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66강 / 계15장 1-4 (유리바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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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바다
2007년 6월 17일
이근호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4:1-4
(계 15: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계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계 15: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바다 한 가운데를 건너가는 사람들이 특이한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의 제목은 ‘어린양의 노래’, 혹은 ‘모세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의 내용대로 되어서 지금 우리들이 이 죽음의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리 바다를 건너가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이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주위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노래는, 어디서 어디론가 건너간다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현대인에게 있어 어디서 어디로 건너가야만 한다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죽어서 어디로 가야하는 세계보다 현대인들은 현생에 집중합니다. 지금, 이곳이 우선 관심사가 됩니다. 그들 생각에 죽으면 어차피 어느 세계이든 합류된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의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이란 자신들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에 의하면 천국은 누구가 마음먹기에 따라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도리어 금지하고 차단하고 저지하는 나라입니다. 즉 ‘올 수 없는 자는 오지 못하는 나라’가 곧 어린양의 세계입니다.
안 와야 하는 자는 극구 넣어주지 않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하나님쪽에서 사람을 차별하신다는 말은, 구원의 능력이 개인적인 자질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말도 됩니다. 즉 개인적 종교 자질에 따라서 누구든지 갈 수 있는 나라가 천국이 아니라 애초부터 인간의 능력을 차단하고 오로지 어린양의 능력으로만 구원시키겠다는 것은 이미 그 능력의 혜택을 입을 자들이 완전히 확정되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유리 바다를 건너서 천국으로 향하는 자들은 오로지 어린양의 공로만 노래하는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주위 사람들은 우리 성도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세계관은 ‘바다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건널 필요조차 없다고 주장하는 세계가 오늘날의 세계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자들과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서 바다를 건너가야만 하는 민족 사이의 차이가 홍해바다 건너는 일을 통해서 확실하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애굽 군사들과 히브리인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애굽 군인들의 마음가짐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히브리인들을 뒤따라 붙였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겁니다. 저쪽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너간다면 자기들도 얼마든지 건너갈 수 있다는 겁니다. 두 다리 있겠다는 눈이 있겠다 뭐가 부족해서 히브리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자기들이 못하겠느냐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몰랐습니다.
홍해바다는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건날 수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다같이 인간이라는 조건 때문에 넣어주는 곳이 아님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히브리인들은 건너온 아침에 바닷가에서 애굽 군사들의 시체를 즐비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하면 된다”는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자력으로 능력으로 천국마저 돌파할 수 있다는 믿은 것입니다. 자기네들이 안되는 것이면 히브리인들도 안된다고 보았고, 히브리인들이 되는 일이라면 자기네들도 다같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사이에 차별하신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그곳이 천국이다는 사실을 그들은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까 겁 없이 히브리인들을 추격해 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누구나 등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천국 가는 것은 교회가 뒤에서 밀어준다고 성사될 일이 아닙니다. 참된 전도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구원 의욕을 저지하시는 하나님을 전하는 겁니다.
애굽 군대를 뒤로 따돌리고 무사히 애굽 땅을 벗어난 히브리인들에게는 질식할 것은 하나님의 법이 주어집니다. 광야도 통과해야 하고 십계명대로 살아야 하고 각양 법들이 그들에게 안겨졌습니다. 안식일에 나무하는 자도 죽고, 부모를 저주하는 자도 죽고, 점치는 자도 죽습니다.
오징어나 돼지고기도 못먹고 선지국도 먹어서는 아니됩니다. 히브리인 집단에서 이런 질식할 것은 법에 대항하여 모세에게 대들었던 레위인들이 자기가 들고 온 향로불에 화상입어 250명이 즉사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무시무시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즉 어느 누구도 율법의 저주에서 ‘탈출 불가’입니다.
그 누구도 자력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진노의 죽음을 당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의 진가를 이런 질식할 것같은 법의 저주 아래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광채입니다.
어린양의 피의 효력은 법의 저주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감격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자력으로 성공했다는 업적을 쥐고 싶어합니다. 별 볼일없이 꺼져가는 촛불이 되기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어린양의 노래에서 나오는 능력은 이 모든 장애이 저항을 이깁니다.
아무 것도 행한 것도 없이 거저주시는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이 원리만이 질식할 것은 말씀의 무게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앞두고 한 기도는 이처럼 ‘탈출’에 관한 기도였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한 내용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본인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포경선을 작살을 고래로 향하여 날린 어부가 자신의 작살을 포기할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 식대로 성공한 번 해보 죽겠다고 몸부림쳐도 주님은 우리에게 꽂혀있는 자신의 작살을 자꾸만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십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이란 내가 나를 천국으로 밀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저쪽 천국에 계신 어린양께서 어린양의 피의 밧줄로서 매일같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때, 이들만이 아는 노래가 바로 ‘어린양의 노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공로를 포기못하고 늘 성과급을 노리를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저주의 무서움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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