숨어있는 거예요. 그 전의 비잔틴신학은 뭡니까. 십자가로서 나타낸 하나님이죠. 십자가를 질 정도로 너희를 사랑했다, 그 정도의 신학이었다면 루터는 사랑이 있기는 있는데, 십자가 뒤에 숨어 있기 때문에 이쪽에서 볼 때는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 할 이유가 있잖아요. 죄가 있어야 십자가에 죽을 거 아닙니까.
죄인이 십자가에 죽고 나야 그 다음에 주님의 사랑을 만난다는 거예요. 그 사랑이 뭐냐, 모든 교회가 벌여놓은 일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모든 것을 루터는 뭐라고 하냐면, ‘죄’로 본 거예요. 왜 그랬냐 하면, 교회 역사가 계속해서 사랑, 사랑으로 엮어 온 마지막 결정적인 모습이 바로, 돈 바칠 때, 땡그랑~ 소리가 들리면 아는 사람이 연옥에서 빠져나왔다 하는 설이, 이것이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고,
루터가 공부를 해보니까, 그동안 조금씩 조금씩 보다 많은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보다 많은 사람을 성도화 되게 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인간들이 행세했던 모든 것이 누적되고 축적이 되면 결국은 이런 것 까지 정당화, 합리화 되더라 이 말이지요. 우리는 그것이 죄, 그 죄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죄를.
우리가 지금까지 왔던 이 모든 것은, 어거스틴부터 이후부터 중세이후의 지금까지의 신학은 어거스틴의 사상을 비난한 사도바울과 -루터가 두 사람 이야기 했죠- 어거스틴, 이 두 사람 노선에서 벗어나서 갑자기 여기에 뭐가 가미 되냐 하면 인간의 행함이 가미되었다는 겁니다. 행함이 가미된 그것이 바로 ‘죄’ 그것이 죄인 것을, 헌금해서 구원받겠다는 인식 자체가 ‘죄인 맞습니다’ 라는 인식이 없으면 십자가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 루터였습니다. 그게 루터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루터의 이야기를 오늘날 이야기에 적용시켜 봅시다. 적용시켰다면, 천주교가 주장했던 것이 뭐라했죠? 잊어버렸죠? 천주교 신앙은, ‘하나님은 자기가 지은 피조물을 책임지게 사랑하신다.’ 라는 것이 중세신학이라고 했죠? 그것 때문에 무엇까지 만들었다? ‘연옥’까지 만들었다. 개신교는 연옥까지 만든 건 아니지만, 연옥과 유사한 베드로가 이용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게 뭐냐 하면, 본인이 믿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기도로서 하나님에게 압력을 가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 기도 덕분에 안 믿는 사람도 구원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어요. 그게 무슨 기도입니까? ‘중보기도’지요. 중보기도. 그렇다면 기도 앞에 무엇을 붙입니까. ‘중보’를 붙이면 일반기도 생기고 또 뭐가 생겼습니까. ‘중보기도’가 생겼지요? 그러면 일반기도는 그들이 모르니까 중보기도라 하고, 중보기도의 의식이 뭡니까. 중심사상이 뭡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무조건 사랑해야 된다는 게 되지요. 사랑해야 된다. 사랑해야 된다면-처음에 강의한 것처럼- 사랑해야 된다면 다수의 사람을 하나라고 할 때 구약에서는 다수가 부정당하고 성령께서 예수님께 오잖아요. 어제 얘기한 것처럼. 그런데 중세신학은 그게 아니고 다수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다수가 갖고 있는 공통점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지요. 다수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신은 모든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칼 바르트는 그걸 <존재의 신학>이라고 한 겁니다.
A도 사랑받고 B도 사랑받고, 사랑받을 수 있다,를 끄집어내면 그것이 예수그리스도 부인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소급해버리면 ‘예수님이 떴다’ 이 말은 다른말로 뭐냐면, ‘모든 사람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있는데 오늘날 교회가 뭘 보태주었냐 하면, 주님의 취지를 반영 못했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의 취지를 반영한다면 이 사람이 비록 믿음이 없어서 구원 못 받았으면 여기에다 먼저 믿은 사람이 ‘중보기도’해주면, 마리아처럼 중보기도 해주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갈 수 있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대게 좋아하실 거다, 라는 데서 생긴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그런 사상입니다.
우리는 중세 천주교 신학과 차이점이 뭐여요? 아, 차이점이 있어요. 개신교는 이 사람은 중보기도 때문에 믿음 없는 사람이 믿음이 생기는 것이고 중세철학은 인간들의 공통점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의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신앙에 훼손 되었지만, 형상이란 껍데기는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 껍데기가 뭐냐 하면 유교에서 말하는 동양철학에서는 이걸 ‘인’‘의’라고 하는데 이게 뭐냐면 수보지심酬報之心, 인애지심 하겠지요.
사람은, 개나 소나 강도라 할지라도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 보면 동정심 가질 수도 있고, 악한 자라도 물에 빠지면 건져내고 싶어 하고, 사람들 앞에서 예를 차질 줄 알고, 그리고 부끄러운 일 당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타고난 ‘성품’이라고 했지만 천주교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 흔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 형상이 있으니까 흔적이 있다는 말은 여기서 좋은 말씀, 참된 윤리 이야기하면, 그 사람 앞에서는 틱,틱 하더라도 돌아서서는 뭔가 ‘그래, 내가 잘못했어’ 개과천선할 수 있는 여지를 하나님께서 없애지 않고 남겨두었다는 겁니다.
그런 공통점을 끄집어내가지고 금방 예수 믿게 할 수 있다는 이론이죠. 둘 다 기도사상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자기 인간을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 못해서 환장했다는 말을 들을 사상이죠. 그런데 요한일서에서는 뭐라 합니까.『사랑은 여기 있나니』라고 해서 사랑을 다수에서 찾지 않고 누가 찾습니까.『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했죠?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한 자로 뭐라 합니까. 그걸 ‘죄’라고 하죠.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걸 죄로 보지 않고 뭐라 합니까? 인간의 한계로 봐요. 한계성으로 본다니까요. 인간이니까. 철딱서니 없으니. 여러분 애가 오줌을 누면 ‘크면 쟤가 오줌 가리겠지’ 하지요. 절대 죄라고 보지 않지요? 바로 이 차이입니다. 창세기3장22절에서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치워버렸습니까. 놔두었습니까. 치워버렸죠? 만약에 천주교나 개신교 이론 같으면 전에는 한 그루 있던 생명나무를 온 둘레에다 두어, ‘언젠가는 따먹겠지’ ‘지금은 철이 없으니, 한계니까 나중에 철들면 하겠지‘ 라고 한 거예요.
칸트란 사람도 인정했습니다. 인간은 비록 자기 선을 행할 줄을 모르지만, 무한한 시간을 주고 무한한 자유를 허용해버리면 언젠가는 지나간 과거를 반성해서, ‘그때 내가 철딱서니 없어서 이런 행동을 했어’ 라고 선을 행할 수 있으니까 무한대로 기회를 주라. 무한대로 자유를 주면 언젠가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 희망만이 인류를 진화케 하고 인류를 동물이 아닌 인간다운 모습으로 변화한다. 는 신학이 칸트철학입니다.
니체는 그걸 가지고 산상수훈을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늘나라의 개념과 공통윤리의 개념으로 해석했는데 맞는 얘깁니까? 이 모두는 무얼 주장합니까? 전부다 하나님이 있고, 인간이 있으면 우리를 거쳐서 바로 하고자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십자가 뒤에 감춰뒀다는 건 모르고 루터처럼. 루터는 십자가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인데, 천주교 이런 사람들은 뭐냐, 하나님이 이미 등장했어, 등장하고 인간의 한계가 있으니까 십자가 주어가지고 십자가 보고서 그냥 ‘날 따라와’ 라는 노출된 신을 이야기합니다. 노출된 신.
결국 이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책망할 필요가 없어요. 잘못한 게 있어야 책망하죠. 애가 오줌 못 가린다고 책망하면 안 되잖아요. 책망하지 말고 양육하고 가르쳐야죠. 살살 달래서 가르치면 될 일을 책망합니까.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를 뭐합니까? 책망하죠. 왜 책망한가. 책망의 근거는 바로,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책망할 때, 이렇게 돼야 되는데 실제로 행동 못한 것 차이를 책망하는 게 아니고, ‘너 이렇게 해야 되는 거 알지?’ ‘압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했어’ 식으로 비교해서 책망하는 게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왜 죽였어!>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모르는 게 그점입니다.
착하게 사는데 왜 죄냐. 자기가 아는 착함과, 아는 이론과 실제 사이의 갭a gap 이 있을 때는 독려하고 격려해주면 얼추 따라 붙는다는 거예요. 저는 도저히 못 따라 간다가 기준인데, 우리가 이렇게 돼야 한다는 표준점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주었다는 겁니다. 이미. 소위 너나 할 것 없이,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관계없이 다 주었다는 거예요. 그것도 <새 언약>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죽인 것이 ‘너’라는 입장에서 다시 한 번 너희가 할 수 있는가, 생각해보라. 못하죠. 못하면 못한다 하면 된다, 이 말이죠.
별로 어려운 거 없잖아요.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어디서만 나옵니까. 사랑은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오직 예수님과 누구와 거래해요? 하나님과 예수님이 해서 우리는 뭘로 동원되었습니까. 무엇의 이름으로? ‘죄인’의 이름으로 아까 뜨끈뜨끈한 찜질방에 땔감으로 들어갔어요. 김아무개 박아무개 박온정(허걱, 맞아요 맞아요ㅜㅜ-녹취자)...있어요. 땔감으로 들어가요. 땔감으로... 이근호도 땔감으로 무차별 소급해야 돼요. 소급해야 된다 말이지요. 죄인이니까. 땔감으로 뜨끈뜨끈한 사랑이 피어나는 것은 예수님의 뭡니까. <화목제물>이죠.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니까 심하게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도사님! 땔감의 기능에 공로는 있지 않습니까?’ 나라에서 사형틀을 만들어놨는데 사형집행 당시 죄수가 하는 말이, ‘나도 국가에 공헌했습니다요.’ ‘뭘?’ ‘사형틀을 놀게 하지 않고 사용되도록 내가 죄 지었다는 게 얼마나 큰 공로입니까? 왜 날 무시합니까? 나의 가치도 있잖아요!’ 말도 안 되는 이 말과 똑같은 소리예요.
십자가는 우리의 사형틀이에요. 우리 죄수가 달리는 겁니다. 물론 죄 없는 분이 죄수와 같이 달려서 아버지의 저주 받게 되었고, 이 틀을 우리가 상대한 게 아니에요. 주님이 하나님을 상대했어요. 그걸 뭐라 하냐면 <새 언약 성취>를 주님께서 마련했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신앙생활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하지 마세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약속은 이러합니다’를 증거 하면 끝나는 문제예요 우리는. 목사든 집사든 관계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은 이것입니다,를 증거 하면 되는 거예요. 비웃든지 모독하든지 그건 그쪽 일이고, 우리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고, 주님의 약속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약속을 보여줄 때 우리의 초점은 우리 자신을 떠나서 ‘주체’ 다시 한 번 일곱 번 얘기하지만, 우리의 주체가 눈에 보이는 걸 떠나서 성경말씀에서 오는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바뀔 때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있으면 뭐가 없냐 하면, 두려움이 없지요 두려움이. 왜 두려움이 없냐 하면, 두려워 할 주체에 내가 관심이 없어요.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하면 더 두렵습니다. 마귀는 아는데 사람은 모르는 게 있는데요,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이래요.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두려워하는 것과 두려워하지 않은 상태 둘 다를 우리가 가져야 되겠지요.
둘 사이에 뭐가 흐릅니까. 사건과 사건 사이에 뭐가 흐르지요? 역사가 흐르지요. 그러면 우리는 역사한테 미완료와 완료에 치는 거예요. ‘두려워하지 않아야 되는데 왜 자꾸 두려울까’ ‘나는 안돼 나는 안돼’ 자기 역사에 자기 꾀에 빠져버렸어요. 십자가에 눈 돌릴 때 그 짧은 순간만큼은 두려워할까 말까, 생각이 없어져버려요. 그러니까 두려움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제가 전에 설교시간에 얘기했지만, 두고두고 참 그렇다, 했는데. 사람이 누구를 만나면 그때부터 걱정이 발생합니다. 안 보고 안 만나면 아무 근심이 없는데 추석 때 친척 만나고 난 뒤에 ‘저 조카 공납금 대주어야하는 거 아닌가’ 근심이 오는 거예요. 안 보고 안 만나면 아무일 없어요. 어머니가 넘어져서 금이 가도 아르헨티나, 미국에 있으면 걱정 안 됩니다.
가까이 오니까 수발들 사람 없어가지고 징역살이 하는 것처럼, 안 보고 안 만나면 아무 일이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 합니까. ‘너는 매일같이 주님만 만나라’ ‘너는 너를 만나지 마라’ 말이다.(너는 너를 만나지 마라, 이 표현 너무 멋져요,) 너는 너 자신을 만나서 흔들어대지 마라, ‘너 왜 이 모양이야, 왜 이렇게 사니, 왜 이꼬라지로 사는 거야’ 흔들잖아요. 그런데 어느땐 본인이 안 흔들어도 주위사람들이 많이 흔들어요.
요한일서 4장18절을 한번 봅시다:『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하나님도 참 말씀을 얄밉게 해요. 그냥, ‘너가 사랑이 없으면 두려움이 있느니라’ 하면 좋을 텐데 같은 말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두려움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형벌’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네가 주님을 안 믿으면 그냥 ‘빈 마음’ 되는 것이 아니고, 일곱 귀신 쫓겨나가 ‘빈집인가?’ 하고 찾아 들어온다는 거죠.
우리는 항상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고, 항상 대체된 것들로 콱콱 채워질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라는 거죠. 결국 우리 인간은 영적세계에 놀아나는 <허수아비>같은 존재. 아무나 와서 건드리면 허약하게 말려들어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걱정근심이 계속해서 힘들게 합니다.
사람이 아무도 안 만나면 걱정 없잖아요. 아무나 안 만나보세요. 그러면 옛날 기억이 또 흔듭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격이라 하는 것은 ‘과거 덩어리’를 인격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 인격은 도 닦는다고 되는 게 아니고, 과거의 기억들. 과거에 누구에게 당했다는 아픔. 그 아픔을 고상한 것으로 채울 때에 아픔과 고상함이 한 세트가 되어서 인격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 용서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나타나면 ‘용서해 왔다’는 인고의 세월이 어딘가로 날아가고 ‘잘 만났다 이눔아!’ 하게 되어 있죠. 몇 번 용서해야 된다고요? 490번?
심리학자는 말합니다. 사람의 용서의 한계는 세 번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오죽하면 삼 세 판입니까. ‘가위, 바위,보!’3 사람의 한계는 보통 통계적으로, 용서는 세 번까지는 되지만 네 번까지는 용서가 안 됩니다. 베드로의 일곱 번 하는 것도 베드로 입장에서는 ‘도사급’입니다. 도사를 굴비로 꿰어 일곱 번 해보세요. 그러면 구원받는가...안 됩니다. 우리는 구원이 된다? 안된다? <안 됩니다!>
그러면 이 두려움에 좀 더 봅시다. 마지막 어려운 거니까...그림을 하나 그립니다.-잘 못 그리니 이해해주시고 - 칠판에 말을 그리심- 말이 지금 무엇을 뜯어먹고 있어요. 뭘 뜯어먹고 있는가? -장막도 그리심- 장막 그림에 말이 그려져 있는데, 말의 입술이 움직이면서 장막을 뜯어버리면 장막 없어질 때 뭐도 없어집니까. 말 그림도 없어지고 장막 그림도 없어지겠지요. 이게 바로 우리가 만든 이 세상의 환각입니다. 환각. -어렵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 놀던 골목이 있어요.-골목에 전봇대, 집 그리심- 어릴 때라면 다섯 살이나 여섯 살, 놀던 그 골목에 지금 나이 50넘어서 가보세요. 10/1정도가 축소된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 그때의 전봇대와 집이 작아졌습니까? 아니죠. 누가 컸습니까? 내가 그만큼 세상을 넓게 본 게 되죠.
이런 노래가 있어요.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라는 가사에 보면 ‘저 뒷동산 올라가면 우리집 보일까...’라는 가사가 있죠. 뒷동산 올라가면 지네집 보입니까? 지금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이등병이 생각한 세상의 한계는 뭡니까. 뒷동산이에요 뒷동산. 뒷동산이죠. 만약에 그 사람이 훈련받아 비행사가 됐다면 뒷동산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죠? 지면에서의 뒷동산은 비행기 타고 가서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었어, 언덕에 불과했지.
인간의 지각이라 하는 것, 느끼는 것, 인간의 과거라 하는 것은 과거에 모아놓았던 자기의 경험들이 계속해서 뭘 조성하느냐 하면, 그 안에서의 새로운 세계관을 계속 만들다 보니까 여기서 착각과 오인을 발생되는 겁니다. 그거는 뭐 철학적으로 이야기 않고 성경적으로 얘기 해볼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잡혀 죽는다 했을 때 베드로가 말렸죠. 말린 정도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어느 밤에 예수님이 체포당할 때 ‘말고’라는 사람의 칼을 빼서 그 사람의 귀를 벴잖아요. 왜 그랬습니까. 바로 뒷동산 너머에 뭐가 있다? ‘우리 집이 보일까, 하는 심정이에요. 자기가 지금 예수님 만나서 구축해 놓은 모든 세계관은, 세계관에 의하면 그것이 기반이 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절대로 이대로 죽으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다‘여야죠. 믿습니다. 때려죽여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조치를 어떻게 해요. 그러면 그 믿습니다,라는 말은 그 내용대로 않으면 그 다음에 뭐가 생깁니까. 두려움이 생기죠. 두려움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을 어떻게 하십니까. ‘베드로야, 네 신앙 그거밖에 안 되는 거 보고 내가 너무 과격했구나, 그래, 내가 살살 달래가면서 믿음 줄게’ 이랬습니까?
의도적으로 베드로를 난처하게 만들죠? 그게 뭐냐 절망입니다. 절망...이게 절망이에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절망을 줘요 절망을. 내가 알고 있던 이것을 주님께서 내 뜻에 동조한다? 않는다? 절대로 주님께서는 내 기도에 응답 안 해주고 동조를 안 해주는 거예요. 돌아보면 은혜죠. 돌아보면 은혜지만, 그 시점에서 당황스럽고 난처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이걸 가지고 다수에서 하나로, 하나에서 다수를 기대했는데 이게 아니고 ‘하나의 반복’으로 <낯섬의 반복> 매일같이 낯섬의 반복, 또는 <위기의 연속> 이정도 교인 됐으면 밥 먹고 살겠다 했는데 갑자기 교인들 다 나가버리고, 뭔가 이렇게 안주하지 못하도록 방석을 빼버리고 흔들어버리는, 그래서 세상을 나의 ‘나 중심’의 환상으로 가는 것을 방해하죠. 거기서 없는 두려움이 발생됩니다.
없는 두려움을 왜 발생시키나?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이란 장막을 뜯어가게 되면 우리는 여기 또 새로운 장막을 설치하고 말 그림을 또 그립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일을 하실 때, 기존에 있던 것을 부수고 인간은 그 시점에서 새로운 것을 조작해간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걸 부수면 이 사이에 뭐가 생기냐 하면, 틈이 생겨요. 틈. 이걸 다른 말로 ‘공백’이라고 하죠. 공백. 또는 <어두움> 또는, <예상 못할 여지> ‘아, 이런 경우도 있었나?’ 하는 거.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 뒤에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내 얼굴 모르겠나? 나 그때 예수다’ 이랬습니까? 아니면, 액션(행동)을 보여주었습니까? 무슨 행동입니까. 베드로를 처음 만날 때의 행동을 재현했죠. 하나의 반복이니까. 처음 만날 때 ‘나는 죄인입니다’ 했죠? 그런데 부활 후 만날 때 ‘와~! 예수님이다!’ 했습니다. 그 뒤로 베드로가 한번도 달라진 적이 없어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예수님 만나고 자기 딴에 발전이고 진화인데 주님 보시기엔 이 발걸음이 한 발자국도 A라는 사건에서 B사건으로 넘어간 적이 없어요.
같은 사건의 연속이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게 성립이 안돼요. 없어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고, 인간은 나이 먹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나이 먹어서도 똑 같아요. 똑 같을 왔을 때 처음엔 ‘주님입니다’ 하다가 두 번째는 주체를 넘깁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냐?’ ‘주께서 나의 사랑을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주체를 넘기죠.
뭐냐 하면,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하겠습니다, 않겠습니다, 라는 그것이 바로 내가 오인하고, 내 맘대로 착각했던 ‘죄’였습니다. 그러면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이 뭐냐 하면, 이 사태가 하나님의 협력하여 뜻이 있었겠지, 라고 그 모든 주체를 주 앞에 넘기도록 하는 틈새 사건을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주여, 이만하면 제 실력으로 해보겠습니다.’ 라고 버티다가 그게 안 되게 만들어가지고 ‘주께서 뜻이 있어서 하셨겠지’ 라는, 주께서 넘기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넘기면 누가 주도자가 되냐면 예수님이 주도자가 되고, 우리는 그의 똘마니가 되죠. 주님께서 일으킨 의도적인 사건에 우리는 휘말리게 되는 겁니다. 그걸 소급해서 보자면, 지나간 모든 과거를 소급해 보면, 그 발자국 발자국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다 주의 은혜가 아닌 게 없습니다. 이거 3초갑니다!! 왜 3초가냐면, 이걸 근거로 해서 우리는 새로운 장막을 또 만들어요. 뒷동산 가면 우리 고향 보이겠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에긍, 이제 소원이 하나 있는데, 죽고 싶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리 이야기했죠? 죽고 싶습니다. 죽고 싶습니다’ 해 놓고 뭐라 했죠? 갑자기 차가오니까, ‘어이쿠~! 놀래라~!’ ‘사람 죽일라카나!’ 우리의 몸이 무너지고 있는데 무너져도 계속 ‘죄’ 짓고 있어요. 무너지는 걸 알면 죄를 안 지어야 되는데, 모든 죄라는 말은, 계약은 주님과 했는데 나와 하나님이 계약 당사자인 줄 알고 오인합니다.
왜 내가 잘하면 구원받는다고 여기는 것. 나의 열심 으로 언약이 변경되리라고 여기는 이 착각! 이 죄! 그때마다 주님께서 다시 한 번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서 ‘네가 화목제물 아니고 내가 화목제물이거든?’ 경건치 않은 자, 원수 된 자, 죄인 된 자를 위해서 ‘네가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죽은 게 아니고,’ 내가 십자가 죽어서 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을 해소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유발시키고, 유발시킨 그 자리에서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서, 두려움이 없어지는 걸 통해서, 내가 잘나서 두려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주님과 함께 ‘사랑의 자리’에 있기에 그 뜨끈뜨끈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지워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아 온전히 주님께만 공로를 돌리는데 이것이 성경적인 목적입니다.
그래서 설교하실 때 어떻게 하냐면, 둘 다를 이야기 합니다. 이 내용을 다 이야기해서 그냥 명령만 해버리면, 지켜서 두려움을 없애려하는 옛날 하는 행세를 또 하는, 되풀이하게 됩니다. 그게 아니라고 하실 때에 성도는 믿는 분을 다시 한 번 더욱 더 믿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8절 끝에,『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은 무엇을 유발시킵니까? ‘형벌, 저주’죠.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지옥 가는 사람 둘 째 유황불에 빠진 사람 항목 중에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두려워하는 자>라고 했어요. 두려워하는 자. 그래서 성경 보는 분들이나 교인들이나 목사도 마찬가지, 상당히 난처한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히브리서 끝에 보면,11장인가 보면, ‘두려움 가운데’ ‘경외함과 두려움 가운데’ ‘떨림 가운데’ 하늘과 땅도 떠는데 왜 너는 안 떨어? 하늘에서도 떠는데 땅에 있으면서 땅이 떨면 너도 같이 떨어야지, 너는 왜 안 떨어! 두려움 가운데 해라. 모세가 율법 받을 때도 떨었는데, 새 언약 받을 때 이것은, 산이고 강이고 다 날아가 버린다. 두려움 가운데 경외하란 말도 성경에 여러 곳 나오고, 여기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는 말은 논리가 맞지 않느냐, 그런 논제가 많지요?
그래서 성경해석에, 요령 가르쳐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인간이 말씀을 대할 때, 반드시 중간을 거쳐서 들어야 돼요. 우리 인간이 구약 구절을 설교할 때는 구역 성경을 어디로 보내냐 하면, 옛 언약으로 보내주고 새 언약이라는 에드벌룬을 띄웁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약 언약을 해석하는 게 아니고, 옛 언약은 누구 쪽에서 해석해야 돼요? 새 언약 쪽에서 주님이 한 것을 우리가 증거하는 입장이 바로 성경해석입니다.
언약을 뽑아내서 언약을 보내버리고, 언약을 우리가 처리하면 안 됩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받으면 안돼요. 예수님이 새 언약으로 극복되도록 그렇게 조처해야 되고, 그 다음에 그 혜택을 성령을 통해서 입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두려워한다는 게 어떤 경우냐 하면, 옛 언약 노선을 성급하게 우리가 개입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이걸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미 보여진 일에 대해서 경외하라. ‘아, 우리가 못하는 거구나’ 라고 경외하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아직 이 노선에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구약에서 해석 끝내고 새 언약..(..)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 이럴 때는 저주가 주어진다고요. 그래서 한쪽 두려움은 언약 안에서의 경외고 또 한쪽 두려움은 언약 들어가지도 않고 버티는 거. ‘구 언약, 새 언약이 뭐야, 요새 시대에..’ ‘내 행위가 최고지’ ‘주님이 하신 게 뭐에요.’할 때는 그것이 바로 형벌로 주어진다, 그런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죄의 주인으로 개입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닌 것을, 왜 자꾸 잊어버리는지, 마귀가 와서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얼마나 독촉하는지 저희들, 우리 몸을 새 언약에 집어넣어서 주께서 이루어내신 그 놀라운 일에 우리로 감탄하게 하시고, 경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10-12 21:54:07 녹취 : 박온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