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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3강 / 요일2:8 / 안산 091211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1서

3강 / 요일2:8 / 안산 091211

정인순 2011. 1. 1. 11:06

091211 요일2:8 빛(사귐)과 어둠(지배:법적유익) 구조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안산/안산091211요일2장8절.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안산/안산091211요일2장8절.hwp

 

 

안산091211요일2장8절

안산강의-요한일서03강-091211(나라교회, 이 근호목사)


요한일서가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이미 나와 있어서 그 요한복음이 교회들마다 다 있는 상태에서 교회에서 새로운 문제점이 일어나서 요한일서를 쓰기 때문에 요한일서는 요한복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쓰는 편지가 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죽 나와 있잖아요.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죽 나와 있기 때문에 ‘그 요한복음을 여러분이 이해하신다면 그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시고 제자들 보내고 난 그 다음에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 교회하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그 말이지요. 한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오셔서 하늘나라 가버리셨으니 이 지상에 있는 교회는 우리 인간들 손에서 이루어지고 진행되고 만들어지고 세워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상식이 아니냐, 라고 나올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벌써 자기 볼일 보시고 하늘나라 가셨는데 지금 교회는 인간들끼리 모여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인데 그 하늘나라의 예수님과 이 지상의 교회와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이 들 수가 있거든요. 그럴 때 사도요한이 이 요한일서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편지를 보냈다고 할 때 여기에 또 오해할 소지가 있어요.

‘아, 예수님께서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사도들을 보내서 편지를 써서 그 편지의 내용가지고 우리가 자극받고 정신 차려서 똑바로 살아보면 이 교회가 되겠구나.’라는 식으로 또 오해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어쨌든 우리 일에 관여하지 않고 사도를 통해서 사도로 하여금 편지 쓰게 해서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을 보니까 여전히 예수님은 교회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오해를 또 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요한일서를 보면서 사람들이 무엇과 무엇을 분리를 시키느냐 하면 요한복음은 요한복음이고 현재 있는 교회는 교회다, 이렇게 따로 따로 생각하고 싶어 해요. 쉽게 말해서 ‘요한복음에 보면 열두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그랬지만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고 난 뒤의 오늘날 교회는 따라다닐 위인이 없다.’는 말이지요.

여기가 나라장로교회인데 이번 주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암탉처럼 앞장서서 가면 교인들이 예수님 뒤를 졸졸 따라가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망토 휘날리면서, 그랬습니까? 안 그랬어요. 그저 우리들끼리 모여서 점심 먹고 헤어졌어요. 그랬으니까 결국 요한복음과 현재 교회와는 무관하지 않겠는가, 아무 상관없을 것이다, 라는 오해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따로 이고 이것이 교회냐, 교회가 아니냐, 이것을 가지고 잔소리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보낸 사도요한입니다. 그런데 사도요한도 직접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매주 교회 왔다 갔다 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편배달부편에 편지만 덜렁 보냈다는 말이지요. 이 교과서 같은 편지만 보냈으니까 이것을 읽고, ‘아, 알았습니다. 이제부터 잘하겠습니다.’ 이러면 그만 아닙니까?

결국 남는 것은 우리끼리 으쌰, 으쌰, 하고 단결하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원하는 교회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안 되면 구원 못 받습니까? 교회가 교회답게 되어야 구원받습니까? 구원은 받았는데 교회에서 남에게 잘못을 했다든지 남과 싸웠다든지 하면 구원 못 받는 거예요?

그렇게 질문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고 교회는 예의상 같이 모여주고 이렇게 되면 나는 구원은 받았으니까 교회야 어떻게 되든 나는 신경 뚝 끊어도 된다, 라는 생각을 가질 겁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서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콕 지적하지요. ‘사귐’이라는 말이 나와요.

사람하고 사귄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처음에 요한일서가 어렵다고 했는데 그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귀신하고 사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졸졸 따라다녔다는 그 이상으로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같이 동행하라는 말입니다. 전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과 동행했잖아요.

동행했는데 동행보다 더 센 개념이 사귐입니다. 동방신기가 가면 팬클럽 애들이 죽 따라다니는데 그것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나 동방신기 아무개하고 사귄다, 2pm하고 사귄다.’ 하면 다른 팬들한테 쥐어뜯기지요. ‘너만 사귀고 왜 나는 안 사귀는데?’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사귄다는 말이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나만 사귀면 다른 사람은 나로 인해서 못 사귄다는 것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귐을 독점했기 때문에.

그래서 요한일서가 어려워요. 요한일서 1장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되어 있지요. 그렇게 사람하고 사귀는 것뿐만 아니고 요한일서 2장 9절에 보면 “빛 가운데 있다 하여…….” 이렇게 되어 있지요. ‘빛 가운데 있다 하여’

오늘 강의의 주제를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이 뭐냐.’로 삼고 싶은데요. ‘빛 가운데 거한다, 빛 가운데 서로 형제가운데 서로 사귄다.’ 뜸 들이지 말고 바로 들어갈게요. 뜸 들인다고 더 쉬워지는 것이 아니니까. 보통 인간들의 사귐이라는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 1:1로 사귀지요. 그런데 ‘빛 가운데’가 되어버리면, 빛이 임해버리면 여기 있는 이 세상은 빛이 없는 것이 됩니다.

만약에 빛과 상관없이 누구는 더 밝고 누구는 더 어둡게 되면 같은 어둠 가운데서도 이쪽은 40럭스, 이쪽은 20럭스, 이래서 중앙동쪽은 더 밝고 변두리는 어 어둡고, 그런 것이 있겠지요. 이렇게 같은 어두움이라도 그 중에서 더 밝은 데가 있겠지요. 그런데 빛이 임해버리면 40럭스든지 20럭스든지 관계없이 이 전부가 어두움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일 대 일로 사귀지만 빛이 임해버리면 이 하나 하나, 이것을 주체라 하는데 이 하나 하나가 전체로 더불어 하나가 돼요. 적어 볼게요. ‘더불어 하나.’ 이 ‘더불어 하나’ 개념이 어떤 철학, 어떤 철학에서도 안 나오고 있습니다.

이 더불어 하나 개념을 요한일서 2장 10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라고 ‘형제’라는 말을 했어요. 지금부터 왜 이 ‘더불어 하나’라는 개념이 어렵고 우리에게 생소하게 느껴지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사람은 두 종류의 ‘나’가 있어요. 하나는 moi라고 하고 하나는 ye라고 하는데 이 moi라고 하는 ‘나’ 이걸 다른 말로 주체라고 합니다. ‘주체’ ‘자아’가 뭐고 ‘나’는 뭐냐? 자아라고 하는 것은 시간에 따라서 늘 상 변하는 것을 자아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오전 10시의 나, 오후 2시의 나, 이렇게 시간 따라 늘 상 변하는 이 자아를 콕 집어서 ‘이게 나야.’라고 집어주는 그 일을 하는 주체, 그걸 ‘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아’는 ‘나’로 돌아가는데 ‘나’에게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나는 다시 ‘자아’로 돌아가 버려요. ‘자아’에서 굳히기에 들어가면 그것이 다시 ‘나’가 돼요. 항상 왔다 갔다 합니다. 이게 심하면 우울증이 걸리지요. ‘그래 나 같은 인간은 죽어야 돼. 살 이유가 없어.’ 그러다가 애가 수능에서 성적이 좀 잘 나왔다 하면 ‘그래, 자식을 봐서라도 내가 살아야지. 나는 자식 하나는 잘 키웠어.’ 그 때 나는 ‘자식을 잘 키운 나’가 되는 거죠.

그래서 항상 이 나는 무엇을 갖출 때 ‘나’라고 하느냐 하면 ‘가치성’입니다. ‘가치성’을 갖출 때 ‘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치성이 나의 기대 밖으로 그 가치가 깨어지게 되면 대체 ‘나는 뭐지?’라고 그 ‘나’가 둘로 쪼개져서 이 ‘나’는 자아가 되면서 둘로 갈라져요. 이게 너무 갈라져서 회복이 안 되면 자살로 이어집니다.

왜 나는 내가 기대한 내가 되지 못할까? 실제 현실속의 자아는 이게 나이고 내가 기대하는 나는 이게 나인데 이 자아가 내가 예상한 나로 돌아오지 못하고 너무 떨어져 버려서 남이 내가 맘에 안 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맘에 들지 않아요. 내가 내 맘에 영 들지 않는 거예요. 특히 여성들 같은 경우에는 ‘여기를 고쳐볼까, 보톡스를 넣어볼까?’ 하다가 새치 뽑는다고 뽑다가 생머리까지 다 뽑고.

사람의 24시간이 뭐냐 하면 이 두 개를 일치시키는 것이 할 일입니다. 라캉이라는 사람이 잘 이야기 했는데 이 ‘나’가 고요하게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 둘러싸이다 보니까 이‘나’가 자꾸 욕심을 내네요. ‘아, 나도 저런 집에 살았으면, 저 사람이 입은 옷 내가 입어보면 어떨까, 저 사람 구두 어디서 맞췄는지 물어볼까, 저 사람은 머리도 잘 나왔네, 물결파마가 어떻게 그리도 잘 나왔는지, 나는 동네미용실에서 해서 그런지 약냄새만 풍기면서 영 맘에 들지도 않고…….’

이렇게 외부에서 와버리면 이 자아가 크게 갈라져서 남이 나를 맘에 안 들어 하는 것은 둘째 치고 나부터 내가 영 내 맘에 들지를 않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간단히 이야기해서 ‘오늘 기분 나쁘다.’ 그 말입니다. 기분 나쁘다는 것이 뭐냐 하면 자아하고 나하고 너무 거리가 멀어져 있는 거예요.

라캉은 말하기를 이 ‘나’를 환상으로 봤어요. 어떤 환상이냐, 현재의 ‘나’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단 장담해보는 그 환상. 그걸 기준으로 해서 자아가 너무 멀리가면 당기고 괜찮다 싶으면 또 새로운 자아가 욕심을 내 보는 거예요. 부잣집 자아 만들었다가 안 되면 또 원위치 시키고.

이것은 ‘더불어 하나’가 아니지요. 항상 ‘나’가 하나지요. 그 ‘나’라는 것은 외부의 욕망이 올 때 무엇을 품는다고 했습니까? ‘가치’ 앞에 하나 더 붙인다면 ‘살 가치’ 내가 아직까지 이 땅에 살아 있어야 할 이유, 그런 것이 뭉쳐져서 ‘나’가 되거든요.

잘 들어야 됩니다. 이 ‘나’는 나를 절대 포기 안 해요. 내가 빛으로서 사는 것은, 이 ‘나’ 빛 되신 주님을 본받으려고 애쓰는 그 ‘나’는, 있는 나를 예수님 닮은 자아로 ‘빛처럼 살아야지, 주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소금처럼 살아야지.’라고 품어내면서 나오는 이것은 결코 어둠이 아니고 ‘나’라는 인간을 더욱 더 확장시키는 거지요.

이것은 내가 만들어내는 유사 빛, 가짜 빛이고 예수님 자체의 빛이 와버리면 모든 것이 다 어둠이 되지요. 어둠이라는 말은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가치가 없는 거예요. 과학적인 무엇을 해도 가치가 없고 전도를 해도 가치가 없어요. 전도가 나쁘고 설교가 나빠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빛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가치가 없는 겁니다.

이야기가 굉장히 간단해져 버렸지요. 열심히 신앙을 해야지, 선교를 하고 설교를 해야지 왜 그것을 죄라고 하느냐, 라고 따지는데 이 답답한 분아, 빛이 아니기 때문에 어두운 거예요. 누가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어긋나서 죄를 지어서 어둠이 아니에요. 율법에 어긋나서, 말씀을 위배해서 어둠이 아니고 빛이 아니기에 그냥 어두움이에요. 빛이 하나라면 어두움도 하나가 되는 거예요. ‘더불어 하나’가 된다고요.

지금부터 좀 어렵게 하겠습니다. 전에 벌통을 들고 가면 그 뒤로 벌이 따라온다는 예화를 든 적이 있지요. 예수님이 오게 되면 그 뒤에 같이 빛의 세계가 따라오지요. 이걸 제가 빛의 구조라 했습니다. 빛의 세계, 빛의 구조가 같은 말입니다. 빛의 세계가 따라오게 되면 이 어두움은 졸지에 어두움의 구조가 돼요.

빛의 구조와 어두움의 구조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 빛의 구조 안에서는 전체가 빛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샘에서 물 나오듯이 계속 솟아 나와요. 마찬가지로 어두움의 세계는 이 세상이 어두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새록새록 그 구조 안에서 계속 나와요. 특징은 이 어두움의 구조가 두 개가 아니고 세 개가 아니라는 거예요. 어두움의 구조는 한 구조에요.

하나의 구조가 되어버리면 아까 이야기한 나, 자아, 주체 이렇게 생각하는 구조가 몽상이 돼요. 몽상 알지요? 몽상가, 꿈, 아까 이야기한 환상, 또 어떤 번역에 의하면 환영이라 하는데 환영 알지요, 유령, 고스트, 실체가 없는 귀신이 되는 겁니다. 여기 전목사님이 계시는데 전목사님 보고 ‘여기 있는 전목사님은 귀신입니다. 이것은 유령입니다. 죽은 시체이고 좀비입니다.’라고 할 때 어떤 경우에는 화를 내느냐 하면 이 어두움구조에 함께 있지 않고 자기 자아(moi)나 주체에 그냥 머물러 있다면 화를 낼 수밖에 없지요.


‘저 교도소에 가 있는 놈은 나쁜 것이 맞는데 나는 그 사람보다 나으니까 나보고 유령이라 하지 마. 나는 존재의 가치가 있는 실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순간 뭡니까? 같이 어두움구조라는 것을 깜빡 잊어버린 거예요. 자기도 같이 어두움의 구조라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앞에 그 빛의 세계가 와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안 믿는 순간이 되어버려요.

주님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을 안 믿는 순간 나는 나의 가치를 꼭 쥐고 있는, 화투판에서 장땡 쥐고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것처럼, ‘이게 얼마 만에 들어온 장땡인데’ 하면서 불이 나도 계속 패 돌리라고 할 판인 그 마지막 패, 내가 가치 있는 존재라고 하면서 쥐고 있는 그 마지막 패가 있으면 그 사람은 누가 와도 사귐이 성립이 됩니까, 안됩니까? 사귐이 성립이 안돼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배(支配)’라고 합니다. 지배 또는 지배구조라고 하는데 여기에 특징이 있어요. 남을 규정한다는 겁니다. 내가 최고가 되고 내가 지배의 정점에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다 어떻게 합니까? 내가 평가하고 내가 규정을 하지요. ‘저 인간은 인간 아니다.’ 이렇게 규정을 하지요.

규정을 한 다음에 명령을 해요. 심지어 갓 태어난 애들도 엄마한테 명령해요. ‘엄마, 물 줘.’ 그게 엄마하고 애 하고 사귀는 겁니까? 인간은 주체가 있는 이상 사귐은 일체 없습니다. 형제 우애 일체 없습니다. 누가 되었든 엄마가 되었든 아빠가 되었든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그 지배는 남을 평가, 규정하고 명령하고 그 다음에 세 번째로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을 분류시켜요. 다 같은 이야기죠. 규정하고 명령하고 그 다음에는 분류시켜요. ‘너 집에서 나가. 너 우리 집에 와.’ 아침 드라마를 거의 안보지만 슥 지나가면서 보게 되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텔레비전 거의 안보지만 슥 지나가면서 본 것인데 재벌 집 아들의 엄마가 자기 아들이 그냥 평범하고 착하기만 한 여자하고 사귀니까 커피숍에서 봉투에 돈 넣어서 ‘그래, 임신했다고? 수고했구나. 하지만 이거면 되겠느냐? 이걸로 유학이나 가거라.’ 하는 막장 드라마 내용이 나오지요.

이게 뭡니까? 아무리 내 아들하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도 서로 가문끼리 안 맞으니까 대를 이어서 후계자가 될 며느리로서는 적합지 않으니 좀 떨어져 나가달라, 이런 식으로 분류를 시켜요. 분류시킬 때 돈 주면서 뭐합니까? 명령을 하지요. 일방적으로 분류시키고 명령한다는 자체가 일방적으로 뭐했다? 규정을 한 거예요.

그러면 새색시가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회장님은 우리 사랑이 돈으로 떨어질 줄 압니까?” “얼마면 되는데?” “우리 사랑을 천박하게 돈으로 매수하지 마세요.” 이런 대화가 오고 가지요. 결국 드라마이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회개하고 며느리로 맞아들이고 아주 못된 여자가 또 훼방 놓다가 떨어져 나가고 천사 같은 여자가 복 받는 쪽으로 스토리가 풀려가지요.

이걸 지배라고 합니다. 이 지배의 정점에는 좌석이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도 아닙니다. 누구입니까? 자기자리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사귐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빛 가운데 사귄다,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빛도 어두움도 누가 규정하느냐 하면 본인이 규정하고 본인이 명령하고 본인이 판단해서 빛과 어두움을 일방적으로 분류시키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이렇게 되면 요한일서의 말씀을 우리가 못 지킬 뿐만이 아니라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더 나아가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도 우리가 믿을 수 있다, 없다?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거죠. 못 믿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요한복음의 그 예수님, 이것은 이번 대전에서 수련회 할 내용인데, 요한복음의 예수님을 자신이 자신을 지배자의 자리에 앉혀놓고 거기다가 누구를 믿는다고요? 예수를 믿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자기가 자신의 지배자로 앉아서 예수 믿겠다는 것은 계속해서 어두움을 키우는 것밖에 안돼요. 어두움을 빛이라고 위장해서 계속 키워나가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그것부터 치고 들어오지요. ‘누구든지 자기가 죄 없다 하면 누구를 거짓말로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죄 없다고 한다면 본인이 어둠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빛 되신 분을 빛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내가 나보고 어둠이라 하든지 내가 나보고 어둠이라 하든지 예수님 당신하고 무슨 관계  있느냐?’ 이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어려워요, 이런 것이 성경설명 할 때 무척 어려운데, 이것을 설명하면 또 다른 것을 설명해야 되고, 하여튼 해 봅시다. 사람은 이 땅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가 자기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데 이미 그 구조 전체가 어둠이라는 판위에서 자기 혼자 노닥거리고 있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너만 지배하나? 나도 지배한다.’ 이 판 자체가 어두움이고 이 어두움이 바로 빛이 구조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두움의 상시화, 늘 상 있어야 되는 구조, 늘 있는 구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가 지배자 입장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에요. 차라리 이래야 돼요. ‘아, 나한테 누가 쳐들어왔다.’ 이래야 정답입니다.

이 어두움의 세계에 누가 쳐들어왔어요. 빛의 구조가 쳐들어오니까 비로소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고발당한 거죠. 이렇게 촐랑거리면서 빛 앞에서 까부는 어둠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귐이에요. 그게 바로 ‘빛 가운데 사귐’이라고요.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현실성을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떴다, 빛! 우리는 졸지에 어두움.’ 그게 끝이에요. ‘빛이 떴다. 우리는 어두움이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이제부터 빛 가운데서 서로 사귀면서 알 것, 남은 것은 ‘왜 우리가 어두움일 수밖에 없는가를 아는 것’ 그게 바로 빛 가운데서 형제간에 서로 사귀는 내막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왜 어두움일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다 아신다고 생각하고 더 진도 나가봅시다. 여기 어두움에 수많은 사람이 있어요.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여기 이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숫자를 세면서 54만2천4백5십 명이라고 우겨도 주님 보시기에는 이걸 하나로 봐요. ‘어두운 놈들끼리 잘 뭉쳐져 있다.’ 이렇게 뭉쳐진 걸로 봐요.

그런데 여기에 빛이 오게 되면 빛은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지배력을 행사하면 아까 제가 지배력이라 할 때 세 가지가 있었지요. 뭡니까? 규정하고 명령하고 분리시키지요. ‘어이, 너 빛의 자녀, 나와!’라고 분리시켜 버린다고요. 그 분리는 무엇으로 이루어집니까? 명령으로 이루어지지요. 그 명령은 ‘창세전부터 너는 빛의 자녀로 규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 지배력을 알아먹는 사람을 가지고 성령을 받은 자 라고 합니다. 그래서 빛과 자녀의 사귐은 어둠속에 있으면서도 어디에서 사귀나, ‘성령 안에서 서로 사귄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열두 명이 빠져나왔다, 그러면 열두 명이 하나입니까, 열둘입니까? 열둘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하나가 되기 때문에 열두 명 내부에서는 자아, 나를 주장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그걸 주장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빛 가운데서 형제간에 서로 사귀는 그 모습인데 자아를 주장하지 않고 우리는 뭘 해도 떨어져 있어도 하나라는 것을 느낄 때 그게 빛 가운데 사귐이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제가 표현을 ‘더불어 하나’라고 했지요.

이 ‘더불어 하나’를 가지고 빛의 구조라고 본 거예요. 그 ‘더불어 하나’에 누가 개입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이 개입되어 있거든요. 우리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면 소위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지켜야 되는가, 아니면 예수 믿고 나서는 안 지켜도 되는가?’ 하는 그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다 풀렸습니다.

만약에 자기 주체가 있어서 내가 그걸 지킨다고 한다면 아무리 지켜도 그것은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주체의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밖에는 안돼요. 사도바울의 모든 권면과 명령이 있잖아요. ‘거룩 하라,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라, 남의 짐을 지라.’ 등 모든 말씀과 심지어 산상설교, 이 모든 것은 주체가 있어서 주체가 해버리면 하는 족족 다 실패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지배력을 더욱더 확대시켜서 이런 어두움이 그런 명령을 지켜서 빛이 되고자 확장시키는데 어두움이 확장되어봐야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이 확장된다고 해서 어두움의 몸집만 커질 뿐이지 그게 빛 되는 것이 아닙니다. 큰 교회 목사들 보세요. 그 몸집 늘어난다고 그게 더욱 더 목사답던가요? 아니잖아요.

교인 세 명 있을 때의 그 모습을 교인 5천명 되어도 유지하던가요? 아닙니다. 교인 세 명일 때의 그 겸손한 마음 5천명 되면 그 겸손한 마음 없어졌습니다. 앞에 맨 날 그게 붙어요. ‘감히, 감히 나에게!’ 5천명을 지배하려고 해 보세요. 5천명이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5천명의 영혼을 지배하려 드니 얼마나 우쭐대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는 처음 사랑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처음 사랑은 한마디로 그거에요. ‘범사에 감사하다.’는 거예요. ‘주여, 나 같은 인간을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게 처음 사랑이에요. 우리 화평교회가 처음 사랑을 유지했으면 좋겠어요. 이 강의를 화평교회가 들으면 또 화가 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다 화평교회와 ‘더불어 하나’니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더불어 하나’니까.

여기 교인 12명이 있다면 성령이 오게 되면 누구 지배력을 드러내게 되는가, 그 열두 명 모두 다 자기주체의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찾아온 예수님의 일방적인 지배력을 드러내게 되는 거예요. 빛의 자녀라고 주께서 규정했고 주께서 명령, 목사가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그 누가 명령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께서 명령하고 주께서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분류했다는 것을 각자가 다 드러내니까 12명이 모이든 120명이 모이든 1천명이 모이든 생각이 하나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더불어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빛 가운데서의 형제간의 ‘사귐’이라는 겁니다. 그 상태는 본인 나름대로의 주체가 없으니까 그게 온유가 되고 화평이 되고 자비가 되고 양선이 되고 형제우애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그 안에 날카로운 칼날 같은 주체가 등장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 이런 것들로 쫙쫙 째지는 거예요.

솜을 담은 보자기속에 잘못해서 면도칼 하나 들어가 보세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솜을 담은 보자기가 다 찢어지겠지요. 교회 문제 가만 보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하나’가 아니고 ‘날 알아다오. 나의 가치를 알아다오. 난 8년 동안 이 교회에서 봉사했으니 날 알아다오.’ 면도날이에요. ‘십자가마을 이 근호 목사 아니면 운영 되겠나?’ 그러면 그 이 근호목사는 면도칼입니다. 제거대상이에요. ‘더불어 하나’를 훼방하고 주님의 주체의 지배력에 도전하는 ‘나’라는 주체의 지배력이 또 행사돼요.

계속 진도 나가봅시다. 제가 빛의 구조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이렇게 자꾸 구조를 설명하는 이유는 구조가 되어야 ‘내가 지켰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지켰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20퍼센트 지켰습니다.’ 라는 이런 식으로 성경을 안 보게 돼요. 동대구역에 모텔 이름이 ‘지붕 열리는 모텔’입니다. 그걸 보고 하이데거가 생각났어요. 하이데거 철학에서 그것을 ‘개시성(開示性)’이라 합니다.

마치 미사일을 쏘려 할 때 미사일을 담고 있던 돔이 열려야 되지요. 그게 개시성이에요. ‘더불어 하나’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력을 활짝 열어서 발산해야 될 속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어두움 가운데 세상에 속하지 않는 우리를 남겨둔 것은 세상에 속한 이 어두움의 세계 군데군데서 빛이 발산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빛은 본인의 주체에서 나온 빛이 아닙니다. 개인이 열심히 말씀 지켜서 나온 빛이 아니고 더불어, 함께 계시는 주님의 빛이 성도의 주체해체를 통해서 빛이 발산되는 거예요. 그것도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합니까? 더불어서.

그러니까 개인구원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개인구원은 없어요. 무슨 구원밖에 없는가? 더불어, 단체입장이지요. 단체입장을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단어로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걸 두자로 줄이면 이게 바로 ‘아들’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뭘 로 바뀝니까? 신약에 오면 아들로 바뀌지요. 아들로 바뀌는데 아들이 몇 명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 몇 명입니까? 한 명, 한 명인데 그 아브라함 자손에 의해서 성령이 오게 되면 육의 속한 사람도 아들이 되는 겁니다.

성경 찾아봅시다. 갈라디아서 4장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걸 설교했는데 설교할 때는 깊이 있게 설명을 못하거든요.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5절까지 누가 읽어보세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만약에 여자에게서 아들이 안 나오면 아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들이 있다, 없다? 없지요. 없는데 아들은 어디에만 있어요? 하늘에만 있지요. 하늘에만 있는 아들을 여자로부터 태어나게 하셔서 그 다음부터는 뭐가 생성되겠습니까? 하늘에 있는 아들만 아들이 아니라 지상에서 아들의 명분을 얻은 사람들이 나타나게 했다는 말이죠.

아들이 아닌 자가 아들이 되려면 그 중간에 뭐가 필요합니까? ‘속량(贖良)’이 필요하지요. 속량이란 죄 씻어주는 것을 속량이라 합니다. 그런데 죄 씻어주는 속량이 되려면 그 사람들이 죄인이 되어야 되겠지요. 죄인이 되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4장 4절에 율법 밑에 있어야 돼요. 율법 밑에 있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지요. 왜? 율법이 덮어졌다는 것, 율법이 온 것은 ‘너는 저주 받아 마땅하’기에 율법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산 쓰는 이유가 뭡니까? 비가 온다는 뜻 아닙니까? 하나님이 율법을 줬다는 이 말은 예수님 빼놓고는 의인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아담 안에서 더불어 하나니까. 이 세상에 인간이 몇 명이냐, 인간이 한명 밖에 없어요. 이걸 사람들이 몰라요. 이 세상에 사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담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아들 몇 명입니까? 하나밖에 없어요. 마지막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이 하나 됨이 둘로 셋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하나 됨을 ‘더불어 하나’로 만들어요. 예수님이라는 한 분이 이제는 뭘 하느냐, 둘 혹은 셋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하나’를 만들어요. 그리되면 예수님과 그 형제는 더불어 뭐가 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지요. 그리스도의 몸이 몇 개입니까? 하나밖에 없어요.

이렇게 그리스도 몸이 하나인 이유는 나머지 지옥 가는 사람이 몇 명입니까? 한명이죠. 쉽게 이야기해서 한 구조지요. 어두움이라는 구조. 그것이 율법 아래 있는 자, 율법 아래 있는 노선입니다. 성령의 노선이 있고 율법으로 난 노선이 있거든요. 율법으로 난 노선들은 저주를 받게 되어 있고, 이것은 하갈 쪽이고 이삭 쪽은 그 엄마가 하늘에 있어서 엄마 찾아 삼만 리, 자기 엄마를 찾아 가는 거예요.

방금 이러한 이야기가 예수님 안목에서 볼 때에 일대일로 보이는 겁니다. 빛의 구조, 빛의 자녀와 어두움에 속한 자녀로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요한일서에 나옵니다. 요한일서 4장 5절, 6절입니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성경은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쪽으로 접근해 가면 성경 전혀 이해 안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그 사람은 아무리 예수 믿어도 여전히 뭐가 남아 있느냐, 자기 주체 중심의, 어두움을 키워내고자 하는, 어두움을 빛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쓸데없고 소용없는 짓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나’라는 인간을 빛의 자녀로 한 번 만들어볼까, 수도 없이 시도하고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성경보고 시도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들이닥치면 예수님의 지배력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 순간 우리의 주체는 마치 미사일발사대처럼 뭔가 활짝 열리면서 우리 안에 있는 빛이 개시(開示), 활짝 열리는 것, 천지가 갈라지듯이 쫙 열려서 우리가 빛이라는 말이 아니고 빛 되시는 분의 빛이 활짝 만개하고 활짝 드러나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주체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주체는 걷어치우고, 우리는 ‘더불어 하나’로 있으니까, 그 하나의 주체 속에 성도의 주체는 이미 녹아버렸으니까, 우리는 고철인데 그 고철이 녹아버렸으니까 우리는 트랜스포머처럼 하나의 로봇 속에 있는 부속품들이에요. 트랜스포머가 커지면 뭐가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저쪽도 덩어리가 한 덩어리에요. 이쪽은 착한 로봇, 저쪽은 나쁜 로봇이 되는 겁니다. 기준은 우리가 착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주체에 예속되고 복속된 사람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주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체성, 지배력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것이 개시성(開示性)인데 이것이 바로 개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개시, 드러날 때는 항상 우리의 안목이 뭐냐, 이 세상은 어둡다는 사실을 24시간 잊지 말아야 돼요. 이 세상은 어둡다는 것,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이 어려워요. 어둡다는 말은 무가치하다는 뜻이에요.

‘어둡다는 것은 무가치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생각해서 이것이 필요 없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 없으면 자동차 펑크 나면 누가 고쳐줍니까? 자장면이 먹고 싶은데 예수 안 믿는 중국집 주방장이 없으면 자장면 어떻게 먹습니까? ‘필요 없다’가 아니라 필요해요. 뭐 때문에? 빛을 빛답게 하기 위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어두움의 구조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 구조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취지를 우리는 존중해 줍시다.

예수 안 믿는 주방장이 자장면 만드는 그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해 주되 그 사람이 만약에 주체를 주장한다면, ‘나는 이것을 하기에 나는 가치 있다.’고 나온다면 ‘당신은 무가치한 존재다.’라고 되는 겁니다. 그것은 무가치한 존재지요.

구약에서 우리가 납득하기 힘든 대목이 있는데 구약에 등장하는 히브리인들이 하나하나를 개인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으로 다룬다는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열 번째 마지막 재앙이 뭐였습니까? 바로의 맏이만 왕궁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심지어 바로의 왕궁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본집의 아들까지 죽었어요.

이 말은 모세하고 바로하고 일대일로 붙은 것이 아니고, 이것이 개시성인데 아직까지 감추어져 있지만 나타나고 구성되어야 할 미지의 나라 이스라엘 대 그것을 안내어놓은 애굽 나라를 전체로 하나로 보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안목이에요. 그게 우리 성도의 안목이 되어야 되고. 전체를 하나로 보는 거예요.

당신은 신앙생활 왜 합니까? 정답은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지배력을 빛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왜 이 세상이 어두운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직장이 필요 없다.’가 아닙니다. 있어야 드러내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장땡을 쥐고 있다. 단풍 두 장을 쥐고 있는데 불이 나도 화투판에서 화투를 해야 되는 이유가 뭐냐, 전부 다 9땡이나 7땡이나 나보다 낮은 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왜 나타났느냐? 예수님만이 빛이고 세상은 전부가 어둡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개시할 수 있는 용도로 우리를 분류시켜서 자기 몸에다 붙인 거예요. 너는 허파에 붙고 너는 다리에 붙고 너는 내 손에 붙고, 이것을 지체라 하는데 그렇게 붙어서 더불어 하나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드러내는데 무엇으로 드러내느냐? 오늘날 교회에서 사람들이 여기에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를 무척 확인하고 싶어 해요. 감수성이 예민한 여고생들 중에 귀신을 보고 싶어 환장한 애들에게 유행한 것이 분신사마라는 것이 있어요. 볼펜을 끼고 ‘분신사바’라고 벌벌 떨면서 주문을 외우는 거지요. 그게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교회에서 그 귀신을 불러요. 주여, 삼창을 해가면서 귀신이 나타나게 해 달라고 귀신을 불러요. ‘귀신을 눈으로 보게 하옵소서.’

그러면 요한일서에서는 참된 하나님의 나타남을 무엇으로 봅니까? 볼펜 들고 분신사바 주문으로 하면 나타납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언어로 나타내시는데 그 언어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며 예수 그리스도의 물질적인 증거가 세 가지인데 물과 피와 성령, 이 셋으로 증거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의 공통점이 뭐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제자 전부에게 뭘 보여주느냐, ‘내 옆구리의 창자국과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아라’고 한 거예요. 우리 생각에는 이미 예수님이 부활했다면 바바리맨처럼 짠, 하고 나타나면 되잖아요. ‘내 얼굴 모르겠나.’ 하고 주님의 모든 존재, 인상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우리는 생각되는데 주님께서는 이 얼굴이나 그 얼굴의 표정이 아니고 ‘내 옆구리의 창자국과 손의 못 자국’ 곧 ‘예수님의 죽음을 봐라.’ 하는 겁니다.

이게 정말 어려워요. 결국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빛을 보여주는 개시성, ‘예수님의 죽으심이 발산될 때, 예수님의 죽으심이 드러날 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다.’ 하는 최고의 더 이상의 변동이 없는 최후의 확고한 증거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뭐가 붙어요. 예수님의 죽음은 ‘대신 죽음’이죠. 대신 죽었다는 그 말은 우리는 살았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 안에 누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느냐, 이렇게 죽어버리면 무엇의 죽음이냐, 바로 우리 주체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주체가 없는 자가 아니고 있어요. 있는데 무슨 주체입니까? 죽은 주체가 되는 거예요.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언제 예수님의 증인노릇을 하느냐, ‘나는 살아도 살 필요도 없고 사실은 이미 죽은 자다.’라는 생각이 들 때 그 때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설교하면서 ‘이대로 죽어버리자.’ ‘이 설교해서 몇 주 더 버텨야지.’ 그것이 아니라 ‘오늘 이 설교로 이 강의로 내가 그만 죽어버리련다.’ 그것도 싱글벙글, 웃으면서 맘 푹 놓고 죽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곧 나의 주체는 나를 드러내는 용도의 주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드러내는 용도로서만 내가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주체라는 것은 말씀이 우리 육체에 와 닿는 그 순간 반짝 드러나는 것이 주체라고 했지요. 대전강의에서인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라는 주체가 언제 드러나느냐, 성령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 주어질 때 ‘나’라는 존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지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더 이상 날 위해서 살아가는 그것은 곧장 그것이 무엇으로 통한다? 그것이 죽는 이유로 통해요. ‘이것 때문에 내가 죽어야 되고 이것 때문에 주님이 죽어야 했구나.’ 라는 이유로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이 24시간동안 거의 무슨 생각 하느냐 하면 다 나를 위해서 살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오늘 하루도 내가 죽어야 할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살았구나.’ 라고 되는 겁니다. ‘내가 더 안살아도 되는 것을 괜히 더 살겠다고 버티는 것 때문에 주님의 개시성을 내가 훼방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요한일서 3장 16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더불어 하나’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구조라고 했어요. 이 구조 안에서 ‘나’라는 주체 또는 ‘모이(moi)’라는 자아는 그것을 살리려고 하다가는 그것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지요.

그러면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날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려 내기 위해서 살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우리 속에는 뭐가 남아 있어야 됩니까? 날 위해서 살아가는 내 모습이 항상 떠올라야 되지요. 말이 참 어렵습니다. 항상 날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 내 본성이 떠올라 줘야 그것이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해주는 거예요. 그 이유를 제시한다고 일부러 그렇게 살 필요는 없고 그것이 떠오른다는 거예요. 그게 개시성이에요.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이런 우리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언약의 신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이 작용하는 신체. 새 언약의 주체가 누굽니까? 예수님이 주체이고 내가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의 주체는 없느냐, 있지요. 그 있는 주체는 뭐냐, 이래서 우리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주체는 살아 있지요.

그러면 이제 정리가 되었지요? 내 주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있는데 어떤 이유다? ‘나는 어두움에 속하며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주체고 그 주체를 주님의 주체가 대신 죽음으로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는 이제 죽어도 그리스도의 부활구조 속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세상에 마음껏 개시(開示)하라고 아직도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는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내 개인적인 안목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것을 버리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의 안목,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그 안목을 가지고 볼 때 우리 몸이 이렇게 귀한 몸 인줄 몰랐습니다. 우리 몸 안에 계시는 주님의 지배력이 마음껏 발휘되어서 우리는 이제 죽어도 괜찮을 정도로 즐거운 존재가 된 것을 남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5-04 10:53:29 녹취 : 오용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