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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69강 / 계16장 3-11 (재앙의 내용)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69강 / 계16장 3-11 (재앙의 내용)

정인순 2010. 12. 30.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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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재앙의 내용

 

2007년 7월 8일

 

본문 말씀: 16:3-11

 

(계 16:3)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계 16:4)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계 16:5)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계 16:6)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계 16: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계 16:8)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계 16: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계 16:10)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계 16:11)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종교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행위요 생각이요 움직임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던 아니하던 별 차이날 게 없는 몸짓들입니다. 그런데 구원이란 인간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위로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이 땅은 온통 인간들의 움직임으로 움직인다고 여기겠지만 실은 예수님은 훨씬 열심히 분주하게 일하십니다. 예를 들면, 우리 예배당에 어떤 분이 와서 빗자루들고 청소를 하고 있다면 누구나 “자 아저씨가 일하고 있구나”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바로 이 청소일 못지 않게 실제로 지금도 예수님은 일하십니다.

 

그 일하심을 믿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즉 나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도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의 일함으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러한 일하심으로 내가 구원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 같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일하심이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진 성경의 내용대로 일하신다는 것을 말하면 사람들은 얼굴을 돌리고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 속에서 역겨움과 반발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대로 지금도 주님은 부지런히 일하십니다. 특히 5-6절에 보면, “거룩하신 이가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시는 것이 합당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하심 때문에 이 지상에서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피를 흘렸다는 겁니다. 우리 성도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욕을 얻어먹는 것이 정상입니다. 복음을 알고 전했다면서 욕을 먹지 않는 현상이 이상스럽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지금 일하심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복음 때문에 욕을 얻어먹고 피까지 흘리는 지경에 이런 자들만 눈치채는 자의 몫입니다.

 

즉 우리가 오늘 본문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가 복음으로 인해 수모를 당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자라에 서 있어야 비로소 밝혀진 사항입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가지고 ‘계시 만들기’에 나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으로 수모를 당하는 자리에서 발견한 예수님의 ‘청소하기’가 어떤 양상으로 진행됩니까?

 

8-9절에 보면, 천사들의 심판의 대접이 해의 근원을 공격하니 인간들이 뜨거움을 못견뎌서 하나님을 대놓고 욕하게 되고, 또한 피부병과 종기가 인해 사람들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주저없이 하나님을 욕합니다.

 

사람이란 이처럼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는지 잘 모릅니다. 예수님은 심판은 인간의 근원과 본색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욕하고 싶은 본성으로 충만했음을 드러내는 입장에서 상승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진리란, 자신에게 이익이냐 손실이냐만 고려하는 진리관입니다.

 

인간은 몸 편한대로 삽니다. 행동도 편한대로 움직입니다. 편하게 되면 이익이요 불편하게 되면 손실이라고 보는 겁니다. 죽으라고 일하는 것도 모두 허벌나게 놀기 위한 희망 때문입니다. 일하고 난 뒤 신나게 술 퍼마시고 자아를 잃어보는 즐거움에 탐닉하고, 그러한 생활을 되풀이하는 것이 진리의 전부라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성도는 다릅니다. 성도는 개인적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진리 범주 안에 속해져있습니다. 진리가 성도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진리가 개입하고 관여합니다. 개인적으로 이익과 손실을 따져도, 진리는 그 성도의 그런 사고방식이 비진리적임을 알려 주십니다.

 

성도를 향해 날아오는 진리는 그 원천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저주받을 자임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자력으로 설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저주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도 실은 사치입니다. 진작 멸망당해도 우리로서는 할 말 없습니다.

 

천사들의 7 대접 재앙은 이런 십자가 심판의 맛봬기입니다. 요한계시록 8장에 보면, 일곱 나팔이 나옵니다. 나팔이란 경고용입니다. 산천초목의 3분지 1일만 피해를 입고 나머지는 남겨두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그저 있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감행하는 공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일곱 대접이란 그런 경고 정도가 아니라 전체를 심판의 세상으로 뒤덮게 하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대접으로 퍼부어 재앙은 그 어떤 인간도 그 대접 밖으로 기어나와 살 수 없습니다. 마치 튀김솥 같습니다. 부글부글 끓는 기름 가마 속에서 그 어떤 오징어 다리나 닭다리도 뜨겁다고 자발적으로 기어나올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 어떤 개성도 묵살 당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스스로 이미지 관리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저주 앞에서 인간들 사이의 차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미지도 통할 리 없습니다. 동일하게 당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누구냐?”라는 물음보다 더 시급한 물음은 “내가 어떤 범주 안에 놓여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십자가 사건에서는 또 다른 능력이 성도에게 적용됩니다.

 

그것은 성도의 모든 죄가 해결받는 능력입니다. 성도는 이런 용서함의 능력이 있기에 이 세상에서 복음으로 인해 어떤 욕설도 감수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남들 못지 않고 본인조차도 예상 못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항상 툭툭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 염려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경제 상황이 참으로 어려울 때에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툭 불거져 나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는 말은 기껏 그 상황에서 잔소리만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통해 ‘계시 만들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성도에게는 자신의 종교 행위라는 것이 불신자의 가식 행위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진정 구원이란 나의 종교 생활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청소 작업’의 결과임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인생의 정답과 진리 범주 안에 놓여져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커닝하는 마음으로 남의 인생을 견눈질 하면서 하시겠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내부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속구쳐 올라옴의 의의를 우리가 잊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