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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디모데전서4장14절 / 딤전 5장 교회란? (두 종류의 과부)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디모데전서

디모데전서4장14절 / 딤전 5장 교회란? (두 종류의 과부)

정인순 2010. 12. 29. 18:47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8광주/광주080926a디모데전서4장14절.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8광주/광주080926b디모데전서5장5절.mp3

 

 

광주080926a디모데전서4장14절

광주 강의(08. 9. 26) 41-1

디모데전서 4장 14-15절 봅시다. 신약성경 340페이지.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여기 두 가지 중요한 용어가 나옵니다. 상당히 무서운 용어죠? ‘은사’와 ‘예언’입니다.
‘은사’라는 말이 어렵기 때문에 ‘예언’부터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는 겁니다. 사람은 내일 일을 모르니까. 예언이란 말의 뜻은, 만약 예언이 먹구름이라고 한다면 먹구름이 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어오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선풍기 켜놓고 부채질을 해도 밀려오는 먹구름을 저지할 수 없지요? 먹구름이 오겠다는데 땅에서 부채질하고 입으로 불어서 먹구름이 다른 곳으로 가겠어요?

먹구름이 몰려오면 땅에서 인간들이 쫓으려 해도 먹구름이 멈출 리 없습니다. 이 먹구름이 바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란 것은,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이 오는 먹구름을 막을 수 없고, 가는 먹구름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냥 와서 먹구름에서 빗줄기가 쏟아지는데, 이것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먹구름이 퍼붓는 빗줄기를 맞아야 돼요.

여기에서 비가 올 때 우산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이게 바로 ‘은사’라는 겁니다. 은사는 무엇과 만날 때 은사 값을 하느냐 하면, ‘무엇이든지 예언한 대로 됩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예언에 합당한 은사를 준비하게 되지요.

예를 들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지요. 방주 만들 때 비 왔습니까? 전혀 안 왔습니다. 그런데 방주는 무슨 용도냐 하면, 장차 비가 왔을 때 필요하지 비 안 오면 방주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에는 노아 식구 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방주가 언제 효과를 봤습니까? 온 지면이 물로 덮일 때 방주가 그 값을 했단 말이지요. 이처럼 은사라는 것은 장차 올 예언을 대비해서 미리 주어진 어떤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선물은 지금은 소용없어요. 예언이 예언대로 이뤄질 때 필요하지요. 먹구름이 덮이고 비가 올 때에 우산 준비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산 준비 없으면 비를 흠뻑 맞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언을 이야기하면서 그 전에 반드시 은사를 주어서, 은사와 예언이 만나도록 조치를 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예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오늘 주제에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예언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주제가 아니고 뭐가 주제냐 하면, 이 예언 안에 어떤 것이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가족 만들기가 이 예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예언이 없으면 하나님의 가족이 만들어 진다, 아니다?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식구 되고 싶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식구는 예언대로 하나님의 은사가 내려와야 하나님의 식구가 됩니다. 만약 은사가 없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식구가 안 됩니다.

자,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식구가 아닌 것은 결국 사람의 식구죠.

오늘 디모데전서 5장을 살펴 볼 텐데 1-2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여기에 보면 늙은이가 나오고, 늙은이는 아비와 어미. 젊은이는 형제와 자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예언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근거로 해서 단호히 이야기합니다. 개인 구원은 있다, 없다?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나 혼자 구원 받았다.’ 이런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저 구원 받고 싶습니다.’ 해도 하나님은 구원 안 해줍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구원 받겠습니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에 해당이 안 돼요.

내가 삼성그룹에 취직하고 싶다고 넣어 줍니까? 안 넣어줍니다. 인사 담당자에게 “이번 달 사원 모집 계획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니, 제가 삼성그룹에 입사하고 싶다니까요.” “아, 계획이 없습니다.”

“나, 죽어서 천당 가고 싶습니다.” “넣어줄 계획 없다.”

성경에 구원의 원리가 뭐냐 하면, 계획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자기 혼자 도 닦고, 혼자 교회 다니고 주께 기도한다고 해서 구원 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채용 계획이 있어야 됩니다. “이번에 T.O 몇 명?” “3명” 그러면 3명이 입사할 수 있습니다. 3명 떨어지면 3명 구원 받습니다. 4명 안 됩니다. 예언 속에 있는 3명만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반듯이 예언된 대로만 됩니다.’ 이게 현재까지의 요점이에요. 구원은 예언된 대로 됩니다. 내가 요청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구원은 인간들의 희망사항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뭔가? 하나님의 식구는 하나님이 책임지고 만들기 때문에 사람의 뜻은 제거됩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말씀처럼, 우리 뜻은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언, 하늘에서 몰려오는 구름, 예언 덩어리 구름,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하나님의 가족이 구성되지, 내가 하나님의 식구에 편입하고 싶고, 가담하고 싶고, 합류하고 싶다고 해서 하나님이 허용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진리가 산꼭대기에 있죠. 그래서 남쪽으로 올라가든 북쪽으로 올라가든 올라가면 돼요. 사람마다 다양성이 있어서 개성에 따라, 성장 과정에 따라,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서 다 달라서 “진리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위에 올라가면 한 지점에 도착하기 때문에 결국은 한 진리에 합류된다.” 이걸 가지고 종교라고 합니다.

이 종교에 놀랍게도 기독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엉터리입니다. 기독교만 주장하면 안 됩니다. 불교도 있고 다른 종교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밑에서는 종교 간의 차이가 있지만 정상에 올라가면 진리가 있을 뿐이지 종교 간의 차이는 없지요. “아하, 이게 진리구나. 하나뿐인 진리를 가지고 괜히 싸웠네. 지금 생각하니까 후회스럽다. 우리가 다 한 형제인 것을 모르고 서로 싸웠네.” 이렇게 된다면 지금 서로 다르다고 한 것이 나중에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이게 바로 세상 종교입니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종교는 어디 위에 있느냐 하면 바로 철학 위에 있습니다. 철학 위에 종교가 있어요. 칸트는 이것을 가지고 ‘경외’라고 했어요. 인간의 이성보다 더 뛰어난 것이 ‘경외’, 이것을 다른 말로 ‘숭고의 미학’이라고 합니다. “숭고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철학이지만 그것보다 더 높은 것은 숭고의 미학인데 그것은 바로 종교만이 할 수 있다.”

신, 영혼, 자유 이 세 가지는 인간의 모든 언어를 초월해서 있다고 했지요. 초월해서 있든 없든 간에 중요한 것이 이거예요. 지금 여기 있으면서 인간이 비록 우주를 지배하지는 못하지만 우주가 넓다는 것을 안다는 그 자체가 인간이 얼마나 대단하냐는 거지요. 인간이 저 하늘의 별을 따지는 못하지만 별이 있다는 것은 인간 외에 누가 알겠습니까? 개가 알겠습니까, 사슴이 알겠습니까? 그것을 안다는 자체는 이미 어느 순간 그 별과 나 사이에는 끊으려야 끊어질 수 없는 그런 사유의 연결고리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연속성은 안 끊어진다는 겁니다. 안 끊어지면 차츰차츰 나아가면 결국 도달하게 된다는 거지요. 어떤 사람은 산 정상으로 올라가다 죽는 사람도 있지만 죽고 난 뒤에도 영혼으로 가면 되니까. 이게 바로 세상의 모든 종굡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강의한 것은 뭡니까? 이것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 아닙니다. 이것이 시내산인데, 시내산에 누가 오지요. 누가 왔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오시지요. 하나님이 오시면서 모세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내 뜻(예언) 대로 내 백성(식구)을 만든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말씀대로 백성을 만들면 방향이 위에서 내려오죠? 종교는 밑에서 올라가지요?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은, 여호와 종교는 한마디로 해서 ‘폐쇄되었다.’ 뭔가 대화가 안 되고 단절된 거지요. 출애굽기에서는 이것을 ‘선택’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사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이스라엘)만 택한 백성이레.”

여기 같은 떡이 있는데, ‘누가 잘났나?’ 싸울 필요 없어요.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와서 “나는 까만 이것을 선택했다”고 잡으면 자동적으로 한쪽이 남는데 그것을 개기로 해서 선택 안 당한 쪽과 선택 당한 쪽, 이쪽과 저쪽의 차별화가 생깁니다.

둘이 경쟁을 시켜서 “누가 더 잘하나? 한 번 경쟁해 봐라. 이기는 놈 내가 선택할 게.” 이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를 뽑으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안 뽑혔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그 자리에 있지요. 이쪽에 뽑힌 사람은 “누가 나를 뽑았다.”고 이야기 하고, 저쪽 사람들은 “누가 나를 안 뽑아 주더라.”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냥 그 자리에 있지요.

결국 차이점은 뭔가 하면, 누가 훌륭하나, 누가 착하나, 누가 공부를 많이 했나? 이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와서 일방적으로 선택했다는 하나님의 자유, 하나님의 액션에 의해서 갈라지죠.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은 예언대로 일하신다. 그 예언 속에 어떤 내용이 있느냐?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의 식구 만들기다. 그 식구 만들기의 의미가 뭐냐? 개인의 요구나 요청에 의해서는 절대로 구원 되는 법은 없다. 우리 요청으로 구원이 안 되다면 하나님의 식구는 없나? 있다. 인간의 요청에 의해 식구가 되는 것?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식구가 만들어진다. 하나님이 선택한 경우가 그 전에 있었는가? 있다. 어디에? 출애굽기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셨는데, 그 방식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시켜서 선택이란 것을 통해서 하나를 뽑아 세우고 나머지를 배제함으로 말미암아 자동적으로 구분되는 그런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자, 여기서 조금 어려워요. 그러면 당신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요청으로 되지는 않고 하나님의 선택으로만 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선택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그 문제가 남을 것 아닌가? 이게 어려워요.

왜냐하면 ‘내가 여호와를 선택하면 될 것 아닌가? 하나님이 날 선택하기 이전에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면 되지 않겠느냐?’ 김을수 집사님 답변해 보세요. 하나님이 날 선택하기 전에 내가 여호와를 선택하면 구원 받지 않습니까? 이게 성경에서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요.

제 이론대로, 여호와께서 선택해서 자기 백성 만들면, 이 방법을 내가 알잖아요. 그러면 내가 이 방법대로 ‘하나님이여, 저를 선택해 주세요. 저도 하나님 백성 되고 싶습니다.’ 라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선택한 사람은 없어요. 이게 문제라. 여호와께서 선택한 사람이 없다니까요.

최 장로님 하고 저하고 있는데, 여호와께서 최 장로님을 선택했다고 하면, 나는 옆에서 봤기 때문에 “‘최 장로님 선택하는데 나도 선택해 주세요.’ 라고 요청하면 나도 선택 받겠지.” 라고 하는데, 주님께서 최 장로님을 선택 안 했어요. 여호와께서 선택한 것은 최 장로님이신데, 최 장로님은 본인이 본인인줄 알고 있다니까. 이 말 굉장히 어렵지요? 하나님께서 오 목사님을 선택했는데 오 목사님은 착각하기를 오 목사님 본인인줄 안다니까.

하나님 식구로서 하나님은 미지의 인물(점선으로 합시다)을 선택했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 자식을 선택한 줄로 알았어요. 하나님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선택할 사람을 본인이 만들어 놓고 선택해요. 만들어놓고 선택하는데 아브라함, 사라는 뭐냐? ‘이왕 있는 아이니까 선택해 주세요.’ 이렇게 나와요. 오 목사님 경우를 예로 들면 “하나님, 저 오용익입니다. 저는 이미 태어났으니까 저를 선택해서 천당 넣어 주세요.” 하나님은 이미 생긴 인간은 선택 안 해요. 없는 오용익을 새로 만들어서 오용익 되게 해서 되어진 오용익을 선택하지, 있는 오용익을 선택해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금요 철야기도 하면서 “주여, 선택해 주세요. 구원 받기 원합니다.” 이거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왜 하나님 저를 무시하십니까? 저 사람은 구원하고 저는 왜 버리십니까?” 하나님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다 버렸다. 너희들이 구원 받았다고 하는 그 사람도 나는 버렸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버려요. 도무지 선택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로서는 선택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박탈돼요. 그러니까 “너는 선택 안 됐지? 나는 선택 됐다.”고 촐랑대는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이론에 의하면 아무도 구원 받을 사람 없고, 아무도 하나님 식구 없고, 아무도 하나님 백성 안 되네요?’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도 안 되고, 아무도 하나님 백성 없습니다. 그런데 천국 가면 하나님 백성 있어요. 아무도 하나님 백성 없는데 왜 천국에는 백성이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는 솜씨를 발휘합니다. 그 능력이 바로 예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왔다. 오직 선택된 자만 구원한다. 개인 자격으로는 안 돼요. 구원은 식구로 합니다. 그런데 그 선택된 자는 이 땅에 없다. 없는데 어떻게 있게 했는가? 없다고 여기는 곳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집어넣어서 다시 있게 만드는 그 사람만 하나님께서 선택하는 방식으로 빼간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지요. 헌 피조물은 구원 못 받습니다. 새 피조물만 구원 받습니다.

제가 잘 못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농사를 짓는데 이런 방법이 있다고 해요. 농부가 원하는 열매를 못 얻으니까 다른 식물 가지를 잠시 이용(접붙이기)해서 결실을 하고, 그 가지는 얻는 게 하나도 없고 나중에 열매 맺으니까 농부가 몽땅 가져가고, 일종의 ‘씨받이’지요. 씨받이는 아이만 낳고 아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거예요. 돈 몇 푼 받고.

자기가 애 낳았는데 전혀 자기 아이가 아닌 것. 그것이 바로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낳기 위해서 누구 배를 이용했습니까? 사라의 배를 이용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 부부는 하나님의 약속 “네 씨가 하나님의 식구가 될 것이다.”라고 하니까 착각을 했어요. ‘아, 우리 부부에게서 날 자식이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서 그들이 구원 받는 백성이 되는구나.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하나님이 원하는 자식은 이들 부부의 생각은 깡그리 무시하시고, 현재 있는 아이가 이스마엘이죠. 이 이스마엘은 너희들이 생각했던 그런 자식이기에 아니고 없는 자식 만들어 내죠.

없는 자식 만들어 내려고 하면 이 사라는 임신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라의 태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태가 죽어서 ‘아기 끝, 더 이상 아기 없음, 우리 능력으로는 아기 못 낳음.’ 이것이 확정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죽은 태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가지요. 하나님의 예언,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가면 태가 죽었는데 배가 불러와요. 그래서 태어난 자식이 누구입니까? 이삭이죠. 이런 이삭의 계열, 이런 식으로 태어나야 하나님의 식구가 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자기 백성을 만드느냐 하면, 아까 그림 다시 그리겠습니다. 산이 두 개 있는데 이쪽 산은 인간이 벌떼같이 기어오르는 산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많이 올라 간 상태고 게으른 사람은 조금 올라가 있고, 그런데 저쪽은 그냥 내려와 버려요.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려올 때 이스라엘 이 사람들도 여기 있는 이 사람들과 사고방식이 동일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사고방식이 틀립니까? 똑 같아요. 같은 몸을 가지고 있기에 몸을 유지하기 위한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이 똑 같아요.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옵니까? 사고방식은 자기 신체 보존용입니다. 이것이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인데, 세포는 탄수화물과 단백질이 올라가야 에너지가 되거든요. 자기 몸 보존을 위한 수단과 수법은 그 사람이 복음을 알든 종교인이든 관계없이, 동일한 몸의 생리를 보여준다면 그 몸을 부지하고 지탱하는 사고방식도 똑같은 사고방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배부를 때 종교가 있지, 배가 불러야 이웃에 구제하고 사랑을 베풀지 배고프면 못합니다. 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요? 자기가 배고파 쓰러질 지경이 되면 남 생각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탈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남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기가 확장된 것, 풍선처럼 커진 것일 뿐이라고 제가 주일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아무리 사랑을 한다고 해도 자기가 자기 덩어리로 다가가는 것이지 자기를 포기하고 남을 위하는 그런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못 벗어나요.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삼키는 행위입니다. “너는 내거야.”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아?”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너를 삼키기 위해서 투자한 에너지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라는 뜻입니다.

들뢰즈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랑이란 말보다 더 큰 거짓말은 없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이란 책이 보면 나와요. 사람은 거짓말을 감추는 방법 중 하나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잠자리에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이란 말이 나왔다는 것은 “이제는 너 사랑하기도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말은 감추기 위한 마무리 용도이니까. “내가 너를 떠난다 할지라도 날 원망하지 마라. 나는 끝까지 너를 사랑했다.” 뭐 이런 의미가 됩니다. 아주 비열한 짓이지요.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벗어날 수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몸은 200조 개의 세포가 있고, 이 세포가 밥 달라고 난리를 쳐요. 자기 몸이 밥 달라고 난리를 치는데, 자기 몸부터 밥 줘야지 어디 남을 먼저 생각합니까? 성경공부도 밥 먹고 해야지. 밥 안 먹으면 힘이 없어서 못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신체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신체가 만들어 낸 활성화 된 에너지의 모든 정신세계. 인간의 정신세계는 그 기초가 얼마나 내 몸이 편하냐? 내 몸이 편하면 기분 좋습니다. 술 한 잔 마시고 기분 좋으면 팁 막 뿌립니다.

인간의 모든 진리가 뭐냐? 내 몸이 편하면 그게 곧 진리입니다. 어떤 학자의 연구 결과 몸이 편안한 상태를 위해서는 기온이 섭씨 18도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그리고 배는 적당히 부를 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합니다. 이런 환경에는 휘파람이 절로 나와요. 그러다가 치통이 오면 행복 다 깨져요.

행복이란 뭐냐? 내 몸의 컨디션이 최적의 상태일 때 이것을 두자로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옆에서 누가 잔소리를 한다. 그러면 내 몸의 편함의 균형이 깨져요. 그럴 때 버럭 화를 내지요. “내 행복을 왜 깨는 거야.” 라는 반발입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잔소리 하는 이유는, 자기 행복을 얻기 위해서 화풀이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 화풀이 하는 상대와 그 화풀이를 듣고 화나는 내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해야 됩니다. 여기서 몸이 편한 것을 상상계라고 하고, 타협하는 것을 상징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상징계는 반드시 법과 질서가 있습니다. 법은 타협책입니다. “너도 좀 양보하고, 나도 좀 양보하자.” 이것이 법입니다. 법은 진리가 아닙니다. 서로 양보하는 거예요. 그래서 법은 항상 유동성이 있어요.

신자냐, 불신자냐 하는 것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은 다 이런 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중심이에요. 어느 인간도 자기중심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에서 변해서 하나님 중심이 된다. 이렇게 해서 구원 받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논리를 따라가 보세요. ‘나는 내 중심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났다. 나는 남을 위해 산다.’ 라고 했을 때, 이런 인간. ‘전에는 나밖에 몰랐다가 내 중심에서 벗어난 인간.’ 그 인간 누굽니까? 역시 나지요. 그러니까 나에서 못 벗어났잖아요? 논리가 그렇잖아요.

“나는 나 중심에서 벗어나서 남을 위해 산다.”고 하는 그 훌륭한 나. 그는 누구입니까? 역시 나지요. 그럴 때 다른 사람이 와서 “당신은 왜 이웃을 위해 안살아?” 라고 하면, “나는 나를 벗어났어. 남을 위해 사는 나를 보고도 모르나?” 라고 화를 내지요. 화낸다는 자체가 뭡니까? 이미 더 큰 나로서 철조망을 친 거예요.

“나는 날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산다.”고 했는데, 남들이 약을 올리니까 갑자기 순간적으로 화가 났단 말이지요. 화를 냈으면 인간은 반드시 반성을 합니다. 그렇게 반성하고 난 뒤의 그는 누구입니까? 역시 나지요. 무한소급. 이런 반성을 하면서 생긴 나는 건사한 나. 또 나지요. 거울을 10개 보세요. 거울 속에 거울이 들어있지요. 얼마만큼 들어있습니까? 거울의 숫자만큼 들어 있지요. 그 거울에서 우리가 못 빠져 나오잖아요.

따라서 절대로 나에게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나에게서 벗어나서 구원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반성이 아니라 회개를 해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있는 그대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식구,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있는 그대로 구원 받아요. 나로부터 벗어나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그냥 생겨먹은 대로, 부모로부터 태어난 그대로, 욕망 덩어리인 그대로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예언이 덮치지요. 곡성에 살면 곡성에 사는 그대로, 대구에 살면 대구에 사는 그대로 덮쳐버리면, 구름이 덮쳐오면 빗방울이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예언대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은 나를 못 벗어나지만, 나 외곽에 하나님의 예언이 주어짐을 아는 것, 이것을 믿음이라 하고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의 식구들의 특징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러워서 이야기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행위를 이야기하면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구원받으려고 시도하는 사람이죠. 이런 방식은 산 위를 내가 올라가서 구원 받으려는 옛날 방식입니다. 이것이 아니고 위에서 내려올 때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뭘 줬습니까? 말씀을 주셨지요. 주어진 말씀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네가 지키든 안 지키든 간에 이 말씀은 하등의 자질이 없다.’ 말씀 성취에 네가 순종을 10개 했느냐, 20개 했느냐 상관없이 말씀은 말씀 그대로 될 뿐입니다.

우리가 방해한다고 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안 오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예수 안 믿겠다고 발악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이제 예수 안 믿겠습니다. 교회 안 가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쩌라고? 언제 네가 네 열심 때문에 구원 받았나?” 이게 바로 ‘자유’입니다.

“나는 이제 마음껏 타락할거야.” 마음껏 타락해 보세요. 마음껏 타락에서 지옥 갈 것 같으면 예초에 구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기쁜 소식 아닙니까? 내가 마음껏 타락해서 지옥 갈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가족은 예언대로 되지 내 행동 여하에 따라서 취소되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은 살인 강도였습니다. 그래서 사형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어요. 이런 말씀 듣고 강도가 뭘 생각했겠습니까? ‘내가 사람을 몇 명 죽었지?’ 이런 생각 하겠어요? ‘아하, 구원이란 것은 내가 강도짓 하나 안 하나 상관없이 예수님의 말씀 성취 대가로, 그 공로로, 그 은혜로, 그 사랑으로 내가 구원 받았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알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식구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렇게 된 사람이 자기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자기와 똑같이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 받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들끼리 모였을 때 그들이 뭘 자랑하겠습니까?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겠습니까? 아니지요. “너나 나나 똑같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식구입니다.

이제 본문 이해하시겠지요?
‘그러면 그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라고 물으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게 된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인하여, 이것은 내 행동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 외곽을 믿지요.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예언 속에 포함된 선물이죠. 그래서 이 선물이 오게 되면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아하, 내가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시켜 주셔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나처럼 구원받기 싫어도 이미 하나님 백성 삼은 사람이 있다.’

만약, A와 B란 사람이 그렇다면 A와 B가 만날 때 같은 식구인지 어떻게 압니까?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만 하고 첫째시간을 마치겠습니다. A도 B도 구원 받았다면, 같이 구원받은 사람의 공통점이 있을 건데, 뭔가 통하는 것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뭐냔 말이지요.

이것이 5장 1절에 나옵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이게 뭐냐 하면, 그 사람은 육신적으로 집에 아버지가 있지요. 있는데, 교회 가니까 늙은 남자가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은 분명히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런데 아비같이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집에 있는 식구 따로 있고 교회에 식구가 있을 때, 교회 왔다. 이것이 아니고 우리는 한 가족이 모였네. 라는 인식을 A도 가지고 B도 가질 때 그 사람은 가족으로서 서로 대화가 되는 거예요.

대화가 되는데, 문제는 분명히 나는 가족으로 생각했는데 최 집사님은 ‘왜 날 무시합니까?’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아니, 최 집사님. 나는 집사님을 무시한 적 없고 집사님은 기도할 때 너무 짧게 해서 다음에 기도할 때는 좀 길게 하라고 했는데--’ “그래, 당신은 기도 길게 할 수 있다고 자랑하나? 나는 배운 게 없어서 짧게 한다. 어쩔래?”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는 한 식구란 점에서 짧게 하나 길게 하나 상관없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니까 좀 더 길게 했으면 하고 한 식구라는 점에서 그런 말씀 드렸습니다.” “당신은 나를 식구로 보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 잘 몰라.” 이렇게 나왔을 때는 한쪽은 자아를 주장하고 “왜 날 무시하나?” 이쪽은 주님의 가족이란 의미에서 하니까 둘이 같이 교회에서 만났는데 서로 어긋나는 거예요.

“왜 날 무시하나?” 이것은 ‘왜 나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는가?’ 라는 말이지요. 이런 말은, 하나님의 식구가 아니고  일반 세상 모임, 낚시회, 볼링 동호회 이런 곳에서나 할 말이지요.
“기도 좀 길게 하세요.” 라고 했다면,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짧게 했는데, 다음에는 좀 더 길게 해 볼게요.” 이렇게 웃으면서 넘기면 될 일을 “왜 날 무시하나?” 라고 갑자기 자아가 나왔단 말이지요. 그렇게 나오면 상대가 멀쑥하게 되지요. 이럴 경우에는 그 늙은이를 아비 대하듯 못하지요. 아, 저 사람은 옆집 아저씨지 우리 식구가 아니네.

교회에서는 한 식구처럼 편하게 대하세요. 그런데 편하게 대하는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왜, 날 무시하나?”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지면서 ‘내가 지금 어디 와 있지? 내가 하나님의 집에 왔나, 아니면 세상 계모임에 와 있나?’ 혼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결론이 뭐냐 하면, 디모데전서 5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은, 교회 된 사람들은 교회 되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것대로 하게 되면 가짜를 쏙쏙 뽑아낼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구원도 못 받은 주제에 식구인 냥 섞여있는 것을 뽑아낼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되는 겁니다. 교인 한 사람 줄었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이걸 들통 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사람들로 하여금 “아하, 하나님의 식구는 ‘왜 날 무시하나?’ 그런 소리 하는 것이 아니고 무시하든 말든 구원은 주님께 달려 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한 사람 중에 2년 후에 또 삐쳐서 “왜 날 무시하나?” 그렇게 나오면 그 사람 또 빠져나갑니다. 그러니까 인위적으로 교회로 사람을 모으려는 노력은 하지 마시고, 평소 하는 대로 ‘나는 당신을 내 아버지로 보고, 나이 많은 여자를 어머니로 여기고, 같은 연배에 있는 사람을 형제, 자매로 보겠습니다.’

“오늘 전어무침 맛도 없고, 그것도 손님 대접이라고” 이렇게 해도, 조 집사님은 “전어 회 못 무쳐도 나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자유’ 이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첫째시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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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080926b디모데전서5장5절

광주 강의(08. 9. 26) 41-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마지막부분에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뭐냐 하면, 교회 왔는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 제가 문제 내겠습니다. 교인이 20명인데 18명이 신자고 2명이 가짜 신자라고 할 때, 역시 교회지요. 그러면 2명이 신자고 18명이 가짜신자라면 이건 교회입니까, 교회 아닙니까? 이것도 교회죠.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교회 출석하는 사람 중에 신자가 다수고 가짜는 소수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어요.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첫째시간에 한 것 다시해 보겠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하나님의 식구에요. 하나님의 식구이면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책임자죠. 하나님이 책임자가 되셔서 식구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 자식들이 되죠. 그래서 하나님의 식구가 되는데,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낳은 자식이 아닌 가짜 자식이 들어온다.’ 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아버지와 참된 자식이 있는데, 자식이 2명밖에 안 되는데, 18명이나 되는 가짜가 여기 들어와도 역시 이것은 교회가 되는 겁니다.

다수가 옳다고 해서 교회 되고, 다수가 가짜라고 해서 교회 아닌 게 아닙니다. 항상 책임자가 아버지께서 책임자가 된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봅시다. 교회가 무엇인가 하면, 교회라는 것은 아버지의 권위, 하나님 말씀의 권위, 예언의 권위입니다. 예언의 권위가 1명이라도 살아 있으면 그게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예언의 권위를 거부하는 사람이 섞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여기에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결국 이 사람들은 말씀에 의해서 분리가 일어나요.

‘목사님,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말씀이 살아있는 곳. 이게 교회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말씀이 살아있지 않은 교회가 있나. 교회는 다 말씀이 살아 있지.’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8명이 말씀을 안 좋아하고 그냥 교회에서 노는 것이 재미있다. 그런데 2명은 ‘말씀대로 합시다.’ 라고 나왔을 때, 결국은 18명이 누굴 쫓아냅니까? 2명을 추방하게 되어 있죠.

그러면 추방된 2명이 교회고 18명은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제 두 번째 시간 해 봅시다.
그러면 그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디모데전서 5장 뒷부분을 봅시다. 여기 교회 안에 과부가 있는데 두 종류의 과부가 있어요. 과부라는 말은 표현이 고상한 것은 아니지요? 고상한 말로 하면 ‘미망인’입니다. 사실 미망인이나 과부나 그게 그건데.

어쨌든 교회에 과부가 있는데, 두 종류의 사람을 통해서 한쪽은 하나님의 가족인 사람, 한쪽은 가족이 아닌 사람. 이렇게 나눕니다. 나누는데 바로 말씀으로 나눠요.

5절에 보면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여기에서, 참 과부는 뭐냐?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고 했어요. 그러면 구원받지 못할 과부는 소망이 어디 있습니까? 일낙을 좋아하지요.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아니고 세상적인 쾌락이나 이런데 두는 사람 같으면 이 사람은 교회 다녀도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말하기가 참 조심스러운 것이 뭐냐 하면, 방금 첫째시간에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구원 받는다.’고 했는데, ‘지금 와서 왜 딴소리 합니까?’ 이렇게 나올 수 있거든요. 사람을 죽여도 하나님의 예언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는다면서요? 맞습니다. 그 말 옳습니다. 그러면 세상 일락을 좋아하는 사람을 왜 성도 아니라고 하느냐?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과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척하는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되면 현재 자기의 처지에 대해서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중간 과정이 되고 하나님 배후에 자기 자신이 잘 되는 것에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은 수단이고 원래 자기가 기대했던 바를 이룬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믿는 게 돼요.

이것은 어떻게 들통 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다른 말로 하면, 참 과부가 나타날 때 서로 차이가 나면서 들통 납니다. 이렇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요. 이게 수직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참 과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직적으로가 아니라 수평적인 것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수평적인 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채우며 살아가는데 다 채우지 못해 미흡한 것을 하나님께 요청해서 채우려고 하나님을 이용하지요.

이들은 하나님께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기대하는 나 되기’ 즉 A에서 A'로 나아가기 원하는데, “이번 일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이번 일만 도와주시면 하나님께 헌금 듬뿍 하겠습니다.” 라고 나올 때, 결국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식구가 아니었단 말이지요.

정석훈 목사님 설교(http://blog.daum.net/1188-10)를 보면 사주팔자에 대해서 나와요. 사주팔자를 보는, 점치는 인간들은 죽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요. 저는 거기에 리플을 달았어요. 점치는 사람뿐만 아니고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도 죽여라. 사주팔자가 뭐냐 하면,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소망이 있어요. 나에게 소망이 있다는 말은, 주님은 우리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는데 자기는 안 죽고 훌륭하고 멋진 산 자로 기대를 하고 있으니까 여기에서 아무리 하나님, 예수님 불러도 그것은 하나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아요.

이런 자는 진짜 내가 원하는 내가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발로 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내 포부에 의해서 내가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 이게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어요. 나는 뭐가 되고 싶어. 이 땅에서 잘 되고 죽어서 천당 가고 싶어. 내 포부, 내 소망, 내 희망에 의해서 내가 구원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언젠가는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못나도 괜찮아요. 못나도 구원 받습니다. 이건 저의 주장이고, 불신자는 내가 못난 것은 내가 용서가 안 돼.

아까 쉬는 시간에 집사님이 필리핀 간 이야기했지요. 필리핀 원주민들이 정말 가난하잖아요. 그런 사람과 비교하면 집사님은 부자지요. 그런데 막상 한국에 오면 자신은 ‘나는 못난이.’ 항상 나는 저 재벌보다 못났고, 저 교수보다도 못났고, 나는 훌륭한 아버지도 아니고, 훌륭한 남편도 아니고, 너무 자책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양심이 고와서.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를 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너무 못났다는 거예요. 주님의 뜻은 못나도 괜찮다고 하시는데. 그런데 내가 못난 것에 대해 내가 용서가 안 돼요. 그래서 자실하는 사람이 있어요. 자살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가 기대한 내가 되지 못할 때 자기한테 너무 분해서 내가 나를 처벌하는 거예요.

정신병, 우울증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심판을 하는 겁니다. ‘너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못 되는 거야. 더 매를 맞아야 되겠어. 정신 차려야 되겠어.’ 하면서 자책을 하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무척 성화되고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 사람의 소망은 엉뚱한 소망이에요.

못나도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께 있는데, 나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지금보다 더욱 더 잘난 나가 되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A라는 지점에서 내가 원하는 A'로 갔습니다. 만족합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산이 여러 개 있는데 네 번째 산은 세 번째 산에 와야 네 번째 산이 보입니다.

제가 수요일 설교시간에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1,000억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는 500억 재산을 일단 가져야 1,000억 가진 사람들의 부인들은 란제리도 수백만원짜리 사는구나. 알지, 지금 월 수입이 100만원 되는 사람이 1,000억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몰라요. 일단 500억 정도는 손에 쥐어야 ‘1,000억 벌면 저 사람처럼 사는구나.’ 하는 것이 보이지, 100만원 버는 사람이 1,000억 버는 사람의 삶을 이해 못합니다.

이것은 돈 뿐만 아닙니다. 소위 훌륭하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제가 TV에서 봤는데, 훌륭한 며느리가 나왔어요. 벌써 20년 전 이야기입니다. 저는 제 아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아내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TV에 나오는 이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봉양하는데 밑반찬을 1,000가지를 했어요. 그것도 아주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해요. 그런데 제 아내는 밑반찬 3가지를 했어요. 저는 3종류 해도 좋아요. 그런데 1,000지는 네 번째 산이라. 나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에요. 내가 아내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1,000가지를 바라겠어요.

세 가지만 해도 좋은 아내라고 했는데, 사실은 이것도 욕심이라. 아내가 아프지만 말아다오. 보통 아내가 아프다가 안 아프면 처음에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좀 시간이 지나면 감사가 없어지고, 그 다음에 돈 벌어 오라고 합니다. “나 혼자 버니까 너무 힘들다. 다른 여자들은 다 돈 버는데 너는 뭐하나? 내가 돈 버는 기계가?” 이렇게 나옵니다.

그 전에는 ‘제발 아프지만 말아다오.’ 하다가 건강하니까 돈 벌어오라고 하잖아요. 이처럼 사람의 욕심이란 것이 ‘나는 그런 욕심 없습니다.’ 하지만, 막상 산을 하나 넘고 둘 넘고 셋을 넘으면 새로운 내가 미처 몰랐던 낯선 욕심이 내 속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소망을 갖는다는 말은 결국 스스로 파멸의 길, 스스로 행복을 깨는 길입니다.

마음을 낮춰야 되는데 갈수록 높아져요. 세상에 어느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 지금부터 가난하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지금보다 더 낫게, 더 훌륭하게 되도록 기도 할 것 아닙니까? 이런 기도가 모여 이미 소망이 하나님에게서의 벗어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가짜 과부는 무엇이 소망인가 하면, 11절에 나옵니다.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젊은 과부가 몇 살이냐 하면, 9절에 보면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60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50살도 젊은 과부에 속하지요. 젊은 과부는 결혼 정보회사에 등록하지 말라는 말이거든요.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배반한다.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왜 거절하느냐? 이들은 틈만 나면 새로 시집가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다시 정욕을 따라 세상 쪽으로 갈 경향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참 과부는 뭡니까? 5절에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그러니까 은장도로 허벅지를 찌르면서 “참아야 하느니라.” 이런 사람은 참 과부고, 큰 교회 가서 어디 돈 많은 홀아비 없나 싶어서 설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나오겠지요?

디모데전서 5장의 전체 내용은, 그 당시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배반한다는 말은 참 믿음이 없었고,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믿음이 아니고 결국 무슨 노림수를 가지고 교회에 오는 그런 가짜 교인들이 숱하게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도에 의해 말씀이 주어지면 발칵 화를 내면서 “남편 죽은 것도 억울한데 그러면 만날 ‘참아야 하느니라’ 이런 식으로 살란 말인가? 그러려면 내가 교회 미쳤다가 다니나?” 하고 삐칠 수가 있잖아요.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삐져라” 이 말입니다.

“삐져라”는 것은, 아무리 믿고 싶어도 결국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자신의 본색이 들통 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규범을 정한 것이 아니고, 믿음 없는 사람은 결국 그 본색이 드러나서 교회에 관심 있는 척하다가 세상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누가 책임진다? 하나님이 책임진다. 걱정하지 말고 너는 말씀만 전하면 다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 같지만, 일이 닥치고 이런 저런 상황이 오면 결국 떨어져 나갈 사람은 다 떨어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결국 말씀과 사건과의 만남에서 참과 거짓이 구분됩니다. 이 말씀을 보고 “나는 예수도 믿는다. 예수 믿는 것으로 모자라서 이제는 (나이 60되어서 과부 되었는데 이제는)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지.” 라고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아하, 내가 교회 다니면서 엉뚱한 발상을 했구나. 예수 믿는다고 했지만 그것보다는 ‘나도 새 시집가서 뒤늦게 호강해 볼까?’ 하는 생각이 있었구나.” 라고, 말씀의 권위 앞에서 다시 자기 자신의 소망을 지상에서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돌릴 때 그게 바로 참 신자입니다.

내 남편이 죽었다는 그 사건이 뭘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정말 하나님의 식구인가, 아닌가를 드러내는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남편이 죽은 것이 사건 아닙니까. 내가 일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 가짜는 30년, 40년 믿었다고 해도 어떤 사건이 터지면 결국은 자기 본색, 자기 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진짜 신자는 이런 말씀이 주어지면 “아, 그래. 내가 착각했구나. 내가 잘 믿는 줄 알았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내가 죽을 죄인이구나.” 다시 깨닫고, 남편 죽었다는 사건이 남들보다 재수 없는 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참 하나님의 식구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13절 이하를 보세요.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 지지 말게 하라.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참 과부는 교회가 관심을 가져주고, 그 외 어려운 사람이 있거든 교회에 짐 지우지 말고 가족이나 친척들이 짐을 지고, 남편을 죽게 한 사건 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교회가 하나님의 식구로서 보여줘야 될 책임이 있고, 이것이 바로 말씀의 권위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 화평교회는 그렇게 못합니다. 다들 바빠서 그렇게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화평교회 교인들의 관심사가 자기 몸 편한 것에 있었지 실제는 하나님의 식구가 아님이 들통 나는 거지요.

그 말씀 들을 때 “아하, 우리가 소홀이 한 것이 있었구나. 우리가 놓친 게 있었구나. 우리가 도와야 될 사람을 제대로 안 도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교회를 이용해서 자기가 도와야 할 사람을 교회에 짐 지우는 이런 것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식구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이란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태가 발생하고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인간은 본색을 드러내는데, 그 본색을 통해서 “아이고, 내고 뭔가 잘못 생각했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소망을 뒀구나.” 하고 깨닫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두는 사람은 진짜 신자고, “어쩌라고? 나는 내 할 도리 다했다. 이만큼 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뭘 더 하라고? 그러면 교회 못 다니지.” 라고 자기 본심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사태를 잘 일으키신 거예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식구를 책임지는데, 방법이 뭐냐 하면, 말씀과 돌발적인 사건을 주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울 때에 “목사님 말씀 옳습니다.” 라고 하지만, 막상 자기 집안에 무슨 사태가 발생하면 갑자기 원망을 누구한테 합니까? “하나님, 책임지세요. 내가 당신한테 얼마나 많은 것을 했는데 당신은 나에게 뭘 해주셨어요?” 자기 본색을 드러내요.

본색은 누구나 다 드러냅니다. 화 날 때 내더라도 “아하, 디모데전서를 보니까 잘못이 내게 있구나. 나도 몰랐던 죄가 내게 있었구나.”라고 깨닫는 사람은 다시 소망을,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신 하나님’께 두지만, 끝까지 원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바친 돈이 얼만데? 내가 믿으려고 애쓴 노력이 얼만데? 당신은 기껏 하는 짓이 내 남편 죽이나. 도대체 당신이 뭐야? 신이라면 똑바로 해. 당신이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야?”라고 대들 수밖에 없는 사태가 왔을 때, 인간의 힘으로는 누구나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언의 은사, 선물을 받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힘을 능가해서 “아하, 내가 마귀노릇했구나. 주님께서 십자가 피로 구원했는데 내가 마귀 짓을 했구나.”하고 자신의 주재파악을 하고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이지요.

말씀이 말씀대로 이뤄지기 위해서 이런 사태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하나님의 식구 같으면 하나님이 책임지고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건 우리가 염려할 사항이 아니에요.

사람을 100명 죽였다. 죽여도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합니다. 과부가 되어 정욕으로 말미암아 새 시집가더라도 “내가 젊을 때 이것 때문에 교회를 이용했구나.” 라고 깨닫게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시집을 가도 결국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일이 벌어집니다. 지고 난 뒤에 나중에 간증하면서 “젊은 여자분들, 남자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나는 두 번 시집갔다가 두 번 다 혼 났습니다.” 이런 식으로 간증할 수도 있잖아요. “소망을 하나님께 둬야 합니다.” 본인 입으로 그런 말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식구를 사용을 하되 결국 구원은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예언대로, 약속대로 택한 백성을 말씀을 주고, 사태를 주어서 기어이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감히 하나님의 뜻을 알겠습니까? 그냥 살 뿐입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살고, 몸의 욕망대로 그냥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오니 이 뜻을 우리가 무시하지 않는 그런 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