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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5강 / 요일2:9 / 안산 100219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1서

5강 / 요일2:9 / 안산 100219

정인순 2011. 1. 1. 11:10

100219 요일2:9 공간의 끝과 시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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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100219요일2장9절a

‘빛과 어두움 두 패로 나누는 종말(끝)’

2010-09-24 11:50:07   녹취 : 박온정     

『공간의 끝과 시간의 끝』


요한일서 2장9절 할 차례입니다. 389페이지,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여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가운데 있고 그 어두움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이 대목부터 해 나갑니다.

‘제가 지난시간에 ‘어두움과 빛’이라 하는 빛과 어두움이 갈라지는 것이 언제 적이라고 했죠? 종말 때 갈라진다했죠. 세상이 마지막이 되면 이 세상 전부가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으로 이렇게 구분이 되는 겁니다. 세상 끝이 되면. 그전까지는 구분이 되지 않아요. 그전까지는, 어떤 사람은 남반구에 산다, 어떤 사람은 북반구에 산다, 미국 사람이다, 영국 사람이다, 이렇게 분류하는 방법이 있지만, 마지막 때 그런 인간적인 분류는 인정 안해줍니다. 오직 빛이면 빛이고 어두움이면 어두움이고, 뭐, 빛도 아니고 어두움도 아니고, 어중간한 경계가 없어요. 그걸 저는 오늘 강의 할 끝, 끝에 대해서 강의하겠습니다.

끝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공간의 끝이 있고, 또 하나는 시간의 끝이 있습니다. 공간의 끝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사도행전 1장8절에 나오죠. “네가 성령이 임하면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사마리아와 땅 끝... 땅, 공간이잖아요.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이렇게 돼있어요. 사도행전 1장8절이잖아요. 제가 사도행전1장8절을 잠시 보게 되면 창세기 있고, 마태복음 있고, 사도행전 있고, 마지막에 요한계시록 있다, 이렇게 그렸지만 사실은 이렇게 그리면 안 되고, 창세기 있고, 그 다음에 마태복음, 신약부터 여기는 끝의 시대에 들어갑니다. 끝의 시대. 마태복음부터, 마태복음은 신약이니까, 신약이라 하는 것은 전부가 끝이에요.

저의 어떤 글에 보면「끝이 요동친다」는 말을 했어요. 끝이 ‘복장 친다’는 말을 했는데, 여기는 단순하게 와서 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끝이 어디서 왔느냐하면 위에서 같이, 점선으로 와가지고(강의 현장 액션 모드) 만나죠.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맞죠? 다윗의 혈통으로 왔는데 다윗은 메시아가 아니고, 다윗의 혈통으로 왔는데, 위에서 점선 따라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되고.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하고 여기 지상의 나라와 만나는 지점이 바로, 마태복음 처음 시작 신약시대가 본론적으로 개최되는 그 지점입니다. 옛날 구약 때의 약속의 땅은 어딥니까? 가나안땅이죠. 이게 약속의 땅인데 예수님이 매치, 합류해가지고 약속을 끌고 가니까, 약속의 땅이 어딥니까. 천국이 되는 겁니다.(히11: )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우리는 다 객이요, 나그네요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서 너희를 기다리느니, 하늘에 있는지라.

그렇다면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자기는 몰랐는데 자기 고향에 갔는데 가야될 곳은 점선(현장 액션모드)지점이죠. 모세 지점, 예레미야 지점, 지점들이 이제는 일치되어 이 지상에 내려앉아버리는 거예요. 내려앉아버리는 순간 위의 세계는 빛의 세계가 되고, 밑의 세계는 뭐가 되냐면 어두움의 세계가 있는데, 막상 만나보니까 ‘아! 어두움이 어둠이구나’ 라는 걸 아는 겁니다. 빛의 세계는 예수님이 몰고 온 거예요. 예수님이 몰고 와서 빛의 세계가 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요한일서 2장9절하면서 빛과 어둠이 나뉘는 것은 언제다? 끝날 때다. 모든 것이 끝이 날 때 ‘너는 빛이야, 너는 어둠이야,’ 라고 판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내릴 수 없어요. 오늘 이거 상세히 해봅시다. 이거 중요하니까요.

예수님은 빛이죠.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그는 세상의 빛이라’ 예수님은 빛이라, 그렇다면 세상은 빛이 오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자신을 빛이라 여길까요 어둠이라 여길까요. 이스라엘 사람만 자기가 빛의 자녀라 여기고 다른 사람은 그냥 살아가는 거죠. 나는 인간이다. 나는 남자다, 여자다. 이러지「나는 어둠이야」라고 할 수는 없는거죠?

빛을 만나게 될 때에 어떤 현상이 나오냐면 여기서 역전, 거꾸로 뒤집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죠. 인간 속의 어둠이 시편51편에 보면 다윗이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이기 전까지는 다윗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놀랍게 다윗이 우리아 죽이고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뒤에 「나는 하나님 앞에 죄지었다」상당히 뻔뻔스럽죠. 우리아 집안에 미안해야 될 건데 뻔뻔스럽게 ‘나는 하나님께만 죄를 지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죄를 지음으로써 누굴 만났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죄를 짓기 전에는 나는 잘났다고 생각했는데 죄를 짓는 그 순간 본인은 하나님 앞에 죄 지은 걸 알았으니까, 죄지은 그걸로 인하여 뭐가 되냐면, 죄지은 그걸로 인하여 구원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제가 역전이라고 한 겁니다. 앞에서는 뭐냐면 ‘사람이 의로워져야 천국 가고 악하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되어 왔는데, 예수님을 만나고보니 이것자체가 착각이었고, 이것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나는 죄 안 지었으니까 좋은데 갈 거야,’ 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뒤바뀌어져야 돼요.

죄를 짓게 하는 것은 하나님 만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파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사이는 죄를 통해서 만나요. 죄를 안 지으려고 버티는 사람이 누구냐면 바리새인들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바리새인처럼 되지 못하면 천국 못간다,” 이 말은 너희들 인간적으로 죄 안지어서 구원받으려면 너희보다 최고의 선배가 있고 너희들보다 재주가 좋은 사람이 있는데, 그게 누구다? 바리새인이다. 하지만 그 바리새인이 지옥 간다면 너희들 끝장 난거다. 여기 이 사람들은 그것이 어두움인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자체 내에서 빛과 어두움을 따로 구분했어요.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구분할게요.)

끝이 되면 예수님이 빛이고 우리는 그 앞에서 모든 사람이 어둠이죠.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쪽이고 인간 쪽에서 빛과 어둠을 나누는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빛은 무엇이고 어둠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 당시에 보면, 율법을 지키면 빛이 되고, 율법을 어기면 어둠이 된다고 본 겁니다. 그럼 제가 문제하나 던질게요.

율법 열 개 중에서 다섯 개 지키면 뭐가 됩니까. 50퍼센트 빛이고 50퍼센트는 어둠이 되겠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뭐냐 하면, 어두움에서 빛으로 가는 방법은 자기가 자기 절제를 하고 자기관리해서 율법을 덜 지키면 어둠 쪽에서 땡기고, 율법을 많이 지키면 빛 쪽에서 땡긴다고 본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데 제가 사실 바리새인이라고 했지만 사람들 속에 있는 양심아라는 것은 뭘 따먹었기 때문에 생긴 겁니까. 양심을 조사해보면 선과 악이 있어요. 우리 조상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 양심이 생겨났습니다.

사모님께 하나 물어볼게요. 선악을 아는 양심을 갖고 있으면 생명나무 따먹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선악을 아는 상태에서 생명나무 따먹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따먹죠’ 못 따먹죠.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착하게 살면 영생의 나라, 생명나무의 나라, 천국에 간다고 우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거는 거짓말이에요.

선과 악, ‘양심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면 그건 끝나는 거예요. 이거는 구원 못 받는 겁니다. 근데 양심 없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면 다 구원 못 받는 거예요. 구원 못 받는 상태에서 그들은 빛과 어두움을 율법대로 지키면 빛이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어둡다, 이렇게 구분을 한 겁니다. 자, 이렇게 구분을 해놓으면 그다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냐면, 예수님께서 인간세계에 들어오셨지요?

예수님은 오실 때도 빛인데, 예수님이 인간세계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못 믿습니다. 왜 못 믿냐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게 되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어야 하느냐 하면, 자기들이 생각하는 빛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경우에는 자기 힘으로 예수님을 믿겠지요. ‘내가 보기에 예수 당신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야’ 라고 믿게 되겠는데, 인간들이 자기가 빛이라고 우겼던 기준에 맞추어보면 예수님은 뭐가 됩니까? 빛이 아니고 이단이에요 이단.

그래서 2장9절에 뭐라고 했냐면 그걸 ‘어둡다’고 된 거예요. 어둡다. 어두운 거예요. 뭐가 어둡다? 양심이 어두운 거예요. 인간의 양심이 어두운 거예요. ‘양심을 어둡게 사용하지 마라,’가 아니라 양심 자체가 어둡다니까요. 양심 자체가 어두우니까 양심을 빼버리면 뒤에 남는 게 뭡니까. 그냥 어둠다입니다. 양심 떼어버리면 뭐가 되요, 그냥 어두운 거예요. 인간은 그냥 어두운 거예요. 양심대로 살아서 예수 믿을 수 있느냐?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없고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아니하면 예수를 믿을 수가 없고,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예수님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만약에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과연 성령이 와서 예수를 믿는 자가 되었다면, 그다음에 뭐를 부정하겠어요? 예수님이 빛이라면, 그 빛을 내 양심으로 믿을 수 없는 빛이라면, 그 양심은 결국 썩은 양심이죠. 그 썩은 양심은 무슨 양심이냐면 이게 바로,

요한복음 12장에 의하면 ‘자신의 영광을 위한 양심’입니다. 쉽게 해서, 자존심!

모든 양심은 자기 자존심을 위하여 양심을 부리고 양심을 활용하게 되어 있어요. 어떤 도둑넘이 들어왔다, 경찰에게 잡혔다. ‘도둑질을 왜 했어!’ 하면 ‘어릴 때부터 부모를 여의고...’ 이렇게 나오죠. ‘간난아이 우유값이 없어서...’ 이렇게 변명을 한다 말이죠.‘그래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죠.

만약에 다윗에게 성령이 오지 않고 양심만 남아 있었다면, ‘ 너 밧세바와 왜 간음했어,’ 물으면 ‘뒷 자태가 너무 아름다워서...’ ‘우리아는 왜 죽였어!’ ‘뭐, 장군이 나라를 위해 몸 바칠 수도...’ 이렇게 나왔을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뭐라 하냐면, 우리아와 간음이 중요한 게 아니고, ‘야...내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걸 처음 안 거예요.

내가 그동안 써먹던 양심이 고장난 엔진이에요. 고장난 엔진. 평생 고장난 양심을 가지고 어딜 간다? 감히, 천국을 들어가겠다고 버틴 거예요. 양심 굴려서... 바르게 살아서, 말씀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시도한 거예요. 하나님 앞에 서니까 그것 자체가 「어둠」이었다. 그래서 행복한 다윗이 말하기를,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겁게 하옵소서” 주께서 꺾은 뼈가 누구냐면, 자기 손으로 죽은 우리아가 내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주께서 꺾으신 뼈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기쁨을 갖는 거지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 하면 성령받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얘기할 거예요.“목사님은 인간을 너무 부정적으로 봅니다” 이렇게 나쁘게 보지 마세요, 합니다만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신나죠. 어차피 고장난 양심인데 이 양심을 가지고 자기 자존심을 채울 필요도 없고, 자존심을 지탱할 필요도 없고, ‘내 자존심은 원래 나쁜 거다’ 팽개칠 수가 있다 그 말이죠. 이 말은 ‘자기 영광을 포기하며 사는 자,입니다.

자, 2장9절 설명합니다. 자기 영광을 포기한 것을 뭐라 하냐면, 「형제사랑」이라고 합니다. 쉽지요?^^* 이렇게 돌아서오니까 쉽지요? 형제 사랑이 뭐냐 하면, 누굴 만날 때 어떻게 만나자? 뭘 포기한다? 자기 영광, 내 자존심! 내 양심을 논하지 아니하고, ‘나 주님 앞에서 어둠입니다’ ‘나 주님 때문에 살았어요, 라고 나오면 그게 형제사랑이에요. 그게 형제 사랑입니다. 굉장히 쉽지요?

장로님이나 목사님 등 형제 만날 때, 목사가 장로 앞에서 “장로님! 저 목사지만 저 죄인이에요” 그것보다 훌륭한 장로 앞에서의 목사가 없어요. 장로님은 교인들 앞에서 “교인 여러분, 저 장로라고 하지만 저 죄인입니다” 세상에는 이것보다 더 훌륭한 형제 사랑이 없습니다. 꼭 장로티를 내고 목사티를 내니까 그때마다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영광? 자기 영광!

그래서 사람들이 ‘목사가 그러면 됩니까?’ 이러면 그 다음에 뭐가 나오냐면 양심이 나와요. “나는 ‘양심껏’ 이 교회에서 8년 동안 ‘양심껏’ 했습니다” “양심껏 살았던 이 목사를 대적하면 여러분 저주받죠”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져서 우리를 구원해놓고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그 앞에서 십자가를 가로막아버려요. 그러면 교인들이 어떻게 본 받을까요. 구원을 가로막는 거예요. 교회는 목사의 자존심 세우는데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자존심을 세워야지요. 주님의 영광이지, 장로영광, 목사영광, 집사영광 이것땜에 된게 아니거든요.

그러려면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이거예요. ‘나는 내 영광, 내 자존심 이거 쓰레기입니다. 모두 다 쓰레기고, 저는 벌써 이것 다 차버렸습니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누구를 대하면 그게 형제사랑입니다. 그럴 때 오늘 본문에 뭐라 하냐면,『눈멀지 않았다』형제를 사랑한 자는 눈이 멀지 않았고, 소경이 아니고, 형제를 미워하면 그게 뭐라하냐면 “소경”이라고 얘기한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어려운 거예요. 이렇게 빙빙 돌아서 설명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당신, 집사를 비워했잖아! 나쁜사람이야!’ 이러는 게 아니고, ‘당신은 그러니까 복음을 몰라, 눈이 멀었어! 당신 주님을 만나본 적이 없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느땐 이런 예를 들어요. ‘우리끼리 만나지 말고, 주님을 세우자,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를 통과해서 만나자’ 나는 잘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십자가를 통과하자마자 내가 죄인되어서 내가 앞에서고 집사님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부부사이도 이게 중요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둘 다 눈이 멀어버리면 둘 다 양심을 내세워요. ‘당신에게 시집와서 당신 내게 해준 게 뭐있어?’ 보통 여자들이 다 이렇게 말해요. 여자들이. ‘내가 당신 믿고 시집왔는데 지금까지 고생시키고 해준 게 뭐 있노?’ 이렇게 나오고, 남자는 말하기를, ‘그렇게 매일같이 잔소리 하니까 하는 일도 안 되지’ 이렇게 나옵니다.

‘나처럼 이렇게 가정에 헌신한사람 없다!’ ‘다른 사람은 새벽에 들어오지만 나는 밤 11시에는 들어오잖아!’ 이러는 둥. ‘남들은 열두시에 들어오는데 자신은 열한시에 들어온다’ 이렇게 말하는 양심은 스스로 자기 안에서 잘난 것, 선한 것과 나쁜 것을 따로 구분해서 ‘나는 나쁜 것도 있지만 뭐도 있다? 착한일 했잖아.’ 자꾸 양심을 내세울 때 그거는 생명나무와 관계없는 선악과 세상, 어두운, 눈먼 세상, 봉사들의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가운데 두게 되면, “여보, 내가 아무리 해줘도 당신에게 미안해! 이렇게 내게 과부한 여자를 주는 것은 이같은 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야,” 이렇게 나올 것이고, “당신 같은 남자를 만난 것도 하나님께서 복음을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어!” 이러면 되죠. 그런데 이것도 한두 번만 써먹어야지 자꾸 써먹으면 여자가 뭐라한 줄 아십니까? “당신은 말만 해 말로만...돈은 안 벌어오고 말만 해!” 자주 써먹으면 안됩니다.

2장9절 해석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형제사랑이라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마음씨가 나쁜 게 아니라 눈이 멀었기 때문에, 형제사랑을 못하는 사람은 어둠에 속하고, 형제사랑을 하는 자는 그 사람은 눈이 떠졌기 때문에 빛에 속한다, 는 이야기가 바로 2장9절에서 11절까지 이야기였습니다.

그 다음에 12절을 봅시다. 13절, “아비들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14절) 성경 하나하나가 그냥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안 드러나잖아요. 두 가지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음이요(12절)’ 아... 어렵다! 사람이 무슨 죄가...죄를 지었으면 교도소 가야지 그의 이름으로 사함 받습니까? 아이 키우는 어무이들, 애가 잘못했으면 ‘똑바로 앉아! 손들고 있엇!’ 벌을 줘서 죄를 다스리는 법인데 ‘얘야, 주의 이름으로 용서한다’ 어떻게 주의 이름으로 용서가 됩니까? 이거는 두 번째 것부터 살펴봅시다, 어떻게 관계되는지...

성경에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 했지요? 예수 이름으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무엇을 얻는다? ‘구원을 얻는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지요?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예수이름으로 구원받는데 어떤 경로로 구원 되느냐 이 말이지요. 여기서 일너 식이 됩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세계에 우리가 빨려들어가면 이게 구원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내가 소지하는 걸로, 뚝 떼가지고 내가 소유하는 걸로 생각하는데, 그거 소지해봐야 관리 안됩니다 우리는. 아침에 얻었다가 저녁에 다 쏟아버려요.

비싼 보석을 자기 집 강아지에게 줘봐야, 강아지가 그거 자랑 않습니다. 강아지는 먹든지 버리든지...보석을 강아지에게 줘봐야 의미 없는 것처럼 이 구원을 누가 관리 하냐면 인간이 관리하면 관리 안 됩니다. 인간은 구원보다 십억, 이십억 이런 게 더 좋아요. 돈을 더 좋아해요. 보세요, 교회 교인들 ‘예수님의 구원이 좋습니까? 이백억이 좋습니까?’ 물으면 이백억이 좋다해요.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건데 우리 손으로 관리가 안되요. 예수 믿다가 치매 걸려가지고 ‘예수가 누구고?’ 이런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심지어 치매 안 걸려도, ‘나는 교회는 다녔지만 믿음의 확신이 없어,’ 이런 사람 굉장히 많아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목사들이, 자꾸만 목사님들이 ‘구원을 주었으면 본인이 관리해야지,’ 자꾸 이러다보니까 자기가 치매 걸렸는데 구원받은 걸 어찌 압니까.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짐이되어 ‘목사님같이 구원받는다면 교회도 못 나오겠습니다.’ 그런 경우가 뭐냐면 아가씨가 처녀 때는 교회 나왔는데 나중에 불도가정으로 시집간 뒤에 제사를 한 달에 두 번 드려야 되니까 너무 힘들어져 ‘목사님 당분간 교회 못 나오겠습니다,’ 하는 경우 많아요. 우리교회도 있고 교회마다 그런 사람 많습니다.

구원을... 지금 이 안경이 구원이라면 ‘관리 하세요’ 하고서 주는 게 아니고 이건 미끼예요. 딱 주면 믿잖아요. 그 다음에 안경을 잡아 댕겨요. 붙잡혀서 가다 보니까 천국인 거예요. 주님께서 말씀의 미끼를...그 미끼가 뭐냐,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거예요. 자,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면, 아브라함의 첫 이름이 뭐죠? 아브람이죠? 아브람은 자기의 육적인 이름이에요.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이 덮쳐서 아브라함입니다. 아까는 안경이죠? 아브람이라는 육적인간에게 안경이 덮쳐 아브람을 잡아 댕기면 아브라함으로 딸려 가는 거예요.

야곱, 육적이름이죠? 그런데 야곱의 이름이 바뀌죠, 뭘로 바뀝니까? 이스라엘이죠. 야곱은 「속이는 자」 야곱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이루시는 분은 야곱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흰 돌이 있잖아요. 흰 돌에 무슨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무슨이름?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우리를 흰 돌로 삼고, 백석인데(그래서 백석대학?) 여기에 내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이 박혀버리고, 이제는 이근호라는 내 이름은 이거는 쓰레기고, 그대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에 합당한 이름으로 살도록 잡아 댕기는데 가다보면 천국이라.

다시 얘기할게요. 「죄 사함」이 되는 것은 구원을 우리가 관리하지 않는다는 것, 명심해야 됩니다. 목사님들이... ‘여러분이 주신 구원을 관리 잘 해야지’ 이러면 참 힘들어서 못 살아요.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관리합니까. 헌금내야 돼, 전도해야 돼, 할 짓이 한둘이 아니라, 교회 봉사도 해야지, 너무너무 힘들어요. 자꾸 그렇게 행함으로 나가버리면 나중에 지친나머지 자포자기상태가 됩니다. ‘지금 아이 키우느라 바빠서 못 옵니다’ 이런 핑계거리는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셈이 되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집에서나 어디서나 주님께서 완전함으로 백석으로, 하얀 돌로 삼으시고 거기에 우리이름 완전히 깡그리 무시하시고, 자기 이름을 박아놔버리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님의 자존심 때문에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요.

그걸 지체라 해요. 우리의 몸의 지체. 우리가 예수님의 손가락 되고 발가락 됐습니까. 세상에 오른손 잡아 댕기는데 왼손 두고 갈 수가 없잖아요. 자기 지체니까 끌고 가기 위해서는 우리에 아무리 불도佛道가 심한 집안으로 시집가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안에서, 그 현장에서 예수님의 살아계심이 폭발하게 되어 있어요. 발산하게 되어 있다고요.

방금 쉽게 이야기했는데, 다시 말하면 예수 이름에는 분석해보니까(내가 분석한 게 아니라 천사가 분석합니다) 말하기를, 예수는 어떤 일을 하느냐? 첫 번째, 자기백성,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이 자기백성이 아니죠? 자기백성 따로 있죠. 이걸 가지고 뭐라 하냐면,「분리작업」예수님은 무슨 작업 한다고요? ‘분리작업’으로 양과 염소를, (여러분 염소 잘 아시죠?) 또는 알곡과 쭉정이를, 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이런 식으로 분리작업을 하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나라에 영국에 취직 안 될 때, 무슨 일 한 줄 알아요? 병아리 감별사, 굉장히 빠른 속도의, 솜씨가 좋아가지고 우리나라 사람 많이 데려갔대요. 암컷 수컷 분리하듯이 ‘이거는 내 자식 이거는 마귀자식’ 분류하는 거예요. 이게 본격적으로 어디 나오냐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두 종류의 이마가 있는데, 한 쪽은 어린양의 이름이 이마에 박힌 사람, 또 한 사람은 마귀, 짐승의 이름이 박힌 사람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은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고(어린양) 이 사람은 바로 행위 책에 기록된 사람, 어중간한, 중간지점이 없어요.

이 분류작업을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왔습니다. 예수님의 분류작업 할 때에 주의할 것은, 양과 염소니까, 목자로 왔거든요? 염소는 목자에 대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우리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 2장 15절16절: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보세요! 목자가 똑 같은 말을 했는데 구원받는 사람에게는 향기가 되고, 망하는 사람에게는 악취가 되는 거예요 악취! (어휴, 냄새 드럽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똑 같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누가 누군 지 몰라요, 그런데 사도가 복음을 전하니까 어떤 사람은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요?”
“행함이 아니고 그냥 공짜로 구원받아요?”
“세상에...공짜로 구원받는다는 거 첨 알았네!” 향기라고 춤추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세상에...인간이 착해야, 양심대로 살아야지, 염치가 있지 양심대로 살아야 천당을 가지! 나쁜짓 하고 어떻게 천당을 가!” 내게 부정적인 얘기 하지 말라는 식으로 ‘어휴 악취!’ 이런 사람이 있다 이 말이지요.

이것은 같은 자식이라도 장담 못해요. 부부사이라도 장담 못합니다. 남편은 향기인데 아내는 악취로 들리고 어떤 사람은,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는 남자는 좋아하는데 여자는 싫어하고. 어떤경우에는 여자는 좋아하는데 남자가 또 싫어하는 가정이 있고, 있어요. 그래서 부부가 같이 교회 나온다는 것은 복음을 알면 땡잡은 거예요. 더 이상 다른 복 찾지 마세요! 둘 다 눈이 뜨였다면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빨리 죽고싶다 였잖아요. 눈 떠버렸는데요뭐, 눈 떴으니까 이 세상이 시시해보이는데...하늘나라에 맨션 있는데 거기가 살지 뭐땀시 고생스럽게 이 땅에서 몸 아파가며 살겠습니까. 아픈 곳도 없고 괴로움도 없고 좋지요. 부부가 아까처럼 예수님이 중간에 계셔서 ‘나 죄인이야, 나 죄인이야’ 이것도 행복이고, 십자가 보험 이것도 행복인데, 하나님께서 그런 축복을 주시면 몰라도, 보통 가정은 한사람은 아는데 한사람은 몰라서 핍박을 하고, 남자는 복음을 알고 사는데 여자 쪽에서 목사 시킨대로 않으면 저주받는다 해 싸고, 재산 다 갖다 바치고...(답답하고 신기한 인간들...녹취자)

어쨌든 예수님께서 무슨 작업? 분리작업... 양과 염소로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염소는 ‘어휴, 냄새야’ 하면서 ‘내 앞에서는 복음 이야기하지마라’ ‘사람은 행해서 구원받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 이런 식의...핍박을 하게 되죠, 이것이 분류작업입니다. 첫 번째는 예수란 두 번째, 자기 백성을 세 번째, 죄에서 구원해 내실 자가 되는 거예요. 두 번째에 대해서 해봅시다.

두 번째,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가 죄 지은 것을 죄 안 짓게 하는 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우리가 죄 속에 있음을 눈을 뜨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눈을 떠서 발견케 하는 겁니다. 나이 60,70 되었다고 죄 안 짓는 게 아니고, 어린아이라고 죄 안 짓는 게 아닙니다. 항상 죄에서 태어났어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의 작품이라니까요. 어떤 통계에 보니까 3개월짜리 어린아이가 부모를 속인다는 사실을 심리학자는 조사해 냈어요. 3개월짜리가 설마, 어린 속일까 싶죠? 속인답니다. 울음을 가지고 속인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밖에 몰라요. 심지어 자궁 속에서까지 자기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마세요! (오늘 참 희한한 얘기한다, 쩝:) 죄에서 벗어날 생각 하지 마라니까요! 자기가 알아서 죄에서 벗어나면, 세 번째, 구원자가 왜 필요합니까. 자기가 기도 많이 해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십자가 피가 왜 필요합니까. 만약에 기도해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우리보고 ‘얘야, 기도 열심히 해라,’ ‘몇 시간요?’ ‘하루에 두 시간 하면 구원해줄게,’ 이렇게 되었을 거예요. 그게 아니고, ‘너 헌금 많이 해라이?’ 이것도 아니에요. ‘전도 천 명해라’ 이것도 아니고 뭡니까? “가만히 있어, 내 살과 내 피로 너를 구원해줄게” 이렇게 되어버리면 결국 죄라는 것을 알려주는 이유가, 이 죄는 우리가 벗언라 수 있는 죄가 아니라, 우리가 멈추게할 수 있는 죄가 아니라, 아무리해도 우리가 멈출 수 없고,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죄를 ‘죄’라고 이야기 해준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분류작업을 하시는 분이고, 그 내용이 뭐냐, 우리는 아무리 성경대로 살아도 죄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 예수 믿고 천 년을 살아도 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 세 번째가 ‘가만있거나 내가 건질 게’ 구원 작업 하러 오신 겁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합동해서 구원받습니까? (그러면 예수님 피 흘리신 생색이 안나죠잉~-녹취자) 아니에요. 『죽은 자야 깨어 일어나라!』하잖아요. 성령이 임하면 ‘죽은 자여, 깨어 일어나라’ 한 가지 예로 들게요, 베드로가 예수님 십자가 전에는 율법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물어요, “예수님, 우리에게 자꾸 용서하라시는데 우리가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아는 척 하면서 “일곱번 용서하면 됩니까?” 하죠?

얼마전에 방송에 보니까, 어떤 신부가 있는데 직업이 전에 의사였어요. 의사였는데 신부로 바꿔져 이디오피아를 갔는데 그곳에서 아이들을 위하여 학교도 지어주고, 병도 물론 고쳐주고 하다가, 나이가 불과 48살인데 고국에 와서 조사해보니까, 대장암말기가 돼서 그 뒤 얼마 전에 죽었어요. 그러면 질문 다시 합니다. ‘예수님, 에티오피아에 가야 구원받습니까? 안 그러면 나이지리아에 가서 봉사해야 구원받습니까?’ 했더니 뭐라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네가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필리핀을 가도’ 구원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는 거예요.

착한 일 하신 분들이 주의할 것이 있어요. 주께서 시켰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 일은 내 죄를 깨닫게 하시려는 일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내 죄를 깨닫게 하려함이 아니라 ‘내 잘남을’ 내 영광을 위해서 그 일을 한다면, 그 일은 큰일 날 일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이 일을 열심히 한다, 그것조차도 내 구원받는 데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고 오히려, 주께서 내가 죄 아래 있음을 확인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되는 겁니다.

구원자는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밖에 없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구원받을 이름은 예수이름밖에 없다!’ 그 이름 안에 세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야, 바로 이런 이해를 가져야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분류하러 오셨고, 우리를 그냥 죄인이라 깨닫게 하셨고, 그 죄인은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서만 구원한다, 는 이 세 가지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걸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뭐가 있어야 하느냐면, 성령이 오셔야 됩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한 가지만 오는 게 아니고 이 세 가지 삼종세트가 택배로 오는데, 택배비도 안 받고, 공짜로! 공짜로 오는데 이걸 『성령의 은사』라 합니다. ‘은사’라 하는 다른 말은 ‘선물’이에요.

성령의 은사가 오게 되면, 이 세 가지가 공짜로 다 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 전체를 두 자로 뭐라 하냐면,『사랑』이라고 비로소 눈 뜨고 알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 받았다’ 누구한테? 주님께 사랑 받았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내게 박혀있으면, 주의 이름이 우리 안에 박혀있기 때문에, 평생 동안 이 세 가지를 확인해가면서 우리를 살금살금 천국까지 끄집어 당깁니다. ‘내가 목사다 강의도 하고 설교도 한다’ ‘주여 이정도하면 괜찮죠?’ 하면, “이놈아 너는 끝까지 죄 속에 있어!” 깨닫게 할 때 얼마나 기쁜지요!!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옵소서!”(시51:8)

내가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또 어느 땐, ‘하나님 제가 날나서 양됐죠?’ 하면 또 얻어맞는 거예요. 주님께서, ‘너는 양으로 분류됐어’ ‘나도 주님 일에 많이 협조했으니 복주시옵소서’ “너는 죄인이야! 구원자는 나밖에 없어!” 우리는 예수 외에 자랑할 거리가 없다, 입니다. 어떤 교인이 와서 ‘목사님 훌륭하십니다’ 하면 ‘미쳤습니까, 십자가 지지도 않은 내게 왜 이럽니까’

예수님은 그래서 이 세 가지 분류작업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모독하면 뭐가 됩니까? 분류작업이니까, 염소가 되고, 영원한 저주에 가담되는 거죠. 그럼 문제 냅니다. 예수님을 저주하면 염소 되죠? 목사를 저주하면 뭐가 됩니까? 저주 안 받죠뭐, 그런데 목사는 저주받는다고 사기를 치잖아요. ‘교인들이 아직 복음을 이해 못했구나’ 이러면 되는데, ‘감히 나에게 대적하다니...저주 받아라’ 이렇게 할 권한은 목사에게 없습니다. 목사가 자기 자존심, 자기 영광을 생각하면 안돼요.

오직, 목사가 그런 소리 듣거든, ‘아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생각하면 되는 거지, ‘이게 감히 나를 저주를 하다니’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고, 어떤 사람이 예수를 안 믿거든 당연한 줄 아시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아 선물 받았구나’ 하며 귀하게 여기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어가지고 자꾸 설교에 성깔을 넣다보니까 안 믿으면 혼자 뿔따구 내요. 그러면 안 되요.

분리작업을 누가 하십니까. 분리작업을 예수님이 하시는데, 자기가 열성이 있는데 말을 안 들어주니까, ‘내가 투자한 게 얼만데...’‘심방 간 게 여섯 번인데 교회를 안 나와?’ 하면서 악담을 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을 때, 우리 이름이 우리 죄를 토해냅니다. 우리 안에 죄가 들어있고, 바깥에는 하나님의 죄 사함, 다른 말로 세 가지 삼종세트 주님의 피로서, 이 죄를 은혜로 덮어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겁니다.

두 번째, 태초.-이거 하고 십분 쉽시다 - 태초에 계신 분이라 하셨는데 -이거 어려운 거예요.- 태초라 하는 건 세상 처음이잖아요. 원래, 세상 처음과 세상 끝이 같습니다. 왜냐하면, 시작했던 것이 돌아서 다시 오기 때문에. 층이 두 층이 되어 있어요. 이걸 가지고 밑의 층을 역사라 하고 위의 것은 영적인 층, 어려운 말로 『묵시 층』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 때에 예수님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렸지요. 그 부분을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배후에는 뭐가 있냐면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형상의 특징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차단하고 숨기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볼 자가 있다 없다? 없어요!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상상을 했어요. 무슨 상상을 했냐면, 하나님이 여기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마귀가 지어낸 가짜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고 오직 누구라고 했습니까? 나를 보았거든, “예수님을 본 자가 아버지를 본 자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은 볼 수가 없고 하나님 형상 되시는 분만 만납니다.(출33장) 모세가 시내 산 올라가서 누굴 봤습니까? 형상만 봤지요? 형상만 보고 뒤에는 감춰져 있지요. 예수님을 본 사람은 있지만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항상 피조세계에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 형상이지 하나님이 아니에요. 형상을 통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형상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거예요. 형상과 더불어서. 태초에 계신다고 했는데 태초에 창세전에 인간은 뭐였다? 하나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형상과 사람 사이에는 두 가지 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선악과나무가 있었고, 또 하나는 생명나무도 있었는데, 지금으로서는 생명나무라 하는 것은, 선악과나무 기능을 할 때만 생명나무가 어떤 나무인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전에는 생명나무가 어떤 나무인가 몰라요. 선악과를 따먹어주므로 말미암아 생명나무는 못 따먹는다는 거. 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악과나무를 심어놓은 거예요. 심어놓고 두 가지 나무를 다 심어놓은 거예요. 두 가지 나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아, 우리는 하나님 자체를 우리 힘으로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피조사계에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한 쪽을 건드리면 한 쪽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선악과나무가 사라지니까 생명나무가 우리 선에서 사라져버리는 거지요. 인간이 선악과나무 따먹은 이유가 뭡니까? 자기 힘으로 자기가 신이 되고자 했잖아요. 피조물은 피조물이지 신이 될 이유가 없고 필요가 없어요. 마귀가 와서 유혹을 하니까 따먹고, 신이 되는 양 하는 거예요. 그러나 생명나무 가는 길을 어떻게 했다? 차단시켰다. 아까 했던, 양심껏 산다고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다 말이지요. 차라리 양심이 없었으면... 양심이 살아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막혔습니다!』

아까 그걸 다시 하면, 태초에 계신분인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됐다?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우리에게 온 거예요. 두 분 다 같은 분입니다. 태초에 계신분과, 죄 사함 주신분과 같은 분이 되는 겁니다. 그 형상이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십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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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6 01:23:14 녹취 : 박온정

 
안산100219요일2장9절b

‘빛과 어두움 두 패로 나누는 종말(끝)’

 
『공간의 끝과 시간의 끝』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요한일서에서 죄 사함과 태초, 그리스도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고, 그때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분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건,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잖아요.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 뭘 압니까? 하나님을 아는 거예요.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자녀들이고 자녀에서 더 나아가면 뭐가되냐, 아비들...아비층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한 가정에서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알고, 한 가족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았다, 이런 뜻이 아니고 교회 내에서 젊은 층은 처음 입교하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알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하나님을 알지요. 합쳐서 태초에 계신분인데 이게, 아까 얘기했잖아요. 가려져있는 거예요. 가려져서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른다,입니다.

태초에 두 분에 의해서(이런 게 좀 어려워요), 태초에 두 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과 하나님과 하나님 아들, 성부 성자인데요, 또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가 만들어졌는데, 아까 뭐라했죠?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가. 왜냐면 처음 태초에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그리스도의 복사판이죠. 성경에 “내 살과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에게 생명이 없다,”는 말이 나오죠. 이 말이 어렵기 때문에 설명하면 설명한 게 더 어려워져요.

쉽게 하려면 이렇게 하면 되요. ‘나는 이광수의 소설을 보면서 나는 이광수의 살과 피가 되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유명한 소설가 또 누구 있습니까? ‘나는 김동리 소설을 보면 김동리의 살과 피가 되는 것 같애’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나는 우리 아버지가 너무존경스러워서 나는 평생의 아버지의 살과 피로 살았어,’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의 복자판이다 이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와 살이 내 속에 흐르는 것 같애’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예요. 전에는 우리의 자존심, 우리의 영광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자존심,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예수님의 사람 된 것을, 예수님의 가족 된 것을 나는 영광으로 여겨.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형상대로 만든 거예요. 구분하기 십지요?

예수님 형상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 형상대로 만들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내 모든면을 장악하고 있고, 내 속에 살과 피처럼 흐르고 있어서,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이 말이죠. 그리스도가 내 뼈다귀가 되고 그리스도가 내 핏줄이 되고, 내 혈액이 되고 내 심장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나는 이제 못 산다, 라는 것을 느낄 때 그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형상으로 변화된 거예요. ‘그리스도 형상으로 변했다, 이 말은 어떤 곳을 뚫어도 살과 피가 나오듯이 어떤 곳을 찔러도 주님의 용서하심이 나오죠. 이렇게 긍휼하심, 용서하심이 나오죠.

요한일서 1장10절 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 참 재미있죠? 거짓말 안 하는 자는 말씀이 우리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아예 드러나 버린 거예요.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있어서 출렁출렁하면 뭐가 출렁거려요? 말씀이 출렁출렁거려요, 우리 안에서. 이게 하나님 형상이 출렁거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살과 피가 되었다 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유사한 말씀이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너희가 내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니 정말 그러하다』남들은 사도의 말, 사람의 말 ‘너는 뭐 잘났어’ 이렇게 들리던데 어떻게 ‘너희들은 내 말 들을 때 내가 말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가? 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말씀 스스로 움직여서 너희 안에 파고들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윙~ 파리가 날아다니다가 파리를 잡으려는데 파리가 윙~ 목소리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버리면 파리가 알아서 내 속에 들어온 게 되잖아요. 그 파리가 말씀이라고 봅시다. 내가 말씀을 잡아서 집어넣은 게 아니고, 말씀이 알아서 내 속에 들어와서 내 안에서 말씀이 흐르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주여 우리 죄 지은 거 맞습니다’ 고백하는 거예요. 남들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 안의 말씀으로 대조해볼 때.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런 모습을 뭐라하냐면 우리를 하나님의 용기(容器), 우리를 말씀을 담는 그릇이라 되어 있고, 로마서에서는 이 세상에는 두 개의 그릇밖에 없다. 하나는 하나님의 긍휼을 담는 긍휼의 그릇이 있고,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담는 그릇. 인간에게는 두 개밖에 없다. 양과 염소,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 여기서 긍휼의 그릇, 진노의 그릇. 모든 인간은 이 둘 중의 하나에 속합니다. 사람이 국회의원, 대통령, 판사 됐다고 그거 인생 끝나면 그것도 바로 끝납니다. 소용없어요. 그거는 자기 자존심의 그릇이죠. ‘나는 판사다!’ 그거 자존심의 그릇입니다.

판사가 되지 마라는 말이 아니라 판사가 되었더라도, 판사의 그릇이 되지 말고, 예수님의 그릇이 되야 되고 긍휼의 그릇이 돼야 되요. 그래야 판사 일을 해도 구원받지요. 자칫하면 피고보다 더 못한 사람이 되요. 강도가 천국가니까. 강도를 재판한 판사가 지옥가고 강도는 천국가고 이런 일이 생긴다니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신 일로 되겠습니다.

자, 그다음에 14절 끝에 봅시다.『......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이것은 우리가 이기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 뭐가 거하기 때문에? 말씀이 거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긴 거예요. 이상화 선수가(빙상) 500미터에서 금메달 땄잖아요. 이상화 선수와 똑 같은 마네킹을 만들어 달려보라 하세요, 못 달리잖아요. 껍데기를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 속의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마귀는 우리 껍데기를 안 봅니다. 우리가 목사나 집사라 해서 마귀가 벌벌 떠는 법이 없습니다. 그 사람 속에 말씀이 들어있으면 말씀보고 마귀가(8:18)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마귀를 보고 겁내지 말고,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을 보고 겁내야 되요. 말이 되는 말입니다.

적들이 왔다, 적들보고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 속에 우리를 장악하시는 예수님을 더 경외해야 되지, 예수님이 무서우면 세상은 안 무서워요. 목사도 안 무서워요. 예를 들어서, 송구영신예배쯤 되면 당회원들 단도리하죠? 자신들은 맛있는 거 다 사먹고 자기들은 아이들 유학 보내면서 목사들은 월급 안주면 되느냐고 협박 공갈하죠. 주의 종을 이렇게 소홀하게 대접하면 복 받을 걸 믿느냐, 너희는 저주받는다, 이런 식으로 하는데 디모데전서에 보면 뭐라 했냐면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이렇게 되어 있죠? 만약에 당회원 가운데 딱 한 사람이라도 말씀에 젖어있는 사람 같으면, 목사가 그런 이야기할 때 뭘 보겠어요. 말씀을 보겠죠.‘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돈 사랑은 일만 악의 뿌리다’

그러면 뭐가 무섭습니까. 협박 공갈한 당회장이 무서운 게 아니고 뭐가 무섭습니까. 저주 받는다고 욕하는 목사 무서운 게 아니고 자기 속의 말씀이 무서울 때는 “목사님, 제가 알기로는 성도는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아는데 지금 목사님 굶습니까? 우리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죽을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면, 그걸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이해를 하고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목사의 도리가 아닙니까?” 라고 속에 있는 말씀대로 이야기를 하죠. 말씀대로 한다는 것은 뭐냐면, 나를 안 섬기면 저주 받는다는 목사가 무섭기 전에 뭐가 더 무섭습니까. 자기 속의 말씀이 더 무섭기 때문에 앞에 있는 목사는 안 무서운 거예요.

하나의 교인으로 보자 이 말이지요. 전도를 하자 이 말이지요. 양심있는 목사 같으면 ‘뭐, 쫌 더 올려달라 이거지요’ 그러면 교인은 이러죠, “목사님, 목사님 형편을 우리가 알고 목사님 말씀이 은혜로우면 목사님 올려달라는 말 안 해도 우리가 올려줍니다” “우리가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 복음 전하라고, 복음 전하라고 올려줄 수도 있는데 목사가... 복음은 생각 않고 맨날 목사 권위만 생각하니까. 주고 싶어도 우리는 못 주는 거예요.” 왜, 우리 돈은 내돈이 아니고 주님 주신 돈이기 때문에. 복음 위해 쓰라는 돈이 목사 위해 쓰라는 돈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개혁주의가 이렇게 했으면 한국교회 타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교인들이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목사를 더 무서워해버리니까 같이 목사한테 놀아나고 사조직 되잖아요. 이런 오류를 우리가 주의해야 됩니다. (여기 교회는 그런 일 없겠지만...) 바로 제가 예로 든 것을 이제 알겠죠? 말씀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이 뭐냐, 악한 자를 이긴다 이 말이죠. 왜! 우리는 먼저 말씀에 굴복하니까! 말씀에 굴복한 사람이 어떻게 마귀한테 굴복하겠어요. 먼저 굴복해야 될 분께 굴복했으니까! 당당하게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그 다음에 우리가 굴복하기 힘든 게 있어요. 그게 바로 16절입니다. 15절에 보면『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이걸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까 첨에 제가 설명한 거예요. 세상의 육적인 것이 점선으로 내려오다 십자가에서 예수님 만났습니다. 구약의 약속의 땅은 뭐냐 하면, 양이 늘어나고, 소가 늘어나고, 흔히 말하는 축복이라는 것, 축복받는...자손이 잘되고,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안 되고,하는 그게 약속의 땅인데, 이 약속이 땅은 약속이 거하는 땅이에요. 다시 말해서 땅이 있다고 약속이 있는 게 아니고 약속을 바라볼 때만 그런 축복이 주어지고, 만약에 약속을 안 바라보면 이 땅이 무슨 땅이 되냐 하면 저주의 땅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멸망당했어요.

축복받은 땅에서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했어요. 그거는 뭐냐, 그들은 땅만 귀하게 여겼지, 약속은 내팽개쳐버린 거예요. 그런데 신약성경에 약속이 누굽니까. 이 약속이 누구예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승천했잖아요. 그러니까 승천하니까, 이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고 뭡니까? 악일뿐이죠. 이 땅의 것을 사랑치 말라, 진짜 사랑해 주는 분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위에 있어요. 올라갔어요. 그래서 성도는 이 안에 있으면서 핍박을 받죠.

그래서 옛날에는, 십자가 이전에는 축복이라고 여겼던 것이 위에 있고, 저주가 아래 있다면 신약의 십자가를 통해서는 땅의 축복이라는 것은 사실은 저주의 모습이고, 그 당시에 저주받은 것은 사실 축복이 되는 겁니다. 주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이 축복이 되는 겁니다. 이게 역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교회에서는 십자가를 통과 안 하니까, 땅의 축복이 축복인 줄 알고 십자가 말고 바로 가버려요. 바로 가버리니깐 교회가 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빌면 복 받은 줄 알고, 지성이면감천이라고, 무조건 빌고 갖다 바치면 복 받은 줄 알고 세상 복을 구하잖아요.

그런 사람에게 요한일서 2장15절 들이대면 뭐라 하겠습니까. “목사님, 그렇게 해서 교회 부흥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옵니다.『세상 것에 현혹치 말라』‘이 세상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뿐이니 이 세상 것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없다,’ 이거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진정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나?” “예! ” “그렇다면 세상 것은 사랑하지 마라” 너희 사랑하는 하나님은 벌써 왔다가 이 땅에서 사랑을 베풀어주는 거예요. “ 거기 있지 말고 빨리 죽어서 빨리 나 있는 곳에 오라!” 그래서 사도바울은 죽는 게 소원이었어요.

나의 소원은 하나밖에 없다. 죽는 게 소원이다. “주여! 불러주옵소서!” 주님께서 “ 안돼! ” “왜요?” “할 일 하고 와야지” 거기는 할 일 하고 와야지,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지금 가고 싶지만 안 가는 것은, 너희 때문에, 너희에게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한다 이것들아!” 마음 같으면 가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못 가게 말리는 거예요. 복음 전하라고!

얼마나 이게 자유롭습니까. 목사가 가장 시험받는 것이 옆에 있는 동기 목사는 교인 수가 많고, 자기는 교인 수가 적을 때 열등감을 느낍니다. 그때, “하나님이여! 왜 하필 나에게, 하나님이여! 신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한 인간이, 하필이면 왜! 나보다 더 나은 사모만나서 벤츠타고 다니는데, 저는 왜 이 모양입니까.” 할 때 하나님의 뜻은, 네가 정말 믿음이 있는지, 네가 정말 하나님 사랑하는지를 측정하는 방법이, 바로 세상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배치를 해 놓아요. 마치, 이스라엘 나라에게 이방나라를 배치해, 이스라엘이 이방나라 부러워서 어쩔 줄 모를 때는 그들이 저주받고, ‘저는 하나님이 더 좋습니다’ 이렇게 되면 복 받고‘ 하는 그런 장치를, 그런 장치 속에 똑 같이 우리 주변에 깔아 놓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임을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원했으니, 하늘에서 주는 그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소원하며, 하늘에서 주는 상급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면 또 어떤 사람은 묻죠. ‘그러면 교육도 받지 말고, 아이들도 키우지 말고, 피아노도 가르치지 말고, 이 세상사는 걸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왜, 왜 그러느냐, 우리가 말씀을 읽잖아요. 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 말이죠.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우리가 전에 기도원에 가는 것 하며, 세상살이 하지 말까요?’ ‘아니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안에 말씀이 들어 있잖아요. 말씀이 방금 요한일서 2장15절,16절이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 주변에 죄성, -이건 우리의 옛 아담의 속성이 남아있잖아요 -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죄가 뭡니까? 세상을 좋아하는 게 죄잖아요.-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우리는 뭘 느껴야 하느냐 하면, 이런 나를(숨기면 안돼요)(위장하면 안되고), ‘나 이렇습니다,’ 하고 까발려요, 까발리면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이 충돌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되게 하고, 주님의 용서를 깨닫게 합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합니다.

인간은 자기 행위 하려면 자기 의지를 발휘하겠죠. ‘말씀을 본다’ 자기 의지를 발휘하는데 의지 바깥에 주님의 의지가 있어요. 나는 이 말씀이 옳다고 여기는데, 주님은 나의 바깥에서 주님의 의지가 오니까, 어떤 게 맞아요? 주님이 옳지요. ‘아, 역시 또 내 욕심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하는 겁니다.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 돌본다, 착한일 했더니만 주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아! 내가 또 착한일 했다고 떠벌였구나, 이것이 나의 죄구나,’ 늘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고상하게 기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기도하시고, 응답은 말씀으로 응답 받아야 돼요. 내가 응답을 만들어내면 안돼요.(목사님의 이런 가르침 첨듣습니다-녹취자의 생각) 그러면 자기가 착한사람 돼요. 우리는 못된 사람 돼야 됩니다. 우리는 못된 살마 되어야 하고, 기도할 때 기복적 기도밖에 할 줄 모르는, 그런 인간에 대해서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서 일 하시기를, 이건 이 말씀에 어긋나고, 이 말씀은 이것에서 잘못이고, 라는 것을 알려주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열심히 복음 전하는데 왜 집안에 우환이 생깁니까.” 그러면 그걸 속일 필요 없어요. “하필이면 나에게!!” 항의하듯이 기도해야 돼요. 하게 되면, 주님께서 요한복음 5장을 알려주시면서,『너희가 경건치 않은 자를, 으시대는 자를, 죄인 된 자를 구하는 건 피 밖에 없다』예수님의 피의 효과를 다시 한번 일깨워줄 때에, ‘아, 내가 객기를 부렸구나 또,’ 평생 동안 매일같이 이게 벌어지는 거예요. 매일같이...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죠, ‘그냥 성질대로 그냥 사세요!’ 주께서 친히 다뤄야지 내가 만들어가는 고상한 나를 만들지 마세요!‘ 합니다. 자기가 고상해지면 주님이 구원자가 아니고 자기 잘난 체 하게 되요. 자기 믿음 좋은 것을 자랑하고 싶은, 최고가 되고 싶은,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뭐라 했습니까. 그걸,『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이라고 되어 있죠. 주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꺼리의 주인공을 누구로 삼습니까? <나>로 삼는 거예요 나!

그런데 요한일서 1장10절에 보면 우리는 범죄 한 자인데, 우리가 하나님 거론하면서 주인공이 누가됐다?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할 때!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마귀가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2장17절에 뭐라고 되어 있냐 하면, “이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가고” 지나간다는 걸 다른 말로 하면, “빠져나간다”

사람에게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심판이 있지요. 그래서 장례식에 가끔 갑니다마는, 안 믿는 사람들 보면 갖잖아요. 죽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하고,-사실 죽는 것은 심각한 게 아닙니다.-그보다 더 중요한 건 뭡니까.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누구나 죽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심판이 있는데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었다고 그 난리치는 거예요. 죽었다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요11:25』그래서 그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형제를 사랑하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이게 뭐냐 하면, 옮겨지는 것이 A영역이고 빠져나가는 것이 B영역이라면, A영역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거는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진짜 알려면 A영역에서 빠져나가서 정욕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지고 있는 B영역. 심판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인가, 이게 진짜모습입니다. 이걸【허구와 실재】라고 합니다.

실재는 주님 앞에 섰을 때가 실재지,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잘난 체 하는 건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사람들끼리. 그래서 저는 사람을, ‘남을 의식하지 마’ 라고 합니다. 이게 다 허구입니다. 그래서 같은 목사끼리 너무 열등의식을 갖지 말라고 하지요. ‘저 목사님은 교인 수 몇 명입니까? 30명 안되지요?’ 그런 열등의식 가질 필요가 없어요. 생활은 많이 불편하겠지만...

A영역에서 누가 잘났냐가 아닙니다. 부흥사들 보면 ‘너희교회 몇 명이냐, 올해 너희교회 예산 얼마냐, 우리는 이십억인데 너희는 삼십억이냐, 이렇게 자꾸 비교 시작해서 ’하나님의 훌륭한 종‘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훌륭한 종은 없어요. 그릇의 크고 작고 중요한 건 무엇이 담겨있느냐가 중요하지. 그릇 크다고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그릇 크면 허풍도 크게 마련이거든요.

그릇 크다고 양적으로 큰 것이지 질적으로 딴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이쪽에는 질적으로 따져서 새로운 피조물인데, A라는 영역(눈에 보이는 세상) 말고 B라는 영역, 주님 앞에서의 내 모습이 어떠냐, 우리는 긍휼을 담은 그릇이 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너무 기죽을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은 지나갔다. 빠져나오는 영역의 속도를 느껴야 합니다.

이걸 알려면 사진 찍어보면 압니다. 5년 전의 사진보면 그렇게 젊었어요. 나이가 60넘으면 사진 찍는 게 싫어요. 거울 보면 젊은데, 사진보면 기氣가 빠져가지고, ‘아니, 웬 노인네야?’ 놀래요. 송장에다가 허수아비 옷 입혀놓은 것처럼... 쉬지도 않고 빠져나갑니다. 빠져나가면서, 한 지점에서 ‘너는 어떤 인간이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이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지, 이 사망의 세계에서 뭔가 승부보고 쇼부낼라하면 안되죠.

그 다음에 2장 18절 아까 제가 마지막 때라 했지요? 끝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오시고난 뒤 끝났다. 다른 미래는 없다,입니다. 사도행전17장 한번 봅시다. 17장30절:『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예, 여기 보면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은 시대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허물치 아니했어요.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허물치 아니했는데, 묵인했다 이 말이지요?

31절에 보면, “이는 정하신 사람” 정하신 사람이 예수님이죠? 31절:『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이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32절에 뭐라 합니까?『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그러니까 우리 계획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 계획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때는 구원받고 안 받고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정하신 분이 따로 있어요. 누굽니까. 예수님이 결정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구원받고 안 받아들이면 우리는 지옥 가는 거예요. 제가 강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받아 들이냐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그냥 묵인, 허물치 아니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간섭하겠다는 거예요. 문제 삼겠다는 겁니다. 왜 절에 가냐고, 왜 불도가 심하냐고 묻겠다는 거예요. 왜 바쁘다는 핑계대고 예수를 안 믿었느냐, 묻겠다는 겁니다. 왜! 기준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기관의 ‘쉼터’ 애들이 공부해서, 자기스스로 자립해서 나갈 수 있는 능력 실력을 기르면 그것으로 쉼터에서의 기능은 다 한 거예요. 부모노릇을 대신 해주는 겁니다. 성인되면 자기가 알아서 살아야 되니까. 거기에서는 기준이 뭐냐 하면, 얼마나 자립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느냐, 그만한 기술과 기능을 익혔느냐, 어느 정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초적인 확률 자세한 확인, 이게 기준이죠.

만약에 그 힌트가 구원과 천국을 가늠하는 그런 힌트라면 졸업할 때 뭘 물어야 됩니까. ‘너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걸 물어야죠. 왜냐면 하나님 구원하는 방법은 정하신 사랑에 대한, 관해서 하는 문제기 때문에 ‘정하신 사람이 죽었다가 십자가 부활했는데 너는 그걸 믿느냐,’ 그건 우리나 선생님이 정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정한 거잖아요. 하나님이 정한 거잖아요. 그러면 교회는 뭡니까, 교회는 뭐하는 곳이에요? 교회 키우는 데가 아니죠. 뭐하는 뎁니까. 자기사람을 어디 넣어준다? 천국에 넣어줘야 할 길이 교회 아닙니까.

그러면 교회 기준이, 외쳐야 될 기준이 뭐밖에 없어요? ‘돈 벌었습니까?’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그걸 물어서는 안 되죠. 그럼 뭐라 합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목사가 그런 질문이 나와야지요.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그 이야기 나오면 안 되지요. 그런데 일반 사람에게 교회라 하는 것은『속죄양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는가,’ 물어야 되는데 왜 목사가 목회에 방해된다고, 교회 안 큰다고, 왜 자꾸 하나님이 정해놓은 기준을 빼버리고, 세상 고객들이 좋아하는, 그 스님들이 좋아하는 축복 축복을 왜 이야기하느냐 이 말이지요. 교회라는 이름으로 지옥가게 만든다 이 말이지요.

평생 살 것 아니잖아요. 결국은 빠져나가 죽잖아요. 50, 60, 70 빠져나가는 중입니다. 쉬지도 않고. 멈출 수가 없어요. 점점 늙어가요. 빠져나와서 A영역에서 B구역으로 주님 앞으로 나오는데, 기준은 누가 정했다? 주님이 정했지요. ‘정하신 사랑과 십자가 부활’ 이게 복음이잖아요. 복음을 위해서는 목사가 목에 칼이 들어오고 굶어죽는다 해도 뭘 전해야 되요. 복음만 전해서... 한번 죽고 또 죽을 거 아니잖아요. 천국 가서 또 봐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복음만 전해서, ‘내가 당신께 금이나 은을 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드립니다. 예수 이름.

‘분류작업, 죄, 우리는 죄인이고 거기서 구원할 자 예수님밖에 없다.’ 하는 그걸 전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목사의 도리 아닙니까. 목사의 도리예요. 이 직분이 얼마나 부러운지 사도바울은 천사도 부러워서, ‘아흐, 나 천사 안 할래, 나 복음 전할래,’ 천사는 심부름만 해야되잖아요. 심판할 땐 심판하고, 그런 직분을 받아 놓고, 세상에 이걸 돈에 팔아먹어요? 자기 자존심에 팔아먹어?

교인 수 몇 명 안 된다고 복음 때려치우고, 세상 것을 증거해요? 그러면 그것은 성령 받은 목사가 아니죠. 악마의 종이죠. 그런데 목사가 그러고 싶어도 사모들이 가만 두지를 않아요. 양식이 문제......방금 이야기한 것이 요한일서 2장18절에 나오죠?「적그리스도」가 나온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쭈욱 이야기한 게 적그리스도가 별게 아니라, 복음을, 복음 말고 다른 거 전하면 적그리스도라는데, 다른 게 뭐냐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 세상 것을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죠.

적그리스도도 여기서는 뭐가 되냐 하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라,」이런 말이 있죠. 그것과 2장15, 16절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하는 것과,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것은 맥락이 같아요. 어떻게 같은 맥락이 되는가, 이게 궁금하지요. 이거 좀 어려운 거예요.

이게 조금 어려운 거니까 미리 기준을 한번 봅시다. 요한일서 5장6절,7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증거 하신 이가 셋인데 뭡니까.【성령과 물과 피라】이것이 예수님의 육신이 없이 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구원 받느냐 마느냐는 것이 세 가지인데 ‘성령과 물과 피’거든요. 성령과 물과 피라, 이게 뭐냐 하면,

뒤에다 ‘세례’를 붙이면 다 맞아요. 물세례, 피세례, 성령세례. 피세례를 마태복음에서는 뭐라하냐면 불세례라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받은 세례가 있는데 무슨 세례냐’ 하니까 불세례가 남아 있다고 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에 죽는 세례입니다.

처음에 물세례 받을 때는, 어디 갔느냐 하면 세례요한에게 물세례 받을 때 사람들 물세례 받았지요? 그 사람들은 죄인입니까? 죄인 아닙니까? 죄인이지요. 쉽게 말해서 땟국이 질질 흐르는 더러운 물에 들어갔지요. 이 더러운 물에 예수님이 끼어들어갔지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말려요. “예수님같이 정한 분이 여기서 세례 받을 수 없습니다. 왜이러십니까” 말리니까, 이래야 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죄인이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죄인의 땟국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죄가 없으신 분이 죄를 뒤집어 써야 되는 거예요. 항상 구원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가 있는 죄의 자리에 침범해서 우리 자리에 합류할 때,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는 겁니다.

세상에 어떤 인간이 자기 죄를 털고 구원받겠어요? 우리는 평생 지만 지을 뿐이죠. 자기 자존심만 챙기죠. 그런데 이 자존심이 있는데 우리 속에 말씀으로 들어오시는 겁니다. 땟국물이 있는데 들어오죠. 그게 뭐냐 하면,【의】의 시작이에요. ‘의’ 의 시작. 주님께서 자신해서 죄인이 되셔서 이 죄 때문에 두 번째, 불세례 받아야 됩니다. 불세례는 뭐냐, 지옥불이에요. 지옥불.

지옥불이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버림받는 겁니다. 저주를 받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불세례...지옥불을 뒤집어쓰는 거예요. 죄를 향하여 주어지는 아버지의 저주! 이것을 바로 예수님의 피라고 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불세례라고 했어요. 이 두 가지를 예수님이 받아버리시면 여기서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예수님 혼자 구원받겠습니까? 세 번째,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성령은 예수님을 위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한 택배직원이에요. 이것을 가지고 ‘보혜사’라고 합니다.

여러분 병원에 가면, 의사가 병 고치죠 물론. 의사의 말을 전달받아서 주사놓는 사람이 누굽니까. 간호사죠. 간호사가 바로 ‘보혜사’인 거죠. 일은 누가 하셨고? ‘이루었다’는 누가 다 이루었고? 예수님이 다 이루셨죠. 다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전달시키는 분은 누구? 성령께서. 성령은 다른 보혜사에 대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게 되면, 예수님의 구원이 예수님의 단독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편적 단속성斷續性이라고 합니다.

보편적 단속성은 2월27일날 여기, 서울의 방배동 백석대학교에서 1시부터 제가 논문발표를 합니다. “아무나 갈 수있습니까?” “만원씩만 내세요. 아무나 갈 수 있습니다”“ 방배동역 2번출구 토요일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보편적 단속성’이란 것은 아버지가 어쨌든 한 사람이죠. 그 뒤로 줄줄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따라오는 것을 말합니다. ‘보편적인 단속성.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피가 아니고 우리 물도 아니고, 우리 세례도 아니에요. 피와 물과 성령은 예수님의 전 행적을 말하는 겁니다. 이걸 사람들이 풀지를 못해요. 피가...뭔지. 꼭 자기가 행해야 된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행하신 거예요.

물세례, 피세례, 그리고 성령세례, 성령세례 받은 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나눠주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자”라고 디어 있어요(요1:33).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랐는데, 성령이 임한 그분이 장차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분이니까 ‘너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인 줄 알아라’ 이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있으려면 예수님이 어떻게 와야 돼요. 귀신으로 오면 안 되고, 실제로 세례 받아야 되고, 실제로 십자가 저주를 받아야 되고, 실제로 성령을 줄 수 있는 분이어야지요. 그게 육신으로 오신 분이다,는 겁니다. 육신으로. 그냥 몸으로 오는 그걸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고, 이 세 가지의 기능을 하신 분으로서의 몸인 거예요. 그런데 일반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왔다고 자기는 정통이라고 우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거는 잘못된 거고. 육신으로 온 이유가 바로 이 세 가지의 과정을 겪어야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인데, 어떤 사람들은 적그리스도 이런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여러분들이 도 닦으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22절 봅시다.『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해서 반듯이 아버지만 단독으로 있는 경우는 있다 없다? 반드시 아버지를 알려면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자에게만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따로 있고 아들이 따로 있는 경우는 없다는 거예요.

25절에 봅시다. 25절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영원한 생명이 뭐냐 하면, 오래 사는 거요? 오래 사는 게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이란 수명 자체가 없는 거예요. 수명 자체가. 이게 어디 나오냐 하면, 변화산 올라갔잖아요. 거기 예수님이 계시죠? 엘리야 있었죠? 모세 있었죠. 모세가 오래 살았습니까, 엘리야가 오래 살았습니까. 이걸 묻는 자체가 잘못이죠. 왜냐하면

지상에서 있는 게 아니고 이미 지상에서 벗어나서 묵시세계 올라간 사람에게는, 엘리야나 모세나 다 같이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묵시적 인물 예수님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엘리야가 영원하고, 모세가 영원하고, 아브라함이 영원하다면, 예수님 후에 구원받으면 뭡니까. 지상에서는 우리가 수명이 있지만, 영원한 영생을 얻는 것, 이것이 뭐다? 약속이잖아요. 약속. 이게 약속인 거예요.

수명을 이야기하지 않은, 수명을 논할 필요가 없는, 예수님의 몸으로서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 자체가, 이들은 예수님은 엘리야나 모세나 우리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예수님으로서 값을 올리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구원하는 자들 속에 있어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구원하는 자들 속에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 것처럼 이제는 그들과 하나 되게 하옵소서.

여러분의 어린아이들 게임하다보면 옛날 어릴 때 했었는데, 작대기 꽂을 모래를 모아놓고 작대기 넘어뜨리는 게임 하죠? 작대기 밑에 받치는 모래가 뭐냐 하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뭘 세웁니까, 예수그리스도를 세우고 예수그리스도에 연결된 것이 아버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로 하기 위해서는, 자기 백성들이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함으로써 이것이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 언약백성으로 약속백성이 되는 거죠. 이 사람은 누가 키웠는가? 주님께서 키웠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뭐가 됐다? 가지가 됐다. 가지가 된 이유가 뭐냐면, 열매가 나무에 맺는 게 아닙니다. 가지 끝에 열매가 맺힘으로 말미암아 이 열매가 가지 덕분이 아니고 누구 덕분이다? 바로 이 나무덕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같은 가지가 있는 겁니다.

이 열매를 우리 열매라고 하면 안 됩니다. 누구열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열매라고 봐야 되요. 모든 공로를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나의 공로로 돌아오면 안 됩니다. 자기 공로로 돌아오면 시기와 질투와 분노가 생겨요. 하필이면 나에게!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불상사가? 우리는 통과하는 파이프인데, 관에 불과한데, 여기서 통과해서 뭐가 나왔는데 이 열매를... 우편배달부가 모든 소포를 자기꺼라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자기는 전달해야 할 사람인데...하나의 목격자에 불과한데 자기가 그 사람을 구원한 것처럼 예수님이 구원한 것을 목사가 구원한 것처럼 행세하면 안 되지요. 목사는 하나의 목격자입니다.

주께서 집사님을 구원했는데 그걸 그냥 주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증인으로 집사님 옆에 목사가 서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죠. 그게 바로 영원한 생명이다. 요한일서 1장 봅시다. 1장1절:『태초로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예수님 때문에 아브라함과 모세가 살았다면 똑 같은 원칙으로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게 되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살려 주는 자 속에, 하나님이 살려내는 자의 속에만 예수님이 계시는 겁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이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 말은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어있다? 살아있다? 살아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약속 때문에 살아있는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은 겁니다. 오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릴 자라는 것을.

물론, 살아서 믿는 자가 살고, 죽어서 믿는 자도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그분은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라고 믿는 자가 성령 받은 자입니다. 마리아, 마르다 오빠가 죽은 지 나흘만에 걸어서 나왔잖아요. 사람들은 보고도 안 믿습니다. 그러니까,「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시고,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이게 무슨 작업? 분류작업... ‘잘난 체 하는 사람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 같은 사람에게는 나타내 보이시고... 어린아이 되면 안돼요. 나타났기 때문에 어린아이 되는 거지 어린아이처럼 행하면 안 되죠. 세상에 말도 안 되는 걸 알려주니까, 자기 행함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 이거 땡잡은 거지, 그 마음이 어린아이 같다는 거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받들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심으로서 우리가 회개한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이 더러운 죄 속에 우리 더러운 마음속에 주께서 말씀으로 임하셔서 영생이 우리 속에서 꽃피워지니 우리가 영생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고생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