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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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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2

두 번째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선지자가 등장했다는 것은 기존의 하나님관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데, 어떤 것이 잘못 되었느냐?  보통 잘못 되었다는 것은 만약 A하고 B가 잘못 되었다면, B도 알고 C도 알고 둘 다를 아는 상태에서 ‘둘이 이런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렇게 해 줘야 이것이 잘못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A쪽은 선지자에 의하면, 교재 3페이지 끝에 보면 아모스 3장 3절이 나오지요.  “두 사람이 길을 같이 간다면 미리 약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는 A가 하나님 쪽이라면, 하나님 쪽에서는 두 분이 약속되어 있는 거라면, 두 분이 길을 같이 간다면 이미 약속되어 있다 해서, 여기 약속이 있는데, 약속 안의 내용이 뭐냐?  하나님이 하나님을 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치셔서 이것을 구원의 근거로 삼는 것이 하나님 쪽에서의 일이라면,

이쪽에서는, 인간 쪽에서는 뭐냐 하면, 인간이 자신의 구원 욕구, 축복, 영생 다 마찬가지인데, 그 욕구를 보여주므로 구원이 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내용이 달라요.  여기는 뭐가 빠졌는가 하면 “치신다.” 치시는 것이 빠져 있어요.  치심이 없어요.

이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 전에 무엇을, 아모스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6장 6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란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아픔을 모릅니다.
그들은 옆에 있는 괜찮은 사람을 왜 치시는지를 모르면서 자기는 막무가내로 구원해 달래요.  신이시여 내 정성을 다 바칠 테니 저를 구원해 주세요.  그런데 당신은 왜 맞지?  참 이상한 사람이네.  주여, 저를 구원해 주소서.  그런데 당신은 왜 터지지.  이상한 사람이네.  주여 저를 구원해 주옵소서.

근본적으로 인간들이 도저히 생각 못한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치는 방법으로 우리를 건진다는 것은 인간들은 머릿속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구원이란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거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물어도 나한테 묻고, 뭔가를 요구해도 나에게 요구할 사항이지, 나를 배제하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쳐서 가만히 있는 나를 건져낸다?  그러면 나는 소외되잖아요.  내 구원 받는데 내게 거들수가 없잖아요.

이것이 본인이 어떤 행함을 개입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만약에 나의 행함이 추가될 수 없다면 결국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성경 해석은 하나님만이 해석할 수 있지 우리 인간은 해석해도 소용없고 안 해도 소용없고, 하나 안 하나 그 해석과 내 구원은 상관이 없는 것이 되 버려요.  그게 기분 나쁘잖아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쳐서 가만히 있는 나를 구원한다는 것이 굉장히 우리를 속상하게 만들고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을 치셨는데 누가 봐도 요셉은 잘못이 없습니다.  자기가 꿈꾸려고 시도한 것도 아니고, 꿈도 하나님이 주셨고, 그 꿈대로 요셉이 인도함을 받는 것도 요셉의 의지대로 되지 않고, 요셉은 그냥 하나의 도화지처럼 계시가 오면 오는 대로 그냥 반응을 그 때 그 때 나타냈을 뿐이에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요셉의 운명은 절망적으로 바뀝니다.  절망적으로 바뀌면서 일이 꼬이면서 점점 더 요셉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성사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 가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선한 요셉이 보통사람들보다 더 난처한 지경에 빠지는 것, 그것이 바로 요셉의 아픔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본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그렇게 가기 때문에, 요셉이 깊은 옥에 갇히잖아요.  그것이 시편 105편에 보면 요셉이 아주 혼이 나요. 얼마나 시달리고 고생이 심했던지--

요셉이 자력으로 자기 꿈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 말씀을 우리 성도에게 줘도, 준 이유가 뭐냐?  이 성경 말씀 어떤 말씀도 예수 믿는 네가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므로 말미암아 여전히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 행함으로 자기를 건져낼 가능성을 발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오늘날 성도나 요셉은 하나의 낯선 인물로서 그들 속에 그냥 새겨져 있는 거지요.  

이것은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받는다는 뜻은 예수님만이 구원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만 구원되고 다른 사람은 구원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되므로 말미암아 그 몸,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바로 교회고 그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사람만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다는 말은 결국 그것이 모아지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된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는 그 순간 구원에서 떨어지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걸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 비유로 했지요.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결코 농부 되신 하나님이 원하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제발 붙어있어 다오.  이거거든요.  잘하라는 말이 아니고, 훌륭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여튼 독자적으로 있으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너는 너 혼자 있으면 가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서 있을 때 하나님이 원하는 열매가 맺힌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만 구원자가 된다는 것을 이 아모스를 통해서 명쾌하게 보여주죠.  그게 하나님이 하나님을 치시는 방법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3페이지 제일 밑에 다시 보겠습니다.  아모스 3장 3절 “두 사람이 길을 같이 간다면 미리 약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둘만이 아는 사항입니다.  둘만이 아는 사항이고, 거기에 약속을 주신 분은 약속 받은 사람을 일방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제 3자가 끼어들 수가 없는 겁니다.

아모스가 힘들게 살던지 어떻게 살던지 상관없이 아모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처지입니다.  따라서 그 두 사람을 맺어주는 것은 뭐냐 하면 약속입니다.

다시 한번 아모스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브라함의 제물처럼 간주하셔서 그 속을 통과하는데, 통과하게 되면 이것이 개별 심판이 아니고 집단 심판이 됩니다.  다 죽어라 이 말이지요.  그것을 완전히 통과하므로 다 죽이고 그렇게 해서 어떤 인간도 구원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제가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엉뚱하게 아들을 등장시켜서 아들과 우리를 비교하게 만들지요.  너로 인하여 구원 되느냐?  네가 뭘 알아서 구원 되느냐?  네가 신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것 맞느냐?  아들이 없다면, 만약에 아들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그것으로 구원되는 이 방법 외에 다른 아이디어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선지서가 빠진 상태에서의 십자가고 복음이란 것입니다.  이게 엉터리 복음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자신이 ‘나는 신이다’ 이런 식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나는 아들이다’ 이렇게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진짜 아버지는 아들 뒤에 숨어 있는 식으로만, 하나님이 감춰진 하나님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아들과 자기를 비교해서 자기를 아들한테 굴복시키고 ‘나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며 나는 구원 될 수 없습니다.’ 라고 아들에게 고백한 사람만이, 그 사람만이 아들이 있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있고, 그렇지 않고 ‘나도 아들이다’ 라고 비교대상, 경쟁대상으로 여긴다면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신은 예수님이 갖고 있는 참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신을 참된 신이라고 착각하면서 평생을 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예를 들었던 80평생을 살다가 마지막에 “애들아, 예수 믿는 것은 네가 착각한 거야.  나도 그렇게 착각했는데 이제 다 헛것이라고 자백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한 것은, 그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왜 하나님이 아들로 등장하는가?’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겁니다.

그 사람 머리 속에는 뭐냐, 신이 나타나서 내가 신과 관계하므로 써 내가 구원 받는다. 이런 공식이 꽉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 관계 속에 하나님께서 아들로 통해서만 이야기한다는 그 아들의 존재함에 대해서 왜 하나님이 직접 나서지 아들을 보냈지? 이상하네. 이런 식으로만 의아하게 여기면서, 그들은 아들이 자기와 대면상태라는 것을 모르고 그냥 아들보다는 아버지가 더 좋다고 여기는 그런 오류를 범했던 것입니다.  

결국 구원 받고 안 받고는 내 결심에 달려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달려있다는 거지요.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 안하고 자기가 기어이 신의 세계에 침투하겠다는 안타까운 노력에 불과한 겁니다.

자, 그렇다면 아모스에서는 전면적인 심판과, 이건 회복되는 것이 아니고 어차피 심판과 끝까지 가는 거예요. 구원된 사람은.  

자, 그러면 구원이 어떻게 되는가? 호세아에 보면 호세아가 정말 어려운 성경입니다.  어떤 것이 어려운가 하면 호세아의 아내라는 것은 없어요. 하나님의 아내다 라는 것이 없어요.  여러분 원래 아내라는 것이 없는데 언제 아내가 생겼는가 하면 남편이 생겨서 그 남편이 너는 내 아내라 할 그 시점에 최초로 아내가 등장하는 겁니다. 아~ 이 깊은 뜻을!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아내는 없다’ 이 말입니다.

지금 호세아를 보면서 사람들이 제일 의아해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래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남편이라면서 그 아내하나 간수 못하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호세아 본 사람들은 전부다, 내 아내는 뭐지? 내 아내는 음란한 여인이고 이러면 그 이야기를 어떻게 남들에게 이야기 합니까?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어이구 지질이도 못난 남자, 여자 욕할게 아니고, 네 아내하나 간수 못해가지고 그렇게 다른 남자 찾게 만들었어? 네가 지질이도 못났으니까 아내가 바람피우지. 이게 욕 얻어먹으려고 환장을 했어. 어디 누구 욕을 해. 이렇게 된다 말이죠.

호세아에서 진정한 의의는 뭐냐 하면 남편이 등장하기까지는 어떤 간음죄도 성사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지금 호세아서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뭐라 한다고요? 간음죄라 하거든요.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간음죄라 하는데 그것이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간음죄라고 명명하자면 남편이 남편다워야 남편이 되는 거예요. 남자가 남자다워야 남자지. 남편이 제대로 남편다울 때, 비로소 너는 이스라엘은 간음했다는 간음죄가 성립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긴지. 정말 어려운 이야기에요.

창세기에 보면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다”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그런 말을, 그런 사랑이라는 것을 하려면 남편이 먼저 있어서 비로소 남편 속에서 사랑이 나오지 처음부터 사랑이라는 건 없는 거예요. 이해됐습니까?

사랑하는 주체가 없는데 무슨 사랑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이건 IQ가 50이 안돼도 이해가 되죠? 사랑을 할 수 있는 주체가 없는데 사랑이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너는 간음했다.’ 라고 할 경우에 그 간음죄가 성사되려면 뭔가 진정한 남편이 짜~안 하고 나타나 줄 때만 간음죄가 성립되는 거고, 남편이 남편 아닐 때는 간음죄가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신을 섬기고 겉으로는 여호와를 섬기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 간음죄가 아니고 여호와를 섬기는 그 내용의 폭을 확대하려는 하나의 인간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교회 다니는데 목사가 ‘헌금을 많이 해야 복을 받지 믿음 없이 아껴서 하면 저주 받는다. 어떤 사람은 헌금 적게 해서 저주 받았다. 그러니까 헌금 많이 해라.’ 이렇게 하니까 그 소리 듣고 어떤 집사가 직장에서 뇌물을 받아 챙기는 거예요. 뇌물을 받아서 그 돈 가지고 헌금하는 이유가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목사 말은 하나님 말과 같은 거니까, 지금 하나님에게 축복받는 훌륭한 성도되기 위해서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결국 목적적으로 누가 좋으면 된다? 우리 하나님 좋으면 된다 하는 식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왔던 거예요. 여호와를 섬기면서 그 안의 모든 삶의 형태는 바알종교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바알 종교를 설명해야 하는데 이 바알 종교를 오늘 이 시간에 정리를 해 뒀으면 좋겠어요. 이 바알 종교는 어느 정도 정립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바알 신앙은요 [토지] 박경리입니까, [토지] 있지요? 얼마 전에 제가 하동으로 갔습니다. 그 촬영한 장소에 들어가려는데 들어가는데 2000원 받길래 안 들어가고 그냥 나왔습니다. 셋트가 있어요. 그 토지는 어떤 원칙이 있나 하면 노동 +신의 증여, 그냥 주시는 은혜죠. 토지라는 것은 노동 + 증여에 의해서 여기서 잉여 생산물이 나와서 이것이 경제의 가치로서 돌아다녀서 운영되는 그런 것이 바알 종교의 특징입니다.

이제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보통 이런 지우개를 생산하면요, 지우개 생산한 것은 지우개에 들어간 재료와 노동자의 기술과 노동력과 시간이 합쳐서 되잖아요. 근데 여기에 새로운 잉여가치, 부가되는 가치는 없어요. 왜냐하면 그냥 분해하면 내 노동과 이 재료값 그것 빼면 전부이기 때문에. 재료가 있었는데 이걸로 지우개를 만들었으니까 이 가치는 내꺼하고 이 재료값하고 떼놓으면 더 이상 거기엔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둘로 딱 구분될 수 있어요. 그런데 농사짓는 사람이 토지가 있고 농사지을 때 거기에 무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햇빛과 공기와 단비입니다. 이게 무상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잉여가치로서 경제가 발전하는 원천이 되는 거예요.

지금 마르크스가 시비 거는 것이 뭐냐 하면 노동자가 10시간 일했는데 노동자가 많다는 이유 때문에 10시간 값을 다 치루지 않고 7시간 값 치르고 3시간만큼은 노동자가 자기의 이자 이상으로 그걸 착취하게 해서, 착취한 것이 가만있으면 괜찮은데 착취한 그것이 재생산에 투자됨으로 말미암아 전에 있던 노동 가치를 더 떨어뜨려서, 전에는 7시간에 만원이었는데 다음엔 10시간해야 만원이 됩니다. 이렇게 만원가치를 약화시키는 게 문제가 되고, 그 나머지 잉여부분은 점점 더 자본가가 재산을 불려나가는 게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이해 안 되면 그냥 들어놓으세요.

이걸 가지고 노동자가 원래 큰 기계는 노동자가 사는 게 아니고 자본가가 사야하는 거잖아요. 무슨 돈이 있다고 그걸 사겠습니까? 그 큰 기계를 노동 생산 수단이라고 합니다. 생산수단에서 노동자가 배제(소외)됨으로 말미암아 그 큰 기계 사용하는 것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그 값보다도 더 헐값으로 노동 가치가 매겨져서 거기서 남는 장사를 자본가가 하고 거기서 멈추면 괜찮아요, 거기서 0이 나오면 괜찮은데 그 남아도는 것이 축적이 되면서 전에 보다 더 낮게 측정이 되는 식으로 노동시장이 형성된다는 거죠.

인간의 노동의 가치라는 것이 고정적이 아니고 market 시장에서 그때 그때 달라요. 달라 지는 것은 좋은데 그때 그때 하락되는 쪽으로 달라진다는 거죠. 그래서 지금 건설 노동에 중국 값싼 조선족들이 와 버리면 그동안 하루 일당 7만원 받는 사람들이 그런 일자리도 값싼 노동력 조선족들에게 빼앗겨 버리면 시장에서 소외되어 버린다 말이죠. 근데 누가 이렇게 하느냐? 그것은 더 잉여 가치를 빼낼 의도가 있는 사람에게만, 기업가들이 그것 때문에 기업하거든요. 남 주고 은행 이자만 받을 것 같으면 은행에 맡기지 미쳤다고, 그냥 있는 돈 이자 받아먹으면 되지, 자본가가 은행 이자 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기 위해서 최상의 운영을 하는 거잖아요. 그 노동가치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뭔가 손해 보는 쪽이 있어야 얻는 거 아닙니까.

근데 농사짓는 사람은 이것은 자기의 노동 +하늘이지만 하늘이 주는 증여가 있어요. 토지가 있다고.  여기서 신의 은총을 느끼는 거예요. 저는 씨를 뿌렸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최초의 예배를 드린 사람이 누구죠? 가인입니다. 그게 바알종교의 형성입니다. 그러니까 바알 종교를 쉽게 말하면 신께서 우리를 날마다 풍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신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우리에게 가치를 덧붙여 줍니다. 그것을 우리는 축복이라고 간주하겠습니다. 라는 토지 중심, 생산 중심의 신앙을 바알 종교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종교는 뭐냐 하면, 너희가 요셉의 뭘 모른다? 아픔을 모른다. 토지가 날 살린다는 것은 이방 종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살다 보니까 24시간 생각하는 것이 뭐냐? 나는 부자일까 가난할까? 그 틈 사이 부자냐 가난이냐 그 틈 안에만 있어요. 그래서 바깥에 튀어나와서 자기 가치를 볼 줄 몰라요. 나 부자 되면 더 낫지, 가난하면 가치 없어.  그 틈새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문을 들어오면서 ‘부자 되게 하옵소서!’  교회 문 열고 나가면서 ‘하나님, 가난하면 안 되지요.  하나님 가난하면 안 됩니다.’  부자, 가난.  이것이 바로 껍데기는 기독교이고 예수님이고, 안에는 바알 종교.  이것이 인간의 본성으로 그냥 자리 잡은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 호세아 당시에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데, 누구나 하나님께 축복받고 싶어서 그렇게 사는데 그걸 가지고 호세아는 “이 간음한 나쁜 여인들아!”  무슨 소린데?  뭐?  우리가 어쨌는데?  “너희가 간음했잖아.”  뭘 간음했어?  여호와 잘 믿는데.  우리 제사 드렸잖아.  잘 하고 있잖아.  “네가 남편을 모르는구나!”  웬 남편?

그때까지는 여호와가 남편이 아니에요.  여호와가 남편이 아니고 하나님이에요.  남편이란 말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남편이라고 등장할 경우에만 비로소 남편이 되고, 비로소 간음죄가 형성되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권사님 어디 갔노?  더 쉽게 말한다고 해 놓고 더 어렵게 말한다고 하시는데.  더 쉽게 말해서,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죄인인줄 모르는 상태에서 주님께서 새로운 사건을 유발할 때마다 비로소 하나, 둘씩 이런 점에서 죄인이구나!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저벅저벅 다가오시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인데.

진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지도 않고 예상치도 않은, 우리는 결코 죄인이 아니야. 라고 아주 다짐을 하고 확신을 갖고 있는 거기에다가 죄인이게 하는, 죄인이게 만드시는 방식으로 다가오십니다.

경산에 보면 [신비의 교회]라는 것이 있어요.
[신비의 교회]가 뭐 하는 데냐?  [신비의 교회]에 가면 병을 고친답니다.  그래서 제 어머니가 “야야, 신비의 교회에 가면 병을 고친다는데 병 고치면 안 좋나. 하나님 믿고 병 고치고 좋잖아?”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교회 다닌 지 얼마 안 되어서 그것이 바알 종교인줄 모르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에는 ‘병 고쳐줄게’ 라고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너는 이래서 죄인이야’라는 식으로만 다가옵니다.  다른 방식은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면 다 가짜입니다.  마귀가 오는 거예요.  ‘병 고쳐줄게.  잘 되게 해 줄게.’

하나님은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하기 때문에, 그 구원의 능력에 십자가가 들어있기 때문에,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 죄 때문에 대신 돌아가신 분의 모습이 십자가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는 어찌해서 예수님이 대신 모든 값을 치러야했던가?  그 이유를 설명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이 참 하나님이지, ‘너는 이래서 죄인이야’ 라고 다가오시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입니다.

주님께서는 탄식하는 마음으로 오십니다.  “이래서 죄인이기 때문에 이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단다. 그래서 넌 구원 받은 거야.” 이런 식으로 다가오시는 것이지, ‘어디 아픈데? 병 고쳐줄까?’ 이런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이것이, 얼마나 바알 신앙이 하나의 현실로 자리 잡고 있는지 예를 들어 보여드리겠습니다.  여기 광고지가 있는데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오 목사님 한번 불러보이소.  “꿈 바위.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018-789-5008”  ‘조상 영가, 천도, 시부모 영가, 친정부모 영가, 태아 영가, 각종 질병 사고로 인한 영가, 사별한 남편, 부인 영가 상담 환영’

이게 뭐냐 하면, ‘찝찝하지요. 교회 나오세요.’ 하는 소리하고 똑같아요.  뭔가 찝찝하지요?  교회 나오세요.  교회가 노골적으로 이렇게---,

‘영가’라는 것이 뭐냐고 제가 전화로 물어봤어요.  ‘죽은 귀신’을 영가라고 한대요.  다른 말로 하면 ‘영혼’ 그러니까 시어버니 영혼, 친정부모 영혼, 태아 영혼을 잘 하면, 죽은 사람 천도제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여기에 뭐가 없느냐 하면, 이런 논리에 뭐가 빠졌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을 쳤다는 것이 빠져 있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쳤다는 것이 빠져있다는 것은, 불교도 마찬가지지만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이게 없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치셔서 구원 받았다는 것이 없어요.

당신들이 얼마나 잘 바치면 복 받습니다. 라는 것만 있지요.  당신이 행세를 똑바로 하고 바르게 살면 복 받습니다. 그게 있지, 이것은 바알 종교입니다.  내가 잘 되면 복 받는 거고, 이 세상에서.

그러나 주님께서는 ‘죄인이 뭐냐?’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요셉의 아픔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아모스는 요셉의 아픔으로 다가오고, 호세아는 뭐냐 하면 난데없이 간음했다고 소리치면서 다가오는 거예요.  사람들은 ‘뭘 간음해?’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호세아 가정에 뭘 했느냐, 간음한 아내와 혼인하고 다시 가출하게 만들고 다시 값을 치러서 되돌아오게 해서 그 과정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 너희들이 그동안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들이 여호와를 잘 섬기고 있는데,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에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왕이 곧 우상이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회 전체가 우상이었다는 말입니다.

호세아 8장 4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왕을 세웠으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겁니다.  왕 자체가--

호세야 13장 11절 이거는 신학교 졸업한 사람은 다 아는 건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유명한 구절이지요.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왕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왕 세우는 것은 누구로 말미암지 않았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평소에 너희들이 몰랐던, 모르고 한 행동 그 자체가 왕이라는 우상의 결과를 낳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왕이 있고 뭐가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너희들이 남편 되는 여호와 앞에서 우상을 섬기게 되면 왕이 있다는 그 체제가 그게 우상 죄를 무마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지요.  결국 그동안 왕이 있어서 훌륭한 왕을 찾아서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 우리를 건져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실제로 왕을 세웠던 모든 시도는 자기 죄의 본색조차 모르는 하나의 헛된 짓의 반복이란 말이지요.  헛된 짓의 반복.  갑자기 또 열이 올라가네.

제가 왜 열 내느냐 하면, ‘왜 십자가를 모릅니까?’ 하니까, ‘나 목사 아닙니다.’ 이래요.  
목사가 되었다는 말은, 나는 목사니까 믿음 좋다고 여긴 그 마음은 평소에 자기가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는, 복음도 모르고 있으면서 그냥 무턱대고 해보니까, 목사 되면 구원에 도움이 될까 했던 하나의 헛된 시도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예를 들면 그렇다 이 말이지요.  

어떤 분이 크로스 빌리지에 그런 글을 올렸어요.  나는 개혁주의를 표방한다. 개혁주의보다 완벽한 신학은 못 봤다.  제 얘기는 ‘개혁주의가 악마를 이깁니까?’  말을 바꿔볼게요.  ‘마귀가 개혁주의를 무서워합니까?’  아이고 무서워라, 아이고 무서워라, 나는 개혁주의한테 질거야. 아이 무서워라.  마귀가 개혁주의한테 집니까?  어느 병신, 바보 같은 마귀가 개혁주의한테 져요.

마귀는 예수님 십자가 복음을 가리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쓰지 개혁주의 가리기위해서 노력하는 마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개혁주의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마귀가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 복음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마귀는 있어도 개혁주의 막고자 하는 그런 마귀는 없어요.

마귀도 하나님 다 알아요.  개혁주의도 안다고요.  그렇다면 마귀도 하나 못 이기는 그런 신학을 해서 뭐 할 건데 그래.  그런 신학해서 장사꾼 밖에 더 되겠습니까?

호세아에서 왕 세우는 것은 나로 말미암지 않았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왕을 허락한 것은 내가 너희를 심판하기 위해서, 죄인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왕을 세웠고, 폐하는 것도 내가 했다는 말은 뭐냐, 왕이 있든 어떤 형식이 있든 상관없이 너희들은 총체적으로, 사회전체가 썩었다 이 말입니다.  사회 전체가 왕상숭배자다.

그런데 그것을 평소에 알고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은 몰랐습니다.  왜 몰랐는가 하면 여호와가 막연한 그냥 신이지 자기 남편 된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여러분, 남편과 아내 사이는 보통사이가 아닙니다.  무슨 사이?  사랑의 사이.  사랑이라고 사랑.

사랑인데,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하면, 아내의 잘못을 나무라면서도 기어이 찾아오는 사랑이거든요.  이 사랑은 ‘잘한다, 잘한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 아내의 잘못을 나무란다는 그 자체가 그것이 바로 사랑의 증거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하느냐?’  ‘내가 남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여기서 남편과 아내는 무슨 뜻이냐 하면 헤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헤어질 수 없기에 너를 나무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세아의 결론이에요.  우리 둘은 헤어질 수 없기에 나는 너를 간음죄로 고소한다.  헤어질 수 없기에.  이게 호세아입니다.

그렇게 성립되려면 남편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들고 하나님이 낯설게 등장해야 돼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하나님이 남편 입장에서 등장한 것은 호세아가 최초입니다.  그런 남편 입장에서 과거까지 들먹이죠.  내가 출애굽할 때 남편으로 너를 데리고 왔다.
과거를 해석할 때 남편이란 이름으로 등장했는데 왜 하필이면 우상 섬길 때 남편으로 등장했는가? 그들은 그들의 바알을 남편이라고 부르면서 섬겼거든요. 그 당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남편이라고 부르면서 섬겼다 이 말입니다.

아까 광고지 어디 갔습니까?
여기 [조상 영가 천도]에 보면 애기 못 낳는 것, 부부 갈등 있는 것, 애 공부 못하고 시름시름 앓는 것, 고부 갈등 있는 것 전부 되는데, 여기에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을 때 이렇게 천도제 드리면 됩니다. 이래요.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랑이라는 그 시스템이, 사랑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뭔가 미흡하다, 모자란다고 느끼는 것이 결국 무슨 시스템을 모독하는가 하면, 사랑이라는 그 질서체제를 배척한 게 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는데 부족함이 있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  거기에서 여자가 ‘사랑하면 돈 500만원 도.’  그런데 만약 안 빌려주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나를 사랑 안 하네.  그런 것은 바로 인간들의 “꿈 바위”하고 똑같은 거예요.

사랑이란 말을 몰라요.  사랑이란 말은 너에게 어떤 조건의 이유를 찾지 않고 일방적으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일방적으로 그냥 베풀어지는 것이 사랑인데, 사람들은 주체가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에 내 쪽에서 무엇을 하면 신이 갖고 있는 축복을 내가 하나라도 더 따 낼 것이냐?  이런 쪽으로 나오니까 이거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고 흥정이라든지 거래 관계지요.  아주 차가운 거래 관곕니다.  사랑의 관계가 아니고.

신이 나에게 말씀대로 안 하니까 벌을 내렸다. 이래 나오니까, 사랑으로 맺어진 것은 생각 안 하고, 내가 벌 안 받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면 되느냐? 이런 쪽으로 머리가 돌아간다는 것은, 참 돌대가리지만, 이런 식으로 머리가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은 뭐냐, 당신하고 나하고는 사랑 관계는 아니오, 내 하기 나름이오. 라고 단언하고 선언하는 것 밖에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아십니까?
호세아 선지자는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를 버린 여자를 다시 찾아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은 또 해석에 착각을 해요.  ‘그 봐, 자기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찾아 나서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그게 아닙니다.

호세아가 자기 아내를 사랑해서 찾아 나선 것이 아니고 호세아는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한 거예요.  세상에 무슨 선지자 가정에.  아까 3종 셋트 했잖아요.  가족과 이웃에게 다 버림 받은 인간이 자기 마누라 하나 챙기기 위해서 그런 짓 하겠습니까?  그렇게 찾아가는 것은 배용준한테 찾고, [미워도 다시 한 번] 그런데서 찾아야지, 그런 신파극에서 찾아야지 ---

시오오엘(cool) 뭡니까?  쿨.  차갑게 또는 시원하게 그런 뜻이거든요.  헤어졌으면 시원하게 헤어져야지 무슨 진드기처럼 다시 찾아오고 아이고, 인간아!  그게 속 시원한 거예요?

호세아가 자기 아내를 데려오는 것은 그 아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시켜서 한 거예요. 그 뭐 해석할 것 없어요. 주께서 시켜서 온 거예요. 모가지를 끌고 온 거예요. 내가 네 좋아서 끌고 온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시켜서 끌고 온 거예요.

이것은 아담을 먼저 만들었고 아담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사랑이라는 게 성립되어서 ‘내 살중의 살’ 인 아내가 성립되는 것처럼, 호세아 결론 내립시다. 아내란 사람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면 아내라는 명칭도 탈락합니다. 이게 호세아의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받지 아니하면 사랑을 모르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이야기해도 이거 참 괜찮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보면 우리는 사랑 안에 있으니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느니라. 사랑 안에는 뭐가 없나니? 심판이 없나니.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호세아 선지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거든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안에 들어있으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예수님이다 이 말이 이상하지만 호세아 선지자 안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거든요. 예수님이 선지자이니까. 호세아의 완성자로서의 예수님이 호세아를 우리에게 성취시키는 입장에서 우리에게 사랑을 퍼부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으나 싫으나 그 사랑 안에서 두려움이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이제는 사랑 시스템 안에서는 뭐를 더하면 복 더 받고 뭐를 안 하면 저주받고 이런 게 없습니다.  그런 두려움 자체도 사랑 시스템은 용납을 안 해요.  그 이유는 하나 밖에 없어요. 나는 네 남편이고 너는 내 아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 우린 묻지요, ‘예수님, 예수님이 왜 내 남편입니까?’ 내가 남편이거든. 이제 이해됩니까? 이해 안 되는 사람 몇 명 있다. 제가 왜 예수님의 아내입니까 물으면, 예수님이 내가 네 남편이거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조건을 우리에게 찾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남편이라는 것 때문에 그것으로 모든 것이 충족된다는 겁니다. 내가 네 남편이거든. 그게 끝이에요.

고린도 후서에 나옵니까? 사도바울은 예수님과 우리사이에 중매쟁이로 나섰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매쟁이로 나서는데 누가 방해합니까? 조직 신학이 방해합니까? 마귀가 방해하죠. 가짜로, 사투리로 가라라고 하죠, 방해해서 결혼 못하도록 그렇게 나서는 겁니다.

좀 더 이야기 할 게 있는데, 교재 4페이지 봅시다. 위에서 가나안 민족은 바알 신 (왕상 18:20-29), 아람 민족은 림몬 신, 현재 아람 민족은 지금 싸우고 있는 레바논입니다. 레바논은 그 수도가 다마스커스 그걸 성경에서는 다메섹이라 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싸우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다윗 후손의 메시야가 나올 때 까지 폭탄 터뜨리는 겁니다. 작살내버립니다. 왜? 신의 뜻이기 때문에.  아람나라에요. 이스라엘 입장에서 현재 레바논 헤즈볼라는 아람나라입니다.

따라서 본인이 폭격하기 싫어도 신의 뜻에 의해서 폭격해야 합니다. 폭격하면 누가 나타나느냐? 다윗 자손의 메시야가 구름타고 오실 거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 말도 안 듣고 UN말도 안 듣고 여호와 하나님 말만 들어요. 근데 문제는 그들이 뭐가 없다? 아들이 없다는 겁니다. 아들만 빠지고 나머진 다 있어요. 문제는 아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지옥가고 있는 거예요.

근데 지금 그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모압 사람들은 그모스 신, 암몬 사람들은 밀곰신 이렇게 되어 있는데 호세아서 (2:8-9) “그런데 그녀는 저에게 그 곡식과 그 포도주와 그 기름을 준 것이 또한 저희가 바알을 위해 사용한 은과 금을 저에게 아낌없이 준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바알 제단에 헌금하는 돈과 제물이 사실은 숨겨져 있는, 그 때까지 남편이라고 이야기 한 적 없는, 호세아서에서 최초로 남편이라는 명칭을 달고 나타난 그 여호와께서 평소에 남편 노릇을 다 해 온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남편인 진짜 여호와 앞에 안 바치고 그들은 그걸 몽땅 누구한테? 바알을 남편이라 섬기며 갖다 바쳤으니까 그게 음란하고 간음한 여인이 아니고 뭐냐 이 말이죠.

근데 여러분들이 음란, 간음 할 때 그건 항상 남편이 규정할 때 음란죄가 성립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뭐다? 간음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남편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 뭐다?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모든 성경 말씀의 율법은 사랑함으로써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느니라. 로마서 (13:8-9)

“그래서 나는 곡식의 때에 나의 곡식을 포도주의 철에 나의 포도주를 도로 거두리라. 또한 나의 양털과 아의 모시로 도로 빼앗으리라” (호세아2:8-9) 이 선지자가 이걸 도로 뺏는 것이 미워서 뺏는 것이 아니고 제발 너는 나의 아내가 되고 나는 네 남편이 되니까 우리 둘 사이는 사랑 관계만 있을 뿐임을 깨우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여러 가지 자연물들을 뺏아가고 지진 일어나고 태풍 일어나고 가뭄 들게 하고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이 땅에서 사랑한다고 사랑하는 남편이 네 곁에 있다고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노력을 하시는데.. 주님은 그런 하나님을 가지고 섭섭하니 뭐 얼마나 갖다 먹어야 퍼 주겠느니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다음에 이사야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확인시켜야겠습니다. 호세아에서 왕을 세운다는 자체가 이미 너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우상숭배하고 있음을 보이는 증거가 바로 왕 세운 것이다. 나중에 이 왕도 폐함으로 말미암아 사회 전체가 이미 우상의 세계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집단 심판에 나서게 됩니다. 어떻게 나선다구요? 용서가 안 된다는 거죠.  가뭄이 들게 해서. 네 사랑하는 남편이 그렇게 했다고 보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이사야!
이사야의 핵심은 뭐냐, 이사야의 핵심을 ‘놀래킴’입니다.  제가 이야기해도 우스운데, 한 번 적어 볼게요.  깜짝 놀란다.  

이사야 29장 9-10절 봅시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이사야는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일을 일으켜서 정끼들게 만들어요.  깜짝 놀라게 만들어요.  쇼크를 줘 버려요.

사람들은 과거에 있는 역사를 관성적으로 잡아당김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관을 자기한테 몸에 익숙하게 만드는 그러한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을 ‘적응’이라고 하는데, 항상 놀라는 것을 싫어해요.

어떤 사람은 [괴물] 영화보고 난 뒤에 다쳤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깜짝 놀라서.  
[괴물] 영화 보셨어요?
공포영화는, 더운 여름에 주로 상영하는데, 더움이 있을 때 깜짝 놀라는 그 순간은 더운지 안 더운지도 잊어버려요.  지금이 여름인지 겨울인지도 몰라요.  다만 놀랐다는 그 사실만, 뭔가 나는 새로운 것을 접했다는 사실만 아는 거예요.  

이사야는 놀래게 하는 거예요.  예상치도 못하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치는데 채찍에 맞고,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은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53:5).

심지어 이사야 1장에 보면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뭐 같이 희어진다?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깜짝 놀랄 이야기에요.  이게.
심지어 이런 것이 있지요?  (렘13:23) 표범이 그 얼룩을 지울 수 있습니까?  빼빠(사포)가지고 밀면 됩니까?  흑인이 그 얼굴 색깔을 바꿀 수 있습니까?  화장을 떡칠 한다고 해서 바뀌어 집니까?

이것은 놀랄만한 이야기에요.
얼마나 놀랬으면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창조’라고 해요.  이사야는 그냥 창조가 아니고, 흔히 예상된 창조가 아니라 놀랄만한 창조를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기존의 모든 역사를 다 잊어버리게 하는 그러한 책이 이사야입니다.  

이사야가 처음부터 그것을 봤지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처음부터 이사야는 시작을 어떻게 하는가 하면, 깜짝 정끼들게 놀랍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키에르케골은 독자적이에요.  기독교가 어떠니, 개혁신학이 어떠니 이게 아니라 혼자서 놀라는 것이 있어야 그것이 신앙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목사고, 우리 엄마가 사모님이고, 목사니까 사모님 맞기는 맞네.  이게 아니고, 기독교가 어떻고, 찬송가를 다 외우고 이게 아니라, 이상하게 혼자 깜짝 놀란 경험.  ‘오, 주여!’, 십자가 앞에서 ‘주여, 저는 죄인이군요. 죄인 맞군요. 나는 몰랐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 피로 구원 받는다고요. 감사합니다.  어떻게 살까요?  십자가 증거하라고요.  아멘!’

이것은 내가 학력이 어디까지냐, 내 직업이 뭐냐 이런 것은 완전히 무시당하고 혼자서 돌발적인 사태에 직면해서 깜짝 놀라면서 혼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이런 고백.  이게 다메섹에서 나오는 그거지요.

결국은 예수님이 이사야 속에 있으니까 이사야가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난 것은 이사야가 온 거예요.  그 예수님은 우리를 깜짝 깜짝 정끼나게 만들어요.  그리고 예수님 따라다닌 사람은 혼났어요.  늘 놀랄 일을 해서 그래요.

물 위를 걸으면서 베드로가 놀랬다니까.  물 위를 걸은 자기가 놀랬다니까.  이게 무슨 짓이 이런 짓이 다 있어요. 물 위를 걷다니.  무슨 짓이 있느냐 하는데 빠져버렸어요.  물 위로 걷는 짓이 무슨 짓이냐 하는데 빠져버렸다고.  이게 뭐냐?  예상치도 못한 깜짝 놀랄 일로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다가오는 거예요.

베드로 같은 경우에 고기를 잡았는데 엄청나게 잡았어요.  그래서 놀래서 뭐라고 한줄 압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나를 떠나소서.” 이게 이사야의 성취입니다.  이사야가 그 속에 들어간 거예요.  그 사람은 이사야가 되고 주님은 이사야의 주님이 되고.  그런 관계로 맺어진 것이 신약 성경에 왔어.

깜짝 놀라게 하는 하나님.  너희를 놀래키는 하나님.
‘놀래킴’은 이사야의 주제입니다.  간단합니다.  이사야가 뭐라고요?  놀랬습니다.  너무 놀랬습니다.  예상치도 못하게 놀랐습니다.  이것은 키에르케골의 단독자 개념, 실존 개념.  옆에 누가 있든 관계없어요.  혼자서 처음으로 주님을 단독자로 만난 거예요.  아무도 없고, 가족도 없고 그냥 주님과 나만 남고, 십자가만 남고 주위의 아무것도 느끼지를 않는, 그 느낌으로, 그 호흡으로 이번시간 강의를 끝내야겠습니다.  끝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