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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4강 / 요일2:12 / 안산 100108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1서

4강 / 요일2:12 / 안산 100108

정인순 2011. 1. 1. 11:08

100108 요일2:12 힘(법)모을려는 죄 vs 감사(힘빼기)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안산/안산100108요일2장12절.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안산/안산100108요일2장12절.hwp

 

 

안산100108요일2장12절

2010-09-30 09:44:51 녹취 : 박온정


안산100108요일2장12절.힘(법)모을려는 죄 vs 감사(힘빼기)

100108 요일2:12 이근호 목사

요한일서 2장12절 13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그렇게 되어있지요? 위와 아래층을 나눠봅시다. 위에 있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에게 쓰는 것은 그의 이름, 위층에 있는 그의 이름입니다.

그 다음에 이거는 자녀들에게 이야기한 거고, 그다음에 아비들에게 하는 것은 너희에게 ‘태초에 계신’ 그렇게 되어있고 ‘그의 이름’ 그 다음에 아래쪽에 뭐가 있냐면 ‘그의 죄 사함,’ 이 있고 그다음에 또 뭐가 있느냐 하면, ‘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 ‘앎’에 대해서 나와 있고, 그 다음에 너희가 ‘악한 자를 승리’ 이렇게 되어 있죠. 요한계시록 2장 12~14절까지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에서 제가 동그라미를 쳤는데, 이 밖에 있는 사람들, 이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안에 들어오면 위층 아래층 둘 다를 알 수 있겠지요. 아래층만 아는 게 아니고 위층도 알 수 있겠지요? 내가 얘기하는 이유는, 아래층 ‘죄 사함’ ‘하나님 아는 것’ ‘악한 자를 승리’ 이것만 챙기면 안 되고, 이것만 알면 안 되고, 정말 이 안에 들어왔다면 태초에 계신 분 그의 이름, 이것도 알게 되겠지요? 이렇게 알게 되었을 때에 특징이 뭐냐 하면, 지금 여기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만약에 이 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경우에는 자신의 관심사라고 할까, 자기 인생에 중요한 것은 이 바깥의 이야기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이런 이야기들은 바깥의 이야기죠? 만약에 성령에 의해서 이 안에 들어왔다 한다면 무엇을 잊어버리겠습니까. 바깥에 있는 것을 크게 여기지 않겠지요? 왜냐면, 죄 사함이 어디서 발생됩니까. 바깥에서 일어나죠? 죄...바깥에서는 죄가 일어나고 안에 들어오면 ‘죄 사함’이 일어나고, 바깥에서는 태초에 계신 분을 알게 되고, 안에 들어가면 알게 되고, 바깥에서는 악한 자에게 패배하는데 안에 들어오면 승리하고,

이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것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이 문제가 진지하고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지요? 이 안에 들어온 사람의 특징은. 사람들에게 “교회 가보세요,” 하면 바쁘다는 거예요. 바쁘다는 의미가 뭐냐 하면 바깥에 있는 것이 자기의 주 관심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교회에 와서 성령의 충만을 입게 되면, ‘죄 사함’ ‘악한 자를 승리’ 이것 때문에 그 순간 무엇이 소홀해지느냐 하면, 교회 오기 전에 아주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왔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성령 안에 들어오게 되면-요한일서 자체가 성령 안- 우리에게 심각했던 문제들이 시시하게 되요. 중요하지 않는 일이 되요. 별로 소중한 일이 아니고, 심각한 일이 아닌 것을 아는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교회 왔는데, ‘죄 사함’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이 사람이 교회 안에 앉아 있어도, 이 사람의 마음은 다 어디에 가 있습니까. 콩밭에 가 있겠지요.

그래서 목사 설교 듣고 성경 봐도 들어오지도 않고, 이 사람은 빨리 끝내고 어디로 가야되요? 바깥으로 나가야 되요, 자기 볼 일을 봐야 되요. 그러나 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이 건성이고 아무런 중요하지 않고, 그야말로 태초에 계신 분도 없고, 그의 이름도 없고, 그의 이름이 자신에게 죄 사함 받은 관계도 아니고, 교회 다니면서도 예수가 누구신지 모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오늘 중요한 이야기 많이 했는데 -이 이야기를 먼저 드리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보기 전, 성경공부 하기 전까지는 늘 들은 것, 다 아는 이야기다, 이렇게 평하지만 말씀을 지식으로 들으면 다 아는 이야기예요. 하지만 말씀과 더불어서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할 정도가 됩니다.

베드로가 산에서 내려가면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더라도 산을 내려가는 게 싫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것, ‘이게 현실인지 진짜 몰랐다, 바깥에 있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했는데 막상 자기가 모세, 엘리야, 예수님, 자기까지 포함해서 같이 네 사람이, 총 여섯 사람이죠? 여섯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니까 세상만사 모든 시름 잊고, 여기서 영원히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영원히 있고 싶은 그런 것을 베드로가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체험을 했으면 기분 좋겠지요. 좋은데, 문제가 뭐냐 하면 다시 그 산에 등산해도 그 엘리야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예요. 무슨 말이냐면 이런 은혜를 받더라도 내가 이 세계, ㅡ안산시 부곡동 몇 번지...이게 늘상 이렇게 있으면, 우리는 세상적으로 어렵다 싶으면 후딱 뛰어 들어가서 은혜 받고 또 나가면 될 텐데ㅡ 이 세계가 성령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동해버리면 그 자리가도 없다는 거예요. 옛날 이동도서관이죠.

이동도서관이 늘 그 자리에 있으면 책 빌려주면 되는데 이동도서관이 어느 날 가버리면, 이동도서관에 책 빌리러 가도 도서관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예수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사람을 붙잡아 땡길 때 영광인 줄 알아야 됩니다. 이거 축복인 줄 알아야죠.(아멘)

‘교회 가면 늘 은혜 받더라’ 그런 거 없습니다. 교회 가면 늘 은혜 받는 거 아니에요. 우리교회 교인들은 늘 은혜 받아요. 은혜 받는데, 가끔 지난 번 설교 때 은혜 받은, 눈물 흘리곤 하던 사람이 이번 주에는 딴생각 하고 있는 거예요. -휴대폰을 본다거나- 말씀 안에 못 들어가고 교회는 왔는데, 분명히 바쁜 시간에도 불구하고 교회 왔는데, 자꾸 바깥에서 땡기는 거예요. 그래서 태초에 계신 분도 관심이 없고, 그의 이름도 관심 없고, 죄 사함도 관심 없고 ‘악한 자의 승리’에서 오는 아무런 기쁨도 없고, 빨리 예배 참석하고 빠져나가 자기 볼일 봐야 돼 볼일.

사람이 예수님에게 포착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예수님께 포착 당해야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런 경험이 우리한테는 손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전에 은혜 받았던 것이 실제로 예수님이 은혜 주셨다는 것을, 은혜 받지 못한 것을 새롭게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은헤라는 것은 똑같이 성경보고 똑같이 기도하고 똑같이 찬송해도 은혜라는 것은 올 때있고 안 올 때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올 때있고 안 올 때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한번 오게 되면, 더 이상 이 땅에 살기가 싫어요. (아멘) 그냥 죽어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고 싶은 거예요, 은혜 올 때는. (아멘) 그런데 은혜 안 올 때는 빨리 교회를 떠나고 싶어 예배 끝나고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악한 자라도 승리가 즐거움이 불과 3초? 2초?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예요. (잠시 현장이 소란함: 강의시간에 들락날락 하지 맙시다) (국지성 소나기 같은 소음이...녹취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요한일서에 보면 제가 적어봅니다. ‘그의 이름으로’ 그 다음에 뭘 받느냐 하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그의 이름으로 어떻게 죄 사함 받는가?」문제 내면 알아맞출 사람 별로 없을 걸요.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 받는다” 이게 가능합니까?

‘안중근 의사 믿으면 죄 사함 받는다?,’
‘틀린 것 같은데...’
‘이순신은?’
‘틀린 것 같은데?’
‘왜 틀리는데?’
‘하나님이 아니니까’ ( 목사님과 어무이 따라 온 꼬마친구의 문답이었음)

지금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 받는다.’ 이게 왜 맞아야 되는데? 안중근은 안 되고, 이 순신도 안 되고, 왜 맞아야 되는데? ‘그냥 믿어라’ ‘맞다’ 이럴 수가 없거든요. 그러면 그건 미신이 되는 거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 받을 때, 이게 어떻게 죄가 사해지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 있고, 예수님이 여기 있다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뭐가 오느냐 하면, 이름이 오거든요. 이름이 온다 이 말이지요. 이것도 상당히 어려워요.

이것도 상당히 어려워요. 누가 이름을 부를 때 이름이 명찰에 붙었으면 명찰 떼 가지고 ‘ 죄 사함 ’ 받으라,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쉬운데, 이름 있는 명찰 떼 가지고 ‘너희 두뇌가 죄 지었으니 두뇌 뗄 게’ 이럴 것 같으면 요술 같고 쉬운데 이렇지는 않잖아요.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이 죄 사함 받습니까. 이것을 시원하게 설명할 신학이 없습니다. 신학이 없어요.

‘그냥 믿어라, ’ ‘어떻게?’ 예수 이름 믿으면 죄 사함 받는데, 무조건 예수 이름 부르자, ‘그런데 세게 부를까요 살살 부를까요? 나직이 부를까요.’ ‘세게 불러라’ ‘몇 번요?’ ‘세 번 불러라’ 이런 식으로... 예수란 이름이 죄 사함 받습니까. Jesus 가 죄 사함 받습니까. 한글로 해야 죄 사함 받아요? 아니면 영어로 해야 죄 사함 받아요. 관계가 굉장히 복잡합니다.
오늘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왜 예수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 받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죄를 지을 때 죄를 누가 짓느냐 하면, 예수님은 지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죄인이 디를 짓지요? 죄인이 죄를 지으면 죄인에게 어떤 이름이 있더라도 사람이 죄를 지어버리면 그 사람의 이름은 ‘죄인’이 되어버려요. 죄인이 되면서 자기 이름에서 떠나 어디로 가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언약이 뭐냐, 언약은 옛날 이스라엘 때 죄인들이 양을 들고 오면 양에 피를 내어 그 피를 보고 용서해주는 것이 언약이에요.

그러면 언약이라는 것이, 약속이 성립되려면 약속이 위에서 내려오는 통과 아래서 들어가는 통이 있어요. (이렇게 쉽게 얘기해야 알아듣습니까) 안에서 들어오는 통은 뭐냐 하면, 통 안에 죄가 들어가야 되요. 죄가 들어오고 위에서 내려오는 게 있어야 되요. 이게 뭐냐 하면, 그 죄를 씻어주는 것은 위에서 의가 내려와야 되고, 은혜가 내려와야 됩니다.

그런데, 들어올 때 우리는 뭐냐 하면, 우리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언약 안에 들어갈 때는 모든 이름은 (예: 이근호 라든지) 모두 없어지고, 언약의 이름으로만 여기 들어옵니다. 그 이름이 뭐냐 하면〔아담〕이에요. 아담입니다. 남자든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상관없어요. 하나님은 하나의 이름만 이야기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할 때 아담을 대표자로 세워서 언약을 하는데, 옛 아담, 첫 아담과 새로운 아담, 새로운 아담이 누구겠습니까.

예수님 사이에서 언약이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적 자격으로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볼게요, 중요한 거. ‘개인 이름으로 죄 사함 없다’ 내가 옛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까 못 받습니까? 못 받는 거예요. 우리가 어디로 들어가야 됩니다. 언약 안으로 들어가야 되요. 우리는 언약이라는 것을 치우고, -돈 찾으려면 은행 가야되지요? 그럴 때 우리가 은행에 가면 고객입니다. 고객이 되죠. 은행에서 통하는 용어가 따로 있어요. -

우리는 개인적 이름이 없고, 한 사람에게 복속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담이 되려면, 우리는 뭘 버려야 되냐면, ‘나는 변호사다’ ‘나는 판사다, 목사다, 집사다’ 이게 언약 안에서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전혀 안통하고, 오직 하나만 통해요.【나는 죄인이다.】
캄캄한 밤에 가로등이 꺼져버리면, 누가 빨간색을 입었는지 까만색을 입었는지 색깔이 보일까요? 안보일까요? 며칠 뒤에 요한복음 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그걸 하나로 통일합니다. 뭐라고 하냐면,【어둠】으로 통해요. 어둠인데 나는 목사다, 나는 집사다, 이건 안통합니다. 주님은 빛이니 빛 앞에서 모두는 어둠입니다. 어둠은 요한일서에 보면 이건 죄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죄 없다,’ 하면 사람 취급도 않습니다. 사람은 곧 죄인이고, 죄인으로 일단 만들어놔야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분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이문열이라는 소설가는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의 출생에 갈릴리 출신이고 키가 얼마고, 몇 살이고, 이렇게 보는 것은 어떤 안목에서 그렇게 보는 겁니까. 죄인이 아닌 안목에서 ‘나나 너나 똑같은 인간인데뭐, 공자 맹자 똑 같아, 소크라테스도 똑 같아,’ 이럴 경우에는 예수님을 어떤 입장에 두냐 하면, 이문열이라는 입장에서 예수를 바라보잖아요.

이문열 입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의 진면목이 그 사람에게는 와 닿지 않습니다. 예수나 자기나 똑 같이 돼버려요. 유명한 영화 예수님이 고난 받은 영화 있잖아요. 멜 깁슨의 ‘그리스도의 고통(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이 많지만 제가 보기에는 불만이 많아요. 보는 관점이 ‘고통’에 치중돼 있죠.

일종의 아픈 것도 괘락입니다. 미리 얘기하자면, 고난 받고, 순교하고 아픔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주신 모든 법을 모독할 수가 있어요. 법을 지키는 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새디즘sadism 적인 것이고, 하나는 매조히즘masochism 인데,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피학적인 것 반대말은 가학적인 것인데, 인간은 법을 다 시키면 법대로 다 해요, 법을 다 지켜서 법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드는 식으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서 법을 주신 사람을 모독하려는 목적으로 법에게 순종하는 그런 타입.

옛날 할머니들, 시어머니들, ‘그래, 시켜라!’ 시키는 것 다 하므로 말미암아 명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약 오르게 만드는 거예요. 어떤 법이든 다 지키는 거예요.(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 특징) 그런 방법이 있고, 가학적인 방법은 뭐냐 하면 법 위에 뭐가 있느냐 하면, 법 위에 선이 있잖아요. 그 선을 악으로 바꾸어서, 이것을 무정부주의-이것 어려운 말입니다만, 정부가 없으면 자유잖아요. 구름 위의 법이라고 구름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구름 위로 올라가면 뭐냐 하면 모든 법을 무시함으로써 자유를 얻는 즐거움, 이걸 가학적인 것입니다.

‘너는 이야기해라, 나는 무시 하겠다’ 법을 무시함으로써 자유를 느끼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을 깔보는 것과, 법을 다 지킴으로써 깔봐서 법을 능가하는데, 두 가지 특징이 뭐냐 하면 어떤 식으로든 ‘법 자체를 벗어나겠다’는 거예요. 법만 벗어나면 우리는 뭐가 안 됩니까. 죄인이 안 되죠. 한 사람은 법을 무시해서 죄인이 안 되고, 한 사람은(강압적인 것) 모든 법을 지키기 때문에 법의 저촉을 안 받는 사람.

교회는 어느 쪽이 맞겠습니까? 피학적(masochistic)입니다. 이게 참 교회에서 많아요. ‘당신은 죄인입니다’ 하면 저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저는 죄라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목사님 시킨대로 다 하는데 무슨 죄인입니까?’ ‘이렇게 시킨대로 다한 나의 인생을 힘들게 한다면 이것은 명령주신 하나님 잘못이지, 그 명령대로 고분고분 순종한 내 잘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실수 한 거죠. 나에게 이렇게 고생 시킬 이유가 없어요. 당신 실수 한 거야,’

지금 제가 욥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욥에 관한 논문 내용이 뭐냐 하면, -내용을 올릴 수도 있는데 잡지사와 약속 때문에 3월에- <욥의 세 친구의 신학> 욥을 비난했던 세 친구가 어떤 신학을 했기에 욥을 비난할 수밖에 없는가, 한 거예요. 그쪽은 뭐냐 하면, 그 세 친구는 피학적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 양심이 시키는대로 다 했어요. 양심껏 살았기 때문에 ‘죄’라나 게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욥은 벌 받은 거 보니까 분명히 ‘네가 모르는 죄’가 있다는 겁니다. 회개해야 된다는 겁니다.

바로 오늘날 사람들이 ‘십자가 믿으세요’ ‘복음 믿으세요’ 하면 복음과 십자가를 뭐라고 하냐 하면, 이걸 법으로 봅니다. 법으로 보니까 십자가를 믿어줘요. 놀라운 사실은, 십자가를 믿어주고 복음을 받아줍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선교단체에서 많이 하는 대목 아닙니까. 그들이 ‘해줘요’ 해주고 난 뒤에 이런 것까지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꼬이게 만들면 책임은 누구 책임이냐? 예수님 당신 책임이다, 왜, 나는 할 도리 다 했기 때문에. '내 인생을 이렇게 어렵게 하는 것 당신 실수 한거야‘ 이렇게 됩니다.

마귀도 여러 질이지요? 그러면 교회 목사 입장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돌아갑니까. 가학적인 마귀보다도 피학적인 마귀를 아주 좋아하지요. 왜? 그래야 교회에 돈이 모이니까. 돈 바치고 다 바치니까. 목사들도 이걸 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완벽을 기하라고 당근과 채찍을 때리지요. 그러면 점점 더 자신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과 자기가 경쟁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못 지킨다’ 자기는 ‘지킬 수 있다’ 누가 이기나 보자, 하나님과 시험이 붙어가지고 기어히 자기가 승리할 때까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정 자신 없는 것은 미리 나중에 지킬 것은 빼놓고, 성경말씀 가운데, 못 지킬 것은 빼놓고 지킬 것만 지켜놓고 그것으로 자기의 상급을, 보너스를... 그 상급은 죽어도 보너스고 살아도 보너스고. 이런 잘못된 건 근원적으로 잘못된 거거든요. 무엇이 잘못 됐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말로 ‘비규정’이라고 하는데 규정이란 말은 정하는 거고,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가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새 언약도 우리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 했죠? 예수 믿으면 지옥간다고. 예수님 믿으면 지옥 가고 예수님이 믿어지면 천국간다. 했죠? 이것은 비규정이기 때문에 선택해서 믿을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에요. 남자하고 여자하고 저 남자를 차버리느냐, 내 남편으로 받아 줄 거냐 하는 것은 규정된 거죠. ‘지금이라도 약혼 파기하면 그만이다,’ 고 하지만 막상 남자가 여자와 결혼 해놓고 이혼을 하겠다, 할 때 그때 주위에서 뭐라 합니까? ‘야,야, 이거 네 운명이다.’

운명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파기하지 못한다,’입니다. 목사는 또 뭐라 합니까.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서약... ‘내 앞엣 서약했잖아.’ ‘서약했는데 파기하면 너 저주 받는다, 벌 받는다, 너 지옥간다,’ 이럽니다. 간음한 연고 없이 이혼하면 간음죄에 해당되죠? 운명은 파기될 수가 없죠. 파기될 수가 없다는 말은 이걸 가지고 ‘비규정’적이다 이 말이지요.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세요. 결혼하기 전부터 내가 다룰 수 없는 대상이 돼야 되잖아요. 내가 결혼하기 전에는 다룰 수 있고, 결혼한 뒤에는 내가 못 다루고, 이거 앞뒤가 안 맞잖아요. 제가 여러분 사기 치는 거 아닙니다. 맞잖아요! 첨부터 ‘이건 운명이다’ 이래야 될 건데,
‘당신하고 내가 결혼한 건 운명이다’ 이러면 말 않는데, 그게 아니고 첨에는 남자 문어다리 열댓 명 걸쳐 놓고, ‘얘는 키가 작아서 문제고, 얘는 집에서 반대해서 문제고, 얘는 직장이 변변찮아서 문제고, 이거는 인물이...문제고 ’ 자기가 골라잡아 놓고, 결혼해놓고, 자기가 규정해놓고, 저 남자는 50점, 60점 해놓고, 50,60점 비교 했으니 자기도 50점짜리 되는 거죠.

참 이게 재밌는 것은요, 남자들이 여자를 정해 결혼을 해놓고,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을, 안 가진 사람이 거의 없어요.‘아, 내가 미쳤지, 그때 내가 정신나갔지, 왜그랬을까?’ 고를 때는 따지고 따지고 천번을 따지고 만번을 따져놓고, 해놓고는 ‘미쳤지, 내가 뭐에 씌었지’ 그것은요, 첨부터 인간은 아담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규정적으로 본다는 사실을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자신의 구원을 비규정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눈을, 시선을, 내가 예수님을 보지 말고, “예수님 저 어때요?” 시선을 예수님께 돌릴 수 있는 사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이게 신앙이에요. 그렇게 되면 이혼하고 않고는 문제꺼리가 안돼요. 왜? ‘죄 사함’ 받게 되어 있으니까. (어렵다, 어렵다 무슨 말인 지 어렵다) 만약에 우리가 규정하면, 내가 만약에 이혼하잖아요. 결혼은 하나님 주신 강제규정이기 때문에 내가 이혼할 수 없어. ‘사람이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파기하면 안돼.’ 라고 말해놓고 이혼을 했다 이 말이지요.

이혼을 했으면 그 사람은 이혼이 나쁜 겁니까, 결혼은 파기할 수 없다는 게 나쁜 겁니까. (내가 말을 어렵게 했습니까?) 둘 다예요. 둘 다 자기 꾀에 빠진 거예요. 첨부터,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은 깨지지 않아’ 라고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 꾀에 빠졌어요. 주님께서 가만히 보시고, ‘미쳤지, 혼자 믿음 좋다고 웃다가 울다가, 누가 뭐라 했어?’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은 깨지지 않는다는 말은 사람이 찢어도 찢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걸 하나님의 명령으로 들어버리면, ‘하나님은 못하지만 나는 한다, 해볼까? 하나님 보란 듯이 이혼 해버려’ 그것은 애초부터 하나님 말씀에서부터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깨질 것 같으면 그건 명령도 아닌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오기가 있어서 ‘하나님, 안 깨진다고요? 그럼 제가 한번 깨볼게요.’ 자기가 맘대로 생각해 놓고...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 법은 우리가 위반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위반할 수 없습니다! 위반하고 싶어도. 살인을 하고 아무리 위반을 해도 위반되지 않아요. 원래 그게 법이에요. 위반이 안 되는 거예요. 위반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마귀는 뭐라고 합니까? ‘너는 법을 어겼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에라, 개판이다 나 이제 예수 안 믿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누가 믿으라고 했습니까?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은 거예요.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뭐는 벌써 탈출했습니까. 인간의 손에서 생명나무는 탈출했지요? 선악과 따먹은 모든 죄는 무성으로 나중에 보상됩니까. 하나님의 규정은 (인간보기에 비규정이니까) 생명나무에 의해서 선악과에 대한 죄는 어떻게 되요? 사함을 받잖아요. 용서 받는 다는 뜻. 생명나무가 있는 한 선악과 따먹은 죄는 생명나무에 흡수되어서, 제거가 되는 겁니다. 이걸 믿는 거예요.

그럼 뭘 믿느냐면, ‘나는 믿는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믿는 게 아니고, 주께서 나에게 뭘 하셨는가를 믿는 거예요. 이게 신앙이라고... 맨날 어겨요, 아침에 눈만 뜨면 어겨요 모든 게... 그렇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법을 위반한다 하지 않는다? 위반하지 않잖아요. 그 혜택과 그 결과를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게 요한일서예요.

‘주님과 사귀라’ 이 말입니다. 엉뚱한 사람들과 사귀지 말고. 주님과 빛 아래서 사귀라는 말이, 사귀면 뭘 받습니까? 내가 행한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행한 대가를 우리는 값없이 그냥 받는 거예요. 그래서 좋은 친구, 주님이라는 친구를 사귀라 이 말이지요. 사귀면, 다시는 그 안에는 심판이 없고, 그 주님 주신 사랑이 너희 모든 죄를 다 덮느니라.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그런데 교회서는 어떻게 가르칩니까. ‘여러분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고 안 믿으면 지옥갑니다’ 하니까 하루에 두 시간 믿고, 30분은 안 믿고, 새벽기도 할 때 믿고, 새벽기도 나와서 화나가지고 삐져서 안 믿고. 이게 밤송이입니까? 쭉 가다가 떨어지고, 쭉 가다가 떨어지고, 이게 뭐에요. 어떤 사람은 제게 질문하기를, ‘목사님, 만약에 어떤 할아버지가 치매 걸리면 치매 걸리기 전에 믿었던 거 다 소용없이 되는 겁니까? (치매: 기억력 상실) 60대까지 예수 잘 믿었습니다. 70대에 치매 걸렸어요. 끊어졌습니다. 그러면 계속 끊어져 죽었습니다. 지옥 갔습니까. 천국 갔습니까. 지옥!(어무이 따라온 꼬마의 답변)

이런 불안감 자체가 자기가 뭘 믿느냐 하면, 자기 몸이 아팠을 때 과연 내 믿음을 내가 유지할 수 있을까, 여전히 자기 행함에 대해서 기대를 거는 그것이 주님이 주신 사귐이 아닌 상태에 빠진 거예요. 우리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성령께서 그것을 다시 회복해 주십니다. 조금 더 이야기 해 봅시다. 제가 지금 이걸 이야기할 게 아니고, 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법은, 우선 사람들 생각을 해봅시다. 사람들 생각에 법 위에 뭐가 있냐 하면, ‘선’이 있다고 본 거예요. 선을 보여주기 위해서 법이 있기 때문에 ‘법을 지키면 선에 이를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틀린 생각입니다. 이 법은, 사실 이 법이 어디 들어 있냐 하면,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우리 마음속에 이 전체가 다 들어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속에 어떤 법이 있느냐가 문제가 되고, 예수님 안에 법은 어떻게 들어있냐, 이게 중요하죠.

우리 안에 법은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악의 법에 따라서 선에 이를 수 있다, 악에서 멀어지고 점점 더 선에 이를 수 있다, 이걸 성화론이라 하는데, 교회 와서 예수 믿는 건 은혜로 믿고 영광 돌리는 것은 행함을 영광 돌린다, 은혜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상급 받고 하는 공식이 교회에 있는데, 이것은 성경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속에 있는 ‘법 감정’을 그냥 성경 구절가지고 꿰맞추는 식의... 속임수죠.

이런 속임수 제하고 나면 뭐가 남습니까. 법은 지킬 때는 자기가 선한 줄 알았는데, 남들 다 지켜버리면 사람들은 짜증이 나죠. 남들 다 지키는 법 같으면 자기는 남들이 못 따라오는, 지키기 힘든 법을 지키려고 해요. 신장이식 같은 거, 또는 헌혈, 선교를 해도 일본 같은데 말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하는 것. 어쨌든 나를 조금이라도 학대할 수 있는 것. 문둥병자하고 손 만지고 악수해서 자기도 문둥병 걸리는 그 데미안 신부같이 또는 데레사 수녀같이 모든 걸 포기하는 것. 교회 와서 기도 5초만 하고 가는 사람 말고, 두 시간 하는 권사, 이런 사람 그 사람들이 모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선을 이루기 위해서, 선을 이루는 것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사람이 지켰던 레벨, 20점 박리의 선이 있고, 막상 20점하고 나면 선은 저만큼 더 멀어지겠지요. 그래서 따라붙기 위해서 30짜리 하게 되면 선은 더 멀어져 있어요. 여러분, 산 넘어 산 알지요? 이 산 넘어가면 될 줄 알았는데 넘어가면 산이 또 있지요. 이거는 마귀의 속임수인데, 지키면 지킬수록 자책감만 더 늘어나요.

그러면 예수님의 법 감정은 어떤 법 감정이 있느냐 이게 중요한데요.
예수님은 법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선이고, 선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법이 자기 안에 움직일 때마다 법이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법이 같이 움직여요. 그래서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법을 지켜야 된다는데 예수님은 법을 지키는 게 아니고, 움직이는 자체가 법이에요. 모든 게 법이 되요 모든 게. 밥을 먹든지, 오줌을 누든지...모든 게 법이 되는 거예요.

어긴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법이 이쪽에 있고 인간은 여기 있으니까 그만큼 틈이 벌어져 있는데, 예수님 같은 경우에는 성령이 같이 있기 때문에 굴러가는 눈송이처럼 굴러가는 자체가 하나의 법으로서 굴러가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에게 법이 있고, 우리는 여기 있어서 벌어져 있으면, ‘바빠서 못 지켰습니다.’

‘지난번 지킨 것으로 대충 때워주...’ 지난번 여유롭게 착한일 했기 때문에 이번에 악한일 있더라도 착한일 떼내가지고 악한일 상쇄시켜 무마해달라, 이런 식의 법은 항상 명령을 하기 때문에 성경 하루에 석장 기도 하루에 두 번씩 명령하고, 바빠서 못할 경우에는 미리 여섯 장을 읽어요. 미리 여섯 장 읽으면 내일 안 읽어도 되잖아요.

애를 때렸다, 나쁜 일이다, 그 대신 사탕 사줬다, 자장면 해줬다, 그러면 엄마로서 양심이 어떻게 됩니까? 괜찮죠? 나쁜 일 했는데 자장면 해줬으니까, 보상되니까 없어지죠? 항상 법이라 하는 것은 바깥에 있어도 내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바짝 뛰어야 잡히고, 어느 착할 때는 잡히고, 나쁜 짓할 때는 도망을 치는 것처럼, 도망치면 뭐가 나오죠? 징계와 저주와 형벌이 오기 때문에 이것도 골치 아파요.

그래서 따라 잡아서 근처쯤 가야 축복이 오고 너무 멀어지면 형벌이 오는 거죠. 제가 어떤 십일조 하는 사람과 이야기했어요. 십일조 시험해보세요. ‘십일조 해서 시험하라,’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저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십일조 안 해봐라, 저주 오는지 안 오는지’ 안 오거든요. 그렇게 해서라도 바깥에 법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망상이에요. 죄인의 망상...

우리 주변에는 법이 없어요. 내가 있다는 자체가 법이에요. 왜 법이냐면, 여러분 허파가 양쪽에 있죠? 법이 와서 한쪽은 예수님 쪽으로, 한쪽은 누구? 아담 쪽으로 예수님은 의인, 아담은 죄인. 법이 이렇게 만들 때 완성이 되는 겁니다. 짝이 되고 세트가 된다고요. 우리는 죄인 역할을 해야 되요. 죄인 역할을 하면 되는 거예요. 법이 있으니까 죄인 역할을 하라고 주어진 건데 우리는 자꾸 죄인 안 되려하는 거예요.

말을 지독히 안 들어요 인간들이. 죄인 되라고 법을 줬는데 예수님이 십일조 얘기할 때, 십일조가 뭐냐 하면 사람이 십분의 일을 놓치게 되면 의와 인과 신을 반드시 놓치게 되어 있어요. 자기 십일조 내는 그 귀한 돈을 내는 의욕, 주님이 주신 자비로움과 긍휼하심과 용서하심과 이런 걸 다 까먹게 되어 있다고요. 십일조를 해 봐야 안다니까요. 십일조를 해 볼 때 ‘햐, 인간은 십일조 하면서도 역시 돈밖에 모르고, 돈 내면서도 티내는 자기 의밖에 모른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율법 자체가 그래요. 여러분 남편이 일요일에 등산가자 하는데 억지로 등산하지 않고 교회 오시면 눈물 납니다. 뿌듯합니다. ‘주여, 오늘도 마귀를 이겼습니다,’ 뿌~듯 해요. 그게 바로 죄에요 죄. 우리 조상 아담이 뭘 먹었습니까? 선악과를 먹었잖아요. 그 먹은 것이 DNA로 접수되어 우리 안에 있다고요. 독이 있으면, ‘이게 우리 조상이 먹은 독입니다’ 내 놓기만 하면 되요.

그러면 의로움도 없어요. ‘아, 아담이 먹었던 죄란 게 이런 거구나’ 내놓으면 이게 하나님의 법에 합작되는 거에요. ‘옳지, 옳지, 진작 그러지 진작...옳지, 옳지 잘한다’ 이건 선악을 따먹은 게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었지요? 선과 악을 아는 지식: 이게 선일까요 악일까요? 옮지! 오랜만에 맞네요. 악이라니까요! 이게 악이라니까요. 재미있죠? 우리는 선을 알면 전적으로 악이 아니라고 우기잖아요.

하나님, 저는 악만 아는 게 아니고 선도 압니다. 누가 알라 했냐 말이죠. 모르게 하려는데 왜 알았냐, 이 말이지요. ‘알면 어떻습니까?’ ‘알면 악이지’ ‘알면 왜 악입니까?’ ‘알면 악이지,’ 하나님 작업이 안돼요, 하나님 작업이. ‘이제부터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지,’ 하면 자기 자존심은 되는데, 문제는 인간을 구원할 하나님 작업이 안 된다니까요. 전에 얘기했잖아요. 일곱 살 먹은 딸아이가 잡채 만들 줄 모르면서, 오랜만에 집들이한다고 손님들 오셨는데 그냥 게임하고 놀아라했는데, 잡채 한다고 해갖고 잡채 다 태워 엉망진창 만들잖아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겠다는데, 하나님이 일을 하겠다고 생명나무를 다치지 않게 했거든요. 인간을 개판 만들려면 생명나무 따먹고 영원히 죽어라 했을 겁니다. 생명나무를 지켰다는 말은 그만큼 여유를 준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한 것은 그만큼 여유를 준겁니다. 여유를 주었지만 자기 힘으로는 해결 안돼요. 왜, 생명나무를 막아놨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생명나무 따돌려서 어떤 조치를 취하려는데,

하나님 없이 자기 자체적으로 선과 악을 가지고 어떤 의로움을, 구원을 해결책으로 하려는 거예요. 그러니까 외부에서 선과 악에 부합되는 법을 준다고요, 법은 무엇과의 만남이냐면 인간의 선악과의 만남이에요. 다시 합니다. 선악과는 뭐라 했습니까. 이게 죄죠? 그러니까 법이라는 것은 율법의 어떤 만남입니까? 선악과 따먹었다는 죄와 만나면서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게 죄가 아니고 오히려 의가 된다고 오해를 한 겁니다. 죄가 아니고 의가 된다고 오해를...

그래서 오늘날 목사들도 뭐라 합니까. ‘여러분들 목사가 시킨 대로 하면 여러분은 의롭습니다’ 맨날 ‘복 받았습니다’하는데 복 받았다는 건 의롭기 때문에 복 받았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자꾸 복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죄인인 걸 모르고 ‘아, 내가 악에서 멀어지고 선과 가까이하면 내가 목사님 말씀대로 복 받는구나 열심히 해야지’ 이런 식으로 유도가 될 거예요.

하나님이 전체를, 법을 주었다는 것은 법이 있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뭐하기 위함이라? 더욱 더 죄 되게...죄를 드러내게 하려함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법으로 계시는데 결국 법으로 계신 것이 뭐냐 하면, 십자가죠. 십자가 죽으신 이유가 뭡니까.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뭘 느낍니까. 우리는 뭘 해도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1)죄인 되게 해서 2)십자가 피로 우리를 용서의 대상이 되죠.

그렇다면 십자가 앞에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용서의 대상이죠. 용서의 대상, 이미 구원받은 사람인데 우리는 이 안에서, 어째서 우리는 예수님 피로만 구원받아야 하느냐, 하는 이유는 ‘이 안에서 평생을 보내면 된다’ 이 말입니다. 이 관계는 새 언약의 관계기 때문에 예수님과 안 떨어지고,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면 우리는 자기 행함을 통해서 죄를 아는 것이 아니고, 법을 통해서 죄를 아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알게 되요.

만약에 법을 통해서 죄를 알게 되면, 아까 말씀한 것처럼 법을 조금 지켰다하면, 주일 성수 했다 해버리면 뿌듯해요. 죄인 느낌 안 듭니다. ‘주여, 영하 25도에도 열심히 교회 갑니다’ 만약에 법에 의해서 죄를 느끼는 것은, 그 법을 안다는 것 자체가 자기 의가 돼버립니다. ‘나는 몰랐는데 이번에 알았어’ 얼마나 훌륭해요.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이미 완료거든요.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죄 인 것이 드러났다는 그 즐거움.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는 그 즐거움.

따라서 여기에 뭐가 필요 없냐면, 죄책감이 필요 없어요. 죄를 알면 되지 죄책감 들 필요는 없습니다. -오랜만에 좋은 소리 한번 한다- 죄를 알면 되지, 왜, 원래 누구 모습이기 때문에? 원래 내 모습이기 때문에 죄를 알면 되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만약에 사람이 죄책감을 가져버리면 이것은 내부적인, 내 안의 선과 악이기 때문에 만약에 아이가 대학3수인데 수능점수가 또 안 나왔다, 그러면 여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이번에는 기도빨이 쎄가지고 서울대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서울대 못 들어갈 점수가 되었다.

여기서 파생되는 게 뭐냐, 나는 죄인이다, 하면 괜찮은데 죄책감이 발생되면 문제예요. ‘아 저번에 교회 건축한다는데 돈을 안 냈다. 총 전도대회 때는 내가 목사 하는 정책에 뒤에서 숨어서 비협조적으로 했구나, 옆에 장애자가 왔는데 전도를 해야 되는데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전도 안 했더니 이렇구나, ’ 하고 죄책감이 드는 거예요.

죄책감이 들면 3수하는 자식을 생각하는 죄책감을 없애야 되죠. 죄책감 없애는 방법은 과도한 오버, 과도한 순교, 자학, 희생을 하게 되요. 그러면 뭐가 됩니까. 이게 상쇄되어 어떻습니까. 뿌듯하죠. ‘주여, 하나님도 삐질이지, 교회 한번 안 나왔다고 그렇게 아이 성적을 나쁘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는데, 인간은 엉뚱한 하나님을 상정해가지고, 자기가 상쇄한, 허구죠? 우상적인 하나님을 생각해가지고 자기 맘대로 하나님과 거래하고, 타협하고, 협상하고 이렇게 다 해요. 

그러면 얼마면 돼? 얼마면 돼? 하나님 얼마면 되겠습니까. 목사들이 또 죄책감의 심리 이용해 ‘분명히 하나님께서 서운한 게 있습니다. 아이가 아프다든지, 목사를 뒷담화 한다든지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다 있습니다. 없는 사람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아니고 법적인 관계,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된 겁니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 십자가 앞에 죄 사하심으로 우리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죄책감을 갖지 말고 뭘 가져야 하느냐, 죄를 즐기면 됩니다. 죄가 뭐냐 하면, 이거예요. 죄라는 것은 힘의 소유입니다. 힘의 소유라면 힘은 어디에 필요하냐면 자립도 신앙입니다. 구약에서부터 모든 우상들의 죄는 어떻게 하면 따로 힘을 축적할 수 있느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거룩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희생이에요. 내어주는 것. 봉사죠 봉사. 아까전에 자기가 죄인 같으면 죄책감 없고 죄인 돼버리면 예수님 때문에 죄 사함, 용서 받았잖아요. 두 개의 허파처럼, 한쪽에는 예수님의 이름, 한쪽에는 아담 이름(죄인)으로 죄 사함 받았는데, 죄라 하는 것은 ‘힘 모으기’거든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되려면 뭐가 되냐면 힘 빼기예요. 행복이란 무엇이냐면, 행복이란 힘 빼는 거예요.

목사님 자제분 세 명인 거 처음 알았거든요. ‘세 명 가지고 어찌 키웁니까. 최소한 네 명까지는 안 되나요?’ 이렇게 나와야지 ‘힘듭니다’ 이러면 안 되고 ‘아직도 다섯 명을 못 낳아, 다섯 명 낳아야 될 텐데’ 힘을 빼는 거예요 힘을. ‘세 명 키운다고 정말 노고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섯 명 키우는 사람 앞에서 제가 부끄럽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가진 힘을 빼버리면 그게 행복한 거예요.

남이 뭐 자랑할 때? 남이 힘자랑할 때 ‘나는 힘 없음’을 자랑하면 되요. 힘없음을. 왜냐면 힘없어도 구원받으니까. 천국가니까! 제가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설교 했지요? 시골에 가면 옛날 사진관 있죠? 사진관 보면 옛날 조잡한 사진, 야유회 안 나가고서도 야유회 나간 것처럼 뒤에 의자 배경에 놓인 그림처럼 저는 뭘 보냐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를 뒷배경으로 깔고 봐요. 자기가 아무리 의사, 목사라 해도 ‘당신은 천국 갈 사람이야? 거지 나사로와 합류할 사람이야? 부자와 합류할 사람이야? 뒷배경을 보고 둘 중에 어느 쪽이야? 이러고 봅니다.  

거지 특징이 뭡니까? 힘이 없어요. 힘이. 어느 정도 힘이 없냐면, 개들이 와가지고 핥아도 쫓아버릴 힘이 없어요.‘간지러워, 저리가!’ 거지 나사로의 특징은 아무 힘은 없는데 어디 갔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있는 천국에, 낙원에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질 때 힘없이 졌어요.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우리도 이와 같이 ‘힘’ 빼자. 힘 빼는 걸 두 자로 하면 뭐냐 하면 ‘의지’한다 ‘믿음’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힘 빼고 살아도 같이, 한 세트, 언약 안에 있는 한 세트와 짝을 이루는,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힘없는 죄인도 구원받습니다.》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빛 안에 사는 힘이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이미 너희들이 받았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성경을 볼 때, 우리 안목으로 보지 말고, 예수님께서 이 성경을 친히 쓰실 때 어떤 마음으로 성경을 썼는지, 이제는 그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