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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강 / 요일1:1 / 안산 091113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1서

2강 / 요일1:1 / 안산 091113

정인순 2011. 1. 1. 11:05

091113 요일1:1 이스라엘과 전쟁과 주체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안산/안산091113요일1장1절.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안산/안산091113요일1장1절.hwp

 

 

안산091113요일1장1절

요한 1서 제 2강(이 근호목사, 2009년 11월 13일, 안산나라장로교회)


요한일서 1장입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셨지요. 이 집단이 이스라엘 집단인데 이스라엘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들쭉날쭉 일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만약에 구약사람보고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있기는 있나?’라고 묻게 된다면 누구에게 물으면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물으면 돼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그들의 역사가 하나님께서 관리했던 역사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는 이상은 하나님이 없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자기들이 만들고자 했던 나라가 아니고 ‘이스라엘 만들기’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되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는 이상은 ‘에이, 하나님이 어디 있어?’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었다 치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드러냈느냐?’ 할 때, 구약에서는 전쟁이라는 말을 해요. 요한일서 1장을 시작하면서 또는 신약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점에서 논리의 난맥을 볼 수 있느냐 하면, 구약에서는 전쟁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히 나타냈다, 이 말이죠.

그렇지요? 왜 신약에는 전쟁이 없습니까? 같은 하나님인데 왜 신약에는 전쟁이 없지요? 사도바울은 영적전쟁이라는 말을 했다고요. 영적전쟁이라는 말이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이 구약에서는 실제로 땅뺏기전쟁을 했잖아요. 여리고성 빼앗고 약속의 땅 빼앗고 했잖아요. 진짜 화살이 오고 갔다 이 말이지요. 신약의 영적 전쟁이라는 것이 구약의 전쟁처럼 그렇게 되려면 구약의 전쟁의 바탕위의 영적전쟁이라면 그렇다면 구약은 영적전쟁 아닙니까?

다시 해 봅시다.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냈다. 그런데 그 전쟁의 주체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이라는 전쟁의 주체가 있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전쟁이라는 것을 모르고 ‘내 주체가 여기 있고 하나님 여기 계시면 하나님을 내가 믿음으로서 구원 받는다.’ 할 때 여기에 어떤 전쟁개념은 있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전쟁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전문적으로 전쟁하는 주체세력이, 주체집단이 있어야 돼요. 그게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가지고 전쟁 하신다 이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 신약의 같은 하나님이라면 신약에서 사도바울의 말대로 영적전쟁을 하려면 여기서도 영전전쟁을 하는 주체가 나타나야 됩니까, 안 나타나야 됩니까?

나타나야 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신약에 영적전쟁의 주체를 나타내시는데 막상 신약의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개념은 전혀 안 들어오고 ‘나 교회 갔다. 나 오늘도 복음 들었다. 나 그거 믿는다. 오늘밤에 죽어도 나 천당 간다.’ 이것 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뭐 하나 챙겼다는 거지요. ‘천국 챙기고 영생 챙기고 구원 챙겼다. 손 턴다. 나한테는 하나님도 더 이상 기대하지 마세요. 나는 믿기만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2012>라는 영화를 저는 아직 못 봤습니다만 우리 김 대식 성도님하고 몇몇 분이 벌써 보신 것 같아요. 목요일에 한다는데 어떻게 그리 빨리 볼 수 있는지 몰라요. 영화관에서 봤는지 야매로 봤는지, 하여간 잘 모르겠는데 저는 예고편 5분정도 나오는 것만 우선 봤어요. 거기에 보면 캘리포니아가 지진에 의해서 물밑으로 가라앉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럴 때 그들이 거기서 무슨 전쟁을 벌입니까? 아무 전쟁을 안 벌이지요. 그렇잖아요. ‘가만있는데 땅이 꺼지면서 주저앉고 바닷물이 넘쳐서 캘리포니아 전체가 없어졌더라.’ 거기에 칼 들고 전쟁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자연을 향하여 뭐 전쟁할 겁니까? 그냥 당하는 대로 당할 수밖에 없지요.

전쟁이 없는 상태에서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구원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은 100프로 엉터리입니다. ‘내가 예수 믿을게 구원해주세요.’라는 개념은 구약은 물론 신약에도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서 신약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구약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주체, 전쟁하기 위해서 없는데서 새로 뽑혀 나오는 사람들이 구원되는 사람이에요.

구약하고 똑같아요. 이스라엘나라가 하나님의 전쟁을 하기 위해서 그 전쟁의 주체로서, 전쟁의 군대로서 뽑혀 나와서 이스라엘 되었듯이 신약에도 전쟁이 우선이고 전쟁하기 위해서 솎아져 나온 사람들, 뽑혀져 나온 사람들이 바로 구원될 사람입니다. 그냥 ‘캘리포니아가 무너지고 안산시가 무너지고 서울시가 무너졌는데 하나님께 비니까 하나님이 건져줬다.’

이런 개념의 구원은 엘리뇨현상에 의해서 홍수 날 때나 양자강에 물 빠졌을 때, 그럴 때나 끄집어내는 것이고 쓰나미현상 일어났을 때 빠져나온 것이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은 그런 구원개념이 아니에요. <2012> 예고편 보니까 빌딩 두 개가 무너지는데 그 사이로  경비행기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것이 5분 예고편에 나와 있어요.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휴, 구원받았다.’ 하잖아요. 그것은 그냥 두 빌딩 사이를 빠져나온 것이지 구원받은 것이 아니지요. 구원받았다는 신약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면 신약이나 구약이나 구원개념이 성립되려면 그 주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뽑혀 나온 주체냐, 아니면 내가 스스로 구원받으려고 믿을 것이 없는가 싶어서 예수 믿는 그 주체냐, 그 둘 중에 어느 쪽이냐가 중요해요.

만약에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십자가 믿는다면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될 수가 없어요. 하나의 종교취미생활을 하는 것이지 구원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영적 전쟁을 벌이기 위해 나온다면 여기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적, 하나님의 적이 있어야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적이 나와야 하고 그 적을 알아보고 그 적과 싸워야 되는데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적이 누구였습니까? 이스라엘이지요. 놀라운 사실은 신약에 영적전쟁의 대상이 누구냐 하면 구약의 적들이 신약의 구원의 대상으로 등장하면서 어떤 교체가 일어나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에는 ‘나는 적이다. 이제는 하나님편이다.’라고 전환되는 절차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에 나오는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의 적이 어떻게 같은 편이 될 수 있느냐? 제가 ‘어떻게 하나님의 적이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의아해 하지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되묻겠습니다. 꼭 하나님의 적이 되어야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저는 날 때부터 하나님 편인데요.’ ‘그러니까 당신은 이단이 되는 거예요.’

‘난 날 때부터 하나님의 편이었고 난 날 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래 되어버리면 그 사람에게는 적에서 아군으로 변하는 절차가 누락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전쟁개념 없이 그냥 예수님을 생각하는, 다른 예수를 상정할 수밖에 없어요. 요한일서에서 ‘빛과 어둠’ 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어요.

요한일서 1장 6절부터 봅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라고 되어 있지요. ‘빛’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빛이라는 이야기는 ‘밝다. 몇 와트냐?’ 그런 개념이 아니고 빛은 무엇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있느냐 하면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들추기 위해서 어두움에 속하지 않은 어떤 힘을 빛이라고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빛으로 왔다.’ 해놓고 막상 보니까 누구냐 하면 어떤 분이었지요. ‘어떤 분’,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보고 ‘야, 빛이네.’라고 생각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어둡다는 생각을 인간은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 왜 죄인인가 하면 본인이 죄인인줄 모르기 때문에 죄인이에요.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인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려고 애를 써요. 심지어 교회는 안가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선물 받기를 원하잖아요.

갑자기 넘어지면서 ‘아이쿠, 하나님!’ 하잖아요.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나쁜 개념을 안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감정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존경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생각은 일절 해 본 적이 없어요. 해 본적이 없는 그 사람은 여전히 구원받지를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오시는데 그래야 빛과 어두움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니까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상당히 어렵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빛이 어떤 분으로 왔다, 했지요. 이게 주체입니다. 예수님주체가 일어났을 때 어두움은 ‘나는 어두움입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라는 사람 참 드물었어요.

예를 들어 세리나 창기 같으면 ‘나는 죄인입니다.’ 했고, 또 삭개오 같은 경우에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그것을 알았고 또 베드로 같은 경우에도 물고기를 잡아 주니까 뭐라고 했어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지요. 몇몇 사람을 빼놓고는 자신의 주체가 어둠에 속했다고 생각을 못한 거예요.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빛이라는 분이 어떤 주체, 어떤 신체로, 어떤 아저씨로 왔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아저씨(예수님)하고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주체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는 빛이고 하나는 뭐가 되겠어요? 어둠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주체 문제에서 인간의 주체가 등장하면 인간의 주체는 다른 사람들 가운데 무엇이 일어나느냐 하면 전쟁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항상 태어나면서부터 생존경쟁을 하면서 싸우게 되어 있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 4장의 가인이죠. 가인은 누구하고 싸웠습니까? 아벨하고 싸웠지요. 둘이 사이좋게 지낸 것이 아니잖아요.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아벨은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는가? 가인이 가인답게 되기 위해서 했겠지요.

그러면 가인에게 있어서 가인답다는 말은 가인에게 뭐가 확고히 되어 있습니까? ‘나’라는 주체는 확고히 되어 있지요. 이걸 누가 깼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가 드린 제사를 안 받으시고 아벨이라는 주체가 드린 제사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겁니다. 동생이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받았다. 받았으면 받은 것이지 그걸 왜 죽입니까?

제가 어렵다고 한 것이,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냥 주체로서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외부와 더불어서 전쟁을 벌이면서 자기 주체를 확립하게 되어 있어요. 외부와 자꾸 견주고 비교하면서. 방금 이 주체가 전쟁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국가라는 것은 시민들, 혹은 시민사회들이다.’ 맞아요. 국가라는 것은 허구지요. 안산시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안산시민들이죠.

그런데 언제 안산시가 허구가 아니고 실체가 되느냐 하면, 안산시하고 수원시하고 축구시합하면 안산시는 안산시민을 대표하는 주체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체라는 것은 우리 배후에 있는 숨어 있는 영적세력이 자기 성질을 뾰루지처럼 돌출 시킨 거예요. 조선시대 여성들 한복치마가 넓잖아요. 입고 있는 치마는 잘 모르겠지만 벗어놓으면 한방 가득하죠.

퍼져 있지요. 퍼져 있는 이 치마를 쏙 잡아당기면 이것을 대변하는 주체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안산시를 악마가 쥐고 있다면 악마의 주체는 볼록 볼록 다 튀어 나오겠지요. 튀어 나오다가 언제 하나가 되느냐 하면 수원시하고 축구시합 할 때 이 전체가 하나로 모이는 겁니다. 하나로 모일 때 이걸 축제라 하지요. 축제 왜 합니까? 하나 되기 위해서 축제합니다.

단합대회 왜 합니까? 하나 되기 위해서 하는 거지요. 이렇게 하나로 모일 때, 사람은 자기 혼자 있을 때는 자기가 주체지만 어떤 계기가 주어지게 되면 더 큰 일에, 숨어 있는 영적인 환경에 보다 깊숙이 개입할 때 주체는 더욱더 확대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어려운 말을 하는 이유는 ‘어두움’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어둡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양심껏 살아요. 어둡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약 삼성그룹에 있다면 삼성그룹에서 보통 일을 시킬 때는 내가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삼성그룹의 임원이 되었다 칩시다. 비자금 조성하고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게 될 때는 삼성그룹의 이름으로 하잖아요.

본인이 삼성그룹에 사표를 내면 안 해도 될 짓을 삼성그룹이라는 이름 때문에 비자금조성하고 뇌물주고 이런 비리를 저지르는 선두주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냥 사표내면 되지 왜 나쁜 짓을 합니까?’ 그 일을 해 줘야 계속 삼성그룹에 남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승진도 할 수 있습니다. 사장단에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걸 뒤에서 누가 받쳐주는 거예요? 본인도 모르는데 조선시대의 한복 치마 같이 널찍한 영적 세력에 의해서 자꾸 그것이 밀어붙이니까 그것에 밀려서 하나의 어두움을 대변하는 주체로서 활동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일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인아, 악이 너를 덮치려고 하는 구나. 너는 악을 이겨야 돼.’ 그렇게 했지만 소용없어요.

사람들은 개개인 놓아두면 참 착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어떤 집단이 되어 버리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어이, 내 뭐할꼬? 내가.’ 하고 보란 듯이 하는 거예요. ‘여자는 남자 몰라 남자는 여자 몰라.’ 남자한테 이런 것이 있어요. ‘젊은 남자애들 한 다섯 명이 가는데 앞에 긴 머리 소녀가 간다.’ 그러면 젊은 남자애들 중에 한 명이 그러지요. ‘야, 누가 꼬실래?’

그럴 경우에 평소에 자기가 사나이답다고 우기던 애에게 민다고요. ‘야, 네가 사나이, 네가 잘 꼬시잖아. 내기 하자. 네가 해내면 5만원 줄게.’ 하잖아요. 그렇게 막 부추기면 객기를 부리는 거예요. ‘그래. 내가 꼬실게. 돈이나 준비해라.’ 그래놓고는 ‘아가씨, 시간 있습니까?’ 한다 이 말이지요. 그 짓을 왜 합니까? 옆에 친구 없으면 절대 그 짓 안 해요.

친구들이 ‘우우~!’ 하면 그 바람에 그냥 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도 모르는 주체의 발판입니다. 우리의 터전이에요. ‘나’라는 터전은 내가 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우리의 발판이 되고 지금 내 모습은 여기서 하나의 종기 같이 튀어나온 돌출부분이에요.

그래서 사내 다섯 명이 여자 하나 꼬이려고 하는데 마침 그 여자의 애인이 나타나서 ‘어이, 니들 뭔데? 누가 내 여자 건드려.’라고 나서면 다섯 명이 5:1로 한꺼번에 달려들잖아요. 갑자기 <웨스트사이드스토리> 되어버린다고. 갑자기 패 가름이 되지요. 내가 그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거예요. 갑자기 한 명 한 명이 아니라 5:1 해서 이쪽은 우리 편이 돼요.

그럼 저쪽은 뭡니까? 저쪽 편 되겠지요. 단수가 아니고 갑자기 뭐로 변했다? 복수로 변해요. 이 이야기가 성경과 무관한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등장했을 때는 이방민족들은 그 이스라엘과 자기들이 상관없는 줄 알았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참 좋겠다! 구원받고.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구원받을 텐데.’ 우리는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 혼자 믿으면 나는 구원받는다.’ 자꾸 ‘나 혼자 믿는다. 나 혼자 믿을 수 있다. 믿지 마라. 나 혼자 믿을게.’ 자꾸 이러한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조청 알지요. 엿이 물같이 되는 것. 물컹물컹한 조청, 액체. 이런 조청덩어리에 있어서는 어느 한 대목이 따로 놀지를 못해요. 잡아당기는 그 흡입력이 강해서.

전에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교회 교인들이 교회 나가면서 ‘왜 나가려고 하느냐?’ 하니까 ‘남편이 안 나와서 같이 안 나오려고 한다.’ 했어요. ‘남편이 교회 다니기 싫다, 한다고 같이 안 나온대요.’ 그 흡입력 강하잖아요. 보세요. 다른 사람보고 물으니까 ‘아내가 안 나와서 나도 못나온다.’ 그러고 있어요. 이쪽은 남편 핑계대고 저쪽은 아내 핑계대고.

이 부부가 흡입력이 대단해요. 거기서 부부가 되니까 ‘나만’ 아니고 갑자기 단수가 아니고 뭐가 됩니까? ‘우리’가 된다고요. 우리가 되면 거기서 ‘나’는 찾으면 안돼요. 주체는 있지요. ‘나’는 없어도 뭐는 있다? 주체는 있어요. 주체가 누구입니까? ‘나’가 아니고 뭐로 변했어요? ‘우리’로 변했다니까.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하나님 쪽에 속한 사람은 항상 누구한테 치이느냐 하면 ‘우리’한테 치어요.

그 ‘우리’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백성. 거기에 치이는 사람은 누굽니까? 참된 선지자. 아모스, 미가, 요나, 예레미야, 이사야, 전부 다 뭐예요? 단독자입니다. 단독자, 또 어려운 말 나왔어요. 여러분, 단독자와 개별자와 달라요. 참 어려운 말인데 단독자와 개별자가 다릅니다. 개별자는 다섯 명이 있다면 다섯 명을 하나하나 나눴을 때, 하나하나 떨어졌을 때 이걸 개별자라 해요.

1+1+1+1+1 이걸 하면 뭐가 됩니까? 5 되지요. 5를 5로 나누면 뭐가 돼요? 1. 1이 5되고 5가 1 될 수 있는 이것은 개별자에요. 단독자라 하는 것은 옆에 있는 네 명이 아무리 맛있는 고기를 먹어도 내가 안 먹으면 나는 그 고기 맛을 못 봐요. 이게 단독자입니다. 설명해도 설명이 더 어렵지요. 만약에 식구가 세 식구인데 누가 ‘식구가 몇 식구입니까?’라고 할 때 ‘세 식구입니다.’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식구 중에서 한 사람이 화장실에 가 보세요. 밖에서 기다리는 두 사람은 죽을 지경이지요. 하지만 한 사람은 단독자에요. 신문 척 펴놓고 보면서 ‘좀 기다려라. 이 단독자가 앉아 있다.’ 사람이 여러 명 있는 것을 두고 우리는 여러 명이라고 하지만 어떤 계기가 되면 자기는 여러 명이 아니고 군중 속에 있어도 군중이 주체가 아니고 내가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타인의 힘이 필요할 때는 잠시 이 주체를 집단한테 양도를 해서 집단이 우리를 지켜 주기를 바라지요. 그때는 단독자가 누구냐, 집단이 단독자가 되고 나는 그 집단의 하나의 부분, 개별자로 전락 합니다. 이번에 연평도부근 바다에서 북한과 교전이 일어났지요.

그 때 북한에서 250발 쐈거든요. 여기서 몇 발 쐈습니까? 1900발 쐈지요. 그 배 완전히 고장 나 버렸어요. 사람도 한 명 죽고. 그럴 때 그 수병이 한 명 죽은 걸 보고 애석해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 ‘참 잘했다. 다음에 할 때는 아예 비행기를 동원해서 폭파해라.’ 이렇게 다 잘했다고 하지요.

왜 잘했다고 합니까? ‘나는 대한민국에 속했기 때문에 내 힘으로 북한을 못 이기지만 군대를 만들어서 내가 스스로 지키지 못한 것을 한국군대가 지켜준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얼마든지 우리는 잠시 주체를 양도할 생각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신약에서 구원받을 때 개별자로 구원받습니까, 단독자로 구원 받습니까?

단독자로 구원받아요. 이게 키에르케고르라는 사람이 이야기한 겁니다. 키에르케고르가 그렇게 그 당시 기독교를 비판했는데 그 비판의 대상은 ‘교회가 구원받는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기를 ‘교회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이 단독자 앞에 서 있어야 된다.’ 했어요. 그런데 키에르케고르는 뭐까지는 몰랐느냐 하면…, 자신이 신앞에 하나의 뭐가 된다? 단독자가 된다. 여기서 실존주의 철학이 나온 거예요.

하지만 성경에 보면 누가 단독자에요? 예수님이 단독자에요. 예수님이 단독자이며 나는 단독자가 아니고 하나의 어두움에 속한 개별자에 속함을 발견할 때 그 사람은 새로운 주체로 전입, 새로운 주체로 그 자리를 이동시켜야 됩니다. 신약에서 ‘그냥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는 이것은 참 쉽지요. 참 쉬운데 이렇게 설명하니까 이게 무지 무지하게 복잡하고 어렵지요.

‘예수 믿으면 그냥 구원받잖아요. 왜 그걸 빙빙 돌려서 그렇게 합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강의 끝! 이러면 될 터인데 왜 그렇게 합니까?’ 라고 할 때, 성경에서 예수님을 빛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다른 종교에도 있는 거예요. ‘빛 되신 신이시여, 태양 같은 신이시여!’ 이게 다른 종교에 다 있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고 우리를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우리를 어두움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를 어두움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하나의 개별자, 몸무게 한 70킬로쯤 나가는 개별자에요. 단독자 된 적은 한 번도 없고 개별자에요. 그리고 그 개별자를 우리는 하나의 주체로 봤다고요. 신을 믿든 뭘 하든 내가 알아서 한다 이거예요.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가 예수 믿으면 그래서 구원 받잖아요. 뭐가 그리 어렵습니까? 뭘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합니까? 쉽게 쉽게 갑시다.’ 이렇게 하는데 어두움은 빛을 믿을 수가 없다니까요?

그 믿는다는 게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군대가 된 게 아닙니다. 강의 다시 해 볼까요? 이스라엘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만든 거예요.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 믿으면 되었지.’ 아니에요. 그렇게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새로운 주체로서 만들어 줘야 된다니까요. 만들어주려면 기존에 주체라고 여긴 것은 어떻게 되어야 돼요? 기존의 주체는 뭐로 드러나야 됩니까? 어두움으로 드러나야 된다고요.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 믿으면 나중에 구원 받겠지.’라는 것에 우리가 가위표(×)를 쳐야 돼요. 그게 바로 엉터리며 그게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주체를 찢어버려야 된다고요.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자.’를 찢어버리고 그 자리에 ‘나는 어두움이었는데 빛이 와서 저를 빛의 자녀로 삼았습니다.’라는 것이 있어야 돼요. 이게 먼저 전제되어야 돼요. ‘나는 어두움이었는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어두움은 빛을 알지 못합니다. 어두움은 깨닫지 못해요. 어둠이 알고 있는 예수는 자기들끼리 만들어낸 가짜예수지요.

진짜 예수님은 우리 앞에 주체가 되면서 우리는 그 앞에서 어둠이 되는 겁니다. 그럼 나는 뭐냐? 어두움에서 올라온 뾰루지(돌출)이라니까요? 악한 악마를 대변해온 대변자였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어두움에서 만들어 낸 이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내가 어두움이라는 것을 들춰내는 예수 말고 이 어두움도 빛이라고, 훌륭하다고, 대견하다고, 착하다고, 참 대단하다고, 똑똑하다고, 나를 자랑해주고 나를 칭찬해주는 그런 예수를 원한다 이 말이지요.

맨 날 노래 부르잖아요. ‘우리를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여기도 드럼 치면서 하잖아요. 어느 누구도 ‘나는 저주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렇게 노래하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한데, 왜, 어두움이기 때문에. 내가 ‘나, 나, 나’ 라고 주장한 것은 사실은 배후에 악마가 시키는 대로 된 거예요.

나는 착해지고 싶지요. 하지만 내 안에 다른 법이 있어요. 무슨 법입니까? 죄의 법이 누구를 이겨요? ‘나’를, 주체를 이기잖아요. 내가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내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싶어도 내 안에 또 다른 세력이 있는데 그 어두운 세력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과는 정반대로 가게 한다 이 말이죠.

가인이 그랬는데 가인을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가인이 그냥 보통 아저씨에요. 보통 아저씨니까 보통 제사를 드렸어요. 아무 일 없었습니다. 사람 좋았어요. 그런데 동생이 드린 제사는 받고 자기 제사는 안 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 그 때부터 그 주체는 전쟁을 벌였지요. ‘어디 감히 나를 어두움으로 들추어내? 누구야? 나라는 인간이 더럽다고 들추어 낸 게 누구야?’

보니까 동생이 있는 이상은 자기는 뭐가 됩니까? 항상 어두움이 되니까 그 동생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옛날처럼 괜찮은 자아로 되돌아 갈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모든 인간들이 하는 전쟁은 뭡니까? 자기를 괜찮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전쟁이죠. 여기 교회 있고 맞은편에도 교회 있지요. 목사 둘이 창문 열고 서로 내다보고 있는데 길에서 한 사람이 성경 들고 어느 교회 갈까, 이쪽으로 갈까, 아니면 저쪽교회로 갈까, 하다가 저쪽 교회로 가보세요.

괜히 그 사람이 안 얼쩡거렸으면 그냥 괜찮은 사람이었을 것을, 괜히 그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저쪽교회로 가버리니까 갑자기 이쪽교회에서 저쪽교회로 박격포를 쏴서 폭파시키고 싶다 이 말이지요. 저 교회 없었으면 그 사람이 어디 가겠습니까? 우리교회로 왔을 것 아닙니까? 그럼 저 교회 때문에 우리 교회 박살났잖아요.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안 왔다는 것 때문인데, 그러면 그 사람이 우리교회 와야 돼, 라는 것은 누구 아이디어에요? ‘나’라는 주체의 아이디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주체가 생각했던 기대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에 나서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적이 있고 그 적은 자기입장에서 자기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어두움의 주체는 반드시 적이 있고 그 적으로 오신 분이 누구다? 예수님이라는 주체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예수님이 뭐가 되고? 빛이 되는 동시에, 예수님을 미워하고 예수님 앞에서 어두움이 되었던 ‘나’가 바로 어두움인 것을. 그래서 예수님께서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온 거예요.

빛이 왔다 해서 2만 볼트 조명발 비추듯이 온 것이 아니고 그냥 보통 아저씨로 온 거예요. 보통 아저씨로 왔다는 말이 ‘너 죄인이거든. 너 그거 율법 지키는 거 아니야. 너희 아비는 마귀야.’ 몇 마디 밖에 안했어요. ‘너희 아비는 마귀고 너는 독사의 자식이라 그 놈의 그 자식이거든.’ 그 몇 마디 밖에 안했어요. 그리고 성전, 예배당이 있으니까 다 치우면서 ‘치워라. 치워라. 이런 것은 성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길이다. 나를 믿어라.’

그런데 사람이 ‘나’가 주체 바깥에 있는 다른 주체를 믿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믿어요. 믿는 대신 점령하지. 왜? 전쟁 중이기 때문에. 내 주체를 안 죽이고 내 주체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점령해 나가지 나를 부인하고 자기를 미워하고 십자가지고 주를 따라가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에요. 지금 저 어린애가 나쁜 소리만 다 따라하는데 그 주체 안에 죄의 법이 들어 있나???

사람은 어떤 상황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 주체를 확장시키는데 도움 주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 주체를 훼손시키고 내 존재의 자존심과 내 가치를 무산시키는 인간인가를 늘 분리를 시켜요. 분리를 시키는데 진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우리를 철저하게 하나님의 원수로 만들어버려요. 우리를 독사의 새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싶어도 성질나서 못 믿어요. 예수 믿는 행위자체가 칭찬으로 와야 하는데 칭찬받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나 자신을 더욱더 죄인으로 만들 것 같으면 어느 누가 믿겠습니까? 뭔가 행동을 하고 난 뒤에는 뭔가 얻는 게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을 강탈하고 빼앗아 간다면, 내 자존심과 위신을 다 빼앗아 간다면 누가 그 예수를 믿겠습니까?

다 빼앗긴 사람들이 믿지요. 누구냐? 문둥병자. 그 열 사람 중에서 몇 명? 한명. 9명은 문둥병만 나으면 나는 도로 인간 된다, 그래 본 거예요. 그런데 한 명은 ‘나는 문둥병이 나았나, 안 나았나, 관계없이 저주받을 놈이다.’

그래서 그 사람 한명은 누구한테 찾아왔습니까? 예수님 찾아 온 거예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문둥병이 맞습니다. 문둥병이 나았다, 안 나았다, 그런 것과 관계없이 나한테는 저주받는 것이 합당합니다. ‘나’라는 주체는 오직 어두움이 바탕이었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빛이고 나는 그 앞에서 어두움에 불과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 어두움은 빛을 증거 하기 위한 어두움인데 바로 주체되시는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사람이 바로 신약의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전쟁하기 위해서, 누구와 전쟁하기 위해서? 하나님전쟁하기 위해서 부름 받았다면 신약의 전쟁하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빛 되심을, 빛 되신 예수님의 빛이 있음을, 그분만이, 그 분의 주체만이 빛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어두움에 불과함을, 어두움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하나의 개별자에 불과함을, 어두움이라는 주체에 소속되어 해당되는 개별자에 불과함을 증거 하는 겁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어두움이라는 덩어리, 조청덩어리에서 엿 줄기 하나 쏙 뽑아내듯이, 우리는 어두움에서 뽑아내진 엿 줄기에요. 우리는 속에서 죄의 법을 좋아하니까. 하지마라,  하면 하고 싶고, 하라, 하면 하기 싫고,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따라서 이 어두움에 속한 이 주체가 유일한 빛이 되신 주체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1장 10절을 봅시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이게 뭐냐 하면 빛은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과 짝을 이루고 어두움은 그냥 어두움이 아니고 빛과 짝을 이루어서 만약 어두움이, 어두움이 아니라고 하면 졸지에 빛이, 빛이 아닌 게 되어 버려요. 그러니까 빛이 빛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천 상 뭐 해야 돼요?

‘주여, 저 어두움이 맞습니다.’ 이럴 때만 빛은 빛으로 드러난다, 이 말이지요. 그 전쟁, 그 전쟁이에요. 그렇다면 이 어두움, 우리는 이 어두움에 소속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하늘나라 가시고 우리는 아직 남아 있으니까, 이 어두움이 그때 같이 한 동지였던, 한통속으로서 ‘우리’라는 같은 큰 주체에 속했던 어두움을 향하여 뭘 해야 됩니까?

도를 전하는, 전도를 해야지요.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어두움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알았어. 우리는 죄인이야.’라고 요한일서는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쟁은 있다, 없다? 이제부터 진짜 영적전쟁이 되는 겁니다. 구약 때는 이방인들과 말 타고 활 쏘고, 그런 전쟁을 해서 ‘우리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계시다?’라는 전쟁, ‘우리는 거룩하고 너희는 더럽다.’ 이렇게 전쟁했다면 지금은 ‘우리 모두가 더럽다.’입니다.

‘우리 모두가 더럽고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있다.’ 이래 되는 겁니다. 2장에 넘어갑시다. 1장을 설명하는데 이 만큼 길었어요. 1장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본다면, ‘우리’라는 것이…, 혼자 있을 때는 모든 인생을 ‘나 하기 나름이다. 내가 알아서 한다.’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오늘 아가씨가…, 이름이 뭐지요? ‘슬기.’

슬기양이 오늘 수능을 쳤는데, 혹시 대학에 들어간다면, 제가 혹시, 라고 했습니다, 혹시, 대학에 들어간다면 ‘우리’로 될지, 아니면 그냥 주체가 개별자로 남을지 그것은 알 수 없어요. ‘우리’가 된다면, 예를 들어서 남자친구를 만나면 그 둘이는 ‘우리’가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가 되는데 만났다가 헤어진다면 그 둘은 도로 뭐로 돌아오겠습니까?

‘우리’였을 때는 ‘우리’가 같이 움직이다가 헤어지면 도로 개별주체가 되어서 따로 움직이죠. 그래서 코미디 프로 중에 이런 게 있어요. <남성권익위원회>라는 프로그램에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왜 여자들 저희끼리 모이면 쫄면을 먹다가 남자만 만나면 파스타를 먹느냐? 돈은 남자가 내는데 왜 쿠폰은 저희가 찍는가?’ 이런 게 나오지요.

그래서 ‘우리도 쿠폰 찍게 해 달라.’고 퉁퉁 치면서 데모하는 게 나와요. 왜 그러냐 하면 여자가 ‘우리’가 되어야 할 텐데 ‘우리’가 되어도 여자는 뭘 주장한다? 주체가 되니까 남자는 그 주체의 똘마니가 되지요. ‘우리’가 되려면 각자가 뭘 포기해야 됩니까?

각자가 주체를 포기해야 되는데 여자는 남자를 만나도 꼭 주체를 포기 안하고 남자를 머슴처럼 이용할 생각만 하니까, 그리고 남자는 또 자기 나름대로 여자한테 잘해주면 언젠가는 자기 것 만들까 싶어서 호시탐탐 노리다 보니까 둘 다 결국 무슨 전쟁입니까? 장미전쟁이죠. 주체의 전쟁이죠.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화성남자와 금성여자’라고 하잖아요.

1장 6절 다시 해 봅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이래 되어 있지요. 여기서 ‘사귐’이라 하는 것은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주체에 속한 하나의 개별자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빛에 속했기 때문에 늘 우리 모습이 시커먼 어두움인 것을 알아요. 아까 했지요. 우리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예수님은 빛이니까.

그럴 때 우리는 이 빛에 속했기 때문에 우리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누구 몸이죠? 예수님 몸이니까 주체는 우리가 양도했지요? 사나 죽으나 우리는 누구의 것이다? 주의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주체를 보여주는 개별자가 되지요. 그런데 이쪽, 어둠 쪽을 보면 이것은 우리 편에 안 속했으니까 우리가 하나의 단독자로, 하나의 주체로 보이는 겁니다.

어렵지요? 이쪽의 어둠에 속한 이 집단에서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단독자, 주체로 보이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독백이라고 하지요. 예수 믿는 사람은 ‘중얼중얼중얼’ 이러고 있어요. ‘어이, 너,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하나?’ ‘가만있어 봐라. 주님과 이야기한다. 중얼중얼중얼….’ ‘아니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데, 아무도 없는데.’ ‘아니야, 주님보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게 기도거든요. 독백인데, 기도란 뭐냐 하면 주체되시는 하나님께서 사건, 사태를 만들어주면 거기에 반응이 나타나지요. 이 반응이 독백이에요. ‘주님,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중얼중얼중얼….’ 자기가 주체가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꼭 정신분열환자 같아요. 미친놈 같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 합니까? ‘내가 미쳤다.’ 안 합니까?

‘내가 미쳤는데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하잖아요. 이 단독자하고 이쪽에는 새로운 집단주체가 있기 때문에 둘 사이에 의사소통이 안돼요. ‘야, 이번 일요일에 교회가지 말고 등산가자.’ ‘교회 가야 돼. 말씀 들어야 돼.’ ‘아이고, 저건 이상해 정말.’ 의사소통이 안돼요. ‘너는 왜 우리 속에 안 들어오느냐?’ 우리는 할 말이 있어요. ‘우리’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우리’입니까? 빛과 사귀기 때문에 어두움과는 결별 상태에 있어요. 이 결별 상태를 뭐라고 했다? 단독자, 그리고 독백, 다른 말로 하면 몸의 반응. 저는 몸에 어떤 반응이 있느냐 하면 담배피우는 것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요. 오늘 아침에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있는데 승강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나이가 한 오십 다섯쯤 되어 보였는데 제가 좋게 이야기했어요. ‘여기 승강장 전체는 이 전봇대에 금연이라고 붙여 놓았기 때문에 담배 피우지 말라.’고.

나이는 한 50대인데 나보다 더 늙어 보여요. 머리가 많이 희었어요. 자기 딴에는 나이든 사람인데 젊어 보이는 사람이 나이든 자기한테 지시하니까 기분 나쁘잖아요. 계속 피우고 있어요. 계속 피우고 있는 것을 손가락 벌려서 그 입에서 뽑아서 부러뜨려 내버렸어요. 그 사람이 할 말이 없어서 멀뚱히 숨 턱 막혀 하고 있어요. 제가 ‘숨 쉬어요.’ 했지요.

옆에 있는 아주머니는 좋아가지고 막…, 왜냐하면 자기가 말 못하고 있었으니까. 독백입니다. 자기는 담배만 날려버렸지요. 보통 젊은 사람은 ‘미안합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나이 많다고, 내가 보기에 나이 많지도 않은데, 자기는 날 어떻게 봤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스데반 집사나 사도바울이나 사도요한, 열두제자 전부 다 이들의 특징이 순교자들이에요.

왜 순교라는 게 등장하느냐 하면 ‘우리’라는 집단속에 소통이 안돼서 그래요. 그들과 함께 사귀지 못해서 그래요. 오늘 저녁에 결혼식이 있지만 고린도전서 9장을 보면 분명히 사도바울은 이야기 하는 겁니다. ‘제발 억지로 결혼하지 말라. 이것이 주의 뜻이다.’라고 해요. ‘제발 억지로 결혼하지 말라. 정 결혼하고 싶거든 정욕이 불붙는 것 같아서 못 참거든 결혼하고 그 외에는 결혼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 주님을 신랑으로 사귀는 마당에, 처녀가 이미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에 또 남자를 사귀어 버리면 이 남자 사귄다고 전에 사귀었던 주님을 소홀할 수밖에 없는 이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 할 때는 관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뭐로 봅니까? 실제로 주님과 정결한 신부로, 보통 남자 사귀듯이 실제로 사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경우에만 그런 소리 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 있잖아. 신랑이 있는데 왜 또 다른 남자를….’ 그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다만 몸이 연약해서, 이 몸의 정욕이 불붙듯이 일어날 때 그때는 결혼 하고 안 그러면 하지 말라.’ 이 말이지요. 그 말 아무도 안 듣지요. 아무도 안 듣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아내가 갈라서자, 하거든 갈라서 줘라. 그거!’ 그것도 역시 아무도 안 지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안 믿는 남편의 한 달 수입이 천만원이라면 미쳤다고 이혼합니까? 혼자 애 데리고 어떻게 살라고. 결국 우리는 주님의 개별자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아니고 본인이 주체가 되고 본인이 계속 단독자가 되어 버렸으니까 자기가 주체로 확정된 이상은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은 내 주체를 확장하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나의 이용물이죠.

제가 부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뭘 믿는 것이냐 하면 힘을 믿는 거예요. 힘을 믿는데 그 힘 앞에 괄호가 쳐져 있고 그 괄호 속에 뭐가 있어요. 무슨 힘이냐 하면 ‘사는 힘’이에요. 사는데 누가 사느냐? 내가 사는 힘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국 힘을 얻기 위함이고 그 힘은 어디에 쓰기 위함이냐? 내가 살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나’가 누구냐? 나는 이 세상에 천상천하유아독존, 내가 주체인 거예요. 내가 주체인데 아까같이 전쟁이나 어떤 위험에 있을 경우에는 보호를 받기 원하잖아요. 연약한 여자들이 남편이 필요할 때는 언제입니까? 어두운 밤중에 퇴근 늦게 할 때 필요하지요. 보디가드로. 결국 주체잖아요. 내가 타 주체에 의해서 침해받을 경우에만 힘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거예요.

그러니 세상에 이게 무슨 복음입니까? 이방종교지요. 결국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자기 주체가 허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주체가 아니고 사나 죽으나 나는 누구의 것이다? 이미 주체는 주님의 것으로 양도된 상태에서 주님의 전쟁을 하기 위해서 하나의 군대로 뽑혀 나왔다는 의식, 이게 구약의 이스라엘과 관련된 신약의 빛의 개념, 어두움의 개념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요. 2장에 한 번 봅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죄라는 것은 주체가 내가 주체가 될 때는, 예를 들어 간음이든 살인이든 욕심내고 거짓말하는 것 다 죄가 돼요. 그런데 만약 주체가 내가 아니고 이미 주체가 예수님께 양도된 상태에서 죄가 뭡니까? 바로 ‘나의 의, 나는 죄 없다.’ 이게 바로 죄에요.

‘하나님이여, 내가 뭘 하면 내가 완전한 사람 되겠습니까?’라고 뭔가 하는 것. 주님께서는 우리를 뽑아내어서 구원했는데, 나는 무엇을 지켜서 어떻게 착해져서 어떤 행동을 점잖게 하고 행동을 조심해서 그래서 어떤 고상한 착함으로 이 주체가 고상한 주체가 되기를 원할 때 이게 뭐가 돼요? 이게 바로 죄에 속하는 겁니다. 참 쉽지요. 잉.

믿지 않고 행하는 것이 죄가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 죄를 씻어주는 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화목제물에서 나오지요. 2장 몇 절입니까? 2장 2절, 화목제물에서 나왔지요. 그러면 화목제물의 가치를 높이지 않고 훼방하는 것은 이 영적 전쟁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죄가 되지요.

‘나, 죄인 맞는데 예수님의 피 때문에, 예수님의 피에서 나온 능력 때문에 나는 그 능력 입어서 주체는 양도되고 나는 구원받았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게 이게 바로 죄에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체가 저쪽으로 인수인계되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뭘 해도 다 자기주체의 가치를 높이는 짓들이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구제하고 봉사하고 기도해도 무슨 짓을 해도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자기어두움을 어두움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어두움이기는 한데 약간의 희끄무레한 어둠이고, 약간 회색빛 나는 어둠이고…, 그런 식으로 하는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요한일서에서 제일 큰 난제가 이렇게 다 풀려 버렸어요. 주체문제에요. 주체문제였습니다. 주체가 예수님한테 가 있으면 죄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가리는 것은 몽땅 죄가 되는 거예요. 왜냐? 이미 우리는 빛을 위하여 뽑혀 나왔기 때문에. 그것이 주님과의 사귐이죠. 그래서 ‘주님과 사귀는 사람은 죄짓지 않는다.’ 한 겁니다.

옛날 계명은 주체가 누구입니까? 옛날 계명은 주체가 ‘나’가 되지만 새 계명의 주체는 뭡니까? 주님에게서 나왔던 사랑이 되지요. 그러니까 용서해주는 그 사랑에 휩싸여 있는 사람은 새 계명 속에 늘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은 ‘내가 사랑했다.’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사랑했다.’로 뭐든지 나가면 되지요.

왜냐하면 주체가 자기가 아니니까. 자기는 주체에 속한 하나의 부분이고 개별자에 해당되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날 사랑했습니다.’ 만약에 형제 때문에 내가 죽을 것 같으면 ‘아이고,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까, 말까?’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의 목숨을 필요로 하는데 나를 사용했다.’라고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이건 자기사랑이 아니고 누구 사랑입니까? 목숨 바치는 것도 누구 사랑이에요? 주님의 사랑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일은 누가 마무리 했고? 내가 마무리 한 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그 현장에 투입시킨, 그 자리에 존재케 했던 주님의 공로로 몽땅 다 가져가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당신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누구 때문에 구원받았다? ‘주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이 당신을 통해서, 당신을 사용해서 나를 건졌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모여서 새로운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 ‘우리’는 새로운 주체가 되고 하나의 이스라엘이 되고 그 주체의 구체화는 예수님이 되고 빛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더 하고 싶은데 시간관계상 다음에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빛 가운데 산다는 것이 더 이상 자존심가운데 살 필요가 없이 되었다는 이 자유함, 우리 자신의 행동에 저촉을 받지 않는 이 자유함, 이 홀가분함, 화목제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날마다 확인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11-22 13:11:48 녹취 : 오용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