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5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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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5
이 시간에는 <에스겔>을 합시다. <에스겔>에서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핵심귀절은 36장 32절에 나와있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찌어다” 아멘! 이 아멘을 해야 하는데요.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벌이는 것은 너희들 좋으라고 벌이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되리라는 겁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다 자기들 좋으라고 하는 일임을 염두에 두고 다 교회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뻔히 아시면서 하시는 말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너희들이 좋으라고 일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라는 말을 하고 있어요. “이렇게 내가 너희에게 뭘 행하든지 그것은 너희를 위함이 아님을 너희들이 진작에 알아 모셔야지. 눈치 채야지. 그것을 모르겠나?”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이용당한 것인가? 그렇다니까요. 우리는 이용당한 겁니다. 하나님한테. 그런데 그 하나님께 이용당하는 것이 피조물의 본래의 존재목적입니다. 창조주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것이 피조물로서 더 이상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문을 열때 “주여, 저를 이용해 주옵소서 마음껏 이용해 주옵소서” 이런 마음으로 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오늘 주님을 좀 이용하러 나왔습니다”식으로 나오니까 그것은 그 동네에 미용실 가게 문을 여는 것이나, 치킨집문을 여는 것이나, 극장문을 여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고 똑같잖아요. 내가 교회에 왔다는 힘든 노동을 했는데 뭔가 반대급부가 있어야지. 그러니 “신이시여 내놓으세요”. 그런데 에스겔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벌이신 일이 모든 것은 “결코 너희를 위함이 아닌줄”을 아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란 말이죠. ‘아하 나 좋으라고 벌이신 일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 때, 비로서 에스겔은 이해가 됩니다. 비로서 그때 에스겔은 이해가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누구 좋으라고 하는 일인가? 에스겔서 36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이렇게 일을 벌이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함이 아니라면 무엇을 위함이냐? 거룩한 내 이름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거룩한 내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기 이름이 영광을 받으면 모든 작업은 마무리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주기도문이 첫머리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유명한 주기도문의 첫머리가 아버지의 이름만 영광된다면 우리 할일 끝! 우리의 존재목적 종료됨. 끝나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하나님께서 저항할수 없는 은총을 주었다는 것을 오해하면, 그 은총을 내것으로 삼으라고 주신 은총이라고, 복주시려고 준 은총이라고 착각할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신 것은, 주신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그것이 좀 노골적으로 나와 있는 것이 시편 135편 4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아주 노골적이예요. 너무 노골적이어서 이걸 보고 유식한 사람들이 삐져서 기독교를 포기하는 일이 많아요.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순전히 자기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특별한 소유로 선택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백부장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새 이만한 믿음 가진 사람 못봤다고 하고 칭찬한 백부장의 말이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주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가 뽑혀 나왔다는 것을 그 믿음이 주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이걸 네글자로 줄이면 “까라면 까”가 됩니다. 군대용어죠.
<에스겔>을 보는 사람들이 궁금한게 있어요. 에스겔을 읽으면서 자꾸 마음속에 의심이 드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렇게 멸망, 심판, 저주, 저주, 되풀이 하는데, 그렇게 자기 백성을 저주하고 멸망시킬 것 같으면 애초부터 무엇 때문에 사랑을 주고 제사를 주고 선지자를 주고 왜 그런 모순된 짓을 했느냐는 겁니다. 병주고 약주지 말고 아예 병이 안생기게 하는 것이 오히려 신사다운 행동이고 자비로운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실컷 병주고 그다음에 약줘놓고 “나 훌륭하지” 라는 식이면 당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시큰둥 한거죠. 뭔가 손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간다는 말이죠. 처음부터 병을 안주면 좋을 것을 왜 병을 주고 그 다음에 낫게 해놓고는 “나 자비로운 하나님 맞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옵니까? “처음부터 아예 병을 주지 말지” 이런 생각이 든다는 말이죠. 여러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워낙 거룩한 성경말씀이기에 시비를 걸면 안될 것 같아서 숨기고 있지만 그런 내막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내막을 한번 에스겔서에서 풀어 봅시다. 원래 예루살렘이 이방민족의 땅이었습니다. 에스겔 16장 3절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성전이 있는 거룩한 땅 예루살렘은, 경배의 장소이며 거룩한 공간인 예루살렘은 그원천과 뿌리가 사실은 아모리 족속이라는 겁니다. 성경에 나온 그대로 하면 아주 참혹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땅이 원래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이 사는 땅입니다. 지금 성전이 있으니까 뭔가 거룩해 보이지 사실은 근본이 엉망이라는 말이죠. 보통 못된 시어머니들이 며느리 들어와서 행실을 잘못하면 “네가 친정에서 이런식으로 배워왔나 하여튼 근본이 없는 것들은 표가 나 표가 나” 이러거든요. 그때 며느리들은 상처를 받지요. 요새 그런 용감한 시어머니는 없습니다. “모실 사람이 누군데 함부로 그런 소리를 ---” 요새 겁나서 그런 소리 못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보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근본은 못속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징벌은 근본의 바닥에서 새로 시작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자구 아닌데도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고’ 하는 식으로 아는 척을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딱 깨놓고 그 근본부터 새로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파헤치는 작업이 징벌이고 징계입니다. 일체의 자기 잘남이 남아 있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징벌을 가합니다. 그렇게 징벌을 할때 하나님께서 마음이 시원하겠습니까?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1)번 시원하다. 2)번 안시원하다. 몇 번입니까? 에스겔 5장 13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에스겔 5장 13절 미리 보신 분이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1)번 시원하다. 2)번 시원하지 않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실컷 저주해놓고 뭐라고 했습니까? “씨원 - 하다” 무슨 심보가 이런 심보가 있습니까? 실컷 짓밟아 놓고 ‘속이 좀 시원하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잔인한 분인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네요. 그것은 사람들의 근본을 캐낼때까지 캐내는 것이 시원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꾸 자기를 위장하거든요. 처음에 인간들이 죄짓고 난 뒤에 첫 번째 한 행세가 뭐냐면 자기를 꾸미는 거예요. 옷을 만들어서 자기 치마를 해서 하체를 가리니까, 주님께서 가서 그 근본을 다시 캐냅니다. “네가 지금 뭐하고 있노” 말이죠. “네가 지금 어디 숨었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네가 지금 가린다고 해서 네 근본이 감춰진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취지에서 옷을 바꿔 입히는 겁니다. 가죽옷을 입히는데 그 가죽옷의 의미는 하나님이 친히 만들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들었다는 말은 하나님앞에 이미 수치를 당해야 마땅한 존재로서 너는 내 앞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친히 옷을 입혔다고 하는데, 옷이란 수치를 가리는데 쓰는게 옷이잖아요. 그 가리개를 하나님이 친히 만들었다는 말은 “네가 아무리 잘난척을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원래 가리기전과 동일한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수치를 가리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행하심에 의해서 가려지는 겁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네 수치가 굴러 내려갔다”는 것이 여호수아 5장에 보면 나옵니다.
(여호수아 5:8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신약성경에 오면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앞에 수치를 당치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나중에 하겠습니다만 스가랴 3장에 보면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새옷을 입혀줍니다. (슥 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그래서 마귀가 여호수아를 공박하려고 하다가 주께서 친히 입혀주신 그 옷에 의해서 마귀가 할말이 없는 거예요. 저사람 나쁘고, 저사람 못되었다고 고소와 고발을 막 하는데, 주님께서 “여호수아야 옷갈아 입을 시간이다”하면서 나오니까 깨끗해 졌다는 말이죠.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가 너를 고소하리요 너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라는 거죠. “누가 너를 고소하리요”
고소를 막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그 피를 여러분들이 헛되이 받지 않는다면, 그 피를 인정하신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고소 당할자가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율법에서도 해방자이기에 고소당할자가 아닙니다. 평생을 어떻게 살았든지간에 하나님앞에서는 고소당할거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다만 이세상에서 남에게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주님에게는 그런 것이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옆에 있는 강도처럼이요. 분명히 강도가 맞습니다. 직업이 강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낙원에 들어가는데 절대로 장애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는 그 주님의 초청장을 찢어버릴 어떤 마귀도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남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 <에스겔>을 하고 있는데 <에스겔>의 핵심이 뭐냐 하면, 근본을 끄집어 내는 겁니다. <에스겔> 16장에 6절입니다. 제가 지은 “지옥의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이 대목을 길게 나열했습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피투성이지만 살아라” 피투성이지만 살았다는 말은, 어떤 경우도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살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에스겔의 전체 목적이 무엇인가? 왜 에스겔에게 이런 말씀을 줬는가? 그것은 16장 63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다 같이 읽어 봅시다. 이것은 중요합니다.에스겔에서 이것만 기억해도 좋아요. 16장 63절 다같이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용서를 받고 난 뒤에 그 용서가 너무 크고 감사해서 이제는 궁지렁 궁지렁 하지를 못하고 “주여 감사합니다”는 말만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너의 원천, 근본, 진면목을 깨내고자 하는 것이 <에스겔>에 담긴 뜻입니다. 어떻게 캐내는가? “네가 내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았잖아”. “너는 더럽게 살았잖아”. 이렇게 이걸 전부다 추적해서 결국은 그것을 용서해 주기 위한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놓고 용서받아 놓고 그 다음부터는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를 못해요. 이름을 이렇게 지야 해요. 최같으면 최용서, 김같으면 김용서, 이 같으면 이용서. 박용서. 신용서. 이름도 용서로 지어야 합니다. 사실은 이름을 안지어도 용서가 가득 차야 합니다. 이 말씀을 성취하기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에스겔의 반열에서 우리를 찾아와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 에스겔의 이 모든 것도 다 포함되는 겁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면 성전은 어떻게 되는가? 성전은 철거되어야 하는 철거대상이죠. 성전이 철거되어 버리면 하나님의 뜻인 거룩한 예배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새로운 성전을 만들면 되지요. 우리보고 만들라고 하면 우리가 용서 받아놓고 또 실수하면 안되잖아요. 자 이점을 이야기해봅시다. 용서를 받아놓고서 그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사람이 과연 지옥에 가겠는가 안그러면 계속 천국으로 가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상당히 쉬우면서도 굉장히 어려운데요.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 지옥갑니다. 이 문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이런 질문 자체가 필요 없는 영역에 속해야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내가 짓잖아요. 용서는 만약 내가 용서를 따내는 식으로 받았으면 그 사람은 죄지으면 지옥갑니다. 내가 용서를 따냈으면. 흔히 교회에서 입찰을 많이 합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목요일 저녁에 입찰을 많이 합니다. “교육관 짓는데 돈낼 사람 손들어봐라” 하면서 장로에게 눈치를 주면 백만원. “또, 또! 100만원이 나왔는데 또! 150만원 나왔습니다. 좋습니다. 150만원 나왔는데 또 없습니까? 없으면 지나갑니다. 또 없습니까? 200만원. 좋습니다. 축복받습니다. 드디어 축복의 점수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200만원 이상 축복받습니다. 없습니까? 250만원” 그래서 부흥회에 참석한 어떤 아가씨가 지혜를 끄집어 냈지요. “35억” 불렀습니다. “감사합니다. 35억 나왔습니다”. 나중에 35억 적어서 냈지요. “아가씨! 무슨 돈이 있어서 35억을 적어 냈습니까?” 하니까 “어차피 장난인데 장난도 못치나!!” 어차피 장난인데. 원래 교회는 장사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 교회인데 어차피 장사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경찰에 고발할 것도 아니고요. 어차피 부도난 것 아닙니까? 어차피 부도난 것 아예 350억 적어내 버리지요. 그것은 또 너무 높이 잡았나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용서는 어떤 값도 치르지 못하도록 만드는 규칙이 있어요. 어떤 값도 용서를 대치할만한 것이 없도록 만들어서 용서를 줘버립니다. 그것을 값없는 피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마지막에 보면 값없이 주는 생명수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자도 오라 할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지금 에스겔을 보는 사람이 답답해요. 왜 답답하냐 하면 “네가 내 이름을 훼손했고, 벌거숭이인데도 불구하고 구원했는데 이제와서 그런 나쁜짓을 했으니 너는 저주받으라”하는 말을 자꾸 하니까 ‘그러면 나는 이제 새로운 성전을 지어야 구원을 받는구나’라는 식으로 오해를 자꾸 하는 겁니다. 그것은 에스겔 전체를 조명하지 못하기에 그러한 시험에 드는 겁니다.
에스겔서 37장 13절에 보면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여호와께서 무덤을 열어 줄때 돈을 얼마나 가져다 드리면 이 무덤을 열고 나올수가 있습니까? 무덤을 열고 나온다는 말은 일체 내쪽에서 무덤 열만한 시도를 한적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무덤에 들어간놈이 “어이 잘못묻었다. 아직 안죽었는데 왜 묻었나?”한다면 그것은 죽은놈이 아니라 산놈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거기서 어떤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고, 십일조를 해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죽은 것으로 간주해요.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으면 그것은 무슨짓을 해도 그것은 구원에 보탬이 안됩니다. 구원은 무덤문을 열고 제쳐 줄때 되는 거예요. 그런 일은 성전이 제대로 돌아갈때만 나오는 효력인데, 문제는 그 성전을 누가 만드느냐 하는 거죠. 내가 용서를 따낸후에 죄를 지으면, 그것은 구원을 못받고 지옥에 갑니다. 주님께서 용서를 했다는 말은 그냥 죄가 있기 때문에 용서가 되는거예요. 죄가 없는데 무슨 용서가 있을수가 있습니까? 죄가 없는데.
요즘 TV 프로에 참 재미있는 것이 있어요. 내용은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얼른 보니까 이런 내용이예요. 고등학교에 깡패가 둘이서 깡패짓을 하는데 조재진이 비슷하게 닮은 사람이 와서 “어이 너 뭐냐”고 하니까 “나 깡패야” “너 싸움좀 하나” “나 쌈 못해” 이것은 허풍을 떨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어떤 능력이 없으면서. 용서란 이미 죄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용서가 계속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아까 그 깡패하고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여러분 지금 거의 눈치를 못챌거예요. 내가 잘난체를 하면 주님의 용서가 무슨 가치가 있냐는 말입니다. 아까 그 깡패 이야기가 이렇게 연관되는 겁니다. 내가 죄를 적게 짓고 많이 지었다는 그것이 주님의 용서 앞에서는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뻔히 다 아는데 허풍을 떨지 말라는 말이죠. 잘할수 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겠습니까? 다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졌는데요. 그럼 목사님. 이말 맞잖아요.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자는 죄를 지으면 주님으로부터 계속 구원되는가라고 할때 계속 구원된다고 할때 맞지 않습니까? 어허이. 진짜로 용서를 받은 사람은 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니까. 질문자체가.
“엄마 나 지금 딸인데 어떻게 하면 아들이 되지?” 이런 것은 질문자체가 말이 안되죠. 질문 자체가. “너 뭐냐?” “딸이야” 딸이면 딸로 살지 아들 이야기를 왜 하느냐 말입니다. “괜히 해 봤어” "괜히 하지마. 앞으로 괜한 질문 하고 그러면 맞는다” “용서 받고서 또 죄지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뭄뚱아리가 서로 다른 몸뚱아리를 연결시킨 거예요. 용서 앞에서는 다시 말해서 십자가앞에서는 주께서 죄를 용서해주었기에 죄라는게 결과론 적으로 남아 있지를 않지요.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바른 교회를 해보자는 것은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되요. 교회란 것은 결과론적으로 태어날 때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그걸 뭐라고 하지요?”
“예 그걸 결과론적으로 교회라고 합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지 “우리 건전한 교회 괜찮은 교회 해볼까?” 해보세요. 그게 되는가? 시발적개념의 교회라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에 그냥 나타나는 현상이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성전을 누가 세우는가? 제가 아직까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은 누가 세우는가 하면 이것은 다윗이 세웁니다. 다윗이 세우는데 문제는 그 다윗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에스겔서 37장 23절 24절에 보면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한 목자가 있을것이라” 이렇게 나오거든요.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성전값도 못한다. 왜? 인간의 원천을 고발하기 위해서 있는 성전이기에 그 성전이 깨지면서 동시에 너는 내 백성이 될 수 없으며 너희들의 모든 행실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성전만이 무덤을 열고 구원하는 능력이 나오는데 그능력은 에스겔 뒷부분에 가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 나와요. 처음에는 무뤂까지 차다가 나중에는 허리까지 차고, 생명수가 에덴동산처럼 흘러서 온 만물에생명수가 넘치는데 문제는 이 성전을 누가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성전은 더 이상 인간의 손에 맡겨지지 않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데 하나님이 만드시는 성전의 이름을 가지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 성전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성전만이 우리에게 무덤문을 열게 하고 살게 하는 영생을 허락해 줍니다. 그러면 과연 그 성전이 성사되었습니까? 이 질문이 중요한 질문인데요. 만일에 그 성전이 만들어 졌으면 더 이상 우리가 성전만들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고, 성전이 아직 안만들어졌으면 우리가 성전을 만들어야 할 부담을 지게 되고요. 둘중의 하나입니다. 성전을 이미 만들었다면 성전을 만들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복음을 모르는 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우리가 성전이기에 그 성전을 자기 몸을 깨끗케 하는 식으로 거룩한 성전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겁니다.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성전을 만들어서 뭐할것인데요? 우리가 하나님입니까? 세상에 성전을 완벽하게 만들어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성전을 만들분이 따로 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한테 설계도만 제시하면 그만이죠. 텔레비에 나오는 목사들이 자꾸 거짓말을 하는데, 성전이 깨끗하지 못해서 너희들이 하는 사업이 안되고 가정에 우환이 있다는 겁니다. 문제의 원인은 성전이 더럽기에 징계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 겁니다. 해결책은 성전을 깨끗이 하면 된다는 겁니다. 무슨 놈의 성전이 10% 더럽고, 20% 더럽고, 30% 더러운 그런 성전이 어디 있습니까? 무슨 수련장입니까? 지금 청소합니까? 청소상태가 10% 잘되있고, 20% 잘되어 있고 이런식으로요. 아파트 청소도 한달에 한번씩 한다는데 그러면 내 청소는 하루에 몇 번 해야 합니까? 때마다 세시에 해야 하고 다섯시에 해야 하고 시간 맞춰서 청소해야 합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큐티를 하는 사람과 비슷하게 되어 버렸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정결한 마음으로 한번 청소하고 - 청소를 안하면 악한 일곱귀신이 몰려오기 때문에 - 오후 되면 못미더운 마음에 한번 청소하고, 저녁때 또 찬미의 제사를 드려서 청소하고, 그러면 때가 좀 없어 집니까?
성도가 예수 믿고 나서 해야 될 일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목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자꾸 물으니까 목사가 그따위 식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성전청소 잘하라는 그 따위 식의 답밖에 할줄 모르는 거예요. 경상도 말로 면경 - 거울인데요. 그 오래된 용어를 들어 보셨습니까? 이것은 어른들은 잘 아시지만 청소년들은 잘 모릅니다. 11500명에게 물었는데 아무도 모른다고 -을 닦는 식으로 자기 마음을 윤내고 광내고 반짝 반짝거리게 하고요. 기껏 그짓을 해봐야 나오는 것은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노” 그것밖에 나오는 것이 없어요. 자칭 백설공주. 자칭 백설공주. 참 불쌍해요. 그런데 속아넘어가는 것을 보면 참 불쌍해요. 성전은 우리가 만드는게 아닙니다. 주께서 만들어 주는데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그 방식도 우리가 우리 기술을 동원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하는 것은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어떻게 깨끗하게 하느냐 하면 - 술먹었는데 술먹지 마라, 담배끊어라는 식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고 - 십자가의 피로 “너는 아예 죽었다”고 확인시킴으로 말미암아 통째로 우리를 없애는 방식으로 성전되게 하는 거예요.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이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것보다 더 깨끗한 면경(거울)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세요. 없어요. 내가 살아서 광내고 빛내봐야 이것은 걱정거리가 생겨요. 왜냐하면 또 어디서 내가 싫어하는 이웃이 와서 슬슬 성질 돋우면 또 더러워질거라는 그 걱정. 아침 큐티해서 깨끗하게 닦아 놓은 마음을 오후 2시에 빚쟁이가 와서 한소리 해버리니 갑자기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욕설, 그 욕설이야 그동안 훈련을 해왔기에 욕설도 아주 고상하게 하는 욕설, “에이 이 나쁜 사람아” 이런 것. 와 너무 고상해요. 욕도 고상해. “이 오징어 같은 사람아” 이런 정도로. 좀더 심해봐야 “저질이야 저질” 이정도. 와! 면경 참 잘닦아 놓았다. 욕이 그정도 밖에 안나오니.
고신측 목사들은 성질나더라고 용어를 가려가면서 해라는 거죠. 그럼 어떻게 하느냐. 간단하죠. 표준어를 동원해서 “당신 저질이야 저질” 그정도 하는 거죠. 주께서 원하는 것은 “남보고 저질이라고 하는 너나 없어져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독사의 새끼들아” 하면서 욕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이것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니까 참고해서 들으세요. 이것은 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개새끼라고 하면 개가 화를 내기 때문에 독사의 새끼라고 한겁니다. 옆에 있는 점잖은 개가 화를 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개만도 못하다고 한겁니다. 이런 뜻은 성경에 나옵니다. 구더기만도 못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귀보다 더 나쁜놈은 없다는 뜻으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한것입니다. 그걸보면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해놓고는 본인은 욕을 하고 있고요. 이중인격자로 보이지 않습니까? 역시 예수님도 남자라서 분은 참지 못했던가 보다 하면서 역시 예수 보다는 부처가 났다고 이런식으로 점잖게 이야기들 하는데요.
예수님의 깨끗함의 근거는 우리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고 욕도 안하고 살면 되는데 왜 이렇게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 넣느냐 하면, 우리가 착하게 살아도 그것은 내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성전은 그것은 성전이 아니고 나라를 인간을 모시는 나의 영광을 위한 신전이죠. 나라는 인간을 모시는 신전이죠. 어떤 아파트에 가면 그런 것 볼수 있어요. 애들에게 요즘은 방 하나씩 다 주잖아요. 방을 하나씩 주면 이방은 누구 누구의 방이라고, 예를 들어 이 방은 심지원의 방이라고 딱 해놓았어요. 이것은 엄마라도 이 영역에 대해서 함부로 할수 없다는 뜻입니다. 들어올때도 노크해야 한다는 거죠. 그것이 얼마나 솔직한 이야기입니까? 인간은 각자 각자 자기의 영역과 자기만의 성채를 갖고 있어요.
이것을 라이프니츠는 “단자”라는 용어를 씁니다. 모든 것이 개별자로 따로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비록 같은 형제라도 하나님이 주신 형상이 서로 각기 다르기에 각자의 행동에 따라서 각자의 심판과 구원이 결정된다고 본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에게 속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집단 심판 받습니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다만 구원받는 사람이 마지막 나타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이름이 바뀌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받지 절대로 자기 이름으로 구원 못받습니다. 제가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합니다. 절대로 자기 이름으로 구원못받습니다. 우리 이름을 계속 유지 하신다면 죄송합니다만 그 이름 가지고 지옥가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구원받을 이름을 준적이 없습니다. 이게 사도행전 4장 12절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로마서 10장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이름에 대해서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까라면 까”라는 말이죠. 이제는 자기 이름 내세워서 주의 이름에 순종못하겠다는 그런 식은 안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성전은 안에서 어떤 활동이 일어나냐 하면, 우리를 죽은자로 무가치한 자로 간주되는 행복을 느끼게 하는 곳이 성전입니다. 성전은 계속해서 우리를 죽은자로 간주하는 곳이예요. “목사님! 저는요. 예수 믿어도 제 이름을 계속 내세우고 싶은데요. 저는 헌금해도 내 이름으로, 기도해도 내 이름으로 전부다 내가 했다고 여겨지는데 그러면 저는 성전이 아닙니까” 그러면 제가 묻지요.
하루에 일초라도 내 이름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느낍니까? 일초라도.
아닌데요.
그럼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아니요.
그럼 에라 더 보태서 십년에 한번이라도.
예. 십년에 한번은 있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이예요.
왜 그러냐 하면 십년에 한번이라도 그 한번이 확률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이 확률입니까? 한 천번을 시도해서 한번 되어서 물위를 걸었습니까? 에스겔 3장을 보겠습니다. 에스겔 3장 12절부터 15절까지를 보고 두 번다시 에스겔을, 그리고 성경전체를 다시는 안보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왜 그런가? 이유가 나옵니다. 3장 12절부터요.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내 뒤에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찌어다 하니 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생물 곁에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 그 다음에 14절도 보세요. “주의 신이 (골리앗 크레인이죠) 나를 들어 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어디로 데려가냐면) 15절에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가에 거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민답히 칠 일을 지내니라” 백성들이 사로잡혀 있는 멀리 있는 그발강가에다 처박아 버렸다는 겁니다.
왜 이 대목을 보고 두 번다시 성경을 안보겠다면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느냐 하면, 성경이란 나의마음의 거울을 정화시키고 좀더 거룩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훌륭한 말씀을 먹고, 교육받고 양육받기 위해서 들었다는 거죠. 그런데 여기 에스겔에 들이닥친 이 사건은 이것이 연습해서 될 문제입니까? 이것은 빌립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시에 있던 사람을 신이 들어서 갑자기 광야로 데려가서 이디오피아의 장관인데 내무대신이나 재무장관 같으면 좀 품위가 있지만 내시 “마마--” 하는 내시같은 인간을 만나게 한다는 말이죠. 그럴때 “빌립 네가 얼마나 잘났어” “에스겔 네가 얼마나 잘났어”. “나도 곧 따라 붙을거야”. 따라 붙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누가 자기를 한평생 골리앗 크레인처럼 들어 올리는 사건이 없었거든요. 그러면 포기할거냐 말거냐 이런 고민에 빠지는 거예요. 차라리 나를 정화하는 용도로 쓸 것 같으면 성경보다 맹자나 공자를 보는 것이 낫고 성경은 해괴망칙하다는 겁니다. 이 말은 꼭 들어 올려야 되고 또 꼭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져야만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나의 온 몸을 씻었다는 그 믿는 기적이 들어 올리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인 것을 그것을 믿는 사람만이 성도입니다.
용서받은 후에 내가 죄를 지은 후에 구원을 받습니까 하는 말에서, 이 용서받았다는 말이 교육받아서 될 문제가 아니고, 진짜 용서 받은줄을 아는 사람은 진짜 들어 올리는 것 이상의 큰 기적을 받아야 용서받은 몸이 온전한 몸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요. 그러니까 자신 만만하게 남은 생애를 살아가죠. 자신만만하게. 진짜 겁 없이 살지요. 교회에서 뭐라고 하든지, 노회에서 뭐라고 하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용서받은 것이 있으면 더 이상 겁날것이 없어요. 그걸 자유라고 하는데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 참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봅시다. 에스겔 16장 63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다고 해서 그걸로 구원받았습니까? 다시 물위를 걸으려고 할때 그는 물위를 걷지 못했습니다. 한번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그 기적이 연장되는 법이 없습니다. 동일한 기적은 십자가의 기적외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기적이고, 들어 올리고 내치고 하는 식은 자칫하면 다 자기의 자랑거리가 될뿐이죠. 자기이름을 드러내는 것 뿐이고 문제는 자기를 부인하는 그런 기적을 내지 못해요. 여러분 제가 묻습니다. 한번 들어 올리고 지옥가는게 좋습니까? 용서를 받고 천당가는게 좋습니까? 아까 병주고 약주는 것이 좋습니까? 안아픈게 좋습니까? 할때 안아픈게 좋은것처럼 한번 들어 올리고 다시는 못들어올리는 것이 좋습니까? 아예 안들어 올리고 예수 믿고 천당가는게 좋습니까? 천당가는게 좋습니다. 십자가옆에 달린 강도는 강도짓을 할때 한번도 들쭉 날쭉 한적이 없습니다. 강도짓을 할때 주께서 옆에서 멈추라고 한적도 없고 계속 강도짓을 한겁니다. 체포될때 기적으로 빼준것도 없습니다. 그냥 체포된겁니다. 사형당할때도 기적으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옆에 있는 강도는 겁이 나서 당신이 구원자라면 살려달라고 했지만 “같이 죽자 같이 죽자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그럴때 구원받은 거예요. 이것은 우리 이름에 의해서 벌어지는 것은 어떤것도 구원에 보탬이 안된다는 행복을 우리에게 줘요. 내가 한 행동이 구원에 보탬이 안된다는 것이 우리에게 오히려 무거운 짐을 벗게 하는 행복한 소식입니다.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아무것도 안했는데 구원받았다는 이런 사람보다 더 편한 사람 나와보라고 하세요. 없어요. 참 편해요.
목사님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해서 방종을 하잖아요. 방종을 하든지 방귀를 뀌든지 간에 이게 맞는 말인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맞는 말인데. 방종하는 그 사람은 용서받은 것을 자기의 수완으로 따내려고 하니까 그게 방종으로 흐를 수밖에 없지요. 용서받은 후에 부끄러워서 봉사를 더 하고 사랑하는데 이게 정상인데, 방종으로 흐른다는 말은 처음에 용서받은 것이 그게 가짜기 때문입니다. 가짜를 내보고 우야란 말인고. 지 가짜 하겠다는 뭐. 내가 지 피조물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가짜를 하겠다는데 제가 어떻게 말리겠어요. 가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알곡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가짜가 발생되더라도 겁낼 필요는 없고, 진짜는 용서받은 후에 자기를 낮추면서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는데 그 모습이 당당하더라는 것입니다. 뭔가 캥기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 앞에 당당하고 자유로움속에서 그것이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은 하나님이 성전을 만드신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죽고난 뒤에 사흘만에 부활할 때 비로서 그것이 예수의 몸이 성전인줄 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은 이미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성전은 어떤 성전이냐 하면, 이제는 예수님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고 해서 그 성전안에 집어 넣어주는 작업만 남았습니다. 그 작업이 뭐냐하면 그것이 바로 영적예배라는 겁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겁니다. 성령이 와서 자기 주제파악을 한 상태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영적 예배입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성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가지 작업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가짜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세워져 있는 겁니다. 인간이 만든 성전이기 때문에 사정없이 날려버립니다. 성전이 깨어졌으면 또 성전은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에스겔서에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나옵니다. 성령이 나오는데 보좌가 움직여서 이동하면서 성령을 보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일차로 인자인 에스겔에게 옵니다. 에스겔은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면 옛성전이 무너져야 된다는 이유를 말하고, 새로운 성전이 다가온다는 이유를 말하는 그런 중간입장에 에스겔이 서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 전하면 안됩니다. 에스겔은 매우 심한 고난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기존의 것을 물리치고 새로운 것이 온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 듣든지 아니듣든지 전할 수밖에 없어요. 옛성전은 거룩하지 않기에 무너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새로운 성전을 만들려면 거룩이 보장되는 사람에 의해서 성전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에스겔의 의해서 세워지는 성전, 에스겔이 세우는 성전이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 에스겔이 계시로 먼저 받았던 성전이 나옵니다. 이 성전은 뒤에 치수가 정해져서 나오는데, 이성전을 에스겔을 중심으로 짓는 그것은 장차 올 다윗의 후손인 하나님이 성전을 지을때 기본 모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어떻게 보여주는가?
에스겔 37장 4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오죠? 골짜기가 나오는데 그 골짜기에 뼈들이 수북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묻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자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망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뼈가 축축한 것 같으면 몇백년이 흐른뒤에 DNA가 살아서 뭐가 될 수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바짝 마른뼈예요. 아주 말라진 뼈입니다. 에스겔이 뭐라고 대답하냐면 “주여호와께서 아시나이다”고 합니다. 참--이 답변이 얼마나 무책임한지요. 욕을 얻어먹지 않으면서도 정답에 가까이 가는.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런게 여러군데 나오지요. 요한복음 마지막에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니까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어요. “사랑을 하냐 안하냐 똑바로 이야기 해라 똑바로” 이렇게 하니까 “주께서 아실걸요?” 그게 뭐냐 하면 엉터리라는 뜻이예요. 엉터리. 그 낌새를 알아 차린 거예요. 내가 사랑한다고 해봐야 그것이 정답이 안된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냥 에스겔을 가지고 노는 거예요. 피조물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에스겔을 뽑은 거예요. 에스겔의 위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제가 에스겔을 처음 시작할때부터 이야기 했죠. 하나님의 모든 일은 에스겔 위주가 아니고 자기 좋으라고 하는 일이예요.
능히 살겠느냐
주께서 아시나이다(멍청하게)
그럼 한번 봐라(보는데 말씀하니까)
뼈들이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생기면서 군대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그 군대는 뼈입니까? 뼈 아닙니까? 뼈지요. 뼈입니다. 다만 그 움직이는 동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움직일때만 살아 있고, 말씀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다시 뼈로 환원되어야 합니다. 처음에 인간을 만들때 흙으로 만들었지요. 그 이름이 아담입니다. 아담이 말씀을 어길때는 다시 원래의 모습인 흙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너는 흙이나 흙으로 돌아가라” 우리는 사실은 손해본 장사는 한적이 없습니다. 흙이 흙으로 돌아가는데 울고 불고 난리라. 사람이 빈몸으로 와서 한평생 옷한벌 걸쳤으면 수지맞는 장사잖소? 도데체 우리가 뭐가 문제입니까? 햇빛줘, 공기줘, 수박줘, 강냉이까지 줘. 수련회가 뭐가 문제인데요? 맛있게 먹었으면 되었지 뭐가 문제입니까? 수지 맞는 장사가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이 허락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생명까지 얻어 챙겼으니 세상에 부러울것이 없어라. 이 세상에 정말 부러울것이 없어요. 예수님의 생명이 있으니 거지 나사로가 거지이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천사가 대동해서 아브라함 품에 안겼어요. 그리고 거기서 제 2의 인생을 개시했습니다. 부자는 제 2의 인생 완전히 꼴아 박았습니다. 세상에 놀음을 해도 그렇게 꼴아박는 사람은 없어요. 인생전체를 걸고 막 놀음을 했는데, 결국 부자 꼴아박고 거지는 완전히 대박났습니다.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그런데 그 부자의 동생들도 덩달아 다 죽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한다는 이 기본, 우리가 필요해서 하나님이 있지 않다는 이 신관의 전환, 신이 다르다는 이 사실. 이것은 성령의 기적을 받지 아니하면 엉뚱한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에게 그냥 사용당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와서 모셔서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맘껏 사용할 때, “가라면 가라 오라면 오라” 는 식으로 될 때,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직접 주님께서 우리에게 방문해서 얻어진 결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뭔가 차이나는 점이 있어야 되는데, 세상 사람은 자기의 위신과 명예와 이름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그렇게 삽니다. 하지만 우리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분이, 따로 기적적으로 들어와 계셔서 주의 십자가의 복음의 고귀함을 증거하라고, 순간 순간 일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로써 주님이 우리보다 강함을 늘 반복적으로 깨닫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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