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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68강 / 계16장 1-3 (천사의 폭격)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68강 / 계16장 1-3 (천사의 폭격)

정인순 2010. 12. 30.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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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천사의 폭격

 

2007년 7월 1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6:1-3

 

(계 16: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계 16:2)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계 16:3)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왜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꼭 들어야만 합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 본문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오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 성도는 애초부터 하나님을 위하여 살다 가야될 자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 말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말아야 될 자라는 뜻이요, 만약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살면 가만두지 않는 그런 대상자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모든 불행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데서 비롯됩니다. 한강 다리에게 뛰어내려 자살하려는 자는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시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왜 만사가 내 뜻대로 안되느냐?”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시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될 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리게 하시는 겁니다. 사람의 모든 걱정, 근심은 자신의 존재 목적에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를 보세요. 그 사람은 비록 돈도 없도 몸이 아프지만, ‘구원은 돈하고는 상관없다’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돈없으면 사람 아니다’는 식으로 세상을 봅니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에게 있어서는 ‘돈없어도 나는 벌써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잘만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저주가 짐승의 표를 받은 자와 우상숭배하는 자에게 떨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땅에서는 이미 잘못된 하나님관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일하는 하나님 같으면, 결국 모든 인간은 다 신의 사랑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저주라든지 지옥이라는든지 그런 것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투로 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제대로만 보면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 믿는 자만 구원받고, 예수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하나님’,하고 ‘예수 안믿으면 지옥간다’하고 어느 말이 맞는 겁니까? ‘예수 안믿으면 지옥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해야 합니까 아니면 신은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결국에는 다 용서한다는 세상 상식을 인정해야 합니까? 만약에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간다’가 맞을 것 같으면, 어떤 것이 ‘예수 안믿음’에 해당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인정못하겠다고 저돌적으로 들고 일어선 자들을 보면 안됩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선 겁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단독’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소속됨’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단독적 의견개진이 아니라 어떤 힘에 소속되어 있기에 필연 나오는 반응이라는 겁니다. 그 힘이 바로 악마의 힘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이미 악마의 힘에 소속되어있어 악마가 원하는 바대로 예수님을 향하여 반발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 안에는 악귀라는 독사들이 우굴거리고 있습니다. 그 사단의 쫄개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전면 거부하도록 부추김을 당하게 됩니다. 이럴 때 나오는 성향은 바로, “나는 나를 위하여 산다”입니다. 마태복음 22:37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하루 종일, 아니 평생을 자기에게만 봉사하고 충성하며 삽니다. 그 열매는 바로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대상으로 시행했던 시험거리들입니다. 돌이 떡어 되어 마음껏 배불리먹고 사는 것이 사람 사는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남들로부터 주목받고 사는 스타 기질이 종교계든, 어떤 사회 속에서는 발휘하는 것이 사람 사는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또한 권력의 맛을 보고 세상의 영광을 차지하는 것이 사람 사는 행복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노림수가 없는 이가 없습니다. 그만큼 독사들은 많이들 품고 다니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안되면 자살까지 감행하면서 자신에게 충성을 다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독사를 꺼집어내면서 “와우! 이런 놈이 내 안에, 내 이름으로 들어있었네”를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즉 내 안에 들어있는 ‘독사 낚시’를 늘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만만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 애를 엄마가 목욕시킬 때보면 아이들은 엄마의 힘센 손아귀에서 벗어나 목욕하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깨끗하게 자기 아이의 목욕을 완료하십니다.

 

남의 자식 같으면 이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바로 ‘소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 위해 예수님의 소속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점검하기를 이 땅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하는 것은 큰 문제거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오직 타이밍에 있습니다. 적절한 때가 되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움켜진 과제는 펼치는 것이 성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예를 들어 문방구에 어떤 점원이 있다고 하면, 그 점원이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남남입니다. 그 점원이 음주운전해서 남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그 합의금은 주인이 대신 내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좀 어설프고 못난 동생이 그 점원의 자리에 들어온다면, 비록 그가 장사를 전의 사람보다 못하지만 걔가 음주운전해서 큰 사고를 치면 주인되는 분이 그 어설픈 동생의 잘못을 전부다 갚아줍니다. 이것은 한 식구의 장점이요 남남관계와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한 식구입니다. 우리의 잘못은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움켜진 그 계획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다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욕을 싫어하는 아이처럼 하나님의 이런 계획을 거부하고 자꾸만 세상쪽으로 달려갑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우리 자신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과 “복음을 위하여 핍박 받으면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작렬하는 장이 되는 겁니다.

 

이것으로 우리 인생의 책임자는 우리 자신이 아님을 압니다. 띠로 계십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문제가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