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 64강 / 계14장 13 (영원한 안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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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영원한 안식
2007년 6월 3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4;13
(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재수없는 것이고 기피하고 싶은 상태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죽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들이 느끽 싫다고 외면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완성을 도리어 평생 고대하고 있어야 할 그 무엇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죽음이 와야 비로소 안식을 할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의도적으로 몰아세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반기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안식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에게 죽음이 품고 있는 진정한 가치에 눈을 떠야 한다는 말씀도 됩니다. 그동안 우리 인간들은 죽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담이 맨처음, 선악과를 따먹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죽음이 찾아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아담 부부는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죽음마저 자신들이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죽음이 그냥 숨 끊어져 죽은 일이라면 대수롭지 않는 일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죽음은 그냥 숨 끊어지는 일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저주가 운명이 되어 아담 부부를 덮친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 저주의 세력을 감당할 수 없는 겁니다. 저주스러운 죽음은, 그동안 인간들이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를 얻고자 시도됐던 모든 일도 다 저주 찾아듬의 이유로서 작용한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즉 더 이상 인간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할 위치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이 저주스러움을 자기 힘으로 이겨내고 버텨보려는 부질없는 투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고생입니다. 저주스러움을 더욱더 가중시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짓도 마다하고 다 저질러보지만 그 저주를 끝까지 저주입니다. 도저히 승산없는 부질없는 짓을 반복하며 사는 겁니다.
아담의 속성을 지닌 이상 달리 대안이 없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원망스러워도 내부에서 그 원망스러운 인생을 계속 존속시키라고 고함치고 그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설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주어도 사정을 달라지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세우고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의 순종 여부에 따라 축복 받을 것인가 아니면 저주 받을 것인가 라는 중차대한 사안에서 인간들은 부지런히 축복을 따내기 위해 나름대로 말씀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때, 그들은 ‘주님 앞’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지고 주님에게로 나아가고자 애썼습니다.
하지만 정작 말씀을 주신 주님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들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것인가만 노출되고 발각될 뿐입니다. 애굽에서 벗어난 구약 백성들이 그저 인간 모세만 쳐다보고 살 때에는, 맨날 떡다오, 물다오 원망만 했지만 막상 그들이 하나님이 임재하신 시내산 밑에 도착하자 아무도 감히 하나님에게 나아갈 자가 없었습니다.
온 산이 정신없이 떨리고 흔들렸습니다. 짐승조차 감히 접근못하는 그 곳에 불꽃은 산 정상을 벌겋게 되덮고 있었고, 천사들의 나팔소리는 온 천지를 울립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 그것은 곧 진정한 죽음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겁니다. 단지 목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 감히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다는 것이 죽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직접 하나님을 뵈옵고는, “화로다 내가 망해야 될 자구나”라고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본인의 입장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라면 완벽하게 지켰다고 자부한 사도 바울도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는 자신이 ‘죄수 중에 괴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계명 대로 살지 못하면 탐심을 가져도 누구도 저주 뿐이요, 마음으로 간음해도 저주만 주어질 뿐입니다. 십일조를 하면서 의와 신과 인이 빠진 십일조는 하면할수록 저주는 커지고 안 해도 저주입니다. 이처럼 주앞에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은 오로지 저주의 상대일 뿐임이 확실해집니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처럼 ‘주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성령을 통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만이 ‘주 안’에 그냥 머물러 있게 됩니다. 요한복음 3:16의 말씀에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같이 우리 곁에 왔다가 갔습니다. 가시면서 멸망과 영생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능력으로 주고 가셨습니다. 휜 도포자락에 바람이 이는 것처럼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믿을 수 있는 능력까지 주셨습니다. 이 때부터 그 예수님이 심어진 말씀의 능력이 있어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희한한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미 죽었던 자기를 되살린 분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관계 안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에 누군가가 있어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분에 의해서 죽음에서 되살아난 사람들이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겁니다.
성도에게는 세상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죽음과 생명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인생이란 마치 죽음과 영생으로 통하는 시원한 10차선 고속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현장터입니다. 인간들은 이것을 미처 모르고 그 위해 손꼽놀이를 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상처받은 영혼’으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누가 유일하게 상처받은 영혼입니까?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일 뿐입니다.
즉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저주받아도 할 말이 없는 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죽음을 우리 인생 가운데 깔아놓으시고 그 위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과 같은 영생으로 덧입혀 깔아놓으심으로 말미암아 영생 문제를 다시는 우리 힘으로 처리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무엇이 안식입니까? 무엇이 평안입니까? 우리 자신을 죽음과 영생이 통과하는 파이프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 중간에 개입해서 나의 것으로 붙잡아 두고자 한다면 이것은 아담의 속성일 뿐입니다. 즉 구원과 죽음을 자기 선에서 처리하고자 하는 부질없는 짓의 되풀일 뿐입니다. 자신을 자기가 붙잡지 말고 놔두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된 죽음조차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임을 알고 우리가 처리 하지 않도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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