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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4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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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4

아모스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통과하는 식으로 심판한다.  그냥 위에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들 안에 통과하시면서 불도저처럼 통과하면서 심판하는데, 그것이 독일 병정이라든지 로마 병정처럼 거룩이란 것을 앞장세워서 저벅저벅 다가오면서 그 거룩을 당해낼 어떤 수안이나 방법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그들은 제사, 찬양, 예배는 드렸지만 그들의 경배의 장소, 거룩한 공간을 공격하므로 말미암아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간의)자기 공로로 구원될 수 있는 여지를 아주 박살내는 그런 식으로 아모스는 멸망을 선포합니다.

호세아에서는 남편이 새로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아내가 등장하는 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십계명 가운데 간음죄가 별로 중요한 대목이 아니었어요.  우상 숭배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 등이 있지만 갑자기 모든 것을 통합하는 법으로써 간음법이 등장한 것은, 사랑 관계 시스템으로 나갈 경우에 간음이 바로 심판 받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명시하는 겁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나와 있지요.  이것은, 사랑이란 관계에서 사랑을 사랑으로 모를 경우에만 구원 받고, 지옥 간다는 말은 인간 편에서 아무리 선을 행해도 남편 주는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착해도 그것이 십자가의 공로를 대체할 만한 대체물은 될 수 없다.  인간이 아무리 예배 잘 드리고, 전도 많이 하고 해도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대체할 만한, 첨가할 만한 대체물은 되지 못하는 겁니다.

남편이란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 호세아에서 최초였습니다.  그전까지는 하나님 또는 아버지로 등장했지만 남편으로 등장한 것은 호세아가 처음이고, 그 남편 입장에서 과거 출애굽까지 해석을 해댑니다.  ‘내가 남편인데 신부인 너희들을 출애굽시켰다.’ 이렇게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야기한 것이 이사야였습니다.  이사야에서는 놀래키는 것이 주제였다. 그렇게 했고, 그 다음에 미가에서는 뭡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제대로 관리했으면 이방민족까지 몰려올 것인데, 그만한 능력이 쏟아져 나오는 건데, 그런 능력이 나오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뜻한 시온성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진정한 이방인까지 몰려오는 성전은 바로 성령이 임해서, 성령이 임한 이방민족이 주를 향하여 나올 때 그것이 진정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의 완성입니다.

자, 오늘 이 시간에는 예레미야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예레미야를 하면서 제가 그림을 크게 그리면서 시작하겠습니다.  둘째 날 오전 강의가 힘들기 때문에 그림을 많이 사용하겠습니다.

이 그림은 인간입니다.  예레미야와 다른 선지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다른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이 주어지면 그걸 내뺏는 식으로 그대로, 당구공이 부딪치면서 탄성 그대로 에너지 유지하면서 반사되어서 전달됩니다.  그렇게 전할 뿐입니다.  사자가 부르짖는 것이 두렵지 아니하냐?  적군이 오는 것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오는 대로 나오는데,

예레미야의 특징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높은데서 와서 기계적으로 뜅겨나가는 것이 아니고, 안에 내부까지 들어와서 예레미야 그 본래의 본성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1차적으로 예레미야 내부에서 부딪친다는 이런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자체가 하나의 moving 움직이는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말이, 그 취지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미술 전공하는 사람이 있어서 뭘 해도 다 걸리는데, 미술사에 보면 인상주의라는 것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모네, 마네 이런 사람들 어떤 성당 그림을 그리는데, 성당 그림이 희미해서 윤곽이 안 나타나요.  아침에는 노란색 낮에는 보라색 저녁에는 파란색, 같은 성당 그림을 같은 지점에서 그렸는데 희미한 색체가 떡칠을 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게 전부다 똑같은 성당 그림을 그리면서도 윤곽이 희미한 채 뭔가 반사되는 빛만 그려져 있어요.  

이거는 뭐냐 하면, 도대체 성당의 색깔이 뭐냐를, 시시각각으로 색깔이 다 다르다는 말이거든요.  그것이 인상주의라는 겁니다.  성당을 보는 그것이, 성당 색깔이 오후 2시 때 빛의 반사의 색깔과 오후 4시 때 빛의 반사가 다 다르니까, 이것은 실제 성당이 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당을 보고 있는 그 화가의 어느 시점에서 화가의 눈에 어떤 빛으로 다가오느냐가, 그것이 진정한 하나의 새로운 미를 창조할 수 있는 사건화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 그렇게 되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화가는, 감정이란 것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무엇이 진실이냐 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보느냐가 의미가 있고 거기에서 의미가 생겨나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그대로 그리려고 하면 사진을 찍어 놓으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그림을 그리겠습니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 사물에 대해서 내가 재해석 한 것을 작가의 입장에서 화폭에 남기는 것.  그것이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예술가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겁니다.

이것은 그림 그리는 주체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하는 겁니다.  운동이죠.  내가 변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여기 매직이 있는데, 이게 뭐냐? 매직이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뭐냐? 하면 ‘시커먼 것.’ 이렇게 되지요.  뭔지 모르지요.

‘이것이 무엇이냐?’ 하는 그것이 동일하게 ‘매직이다’ 이렇게 나와 버리면 거기서는 인간이라는 인격이, 주체의 가치가 거기서 담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뭐냐?’ 이것은 매직이다. 이렇게 되면 안 되고, 내가 옛날 어느 날 강의 할 때, 그 때 그 기억과 과거가 묻혀서 매직에 대해서 내가 어떤 사건이 있어서 이야기 했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내가 생생하게 하나의 존재의 의미로서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지금 예레미야를 설명하는데, 예레미야는 기계처럼 하나님의 뜻이 있다.  전한다. 그러면 되는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떨어진 이것이 인간 내부에서 어떤 모습으로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가를, 그 아픔을 예레미야가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제가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실제로 성경 보는 것이 더 낫겠지요?  
구약성경 1082페이지, 안 찾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20장 7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보세요.  주체가 살아 있잖아요.  하나님 때문에 내가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책임지세요.  그런 반발.  이것이 불신자에게서 나오는 반발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나오는 반발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교회 나오면 착하게 살고 반듯하게 산다. 이렇게들 생각한다고요.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 하신다면 예레미야에 비하면 큰 오산이에요.  참 잘못 된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반발이 일어나고 하나님에게 대듦이 성립되고 참을 수 없는 기분 나쁨이 새로이 발생되는 거예요.

깜짝깜짝 놀라는 것은 제가 이사야에서 이야기했고,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제가 아까 모네, 마네 이런 인상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사물이 뭐냐, 하나님이 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왔을 때 나는 어떠한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반응들이 발생되느냐가, 이것이 새로운 마지막 때의 계시자로서의 합당한 태도다 이 말입니다.  

설교자가 자기설교에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성경본문 그대로 읽어버리면 될까요, 안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자생력이 있어서 말씀이 나와서 말씀대로 성취해서 돌아온다면, 그러면 나는 목사로서 교인들을 구원 한다면, 성경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읽어버리면 되겠네?  그렇다면 설교할 동안에 성경구절 그대로 읽어버리자. 라는 식으로 나간 설교자가 있어요.  그렇게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박희천 목사라고 설교학을 가르쳤던 총신 교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연세가 많습니다만, 그분이 이렇게 했습니다.  1대지, 2대지, 3대지 나누고, 나는 그 대지가 돼지인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그분에 의하면, 성경에다 인간적인 해석을 섞지 말라. 성경대로 해라.

예를 들어, ‘심히 놀랬다.’고 하면, 이렇게 해석하라.  그들은 놀랬다.  어떻게 놀랬는가?  성구사전 보면, ‘놀랬다’는 대목 다 나옵니다.  다 찾아서 역대기에서 놀랜 것 이야기하고, 열왕기에서 놀랜 것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사무엘에서 놀랜 것 이야기하면 벌써 한 10분 지나가잖아요.  그 다음에 “심히 놀랬다”해서, ‘심히’를 성경에서 다 뽑는 거예요.  창세기에서 ‘심히’ 나오는 대목 다 뽑아서 읽고, 요한복음에서 ‘심히’ 찾아서 읽어드리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한 20분 지나요.  그러면 설교 끝.  

일체 인간들의 것을 섞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신학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고, 똑똑한 초등학생 하나 불러서 성경 구절 찾도록 해서 그렇게 설교하면 됩니다.

설교자는 예레미야처럼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 말씀 듣고 이렇게 화딱질 났다는 것을 고백하는 순간이 설교시간입니다.  ‘나는 이 본문보고 이렇게 화가 났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 들었다.’  그것을 그 본문과 더불어 자기고백을 설교시간에 내 뺏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은 목사의 자기 고백이지 어떻게 설교가 되겠느냐?’  세상에 목사가 자기 고백 아닌 설교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총신에서 세미나 할 때 발표를 하니까, 서울 큰 교회 부목사로 있다가 다른 교회로 간 목사 있어요.  그 사람이 발표 끝난 후에 시비를 거는 거예요.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이전도사 당신의 주관적인 것이다.” 라고.  그 소리 듣고 제가 화가 나서 ‘세상에 주관적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나’ 고 했습니다.  어느 인간이 객관적인 인간이 있어요?  다 주관적이지.
기본도 몰라요.  모든 해석과 논리의 기본도 몰라요.  ‘주관주의’하고 ‘주관’하고 다릅니다.  ‘주관주의’라는 것은 객관을 거부하는 것이 주관주의입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교수가 말렸어요.  모든 인간은 다 주관적이라고.  내 편을 들어서 살짝 기분이 좋았는데.

오늘날 설교자의 문제가 주관 아니라서 문제예요.  이것은 위선자예요.  주관이 아니라는 말은 위선자라는 말입니다.  남의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한 주일 살면서 느꼈고, 얻어터지고, 매 맞고, 주님 앞에 대 들고, 어리광부리고, 반발했고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비 주관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럼 왜 설교자가 한 주일동안 얻어터지고, 매 맞고 하는 그런 것이 없느냐?  말씀을 안 보니 그런 거예요.  솔직히 성경 진리에 관심이 없어서 그래요.  설교할 때 되면 본문 보면서 뭘로 30분 때올꼬?  이것만 하면 끝나는 거예요.

물론 십자가 마을에 해당되는 그런 목사님들은 여기에 해당 안 되는 것은 제가 말 안 해도 여러분들이 다 아신다고,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짐작했겠지요?  (하하하)  

제가 이런 소리 하면, ‘아니, 목사님. 사람이 어떻게 24시간 말씀만 생각합니까?’  24시간 말씀만 생각한다는 것이 성경만 들여다보라는 것이 아니고, 드라마를 보든지 뭘 하든지, 신문을 보든지 간에 그 말씀과 연관해서 해석을 24시간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성령이 예레미야처럼 하나님 말씀 전하는 선지자라고 할 수가 있어요.

지금 똑같은 상황에 일반 교인이 있다면 그들은 이 해석에 대해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  나는 이런 반응인데, 어떤 반응이 나타날까?  그러면 그들의 반응이 과연 옳은가, 아니면 목사 내 반응이 옳은가?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아니면 둘 다 틀렸는가?  예수님 반응은 어떤가?  그걸 늘 염두에 둬서 그것을 모아 추려서 설교자의 모든 그 과정, 결론만 달랑하면 5분 만에 끝납니다.  그러니까 검토과정, 세밀한 과정을 다 설명하다보면 교인들이 거기에 동감을 하면서 30분, 40분이 훌딱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드라마만 보여주지 말고 NG장면까지 다 보여주라 이 말입니다.  다 보여줘야 돼요.  그렇지 않고 자꾸 객관적으로 나가면 자기가 가르치는 자가 되고, 결국은 교주가 돼요.  ‘너는 내게 한 수 배워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같이 말씀에 동감해서 목사님이 겪는 것을 우리도 같이 겪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지, ‘당신은 나한테 배우면 되지 잔소리 하지마라.’ 이렇게 되면 교주가 따로 있겠어요.  그 사람이 교주지.  교주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오해할 수도 있고, 저도 이렇게 오해했습니다만 다른 말씀을 보면서 이것이 오해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오해하고 깨닫는 그 과정을, 결론만 달랑하지 말고, 그 과정을 쭉 하다보면 교인들이 교회 올 때,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교회 올 때 사실은 말씀에 관심이 없고 빨리 예배마치고 볼일 보고, 장사하기 바빠요.  교회 좋아서 오지는 않잖아요.  말씀에는 관심 없고, 이번 주 예배 참석했으니까 복이나 달라고 그런 마음으로 오는 사람들이에요.  전부 다.  아닌 척 하지만 다 그래요.

하지만 딱 와가지고 말씀 속에 들어가다 보니까, 세상에 내가 예배마치고 해야 될 일 보다도 말씀이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경험이고 이런 것을 놓치면 성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가게 해요.  가봐야 한 5분 만에 다 없어지지만.  없이 질 때 없어지더라도 적어도 교회 와서는 세상에서 내가 귀하다고 하는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구나!’ 하는 것을 느껴야 하는 거예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외운다는 말이 아니고, 말씀으로 인하여 내가 지적받고 내가 어떤 반응을 느끼고 말씀에 대해 반항도 해보고, ‘하나님, 그렇게 살면 내가 굶어 죽으란 말입니까?’ 라고 항의도 하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반항할 수밖에 없는 성경 구절 중에 한 대목을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거 듣고 반항 안 한다면 진짜 이거는 순교자 반열에 든 사람입니다.  잠언을 봅시다.  저도 이 대목 보고 깜짝 놀랬어요.  새삼스럽게 이걸 알았는데,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시간 자꾸 가면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는데.  아, 여기 있네.  찾았습니다.  잠언 21장 6절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속여서 재물을 구하는 것은 아예 죽음을 불러라.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이 말이거든요.  이 말씀 들을 때 우리교회 보험회사 다니는 사람이 2명 있어요.  문방구하는 사람, 옷 장사 하는 사람도 있고, 공직에는 이것이 없겠습니까?  목사에게는 없겠습니까?

속여서라도 돈을 벌겠다는 것은 아예 죽음을 불러라. 이 말이거든요.  차라리 나가 죽으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예요.  이거 이래가지고는 못 삽니다.  이 말씀대로 못 합니다.  소위 성화되었다는 사람들 와서 이 말씀 좀 봤으면 좋겠어요.  이것 지켰는지.

사람은 하루에 통계에 의하면 300번 거짓말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습니다.  여자들은 하루에 25,000개 단어를 말하지 아니하면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와 사는 남자들이 제일 힘든 것이 그 말을 들어주는 것이 제일 힘듭니다.  그래서 남자는 퇴근하면 하는 말이 겨우, “얘는?  밥도.  자자.” 이게 답니다.  입 다물라는 거지요.

여자는 퇴근하는 남편 붙들고 이야기 25,000마디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얘는? 밥도. 자자.” 하고 입 다물어요.

사람이 속이는 것이 정상이고, 성경 말씀은 우리가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이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남한테 설교하는 목사들이여! 너는 이 대목에 대해서 너는 평소에 얼마나 속여 왔는가를 그대로 증거하면 교인들이 동감하면서, 교인들이 어떻게 사는가는 성령께서 알아서 처리할 문제지 목사가 개입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성경구절 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구절이 다 그래요.  
예레미야 20장으로 돌아옵시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 예레미야는 고정된 기계가 아니고 moving man.  이게 영어가 되는지 모르겠다.  한번 지어내 보자.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움직인다는 말은 하나라, 나는 이거다.  나는 이런 인간이다. 고 하나로 꼭 집어서 몇 시 몇 분의 인간이 진짜 내 모습이다. 라고 꼭 집어서 삔침 가지고, 삔침?  참 이거 경상도 말인데 참 오랜만에 쓰니까 그립네.  침으로 꼭 집어서, 잠자리 표본채집 하듯이.  꼭 집어서 이것이 나다. 라고 할 수 없어요.  인간은.

인간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그 때 그 때 성령도, 하나님 말씀도 같이 움직여서 날마다 상황 따라서 대처하고 있습니다.  탄식하시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서,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하시는 그 작업을, 아무리 우리가 개판 쳐도 그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 우리는 원래 개판이니까.  한 시도 가만있지를 않습니다.  항상 움직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래서 예레미야가 우리한테 더 가까워요.
20장 계속 봅시다.  14절 같이 읽읍시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예레미야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망정이지(다행이지) 앞에 앉았더라면 깃싸대기(뺨) 맞았을 거예요.  “어무이예.  왜 나를 나았십니꺼?  내 밸 때 어머니 저주받아서 사산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 걸” ‘이게 뭐 이런기 다 있노. 니가 에미한테 할 소리가?’  

차마 부모 앞에서 자식 된 도리로서 그런 말 못하지요.  이걸 예레미야가 압니다.  살아있는 부모 앞에서 이런 소리 못하는데, 얼마나 예레미야가 말씀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으면, 진짜로 하나님을 만났으면 하나님 앞에서 이런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겠습니까?  그만큼 예레미야는 구원 받았다는 뜻이에요.  예레미야는 날 때부터 모친의 태중에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택함을 받은 위력이 이런 욕설까지, 자기를 저주하는 것까지, 막말로 나오는 정도까지, 그것이 가능한 것이 택함 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권리는 아니지만. 그러한 솔직한 모습이에요.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정도.  물론 우리는 술 먹고 스스로 ‘나는 죽었으면 좋겠다.’고 할 수 있어요.  자기가 자기한테 하는 것은 용납해 줘도, 만약에 내 딸이 “나 아버지 미워. 나는 안 태어났으면 좋았겠다. 아버지 꼴 보기 싫어서 안 태어났으면 좋겠다.” 이런 소리 할 때는 “차라리 내가 죽으마.” 하고 이런 속사람이 나오겠지요.

그러니까 그 정도로 예레미야와 하나님의 관계는 너무나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밀착되어 있지요.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는데 그 하나님이 누구냐?  바로 장차 예레미야와 같은 영으로 오실 예수님이 예레미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 9절에 보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지금 이 대목은, ‘나는 안 하고 싶은데 답답해서 한다.’ 이러한 심정을 “불붙는 것 같아서” 쉽게 말해서 홀몸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나로 하여금 전하게 만드는 그분에 의해서 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과가 8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예레미야는 남들을 의식할 여유도 없어요.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 그것도 감당 못해서 헉헉거리는데 언제, ‘내 설교 잘 했어요?  내 어때요?’ 이렇게 남 돌아볼 여유조차 없어요.  속에서 불이 타는데.  지금 자기문제예요.  

이렇게 자기 문제가 되고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만약 이런 목사가 있다면 이런 목사가 나중에 교회 나올 때 퇴직금 올려달라고 장로님 붙들고 협박하겠습니까?  나가서 개척교회 한다고 몫 돈 달라고 요구하겠어요?

교인들이 이걸 알아야 돼요.  예레미야를 알고 ‘아, 저래서 가짜구나.’ 그걸 파악하셔야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설교자가 이 예레미야 본문을 설교한다면 이것은 교인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목사관에 대해서 자기가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수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자기 고백으로 나와야 된단 말이지요.

여러분, 진짜 목사는 이렇습니다. 하고 ‘나는 잘 가르쳤습니다.  돈 내놔.’ 이렇게 되면 안 되고, 이것이 내 속에서, 내 속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까, ‘나도 여기에 대해서 반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거기에 대해서 알아서 하세요. 나를 계속 설교자로 세우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여러분 손에 넘어간 겁니다.’ 라고 맡기고, 자기는 주님과의 관계가 더 밀착되었다는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구원 받은 관계에 놓였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지요.  

이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예레미야를 좀 더 나가봅시다.
자, 이제부터 잘 들어보세요.  예레미야가 외부에서 들어온 게 있으면 반드시 내부에서 쏟아 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반발심이 있습니다.  이 반발심은 오늘날 모든 성도에게 소위, 말씀을 지켜야 합니까, 아니면 방종해야 됩니까?  자유를 누려야 합니까, 아니면 자유가 어긋나서 방종을 용납해야 합니까? 하는 그런 모든 문제에 대해서 “방종하면 안 됩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라고 말은 할 수 있는데, 그런 말조차도 사실은 예레미야에게는 해당이 안 돼요.  왜냐하면, 방종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인간이.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뭐가 두려워요.  걱정할 게 뭐가 있어요.  지금 사람들은 뭐냐 하면, 거룩한 사람 티를 내기 위해서 내부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으면서도 이것이 안 올라오는 것처럼 자꾸 위장을 하니까 내가 보기에는 웩(구역질) 올라와요.

나는 말씀을 보면서, 어느 것 하나 못 지키고 다 나를 지적하는 말씀인데, 지는 거룩하고 잘 지킨다고 하고, 나는 깨끗하게 산다고 하니까 내가 그만 토하고 내치고 싶은 생각이 난단 말이지요.  내가 멀미하고 싶다 이 말입니다.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솔직하게 내부에서 올라와요.  ‘나는 삐졌어.  나는 하나님 안 믿을 거야.’ 그러면서도 뭔가 하나 외부와 내부의 만남이 양쪽 다 있다는 것.  “주께서 나를 이기었사오니” 이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고, ‘남들에게 내가 웃음거리가 되어 내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라는 것은 내부에서 올라오는 것이고.  양쪽 다 겸비할 때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한 쪽을 처리하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처리하면 처리한 게 딴 데 가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변신할 뿐이고 잠시 저장될 뿐이지, 어떤 순간이 되면 튀어 오릅니다.

부부싸움 하는 이유가 보면, 저도 결혼 생활해보니까 아는데, ‘저는 결혼하고 한번도 부부싸움 한 적이 없습니다.’ (하하하하)
부부싸움을 해보면 항상 문제가 그 당시에 있는 문제가 아니고 적체되어 있던 그동안 묵혀 놓은 것을 새삼스럽게 수굼포, 이것은 ‘삽’이라는 뜻인데, 경상도에서는 수굼포라고 합니다.  이게 일본말인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사전에는 안 나오지 싶어요.  너무 어려워서.  

삽으로 퍽 떠서 몇 월 몇 일 지난날에 네가 친정 욕했잖아. 이러면서 다 나와요.  작은 문제인데 그것이 확대 돼서 나중에 온갖 것이 다 얽혀서 결국은 성격이 안 맞네. 하면서 갈라  섭니다.  왜냐, 인간은 기억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게 예레미야한테도 그대로 있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제사장 아들이거든요.  요새 말로 하면 목사 아들입니다.  다 어릴 때부터 노는 가락이 있어요.  그 동네에 노는 거룩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를 통해서 거룩한 공간이 폭격을 당합니다.  헤즈볼라가 폭격하듯이.  

세상에 거룩이 어디 있어요.  무슨 거룩이 있습니까?  세리와 창기가 천당 갑니다.  무슨 거룩이 있어요?  거룩이 없어요.  없지만 사람은 이미 자기가 과거에 의해서 누적된 거룩이 있어요.  마일리지가 쌓여요.  이거 일곱 개 주면 피자 한 판 줍니다.  마일리지가 쌓인다고.  이것을 포기를 못해요.  왜냐하면, 그 자기 의를 포기했다는 것이 또 새로운 의가 됩니다.  지난 날까지 쌓은 의를 내가 포기했다.  내가 이렇게 착할 수가. 라는 마일리지 표가 바꿨다는 것뿐이지 또 쌓이는 거예요.

나는 10년 동안 쌓은 의를 다 포기했다는 이름으로 새로운, 수표가 바뀌어요.  “나는 포기  했음.” 이라는 새로운 수표가 등장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 쏟아나는데, 끝까지 우리가 놀라운 것은 지금 이런 반발과 반응 같으면 진작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고, 내가 먼저 하나님 버렸을 텐데 여전히 주님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은 이것은 범상한 일이 아닙니다.  보통 일이 아니에요.  주의 기적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의 혜택입니다.

이런 수련회를 참석하려고 하면요, 저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예배나 수련회에 참석하면요, 지금 하는 일이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 가봐야 이근호 목사 내 다 아는 건데, 뭐 꼭 가서 들을 필요 뭐 있나’ 이런 생각 듭니다.  드는데, 들면서 ‘그래도 뭐 별 할 일 없는데 가야 안 되겠나.’ 하면서도 뭘 기다리느냐 하면, 할 일이 생기기를 기다려요.  무슨 일 안 생기나? 무슨 일 안 생기나?  아이 씨, 오늘 재수 되게 없네. 계속 안 생기네. 그래서 안 생기면 참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인데, 뭐냐 하면 기다려진다는 것.  이상스럽게 그것이 내부에서 올라오는데, 그것이 또 기다려진다는 것.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거든요.  위에서 주는 생각이라.  들어봤자 그 때 뿐이고, 다 끝나면 아무 것도 없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뭔가 또 기다려진다는 것.

저는 여름, 겨울 수련회 할 때마다 우리 정판옥 목사님을 중심으로 한 우리 모임에 대해서 항상 우려하는 것이, 대충 없으면 올해는 그만 넘어가지 뭐, 노회도 뭐 이런 노회가 어디 있노?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것이 내 내부에서 올라온 거란 말이지요.  무슨 노회가 법도 없고 뭐 아무것도 없고 이런 노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뭔가 주의 말씀에 뭔가 관심이 있는 것은, 이것은 내 의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우리가 알고 있어요. 우리는 말씀을 안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의지대로 안 돼요.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내 의지대로 되나 안 되나 시험해 볼까?  다음 수련회에 참석 안 해야지.  그런 생각 들면 참석 안 해도 돼요.  그런 것이 우리 내부에서 평생 올라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거예요.

거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어요.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여기에서 새 언약과 옛 언약의 교차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옛 언약은 내가 뭘 하면 무슨 성과가 일어나는 것이 옛 언약 규칙이고 시스템이에요.  그런데 새 언약 시스템은 옛날 모세 때 왔던 십계명을 들이대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네 속에 너의 허락도 안 받고, 이것이 중요해요.  너의 허락도 안 받고 내가(성령이) 네 속에 들어가겠다.  이게 새 언약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0장에 나와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지키라고 주는 것이 아니고, 가만 있거라. 내가 주사바늘 놓는다는 거예요.  주사바늘.  하나님이 다 지켰음을 우리에게 집어넣어 버려요. 우리의 잠자는 시간에, 우리가 까불고 대항하는 그 시간에.  “다 이루었다.” 고 하신 주님 말씀도 있지만, 그 말씀을 위해서 한 몸을 예비했는데, 그 예비 된 몸이 우리를 위해 다 이루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룩함을 얻었고,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예레미야 31장 말씀처럼 이제는 그 법을 외부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 들어와서 주인공인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으로서, 여기에 침투당하는, 잠식당하는, 납치되는 그러한 소유 당하는 그런 원칙으로 바뀌는 것이 새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새 언약을 위해서 옛 언약이 파기되어야 되겠지요.  그 파기되어야 될 이유, 그 증거물로 인하여 아직도 우리는 육적인 거예요.  그걸 예레미야에서는 토기장이 비유로 보여줍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드는데 어떻게 만드느냐?  옛 것을 부수고 새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옛 것을 부수고 부순 그 재료를 가지고 새것을 만듭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18장 3-4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1079페이지.  제가 읽어볼게요.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부서진 그릇을 재료로 다른 그릇을 만들어요.  그 작업이 반복해서 우리 안에서 이뤄져요.  그걸 대변해서 모델로 보여주는 것이 예레미야입니다.  이것이 시범 조교입니다.  이미 새 언약이 있기 때문에 너는 맨날 나에게 대 들고, 이미 너는 구원 받았기 때문에 맨날 말씀에 대해 틱틱거리고, 뭐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고, 아예 내보고 죽어라고 해라.  어떻게 인생을 삽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안 속이고. 라는 반발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인하여 용서 받았음을 아는 그러한 과정이 항상 일어나 줘야 돼요.  이것이 새 언약의 원칙입니다.  

그러면 새 언약의 원칙이 과연 그런지 예레미야 31장을 한 번 봅시다.  31-32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그러니까 지금 옛날 규칙에 저촉을 받는 그 몸이 여전히 있어요.  있는데, 우리는 기억의 사람이기 때문에 옛날 법을 지키는 것이 습관화 되었습니다.  우리는 법 없이는 우리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충분히 압니다.  법을 지키므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는 착하게 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세운 것이 아니고 옛날 법에 저촉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습성화 되어서 그런 거예요.    

우리교회 밑에 보면 수정교회라고 있습니다.  수정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간판만 그렇습니다.  내부 시설은 잘 되어 있어요.  수정 같아요.  그런데 교회 간판에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라고 써 놓았어요.

저는 속으로 생각했어요.  실천하지 않는 믿음이 믿음이 아니라면, 그러면 실천하는 믿음만 믿음이고, 실천한 믿음만을 가질 때 그것이 구원 받는 믿음이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실천했다는 것을 어떻게 확정짓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죠.  그러면 예를 들어서, 성경에 보면 “아무것도 맹세하지 말라.”고 산상설교에 나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평소에 무슨 결심과 계획과 각오를 세웁니다.  맹세를 합니다.  내일은 꼭 이것을 하리라. 맹세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맹세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면 맹세를 안 했다고 우길 때, 저 수정교회 목사님 물어보겠습니다.  목사님은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왜 묻습니까? 당신은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니까 맹세 하지 말라고 했는데 만약에 당신이 맹세 했다면 당신은 믿음도 없고 지옥 갈 사람이니까 맹세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그 소리 듣고 자기는 주의 말씀대로 맹세 안 했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제가 뭐라고 합니까?  ‘조사하면 다 나와’ (하하하)

어떻게 사람이 맹세 안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뭐 통뼈입니까?  통돼지예요.  성경의 어떤 구절은 못 지킨다가 아니라 어느 한 구절도 실천이란 면에서 예수님 따라갈 실천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실천한 그 수준에 우리가 이를 수가 없어요.  이 말은 결국 모든 말씀은,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수님이 다 성취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시스템 속에서 우리를 그냥, 남편이기 때문에 구원하는 겁니다.

이 성경 말씀은 우리가 못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에 대한 대책은 우리에게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새로운 약속이 오면 그 약속이 우리를 장악해서, 예레미야처럼 “주께서 강하사” 주님은 강하거든요. 우리보다 주님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거부할 수 없어요.  이것을 ‘저항할 수 없는 은총’이라고 해요.  칼빈의 5대 강요에 나오잖아요.  

저항할 수 없는, 정말 우리가 ‘저는 싫습니다.’ 할 수 없는 은혜. 막무가내로 쳐들어오는 용서.  그 용서를 우리가 어떻게 방어합니까?  무슨 수로 방어합니까?  쳐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용서 받은 거예요.  그래서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만 자랑한다고.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그것이 바로 교회고 성도고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교회 모습입니다.

그것이 새 언약에서 나왔다 이 말입니다.
옛날 규칙에 의하면, 옛날 규칙은 십계명 가지고 들이댔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켜야 될 주체자가 명확하게 규정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특징이 뭐냐 하면, 주체자를 없애기 위해서 예수님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고 해서 주체자를 죽은 자라 간주해서 아예 처음부터 죽여 놓고 시작해요.  

죽여 놓고 시작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지켰더라도 내가 지켰다는 소리 못하게 살과 피를 먹도록 하는 겁니다.  그것이 새 언약에 들어가는 출입구의 특징입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 나오는 것은 다 주께서 선한대로 일하셨는데, 어떻게 일하셨는가? 우리의 죄를 들춰내고 주께서 십자가 피로 그것을 용서해 주고, 그것뿐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목사님 만약 주체가 살아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체가 살아 있으면 반드시 여기에서 역사가 발생됩니다.  역사가 이어지게 되면 이 역사의 이름으로 자기를 포기할 줄 모릅니다.

새 언약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데, 사람들은 역사를 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고 있습니다.  여기에 죽음이 와 버리면 40살에 죽어나 100살 되어 죽어나 죽는 순간에는 한 살과 두 살의 차이가 없습니다.  죽는 순간에는.  죽었다. 이것만 있지 몇 살인데 죽었다. 이것이 없어요.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따지는 것이고, 주님 앞에서는 결국 죽을 놈이 죽었네. 이거지, 아이고 100세 까지 사시다가 죽었습니까?  아이고 장하십니다. 이런 것 없어요.

연세 많은 분들께는 죄송합니다만 나이 들어보면, 50을 살아도 여전히 배고파요.  히딩크가 이야기한 것이지만.  4강 먹어도 배고파요.  사라포바는 돈을 그렇게 벌어도 배고프다는데.  사람이 아무리 해도, 나이 80 되었다고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이러면 화납니다.  80 살아도 후딱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지겹다. 지겹다.’ 하는 것은 노인들이 하는 거짓말 아닙니까?  맞지요.  

새 언약은 그 모든 걱정, 근심을 다 들어주십니다.  새 언약의 세계로 오시기 바랍니다.
새 언약은 모든 것을 살과 피로서, 역사에서 오는 모든 무거운 짐을 전부다 일소해 버리고 그런 걱정은 하지들 말란 말입니다.  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요.  잘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잘 될 필요조차 없도록 원천부터 완전히 날아가 버립니다.

새 언약에서는 잘 될 이유도 없는데 왜 잘 되려고 합니까?  이게 바로 토기장이가 새로운 토기를 만들 때 쓰는 법칙인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 법칙 이외 다른 법칙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왜?  그것이 약속이기 때문에.  그것도 최후의 약속이기 때문에. 최후의 약속은 두 번째 최후의 약속은 없습니다.

최후의 약속은 살과 피로서 이미 너는, 너 시대는 끝났다.  끝나버리고 이제 주의 것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말씀을 지켜야 되고 했어요.  그 이후부터는 내가 못 지킨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어요.  어떤 사람도 이 기준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의 새 언약입니다.

예레미야와 moving man.  움직이는 사람.  영어 안 맞지 싶어요. 아무래도.  영어 안 맞는데 그냥 써 봅시다.  인간은 움직이는 사람.  한 시도 이것이 나라고 고정할 수 없는, 항상 반발하게 되어 있어요. 이 반발과 위에서 내려오는 주의 강하심과 이것이 합치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한 번 찾아봅시다.  7장.  7장 아니고 그 근처인데?  예. 10장 22절입니다.  오늘 수련회 하면서 이것 하나 외우세요. 간단한 거니까. 이것 안 외우면 오늘 짜장면 안 준다.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합니까?  이게 신자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80 노인이 그동안 예수 믿은 것 다 헛것이고 다 착각이었다고 고백한 사람은 80 되기 전에 평소에 한 번도, 자기가 주님보다 강하지 주님이 자기보다 강한 적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주님이 우리보다 강하다면 나이 80이 되어 죽을 때가 되어도 여전히 주님은 나보다 강해요.  나는 비록 죄인입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십자가 밖에 없어요.  왜? 그 십자가 믿도록 하신 그 새 언약이 내 속에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주님은 우리보다 강하십니다.  정말 세십니다.  최홍만보다 더 셉니다.  아주 강하십니다.

그 강한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반발로서 고백한 것이 예레미야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설교단에서 ‘내가 죄인이며 이런 잘못을 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진짜 신앙인은 그것이 부끄럽지가 않아요.  왜? 그런 고백 한다는 자체가,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은 저나 여러분에게 여전히 강하신 분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고백의 현장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란 것이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목사가 그런 짓 했다고 해서 따라 할 필요는 없어요.  간증집회 가서 어떤 사람이 그런 말 했다고 해서 그것 따라할 필요는 없어요.  그것은 그 사람 기준이고, 주께서 그 사람에게만 강한 것이 아니고 나한테도 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컨닝하라고 온 것이 아니거든요. 강한 분이 직접 나에게 강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의 고백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철학자들이 예수를 안 믿는 이유는 예수보다 자기가 더 강하다고 우기는 거예요.  그러나 신자는 주님이 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아까 누가 한스 퀸의 책을 가지고 있던데, 이 사람은 가톨릭에 있는 사람인데 파문당했어요.  기독교에서 노회가 싫다고 나가는 것하고 달라요. 가톨릭 신부가 천주교 싫다가 나가는 것은 보통 대가 센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과감히 천주교 집단 전체를 거부하고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태도 하나는 뭔가 그 사람 속에 교회보다 더 큰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설교를 하니까 ‘목사님은 교회보다 교인이 더 크다고 하면 교인들이 방종하고 제 마음대로 사는데 그 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주께서 강하시겠지요?  주께서 그 나름대로 또 강하시겠지요.  다만 주의 새 언약이 이렇다는 것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칩시다.
예레미야 23장 18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23절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지금 메시야가 역사적인 노선을 밟아서 온다고 하는 것이 유대인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저희들이 메시야가 오실만한 환경이 될 때 주께서는 그 역사를 인정하고 구름타고 오시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역사를 부수고 오시는 메시야에 대해서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아무도 몰랐습니다.  누가 반겼느냐?  죄 있는 사람들,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님을 반겼습니다.  백부장이 반겼습니다.  이것은 역사와 상관없이 주님께서 오신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천상회의는 이미 완료되었다는 뜻이에요.  완료가 참 좋은 건데, 예레미야를 끝내면서 한 글자만 쓰고 마치겠습니다.  ‘완료’입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이미 완료된 것을 그냥 통보해 주는 식이지 애써서 내 일에 협조하라는 것은 없어요.  이사야 1장 같으면 ‘소도 자기 주인을 알건마는 왜 너희는 이스라엘을 만드신 하나님을 모르느냐?’ 이 말은, 협조하란 말이 아니고, 여호와의 손과 발이 되어라는 말이에요. 우리 같이 놀자는 말이지요.

이미 완료된 것을 통보하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사랑이지요.  심판하지 않고 그냥 통보해 준다는 것이.  천상회의에 참석했다.  만약 여러분들이 여기가 천상회의입니다.  그런데 1층에 있는 아이들이 경북과 전북의 화합을 위해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상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몰라요.  그래서 내려가서 이야기합니다.  ‘애들아 뭐하노? 춤추고 있습니다.  종말이 오는데 어떻게 할래? 춤이 중요하지 종말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듣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주여, 내가 저들에게 이야기했더니만 모욕거리와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주의 말씀으로 인해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말은, 이미 나는 믿습니다, 봤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나는 보았고 알기 때문에 얼마든지 세상에 나가서 조롱받는 줄 알면서도 그걸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거기서 멈출 수가 없는 겁니다.  

뭔가 개척해 가고, 발굴해 내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료된 상태이기 때문에, 천상회의를 봤기 때문에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되지 않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12제자도 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다 못난 사람들이고, 예수님 버리고 자기 살려고 다 도망간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이 왔을 때, 스데반 집사처럼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은 이미 완료된 것을 위하여, 세상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제가 이야기했지요.  성경이란 것은 우리를, 선지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유는 죽음보다 더 위대한 것이 죽음 뒤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지점까지 선지자를 몰고 가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어머나, 겁난다, 겁난다, 죽겠어, 죽겠어.” 하지만 그들은 ‘죽어도 괜찮지 롱’하고 죽어버려요.  이렇게 죽어도 상관없지 롱 하고 죽어버려요.  이게 선지자들이었어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월등한 것이 여기 있지 롱 하고 죽어버리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그랬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이것이, 선지자의 마음이 예수님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역사라는 것에, 역사라는 유혹에 여러분들이 속아 넘어가지 마시고, 어떤 순서라는 것, 더 발전이라는 것,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되겠다는 인간 개조, 그것 하지 마세요. 인간 개조 안 됩니다. 왜? 개조할 필요가 없는 그런 새 언약 속에 있기 때문에 쓸데없는 그런 노력하지 마시고. 내가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죄고, 부족한가? 그것만 밝혀내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로운 피조물이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토기를 만들 듯이 옛것을 가지로 만들어내는 줄 압니다.  우리가 심히 주님을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더라도 이미 구원 받았기에 불신자들이 갖지 못한 그런 반응인줄 아오니 이런 반응을 통해서 주의 사랑이 깊어지는 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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