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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4강 / 요한일서5장10절 / 아들과 생명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1서

14강 / 요한일서5장10절 / 아들과 생명

정인순 2011. 1. 1. 11:29

101210 아들과 생명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안산/ansan101210a.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안산/ansan101210b.MP3

 

 

안산101210요한일서5장10절a

아들과 생명 / 이근호 목사

요한일서5장10절

『요일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이렇게 돼있죠? 11절에『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 것이니라』 이렇게 돼있죠? 증거라 하는 것은, ‘증거답다’ ‘이건 증거 될 만해’ 라는 결정을 보통 누가 내리죠?

우리 사람이 내리잖아요. 사람이 내리기 때문에 증거, 이것은 진리에 대한 증거라고 수용을 하느냐 마느냐는 것은 사람들이 납득되는 증거가 돼야 될 텐데 사람들은 생명이라는 것을 우선 원하지를 않습니다. 생명에 관심이 없어요. 왜냐면 이미 자기 자신의 목숨이 생명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 목숨 말고 따로 생명을 얻겠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 목숨은 죽어 마땅하다’는 그런 경험밖에 안 되거든요.

‘나는 죽어 마땅해!’ ‘나는 살 필요 없어’ 어? 생명이네! 이렇게 될 때 생명에 관심이 있지 ‘나는 더 살아야 되겠어,’ ‘ 내 목숨 아까워 미치겠어,’ 자기가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입장에서 새롭게 추가된 생명을 줘버리면 내 목숨이냐 생명이냐 둘 사이에 갈등과 대결이 생기게 되요 대결이. 어느 것이 더 소중하고 어느 것이 더 우선이냐 하는 그런 문제가 발생되지 않겠습니까? 발생되지요.

어떤 아이가 있는데 아이가 나중에 커서보니까 엄마가 둘이라, “얘야, 내가 엄마다” “아니야, 내가 엄마다” 아이로서는 상당히 당황스럽잖아요. 그런데 새로운 엄마가 “내가 네 엄마인 증거를 보여줄게” 라고 하면 아이가 뭐라 하겠습니까? “증거를 보여주세요” 합니까 아니면 “증거고 뭐고 이런 일 자체가 나는 귀찮다” 이렇게 나오지 “증거를 보여주세요” 하지는 않는다 말이죠. 왜? 누가 엄마가 됐든 자기는 이미 컸기 때문에, 자시 스스로 살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네 엄마다, 과거 네 엄마다’ 라는 자체도 골치 아파요.

두 분 다 알아서 사시고 나는 나대로 산다, 라고 나온다면 그쪽에서 제시한 증거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쪽에서 제시한 증거가 이쪽에서는 증거 값을 받지를 못하겠죠. 전에 증거로서 행세를 못하게 된다 이 말이죠. 12절에 보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생명이 없다고 했는데 생명이 없는 걸 가지고 두 자로 ‘죽음’이라고 하죠?

아들이 없는 자는 살아도 죽은 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강의가 시작됩니다. 요한일서를 포함해서 모든 성경은 「너는 죽은 자다」부터 시작을 해야 생명의 증거가 증거 값을 하는 겁니다. 모든 사람으로 너는 죽은 자라는 거예요. ‘죽은 자다’라는 것이 달리 이야기하면, 예를 들어서 ‘너는 짐승이다’ 같은 말입니다. ‘죽은 자는 짐승이다’라는 말은 뭐냐면 ‘네가 생각하는 인간은 아니다’ ‘너는 있으나마나한 존재다’ 이 말입니다.

   기차를 다고 가는데 옆자리에 어떤 아저씨가 앉았다. “아저씨는 짐승이십니까?” 이러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그 아저씨가 같이 가는데 “귤 하나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저씨 짐승이거든요?” 이러면 대화가 됩니까? 소위, 소통이 되겠어요? 결혼식 하는데 “자, 남성 짐승 들어오세요.” “여성 짐승 들어오세요.” 하면 결혼식이 엉망진창 된다 말이죠.

   우리는 일단 상대방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대우를 해주면서 생명을 주고 하나님을 알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는 시도를 하는데 그 방법은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이 아니다 이 말이올시다. 그 방법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은 ‘죽은 자’ 다른 말로 ‘짐승’ 또는 ‘벌레’ 점잖게 얘기하면 ‘안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데 ‘안개’의 특징을 한번 봅시다. 안개의 특징은 멀리서도 안개가 끼었잖아요.

 그런데 막상 안개 속에 들어가서 안개를 쥐어보면 안개가 손에 안 잡히잖아요. 멀리서 보면 저기 안개가, 황사도 마찬가지에요. 황사가 멀리서 볼 때는 뿌연 구름덩어리가 밀려온 것 같은데 막상 황사 안에 들어가면 ‘뭐, 견딜만하네’ ‘날씨가 뿌옇네’ 이러지, 날씨가 뿌연 황사 안에 어떤 사람이 들어있을 때 그 사람은 견딜만하고 날씨가 뿌옇다지만 저 멀리 있는 사람이 보면 “에구, 저 사람은 황사 안에 갇혀 있다” 이렇게 본다 말이지요.

   지금 우리는 이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아침에 밥 먹고 좋은 일 하고, 살만하면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파트 장만하고, 굉장히 살만해요. 살만한데, 멀리서 보면 이것은 죽음과 죄와 저주의 심판에 갇혀 있는 꼴이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 이 황사 같은 이 어두운 세계, 하나님의 저주 아래 갇혀 있는 세계, 완전히 이거는 심각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세상을 오아시스화 시키고  살만한 세계로 바꾸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죄수의 길은 왜 있습니까. ‘오아시스’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차타고 자기 마음대로 가기 위해서 주유소에서 기름 넣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남들 부럽지 않게 남들처럼, 남들만큼 밑지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런데 멀리서 보면 자기는 우리를 오아시스로 보고 이거는 낙원이라고 보지만 우리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 전체가 생명이 없느니라, ‘생명이 없다’ 이러는 겁니다. 이런 경우가 구약에도 나오지요? 구약의 ‘니느웨 성’이라고 나오죠? 앗수르의 니느웨 성. 니느웨성에 요나 선지자가 오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그들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어요?

   ‘최선을 다해 노력한 만큼 살만한 고장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살만한 곳이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 자유의지를 구가하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음악과 예술과 미술과 춤과 노래를 부르고. 그 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형제 우애 있고. 동서 간에 친하게 지내고. 아기 낳으면 엄마가 모성애를 발휘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들은 늙은 부모를 효도하면서 ‘세상살이 이만하면 됐지 뭐가 더 부러워?’ 라고 했을 것이다 이 말이지요. 니느웨성이.…

   그런데 여기에 고래타고 오징어타고 배타고 물 건너서 누가 왔습니까? 요나가 오니까 외부인이 바깥의 일어난 사실을 소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도 자기 나름대로 공부를 한 사람이라서 나는 이 니느웨성에서 이방인이고 객이고 타인이고 외국 사람이고 자기는 니느웨성 나름대로 주관이 있고 줏대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낯선 한 사람, 그것도 휘황찬란하게 온 게 아니고 초라한 행색으로 왔을 때, ‘요나가 하는 일’을 니느웨 사람들이 귀담아 듣는다는 것은 요나조차도 전혀 예상을 못했지요.

   하지만 요나가 니느웨성에 회개하러 간 게 아니고, 요나는 그냥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40일 지나면 심판 받는다는 그 소식을 어쩔 수 없이 전할 뿐이에요. 전할 뿐이다 말이죠. ‘한 영혼 살려야지’ ‘복음에 빚진 자’ 이런 거 없어요! 그건 사도바울이나 그런 소리하지. 요나는 그런 거 없다니까요. 그냥. 40일 지나고 39일 38… 에구 빨리 끝내버려라! 이렇게 심판도 모르는 너희들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심판 받아!

   자기는 언덕에 있었어요. 심판 날을 기다린 겁니다. 언덕에 올라가서 니느웨성 멸망을 기다린 겁니다. 요나가 기다린 것은 하나님 말씀을 자기는 분명 신뢰하지만. 그 말씀이 확실하게 증거로 나타나야 되잖아요. 그러면 자기는, ‘야! 선지자 맞구나!’ ‘내가 전한 것이 먹히는구나! 내 말이 아니고 정확하게 하나님 말 맞구나!’ 라고 자기 증거로 삼고 싶었는데 어? 삼일 만에 전할 내용을 하루 만에 해치워버리고, 하여튼 성질도 급했어. 누구(?)닮았어. 후다닥 숙제 해치워버리고 자기는 떡 하니 올라가니까 요나가 이야기한 이것이 이 안에서 회자라는 말이죠. 그 말이 돌기 시작한 거예요.

   여기서 성경에서 어려운 대목이 뭐냐 하면, 출애굽 할 때, 출애굽해서 아말렉 만날 때 그때 누가 아말렉을 승리케 했습니까? 여호수아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모세가 든 지팡이가 있어서 승리했죠? 그 다음에 광야에서 헤맬 때, 모압 때 발람선지자를 고용했던 발락 왕이 저주할 때 그 저주를 누가 막았습니까? 발람 선지자가 저주할 때 하나님께서 발람선지자 입을 지배하니까 발람이 저주를 해야 될 걸 축복했지요? 그 때 민수기3장에 「이스라엘에 이스라엘 사람만 있는 줄 알았더니만 이스라엘 내에 보이지 않은 어떤 왕이 있어서 저주와 축복이 바뀌었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승리하죠.

   그리고 사시기에 보면, 여리고성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마지막엔 일곱 바퀴 돌라고 하니까 성이 무너졌지요? 그래서 여리고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면 다윗 때는, 암몬과 전쟁할 때 그때는 무기가 뭐였지요? 칼 들고 싸웠겠지요? 그때 다윗의 기도에 의해서 요압장군이 승리케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사기에는 횃불과(기드온) 항아리 들고 자기들끼리 했다 이 말이죠. 제가 왜 출애굽부터 사사기의 이런 얘기를 하느냐면, 이 공격의 무기가 먼저 이스라엘이 공격했을 때 이스라엘의 결국의 무기가 뭐였냐 하면, 제가 아는 이야기는, 공격무기는 결국은 ‘언약’이었다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돌멩이로 이겼잖아, 라고 하는데 그건 다윗에게 물어보세요. 다윗은 공격무기는 그렇게 하나님이 ‘할례 받은 자는 할례 받지 못한 자를 이긴다,’ 는 언약에 의해서 무너지게 돼있다 했습니다. 여리고성을 돌 때 열일곱 바퀴 돌아야 되는데 열여섯 바퀴 돌면 무너집니까? 안 무너집니까? 때가 되면 무너진 게 아니에요. 여섯 바퀴 무너지면 절 때 안 무너지는데 일곱 바퀴 돌아야 무너지고 여덟 바퀴 돌면 어찌 됩니까? 역시 안 무너지겠죠.

   일곱 바퀴 돌고 나팔 불었다, 이 말이죠. 이건 뭐냐면 하나님의 전쟁에서 첫 째 약속(언약)인데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승리다, 는 건 빤하지만 그 승리의 참여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약속을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점령군 자기들도 확실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지켜줘야 되는 겁니다. 준수를 해줘야 되요. 반드시 그렇게 해줘야 됩니다. 반드시 지켜줘야 되는데, 만약에 이걸 안 지키게 되면 누가 누구의 적입니까. 승리는 여호와께서 하셔요.

   하지만 그 승리에 누가 참여 못합니까? 이스라엘 본인이 참석 못한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여리고성 무너질 때 아각 같은 사람은 여리고성 가서 돌에 맞아버렸잖아요. 그리고 사사기 기드온 전쟁할 때 에브라임 사람들은 뭐라 합니까. 기드온 전쟁에 왜 우리를 참여 안 시켜주었냐 할 때, 그게 바로 기드온이 받은 약속들은, 기드온이 승리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드온이 믿은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초점을 어디를 봅니까. 기드온이 했다고 보는 거예요. 이거 참 중요하고 어려운 이야깁니다.

   제가 지금 본문을 가지고 그걸 설명하려고해요. 우리는 봉사나 헌금이나 실적을 구해요. 실적을.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걸 생각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힘을 주셔서 내가 앞장서서 일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힘을 줬든 어쨌든 내가 했기 때문에 내가 납득이 되고 내가 증거를 삼을만한 실적을 찾고자 하는 거예요. 백이면 백 다 그거는 엉터리입니다. 다 엉터리예요. 내가 원하는 증거물을 하나님이 주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기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이기지 않았는데 왜 내가 원하는 증거물을 줘야 됩니까. 예를 들어서 이렇습니다. 내가 전도지를 가지고 어떤 사람을 노리고 백 미터 따라가서 전도지를 줬는데 그 사람이 휙 던져버렸어요. 그러면 삐져가지고 ‘하나님이 오늘도 날 쓰시지 않는다. 나 삐졌다, 전도 안 해!’ 하고 집으로 가려하는데 던진 전도지가 바람에 날려서 엉뚱한 사람이 그것을 줍고 만약에 예수 믿었다고 합시다. 그럴 때 그 바람의 각도 바람의 세기를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하셨죠.

   그러면 실컷 일은 우리보고 시키고 모든 업적과 공로와 성과는 누구한테 돌아오고? 하나님께만 돌아가고. 그게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그게 하나님 방식이라고요. 그런데 그 가운데 우리는 항상 삐짐. 삐짐이 되죠. 삐짐이가 되고 찌질이도 되고 항상 우리는 삐져버리고. 내가 원하는 결과와 당사자인 내게 주지 않고 나를 왜 비켜 가느냐는 거죠. 나는 그게 보고 싶은데. 그것만 보여주면 더 용기내가지고 세 배 네 배 전도할 건데… 절대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법이 없어요.

   요한복음 6장에 나오죠? 「내가 아버지께서 보낸 자를 반드시 마지막 날에 살리는 이것이니라 」했거든요. 반드시 주께서 살리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일할 때 반드시 우리는 삐질이가 되도록 만들어서 주께서 일을 시키는 겁니다. 항상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머리가 좋든지 요령이 있어가지고 아예, 일을 안 하잖아요. 해봐야 뭐, 또 삐질 건데.

   주께서 일을 시키는 것은 우리가 내 힘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점이 증거가 되게 해요. 참, 이게 얼마나 어려운가 몰라요. 내가 전도했던 것이 증거가 아니라, 내가 전도하겠다고 나서다가 주께서 나를 밀치고 ‘주님께서 손수 하셨다,’ 라는 것을 나와 세트를 이루는, 내가 증거를 원했던 이 철딱서니 없는 것을 세트로 삼아서, 그게 합쳐서 증거가 되는 거예요. 삐지고 찌질이 되는 그것이 있어줘야, 세트로 있어줘야 하나님의 증거가 된다 이 말입니다.

   기드온은 말하기를 나보고 왕이라 하지만 ‘내가 한 거 없다.’ 하죠.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하게끔, 증거가 되게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뭐라합니까, ‘에이, 왜 또 겸손해? 겸손한 티를 내십니까,’ 하고 나온다 이 말이죠. ‘겸손이 아니고 실제로 내가 한 게 아니다,‘ 그래서 무슨 차이가 납니까? 기드온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하고 그 당시에 구원의 혜택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이 했다고 얘기하고, 바로 이 차이에서 기드온은 이스라엘 사람 전체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에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게 증인이 되는 거예요.

   ‘나는 내가 한 적 없습니다. 내가 안 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하나님 일에 의심했습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증인되게 하신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항상 ‘내가 나셨으니까 일이 되더라,’는 그런 증거를 얻고자 하니 증거가 만 날 싸우는 거예요. ‘내가 폼 나게, 내가 심사숙고한 것이 제대로 어떤 결과가 도출될 때 다음에 또 어떤 일을 하고 싶은, 보람이나 희망을 갖고 싶은, 증거를 갖고 싶은 거예요. 증거. 엉터리 증거예요. 그건 잘못된 증거예요. 까불다가 와장창 깨지는 그것이 진짜 증거가 되는 겁니다.

   요한일서 5장10절,11,12절, 하고 있는데 본문에서 얘기하는 것은, 그 증거가 하나님의 아들로 보여주었다, ‘증거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한다 이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증거는 우리 인간들이 증거로의 채택이 채택할 수 없는 증거로 주신다 이 말이죠. 우리는 그것이 증거다우냐,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가 맞다 안 맞다,의 결정을 건방지게 우리가  나서서 증거를 채택 하니 마니, 우리가 결정하려고 하다 보니까 정작 하나님이 주신 증거를 증거답지 못하다고 내팽개칠 수밖에 없는 증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한 겁니다.

   ‘예수님이 증거입니다’ 라고 얘기하잖아요. 요한일서 5장10절에. 그죠? 그런데 우리는 뭐라합니까. “예수 믿으면 뭐 줄랍니까?” 라고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 자체가 이미 증거라고 하는데 우리는 내가, 예수 믿는 내가 증거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이런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하나님은 예수님이 증거인데 우리는 그 예수를 믿는 내가 내 구원의 증거가 되고자 붙들고 있다 이 말이죠.

   오늘도 십자가마을에 글 하나 썼지요? 읽어보셨습니까? ‘주의 일’ 나의 일이 주의 일이 되고, 주의 일이 곧장 뭘로 바뀝니까? 나의 일로 바뀌는 거예요. 주님의 일을 믿어야 될 건데 주님의 일을 믿는 나를 믿게 돼버리면 이거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가 될 수 없어요. 그냥, 여기 요한일서5장10절 말씀, 예수님이라는 아들, 아들이 하나님의 증거인데 그 아들 믿는 ‘나’가 증거가 돼버리면 이 증거에서 탈락이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를 지금 성경가지고 계속 설명해 왔었어요. 설명 다시 해봅시다.

   니느웨 성에 요나가 올 때, 요나는 이방인이고 니느웨는 나름대로의 인생 체계가 따로 있다 했지요? 그런데 요나가 생각했습니다. 뭘 염두에 뒀냐면 니느웨 사람들 입장을 충분히 고려했지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전해봤자(복음을) 이 사람들은 회개할 가능성 있다? 없다? 전혀 없어요! 왜? 이 사람들 나름대로 재밌게 살고 있는데 너희는 40일 전에 멸망한다는 말이 설득력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증거가 되느냐 말이죠. 증거가 안 되지요.

   그런데 이 증거는요, 하나님이, 예언하라 그들에게 멸망할 거라는 이 증거는 심지어 요나는 생각하기를, 자기는 이 내용을 안다고 생각한 겁니다. 요나 자신이 이 말씀의 증거라고 다짐을 하고 들어갔지요. 하나님이 날 보냈다는 증거라는 입장을 충분히 인지하고 들어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거는 요나 이야기고, 요나 3장 들어 갈 때 이야기지만, 나중에 요나 4장 끝나고 보니까 요나 본인조차도 뭘 몰랐어요? 주님이 진짜로 이 말씀을 주신 이유를 충분히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본인도 몰랐어요.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요나가 ‘나는 주의 말씀을 받았다,’ 40일 뒤에 니느웨 멸망한다고 전해라, 니느웨 입장에서 하나님의 증거가 된다고 자기는 자신만만했지요. 자신만만했으니까 3일 전할 것을 하루 전하고 자기는 언덕위에 올라가서 ‘과연 멸망하는가?’ 지켜봤다 했지요? 그만큼 자신감에서 ‘내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증인’이라고 자신감 있었는데, 이때까지는 기분 좋았죠. 그런데 니느웨성이 멸망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멸망 안 해버리니까 누가 잘못된 거예요?

   요나 본인이 자기는 주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장담했던 그 장담이 파토난 겁니다. 이거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멸망당하라는 그 증인은 요나가 갈 때는 요나 본인이 증인이고 니느웨는 당하기만 해야 할 도시지만 하나님께서 일을 끝내고 보니까 누가 누구의 증인? 회개하는 니느웨성 사람이 누구를 지적해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요나 선지자를 도리어 잘못 됐다고 지적하는 도구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겁니다.

   우리가 전도한다고 하다가 도리어 그 사람(불신자) 이야기 듣고 도리어 은혜 받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주께서 우리를 전도케 하신 이유가 전도할 때 내가 저 사람의 증인이라고 여겼는데 전도해보니까 증인은 오직 아들만 증인이고 그 외 모든 인간은 아들의 증인 되기 위해서 모두 그 자리에 배정받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신자든 불신자든 악마든 심지어 마귀까지 아들을 증거 하기 위한, 고정된 자기 자리를 그냥 고수하고 있고 유지하고 있는 그런 구조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이제 지금까지 한 것은 서론이고. 오늘 본문에 ‘생명과 아들’이라는 말 나오는데 천국이라는 용어가 성경에 있지요? 그러면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천국이란 용어를 예수님이 쓰실 때와 우리가 쓸 때가 같겠습니까? 틀리죠! 이걸 염두에 둬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뭡니까, ‘죽은 자’로 봤지요? ‘생명이 없느니라.’ 다른 말로 하면 ‘짐승’ 또는 ‘벌레’라고 했지요? 이 전체를 합해서 우리를 뭐로 보냐면 이미 ‘죄인’이라고 시작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0절-12절 보면 「너는 첨부터 죄인이야 」라고 시작할 때 ‘ 저 죄인 아닙니다, 어서 진리를 알려주세요.’ 라고 한다면 아무리 진리 알러줘도 그것은 죄인이기 때문에 왜곡된 이해가 팍팍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처지가 인간 처지다 말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은 ‘너는 짐승이야’ ‘너는 죄인이야’ 했을 때 예를 들어서 땅이 15만평 있고, 현찰이 50억 있고, 빌딩이 네 채 있고, 직장 든든하고, 저택이 150평 되는 이런 사람보고 ‘당신은 빌어먹어도 마땅한 사람이다.’ 라고 얘기하면 그 사람이 뭐라 합니까? ‘맞습니다, 맞습니다.’ 하고 받아들여요. 왜냐 하면, 백날 그 소리 들어도 이 재산엔 변동 없기 때문에. 재산과 능력을 가졌고 거기에다 ‘그래 나는 빌어먹어 마땅해’ 라는 아주 겸손한 복음적인 것까지 커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것이 2008년도 7월17일 오후 2시라고 봅시다. 이때 많은 재산 갖고 있을 때 ‘당신은 빌어먹어야 돼’ ‘맞습니다,’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 힘든 거 알지?‘ ’맞습니다‘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보다 어렵습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 맞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나왔을 때 2009년 6월인가? 아침7시에 다 빌어먹었어요. 진짜 빌어먹었어요. 진짜 빌어먹고 난 뒤에 똑 같은 얘기를 했어요. ’당신은 빌어먹어야 돼,‘ 하면 어떻게 합니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을 때 ’당신은 빌어먹어야 돼, 당신은 죄인이야‘ 할 때 우리는 수용이 됩니다. 왜? 챙길 것은 이미 챙겼기 때문에 여유만만하게 한다고요.

   어지간히 살만하니까 ‘ 아, 나 죄인 맞습니다, 내 모든 게 죕니다.’ 하는데 진짜 왕창 망해갖고 지금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릴까 하고 있는데 ‘당신 죄인입니다’ 하면요 ‘에이, 이왕 죽는 거 너하고 같이 죽자,’ 하고는 화내면서 왈칵 달려들어요. 이렇게 재산 있고 여유 있는데 ‘너는 짐승이다’ 하면 ‘나 짐승입니다, 가슴에 털 많습니다.’ 이렇게 나오지만 만약에 다 빌어먹었는데 ‘당신 짐승이야’ 하면 그때는 진짜 짐승 돼버립니다. ‘에라이, 그래, 나 짐승이다 나한테 뜯어 먹혀 볼래?’

   인간이 이렇게 정리 정돈하는 증거라는 것은 이거는 진짜 순수하게 예수님이 생각하는 개념을 하지 못하고 자기 유리한 쪽으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 시키고 의롭게 만드는 그런 입장에서 자꾸 그 개념을 수용하다 보니까 나는 죄인이라고 수용하면서 사실은 남들이 모르는 그 사실, <나는 죄인인 걸 알았기 때문에 항상 의인일 수밖에 없어!> 라는 최종적 의인을 따로 숨겨놓고 있다 이 말이죠. 이거는. 그렇게 돼있어요.

   그러니 사람이 생각하는 개념 자체가 ‘천국’이란 개념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이 생각할 때와 인간이 생각할 때는 이건 완전히 다른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강의한 것처럼 이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개념이든 우리로 하여금 뭘 만들게 하느냐 하면, 모든 성경에 나온 개념을 예수님이 사용하실 때는 ‘천국’을 이야기하는 것이 천국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에게 천국 얘기를 해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진짜 너는 죄인 맞아’ 라는 걸 드러내는 수동으로서 모든 용어들을 우리에게 퍼부어주는 겁니다. ‘증거’라는 것 ‘형제’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이 용어가, 예수님이 썼던 이 용어가 일단 인간에게 와 버리면 ‘그래서 인간은 죄인일 수밖에 없는 걸 들통 나게 하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모든 개념들이 주어진 겁니다. 그 해석이 우리에게 나왔을 때 이걸 통해서 ‘아, 우리가 죄인 맞구나!’ 하는 것을 노출되는, 들켜버리는, 들통나는 그런 개념들로 이 성경 용어들이 사용돼야 됩니다.

   요한일서 5장 봅시다. 5장10절『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라고 돼있죠? 여러분들 이해하기 어렵지만 더 이상 쉽게 하는 것도 제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냥 어렵게 나가겠습니다.

   진짜로 하나님의 성도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요소가 그 사람 속에서 나와 줄 때 이 요한일서 5장10절이 바로 자기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 확증이 되고, 그럴 때 그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자] 안에 본인이 빠질까요? 들어갈까요? 들어가 있음을 본인이 느껴져야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고 말씀 중심이다,’ 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자기가 죄인이 아니고 잘난 체 하는 사람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을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자기 안에 있고 = ‘딱 내 이야기네 맞아 나는 하나님 믿어’ 그 다음 말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 = ‘이거는 나와 해당사항이 없어, 이거는 나 말고 옆 사람이야,’ 라고 해본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 말씀이 반 토막 나있어요. 반 토막.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그 요소는 자기가 해당이 안 된다고 우기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뭘 체험 못하냐 하면, 어째서 인간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본인은 그 체험에서 탈락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구나, 왜? 나는 하나님 잘 믿으니까’ 이래 된다 말이죠.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것으로 만드는가, 그 논리적인 구조를 본인이 끄집어낼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왜? 이건 나하고 해당사항 없으니까.

   더 간단하게 해서, ‘예수 믿지 않는 자는 저주 받는다’라고 하니까 진짜 성도는 그 저주를 알아야 될 텐데 ‘나는 애초부터 믿기 때문에 나는 저주는 안 받아도 돼,’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저주가 뭔지도 모르면서 축복을 논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이게 만약 약이라면 약사가 하는 말, “고객님 이 약 참 잘 듣습니다,” 그러면 고객이 하는 말이, “그래 약사님, 그 약 먹어 봤어요?” 지금 찾아온 고객만큼 아팠던 의사였다면 어쩌겠습니까? “나도 선생님처럼 아팠는데 이 약 먹고 몸 나았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약사님 그거 먹어봤습니까?” 하면 “내가 미쳤습니까? 내가 이걸 왜 먹어요. 아픈 적도 없었는데” “아픈 적도 없는데 이 약 먹으면 낫는 거 어떻게 압니까?” 다른 사람이 ‘~ 카더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합디다. 하는 거예요.

   그것은, 약이라는 것이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요한일서 5장 9절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누구에 대해서?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에 관해서가 아니라 누구에 관해서? ‘아들에 관해서’ 했다 말이죠. 그러면 아들을 진짜로 믿는 사람은 아들을 믿지 않을 때 뭐가 된다? 아들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경우를 본인이 체험해야 됩니까? 않아야 됩니까? 해야 되는 거예요!

   제가 죄송스럽습니다만, 쉽게 얘기해봅시다. 에베소서 2장 찾아보세요.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지배를 받았다고 돼 있죠? 그게 3절 끝에 보면 뭡니까, ‘본질상’ 무슨 자녀라 했습니까? ‘진노의 자녀’잖아요. 에베소서 2장8절에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면 받은 사람은 뭘 안다? 진노의 자녀라는 것을 아주 무릎을 치면서 동의를 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진노의 자녀 아닌 자가 뭘 알아요! 무슨 믿음을 알고 복음을 알고 예수 믿습니까! ‘진노이 자녀’인 것을 알아야 될 텐데.

   그런데 사람들은 버릇이 뭐냐 하면, 진노의 자녀라는 자기는 그런 기억은 없다는 거예요. 자기는 착실해서. 진노의 자녀였는데 그 다음에 4절, 5절에 보면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께서 진노의 자녀에서 진노의 자녀가 아닌 상태로 돌이키기 위해서 주입된 힘들이 뭐예요. 처음에 ‘긍휼’이 되죠. 긍휼. 긍휼을 우리 쉬운 말로 하면 ‘불쌍히 여기심’이에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면 사장은 직원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대가로 그만큼 월급 올려주면 되잖아요. 그런데 일하라고 선반에 몇 억 기계 매달아놓으니까 일 하나도 못해, 일 하나도 못하는데 불쌍히 여겨서 월급 줬다면 그 월급 어떻게 됩니까? 불쌍히 여겨서 사장님이 그 행한 것과 상관없이 그 사람이 얼마나 겸손 하냐, 착했냐 상관없이 그냥 불쌍히 여겨서 월급 준 거죠. 그 사람이 바람보다 생산량을 많이 해서 준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뭘 받게 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던 하나님의 직원에서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아무리 애써도 진노의 자녀에서 못 벗어나면 누가 동의해요? 누가 인정해야 되요? 본인이 인정해야죠. Do you understand? -오랜만에 영어 쓴다.- 아시겠지요? 아무리 강요하고 전도하고 개척교회 뭘 해도 이게 뭐다? 이게 ‘진노의 자녀’가 하는 행세임을 본인이 어떻게? 수긍을 해야 된다고요! 수긍을! 철야기도 이거 열 달 동안 해 봐야, 진노의 자녀가 기도한 거예요, 그게.

   이게 안 된다니까요.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이게 안 되는 거예요. ‘기도하면 뭐가 나쁘냐?’ 맨날 하는 소리가 그거예요. 맨날 하는 소리가. 설교가 예배 참석이 왜 나쁜데? 왜 죈데? 맨날 하는 소리가 그거라니까요. ‘긍휼’도 쬐만하게 준 게 아니고 어떻게 합니까? ‘풍성하게! 풍성하게!’ 죄 지은 자를 무죄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뭐로 바꾼다? 의인으로 바꾸기 위해서 풍성히 줘버리죠! ‘풍성한 긍휼’에 의해서 「풍성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우리가 긍휼해서 우리가 살면 이거는 우리가 증인 됩니까? 증인 안 됩니까? 증인 안 되죠. 우리는 누구와 함께 살아야 되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되는데 왜 오늘날 교인들은 혼자 살았어, 예수 믿고 자기 혼자 살았어. ‘그리스도와 함께’가 없어요! 그리스도와 함께가 아니고 혼자 살다 보니까 ‘나 예수 잘 믿으니까 알아줘!’ 맨날 이런 식이예요. 이런 식.

   나 성도 맞아, 알아줘, 맨날 이런 식이야. 주의 일이 뭐로 바뀌었어요? 졸지에 항상 나의 일로 바뀌었어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되면 누구 공로를 높여야 됩니까? ‘나는 주님의 자녀였다’는 것이 상표처럼 딱 붙어서 앞면에 진노의 자녀로 헤헤 거리면 뒷면 펼쳐보면 뭡니까? ‘긍휼의 풍성하심’ 다시 앞면 돌려보면 ‘진노의 자녀’ 뒷면에는 ‘하나님 긍휼의 풍성하심’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는 증거예요. 증거.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는 증거입니다.

   다윗 구원하려고 주께서 다윗 찾아온 게 아닙니다. 다윗은 만군의 하나님을 증인 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다시 요나 가봅시다. 요나가 니느웨성에 갈 때 자기는 하나님의 증인이라고, 합당한 자라고 아주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말씀을 갖고 그 말씀이 자기를 지적한다는 것은 말씀 전할 때는 상상도 못했어요. 자기는 말씀을 충분히 알고, 모르는 건 저 니느웨 인간들이 모르지!

   나는 안다고 여기고 자부했는데 막상 그 마주침을 통해서 주인공은 니느웨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주인공은 말씀이 말씀 스스로 성취한다는 사실을 니느웨성만 긍휼 받아서는 안 되고, 결국 니느웨성을 통해서 우회로 간접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긍휼 입었고, 은혜 입은 것을 알고자 하는, 접촉하는 차원에서 요나가 잠시 바깥바람 한 번 쐬는 거예요. 바람 쐬고 온 겁니다. 요나가 뜻대로 안 되니까 자결하려 했지요.

   저는 그때 굉장히 감격했습니다. 자살하려 했다고. 얼마나 하나님의 종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겠습니까. 개척교회 안 되면 이걸 로 굶어 죽겠다고 문 잠그고 철야로 40일 동안 굶어죽는 그런 사람 같아요. 죽겠다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뭐라 해요? ‘내가 무슨 잘못 했는데?’ 하니까 비로소 자기 모습으로 ‘우리 고국에 있을 때 일이 이렇게 꼬이게 이야기 안 했잖아요.’라고 나선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하는 말이, ‘네가 왜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느냐!’ 왜 감사가 없느냐. 주의 일이 결국 누구 일이 됐어요? 요나 자기 일 됐습니다. 주의 일에서 자기 일로 나왔던 이 사람, 다시 자기 일에서 주의 일로 갈 때는 무엇을 합니까? 또 다시 하나님께서 주의 일에 쓰이는 죄인이고 진노의 자녀 맞잖아. 내 말 틀린 거 없지? 너는 진노의 자녀잖아.(맞습니다)

   그런데 요나나 이런 사람이 생각하기를 자기는 진노의 자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진노의 자녀 아닌 줄 알고 있는데 ‘진노의 자녀’는 존재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해야 될 기능과 관련돼 있습니다. 우리는 진노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줄 유일한 사람을 가지고 성도라 합니다. 진짜 진노의 자녀는 자기가 진노의 자녀인 줄 몰라요. 우리가 진노의 자녀인 것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십자가이 영이 왔기 때문에 비로소 진노의 자녀인 것을 알고, 십자가 앞에 내세울 때 우리는 ‘죽어 마땅한’ 것을 아는 거예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사야가 이야기했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하는 것이 사도바울이 그런 말을 해야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결혼도 안 했어요. 송재원 씨보다 훨씬 못해. 결혼도 않고 뭐했습니까! 결혼은 결국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왜! 주님의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결혼 않겠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너는 결혼 하지마! 일 해!’ 라고 집어넣은 거예요.

   그럴 때 어지간한 사람은 반응할 텐데 사도바울의 밑바닥은 뭡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기 때문에, 죄인 중에 괴수가 보따리 내 놓으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구원하는 건 좋은데 결혼까지 해주시지, 이런 소리를 어디서 주둥이가 나와요? 할 수가 없지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고, 남편 있는 자는 남편 자랑하지 말고, 돈 있는 자는 돈 자랑하지 말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입을 때, 함께 일으킬 때 우리가 일으킨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내려갔다가 올라온 겁니다.

   우리는 말씀을 위해서 동원된 모자이크의 작은, 동원된 조각품, 짜투리 그림에 불과한 겁니다. 그걸 짜 맞추면 전체가 그리스도 몸이라는 주의 일이 나오지요. 결국 우리는 말씀에 이용당하는 겁니다. 억울하십니까?「 너는 안개니라」분명 말씀이죠? 안개가 덮쳐버려요. 안개가 덮쳐버리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평생을 안개처럼 살아야 되요.

   안개는 분명히 멀리서 보고 있는데 잡으려고 하면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는 게 안개거든요. 손에 쥘 것도 없어요. 내 자신도, 내 자아라는 것도 분명히 있지만 막상 자아가 누군가 물어보면 손에 잡히는 건 없어요. 왜? 어제 자아, 오늘 자아 다르니까. 매일매일 자아가 다르니까. 상황 따라서 엉뚱한 내가 원치 않은 내 다른 모습들이 나오니까. 어느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의 일이 나의 일이고, 나의 일이 주의 일이 되고, 주의 일이 나의 일이 되는데, 따라서 이런 경우가 계속 나왔을 때에는 우리는 어제의 믿음의 신앙은 신앙이라고 단정하면 안 되고 매일같이 우리에게는, 오늘 말씀이 주는 숙제가 있어요. ‘너는 말씀을 지키라’가 아니라 말씀이 너를 덮친다, 그 덮치는 모습이 뭔지를 네가 그 증거를 받으라. 주께서 너와 함께 있는 증거는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말씀이 뭐냐, 요한일서에 의하면 ‘네가 증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증인이다.’ 아들과 너의 차이가 뭔지를 네가 똑바로 봐라.

   아들은 우리에게 긍휼을 줬고, 이런 걸 가지고 진노의 자녀라 하는 것을 확실히 느끼면서 살도록 그렇게 인도되는 겁니다.

십분 쉽시다.

 

 


안산101210요일5장10b‘아들과 생명’

자, 둘 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에 요한일서 5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이 말은 얼른 들으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냈다는 것이 하나님이, 제가 하나님이라면 “내 아들 거기 내려갔잖아?” 사람들이 “그게 무슨 뜻인데요?” “내 아들 내려간 게 그게 생명이야,” “우리는 생명 받은 적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 좀 하지 마세요. 생명을 줘놓고 줬다해야지, 하나님이 언제 생명 줬습니까?” “내 아들 내려갔잖아!” “아니, 어떻게? 아들이 무슨 의미인데? 구게 생명이라는 게 무슨 뜻인데? 우리가 납득 되는 소리를 해야죠,”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아들을 줬다는 말은, 하나님은 생명을 주었다는 이 말 자체가 진짜 빈말이 아니고 위에서 “생명 내려 갔어~” 이게 빈말이 아니라 아들 만나거든 그게 생명인 줄 알아라, 라고 분명한 증거를 주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은 거짓말쟁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준 적이 없어’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아들이 분명히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왔지,’ ‘아, 예수 왔지’ 앎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못 받았다는 것은 그 사람은 ‘아들이 곧 생명’이라는 이 사실에 대해서 거짓말로 취급하는 사람에 불과한 겁니다.
 
   “예수 믿어도 소용없네, 예수 믿어도 생명 안 돼”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아들을 믿어도 생명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증거로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내 인생은 내가 챙긴다’ 예수님과 함께라는 흔적을, 증거를 외부에서 나타내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기를 성도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결국은 조사해보면 다 나오지요.

   조사해보면 뭐가 나오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챙긴다’ 여기서 뭐가 나오냐 하면, 감사가 나올 수가 없지요. 자기 인생 자기가 챙기는데 누구한테 감사해요. 자기가 자기한테 감사할 뿐이죠. 항상 최선을 다한 ‘나’가 나에게 감사할 뿐이지, 나 말고 누가 내 인생 챙겨주는 사람이 있냐, 나 감사 못해. 내가 인생을 살아보니까, 열심히 내 인생 내가 챙길 때 비로소 나는 숨통이 트이더라, 라는 것을 사람들은 이야기해요.

   예수 믿어도 소용없고, 기도해도 아무 응답도 없고 교회에 누가 날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그저 나는 이용만 당했고 내 인생만 내가 나를 챙길 때만 가장 신뢰성이 있고 그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라고 나오는 거죠. 그래서 언젠가 제가 그런 소리 했지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망친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무슨 사상으로 몰아넣습니까?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해야 돼. 너 외에 아무도 너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 라는 사고방식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거예요.

   예수, 당신이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기에, 거짓말 좀 하지마, 라고 예수를 믿지 않는 것. 하나님의 증거를 믿지 않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짓말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필히 등장한다는 겁니다.
   말씀 안에는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하면-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증거가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뜻으로 증거 되는데 이 증거는 반듯이 증거를 믿는 자와, 믿는 경우와 믿지 않는 경우 둘 다의 경우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증거 되시는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 사람은 비로소 믿는 것이 무엇이며 믿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둘 다를 알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진짜 믿지 않는 사람은 믿는 것도 모르고 믿지 않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자기 안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지요.

   결국 이런 모든 이야기는 증거 세 가지가 뭐냐면 물과 피와 성령이라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반복으로서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이어지는 겁니다. 그 다음에 진도 나갑시다. 12절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여기에 아들이 있다고 했는데 뭐가 빠져있지요? 예수님은 늘 계시잖아요. 무소부재. 안 계신 곳이 없지요? 그러면 아들이 있다는 말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어디에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고 어디에 아들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느니라, 가 돼버려요?

   결국 이것은 예수님 안에 들어오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고 예수님 밖에서 저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생명이 없느니라, 그 말입니다. 예수님 없이 따로 없으면 그건 누가 없는 겁니까. 자기는 있는데 누구는 없어요? 아들이 없잖아요. 당신은 생명이 있습니까? 라고 할 때 다른 말로 하면 ‘당신 안에 아들 계십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가 교인들과 소통하고 얘기할 때 “혹시 당신 안에 아들이 계십니까?” 라고 물어야 된다 이 말이죠.

   “나는 나뿐이오, 나는 그걸로 충분해요.” 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뭐냐, 생명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나는 생명이 있어요. 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무슨 이야기가 나와야 돼요? 아들이 있음으로서 생명이 있습니다. 라는 말로 돼야할 텐데 “나도 생명 있다니까!?” 아들 이야기는 없고 자꾸 생명이야기를 해버리면 이거는 사기꾼이죠. 이게 바로 뭐냐면 한국교회 목사들이잖아요. 목사들은 교인들이 천국가기를 원하고 영생 얻기를 원하기 때문에 천국얘기를 하는데 무슨 이야기는 않습니까?

   아들이야기는 않지요. 본인들이 아들을 안 믿으니까. 진짜 아들 믿으면 교회얘기 않고 아들얘기만 합니다.(아멘) 왜냐면 아들이 있을 경우에만 생명이 있는데 아들 외에 교회이야기를 한다든지 자기 경험이야기 해버리면 이건 뭐가 없습니까? 이건 아들이 없는 거예요. 아들이 있다는 얘기는 물과 피와 성령이다 말이죠. 예수님의 피 얘기를 하면 아들이 없는 사람들은 뭐라 하냐면 왜 자꾸 피 얘기하느냐. 우리 인간얘기 하자, 인간 이야기…

   인간이야기 해가지고 뭐하는데, 자식자랑하고 남편자랑하려고 찜질방에서 수다떨일 있습니까? 목사가 의도적으로도 설교시간에 아들얘기만 해야 됩니다.(아멘) 그래서 교인들 인상이 얼마나 찡그리는지를 봐야 되요. 만약에, 의존교회는 그런 일이 없겠습니다만, 김명현 목사님이 아들이야기, 예수님 피 얘기할 때 얼굴 찡그리는 그런 사람 없겠지요? 그러면 이렇게 시험해봅시다. 피 이야기하니까 다 잠든다 합시다. 그러면 피 얘기와 전혀 상관없는 복  받은 이야기, 교회 바쳐서 복 받은 얘기해보세요. 그러면 진짜 아들이 있는 사람은 ‘목사님 아들이야기 해주세요’ 이렇게 나오고 <아들이 있는 것처럼> 그동안 몇십 년 버텨온 사람들은 ‘하이고~ 재밌다 그거, 진작 그 얘기 해주지’ 하는 본색을 드러내겠지요.
   그래서 목사님들 설교할 때는 첨부터 복음 이야기 하지 말고, 세상의 이야기를 쭉 하는 거예요. 하고는 끝에 가서는 ‘이게 바로 이단입니다’ 9회 말에 엎어버립니다. ‘성경말씀에 이렇게 하면 이게 바로 이단입니다’ 라고 뒤엎어버릴 때(속이 시원) 교인들 인상들이 얼마나 험악해질까요? 나는 그게 옳은 줄 알고 기쁨으로 속으로 ‘아멘’ 했는데 그게 아멘 아니고 ‘멘아’‘멘아’ 나오도록 완전히 뒤 엎어버리는 겁니다. 이거는 아멘 할 소리가 아니다 이 말이죠. 뭐든지 강요하면 그걸 억지로는 받아요. 그러나 성경에 정 반대되는 것을 붙여줘 버리면 어느 쪽으로 끌려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 속에 담겨있던 본심은 어느 쪽을 더 소원했냐가 바탕이 들통납니다.

   그러면 여기서 아들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이고 어떤 기분일까? 아까 에베소서에 의해서 진노의 자녀가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일으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일으키심을 받았죠. 죽었다가 일으켰다는 그 공간.  그게 부활인데요, 부활의 능력이잖아요. 부활의 능력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진노의 자녀에게 같은 공간을 차지하면서 같이 들어오죠. 긍휼로…

   같이 들어오게 되면 이 진노의 자녀는 뭘 느끼느냐 하면, 죽으심과 부활, 죽은 것과 부활의 그 이유를 한꺼번에 아는 기회를 맞이하겠죠. 그렇다면 진노의 자녀에서 평소에 하루 일과 가운데 살아가면서 가장 평범하게 길을 걷는다든지, 티비를 본다든지, 축구를 한다든지 등산을 하신다든 지, 자전거를 타신다든 지, 평소에 뭘 할 때 예수 믿는다는 것은 뭘 의미할까요? 그것은 지금 내가 몰두하고 열중하는 일이 ‘나의 구원을 흔들만한 요인’이 된다? 안 된다? 전혀 안 되는 걸 알 때 그걸 ‘믿는 자’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술잔을 기운 이 짓이 나의 구원을 취소시킬 일이 아님을 아는, 그러한 믿음이 진짜 믿음이에요. 반대로 내가 고아원을 방문하여서 돌보아준 착한 이 일이 내 구원을 향상시키는 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한테 칭찬받아도 그거는 구원과 상관없고, 누구한테 정죄함을 받아도 구원하고 상관없고, 진정 그 사람은 자기 행함을 믿지 않고 함께 하신 주님의 긍휼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긴 이야기를 짧게 얘기하면 <그냥 사세요!> 그냥 조용하게 사시면 되는 겁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잊지 말고 그냥 살면 되는 거예요.

   유난떨지 말고, 부산떨지 말고 티내지 말고 그냥 사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그냥 살 때 사람들이 잘 보이는 것 같아요. 인생이 고요할 때, 배가 고요하게 갈 때는 잘 견디는데 갑자기 풍랑이 와가지고 흔들 때는 주님과 함께 그냥 살면 되는데 왜 잠자는 주님을 왜 깨웁니까.(ㅋ) ‘주여! 죽게 되었나이다.’ 풍랑 이는 거와 우리 구원과 관계있다? 없다? 관계없는데 우리는 답답해가지고 잠자는 주님을 깨워가지고 “주님, 내가 뭘 잘못됐는데 이렇게 시련을 주십니까!” 주님께서 “왜? 무슨 일 있나?” “제가 어떻게 했는데…” “ 너 원래 진노의 자식이잖아!”

   진노의 자식이 진노 받으면 되지 뭘~ 왜 또 ‘나에게’가 나오냐 말이죠. 그냥 풍랑대로 살면 되지,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고,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거예요. 하고 싶어서 한다고 성령이 일한 게 아니고, 하기 싫다고 않는다고 그게 악령의 일이 아니에요! 우리는 원래 진노의 자녀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이 어떻고 의미 없습니다. 의미 있는 것은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아는 이것은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이고 성령의 효과죠. 그 사람이 예수, 아들을 믿는 생명 있는 증인으로서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정말 어려운 대목을 거쳐 왔습니다. 생명은 ‘죽음에서 부활’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은 자로서, 주님과 더불어서 생명을 얻는다,는 느낌을 항상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너 어떻게 구원받아?’ ‘나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아’ 예수 피 때문에 구원받아, 이걸 아주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원래 그러하기 때문에, 순하게 튀어나오는 겁니다. 뭐,‘ 찡그려가면서 예수 피로 구원 하면서 인상 안 찡그려도 쉽게 쉽게 나오는 겁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부천개혁교회에 ‘어장금’이라는 그 사람이 썼던 긴 글이 있었어요. 여럽사람이 아마 짜증낼 겁니다. ‘아, 옛날 내 모습 본다, 진짜 찌질이다, 이게 무슨 의미있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거기에 댓글 달린 걸 보고 이런 게 많이 생각납니다. 뭐냐면,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입다,‘는데 그런 댓글은 조금 복음적인 교회에서 용어 몇 개 외우면 갖다 붙일 수 있는 거예요. ’수준 낮은 인간아 이게 정답이야‘ 할 수 있는데 그 댓글이 영 맘에 안 들어요.(듣는 찌질이 식은땀난다는)

  차마 공개적으로 댓글에 대해 쓰지는 못했는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는 그 상투적인 용어. 그런 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어장금이라는 글쓴이가 ‘나도 그 정도는 안다’고 나온 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찌질이 글을 올렸는가 하면요, 사람들이 이미 자기들은 그 시절 지나갔다고,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본인이 교회의 중직이 되도 정작 교회 일은 관심도 없고 팔짱만 끼고 감시만 하지. 정작 교회 일 행하는 사람은 꼭 한 사람(하는 사람만)만 한다고요.

   할 때, 그런 사람이 정작 좋은 일에 모이자고 설쳐대면 다른 사람을 비평하기 좋아하지돈 한 푼 안 내놓는다고요. 그런 경우가 찾아왔을 때 우리는 똑 같은 어장금인가 대장금인가 그 사람처럼 그런 고민을 반복해서 할 수 밖에 없을 거예요. 분명히 복음을 아는데, 이 몸이 그리스도 몸이라는 거 충분히 아는데, 알면서도 막상 당하는 현실은 현실대로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거예요. 교회는 있어야 되겠고, 돈은 모자라고, 답답할 때 그릇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그 글을 옮긴 것은… 그런 글이 그리워져요. 우리는 너무 감춰져있기 때문에 그런 글을 안 내놓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순진한 건지 바보인지 모르지만 자기 얘기를 낱낱이 하니까 우리는 마음껏 비웃어주면서도 우리는 뭔가 내 속에 있던, 내 속에 꿈틀거리는 그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아서 흐뭇하고 재미있는 글이 되지 싶어서 올렸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시절을 초월했다고 장담하지만, 막상 우리가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이미 이겼다고 생각했던, 답답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본심은 그 사람처럼 분주하게 뛰어 다닌다 이 말입니다. 뛰어 다니다가 주의 은혜인 줄 알고 기도하는 모습의 되풀이… 적나라하게 잘 보여줘서 그 글을 올린 겁니다.

수학에서는 정답만 있는 문제지만 안 풀리는 과정, 못 푸는 과정도 얘기하고 정답을 얘기해야할 건데 우리는 너무 정답만 많이 알고 있어요. 사실은 그 정답 나오기 전까지, 미묘한 것까지 보여주는 글을 써야 되는데 엉뚱한 글을 옮겨다 놨습니다.
  ㅡ 다시 한 번 얘기합니다만, 안산 공부가 ‘안양강의’로 바뀌죠? 바뀝니다잉? 바뀌어 다음에는 안양에서 합니다. 위치나 자세한 정보는 차후에 올릴 겁니다. 그 다음에 진도 나가봅시다.ㅡ

   요한일서 5장 13절-15절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한 공간에 있죠? 한 공간에 있는데 예수님도 여기 계시고 우리도 함께 있잖아요. 이 공간은 우리가 만들었어요? 아니면 예수님 주신 겁니까? 예수님 주신 거죠. 주신 것인데 우리는 예전의 우리가 알고 있던 우리 습관과 콤플렉스 때문에 주께서 주신 보물들과 귀한 것들이 어디에 널려있는지 어디에 깔려있는지 모른 거예요. 그런데 주님 곁에 깔려있는 이것들은 예수님의 뜻에 의해서 깔려있죠. 보석들이…

   그러면 주의 뜻대로 기도하면, 원래 한 공간이기 때문에 이런 보석들이 우리 눈에 띄게 됩니까? 안 띄게 됩니까?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되죠. 그걸 말하는 겁니다. 「주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이룬 줄로 이미 알아라」이미 한 공간에 배치돼 있다는 것을, 이미 함께 있음을. 새삼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동안 쭉 나와 함께 있었음을 왜 내가 알지 못했을까를 아는 순간을 만든다, 이 말이죠. 기도의 그게 뭐냐면 「사랑의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늘리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짧은 문장으로 얘기할 수 있는데 살아가면서 이래서 주님의 긍휼이고 이래서 긍휼의 풍성함이고 사랑의 풍성함이구나, 를 주가 함께 동행 하면서 주님이 진짜로 고마운 분이고 감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늘 새롭게, 깊이 있게 아는, 그런 길로 주께서 인도하신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스마트폰 사게 되면 제 나이 때에는요,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요. 전화 오는 것과 거는 것밖에 없는데 전화 오는 건 더 귀찮다면서요? 그냥 휴대폰이 더 필요하다는데 소용없는 것 줘봐야, 우리가 영화를 볼 줄 알겠습니까? 연예인 얼굴을 보겠습니까? 우리는 그냥 옛날식 간편한 게 좋거든요. 스마트폰은 응용이 안돼요. 스마트폰의 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다 캐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스마트폰의 응용 방법대로 믿으면 우리가 몰랐던 스마트폰의 놀라운 기능들이 비로소 우리 앞에 정리될 겁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을 자기 욕망을 채우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예상 밖의 얼마나 큰 기쁨을 제공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면서 계속 주어지는데, 그것을 위하여 너희들이 기도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주의 뜻대로’ 기도하라는 거죠. 주의 뜻대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요한일서 5장15절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가면 「너희들이 구하라 무엇을 구하든지 내 뜻대로 이룬 줄 믿으라」는 것과 연결시키면 되요.

'나의 뜻대로‘ 기도하면 들어준다? 안 들어준다? 안 들어줘요. 왜? 나의 뜻대로 기도하면 들어준다는 말을 여기 요한일서에서 뭐로 바꿨습니까? ’너의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뭘 알아야 되요? ’주의 뜻‘과 ’나의 뜻‘ 차이점을 알고 있어야 되죠. ’주의 뜻‘은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것을 관심에 모으기 위해서 예수님은 일하시거든요.

   ‘죽을 수밖에 없는 너에게 생명을 주었다’ 영생을 주었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반면에 그것 때문에 주님이 함께 있는데 우리의 뜻은 뭐냐 하며는, 주님이 행하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행한 것이 나의 뜻으로 굳어지게 되요. 이걸 시간으로 뭐냐, 과거에 내가 행한 것들은 그냥 행하지 않고 뭔가 노림수를 갖고 있어요. 첫 시간에 요나이야기 했죠? 요나가 후딱 지나가길 바라고 어디 있었습니까? 산 위에 있었죠? 편안하게 앉아서 ‘내 뜻대로 되는가 보자’ 그러니까 요나 같은 경우에는, 인간은 항상 시간성이 있기 때문에 그 시간성은 과거에 기대했던 것이 현재 이루어질 때, 그때 자기는 존재의 의미를 거기서 찾는 겁니다.

   ‘역시 나는 세상 살만하구나,’ ‘내가 기대한대로 척척 이루어지는구나.’ 라고 하면 이것이 나의 뜻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이미 우리는 예수님이 없을 때 죽은 자가 되죠. 그러면 나의 뜻은 무슨 뜻이 되냐 하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뜻이기 때문에 이 기도를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야 될 이유가, 기도를 반드시 해야 되는데 그 이유는 뭐냐면, 우리의 기도가 가치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기도가 주님의 응답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를 알기 위해서, 달리 말하면, 응답 받기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되는 거예요.

   자기 소리만 하고 손 털고 나오면 안돼요. 반드시 기도할 때는 주님의 응답이 무엇인가 받고 일어서야 되요. 왜? 처음에 기도할 때 들어갔던 자기 뜻이 뭐로 교체되는가, 주님의 뜻으로 교체된 채 나가게 되어버리면 처음 기도할 때는 누구의 종입니까? ‘나’ 는 ‘나의 종’이 되었다가 기도 끝나고 난 뒤에 누구의 종이 되요? 주님의 종으로서 탈바꿈하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옛날 교회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왜 여기서 하시는가 하겠지만, 제가 예를 들테니까 정답을 맞춰보세요. 바람으로 응답한다. 지진으로 응답한다. 우주천지개벽으로 응답한다. 세미한 음성으로 응답한다. 몇 번입니까? 세미한 응답도 아닙니다. ‘성경’ 이게 응답이에요.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나타나죠. 그러면 세미한 음성 나타나는 게 뭐냐면 세미한 음성이라는 건 환경조성이고,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아브라함 은혜를 이야기했다고요. 그러면 우리가 가있는 것은 아브라함 은혜를 포함해서 새 언약이잖아요.

   새 언약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은 예수님 중심이다, 이거죠. 우리가 기도할 때는 항상 내 중심으로 기도해야 되요. 우리가 ‘예수 믿습니다’  ‘예수중심으로 합니다.’ 한다고 해도 기도하다 보면 그것마저도 뭔가 예수중심이라고 티를 내면서 이것을 담보로 해가지고 주께서 내가 원하는 걸 빼내고자 하는 노림수를 발각 당해야 됩니다. 그래서 결국 기도라 하는 것은 주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발각당하는 시간인데, 그 시간에 기도를 안 해버리면 무슨 시간을 놓친 거예요? ‘내가 의도한 내 모습’을 발각당하는 시간을 놓친 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주의 뜻이라고 얼마나 나대고 설칠지 몰라요. 기도 안 하면.
   심지어 짧은 예로, 주기도문만 해도 보세요, ‘주기도문’ 자체가 뭡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말하고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할 때 이미 그 뜻 안에서, 그 뒤에 보면 내가 죄 지었다는 거. 일용할 양식부터 해가지고 나는 애초에 일용할 양식 먹을 자격도 없고, 이 땅에 살아있을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데 양식 주시고 죄 용서한다는 것은 이것 자체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써 계속 이끌고 가기 위해서 하는 거라 이 말이죠.

   그러면 아침에 주기도문 할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할 때 눈물이 왈칵 쏟아져야 합니다. 왜 눈물 쏟아지냐, 뭐가 없어지기 때문에? 아침에 눈 뜨면서 생각했던 나의 생존문제, 나의 자존심문제, 애초부터 이것이 주님 앞에는 오늘도 안 통하는군요. 라는… 하나 예를 들게요. 기도할 때는요, 발각당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기해요. ‘주여, 오늘 박태환 수영하는 날입니다. 주님 재림하든 말든 메달 따야 됩니다. 내가 박태환 팬입니다.’ 라고 기도를 시작하는 거예요.

   이걸 고상하게 ‘주여, 박태환이 수영하는 거 주의 뜻입니까?’ 이래 시작하면 또 본심은 숨겨놔요. 이걸 이번 겨울수련회에 할 건데 미리 해봅시다. 그림을 그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투과성입니다. 투과성이어서 뭐든지 왜곡해서 들어가요. 왜곡해 들어오면 과거의 잔존물이 남아 있습니다. 과거의 모든 사건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 중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편집한 그것이 주인공으로 남아 있어요. 항상 인간은 3일전 일보다 어제 일이 더 뚜렷해요. 그리고 10일 전보다도 3일전이 더 뚜렷해요. 왜? 편집하니까.

   쓸데없는 기억들은 삭제하고, 다 편집해버리고 남아있는 것이 뭐냐면 우리의 꿈이라는 겁니다. 꿈이라는 거예요. 과거가 있다 이 말이죠. 이거는 미셸 푸코나 이런 사람들이 주장했던 이야기입니다. 들어보세요. -이런 주장한다는 것도 대단해요 - 인간은 껍데기인데, 얼기설기 그물구조인데 계속해서 외부의 새로운 경험들이 들어오죠. 들어오는데 여기에 자아란 뭐냐면 과거뭉치입니다. 이거는 철학에서도 이야기하지만 성경에서도 얘기해요. 과거라 하는 건 자아는 없고 과거뭉치예요. 그런데 문제점이 뭐냐면 과거 전부가 자아가 아니고, 과거를 깎아내고 편집할 수 있는 주인공 있잖아요. 그 주인공이 누구냐를 그 사람들이 밝혀내지를 못해요. 그건 딴 게 아니라 악령이죠.

   그 사람들은 철학적으로 악령을 안 배웠기 때문에, 진노의 자녀는 그러면 가만있는가? 진노의 자녀는 가만있는 게 아닙니다. 아까 에베소서 2장2절에 뭡니까. 현재 공중권세 잡은 자, 이게 뭐냐면 선반의 드릴, 우리는 쇳덩어린데 그 쇳덩어리를 누가 깎는다? 찌지직~ 하면서 드릴이 깎죠. 드릴로 깎는 그 주체가 누굽니까? 에베소서 2장2절에 누굽니까? 현재 공중권세 잡은 자 같잖아요. 김성민이라는 사람 압니까? 혹시… 그 사람이 대마초와 필로폰을 했잖아요. 김태원이라는 선배가 있어요. 그 선배가 뭐라 하냐면 ‘마약을 끊지 말고 사람을 끊어라’ 했습니다. 주일날 이거 예화로 들 거예요.

    이게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이죠. 이게. 이거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 마약을 끊지 말고 사람을 끊으라, 는 말은 뭐냐면, 사람은 마약이 그리운 게 아닙니다. 사람이 그리워서 그리운 사람과 한 통속이 되려면 그쪽에서 마약하면 자기가 뭘 해야 넣어줍니까? 그쪽편에. 같이 마약을 해야 넣어줘요. 연예계도 그렇고. 같이 놀아주고 술 먹을 때 술 먹어줘야 한 패라고 인정을 해줘요. 사람은 타인이 없으면 외로워서 못 삽니다. 처녀 때 그렇게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해가면서 믿음대로 살겠다 하는 사람들 막상 불신 남편 만나보세요. ‘뭐,’교회 가야 구원받나? 이근호 목사님 말 들으면 교회 안 가도 구원받는다는데.‘ 왜 그런 소리 합니까?

   나는 예수님은 안 그리워도 누구는 그립다? 사랑하는 남편 없으면 때려죽여도 못산다, 합니다. 나는 불신 남편, 절에 가는 앞에서 비로소 내 존재의 의미를 알았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그 남편 죽으면 어떤 남편 만나면 똑 같은 소리해요. ‘나는 골프가 이렇게 재밌는지 몰랐어, 새롭게 발견했어,’ 이렇게 하잖아요. 나중에 또 화투치면 화투가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어, 할 거고.

   사람은 타인의 복사판입니다. 내 앞에 빨간 조명등 있으면 나도 빨간사람이 돼버리고 파란 조명등이 있으면 파란사람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빨간 유니폼 하고 있으면 나 혼자 파란 유니폼 입었으면 빨간 거 입고 싶어 하고, 남들 파란 거 입고 있으면 나 혼자 파란 거 입으면 안돼. 그래야 어울림.… 조화.… 그게 사는 거예요. 그게. 그게 인생 사는 거예요. 세상의 풍속,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악마가 만든 문명과 문화 속에 있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동조를 하고 동참을 해줘야 비로소 사는 것 같아요.(반어적) 도 닦는 것도 아니고 무슨 통수라고 거기서 다 드러납니다. 사람 산다는 게 뭡니까. 남들 보기에 사람으로 인정받는 거 그거잖아요. 오랜만에 이런 말니까 신 난다 정말. 얼마나 이런 소리 하고 싶었는지.… 교회다 뭐다 해도 친구 만나면 짱이고! 최고다 이 말입니다. 친구 만나면…

   불러준 사람 많고, 교회 다니나 안 다닌 거에 관계없이. 교회 가서 친구 얻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또 살잖아요. 그런데 또 교회 가서 복음 전하면 쫓겨나요. 갈데가 없어. 집에서 인터넷 보면 돼. 사람은 사람이 그리워서 교회 오는 거예요. 어디 예수님 보고 싶어서 환장한 거 아닙니다. 보이지도 않은 예수님 뭐할 건데? 날 관심 가져주고, 나에게 정을 베풀어주고, 내가 외로울 때 누가? 여러분! 여러분들이 날 위로해주지!(윤복희 버전) 여러분이 얻고 싶은 거예요.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살아온 사람, 커서는 주위의 관심을 받을 때는 비로소 사는 맛 나는, 이게 뭐냐 하며는, 이 세상 신이 재단한다 하죠. 재단. 잘라낼 건 잘라내고 들들들들~ 세상에 합당하게. 세상 사람한테 왕따 되지 않는, 조각품. 짜여진, 규격화된, 그게 오늘날 교회나 세상이나 동일한. 교회 앞에서 ‘사법고시 몇 명 합격했습니다.’ 오다보니까 홍대 미대 12명 합격!‘ 했다고 평창의 어느 학원에서 써 걸어놨어요. 경기도 지방에서 최우수 학원이라고 자랑한다고 되어 있다 말이죠. 그걸 교회서 그대로 한다 말이죠.

   교회는 복지 시설, 복지시설이 교회 부흥을 좌우합니다. 외롭고 쓸쓸한 할머니 할아버지들, 믿음 없어도 괜찮아요. 우리교회 오시면 도와줍니다. 믿음 없다고, 전에 절에 갔었다고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냥 등록만 해 주신다면 점심은 드리겠습니다.(ㅋ) 복지시설. 장애시설. 그리고 취미활동. 여가활동. 그거 제공하게 되면 교회 부흥 하지 말라도 꾸역꾸역 겨들어옵니다  .

하나님께 교회 헌금 제대로 쓰는 것처럼 표시 나고. 거룩한 복지시설 해가지고 이걸 빌미로 해서 목사는 그 동네에서 유지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껍데기에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게 되면, 이 현재 상황을 과거와 마주치면서 자아상이 재정립이 됩니다. 현대에 맞도록 과거 중에서 필요 없는 것은 잘라내고 유리한 것은 남기고. 이렇게 해서 자 아상이 확립되고. 확립된 자아상은 낼 되면 이건 뭐가 됩니까? 낼 되면 이게 뭐로 변합니까? 전체가 과거가 되죠. 낼 되면 또 새로운 사태가 또 저장돼 있으니까.

   따라서 기도를 하게 되면 우리는 이것을 탈피할 생각 하지 마세요. 방금 하는 것은 진노의 자녀인 악마가 제작한 그것을 자기가 알아서 ‘악마야 들어가라’ 하지를 마세요. 있는, 재단된 그대로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기도는 뭐가 남냐, 우리의 과거에 마귀로부터 멋지게 재단된 이 세상에 살기 적합한, 안 지워질까 싶어서 그들에게 아부를 다 하는 그 모습 그대로 뭐로 이어집니까. 기도로 이어져야 되요. 이어져줘야 무엇과 극한 대비를 이루겠어요? 주님의 뜻과 극한 대비를 내부적으로 파악하는 사람 그 사람이 주의 적입니다. 그게 기도의 응답입니다.(정말 어려운 단락-녹취자)

  기도의 응답은 이미 주께서 <다 이루신> 것에 대해서 과거 미래 현재 상관없이 이미 묵시적으로 다 이루어졌는데, … 하얀 눈은 왔는데… 온 산 위에 눈은 왔는데 ‘주여! 눈이 보고싶습니다.’ ‘하얀 백설이 보고 싶습니다.’ 이런 소리 하는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그러면 자기 눈에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은 마귀에 해당된 그런 눈과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께서 눈을 뜨게 하지 아니하면(주여!) 지금 내가 과거에서 원했던 것만 중요한 줄 알았지, 정작 주님께서 주신 햇빛과 공기의 소중함을 우리는 날마다 잊어버리잖아요.

   「해를 주신, 별을 주심에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말씀을 우리가 언제 지킵니까! 소설에 보면 달빛이 그렇게 감사한 것을 언제 알았냐 하면 교도소 창문에 비쳐드는, 김지하(시인)가 평소에 꽃 좋아하는 사람 아닙니다. 그런데 민주화운동 하다가 갇히고 나니까 창살에 씨앗이 하나 떨어져 꽃이 피었던가 봅니다. 그 꽃을 가지고 김지하가 뭐라 하냐면 ‘그게 바로 생명’이라고 합니다. 생명.

   그동안 그 사람은 민주화운동을 뭐로 봤다? 그게 사람 살리는 운동으로 봤는데 저 꽃은 자신의 민주화운동에 개의치 아니하고 민주화운동의 어떤 혜택을 안 받고서도 ‘촛불집회’ ‘쇠고기반대’ 않더라도 꽃은 자기의 꽃다운 자태를 보여주더라 이 말이죠. 그러면, 김지하가, 내가 꽃 피우는데 뭘 도와줬습니까! 도와준 것 없지요? 그러면 꽃은 어떻게 피었습니까? 생명이 생명으로 그냥 돋아난 거죠. 돋아난다는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두드러기 나듯이…

   그냥 몸에서 자생적으로 뽀루지가 나듯이, 제가 설교시간에 멍게라 했는데 표현이 잘 되었나 몰라? 표면에 툭 튀어나오잖아요. 툭 불거진 부분이 꽃이다 말이죠. 그러면 김지하는 뭘 봤냐면 꽃만 생명이겠어요? 오징어도 생명이겠어요? 오징어도 생명이고 소나무도 생명이겠지요? 그러면 꽃만 생명이 아니고 모든 생명은 하나로 둥글게 연결돼있죠. 그러면 창살에 갇힌 자신이 뭐가 되요? 생명이죠! 그러면 생명과 생명에 이어서 내부적으로 이게 다툴까요? 안 다툴까요? 안 다투죠! 이게 평화예요. 평화! 자기가 그렇게 원했지만 ‘평화는 생명운동에서 이룰 수 있다.’ 이게 김지하가 감옥에서 나온 뒤에 펼친 생명운동의 증거입니다.

   어떻습니까? 이것도 목회하면서 써먹을만하죠? 이게 바로 불교입니다. 불교. 이게 불교이기도 하고 도교고. 유교고. 자연종교의 특징이죠. 이게 바로, 이 자체가 진노 받아야 될, 악마가 재단한 진노 받아야 될 저주의 인간의 본색이라는 것을 김지하는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왜 모를까요? 외부에서 아들이,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안 나타났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궁극적으로 공부도 그만큼 하고 시도 많이 지었고 깨달은 것은, 바로 생명의 옆뿌리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뭐든지 서로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화평하고, 모든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싸우지 말고 모든 종교는 생명 안에서 하나다. 하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설교 듣고 나중에 한 십 년 후에 그리로 안 빠질라나 몰라?! 쓸데없는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되는데…결국은 십자가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은 기껏 연구하고 공부하고 성경공부 해놓으면 결국 이런 식으로 성경공부 하는 사람 많이 있습니다. 옛날 초창기에 성경연구한 사람 많이 있어요. 그 중에 김용옥도 포함되지만. 많은 사람이 결국 빠진 것이 이것이에요. ‘그것이 알고 싶다’가 이거예요 이거.

   교회를 비판하고 한국교회 썩었다고 얘기하지만 결국 나온 것은 생명운동으로 귀결되는 겁니다. 그래서 본인이 예수님의 영, 십자가의 영을 만나기 전까지는 본인이 짐승이고 죄인이고, 정죄당해 죽을 죄인인 것을, 에베소서2장의 진노의 자녀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하죠. 진노의 자녀라 하는 것은 성령과 함께 보니까 ‘내가 그동안 살았던 모든 것’이 공중권세  잡은 악령이 나를 이런 세계로 몰아넣은 겁니다. 몰아넣은 이유는 뭐냐, 그것은 바로 예수는 필요 없는 존재다. ‘그만 믿어라.’ ‘그동안 많이 믿었다.’ ‘예수 십자가 너 많이 외쳤잖아!’ ‘예수 십자가 많이 믿었으니까 그만 믿어!’ ‘그만 믿고 너도 외롭지 않게, 인간답게 한번 살아봐야지~!’ 그런 음성이 지금도 매일같이 우리의 과거 자아 속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남아있는 것을 우리는 싫어하지 마세요. 이게 남아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이 틀렸고 무엇이 옳다는 것을 알지요. 성령을 받아야 둘 다를 아는데, 우리 속에서 나쁜 것은 다 제거하고 싶죠! 그게 성화론이라 하는 거예요. 그게 개혁주의 성화론이라 하는 겁니다. 우리 속에서 나쁜 것을 다 삭제하려하는데, 그거 삭제하게 되면 뭐가 없어집니까? 결국 십자가는 한번 흘깃 보고 십자가 끝내버리고 부활로 달려가면 그런 결과가 됩니다. 늘 십자가가 새롭게 주어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돌아가셨으니까!

   이거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6절『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했는데 여기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법」이 뭐냐 하며는, 예수님을 소개하기 전에 지었던 모든 죄를 얘기하는 겁니다. 아시겠죠? 그런데 예수님을 모르고 지었던 죄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죈데, 만약에 그 사람에게 예수님을 증거 해버리면 그 사람이 거부할 수도 있겠고 수용할 수도 있겠지요? 거부해버리면 무슨 죄가 됩니까?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는 겁니다.

   그 사람 행동에 의해서 사망에 이르는 죄와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판명되는 것이 아니고, 니느웨 성에 요나가 다그치듯이 이 세사에 예수님 갖다 붙여보면, 아 너는 첨부터 주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는 들통이 나는 겁니다. 예수 안 믿는 죄 외의 모든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예요. 그런데 마지막 때에 누구든지 결국은, 예수그리스도를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을 알게 되면, 비로소 내가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진노의 자녀가 본인은 진노의 자녀인지 모르잖아요. 왜냐면 성도도 진노의 자녀의 육체를 갖고 있잖아요. 육체라 하는 것은 하나의 껍데기고 투명한 그물 같은 건데 외부에서 뭔가 주어지면 내부에서 자아상으로 굳혀지죠. 과거와 새롭게 주어진 현재의 사건의 만남을 통해서 오늘의 무슨 자아로 바뀐다? 오늘의 자아상이 바뀌죠. ‘과거에 내가 예수 잘 믿었다,’는 것이 과거로 들어가게 되면,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면 오늘 잘 믿는 것의 자아가 새롭게 정립이 되는 겁니다.

   자아정립이 되는데 자아 정립되는 이 자체를 우리는 뭐로 보냐면, 이 자체를 우리가 믿고 싶어 해요. 이게 뭐냐면, 예수님의 함께 있음을 쓰잘데기 없는 것으로 여기는 악마의 드릴, 재단이 되는 겁니다. ‘너 예수 잘 믿어, 그러니까 예수 그만 믿어!’ 말이 이상하게 안 되는 것 같은데도 되죠? 예수 잘 믿는데 왜 예수 믿어? 여러분 이거 말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우리 심리 마음상태가 그런 상태예요. 예수 잘 믿으니까 십분 간만 예수 믿겠습니다. 라고 나오는 것이 우리의 심리상태예요. 예수 잘 믿기 때문에 예수 안 믿어도 되는 거예요. 한국교회가 십자가 잘 믿기 때문에 십자가 안 믿는 사람들이에요. 왜? 잘 믿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슨 말이냐면, KTX 열차가 달리잖아요. 열차가 역에서 안 움직일 때는 앉아 있다가, ‘야~ 신기하다 열차가 움직인다.’ 알잖아요. 그런데 십분 후에도 ‘야~ 열차가 움직인다’ 그러면 애든지 아니면 정신이상자든지 그런다고요. 이미 열차가 가버리면 딴 것을 해야 돼, 책을 본다든지, 전화를 한다든지 그래야지, 열차가 가고 있는데 확인하는 거. 그거는 약간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개혁주의 하는 사람들이 자꾸 십자가 외치는 사람을 놀리는 겁니다. 잘 가고 있는데 왜 자꾸 확인하냐! 는 거예요.

   그 KTX에 타고 있는 우리가 무슨 자녀다? ‘진노의 자녀’다 말입니다. 진노의 자녀의 특징이 뭐냐면 마귀가 재단을 해요. 마귀는 뭐만 체크하면 되냐면 ‘예수를 잊어라, 이제는 너 자유롭게 살아라,’ ‘예수가 잘 키워줄 거니까 너 할 것만 해!’ ‘너는 너 자체로서 가치 있어,’ 라고 자꾸 예수님의 도우심과 긍휼하심을, 사랑을, 사랑의 크심과 긍휼의 풍성함을 잊어버리도록 조치를 해 놓은 거예요. 마귀는 예수님이 적이에요. 우리는 마귀의 적 잽도 안 되요. 우리는 완전 똘마니에요. 마귀는 예수님이 젤 무서운 거예요. 예수님을 잊게 만드는 건 전부다 마귀 일이고, 예수님께 감사가 떨어지면 그건 전부다 마귀 짓이에요.

   감사가 떨어졌다는 말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런 순간 감사가 없어요. 감사는 뭡니까? ‘고맙습니다.’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나 혼자 살면서 고맙습니다가 없으면 예수님과 관계 떨어진 사람이에요. 그걸 하나님께서는 사태를 줘가지고 다시 한 번 우리로 하여금 ‘네가 지금 정신 나갔구나,’ 하고 다시 깨닫게 하시면 다시 그 순간 예상 밖의 감사와 감격이 톡톡하게 나오죠. 그게 2초 내지 3초가고, 감사와 감격이 뭉쳐진 그것이 나의 또 하나의 뭐가 된다? 나의 과거의 자아상으로 굳혀버리면 ‘주의 일’이 다시 ‘나의 일’로 가버리면 또 주님께서 일을 주면 나의 일이 뭐로 바뀝니까? 또 주의 일로 바뀌죠.

   결국은 우리를 가운데 놓고 누가 누구와의 싸움이에요? 마귀하고 주님하고. 늘 우리를 가운데 두고 우리를 노리개삼아 계속 싸울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내 힘이 아니고! 주님의 공로였습니다! 를 증거 하는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제의 믿음이 오늘까지 유효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은 오늘 치를 주께서 또 믿음을 주시는 거예요. 매일같이 그렇게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래서 여기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 죄를 위해서 내가 구하라 하지 않더냐, 이 사망의 죄가 뭡니까? 나는 도대체 네가 예수님이 여겨준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하는 것은 이미 그거는 영역이 달라요. 요한일서4장에 보면 그거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입니까. 세상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도 세상에 속한 사람은 듣지를 않는 겁니다.

   요나가 니느웨 이야기할 때 요나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들을 거니까!’ 사흘 얘기할 걸 뭐라한다? 하루치 일하고 지는 팔짱끼고 저것들 멸망한 것만 봤습니다. 그런데 얼래? 안 들을 거라고 여겼던 그들이 갑자기 짐승새끼들부터 전부 다 회개하니까 누가 삐졌습니까? 요나 자기가 삐진 거예요. 그 위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고 왜 얘기 안 해줬습니까! 삐졌습니다. 내가 이런 걸 보고 무슨 기분으로 선지자노릇 하겠습니까! 말발이 안 먹히는데! 라고 할 때 ‘네가 바로 니느웨 사람한테 배워야 한다’ ‘네가 박넝쿨한테 도리어 배워야 돼!’

   사실은 요나가 배워야할 것은 아니고 요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죠. 네 나라를 이방인이 도리어 가르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피만이 구원한다는 사실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몸을 갖고 있는 이상은 죽을 때까지 나밖에 모르는, 오직 내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기도합니다. 하지만 함께 계신 주께서 주님의 뜻과 우리 뜻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를 깨닫게 해주신 은혜를 더욱 더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