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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3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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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3

어제 저녁에 강의한 이사야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놀래킨다’ 거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놀라게 할 것이다.’ 놀라게 한다는 것은 너희들이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일을 내가 창조한다. 창조한다는 것은 과거에 너희들이 짐작했던 그 모든 것이 새롭게 창조한 그 일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그게 뭉개진다는 것이죠. 무너져 버려요.

무너지고 나면 그들은 두 가지 결과 중에 하나를 해야 합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께 반발할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무너짐을 인정하고 새로운 일에 고개 숙일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하는데, 인간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 새로운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사야를 밀치므로 말미암아 계속 과거의 기준의 관성의 법칙을, 관행을 인간은 절대 포기하질 못합니다.

이게 두뇌적으로 지각 심리학에서 연구해 본 바에 의하면, 인간이란 항상 과거에 기억한 그것을 바탕으로 그 다음의 세계관을 오늘의 세계관, 내일이 되면 내일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펼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이란 뭐냐? 오직 인간이란 기억이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새로운 일을, 하나님의 일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그런 본성을 자아낸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줘도 자기의 과거와 틀리다는 그러한 것을 이유로 삼아서 새로운 일을 배척해버린다는 것입니다. 배척하는데 배척하는데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미움, 반발, demonstration 시위, 항의, 이걸 우리말로 하면 한, 원한, 또 원망 하나님에 대한 분노 이런 것이 나옵니다. 너가 왜 자꾸 나에게 기도하면서 원망하느냐? 뭐 이러쿵저러쿵 핑계 대지만 그건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등신이 아니고 아직 내가 기억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그것입니다.

자기가 과거에 기억한 것이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대들고 있는 겁니다. 이거 대표적인 것이 요나잖아요. 고기 배에 있을 때에 이런 식으로 결과가 나올 거라고 일을 한다고 저한테 일러주지 않았잖아요. 저한테 일이 이런 식으로 심판된다고 이야기 했지, 심판해서 회개한다고 저한테 언질도 안 줬잖아요. 이제 와서 그들이 심판받지 않고 회개해 버리면, 이 요나의, 하나님의 종의 위신과 체면은 어디서 찾습니까? 나 삐졌습니다. 하고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과거를, 과거의 일도 하나님이 창조한 건데 인간은 얼마나 못됐는지 과거의 창조한 것을 자기의 걸로 소유화시켜버려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려면 그들에게 그런 미움과 반발과 시위와 항의와 한풀이와 원한을 들을만한 그러한 입장에 이미 하나님이 서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해도 인간은 항상 미워할 준비, 반발할 준비, 시위할 준비, 항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하다가 뭔가 깨지고 뭔가 박살나고 난 뒤에는, ‘주여, 내가 나 된 것은 은혜군요’ 하고 아이고 그때는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뒤늦게 회개하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근데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그것조차도 이미 지나가버리면 과거의 사건입니다. 그 바탕위에 턱하니 앉아가지고 내가 이런 인간이라고 우기는데, 그러한 과거에 계속해서 엮어져 있으면요 오늘 주시는 새로운 어떤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감격할 마음 준비가 안 돼 있는 겁니다. 고마워할 마음준비가 안됐어. 감사할 마음 준비가 안됐어.

어제 얼른 듣기로 우리교회 권사님께서 간식으로 강냉이(옥수수)를 준비한다고 하던데, 올 여름 들어서 강냉이 강원도 찰강냉이 한번도 안 먹어본 사람이면 상당히 기대를 하고 있겠지만, 어제까지 냄새나도록 먹은 사람은 딴 거 없나?  딴 거. 미움과 반발과 시위와 항의와 한풀이와 원한이 벌써 나올 준비가 돼 있어요.

이사야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창조하겠다고 하면 그걸 감격과 감사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되는데, 사람이 그렇게 만만치 않아요. 감사보다도 배타시하고 거부해야 될 그런 게 많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놀래키는 일을 하는데 그 놀램에 대해서 사람은 나를 놀래게 했다는 죄목으로 놀래게 한 하나님 쪽을 쳐버리죠. 치게 되면, 그때부터 뭐냐 하면, 이제부턴 진짜 쉽게 하겠습니다.

기차, 기차보세요. 2개가 있는데, 쉽게 하기 위해서 이젠 아예 소리를 내겠습니다. 칙칙폭폭-- 이사야 40장 3절에 보면 여기 칙칙폭폭 나온 게 뭐냐 하면 꽤~웩~나오죠? 이게 이사야 40장에서 뭐냐 하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이거죠. 여기도 칙칙폭폭-- 지금 이사야를 중심으로 해서 기차가 이리로 가고 있는데, 여기에 사람들은 메시야가 이렇게 오는 줄 알고 기존의 사람들은 자기 기억에 과거의 기억의 산물인 인간들은 여기 서있는 거예요. 여기서 주님께서 기차가, 우리 역사가 이렇게 가고 있는 거예요. 선로가 2개가 돼버린 거예요.

이걸 어렵게 말하면, 이사야에 있는 걸로 말하면 이걸 묵시라 하는 겁니다. 여기 아래쪽에 과거의 산물로 있는 거, 이걸 역사라 합니다. 사람들은 역사를 믿지 묵시를 안 믿거든요. 묵시 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열차, 이건 어디서부터 갈라지느냐? 이사야에서부터 갈라집니다. 이사야에서부터 갈라지는데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이사야의 아들이 있어요. 그 아들 이름이 뭐냐? 스얄야숩, 남은 자는 돌아온다.

여기서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 멸망시키는 근거는 하나님이 원래 약속했던 다윗의 언약에 부합되지 않아서 멸망시키는데, 하나님이 멸망시키는 그 세계가 이사야에서부터 갈라지면서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쪽을 향하여 칙칙폭폭, 꽤~엑~, 이거 꽤~엑~을 뭐라 했습니까?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는데, 내가, 왕이 오는데 골마다 낮아지고 골짜기마다 낮아져서 난 외친다. 누가 오신다 이거에요, 하늘나라가 오신다 이거죠. 다윗의 가문에 계시던 분이 하늘나라가 오신다는 거죠. 이쪽에서 이쪽으로 가고 있는데 이쪽 산은 기차가 오지도 않아요. 제일 한심스런 사람이 버스가 끊겼는데 정류장에서 그냥 우산 들고 서 있는 사람, 제일 한심스럽죠. 온대, 그냥.

저 노벨상 받은 작가 사무엘 베케트입니까? 연극에 보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있어요. 고도가 누군지 모르지만 하여튼 고도라는 사람이 온다는 거예요. 근데 그 연극에 보면 결국은 안 와요. 거기 뭐냐 하면, 인간은 누가 와서 인간을 구원해 주는 것이 인간 세계가 아니라, 누가 와서 구원해 준다는 그 희망이 사람을 지금 한없는 행복으로 만든다 이겁니다. 참 여기서 연극 전문가(백흥진 전도사님은 제천 여성극단 감독 및 연출자임) 앞에서 연극이야기 하니 참 미안해 죽겠다. 미안합니다.

사람은 누가 와서, 이걸 어렵게 말하면 이번 주에 포스트 모드니즘 이야기할 건데, 사람은 실제로 자기에게 누가 와서 심어주는 것이 아니고, 누가 이래 행복을 주는 게 아니라, 누가 와서 행복을 준다고 여기던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 나의 행복을 사로잡는 거예요.  

여러분, [큰 바위의 얼굴] 아시지요. 그 단편소설 [큰 바위의 얼굴]. 이 큰 바위 얼굴이 와서 우리 마을을 발전시킨다는 거예요. 근데 그 영웅이 누구냐? 안와요. 없어요. 유명한 사람이 다녀갔지만, 그 사람도 아니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큰 바위 얼굴이 온다고 기대하는 그 소년이 자라 자라서 나중에 큰 바위 얼굴처럼 되어서 그 마을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이야깁니다.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실제는 없어지고 가상세계가 실제를 대신 한, 그런 시대에 돌입했다 이겁니다. 진짜 어렵게 이야기 하면, 가상이 실제를 복제하는 것이 가상이지만, 지금은 복제한 그것을 실제가 복제해서 갖고 다니는 실정이다 이겁니다.

전자제품이 새로운 제품이 개발돼도 그게 특별한 기능이 더 첨부되지는 않습니다. 별다른 게 없어요. 이온 음료도 마찬가지고. 뭐 별거 없는데, 과거의 광고에서 사람 속에 뭔가 새로운 상품이 나오기를 고대하면 내가 돈 주고 사께 라는 새로운 상품을 구입하는 감각적인 행복에 젖어 있는 자본주의 사람들의 소원과 희망을 들어주기 위해서, 회사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옛날 모델을 걷어치우고 새로운 모델을 소비자의 구미(기호)에 맞도록 내놔야 돼. 할 수 없이 내놔야 된다고요. 별것도 아닌 기능을 첨부해서 그냥 과대 포장해서 내놔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겁니다.

환상을 먹고, 꿈을 먹고 사는 거예요. 세종청소년 수련원 올라올 때 플랜카드 보세요. 비젼이 어떻고, 꿈이 어떻고 그런 거 나오죠. 어떤 진짜 뭔가 있기 때문에 힘을 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머리 속에 상상한 그 환상을 마치 실제로 있는 것처럼 간주해서 뭐가 있어야 지금 노력이라도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 세상에 남는 것은 시뮬라시옹같이 가상세계, 공상의 세계만 남고. 실제는 어디 있느냐? 실제라는 것은 이미 없어요. 왜 가상만 있느냐 하면, 그 가상들이 자기의 기억에서 쏟아내기 때문에, 그 기억과 기억이 쏟아내는 너의 기억, 나의 기억이 쏟아내서 그런 비젼과 꿈을 이루지만, 충돌이 일어나면, 정치적인 타협을 해서 어느 정도 선에서 내 양보하고, 네 양보해서 이 정도 하나의 공통적인 꿈이라고 하고, 그래서 하나가 되는 사회 공동체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 월드컵 4강 올라가서 뭐 할건대요? 하지만 4강 올라감으로써 하나, 일체임을 느끼고, 자기 정체성을 거기서 발견하면 됩니다. 아~, 난 이런 인간이구나. 거기서 새삼 발견해서 어떤 안정감을 얻으려는 겁니다.

모든 것이 가상 세계입니다. 인간의 욕망이에요. 이런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여기는 뭐냐 하면 허상과 가상만 나와야 하는데, 여기는 하나님 메시야가 오지 않기 때문에, 그걸 대신해서, 지난 시간에 호세아 이야기 했죠?  대신해서 그들이 무슨 역할을 해냈나 하면, 왕이 등장해야 합니다. 왕 이건 지도자입니다.

제가 1층에 가보니까 [십자가 마을 지도자방] 이라고 해서 101호, 102호 이래 돼 있던데..  김정일 지도자 아닌가? 마태복음 20장에 보니까, 누구든지 사람을 지도자로 하지 말고, 너희 아비는 하나님이고 지도자는 그리스도니 이래 돼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시는 법. 그럼 김대식 씨는 그리스도? 놀래라. (하하하) 그리스도가 계시는 방??

여기는 인간들의 과거 기억에 의해서 자기가 자체적으로 생산해내는 가짜 메시야를 흉내를 내고 연기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기에 왕들은 억지로 해서라도 이스라엘을 이 유다 나라를 유지해야한다는 그런 강박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하스 왕, 이사야 시대는 아하스 왕 시댄데, 아하스 왕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유다 나라를 지킬 때, 민중들이 당신은 정말 하나님이 택한 왕 맞습니다. 라고 계속 인정을 해주기 때문에 무리한 정략결혼과 정략적인 정책을 쓰게 됩니다.

다메섹에 가서 그 나라 앗수르한테 조공 바치고 빌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노력과 상관없이 이사야 하는 말이, 당신이 묵시를 알아? 당신이 하나님 뜻을 알아?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교재 3페이지 밑에서 4번째 줄에 봅시다.  지금 우리가 이사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한다고 자주 자주 이야기 할 겁니다. 왜냐하면 잠을 자기 때문에 아침에. 다 같이 읽어 봅시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사55:11)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그냥 해체될 수 없다. 반드시 그냥 돌아오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이사야가 아하스 왕한테 그 당시 지도자에게 갔어요. 당신은 이런 징조를 하나님이 반드시 이런 쪽으로 일하는 징조를 당신 한번 받아 볼래? 난 그런 거 안 받습니다. 이래 됐다고요.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의 모습이 잘못 된 것을 이야기 하죠. 그 징조가. 이미 기차는 칙칙폭폭 이쪽 노선, 역사 노선이 아니고 묵시 쪽 노선이 갈라지고 있는데 그 갈라진 징조가 뭐냐?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식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구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남은 자는 뭐냐? 임마누엘 이라는 겁니다. 한 아기. 한 아기가.

당신이 당신 힘으로 이렇게 할 때, 앗수르에 의해서 힘겨워 질 때, 그 때 앗수르 하고는 아무 상관없고 바벨론하고도 아무 상관없고 심지어 당신하고도 아무 상관없이, 오직 유다를 구원하시는 메시야하고만 관계되는 한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임마누엘이고 “처녀가 아이를 낳으리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새로운 한 아기가 태어나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중요한 것을 알아야 됩니다. 중요한거 밑에 밑줄 쫘~악 치고, 별표 땡땡 해가지고 중요한 거 표시해야죠. 뭐냐 하면, 그 아기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라지 않는 아기. 그 아기는 계속 아기로 남는 거예요.

이것이 성경에서 난해해서 이해하기 힘든 거예요. 보통 우리 역사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서 아기로서는 별 볼일 없고, 아기가 나와서 커서 어른이 될 때에, 장성할 때, 그 때 뭔가 솜씨를, 지혜롭게 되고 어른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돼 가지고 뭔가 번듯한 업적을 남긴다. 이게 우리들의 상식, 기억된 상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아기가 계속 아기로서 영원한 아기로서, 아기로서의 그러한 취지, 아기라는 명제가 아기로만 계속 유지 될 때만, 그것이 역사를 공격하는 묵시의 가치를 표방한다 이 말입니다. 아기의 표상이 계속 아기로만 남아야 돼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으니 그는 기묘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이사야 9장에 나오죠.

여기서 왜 하나님께선 한 아기를 성장으로 보지 않고, 성장될 일시적인 상태로 보지 않고 영원한 한 아기로 남겨두느냐 하면, 바로 한 아기가 이사야의 남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구원될 자와 구원되지 못할 자를 갈라놓은 그것, 기차노선 철도 노선의 갈림길에서 그것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갈림길에 등장한 한 아기는 앞으로 2009년이 되더라도 계속 한 아기로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에 대해서 고발합니다. 그건 허구라, 시뮬레이션, 상상이라고 가상 세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실제 세계는 한 아기의 세계만이 실제 세계라는 겁니다.

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제가 좀 어렵게 이야기 했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짝사랑했던지 아님 신앙 좋은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를 만났을 때, 그 때 첫눈에 반했던 그 기억을, 예를 들어서 어떤 여자를 봤는데 첫 인상이 애기 같더라. 너무 귀엽다. 아기같다 라는 인상을 받았다 말이죠. 근데 헤어졌어요. 한 40년 지나고 근데 그 여학생 이름은 모릅니다. 이름은 모르는데 통학 길에 늘 같이 왔다 갔다 하면서 한마디 말은 건네지도 못하고 그냥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저쪽에서도 말 건네지도 못하고 같은 통학 길을 3년을 보내고 그냥 졸업하고 난 뒤에 어디 갔는지 모르는. TV는 사랑을 싣고 그 때나 만나지 그렇지 않고는 못 만나는, 그런 상태일 때. 그 여학생 얼굴이 아기 같다. 전 목사님 사모님는 아직도 아기 같애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 흘러서 한 40년 되서 만났다. 그 때 하는 말이 누구 이름, 누구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오~ 아기씨.’ 그 말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 묻는 게 아니고, 그 때 그 당신 맞지? 라는 거예요. 나에게 어떤 쇼크를 주었던, 깊은 인상을 주었던 그 분 맞지요?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역사와 묵시가 갈라지는 최초의 갈림길에서, 한 아기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 이사야 집단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집단에서 인간이 만든 세운 모든 백성들과 왕, 그건 하나의 가상 세계이며, 인간들이 오지 않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과거의 산물의 역사인 것을 고발 하는 것은 한 아기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아담은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는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아니에요. 한 아기였어요. 한 아기를 보리니. 예수님이 태어나서 33살 될 때까지 본격적으로 한 일에 대해서 예언한 것이 아니고, 한 아기로 태어났다는 그 지점이 중요한 거예요. 한 아기로서 태어난 그 주님이, 이것은 한 아기가 뭘 한다는 말이 아니고, 그 아기의 출발은 그 아기는 단순한 아기가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고발하기 위한 하나의 존재물로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시므온이라는 선지자가 그 아기 예수를 안고 하는 말이, “주여 이제 비로소 종을 편안히 놓아 주시는군요.” 저는 그 시므온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아기 예수 안았다고 세상 시름에서 해방됐다면 도대체 우리의 팔에는 무슨 돈 보따리 수십억을 안겨줘야 세상 시름에서 해방되니! 도대체 그게 뭐냐? 역사와 묵시의 차이가 아니고 뭐냐 말입니다.  그게 묵시와 역사의 차이 아니고 뭡니까?

수십억 돈 보따리 들고 ‘주여, 비로소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셨군요.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고, 성령 받은 시므온이 아기 예수만 달랑 안고 “주여,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군요.” 이렇게 했단 말이지요.  시므온이 당회장 됐습니까, 노회장 됐습니까?  뭐 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그것으로 완결이고, 종결이에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얼마나 감사했던지, 그 때부터는 자기 할 일이 끝났다는 것에서 오는 감사도 있고, 이미 자기가 구원 받았다는 데서 오는 감사도 있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더 일 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그 때부터는 옥에 갇혀야 되고, 옥에 갇히자 말자 예수님은 대타로 일해야 되고, 세례 요한은 목 잘려 쟁반에 담겨 죽어야 되고.

그래도 세례 요한은 어느 노선?  묵시의 노선에 해당되기 때문에, 여기서 아무리 칼로 찌르고 목을 자르고 난동을 쳐도 이 묵시의 세계 운명은 이쪽 역사 쪽으로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이 세례 요한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광야에서 외치는 칙칙폭폭, 광야의 외치는 소리예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이사야에서 제일, 해석이 너무 어려워서 어느 신학자도 해석하지 않는 대목이 있어요.  그게 뭐냐, ‘이새의 아들’이란 것입니다.

왜 성경에서는, 다윗이란 이름을 모릅니까?  애들도 다 아는 것이 다윗인데, 골리앗을 이겼다고 다 아는데.  울산에서 오신 분들 골리앗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왜? 거기에 골리앗 크레인이 있거든요.  현대중공업에 골리앗 크레인, 다 알고 있어요.  골리앗 알지요, 다윗 알지요.  다 알아요.

서울 성북 갑인가 보궐선거에 민주당으로 나온 그 사람은 자기가 선거에 이긴 것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는 그런 늙은 다윗은 처음 봤어요.

그런데 왜 다윗이란 이름을 두고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라는 말을 하느냔 말이지요.  ‘이새의 아들’이란 말은, 아들 이름은 밝히지 않고 아버지이름을 거론하면서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새 있고 다윗 있고 어떤 특정인물 두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 의미가 아니라 이새와 다윗 사이는 아들관계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관계라는 겁니다.    

이것은 아들 관계에 놓여있는 분이 메시아로 오시는데 그분은 역사를 무시하는 쪽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게 뭐냐, 이새의 줄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성령이 나와요.  성령의 주특기는 역사를 박살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인간의 기억이 누적되고 축적되어 쌓이고 쌓인 것이 기억이거든요.  

그런데 성령은 체계나 형식이 없습니다.  바람같이 오는 거예요.  바람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마지막에 메시아가 오는데 이새의 줄기에서 오는 그것은,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관계로 형성된 메시아는 성령을 통해서 와서 역사의 누적에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다 이루어서 이 묵시세계, 천국을 이끌고 가게 될 그분이란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포인트는 어디에 있느냐, 그분이 하나님 아들 된 것은, 그 증거가 뭐냐, 성령에 의해서 부활됐다는 그것이 증거라는 겁니다.  너희들 보기에는, 역사 쪽에서 보기에는 묵시에서 이사야든 스알야숩이든 임마누엘이 됐든 누가 되었든 간에 인간들은 전부다 역사 쪽으로 다 끄집어 당겨서 해석해 버려요.  이걸 전부다.

세례 요한이 “회개 하라”고 하니까, 그 당시 제사장들은 그걸 자기 역사 쪽으로 끌어와서 ‘우리가 지금 체계를 잘 잡고 있는데, 네가 선지자야?’ 이런 식으로 자꾸 역사 쪽으로 끄집어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어이, 예수 당신은 어느 신학교 나왔어?  당신이 율법 가르치는 것이 옳은거야?’ 자꾸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성령이 오게 되면 이 모든 것이, 그들은 성령을 역사적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실로암 못에서 물을 퍼다 성전에 갔다 붓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 나리라”(요4:14)
에스겔에서 말하는 그 성령은 역사적으로 따져서 알 수 없고,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이 흘러나오는 그것이 바로 에스겔 예언의 성취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묵시의 세계에서는 역사와 전통이란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것은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역사와 전통은 그만큼 기억이 누적되었다는 것뿐이고, 그 누적된 기억은 하나님에 대해 미움과 질투와 시기, 반발, 분노 이런 것만 자아낼 뿐이지요.    

다시 한번 이사야 그 대목을 보겠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사55:11) 이것을 역사적으로 이룬다고 생각하시면 그 사람은 여전히 오지 않는 메시야 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바로 이 묵시의 편에 서 있는 한 아기, 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을 개시로 해서 이 자체로서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 분은 묵시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켜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내신 그 분에 의해서 회수되는 식으로 다 성취가 되는 거예요. 다 성취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분이 누구냐? 그 분은 바로 갈라져요. 남은 자의 개념에 의해서 이것이 갈라져서, 그 돌아오신 남은 자에 의해서 이 아사야 55장 11절, 내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은 내가 다 이루어서 성취돼서 성령을 통해서 너희에게 그냥 무상으로 전달된다는 것을 다 보여주는 거죠.
이것이 이사야에서 나오는 모든 비밀이고 내막입니다. 그 중간에는 바로 한 아기가 있다는 것이죠.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한 아기라는 것은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어른이 되었지만, 한 아기의 취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 한 아기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인간의 모든 역사를 고발하고, 그리고 인간의 역사들은 오지 않는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희망을 품고 있으면서, 그들의 희망으로 인하여 진짜 현실로 오신 한 아기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것이 인간의 역사관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그런 자리에 한 아기가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릴 때 성전에 있을 때에, 그 때 역사적 아버지 요셉이 살아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버지 요셉이 어린 예수님에 대해서 상당히 나무랐습니다. 네가 이렇게 축제날에 여기 번잡한데, 왜 자꾸 네 혼자 돌아다니느냐? 그렇게 막 나무랬어요.  혼자 돌아다니니까 막 나무래는 거예요. 너를 찾는데 얼마나 사람들이 많은지 사흘 동안 찾았다. 그걸 가지고 어른들은 뭐라하느냐 하면, 가슴이 속이 다 탔다, 새까맣게 탔다고 이야기합니다.

부모 가슴 속 타면 그 부모 구원 받습니까? 하여튼 내가 이런 소리 하지 말라고, 설교에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욕 많이 얻어먹어요. 그런 소리 안 집어넣는데 왜 집어 넣어가지고 괜찮은------  일부러 의도적으로 망치느냐 하는데, 속이 다 상했죠.  당연히 나무래죠. 이렇게 네가 불효자식으로, 도대체 누가 예수님보고 효자라 하는지, 난 좀 반발하고 싶어요. 누가 예수님을 효자라 합니까? 효자 좋~다. 사흘 동안 부모 속 다 타고. 한두 시간만 해도 요즘 젊은 부모들요 아이 한두 시간 잃어버려도 기절할 지경입니다. 만약에 남편이 아이 간수 잘 못해서, 잠깐 담배 피우러 갔다가 아이 잃어버리면 이혼 사유 돼요. 그 정돈데 사흘 동안 찾아 다녔는데, 얼마나 이 되바라진 어린 예수 하는 말이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줄 몰랐습니까?’ 이런 싸가지!

예수님은 처음부터 한 아기고 이건 이새의 아들이에요. 기존 역사의 산물이 아닙니다. 역사의 산물이 아니에요. 이미 이 철도노선이 갈라질 때부터 한 아기의 특성은 계속 유지돼야 되는 거예요. 아기 특성은 계속 유지되는 겁니다.

바로 이 소식을 이사야가 전했으면, 우리 같으면 이사야는 참된 주의 종입니다. 이렇게 할 텐데,  그렇게 할 리가 없지요. 없는데, 그 당시 사람들 이사야를 어떻게 했습니까? 이런 새로운 노선을 이야기 했다는 그 죄목으로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는 톱에 켜서 죽임을 당한다고 돼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나요, 어떤 선지자는 “톱에 켰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이사야라는 거예요. 이거 믿든지 말든지 믿을 거 하나도 없지만. 톱에 켜서 죽임을 당한다는 겁니다. 이만큼 이사야는 심한 고생을 한 거예요.

그래서 4페이지에 보면, “나는 공연히 헛수고만 하였다. 괜히 힘만 뺐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사야의 내막의 전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깜짝 놀라게 하고, 이사야 주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놀래킴.
깜짝 놀라게 하고, 그 놀람에 의해서 갑자기 이사야에게 아기가 하나 생기고, 그런데 그 아기는 새로운 노선을 까는 한 아기로서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이새의 줄기에서 뭐가 나오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이새의 줄기에 성령이 임한 거예요. 아들 이름이 다윗인줄 알면서도 이새라는 이름을 붙인 겁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역사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놓인 분인 메시야에 의해서 된다. 이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거든요.

그분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약속대로 새로운 창조를 하는데 그 창조 속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몽땅 다----- 이런 사실을 알고 칙칙폭폭 꽤~엑 이라고 외치는 이 사람, 이 사람이 신약의 누구라 했습니까? 광야의 외치는 소리, 바로 세례 요한이 이 노선에 의해서 메시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의 파노라마입니다.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은 이사야에 획일성, 일관성 있는 내용이 없다고 해서 이사야를 3개로 쪼갭니다. 이사야 1, 이사야 2, 이사야 3. 그들이 그렇게 쪼개는 그것은 문체가 어쩌니, 스타일이 어떠니 하면서 이사야를 다 쪼개는데,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모든 신학자들이 동의해요. 심지어 칼빈도 동의하고, 리델보스도 동의하고. 이사야가 한권의 책이 아니고 3권의 책을 뒤에 그렇게 꿰맞췄다는 거예요, 서로 안 맞는 내용인데.

근데 생각해보세요. 이사야 편집한 사람들이 바보입니까? 오늘날 우리처럼 바봅니까? 조금만 논문 베껴도 베꼈다고 들통 나서, 부총리가 사흘 만에 쫓겨날 판인데. 논문도 그런데, 하물며 거룩한 성경을 기록한 그 사람이, 딴 사람이 썼다고 그것을 끼어 맞추고 그걸 모른 척 하고 시치미 떼면 그걸 모를 리가 있겠어요?

이새의 줄기가 한 아기와 연관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전부다 내용이 다른 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책들마다, 이사야 참고서마다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모든 신학 책, 주석 책마다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바보 같아요. 정말.  바보인지 믿음이 없는지 모르겠는데.

이사야 전체가 통일되어 있어요.  한 아기로써 통일되어 있는 책입니다.  만약에 여기 지금 아하스가 역사로 우긴다면 여기에 반드시 그들이 역사 속에서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 고레스라는 이방 왕이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로써 역사를 추구하는 너희에게 도움을 주러 올 것이다.  이러한 예언까지 해 버려요.  그러니까 이사야는 톱에 켜도 백번 켤 만 하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 오신다고 하니까 ‘구름타고 오시는 분은 예수님이 아니고 성철 스님이다.’ 이런 소리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성철 스님이 구름타고 온다는 거예요.  그것도 성령에 의해서.  맞아죽어도 싸지요.

그 말은, 성철 스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고, 성철 스님이 메시아란 말이 아니라, ‘현제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라면 결국 성철 스님 밖에 더 있냐!’ 이 말입니다.

지금 이사야가 말하는 한 아기를 기다려야 될 텐데 그게 아니고 현재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어떤 왕의 계열, 역사적 계열을 주장한다면, 결국 너희들이 기다리는 것은 고레스 왕이 메시아 노릇 할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원수 취급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려면 얼마나 부끄러운 줄 몰라요.  내가 가장 미워하고, 극도로 미워하는 사람에게 도움 받아보세요.  부끄럽지요?  제가 ‘저 목사는 완벽한 이단입니다. 이단입니다. 이단입니다.’ 그렇게 했던 사람이 우연히 길에서 만나 ‘목 마르실텐데 물 한 컵 줄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저는 조용기 목사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될 수가 있잖아요.

어떤 역사를 고대한다면 그 역사에 걸맞게 하나님께서 악한 영을 보내서 그렇게 역사하시거든요.  

이것만 찾아보고 이사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상 22장 21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천상회의에서 결정 난 회의 사항을 보게 되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악한 영을 이 땅에 퍼뜨려서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꾀도록 하는 조치를 하나님께서 천상회의에서 이미 땅 땅 땅(의사봉 치는 소리), 작정하고 악한 영들을 보내요.  마귀들을 보낸단 말입니다.  

그렇게 한 것은 한 아기를 부각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쪽을 다 알고 있으면 되지요.  그래서 양쪽을 다 아는 사람은 마귀를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양쪽을 다 아니까.  그런데 한 아기 쪽을 모르고 이쪽만 알게 되면 마귀한테 이기려고 환장을 해요.  아무리 애써도 마귀는, 괜히 마귀가 억울해요.  왜냐, 자기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데, 자기보고 마귀라고 하면 듣는 마귀 기분 나쁘지요.  자기도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적그리스도로 만들고 복음을 가리는 일을 자기가 열심히 해야 돼요.  맡은 일이 그것이기 때문에.  가만히 일 잘하고 있는 나에게 달려들어서 그런 소리하면 참 괴롭다 이 말입니다.

탤런트가 악한 역할을 할 수 있잖아요.  악한 역할 한다고 달려들어 갈비뼈 부수고 이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드라마 하지 말란 말입니까?  그거 안 되잖아요.

그만큼 마귀에 대해 달려들고 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역사에서 자기 힘으로 구원해 보겠다는 그런 헛된 시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은 완료 상태거든요.  완료 상태는 부족함이 없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호세아처럼 사랑 안에 거하기 때문에 사랑시스템은 모자람이 없는 시스템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남편이 있으므로 비로소 새로 발생되는 것이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이 먼저 있고 아내가 있기 때문에 아내에게 따로 뭘 요구하지를 않아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너는 나의 신부다.’ 이러면 끝날 문제지, 신부인데 ‘설거지 못하면 신부 아니다.’ 이러면, 가만히 있는 사람 뽑기는 왜 뽑았느냔 말이지요.  그러려면 나를 아예 신부라고 하지를 말지.

처음부터 호세아에서 남편과 아내의 사이는 사랑관계이기 때문에 율법관계가 아닙니다.  율법관계 같으면요 간음한 여인은 찾아갈 필요가 없어요.  율법을 능가하는, 찾아가서 값 치르고 하는 것이 사랑시스템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내 쪽에서 자기가 구원 받기 위해서 구태여 새롭게 첨가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내 남편은 누구다.’만 이야기하면 그만입니다.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해서 지옥 갑니까?  자기를 구원한 남편도 이야기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인자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시인 할 텐데, 쭉 줄 세워놓고 ‘이 중에 너희 남편 누고?’ 엉뚱한 사람 지적하면, ‘저게 미쳤다. 지 남편도 몰라보고.’ 이게 호세아 아닙니까.  이게 호세아라고.  지금 우리 식이 그런 식이라고요.  사장님이 예수 믿지 말라고 하면 ‘예, 예수 안 믿을게요.’ 이러고 있어요.  자기 남편이 사장이 아닌데.

구원을 자기 힘으로 구원하려니까 힘든 거예요.  내가 다음부터는 주일 지키는 직장 다닐게요. 힘들게 하는데, 주일 지키는 직장 다녀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불쑥 난데없이 남편 하나 등장해서 날보고 신부라고 이야기할 때, 그때부터 구원은 이미 종결된 겁니다.

이사야는 이렇습니다. 라고 제가 얘기 했는데 자꾸 우려가 돼요.
이사야 주제가 뭡니까?  놀래키는 거예요.  깜짝 놀래는.
이사야 몇 장입니다.  29장에 나오지요.  
예상치도 못하는 새로움을 자꾸 주니까 놀랠 수밖에 없지요.

자, 이번 시간에는 미가!

미가를 펴 봅시다.  대략 구약 1200페이지 언저리에 있습니다.  소선지서는 잘 안 읽기 때문에 어디쯤에 있는지 잘 몰라요.

미가의 주제는 뭐냐, ‘성전관리에 따른 책임 추궁 차원에서의 징벌’이 미가의 핵심입니다.  성전을 줘도 관리를 못하더라 이 말입니다.

어제 낮에 백전도사님 사모님이 수련원 직원에게 청소가 부실하다고 막 따지는 것을 제가 목격했습니다.  얘들이 많이 이용하는 시설인데 이들이 넘어지고 하면 먼지 다 뒤집어쓰고 할 텐데 이렇게 밖에 관리를 못하냐?  우리 유치원(사모님은 공립유치원 원장임)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거든요.  깨끗하다는 말이지요.  이곳 수련원은 돈만 챙길 줄 알지 그런 세심한 배려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설이 오래 돼서 지붕이 내려앉고, 에어컨도 계속 안 켜주고 여러 가지 불만이 있는데, 자본주의 사회가 되어서 이윤이 안 남아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개인적인 소유를 관리 못했다고 추궁하면, 주인이 “이게 당신거야! 당신이 지었어?  싫으면 딴 데 가지.  돈 많으면 더 좋은 시설에 가지 왜 여기 왔어?” 이럴 수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성전을 원하지를 않았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성전 관리하라고 하나님이 맡겨버린 겁니다.  모세 언약을 통해서 ‘성전 관리해!’ 하고 맡겨버려요.  ‘너희들이 거룩한 나라 되지 못하면 이 세상은 복을 받지 못해. 너희들이 복된 나라가 될 때 이 세상이 복을 받는 거야. 유지될 수 있는 거야.’ 라고 일방적으로 갔다 안겨준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세상의 뭐가 하나님 뜻대로 안 되면 그 원천을 찾아서 찾아서 가보면 그 원천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전 관리를 잘못한 그들의 책임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서에 있잖아요.  말씀 가르치는 자가 더 큰 심판이 있는 줄 알아라.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약 3:1)

야고보서를 설교할 때 주의할 것이 있어요.  야고보서 말씀대로 얼추(대충) 지켰다는 그 기준이 사람마다, 환경마다 다 다르다는 것을 목사님들이 알고 계셔야 됩니다.  목사는 목사 자기가 지킨 어떤 규칙을 기준으로 삼아서 나처럼 될 때는 말씀 지키는 것이고 나처럼 안 되면 말씀 안 지키는 것처럼 오해를 하는데 앞으로는 그렇게 오해하지 말고, ‘성령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이렇게 그 선을 하나님과 그 사람 책임으로 넘겨주시기 바랍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DNA를 받아서 말 안하고 묵직한 사람이 있어요.  아무리 웃겨도 안 웃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DNA구조가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야고보서에 ‘말을 많이 하면 실수하기 쉽다.’는 이 대목을 가지고 원래 하루에 25,000마디 말을 하는 사람이 25,002마디 하는 것하고, 하루 3마디 하는 사람이 6마디 말하는 것하고 어느 것이 더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까?  6마디 한 사람이 꼽베기로 많은 거예요.

‘술 취하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량이 달라요.  사람마다.  독일 사람들이 맥주 마시는 것은 그들 수질이 석회질이 되어서 물처럼 맥주를 마시는 것하고, 생전 술 못 먹다가 술 취해서 교회에서 술주정하고, 토하고 이것은 다르거든요.  그럴 때는 그 사람에 맞도록, 다른 말로 하면 역사에 맞도록 묵시가(성령께서) 그 사람의 역사를 어떤 식으로 고발하든지 간에 제 3자가 거기에 관여하기 곤란해요.  왜냐하면 제 3자는 나름대로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육을 가지고 있으면 기억이 있잖아요.  기억이 있으면 역사가 이뤄집니다.  

과거에 내가 두 잔 먹었는데 이제는 예수 믿고 한 잔 줄였다.  이것은 자기 역사지, 자기 역사.  처음부터 안 마신 사람한테는 아직도 술 먹는 나쁜 신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사람은 육을 갖고 있고, 육을 가지고 있으면 기억이 있고, 기억이 있으면 나름대로의 역사를 만들고, 역사를 만들면 역사에 따라서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그 역사가 기준이 되어서 그 다음 윤리적인 행동이 나오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각자가 다 다르단 말입니다.  그 때는 ‘이렇게 하면 됩니까?’ 라고 교인들이 묻더라도 그것은 ‘알아서 하세요. 당신 속에는 성령이 없습니까?’ 없으면 애초부터 신자도 아니고 내가 관여할 바 아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지. 맡길 때, 다만 결과적으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나는 죄인이며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못난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 사랑의 넘쳐 남.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증거다 이 말입니다.

아까 손 목사님과 대화한 대목이 이 대목인데 동의 하시지요?
감사로 넘쳐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전을 관리 할 때 성전 관리를 했냐, 안 했냐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성전을 왜 관리 안 했겠어요?  그 사람들이 성전을 관리하는데 미가에 보면 정기적으로 예배드리고, 제사하고, 그리고 제사장들은 나가서 백성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 임한 미가 선지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완전히 부실로 성전을 관리한 게 돼요.

미가 4장 1절 봅시다.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라고 되어 있지요?  2절에 보면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이것은 여호와의 산에서 나오는 신기한 능력이 심지어 성전 관리자가 아닌 이방 민족까지 몰릴 수밖에 없게 하는 어떤 능력이 성전을 제대로, 시온을 제대로 관리 했을 때만 나올 수 있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유대 나라는 그런 이방인이 몰리게 하는 그런 능력이 나오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자기 백성들조차도 저주받고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식으로 관리를 해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관리를 어떻게 했는가?
미가 3장 9절을 보면, 3장 9절 보기 전에 미가 6장 6-7절 봅시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하고 묻는 것은 ‘너희들이 그렇게 해 왔잖아. 하지만 그것은 성전 관리 차원이 아니다.’ 잘못 됐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미가 보기에, 3장 9-10절을 봅시다.  신나는 대목이지요.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지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지금 예루살렘을 관리하고 시온을 관리하라고 맡겨줬는데 이 인간들은 더러운 피와 더러운 죄악으로 아예 쌓는 거예요.  도배를 하고 떡을 치는 겁니다.  지금 이 대목 3장 10절을 이야기할 때, 예루살렘, 시온을 이야기했는데, 이것을 모르고 미가 6장 8절을 봅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대목에 있어서, 이것을 마치 하나님의 선지자의 뜻은 내가 올바른 인간 되는 것이다. 라고 이렇게 해석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핀트가 보통 어긋난 것이 아니에요.  

개인이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언약, 시온을 어떻게 관리 했냐 그 이야깁니다.  다른 말로 해서, 너 하나 구원 받고 이게 문제가 아니라 ‘이방 민족들이 몰려올 정도로 관리를 잘 했냐?’ 이것을 따지고 묻는 거예요.  

나 훌륭하면 나 혼자 구원 하면 됩니다.  이것 묻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그런 윤리, 도덕책이 아니고, 하나님이 맡겨준 것에 대해서 네가 똑바로 관리를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똑바로 하란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선지서 강의 제일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절대로 선지서 이야기는 똑바로 하라는 말이 아니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할 문제지 너희들은 끝났다.  손떼라 이 말입니다.  종말이니까 피하라는 말이 아니고, 종말은 네가 어떤 짓을 하던 종말은 계속 다가온다. 이런 뜻입니다.  종말은 변경되지 않는다.  취소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각오하라 이 말입니다.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해서는 안 돼요.  관리도 못하면서 어떻게 구원 받을까요? 이게 무슨 주제 파악도 안 되고 무슨 그런 욕심이 있습니까.  관리 안 되면 손떼고 지옥가야지.

성경이란 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책이 아니고, 주께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치므로 써 그것으로 모든 하늘나라가 성취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때리는 거예요.  두 분이 하신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그대로 이뤄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