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6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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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6
이번시간에는 <요엘> 선지서를 하겠습니다.
별로 안유명한 선지서입니다. 1270쪽에 있습니다. 별로 안유명 하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도 별게 없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엘서의 내용이 그대로 사도행전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와있는 요엘서의 내용들은 요엘서 2장 28절부터 32절까지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것이며)
사도敾?2장에 보면 갑자기 놀라운 예상치도 못한 변화가 예수님이 제자중심으로 예수님이 승천하고 난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희한한 일들이 벌어 집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떠났다고 해서 예수님의 일이 중지되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연속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예수님만이 예수님의 일을 한다는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에게 붙잡힌 사람들도 연속적으로 예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들의 말을 사람의 지어낸 말로 안들으시면 되겠다는 식으로 사도행전이 정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금 제가 이야기 한대로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사람이 지어낸 말이 아니고, 주님께서 지금 일하고 있는 것이 다만 말하는 사람이 제자들이라는 그 차이뿐 그들의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그대로 들어 있어서 예수님처럼 그들이 말씀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상당히 신기한 이야기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영이 들어 있는 사람은 그 가치가 갑자기 업그레이드 되고 상당히 높은 가치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이미 예언을 했는데요. 사람들에게 체포될때에 명심을 해라. 어떤 명심인가 하면, 본인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내가 아님을 성령이 들어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0:18-20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것을 일반화시키고 싶은 유혹이 불쑥 불쑥 들겠지요. ‘내가 어떻게 하면 그런 능력을 행사할수 있을것인가’ 라는 상당한 유혹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돈을 주고 그 능력을 얻고자 하다가 혼이 났습니다. 아주 혼이 났어요.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이 임하냐 안임하냐 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본인도 알지만 또 알고 있는 집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마, 마귀였습니다. 마귀는 사람을 알아 보는데 귀신입니다. 천재예요. 도사입니다. 그래서 성령받지도 않았으면서 남 성령받은 것 흉내내는 사람들, 연기하고 연출하는 사람들을 쉽게 골라내고 가려내지요. 악령이 이땅에서 활동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이런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어쨌든 사도행전 2장은 “예수님의 일하심의 새로운 방식의 전개”라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일하심이 곧 예수님이 그냥 손으로 만지면서 육체로부터 전도하면서 했던, 예수님이 실제로 땅을 걸어다니면서 했던 그런 방식이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는 것 뿐,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변동사항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예수를 한물 간 과거의 인물, 연개소문이나 주몽정도로 압니다. 이제는 잊혀져도 상관없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존재로 간주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런 불신자들을 아주 더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서 이제는 예수가 하나가 아니라 천이되고 만이 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내보이고 있는 겁니다. 손오공이가 하나이면 참 다루기 쉬운데 손오공이 한 천마리가 되어 버린다면 참 다루기 곤란하지요. 매트릭스 3에 보면 그 스미스 요원들이 왜 그리 많은지. 이성희집사님처럼 안경하나 뒤집어 쓰고, 전부다 이리 저리 피하면서 돌아다니는데 당해 낼수가 없는거예요. 하나를 죽였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멈추는게 아니잖아요.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가시고서는 계속해서 예수님이 일 안하시고 예수님을 대신해서 왜 성령이 임한 사람이 등장하느냐는 것은 바로 요엘선지서의 내용을 예수님이 주의 이름으로서 성취상황에 세상을 놓이게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요엘 선지자가 이야기 한 것이 다 성취되었다는 것이고 빈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예수님 그대로 한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이 “아 요엘 선지서의 말씀을 예수님이 다 이루었구나”라고 동의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 역사에서 어떤 신기한 일이 일어나고 그들이 이야기 하더라도 예수님과 관련된 일을 하면 그들은 전부다 거부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지 않기에, 예수님이 복음 전하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보지 아니하고, 그것은 예수에 의한 광신도들의 작당에 불과하다고 생각들을 해 온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약간 복잡하게 또 하나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을 살필수 있습니다. 뭐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복음을 전하는 것도 성령의 일이지만 그것이 성령의 일인지 아닌지도 해석해 내고 판단해 낼수 있는 것도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담게 하는, 자기의 것도 아닌 주의 것인데, 그 안에 성령이 계셔서 복음을 말하게 하는 것도 성령의 일이지만, 그성령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그것도 성령의 일이라는 거죠. 성령께서는 말하는 것과 해석 전체를 다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내말을 들으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만일 어떤 사람이 사도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사도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그 이유로 인해서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요일 4:5,6) 즉 사도의 말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사도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는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대신해서 새로운 권위가 부각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죠. “사도”. 이 사도로 말미암아 성경말씀이 완성이 됩니다. 늦게 오신 분이 얼굴이 빨갛게 되어서 오셨는데 어디 다녀 오셨기에 저렇게 빨갛게 되어 오셨나 모르겠는데 성령받았기 때문인가요? 그래서 사도가 죽고 난 뒤에는 성경말씀이 없지요? 없습니다. 마지막 성경책은 사도요한에 의해서 기록되고 끝납니다. 그러면 사도가 없는 상태에서 복음을 담게 하는 것은 성령이 할것이고, 그 사도가 전했던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해석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이로써 성경과 그 해석은 여전히 감추어진 비밀로 존재하게 됩니다. 성령이 아니면 그 비밀을 헤쳐낼수가 없어요. 이렇게 감추어진채로 들을귀 있는자만 듣게 해서 자기백성을 골라내는 방식은 <다니엘>에도 나오는데, 거기에는 숫자풀이로 나옵니다. “1290일의 해석을 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왜 해석이 비밀이 되느냐? 해석이 비밀이 되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하는 모든 일이 비밀스러운 일로 진행하기 때문에, 같이 비밀스러운 그 통로로 마중을 나가지 아니하면 그 해석은 계속 비밀로 되고, 그것은 풀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요엘>선지서에서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요엘 2장 32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여기에 보면 문자적으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바뀌어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행 2:21).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래서 너희가 엉터리라는 거야”라고 나오고, “너희가 여호와의 이름이 예수이름으로 바뀐 것을 모르기에 성령에 속하지 않은거야”라고 하면서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완전히 쫙 구분지어 집니다. 여호와에서 예수님으로 바뀌는 것이 인력으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력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기독교 신자를 학대한 것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수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일에 동조했고, 주동까지 했고, 그 뒤에 많은 사람을 잡아 죽였으며, 그 가족들까지 잡아 죽이고 계속 죽이기 위해서 체포해 나가는 그 사울의 용감한 행위에 대해서 충분히 우리는 종교적으로 이해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 <요엘>에 따르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되어있기에 여호와라는 이 이름은 고정되어야 하고 달라져서는 안된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뭐냐 그 여호와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달라졌다고 아예 우기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 성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빼버리고, 자기가 신봉하는 신인 부활했다고 하는 예수를 집어 넣어 놓고 하는 말이 “그러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되었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겁니다. 그런식으로 우기는 고집쟁이들에 대한 대처는 미를 들고 조지는 식으로 하는 수밖에 없지요? 그런 고집쟁이들은.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에 방해세력일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그들을 잡아 죽이려고 가다가 다메섹에서 진짜 주님이 나타날 때 사울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합니다. 이게 앞뒤가 안맞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근호야 네가 누꼬”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똑같은 소리 아닙니까? 주는 주지 뭡니까? 그런데 그 묻는 취지를 예수님이 아시죠. “하나님은 누구십니까”라고 할때 “나는 나다”라고 대답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답입니다. “본인은 본인이야” “나는 나다” 이말이죠.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이것이 공식인데, 여기서 “나는(주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즉 “나는 얼마전까지도 지상에서 생존했던 실존인물 예수다”고 했을때 사도바울은 모든 구약성경을 다 뒤집어 버리고, 해석을 새로 하는 겁니다. 어떻게 뒤집냐 하면 “나는 해석할 자격이 없는 사람인줄 이제 알았습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해석은 주의 영이 임해야 해석할수 있지 나는 해석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그 해석이 불가능한 나를 일컬어서 “육”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육”이라는 개념은 근육질 혹은 삼겹살이라는 뜻으로 사용을 하면서도 육이라는 개념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영을 받지 않은 모든 것을 가지고 육이라고 하는 겁니다. 영을 받지 않은 모든 것이 다 육입니다. 사도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니라”(요 3:6)고 해서 육과 영을 구분합니다. 이제부터 모든 구약성경 신약성경 전부를 육으로 해석하지 말고 영으로 해석하라는 새로운 성령의 요구가 도착하는데, 이렇게 되려면 육의 해석이 뭔지를 알고 있어야 “아하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라는 말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육의 해석에 대해서는 우리가 따로 연구할 필요 없이, 성령받지 않고 해석해 내는 모든 것이 다 육의 해석입니다. 간단한 문제지요.
더 간단하게 말해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해석한 대로 구약성경과 예수님을 해석하지 아니하면 그 모두는 다 육의 사람이고 저주받을 사람입니다. 이 말을 달리 이야기 하면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는 갈라디아서 1장 8절의 말씀에 함축되어 정형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모든 것이 육의 해석이라면, 그러면 성령받은 해석은 뭐냐라고 할때 사도바울은 “내가 받은 해석만이 성령받은 해석이고 그 외에는 해석이 아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해석, 사도요한의 해석등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따로이 점검 받을 필요 없을 정도로 그들도 나를 인정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베드로 후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바울사도에게 뭐라고 합니까? “사도바울의 편지는 함부로 풀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풀어야 된다”고 합니다(벧후 3:15,16). 성령에 의해서 풀었다면 그 결론이 로마서 갈라디아서의 결론과 일치가 될 때 비로서 성령받은 해석이라고 “딩동댕”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제가 아까 육의 해석과 영의 해석, 양쪽을 다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육의 해석에 대해서는 그 정보가 나무 많아서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복음을 모르는 해석은 다 육적인 해석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것은 성경 어느 구절을 대든지 간에 육적으로 해석한 그 열매가 사도바울과 다른 복음이 튀어 나오게 하는 원인 제공이 되는 것입니다. 상당히 논리적으로 단촐해요. 제가 말은 길게 했지만 매우 간단한 겁니다. 사도바울과 일치되지 않은 복음을 전하면 전부다 육적인 해석입니다. 얼마나 간단해요. 그런 육적인 해석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이 그것을 알수 있느냐 하면 사도바울과 동일하게 영적인 해석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아 저것은 이단이다’고 판단할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과 같은 성령을 받아야 만이 사도바울의 복음에 대해서 동의를 할수 있습니다. 만일에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사도바울의 복음에 대해서 동의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해석, 사도바울의 복음이 뭐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지금도 이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 이야기로 책을 내도 몇권을 써야되는 이야기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짧은 문장속에는 이 구원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고 항상 우리와 상관없게 되어 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주의 이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주의 이름외에 다른 사람의 이름에는 구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주의 이름만이 독점적으로 구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주의 이름이 주의 이름만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넘겨다 주면 비로서 우리는 구원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주의 이름, 우리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이기에 우리 이름, 아담의 이름은 완전히 구원에서 배제되는 거예요.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고 싶다 할지라도 주의 이름이 제공해야만이 구원이 되지, 다고 다고 하면서 졸라댄다고 해서 주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예요. 주의 이름에 의해서만 구원이 된다는 사실의 하나의 증거로서 고백되어지는 사람은 요엘 2장 32절의 완성태, 성취된 상태에 합류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요엘 2장 32절을 해석하라고 하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에 대한 해석인데 “이것이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까” 라고 물을때 “성령을 받은 사람에 한해서만 여호와의 이름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이 주어지고 그렇게 받을때만 구원이 성립됩니다”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왜 여호와의 이름은 안됩니까?”라고 묻는다면 여호와의 이름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것은 전부다 육적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왜 당신이 함부로 그렇게 단언하십니까?” 바로 사도바울이 한때,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호와의 이름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렇게 우기는 것이 정당하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여호와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가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줄을 알아서 요엘에 나오는 2장 32절의 말씀을 예수 이름으로 다 바꿔 버렸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그 바꿈에 대해서 동의를 못하기에 그 사람은 여전히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증인”은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그 밖에도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많이 떨어져 나갑니다.
첫 번째는 여호와의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바뀐다는 그점을 성령의 역사와 연관지어서 말씀드렸고, 두 번째로 왜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이 되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하는 일이 있는데 그 일이란 거룩한 전쟁입니다. 주의 이름이란 전쟁의 용사입니다. 주의 이름의 특징은 주의 이름을 가지고 개입하는 그 현장에는 반드시 전쟁이 벌어지게 되어 있고 그 전쟁의 상대자는 뱀의 자손 곧 악마입니다. 영적전쟁입니다. 특히 폰라드 같은 신학자가 잘 밝혀 놓았는데, 그것을 “거룩한 여호와 전쟁”이라고 합니다.
“목사님! 왜 우리가 우리이름으로 주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못받습니까?” 우리는 이미 영적 전쟁의 주체자가 되지 못하고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포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전쟁의 주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벌일 입장도 못되고 갇혀 있는 입장이고 전쟁을 벌여서 갇혀 있는 포로된 것을 자기편으로 빼내주는 것은 주의 이름이, 그 이름을 걸고 하는 전쟁외에 이 세상에 다른 전쟁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적이 누군지를 몰라요. 우리는 원수 두는 것을 싫어해요. 우리는 서로 좋게 지내기를 원하지, 철천지 원수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윤리에 상당히 부담이 됩니다. 사람이 얼마나 인간성이 더러웠으면 원수와 적들이 많겠나 하는 식이 되거든요. 사람이 얼마나 좋으면 그 사람에게는 적들이 없고, 참 성질좋고 남들이 다 좋아한다는 식이 되고요.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거룩한 전쟁에 속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해서 좀 구분좀 지어야 되지요. 구약성경에서 이름이 개입되는 것은 반드시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주의 이름에 대해서 우리가 어디까지 알아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이는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까지 알아야 되고 구약성경전체가 다 뒤집어 져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이 전쟁 이야기를 할때, 제가 쉽게 여호와 전쟁이 있었던 멋들어진 사례를 제가 이야기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겁니다. 그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장면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승리하면서 하는 고백이 있는데 사무엘상 17장 47절에 보면 “또 여호와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짧은 문구로 되어 있는데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뭐라고 되어 있지요?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것인즉”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는 말이죠. 내가 악마를 이기고 싶다고 해서 나선다고 전쟁에 넣어주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전쟁은 순수하게 여호와께만 전담된 것입니다. 그쪽이 전담반입니다. 수사전담반 따로 있듯이 전담반 저쪽이예요. 전쟁은 그쪽 소관이예요. 여호와 소관입니다. 우리 소관이 아니예요. 우리가 이땅에서 힘들게 살면서 어렵다고 해서, 우리가 전쟁벌여서 그 전쟁의 힘으로 우리가 구원된다 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소리입니다.
역대하 20장 15절을 한번 봅시다. 여기는 한수 더 뜹니다.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1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것이 없나니” 야아! 정말 이거 믿음이 있는 것인지 완전히 자포자기 하는것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됩니다만,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국가를 보위해야 할 책임자가 말을 너무 함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적들이 연합군을 형성해서 막강한 대군이 밀려 왔는데 기껏 한다는 소리가 - 물론 여호사밧이 한것도 있고 제사장이 한것도 있지만 어쨌든 다 동의한거죠 - “이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 속했기에 우리가 할게 없다”는 겁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모세에게 반항을 했습니다. 적들이 뒤에서 따라 오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할때 출애굽기 14장 14절에 그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라”입니다.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쉿! 한글자로 쉿! “가만히 있거라” “가만히 있거라”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애들 까부는 것을 보면 알수가 있어요. 애들이 가만히 있을때는 병이 들었든지, 잠이 오고 있든지 할 경우입니다. 뭔가는 컨디션이 안좋을때 가만히 있어요. 보통은 까불어야 건강한 아이거든요. 그 애가 장성해서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니까 오죽 까붑니까? 어떤 부인은 남편보고 하는 말이 “당신 교사 생활을 오래 했으니 이제 그만 퇴직금 챙기고 연금을 받아서 모세처럼 가만히(조용히) 있거라”고 합니다. 참 쉽게 보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예요. 돈좀 있으면 주식투자 해서 말아먹고, 로또사고, 땅 사서 사기 당하기도 하고 가만히 있을수가 없어요. 가만히 있을수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이 가만 있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 것도 오랫동안 연습하면 그것조차 능숙해집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백수들이죠. 대단한 노하우가 있어요. 백수십계명. 백수노하우. 백수 일기쓰기. 그런데 이것을 하루 아침에 습득할 수가 없어요. 오랫동안 놀아봐야 노는 데서 오는 고매한 철학을 느낄수가 있지요.
그런데 막 직장을 그만 두고는 가만히 노는 것이 힘듭니다. 일을 벌이고 결국 망해버리는 식으로 갑니다. 항상 망하고 난 뒤에 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깨닫곤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 말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가만히 좀 있어도” 그말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이방의 일반종교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설쳐대는 것이 얼마나 육적인 해석, 성경을 육적으로 해석했기에 설쳐대느냐 이말이죠. 가만히 있어도 해주는데 왜 설쳐대드냐 이말이죠. 만일 가만히 있지 않고 구원받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식당에서 힌옷입은 아주머니들이 밥을 알아서 배식하고 있는데,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배식하는 곳으로 들어가서 단무지 마구 퍼넣고, 이것저것 끄집어 내서 더 얹고, 자기가 막 설쳐댈때 그 아주머니가 주걱 가지고 패면서 “가만 있어 내가 알아서 퍼줄게 주는 밥도 못먹나 주는 밥도” 우리는 자기가 구원받아야 되요. 자기가. 헌금 해야되고, 십일조도 해야되고, 전도 해야되고, 예배참석 해야되고, 큐티 해야되고. 자기가 구원받아야 되요.
그것이 얼마나 성경 전체를 육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까? 육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걱으로 한대 맞으면 잠시 잠잠 하다가, 다시 또 ‘불안하다. 오늘밤 죽으면 지옥갈까 싶다’고 자기가 지레 겁을 집어 먹습니다. 그래서 성령받은 사도바울이 늘 부탁한 것이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가 있는데 뭐 그렇게 요동하고 안절부절하고 그러냐 십자가가 있는데!”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이미 십자가가 있기에 자기는 전혀 요동할 필요가 없고 전쟁은 이미 끝난 상태라는 겁니다. 종말이 아니라 누가와도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러한 사도바울과 동일한 해석을 하는 사람만이 성령받은 사람이예요. 그 외에는 아니예요. 갑자기 조용해져 버렸네. 아멘 소리도 안들리고. 성령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가 본데.
여호와 전쟁에 대해서 조금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와전쟁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전쟁의 주체자인 용사가 여호와 주의 이름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그 특징이란 그 공로를 인간에게 나누어 주는 주의 이름으로 벌리는 전쟁은 없어요. 인간이 나름대로 어떤 공로를 자기도 가질수 있는 주의 전쟁은 성경에는 한군데도 없습니다. 모든 공로가 오직 주의 이름으로 돌아가는 경우에만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벌인 전쟁이예요. 시편 8편에 보면 전쟁 승리로 인하여 찬송을 부른 가사가 나와 있습니다. 온땅에 주의 이름을 높인다고 하는데 젖먹이와 어린아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을 높아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8편 1,2 여호와 우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저쪽에는 강한 장정들이 나올때, 주님쪽에서는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아말렉과 전쟁할때에, 그 밑에서 여호수아가 칼질하는 것은 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헛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상 전쟁이 결정나기는 산위에 있는 모세의 지팡이로서, 모세가 지팡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그것에 전쟁 승리가 달려 있었던 거예요. 지팡이를 들었다 하는 것은 지금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고 너희들은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예요. 그런데 이걸 육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는 주의 종이다 하면서 지팡이를 들고 산위에 올라간다’는 이런짓을 하는 겁니다. 그것은 흉내내는 것인데 부흥사들이 그걸 흉내낸다고 무엇을 합니까? 아론과 훌의 이야기를 하면서 장로가 옆에서 목사를 받쳐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부흥회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장로가 두명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게 되죠. 왜냐하면 양쪽으로 받쳐 줘야 하니까요. 장로가 한명뿐인 장로는 이것이 잘 안되잖아요. 오른쪽과 왼쪽에서 같이 받쳐줄때 목사의 지팡이가 안내려오듯이 장로가 되었으면 목사를 받쳐줘야 교회가 부흥되는데 올라가는 지팡이까지 장로가 끌어 내리면 교회가 부흥될 리가 있냐고 합니다. 교회가 헌금을 내지 않는 것은 장로들 책임이라고 할때 무식한 교인들은 그말도 주의 종의 말인양 귀담아 듣습니다.
지금의 전쟁의 주체자는 모세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요.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일을 처리하시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벌인 전쟁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어떤 공로도 돌아가지 않는 방식으로 전쟁이 진척됩니다. 그것을 “붙이시매”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근육통)파스를 붙이는 식이죠. 그러니까 파스에 해당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고, 파스를 붙임을 당하는 그 거대한 몸체는 이방나라예요. 주님께서 파스를 그 덩치가 크고 군사력이 강대한 이방나라에 붙이려면 그 파스를 붙이기 전까지의 파스는 얼마나 겁을 집어먹겠습니까?
이스라엘 - 주여! 저것이 덩치가 나보다 큽니다.
여호와 - 너는 파스야 그냥 붙이기만 하면 된다.
이스라엘 - 아닙니다. 저 덩치에 우리가 이길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붙였더니만 그 덩치큰놈이 파스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고, 파스가 덩치큰놈을 끌고 가니 그 파스된 입장에서는 모든 영광을 주께서 하셨다는 식으로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한두번 승리하고 난뒤에는 그 파스가 자기 파스를 자랑한다고 “내 파스 아니면 큰일날뻔 했다”고 나오면 주께서 그 파스를 떼어버리고 다른 것을 집어 넣어 버립니다. 파스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붙이는 그 순간에 “나는 죽어도 마땅하고 모든 일은 주께서 하십니다”하는 고백을 하도록 붙여 주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여리고성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리고성 무너질때 무너지는 이유? 일단 소리를 질렀으니까 음파가 모여져서 갑자기 공명상태를 일으키면서 무너졌다는 것은 물리학자들이 그렇게 지어낸 이야기인데, 노래는 그냥 부르라고 부른것이고 노래를 불렀든지 뺑뺑이를 돌았든지 어떤 일을 했든지간에 그 여리고성 무너짐에 대해서 어떤 효과도 줄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노래는 왜 부르고 언약궤를 앞장 세워서 돌고 도는 이유는 이미 무너졌다고 가상했을때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찬송이죠. 그것을 미리 당겨서 한것입니다. “이미 승리했습니다”라고 당겨서 한것입니다. 여리고성 안에 있는 적군들은 그것 보고 ‘또라이’라고 합니다. 전쟁을 하지도 않고 이미 승리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겁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미 전쟁의 승리가 내장되어 있는 그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다면 저것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한겁니다. 그것을 미리 눈치챈 사람이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대단한 신학자지요. 칼빈보다 더 셀거예요.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 얼마나 간단한 신학인데 얼마나 놀라운 신학입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앞에 당할자가 없다고 합니다. <요엘>선지서의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것이 어느대목에서 툭 튀어 나왔느냐 하면, 그 앞뒤 대목에 여호와의 전쟁이 마지막 결전을 치룬다는 그런 통보가 오고 난 뒤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소리가 나온 겁니다. 요엘 1장 15절에 보면 “ 오호라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보세요 여호와의 날이잖아요.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날이니까 무슨뜻입니까? 인간이 주도권을 쥘수 없는 그러한 순간이 왔다는 거죠. 모든 시간이 인간을 위한 시간이었는데 이제는 인간을 위한 시간일수 없는 그런 시기가 온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맘대로 보낼수 없는 시간이예요. 오히려 인간을 치는 시간, 인간의 시간을 치는 시간. 인간의 역사를 치는 역사. 인간의 역사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서 치는 새롭고 돌발적인 역사. 어떤 시간대. 어떤 사건. 그것이 이름하여 여호와의 날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린 죽었다” 이말이거든요. 그 죽었다는 말이 “오호라”입니다. 좋을 것 같으면 “오호라”하겠습니까? “큰일났구나” 이런뜻이지 환호성을 지르면서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호라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요엘 1:15)
전쟁을 하시는데 일단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답게 될 때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른 민족을 치는 방식이 정상적인 코스인데, 지금 하나님께서 그 코스를 밟지 않고 직접 유다나라에 쳐들어 왔다는 이 말은 이제는 유다나라조차 전쟁의 주체자가 될 수 없고, 즉 유다도 하나님의 백성도 믿을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처리할만큼 다급한 시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다이기 때문에 구원받는데 있어서 이득이 있다는 그런 생각은 말아라는 뜻입니다. 어떤 직업이나 특히 목사라든지 하는 인간쪽에서 유리하다는 어떤 조건은 일체 계산에 넣지 말라는 겁니다. 모든 자가 이제는 여호와 앞에 다 적으로서만 존재하죠. 그날은 여호와께서 분노하는 날이기 때문에 요엘 2장 2절에 나오지요.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그 다음에 2장 31절에 보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이것이 2장의 여호와의 날을 설명하는데 멋들어진 표현이예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한다는 말은, 조명기구가 꺼진다는 말이죠. 이제 분위기가 파장분위기라는 말입니다. 여기 불한번 꺼보세요. 촬영하는데 불끄면 안되죠? 한 2초만 불한번 꺼보세요. “오호라!” 다시 켜세요. 그러니까 조명을 껐다는 이 말은 이제는 전을 거두겠다는 말이예요. 하나님께서 아예 이 세상을 상대로 장사를 그만하겠다는 식으로 아예 철수하는 겁니다. “어이 어이, 차라 차라 이제 이 세상 끝장내고 이제 이사갈란다” 추수할때가 되었다는 식으로 그냥 파장 분위기입니다. 파장분위기. 모이던 사람 흥청거리는 것도 다 없어지고, 웃음소리가 넘치는 것도 이제 슬슬 다 빠져서 아무도 없고,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요.
이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동안 해와 달과 별들이 배치되어서 조명기구처럼 그 역할을 했는데, 그 배치된 조명기구가 언제까지만 유효했느냐하면 그 유효기간이 마지막 여호와께서 개입해서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때까지만 한시적으로만 비쳤던 조명기구들입니다. 그것을 설치되었던 것을 하나씩 빼는 거예요. 달빛이 어두워지고, 햇빛이 어둡다 이말이예요. 그런데 이방나라들은 조명기구만 쳐다보면서 그걸 신이라고 여긴겁니다. 해가 되풀이 해서 뜨니까 자연이 마땅히 나에게 베풀어줘야만 될 혜택이라고 여기고 있지 종말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겁니다.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가 동일하니까요. 여기서 육적인 해석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거죠. 계속 해 봅시다. 지금 <요엘>서를 하고 있습니다.
요엘 3장 15절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이렇게 나오는데 이 <요엘>서에서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뭐냐면 20절 21절입니다.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 이게 중요합니다. 여호와가 어디에 거한다고요? 시온에 거합니다. 시온에. 여호와가 시온에 거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이 시온에 대해서 무시했던 세력들에 대한 단호한 조치로서 종말이라는 이름으로 처리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것을 결론을 내려 보면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렇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전쟁을 벌였는데 전쟁을 벌인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시온에 하나님께서 자기자리를 잡으시고 그 시온에서 자기가 구원한 백성과 영원히 둘러싸여서 거룩한 성산을 이루는 것 이것을 목표로 그동안 여호와께서 전쟁을 해 왔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해 오셨다는데 그것조차 사도바울은 어떤 입장이라고요? 육적인 해석이라고 하지요. 영적인 해석은 뭐라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름으로 무뤂을 꿇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고자 하는 빌립보서 2장 11절의 말씀이 이제는 나사렛 예수로 말미암아 이제는 마지막때를 치닫게 됩니다. 출애굽기 15장을 한번 볼까요? 17절, 18절입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실래요?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시죠. 왜냐하면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기 위함이죠. 주의 처소안에서 백성들이 둘러싼 그 안에서 영원한 성소를 이루시기 위해서 출애굽기 15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용사이신데 그 용사의 정체가 뭐냐면 그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말은 주님의 목적, 주님의 이름으로 벌이는 그 목적에 대해서 초청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회단체에서나 혹은 기업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요구하는 적이 없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요구하는 분은 주의 이름 그분밖에 없죠.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하나의 파스처럼 척척 들러 붙어서 주의 이름을 증거하는 용도로 사용되어지는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그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은 방앗간 주인이었어요. 아무것도 할수 있는게 없습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너는 용사다”(삿 6:12)고 해버립니다.
기드온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적을 베풀어주면서 데리고 일을 벌이는데 그들은 전쟁할 때 “여호와의 칼이여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쌍칼을 내미는데 나중에 내미는 것을 보면 쌍칼이 아니고 횃불하고 항아리뿐입니다. (삿 7: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은 어떤 공적도 인간에게 돌려지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공적도.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장수로 등장한 기드온을 임금으로 삼겠다고 하면서 "당신의 아들들이 대대로 우리를 다스릴것입니다”(삿 7:22) 기드온이 말렸어요. "저 아저씨들 제가 한 것이 아니거든요. 저 그거 싫거든요. 저 그냥 조용히 살고 싶거든요” 기어이 왕으로 삼아서 음란하게 섬겼다는 결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이 육적인 해석이고 바로 그것이 여호와전쟁의 공격대상이 되는 겁니다.
<요엘>서에 나오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말은, 진짜 가만히 있으면 구원해준다는 말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은 특징이 “가만히 가만히 가만히”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가만히 라는 말은 설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어떤 것을 해도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살아서 일을 하셨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열두제자가 다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가룟유다를 빼놓고는 다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성도라 할지라도 불쑥 불쑥 나오잖아요. 그때는 주께서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늘 못박아서 “너는 이미 죽은자며 파스이며 내가 너를 사용한다”는 것을 순간 순간 깨닫게 해서 “아하 내가 이런일을 하는것도 주께서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한 일이지 이것이 전쟁에 관한 것인데 주께서 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시킨 일이구나”하게 됩니다. 주께서 시킨 일이기 때문에 모든 공로를 주께 돌릴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끝으로 베드로전서를 보고 마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인데 여러분이 이걸 잘 아십니다마는 참 읽을때마다 새롭죠. (벧전 4:10,11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가 이런 것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받는 이유가 우리는 일을 해도 주께서 시켜서 한일이기 때문에, 모든 영광은 주님으로 인하여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종이 일했다고 해서 대접받습니까? 마땅히 종은 해야 될 일을 했을뿐입니다” 라는 것이 마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이고 주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지금까지 한 강의를 다시 한번 정리를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아모스>인데 그 핵심은 하나님께서 유다나라의 속을 지나가면서 심판을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개별적인 심판이 아니고 집단심판을 해서 어떤 사람도 남은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최후에 남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장막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지기에 어떤 인간도 자기가 구원받을만 해서 남아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호세아>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특이하죠. 남편이 새롭게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아내라는 새로운 신분이 드러납니다. 남편이 “내가 남편이다”라고 하기 전까지는 아내가 없었어요. 그런데 남편이라고 하는 그 순간부터 “그 전부터 자신은 아내였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그때부터는 이스라엘이 사랑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버립니다. 이스라엘전체가. 사랑시스템은 남편의 일방적인 사랑이 와서 납치해서 구원하는 식입니다. 구원받는 쪽에서 어떤 행위도 보탤 필요조차 없다는 거예요. 남편의 사랑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내쪽에서 미안하니까 뭘 좀 보탤까”라고 보태서 구원받는 법은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만 넉넉하고 그것으로 끝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간음죄를 통해서 심판 받고 안받고가 결정되는데, 그 간음죄란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간음한 것으로 여겨서 저주받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고전 16:22). 그것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남편과 아내의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겁니다.
<이사야>의 특징은 깜짝 놀래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놀래키는가? “네 죄가 주홍같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지리라”고 깜짝 놀래키는 겁니다. 이사야가 자기는 잘났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성전을 다 보고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하면서 깜짝 놀래는 겁니다. 깜짝 놀래키는 이유는 노선이 달라서 그래요. 어떤 노선이냐 하면 기존의 아하스 노선은 역사노선입니다. 우리한테는 훌륭한 왕이 올것이라고 했는데 이사야를 통해서 남은자가 등장하면서 노선이 남은자를 통해서 하나는 전라도로 하나는 경상도로 쫙 갈라져 버려요. 대전이 <이사야>고 대전에서 만약에 경상도로 가는 것이 천국이고 전라도가 지옥이라면, 갑자기 경상도로 빠지는 그 노선에 한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 아기는 성장하지 않는 아기입니다. 계속 아기로 남으면서 영원한 왕노릇을 합니다. 평소에 이사야에 대해서 반발했기 때문에, 이사야를 거부했기 때문에 생성된 어떤 징조로서 태어난 한 아기, 우리가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한 아기, 그 아기가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의 한 아기. 그 아기가 성장해서 뭘 한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 아기로서 이 세상 역사를 지적하고 고발하는 묵시적 기능을 하는 겁니다. 나중에 역사에서 그들이 싫어하는 고레스왕이 메시아로 등장하는 희한한 일이 벌여져 버립니다. 그때 비로서 우리가 역사를 잘못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임마누엘이 대신 채찍맞아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죠. 이사야의 특징은 깜짝 놀래키는 겁니다. 그리고 역사는 끝나고 묵시의 세계로 접어 들어서 새하늘과 새땅과 새로운 하나님의 의로 하늘에서 장마비 오듯이 퍼부어서 구원받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중간시험 보듯이 정리하겠습니다.
<미가>는 시온관리담당자가 시온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이방민족이 딸려오는 식의 능력적인 시온성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시온성을 관리하는 인간들이 기껏 한다는 일이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제물을 바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시온성이 관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께 관리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뭐냐하면 하나님의 사랑, 인자의 희생을 다 보여주는 것이 진짜 시온을 관리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이 못하고 나중에 오시는 메시아가 하는 거죠.
<예레미야>는 말로 하면 너무 어려워서 그림으로 그려야 하는데, 예레미아는 다른 선지자하고 달라서 하나님의 계시가 내려오면 다른 데는 그냥 기계적으로 그냥 전하는데, 예례미아는 이것이 내부로 들어와가지고 예레미야의 내부에 있는 반발심과 만나면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예레미야의 내부가 반발합니다. “하나님이여 못전하겠습니다. 나는 이거 전하다가 완전히 쪼다 다 되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전할 것 같으면 아예 나의 태어난 생일을 저주했으면 얼마나 좋아겠습니까 나는 아예 내 엄마가 나를 죽였더라면 좋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반발하는데 이런식으로 반발했다는 자체가 이미 성령받은 사람이예요. 이게 구원받은 사람이예요. 하나님께 반발한다는 것 자체가 구원받은 사람이예요. 이런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이 새로운 것이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나올때 바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그 관계가 옛언약에서 새언약으로 교체되는 그 상황을 예레미야가 인격적으로 다 보여주는 겁니다. 옛언약은 뭐냐? 옛언약은 십계명이고 애굽에서 나올때 주어진 계명인데 계명을 지켜야 할 주체자가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작용하는 그런 시스템이 옛언약이라면 새언약은 말씀을 지키는 주체자가 따로 존재해서 그분이 다 이루어서 우리에게는 다 이룬 것을 가지고 아예 우리를 죽여버리고 죽은 우리에게 심어줘서 영생을 얻게 하는 방식이 새언약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새언약시스템에서는 내가 주체가 되어서 뭘 하는 것이 있을수가 없어요. 주신 은사대로 맡긴대로 그 호흡가지고 살면 되는 거예요. 살면. 그게 새언약시스템이며 <예레미야>예요.
<에스겔>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다 인간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고 나 하나님을 위함인줄 잘 알지?”라는 뜻입니다. 참 <이사야>를 하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빠뜨렸는데, 하나님이 하나님을 치는 방법으로 구원한다는 그 사실을 놓치면 안됩니다. 그것이 상당히 중요한 건데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치는 방식으로 그 효과로 구원된다는 사실입니다. <에스겔> 계속 해보면, 그렇게 해서 성전이 바뀌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처음부터 이방민족의 땅이었고, 거기 있는 성전도 다 가짜인데, 이제는 하나님이 직접 성전을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세운 성전에서는 비로서 하나님의 온전한 거룩이 보장이 되고, 무덤을 열고 거기서 끄집어 내는 식의 그런 놀라운 효과가 그 성전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죠. 따라서 주의할 것은 그 성전은 절대로 내가 성전되려고 애쓰는 것은 성전안에서는 있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거울닦듯이 반들 반들 닦아서 성전되고자 하는 노력은 가짜성전들이죠. 진짜 성전은 그래서 되는 것이 아니고, 매일 같이 우리를 죽은자로 확인시킴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갈 2:20)는 식으로 확인되는 것이 진정한 성전이다는 말이죠.
<요엘>은 하나님의 모든 종말은 계획된 것이고 그것이 한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이름이 벌이는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에, 영적전쟁이 마감하게 되면 이제는 파장 분위기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집에 가자 가자. 불끄고 집에 가자” 조명도 꺼지고 이제는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구성되어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끝!
'저서 & 기타(이근호) > 종말론 : 끝을 기억하라(선지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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