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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67강 / 계15장 5-8 (성전의 연기)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67강 / 계15장 5-8 (성전의 연기)

정인순 2010. 12. 3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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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성전의 연기

 

2007년 6월 24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5:5-8

 

(계 15:5)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계 15: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계 15:7)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계 15: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성전이 행하는 기능에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속죄의 기능이라면 오늘의 이야기는 심판의 기능입니다. 심판없는 속죄라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항상 심판 분위기 속에서 속죄가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심판이라는 배경을 철수하면 속죄도 같이 사라지는 법입니다.

 

지난 시간에 구원받는 성도들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른다고 했습니다. 어린양의 노래란 오린양이 홀로 해내신 업적과 위력을 노래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업적과 위력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어린양 되시는 분과 우리 사이에 경쟁관계가 형성됩니다.

 

일부러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들은 평소에 상인들이 시장터에 전 펴듯이 온갖 종교적 행위를 자기 앞에서 펼치면서 하나님께서 보시라고 전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따로 하늘에서 누군가를 보내셨습니다. 그 분은 곧 ‘어린양’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로서 그 어린양에게 기댈 것인가 아니면 나를 기댈 것인가를 놓고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수십년간 계속된 종교적 행위들을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예수님을 따로 보내는 그 분에 대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따지시는 겁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나의 노래’를 부르면서 인생을 살아온 셈이 됩니다.

 

종교적 활동으로 완벽을 기하면서 살아온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사울입니다. 이 사람의 종교 활동은 마치 전속력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일종의 턱입니다. 사울은 아무 것도 모르게 예수님을 향하여 들이박겠다고 덤벼든 것입니다.

 

하지만 턱을 무시하고 돌진하는 차량은 스스로 부서질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 돌질하는 인간도 이와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분은 다메섹 길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자신은 진작 망해야 될만한 인간임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완벽추구가 아무런 의미도 없고 하나님에게 소용도 없습니다.

 

이처럼 지금도 사람들은 왜 사는지, 왜 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모한 돌진을 계속합니다. 하지만 곳곳에 예수님이 설치한 턱이 있습니다. 왜 인간이 망해야 마땅하냐를 말해주는 턱입니다. 그 턱을 무시하고 인생의 차량을 몬다는 것은 무모하고 본인에게만 탈이 나는 짓입니다.

 

자기를 몰고 다니는 것이 인생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분을 만나야 합니다. 천국은 그분 소관입니다.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대로 그냥 망해야 될 자들입니다. 나 중심으로 살던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찌그려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전이 열리면서 전 우주를 말씀으로 심판하는 기능을 하는 천사들이 우루루 쏟아져나옵니다.

 

이들은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한결같이 세마포와 황금띠를 띠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 복장입니다.이 제사장 복장이란 다른 인간이나 피조물들이 이들이 하는 일에 이의를 걸 수없는 그런 택함 받은 위치에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들은 말씀을 다루고 말씀에 지배를 받습니다.

 

따라서 이들 천사들은 융통성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시킨대로, 곧이곧대로 하는 자들입니다. 일종의 인조인간 같은 자들입니다. 입력시킨 명령대로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이 천사들을 붙들고 자비를 부탁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들은 개인이든 국가든 교회든 그 어떤 단체든 간에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않는 모든 이를 저주하고 심판하고 붕괴시켜야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심판이 없다면 ‘어린양’의 노래의 가치가 무색해집니다. 이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감히 인간들이 반발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 점을 보이기 위해 성전이 열리면서 천사가 쏟아져나오는 것이 아니 연기도 나오게 됩니다. 연기가 나온다는 것은 아무도 이 성전에서 하달하는 명령에 의견개진을 할 수 없도록 엄하게 차단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도 얼씬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로서 그 어떤 인간이든지간에 천사가 하는 일에 훼방하거나 도전하거나 대들 입장이 못됩니다. 압력을 가하든지 아부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말씀대로 못사는 우리들이야 당연히 망하고 또 망해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우리 매일같이 “망해야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을 되풀이해야 합니다.

 

이 연기는 하나님의 엄위와 양보없는 거룩하심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연기는 옛날 광야 때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숱한 백성들은 성막의 중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성막 중앙을 책임지고 있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에게 있어 성막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곳인가를 절감합니다.

 

이스라엘의 보통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경작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생산한 것 중에서 10%만 제사장에게 갖다 바치면 그것으로 자신의 운명은 아무 탈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성막 한가운데서 벌건 불길이 타오릅니다. 제물을 태우고 피를 내기 위해서 제물을 잡아야 하는 작업이 되풀이됩니다.

 

이것은 몸소 가까운 곳에서 늘 대하는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분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실감나게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말씀을 듣는 사람보다 오히려 더욱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일체의 반항도 용납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본인마저 다른 사람에게는 거룩하고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존경를 받을지언정 본인이 두렵고 두려운 마음으로 말씀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연약함을 거룩과 더욱 가까운 자리에게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무서운 율법에서 어린양 되시는 분은 사랑으로 빼내어주십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사랑은 말로만이 아니라 몸소 피를 흘러주셔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창자국과 손에 난 못자국은 우리를 이토록 사랑했고 그 사랑과 확정적으로 완결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이런 사랑을 받은 자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보고 싶어합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누군가 우리 위해 죽으신 분이 있음을 알고 더 이상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