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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강 / 요일1장 / 안산091009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1서

1강 / 요일1장 / 안산091009

정인순 2011. 1. 1. 11:02

091009 요일1장 예수님 노선 vs 다른복음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안산/안산091009요일1장.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안산/안산091009요일1장.hwp

 

 

안산091009요일1장

요한 1서 제 1강(이 근호목사, 2009년 10월 9일, 안산나라장로교회)


요한일서를 시작하겠습니다. 요한일서를 보기 전에 요한복음 1장을 보게 되면 요한일서의 전체 내용의 윤곽이 드러납니다. 요한복음에 제일먼저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이 빛이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 말씀이 사람에게 오기 전에 빛이 되지요. 빛이 되고 그 다음에 말씀이 육신이 되지요. 보통 상식으로는 성경이, 사람이 알기 쉽게 쓰였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시작부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합니다. 이게 일반 신문지상이나 소설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아니잖아요.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일반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사람들은 ‘성경은 인간들로 하여금 읽고 쉽게 납득이 되어서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성경을 펴보면 사람들의 일반상식으로 통하는 말들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매 독생자의 영광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독생자를 가지고 요한복음 1장에서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을 쓰신 이유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이렇게 나와 있다는 것은 우리보고 믿으라는 말이고, 믿으라는 말은 새로 시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믿기 전에는 누구로부터 시작한 거예요? 믿기 전에는 세상을 우리 자신부터 시작했잖아요. ‘결혼했다. 애기 낳았다. 내가 성인이 되었다. 취직을 했다.’ 이런 것 전부 다 우리자신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목사가 되었다.’ 모든 것이 우리 자신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항상 우리는 우리 자신부터 시작하지 아니하면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너부터 시작하지 말고 예수님부터 시작하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부터 시작하는 것은 내 노선이 있겠지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으로 바뀌어 버리면 나의 노선은 용납이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용납이 안 되겠지요. ‘나는 옛날에 이렇게 살았습니다. 나는 옛날에 이렇게 잘나갔습니다. 나는 옛날에 이렇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없지요.

내가 언제 그런 것을 물었느냐, 이렇게 된다, 이말 이지요.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의 노선을 버리고’ 누구의 노선으로 가라? 예수님의 노선으로 가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노선으로 들어서 버리면 방금 적은 요한일서 시작하는 말씀과 우리가 정반대임을 알게 되겠지요. 우리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는 빛이 아니고 우리는 어두움이며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도 뭐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지요.

예수님이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졸지에 그분이 어린양이 되게끔 했던 죄인이 되겠지요. 그래서 교회 다닌다는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당신은 믿는 사람입니까?’ 할 때 그가 교회를 다니고 있으니까 ‘믿습니다.’ 하겠지요. 그러면 ‘지금 당신은 당신의 노선에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노선에서 살아갑니까?’ 라고 물으면 무슨 말인지 그 사람이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늘 뭐냐 하면, ‘내가 바쁜 시간 쪼개서 내가 교회 간다니까?’ 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지요. ‘그러면 교회 간다는 것이 당신 노선은 그대로 있고 거기에 교회 가는 일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뿐이잖아요.’ 그렇게 제가 이야기를 할 수 있지요. ‘예수를 믿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그 사람은 ‘교회 갑니다.’ 라고 하거든요.

교회 가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노선이 그대로 있으니까.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말씀처럼 이 시대에 교회 가는 사람들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꼭 이단 취급을 받아요. 교회 가는 것을 신앙생활로 우기는 사람들이 때문에 진짜 예수님의 노선으로 바꾸어버린 사람들은 광신도로 그렇게 취급당해요.

‘그냥 대충해라. 대충가라 그만. 예수 따지지 말고 그냥 시간 짬짬이 내서 교회나 다니면 그만 아닌가?’ 이런 식으로 놀림을 받고 있어요. 목사보고 ‘예수 믿습니까?’ 라고 하면 ‘저는 목회생활 합니다.’ 그렇게 답해요. 목회생활은 자기노선이잖아요. 신학교 교수보고 ‘예수 믿습니까?’ 라고 하면 ‘나는 지금 신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라고 하고 있어요.

그것은 자기노선이죠. 성경에서 ‘예수를 믿습니까?’ 하는 것은 ‘너의 기차레일을 걷어냈나?’ 그 말입니다. ‘너의 인생노선을 완전히 철거시켰나?’ 그 말입니다. ‘네가 깔았던 기차노선 위에다 예수님의 노선으로 깔았나?’ 그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과거의 노선은 사라지고 우리 과거의 자리에 뭐가 들어오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시게끔 했던 구약성경이 자리 잡겠지요.

그 구약성경의 제일 앞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하고 그 다음에 ‘에덴동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내가 에덴동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에덴동산이 우리에게 쳐들어오는 것이지요. 쳐들어와서 내가 들어가겠다는 에덴동산이 아니라 우리 조상을 추방시킨 그 에덴동산이 우리 속에 자리 잡게 되지요.

말이 좀 어렵습니까?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추방되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내 노선과 관계없이 과거사건으로, 아담에게나 속한 것이지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고 ‘나는 에덴동산 들어가면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에덴동산은 우리가 못가도록 길을 막아 놓았지요.

그러면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천국은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면 그 못 들어가는 에덴동산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이 생기느냐 하면 ‘나는 왜 에덴동산에 갈수 없는 죄인인가’를 새삼스럽게 아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책에 있던 창세기 3장이 뚜벅뚜벅 걸어서 내 안에 들어온 것이 됩니다.

이제는 성경책 속에 있는 창세기 3장이 아니라 내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창세기 3장입니다. 성경하고 나하고 남남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만들고 내 안에 성경이 가득 차 있는 그러한 인생이 되는 겁니다. 적어도 이렇게 되어야 그것이 믿는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라고 그것을 질문할 수는 없어요.

지금 요한일서를 하기 때문에 요한복음과 자꾸 연계를 시킵니다. 그렇게 질문할 수 없는 이유가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혹은 내가 어떻게 합니까?’가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기존교회는 만 날 ‘어떻게’를 묻잖아요. ‘내가 어떻게 복 받아야 합니까?’

성경은 ‘내가 어떻게 합니까?’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어떤 일을 벌렸습니까?’ 그걸 찾아보는 거예요. 그럼 신앙이 없는 사람은 뭡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은 ‘내가 천국 갈 테니까 예수여, 또는 하나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간다고 이야기를 해주세요.’라고 자기의 ‘어떻게’를 포기를 안 해요. ‘내가 어떻게 행동하면 구원받습니까?’ 라고 자기행동을 포기를 안 해요.

그 만큼 그 사람 안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뭘 어떻게 하실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래요. 믿음이라는 것은 그냥 믿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불신앙이라는 것과 더불어서 병행해서 같이 들어와요. 이것이 믿음이다, 하는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와 같이 들어와요.

보통 지식 같으면 ‘이것은 안경집이다. 나는 안경집을 믿는다.’ 또는 ‘나는 여기 비타500이 있는 것을 믿는다.’ 이렇게 되는데 성경의 믿음은 ‘아,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불신앙에 해당되는구나.’ 이렇게 겸해서 아는 거예요. 뭐가 불신앙이냐 하면 내 쪽에서 뭘 해보려고 하는 것은 다 불신앙입니다. 그걸 알아요.

‘아, 내 쪽에서 뭘 시도하겠다는 것은 불신앙이구나.’라는 불신앙을 알고 그것만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나한테 어떤 조치를 하셨습니다.’ 라고 아는 그것은 불신앙이 아니고 뭐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신앙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한 셑이 돼요. 신앙인 것과 신앙이 아닌 것과를 병행해서 아는 것이 신앙이 들어온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신앙이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도 되지만, 무엇이 불신앙입니까, 라고 물어도 같은 질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성경의 모든 내용이 다 그러한데, 천국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지 마시고 어떤 사람이 지옥 갑니까, 라고 물어보세요. 그래야 제대로 천국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에요. 그냥 천국이라고 하게 되면, 그냥 좋은 곳,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고 …, 이렇게 이해하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옥 갑니까?’ 라고 할 때 그 사람이 말을 못해요. 왜 말을 못하냐? ‘지옥이 이런 곳이고 지옥에 이런 사람이 간다고 해 버리면, 가까운 자기자식들과 자기부인과 시부모와 친구들이 뻔히 지옥 가는 것이 다 보이거든요.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계모임의 임원부터 계원모두 다 어디 간다? 지옥에 간다.

그러니까 차마 지옥에 이런 사람이 간다는 말을 못하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배우나 탤런트, 예를 들어서 일본 아줌마들이 좋아하는 영화배우 배 용준, ‘역시 나는 배 용준을 좋아해. 나는 배 용준이면 껌뻑 간다. 배 용준이 온다고 하면 나는 교회 안 간다.’라고 하는 사람에게 ‘실례지만 지옥에는 어떤 사람이 갑니까?’ 라고 하게 되면 배 용준이 이야기는 쑥 들어가 버리죠.

왜? 배 용준은 지옥가기 때문에. 그래서 얼마나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람들이 믿음이 없다는 것을 감추어 주려고 그렇게 애를 써요. 지옥이 무엇입니까, 이래 물어야 될 것을 천국 좋아하십니까, 이래 물어요. 천국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어서 다 좋은데 가려고 하지요. 믿습니까, 이렇게는 해도 뭘 안 믿습니까, 라고 묻지를 않지요.

복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지 무엇이 다른 복음입니까, 이것을 안 물어요. 복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다른 복음이 뭐라는 것을 겸해서 같이 알고 있어야 돼요. 우리가 이렇게 십자가복음을 강의하면 다른데서 자꾸 이렇게 욕을 해요. ‘그 십자가 나도 안다.’라고 하거든요. 그 사람들은 다른복음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안 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안다고 해놓고는 막상 목회를 할 때는 십자가와 상관없는 식으로 목회를 하거든요. 교회에서 드럼을 가르쳐 준다든지 교회에서 공짜로 영어를 가르쳐 준다든지 놀이방을 운영한다든지, 전자기타를 무료로 가르쳐 준다든지, 목회에 도움 되도록 사람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과외를 한다든지 그런 것들. 그 사람에게 ‘저, 복음이 아닌 다른복음으로 목회한다는 것이 어떤 겁니까?’ 물어보면 답변을 안 하지요.

그래놓고 복음 이야기하면 ‘나도 복음 안다. 나도 신학교 때 십자가 알았다.’ 이렇게 하거든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뭐라고 했다? 빛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네가 뭐라는 뜻입니까? 어둠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제가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완전히 어둡습니다.’ 하면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굉장히 기분나빠할 가능성이 많아요.

성경에 그대로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 사람들은 ‘왜 같은 말을 좋게 하지 부정적으로 하나?’ 이래 나옵니다. 다른 복음을 모르면 그거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왜 사람들은 자꾸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고 부정적인 것을 싫어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믿고자 함이 아니고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용하는 것과 믿는 것이 뭐냐 하면, 이용하게 되면 자기노선을 포기 안 해도 돼요.

자기레일, 자기철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기 인생을 포기를 안 하고, 거기다가 덧붙이기 첨부하기, 거기에 교회 다니기를 추가시키면 자기인생이 윤기가 나고 질 좋은 인생이 되리라, 지금보다 더 우수한 인생이 되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종교라고 합니다. 종교놀이, 게임이죠. 이용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좋다는 이야기만 해주면 얼마든지 추가할 용의가 있다, 이 말이거든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믿는다는 것은 그게 아니라 노선을 갈아치우는 겁니다. 한 가지 예로 TV에서 KBS 보면서 동시에 MBC 못 보잖아요. 그렇지요. MBC 보려면 KBS를 포기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인간들은 KBS에다가 MBC 까지 튀어나오는 그런 채널을 원해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은 좋으신 분, 나도 좋은 분, 그러니까 같이 좋은 분끼리 섞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좋은 분, 나도 예수 믿으니까 좋은 분? 세상에,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이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에서 ‘세상 죄’는 쏙 빼놓고 뭐만 챙긴다? 어린양만 챙겨서 구원받고자 하는 거예요. ‘세상 죄’니까 이 ‘세상 죄’안에 누가 들어 있지요? 본인이 들어 있지요.

본인의 죄를 위해서 죽어가는 어린양이라면 어린양 따지기 전에 뭐부터 알아야 돼요? 도대체 ‘내가 왜 죄인이냐’부터 아는 자에 한해서만 비로소 어린양관계에 결합이 되겠지요. 요한일서 1장 10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뭐하는 자로 만든다?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들지요.

우리가 우리를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누가 누구를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이 말이지요. 제가 방금 읽은 요한일서 1장 10절의 말씀을 그대로 이야기하면 교인들이 의아해 해요. ‘왜 저런 말을 하지? 생전 처음 들어본 소리 같은데.’ 이렇게 당황해 합니다.

왜 당황해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선물보따리를 가득 쥐고 와서 그냥 내어주고 분배해주고 주고 또 주고 또 주고 복 주고 복 주고, 이런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요한일서 1장 10절에 보면 아무것도 없이 텅텅 빈 채로 나타나는 거예요. 텅텅 빈 채로 흰 종이가 같이 있다가 만일 어떤 사람이 ‘나, 죄 없어요.’라고 한다면 그 소리 듣고 여기에 뭐가 생깁니까? ‘거짓말쟁이’라는 글자가 새겨지는 그런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려고 오시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데 어떤 사람이 ‘나는 범죄 한 적이 없어요. 나는 훌륭합니다.’라고 한다면 여기에 ‘거짓말쟁이, 엉터리 하나님’ 이라는 이런 말이 새겨지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정당하다.’라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우리 하나님의 가슴팍에는 점점 더 지독하게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쟁이, 점점 더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죠.

누가 정당하면 정당할수록? 인간이 착하고 어질고 훌륭하고 자비롭고 부처 같고 우수하고 훌륭하면. 그럴수록 하나님은, 예수님은 ‘아니야. 메시아 아니야. 사기꾼이야.’ 이게 더 증가하는 그런 것을 가득 담고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요.

우리가 뭘 갖고 있든지 관계없이 그냥 퍼주기만 하는 하나님이에요. ‘아나 먹어라’ 라고 계속 퍼주기만 하는 하나님이에요. 거기다가 기도하면 기도했다고 보너스를 더 주는 하나님이에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말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이거든요. 그리고 어린양을 알려면 ‘세상 죄를 지고 간다’고 할 때 ‘세상 죄가 어떤 것이 세상 죄이기에 그 오신 메시아가 아예 이 땅에 올 때부터 죽기로 작심하고 와야 될 그 이유가 뭐냐’가 드러나는 거예요.

이걸 모르면 이름만 예수지 사실은 그 이름껍데기 안에 악마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악마 믿고 천국 간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그 예수는 믿고 지옥 가는 예수인데 자기는 천국 간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그것도 집단적으로.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빛이 되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말이에요.

‘말씀이 빛이 되고 빛이 육신이 되고’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노선이잖아요. 예수님의 이 노선을 인간들의 노선이 알아챌 수 없지요. 왜? 예수님의 노선은 ‘말씀이 빛이 되고 빛이 육신이 되었다.’ 라고 한다면 아래노선은 빛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어두움이죠.

그 어두움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교회 아닙니까? 왜? 인간이 볼 수 있으니까. 인간은 교회가 납득이 돼요. 인간이 교회경영을 하면 사람이 모이고, 다단계도 사람 끌어 모으기 하면 모이듯이 교회도 뭘 하든지 사람 끌어 모으기 하든지 다 눈에 보인다 이 말이지요. ‘아, 이렇게 하면 커지는구나. 교회에 정이 많으면 정이 그리워서 할머니들 할아버지들 모여드는구나. 기도하면 복 받는다고 하니까 복 받으려고 모여드는구나.’

이것은 납득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빛이고 당신은 빛 앞에서 어두움이야.’라고 하는 것은 어느 누가 납득이 되겠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납득되지 않는, 이해 안 되는 그리스도의 노선을 버리고 뭘 고집하느냐? 내가 할 수 있는 노선을 고집하다 보니까 교회 부흥되는 이것을 가지고 신앙의 내용으로 삼는 거예요.

교회 믿고 천국가자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요한일서를 지금 시작하는데 요한일서 1장 10절에서 ‘내가 죄가 없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우리에게 결국 뭘 이야기하느냐? 요한일서 2장 27절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가르침’입니다. 태초에 생명의 말씀이 나타난 이유가 우리에게 뭘 하려고 합니까? 가르치겠다는 거예요. 가르치겠다는 말은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 없다?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문제가 있음을 자각해 줘야 이 가르침의 권위가 서요. 자기한테 문제가 있으면 이 가르침이 귀한 줄 압니다. 그러면 이 가르침에서 기름부음이 오기 전에는 그동안 누가 누구를 가르쳤습니까? 인간이 인간을 가르친 거예요.

그런데 여기 요한일서 2장 27절에 보면 누가 누구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지요. 그러면 그동안 인간이 인간을 가르쳐 온 그 가르침은 하늘나라에서 일절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일절 안 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가르쳤습니까? 목사님이. 그런 것은 소용없는 거예요. 누가? 장로님이. 누가? 신학교교수님이, 혹은 어느 신학박사가. 그거 다 소용없는 거예요.

하늘나라는 사람이 가르쳐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 갈 사람은 ‘성령님이 나를 가르쳤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돼요. 강도사가, 목사가 그 소리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설교하면서 성경공부하면서 목사가 그 소리를 할 수 있어야 돼요.

만약에 제가 가르치고 어떤 목사가 가르친다면, 만약 그렇게 해서 교회가 되고 복음이 된다면 이것은 ‘왜 너만 가르치느냐?’ 하는 강사문제가 등장합니다. ‘너만 복음 아나?’ 이렇게 된다고요. 심지어 사도요한이 이야기하면서 사도요한 자신도 여기 이 가르침에 해당 됩니까, 안됩니까? 안됩니다.

왜냐하면 요한 일서에 보면 ‘너희들이 내 말을 깨닫는 것은 너희들이 내 말을 듣고 깨달은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있다는 그 요소 때문에 내말을 알아듣는다.’고 한 거예요. 성령님이 없으면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 말과 내 권하는 것이 내 지혜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권능이 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그 뒤에 보면 ‘심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요 물주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누구다? 하나님이시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이지요. 아볼로는 뭐며 게바는 뭐며 바울은 뭐고, 그게 다 뭐냐, 이 말이지요. ‘세상은 다 너희의 것이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인데. 그렇다면 교인들 속에 성령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 됩니까?

이미 어떤 어떤 사람을 성령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초월했다는 뜻이겠지요. 아까 그 사도바울 이야기를 다시 해 봅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사람의 권함이나 설득력,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에 있어서 권면이나 명령들이 많지요. 그것이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명령입니까? 아니면 성령님의 가르침입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어느 것입니까?

만약에 인간인 사도바울이 인간을 가르친다면 사도바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만 가르치겠지요. 그런데 성령에 의해서 가르친다면 이것은 성령이 없는 사람은 도저히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만 가르치겠지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권면 나오잖아요. ‘온유 하라.’는 권면이 나오지요.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는 권면이 나오지요. 그 권면을 본인이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본인 안에 있는 성령이 할 수 있는 겁니까? 성령님이 할 수 있지요. 그래서 거룩하다면 이것이 본인의 거룩입니까, 성령님의 거룩입니까? 성령님의 거룩이잖아요. 거기에 성령님이 왜 등장합니까? 성화론이 거기에 왜 있는 거예요?

개혁주의성화론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노선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누구의 노선? 나의 노선, 인간노선을 유지하면서 거기에 소명, 중생, 회개, 신앙, 칭의, 양자, 성화, 영화를 집어넣어서 자기노선으로 자기를 스스로 구원하려 하는 종교적인 수법에 지나지 않아요.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나를 믿는 거예요.

나를 믿으면 여기에는 반성이 있을 뿐이지 이것을 전적으로 부정해버리는, ‘나는 어둠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어둡다고 이야기한 나는 멋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회개한 나는 괜찮은 존재입니다.’ 이렇게 돼버려요. ‘남들이 안 믿는 예수를 나는 믿으니까 나는 얼마나 훌륭합니까?’ 이렇게 된다고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죄인중의 괴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믿는 사람도 이렇게 흉내를 낼 수 있어요. ‘사도바울만이 아니고 나도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차이가 나요. 어떤 차이냐 하면,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데, 이 사람은 ‘나도 믿고 천당 간단다.’라고 자기가 믿고 천당 가는 것을 증거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나는 오직 자랑할 것이’ 뭐밖에 없다? ‘십자가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자랑할 것이 십자가밖에 없다.’고 왜 그랬을까요? 십자가는 누가 죽은 십자가냐 하면, 예수님도 죽었지만 또 누가 죽었어요? 나는 이미 맛이 간 인간, 나는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이 있기에 십자가라는 거예요.

나는 쓸모 짝도 없고 무능하고 무의미합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거든요. 내가 구원받는다면 십자가의 능력 때문에 구원받지, 십자가 믿어주는 것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죠. 요한일서는 ‘가르침’입니다. ‘너에게 문제가 있다.’ 하는 겁니다. 이 문제가 보통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 문제란 ‘내가 정당화되면 될수록 누가 거짓말쟁이가 되는가?’ 하나님이 갈수록 거짓말쟁이가 되지요. 그러한 식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가르치는 거예요. 가르치면 그대로 배우면 될 것이 아닌가, 하는데 이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가르친다는 것은 통과해주는 거예요.

그 가르침에 대해서 같은 성령이 안에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옳은 것으로, 현재 내 모습이 그런 모습인 것을 수용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가르침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지요. 그래서 요한일서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눠버립니다. 5장에 나오는데 세상에 속한 사람과 하나님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세상에 속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사람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사람은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너희들은 내 말을 들으니 너희들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맞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증거, 예수님이 세상에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한자의 그 기준이 된다는 증거를 제시한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아까 첫 번째 제가 이야기한 것이 뭐였습니까? 우리 안에 뭐가 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피’, 세 번째가 ‘물’ 요한일서에서는 이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물과 피와 성령이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한다, 이래 되어 있습니다. 참 희한하지요. 물과 피와 성령 이 세 가지 모두 다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했을 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증거들이에요. ‘나는 이정도도 괜찮아. 나는 있는 것에다 하나님의 말씀을 추가해서 구원받을 거야.’ 이렇게 나온다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성령이 온다는 말은 우리는 죽은 인간, 육이다, 이 말이거든요. 물이 온다는 것은 우리도 물에 수장되어야 된다, 죽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피가 온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이 피 흘린 것처럼 죽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 세 가지가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는 이미 어두움이고 빛이 아니며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세 가지 증거가 되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물세례 받을 때 입수가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수장이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물에서 나오는 순서가 있겠지요. 물에 들어가고 물에 잠기고 다시 물에서 나올 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나는 죽었다가 살아나야 되는데 이 작업을 하나님이 물세례를 통해서, 세례요한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 일은 하나밖에 없지요. 뭐냐 하면 너를 죽여 놓고 살려내는 일, 그 외에는 하나님의 일이 없습니다. 애 서울대학 보내주고 기도하면 사법고시 합격하고 그 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법고시 합격하는 그 인간을 죽이고 서울대학 들어가려는 그 인간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부자 되려는 사람을 죽여 버리고 암 걸렸는데 낫고자 하는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목사 되려는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런 설교 했어요. 목사라는 직이 의미 없고 쓰잘데기 없다는 것을 알 때 그 때부터 목사는 예수 믿는다고 했어요. 목사직을 안 믿고 예수를 믿어요. 그런데 목사가 목사직에 의미를 둘 때 그 사람은 절대로 예수를 못 믿습니다. 안 믿습니다. 왜? 믿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목사 잘하면 되지 예수를 왜 믿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날려갈 것이 다 날려가 버렸어요. 몽땅 다 날려가 버렸어요. 이제 이 세상에 믿을게 하나도 없어요. 나 자신도 못 믿겠어요. 손대면 실패라. 시편에 보면 다윗이 그러지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목자시오  피난처시오 방패요 산성이요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힘이시오 나의 칼이시오.’

언제 그렇습니까? 다윗이 잘나갈 때? 아닙니다. 쫒기고 쫒기고 또 쫒기고. 요새 말로 하면 손대면 실패하고 손대면 실패하고, 하여튼 인생에서 성공한 적이 없을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뭐가 없으리라? ‘부족함이 없으리라.’ 사람 환장합니다, 정말. 부족함이 없답니다. 여호와가 계시는데 내가 왜 부족을 느끼는가, 여호와가 계시는데.

여호와가 계시는데 내가 뭐가 모자라느냐, 이 말이지요. 요한일서는 ‘가르침’ 인데요. ‘가르침’은 하나만 있으면 돼요. 뭐냐? ‘맞습니다. 가르친 대로 나는 죄인입니다.’ 이러면 우린 받을 것 다 받았어요. ‘나, 뭘 해도 죄인입니다. 삼성그룹 회장을 한다 해도 나는 실패자요 망했습니다.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것을 알아채면 그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 사람이에요.

그럴 때 그 사람에게만 예수님은 유일하게 빛이 되지요. 왜? 자기는 어두움이니까. ‘이제 나는 때려죽여도 빛 없이는 못살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없이는 못살겠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주님의 물과 피와 성령 없이는 나는 못살겠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사람이 자기 노선을 고집하고 버티고 있으면 이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 현재 나의 노선,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이 노선을 뜯어내야 되는데 뜯어내지 않고 그냥 추가적으로 덧대기를 해 버리면 안에는 우상숭배요 껍데기는 거짓예수 믿는 것이 되지요. 그래서 성경말씀에 이런 것이 있지요.

‘헌 헝겊을 새 옷에 기워서는 안 된다. 왜? 새 옷마저 찢어지니까. 새 포도주는 어디에 담아야 됩니까? 옛 부대에 담으면 안돼요. 왜? 옛 부대가 찢어져서 새 포도주가 다 쏟아져서 낭비가 되지요. 다시 말해서 율법을 알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복음은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게 되어 있어요. 율법에 의해서 죄인이 되어 있어야 복음이 귀한 줄 알고 여호와 나의 목자가 귀한 줄 압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알고 있어야 그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보물로 다가와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지요. 어떤 보석장수가 귀한 보석을 하나 사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추가했습니까? 기존에 있는 보석에다가 새로운 보석을 추가하는 이것이 하늘나라냐, 이 말입니다.

그런 하늘나라 없어요. 새로운 보석 나오면 기존의 보석들은 아낌없이 다 팔아버리지요. 왜? 그 가치가 족히 비교가 안돼요. 완전히 뿅 간 거지요. 새로운 가치에 눈이 먼 겁니다. 귀한 보석 하나 챙기고 난 뒤에 나머지 것들은 보석도 아니고 이제는 쓰레기가 되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나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새삼스럽게 주는 것이 없어요. 주는 것은 없고 가르치기만 해요. ‘현재 네 안에 내 보석을 가지고 있는데 네가 잘 가지고 있느냐?’ ‘뭐요?’ ‘성령 말이다.’ ‘아, 예. 있습니다.’ 현재 성령의 값어치를 새삼스럽게 가르치는 것이 요한일서입니다. ‘아직도 내가 준 성령 귀하게 여기고 있느냐?’ ‘예, 아직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게 요한일서에요.

‘내가 준 사랑 아직도 귀하냐?’ ‘아직도 귀합니다.’ ‘어느 정도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만큼 주님 주신 사랑은 귀합니다.’ 달리 이야기합시다. 성령의 가르침에 의하면 요한일서의 2장 말씀처럼 항상 뭘 건드리냐 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온 것’을 ‘이것은 세상에서 온 것이다’라고 지적하는 능력으로서 항상 성령은 우리에게 가르치지요.

그렇다면 육적인 사람은 은근히 뭘 기대하겠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아까 성도는 뭘 자랑합니까? 십자가 자랑하지요. 하지만 인간들은 ‘십자가 믿을 테니까 이것 주시렵니까?’ 이렇게 자꾸 흥정에 나서고 계약에 나서지요. ‘내가 예수 믿어줄 테니까 그 대신 내가 원하는 이것 주시겠습니까?’

‘뭐?’ ‘세상 것 말입니다.’ ‘그게 왜 갖고 싶은데?’ ‘그래야 내 자랑이 되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내 향유, 내 욕구, 욕망에 대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 ‘나도 세상 사람들 사는 것 같이 한 번 살아 보렵니다. 이제 지긋지긋하게 천하게 사는 것은 그만 하렵니다. 지겹습니다. 지겨워서 못살겠다. 구질구질한 내 인생. 뭔가 한번 바꿔보고 싶습니다. 반짝반짝하게.’

그렇게 할 때 성령이 오게 되면 뭐라고 합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온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 죽을 놈이 왜 자랑을 합니까? 이걸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의 가르침’ 그런데 이상해요.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 이렇게 가르치니까 교인들이 다 나가버렸어요.

다 나가면서 ‘왜 나가십니까?’ 하니까 말을 안 해요. 나중에 우회해서 들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인간의 의를 무시한다.’ 이래요. ‘이 목사가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고 인간의 행함을 무시하더라.’ 그 소리를 듣고는 ‘고맙습니다. 제가 복음을 전한 것이 맞군요.’ 안에 성령이 없고 육만 있는 사람은 이 성령의 가르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몇 년간 참을 수는 있어요. 참다 참다 못 참습니다. 결국은 갈라서게 되어 있어요. 갈라서면서 하는 말이 ‘인간의 가치를 무시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한번 설명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그것은 다 지나간 것이다. 이제는 새사람이 되었으니 잊어버리자.’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요한일서는 이제부터 안 봐도 돼요.

집에 성경 없어도 돼요. 새사람 되었는데 성경 왜 봅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그런 것 왜 봅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는 것을 왜 봐요? 이미 돈 사랑 안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는데 그걸 왜 봅니까? ‘나는 돈 사랑 안 해요.’라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는 디모데전서 6장의 말씀이 필요 없지요?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다.’라는 말씀은 찢어버려야지요. 그걸 왜 갖고 있습니까? 자기하고 상관없는 것인데. 그렇잖아요. 이미 다 뗀 것인데 그걸 왜 갖고 있어요. 그들은 말하기를 십자가를 잊어버리라는 거예요. 십자가를 잊어버리려면 사도의 편지에서 매직을 가지고 십자가 나오는 족족 다 시커멓게 지워버려야 돼요.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너희는 십자가의 원수가 되었구나.’라는 그것을 지워버려야 돼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것도 지워버려야 돼요. 제가 지우라고 해도 그 사람들 성경 안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기존의 노선, 이것을 마작이라고 하는데 중국 사람들이 하는 마작알지요, 일렬로 나란히 세워놓고 같은 글자끼리 바꿔치기 하는 것, 마작처럼 인생을 죽 늘어놓고 나쁜 것은 빼내고 좋은 것은 집어넣고 자기 인생을 근사하게 만드는 여기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어떤 보탬이 될 것이냐, 라는 자기노선의 고수와 집착, 교회 처음 올 때부터 이것 외에 다른 것은 생각 안했던 사람들입니다.

자기부인이 안되지요. ‘목사님, 좀 바꿔주세요.’라고 온 것이 아니고 ‘목사님, 좀 채워주세요.’ 이렇게 온 거예요. ‘목사님, 나라는 인간 좀 바꿔주세요.’ 이렇게 온 것이 아니고 ‘내가 이런 것에 결핍되어 한이 맺혔는데 내 한 좀 풀어 주세요.’ 그 한 풀러 온 거예요. 욕심이 도져서. 사도요한이 교인수가 몇 명이었습니까? 교인수 적어서 지옥 갔습니까?

스데반 집사님이 교인수가 몇 명이었지요? 몇 명 안 된다고 지옥 갔습니까? 이렇게 자기노선을 주장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자기존재의 가치, 존재의 이유, 존재의 의미, 이것을 계속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이미 죽었고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누구 몸입니까?

예수님의 몸인데 예수님의 몸으로서 내가 사는 것인데, 아직도 자기 몸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 몸 따로 있고 자기 몸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온 작대기가 내 안에 꽂힌 거예요. 주님이 장미라면 장미에서 나온 가시가 내 몸을 찌른 겁니다. 그래서 그걸 성령이라 하고 로마서 6장에서는 성령세례라고 하는데, 성령의 세례가 뭐냐?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것이 세례에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이것 하라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교회에 불러 모은 거예요. 예수 혼자 죽고 나 살자, 그게 아니라 ‘매일매일 같이 죽고 같이 살아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 성령께서 그렇게 해 줘요. 우리는 고민할 때 혼자 고민하고 혼자 끙끙 앓아요. 과연 그것이 고민할 거리인가, 걱정거리인가?

이렇게 생각해보면 그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노선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노선을 따로 챙겨놓고, 내가 나를 믿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민과 걱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나를 믿게 되면 그 자체로 살면 살수록 죄를 짓게 됩니다. 죄가 계속해서 생산됩니다. 여러분, 죄가 언제 나오는지 압니까? 안 죽으려고 할 때는 죄가 나와요.

자기가 안 죽으려고 할 때는 죄가 나오고 살려고 할 때 죄가 나와요. 그냥 뭐든지 죽으려고 할 때는 죄가 안 나옵니다. 죄가 안 나오고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온유가 나오고 화평이 나옵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이 죽으려고 하면 걱정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성도가 죽으려 하면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이게 나와요.

초대교회 때 서로 나눠주고 서로 모였지요. 왜 그런 줄 압니까? 다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로 나눠주고 떡을 떼고 그런 거예요. 그 공동체에서 따로 나와서 살 생각 안했습니다.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횡재한 것으로 여기고 주와 함께 날마다 죽어 있는 그것이 복 인줄로 알 경우에만 이 사람들이 떡을 뗐습니다.

그런 것이 고린도교회였고 에베소교회였고 빌립보교회였는데, 자기 따로 살려고 나올 때 그때부터 여기에 죄가 번진다는 거예요. 왜 날 안 알아주느냐?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게 요한 2서에 나오지요. ‘으뜸 되고자 하는 자가 있을 때는 용납하지 마라.’ 이게 목사도 해당 되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 따로 계급을 만드는 사람, 교회에서 튀려고 하는 사람.

그러면 우리는 왜 모이느냐? 서로 봉사하고 서로 도와주기 위해서 모였지요. ‘믿음의 분량대로 서로 은사를 나눠주고 서로 돌보고 서로 사랑하라.’

로마서 12:3-1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이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것이니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긱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서로’라는 말이 많이 나오잖아요. ‘서로’ 가 무슨 말이냐 하면 ‘너 자신의 존재가치는 없다.’는 거예요. ‘네가 죽을 때만 가치가 생기지 네가 살아 있는 한 가치를 생각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내가 이 몸이 어디 가서 죽을까?’ 이러면 가치 있는데 ‘내가 어디 가서 이 몸이 살까?’ 이러면 가치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 맘으로 그 동네 가면 그 동네 사람들이 또 괴롭혀요.

아까 강의 전에 전목사님에게 나이를 물었어요. ‘한 45쯤 됩니까?’ 했더니 사십 아홉 이래요. 한 2개월 있으면 50돼요. 제가 왜 나이를 물었느냐 하면 서른 살 때 한 50쯤 되면 인간 되는 줄 알거든요. 한 40때, ‘내가 십년만 더 있으면 인간되겠지.’ 50되니 인간되었습니까?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노선을 날마다 깔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서도 내 노선 깔고, 내일 되면 내일의 노선 따로 깔아요.

그게 죄 인줄 알면서도 ‘내가 죄인 맞습니다.’ 하면서도 또 눈뜨면 ‘내가 이렇게 살겠다.’ 하고 또 자기 노선 따로 깔아요. 이게 90이 되고 100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살리는 이유가, 예수님이 왜 화목제물 되고 피 흘렸느냐를 피와 물과 성령을 왜 보내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도를 계속 살려줘서 죄가 나오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죄가 나오더라도 살려고, 죄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이 죄가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이미 죽은 놈이구나. 죽었으니까 죄가 나오지. 죽을 만 해서 죄가 나오지.’라고 느끼는 사람은 죄가 나와도 감사와 온유와 화평으로 열매를 맺어요. 죄는 지어놓고 열매는 감사가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라.’가 나오고 ‘항상 기도하라.’가 나와요. ‘항상 즐거워하라.’가 나옵니다.

왜? ‘나는 죽어 마땅한 놈이기 때문에.’ ‘이 땅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죽을 때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것이라.’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오지요. 그러면 지금 걸치고 있는 것은 복이고 덤이고 횡재한 거지요. 시체에 거죽 입혀 놓은 것 같아요. 바로 이런 가르침을 사도요한이기 때문에 먹혀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있는 사람은, 사도요한의 말이 아니라 그게 성령의 말일 때는, 여러분 속에 있는 성령이 그것을 확인절차에 들어가요.

‘아! 나, 성도 맞구나. 나는 빛의 자녀 맞구나. 나는 세상에 속한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에 속한 자녀 맞구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줌으로 우리로 하여금 또다시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케 하는 열매로 맺어지게 합니다. 그것이 요한일서입니다. 이제 정리하고 오늘 강의 마치겠습니다.

요한일서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태초의 말씀이 빛이 되셨다’는 요한복음의 말씀과 병행해서 같이 갑니다. 말씀이 빛이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드러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 없다 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것으로 이 세상을 덮쳤느냐?’를 믿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덮치고 보니까 우리는 졸지에 뭐가 되었습니까? 어두움이고 우리는 계속 죄만 짓고 있는 사람인 것으로 들통이 난 것, 이 관계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성령이 왔으므로 이것이 믿어지는 놀라운 기적을 우리 안에 품고 있음을 요한 일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겁니다. ‘너희 속에 기름부음이 있으면….’ 이라고 했거든요.

없으면 말 안합니다. ‘너희 속에 성령이 있으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아먹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너희에게 더 이상 심판이 없으리니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느니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갖고 있던 우리 인생, 내 역사, 내 인생의 경력, 그것이 바로 죄의 역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내 것만 고집하고 내 집착과 내 명예와 위신을 챙기는 그런 순간에도 주께서 성령으로 피로써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11-19 15:48:56 녹취 : 오용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