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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080822a디모데전서3장15절
광주 강의(08. 8. 22) 40-1
오늘은 디모데전서 3장 15절부터 보겠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여기에 ‘살아 있다’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알기로는 내가 살아 있고, 이 세상에는 인간만 살아 있지요. 내가 살아 있는 그 외에 다른 것은 살아있지 않다고 그렇게 과학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들은 인간과 동․식물들. 이것 외에 이 세상에 별이라든지 이런 것은 살아있지 않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우리 인간 말고 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데 문제는 우리는 왜 이것을 모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살아있는 인간들이 왜 이것을 모르는가 하는 이것이 교회에서의 고민입니다.
‘교회에 와서 세례를 받으라’고 하면 이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어요. 세례 주는 사람이 목사이기 때문에 목사를 통해서 세례를 받으면 됩니다. ‘성찬식을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못 된다는 것이고 이것이 교회에서의 고민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천국이 있다고 하는데 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기준은 다 빼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있는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빼버리면 그 기준 자체가 사람 쪽에서는 성립이 안 되잖아요.
무슨 말인가 하면, 교회가 크면 구원 받습니까? 아뇨. 그러면 테레사 수녀처럼 살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요. 기도원에서 은혜 많이 받으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요.
그러면 도대체 구원 받을 수 있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여기 있고 기준이 저기 있다면 저기 기준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후3:15)라고 했는데, 진리가 아닐 경우에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리를 찾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요.
따라서 사람이 없다면 교회가 없어지고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데, 교회가 되기 위해서 사람을 끌어 모으려면 진리가 아닌 사람들이 납득이 되는 걸 이야기해야 되는데, 문제는 그 교회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 받을 수 있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에게 납득이 될 수 있는 구원 받는 기준을 교회에서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납득이 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하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람들은 자체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진리에 관심도 없고, 모르고 살고, 진리 밖에서 살고 있어요.
진리 밖에 있는 사람이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진리에 대해서 알고 싶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사실은 자기한테 관심이 있어요.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습니다.’ 이것은 자기한테 관심 있는 거예요.
전도자: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습니까? 답변자: 예, 가고 싶습니다. 전도자: 그러면 진리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진리에 대해서 관심 있습니까? 답변자: 그것은 관심 없고 내가 죽어서 천국은 가고 싶습니다. 천국 있습니까? 전도자: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천국에 가는 길이 곧 진리입니다. 답변자: 제가 가면 안 되겠습니까? 전도자: 안 됩니다. 답변자: 왜요? 전도자: 당신은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거부할 사람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제시해야 될 기준은 바로 거부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진리, 그런 기준만 제시할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로 하여금 우르르 몰려오는 것을 하늘나라에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은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겨하는 그런 구원받는 기준은 그 자체가 진리도 아니고 엉터리입니다. 결국 뭐냐 하면, 사람들은 기준이 없어서 그냥 ‘넣어 도. 합격시켜 줘. 그냥 천국 들어가게 해 줘.’
윤리, 도덕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의 외침이 들어있어요. ‘나, 여기 있노라!’ 날 주목해 달라는 거지요. 올림픽 중계방송을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풍경이 나와요. 자기 나라 응원단이 한 사람도 없어요. 그 나라는 가난해서 중국까지 가서 입장료 지불하고 경기장에 갈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그 선수가 신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따면 그 선수와 코치 두 사람만 기뻐하고 그 외 관중이나 심판 그리고 상대측 선수나 임원진은 조용합니다. 승리한 선수와 감독 두 사람만 좋아하는 거예요. 너무 경기장 분위기가 썰렁하니까 선수와 감독 둘이 좋아하다가 그 두 사람도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냥 기쁨이 식어버려요.
이 세상은 같이 좋아할 때 그것이 기준이 돼요. 그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진리는 함께 즐기고 함께 웃고 함께 좋아할 때 그것이 진리에요. 남들이 자기 좋아하는 것을 안 알아주면 기가 죽어서 그만 둡니다.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이런 가치 있는 존재이니까 알아 달라고 할 때, 남들의 박수소리와 칭찬을 기대하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없을 경우에는 윤리, 도덕에 따라 안 삽니다. 남들이 볼 때 해요.
이처럼 모든 기준(천당 가는 기준, 하나님 믿는 기준, 복 받는 기준 등)은 자기가 만들어 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가 비 진리고 사기입니다. 다 엉터리에요.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순간에 기준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 성경 열심히 읽으면 천국 넣어 주지요?’ 이런 식으로.
사람의 행동은 반드시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없으면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 기대하고 고대하는 이 자체가 엉터리이기 때문에 모든 행위가 다 엉터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엉터리로부터 시작에서 엉터리로 끝이 납니다. 여기에서 천당 가는 기준도 만들고 별별 기준을 다 만듭니다. 그러나 다 엉터리지요.
그래서 복음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에게 구원 받는 기준을 이야기해야 되겠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이 수용 못할 그 기준만 제시하는 것이 진리의 기둥과 터의 역할입니다.
저는 혼자 생각해 봐요. 어떤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이냐? 구원 받았다는 그 기준이 뭐냐? 전도를 많이 하는 것. 헌금 하는 것. 아닌데. 뭐가 기준인가? 성경에서는 그 기준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비밀이거든.’ 이렇게 나와요. ‘감춰진 비밀이거든.’
뭐로 구원 받습니까? 비밀로 구원 받습니다. 너무나 비밀스러운 것. 아무리 사람들이 접근해도 접근이 불가능한 비밀이 우리를 구원 합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비밀이 구원한다고.
비밀이 구원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는 교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한국교회지요. 이것은 교회도 아니고 그냥 놀이동산이지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기준은 감춰진 비밀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다니고 지옥 가는 그런 꼴이 됩니다.
자, 그렇다면 이 비밀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가? 이것에 대해 지금부터 설명을 할 텐데,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이 신경을 바짝 써야 됩니다.
두 가지를 설명해 드리겠는데, 이 비밀이 왜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 되는가 하면, 이 비밀의 내용 구조가 두 가지로 되어 있어요. 하나는 하늘나라의 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땅의 구조입니다. 이 하늘의 구조와 땅의 구조가 충돌하는 이것이 비밀입니다.
하늘나라 구조와 땅의 구조가 충돌할 때 생기는 것이 바로 비밀이 됩니다. 땅의 구조라는 것은 인간 마음의 구조입니다. 인간 마음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생존에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글 올린 것 있지요? [불교의 창조론과 구원론]에 대한 글 있잖아요. 거기에 보면 불교는 모든 것이 에너지로부터 시작해서 에너지로 끝나지요. 이게 동양학으로는 기(氣)라고 합니다.
땅의 구조, 사람의 마음의 구조 속에는 힘(또는 에너지)의 배치가 있어요. 나의 가진 힘을 어디에다 저장해 놓고, 내가 또 그 힘을 얻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고. 이 마음의 구조 자체가 힘을 끌어 모아서, 외부에 있는 힘이 내 속에 있는 힘이 되도록 자꾸 모으는데, 이 힘이 빠져나가면 아까워하고, 힘이 다시 모이면 축복으로 여기고 이렇게 자꾸 힘을 끌어 모아요.
고대 신화에는 이런 것이 있어요. 힘 = 인격. 힘이 인격이에요. 고대 부족사회에서 그 사람이 얼마나 인격적으로 훌륭하냐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힘을 가졌느냐? 힘이 곧 인격입니다. 베이컨은 말했지요. ‘아는 것이 힘이다.’
보세요. 관심사가 힘이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자립할 수 있고 버틸 수 있는 힘을 모으는 그런 기준점이 있어요. 이게 마음 구조에요. 마음이 결국 행동으로 나오는데, 힘을 모으는 그런 구조가 밖으로 뻗어 나오는 겁니다.
쉬운 예로, 문어가 움직일 때, 문어는 없어요. 문어 발 하나하나 움직이는 그 자체가 문어가 되는 거예요. 죽은 문어는 문어가 아닙니다. 문어가 살아있을 때만 문어에요. 인간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요. 죽으면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가 힘을 발휘할 때 인간입니다. 아무개를 호명하면 ‘예’라고 답변하지요. 이렇게 살아서 답변하는 자체가 인간이 됩니다. 그냥 사진 찍어서 걸어놓으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지요.
인간이라고 할 때는 뭔가 살아서 움직이는 그 힘의 덩어리. 이것을 인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이 있고, 여기에서 개념을 뽑아내는데 그것을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사람’은 언어지요. 이 언어는 항상 추상적입니다. 개념은 추상적인 언어에 불과하고, 사람이라는 글자를 본다고 사람이 아니지요.
추상적 개념은 도로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야 이것이 진짜 사람이지 글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두환’ 이라고 쓰여진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살인마. 광주 학살의 원흉’ 하면서 막 욕을 합니다. 그런데 전두환이 앞에 있다면 욕할 수 있습니까? 머리 빠지고 늙은 영감이 앉아 있으면 함부로 욕 못하잖아요. 살아있기 때문에. ‘전두환’ 글자는 죽은 것이기 때문에 마음 놓고 욕해도 되는데,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 놓고 욕하지를 못해요.
이명박 대통령을 막 욕하는 사람도 막상 청와대에 초청받아서 대통령 앞에 있으면 황공스러워서 행동을 조심하지요.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대로 욕해요. 예수는 자기 집 강아지보다 더 못해. 교회에서 피해를 입었거나 하는 사람은 예수를 심하게 욕합니다. 예수는 살아있지 않고 그냥 문자(글자)로만 서로 통용되고 있는, 살아있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고 예수는 살아있는 자가 아니에요.
그런데 진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면 반대가 돼요. 예수님만 살아있고 나는 있으나마나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주제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로 구원 받는 이것이 기준인데, 하늘나라의 구조가 이 지상의 구조로 들어올 때 여기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요. 그 싸움의 현장에서 피가 튈 때 그 피가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비밀이 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피가 구원하지요.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다 이야기합니다.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도 ‘오, 신이시여!’ 운동선수들도 신을 향해서 뭔가 주문을 외우기도 하는데, 신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이름은 누구나 알아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하나님, 예수님 다 알아요. 우리나라 애국가에도 나오니까.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나님이든 하느님이든 나오잖아요. 우리가 접근하고 부를 수 있는 신은 가짜에요.
진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신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 피를 흘렸습니다. 그 피가 구원하는데 사람들은 자꾸 하나님이 구원한다고 해요. 아닙니다. 되도 않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이 죽으셨고, 그 피가 구원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피가 기준이 되다보니까 구원 받는 사람들은 그 피 앞에 할 말이 없어요. 왜? 나 때문에 죽었으니까.
사람이 누구에게 잘못해서 피해를 입혔으면 딴 사람에게는 큰소리 쳐도 자기 때문에 피해를 당한 사람 앞에서는 기가 팍 죽어요. ‘저 사람이 내 때문에 고생했다.’ 양심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는 사람 같으면 ‘저분이 나 때문에 죽었구나.’ 하는 것을 알면 기가 팍 죽지요.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주님의 희생을 안다는 것. 딴사람 앞에서는 큰소리 쳐요. 하지만 예수님 십자가만 생각하면 기가 팍 죽어서 ‘주여, 제가 입이 100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강도고, 창녀고, 도둑놈이고, 살인자며, 10계명은 아예 지킨 적이 없고, 내 힘만 모으는데 평생을 헌신하고 달려온 못난 인간인데 이런 날 위해 피를 흘리시다니요.’
목사가 설교하면서 이런 소리를 해야 됩니다. ‘내 힘 모으려고 예배당 크게 지었는데 이 죄를 어떻게 합니까? 내 노후대책 위해서 믿음도 없는 자들을 세례주고, 세례 받으면 구원 된다, 전도하면 복 받는다고 사기를 쳤는데 이 죄를 어떻게 하지요?’
이런 설교하면 장로들은 어떻게 나올까요? “목사님, 한번만 더 그런 설교하면 교회에서 쫓아내겠습니다.” 사람들은 전부 큰 힘 모아서 성공하려고 교회 왔는데 왜 갑자기 피 이야기를 합니까? 피를 누가 좋아합니까? 아무도 안 좋아해요. 왜? 피는 비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피 이야기 듣기 위해서 교회 온 것이 아니잖아요. “기도하면 너희에게 힘을 줄 것이다. 금메달 딸 것이다.” 이런 소리 듣기 위해 교회에 왔지, 피 이야기 들으려고 교회 온 것이 아닙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절에 왜 갑니까? 옛날 교회가 없을 때, 불교가 국교일 때 사람들이 왜 절에 가서 빌었습니까? 서산대사가 임진왜란 때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를 지키려고 했는데, 다 힘을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조상 제사를 왜 드립니까?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죽은 조상의 덕을 보자는 겁니다. 힘을 모으겠다는 것이지요.
힘이 구원의 기준이고, 힘이 있으면 구원 받은 것으로 믿는 이런 생존의 구조에, 하나님이 위에서 하늘나라의 구조, 죄인을 위해서 의인 되시는 주님이 죽어야 된다는 이런 말씀, 이것이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 나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다른 말로 하면 사람 경건이 아니고 큰 경건,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속한 경건. 이것은 지상에서는 아무리 애써도 모릅니다. 왜? 하늘의 경건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지상에서는 발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이런 하늘의 구조가 천장 내려앉듯이 내려앉으니까,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 말고, 내가 고대하고 기대했던 힘이 아니라 큰 경건, 엄청난 하나님의 의와 진리가 위에서 쏟아지는 거예요.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라고 했는데, 왜 중보자가 있어야 됩니까? 그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정성을 다하고 열심을 내면 되지 왜 중보자가 따로 있어야 돼요?
중보자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중보자가 있어야 돼요. 중보자가 왜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못났는가를 일깨워주기 위해서 중보자가 있는 거예요. 네 힘으로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중보자가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그 중보자가 바로 하나님의 집에 아들이고 모세는 종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3장 5절에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사환은 주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집을 맡은 아들로 충성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가 지상에서 힘을 모으는 이 땅의 관심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집은 따로 있어요. 그런데 그 집은 지상에서 사람들이 기준점을 찾아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무너지듯이 덮쳐 와야 돼요.
아파트 지어놓고 분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집은 위에 있어요. 위에 있는 구조가 지상에 그냥 뭉개고 내려와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기준점으로는 그 집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진리나 비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의 구조 자체가 힘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하루아침에 힘을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본성대로 삽니다. 그 본성 안에 죄가 들어 있고 본성대로 그냥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죄 짓기에 바쁜 인간이 언제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나 둡니까? 안 두지요.
인간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죄가 됐든 뭐가 됐든 힘만 챙기면 그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금메달 딴 사람 중에 자기는 고생 안 하고 금메달 땄다는 사람 없습니다. 고생해서 금메달 땄다고 합니다. 이게 거짓말입니다. 자기보다 더 고생하고도 금메달 못 딴 사람이 많이 있어요. “금메달 딴 것은 운입니다.” 이렇게 말해야 정답입니다.
운이란 말은 금메달, 은메달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고등학교 때 전교 1등 한 학생이 입시를 앞두고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수능시험을 망쳤어요. 그런데 늘 학교에서 자기를 못 이겨 애타하던 친구는 서울대 법대 수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 후 자기는 중소기업에 취직해서 평범한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자기 친구는 변호사가 되었어요.
왜 하필 입시를 앞두고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몸이 병들어 병 수발하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시험을 망치는 일이 벌어져야만 했습니까? 철없는 아가씨는 말합니다. “아버지, 왜 저는 쌍꺼풀 없이 태어나게 했습니까? 저는 왜 키가 작습니까?” 라고. 쌍꺼풀과 큰 키가 힘이 되기 때문에 원하는 겁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천국을 가요? 그러면 천국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천국에 가려면 천국의 구조에 합당해야 돼요.
이슬람교의 천국과 성경의 천국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간단합니다. 이슬람교의 천국은 지상에서 원하는 힘이 천국에서도 그대로 보장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이슬람교의 천국입니다. 지상에서 힘을 원했잖아요. 잘 먹고, 잘 살고, 높은 지위를 원했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그대로 천국에서 성취되고 보장되고 완성되는 것이 그들의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보험 상품이죠. ‘월 9,900원 내면 나중에 죽으면 1,000만원 받는다.’ 그래서 이슬람교에서는 많은 구제를 해야 돼요. 그래야 납입금이 모여서 나중에 천국에서 목돈 타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이 지상에서 어떤 것을 생각하든 ‘그것은 다 죄였습니다.’ 라는 것을 예수님의 대신 죽으신 그 피를 통과해서 깨닫게 되고, ‘이런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그 상태가 바로 천국입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이슬람교의 천국은 지상과 똑같아요. 지상과 하늘이 서로 내통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천국은 지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피로써 단절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장담합니다. 지금 우리가 불교 영향권에서 교회가 들어왔기 때문에 불교 같은 기독교가 되었지만, 만약 이슬람교의 영향권에서 교회가 들어왔다면 이슬람교와 같은 교회가 만들어졌을 겁니다.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 말레지라, 인도네시아 전부 이슬람 문화권이거든요. 중국에서 데모 하는 그쪽도 이슬람권이고. 불교의 교리는 모든 것을 해체시키기 때문에 뭔가 가질 게 없기 때문에 기독교가 들어오니까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고 하지만, 이슬람교 같으면 이 땅에서부터 죽어서까지 좋은 것으로 채워지니까 기독교가 들어올 틈이 없지요.
죄를 지적하는 기준이 바로 비밀로서의 피 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의 윤리와 도덕은 죄를 지적할 수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해도, ‘앞으로 우리가 잘 할게요.’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우리를 구원하지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상설교는 하나의 잔소리로 들릴 뿐이지요. ‘앞으로 잘 하면 될 것 아닙니까’ 하면서. ‘마음속으로도 간음하지 말라.’ ‘예, 알겠습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를 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납득이 되는 것을 골라잡는데, 피만 나오면 그것은 다 피하고, 피 말고 다른 기준 ‘열심히 순종하세요.’ ‘예,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알아들어요. 수상하지요? ‘예배 시간에 지각하지 마세요.’ ‘예, 알겠습니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 하라. ~ 하지 말라.’는 것은 잘 듣고 순종하는데, 피만 나오면 못들은 것으로 외면해 버립니다.
제가 10년 넘도록 강의를 계속해 오고 있는데, 외부에서 ‘이근호 목사가 주장하는 것이 뭔데?’ 물으면, 사람들이 답변을 제대로 못해요. ‘이근호 목사는 이것을 이야기하더라.’ 라고 딱 꼬집어 지적을 해야 되는데 지적을 하지 않아요. 대신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자기만 주의 종이래. 십자가마을에만 구원이 있대.’ 이렇게 나와요. 내가 전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자꾸 이야기해요.
왜 이런 식으로 나오는가 하면, 그들은 관심사가 교회에 있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도 공동체고 우리 교회도 교회로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제시한 기준 ‘피’는 차마 말을 못해요. 그걸 빼고 들었기 때문에. 아예 그런데는 관심이 없어요.
만약에 제가 얘기한 ‘피’를 진지하게 들은 사람 같으면 두 번 다시 ‘우리도 교회다. 우리 공동체도 인정해 다오.’ 이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피’는 내가 그동안 공동체니 뭐니 주장했던 그 주장이 전부 다 내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음이 폭로되고, 이런 것들이 ‘피’ 앞에서는 다 죄가 되거든요.
정리를 해보면, 교회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준을 제시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 교회 자체가 ‘진리의 기둥과 터’기 때문에, 이것을 포기하려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해야 되고,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려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참 경건의 비밀, 예수님의 피, 왜 우리 힘으로 안 되고 중보자가 있어야 하는가를 이야기 해 줘야 돼요.
제가 주일날 이런 소리 했어요. 예배시간에 태풍이 불어서 예배당 지붕이 날아가 버렸어요. 그러면 남는 것은 뭐가 있습니까? 예배당 없어지니까 사람들만 남지요. 이 사람들 왜 모였습니까? 교회 오기 위해서. 그러면 교회가 날아가 버렸는데. 무엇 때문에 모였습니까? 예배당이 날아가 버렸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낚시 동호회인지 골프 동호회인지 분간이 안 되잖아요. 분간이 안 되는데, 예배당에 나온 무리들하고 다른 무리들이, 예배당 건물 빼놓고도 뭔가 차이점이 있어야 됩니다.
그 차이점이 뭘까요? 한쪽은 즐기고 재미를 위해서 모였지만,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은 ‘나는 바로 죄인입니다.’ 나는 어떤 행동을 하든지 나 잘났음을 증명하는 식으로 살았는데, 날 변호한다는 자체가 왜 엉터리가 되는지, 나는 아직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옹호하는 것이 왜 죄인지, 예수님의 그 십자가 복음 앞에서 ‘아하, 내가 죄인 맞구나. 그러니까 예수님이 피를 흘렸지.’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28절에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가 되는 겁니다. 예배당 지붕 날아가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면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큰 경건, 이것은 지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밀로서의 큰 경건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겁니다.
00 집사님 막대따님이 피곤해 하시기 때문에 조금만 더 하고 쉬겠습니다. 하루 종일 힘 모은다고 얼마나 피곤했습니까?
선지자들의 특징이 뭐냐? 이 그림을 잊지 마세요. 비밀을 한 글자로 하면 뭡니까? 피. 하나님의 뜻이 뭐냐고 하면, 레위기에는 1장부터 피가 나와요. 제사 드리기 위해 제물을 잡잖아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피만 받으시는 하나님이에요. 간단하지요. 하나님은 피만 받습니다. 우리의 정성은 안 받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드린 그 제물의 흠 없는 피만 받아요.
여러분이 신앙생활 몇 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날의 모든 것들은 다 잊어도 좋습니다. 이것 하나만 기억하세요. ‘우리 하나님은 흠 없는 피만 받는다.’ 이것만 알아도 구원 받습니다. 선지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은 다른 것은 일체 거절하고 피만 받습니다. ‘언약의 피’지요. 피를 보고 살려줍니다. 하나님은 드라큘라 같아요. 피만 보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의 운명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피가 생기는 곳을 가는 움직이는 운명입니다. 이것을 ‘유동성’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힘을 모읍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고정성’이 됩니다. 우리교회 김대식 형제님이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목사님들은 반드시 숙제 해 주시길” 라고 하면서 영화를 올려놓았잖아요. 그 멘트를 보면 얼마나 목사들이 보기에 시건방진지. 자기가 노회장도 아니고 총회장도 아닌데 ‘이 영화에 대해서 평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들’ 이렇게 나와도 영화를 볼지 말지 모르는데 “반드시 숙제하시기 바랍니다.” 학교 졸업하고 숙제가 없어서 편하게 사는데 어른이 되어서 갑자기 누가 숙제를 하라고 하니 원.
십자가마을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또 이런 것으로 시비를 걸 거예요. “봐라. 성도가 이근호 목사 빽 믿고 건방지게 목사들한테 하라고 명령을 하고.” 이렇게 나올 거예요. 어쨌든 김대식 선생님이 숙제라고 냈는데, 윗사람이 숙제를 냈으니까 아랫사람들이 숙제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말 안 들으면 ‘이근호 목사 교만하다.’ 이런 소리 들을 것이고, 윤리적으로 비난을 받으면 내가 힘을 모으는데 힘이 없어지잖아요.
윤리란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외침. ‘봐, 나 착하잖아!’ 하는 자기 외침이거든요. ‘나 봐라 가치 있는 인간이잖아.’ 하는 외침이라고요. 윤리, 도덕이란 게. 이 사회에서.
그래서 그 영화를 보니까 영화가 괜찮아요. 잘 만들었어요. 그 영화에 목사가 나오는데, 목사가 찌질이지요. 요즘 말로 ‘찌질男’(지질이도 못난 남자)이죠. 교인이 달랑 7명인데, 중국집 배달하는 청년, 할머니, 아이와 장애인, 목사님 사모님과 딸. 7명인데, 중국집 배달하는 청년은 목사가 중매해 준 여자가 작은 교회 가기 싫다고 해서 큰 교회로 가버리고, 딸은 친구의 요청으로 큰 교회 가고, 사모님은 보험 영업을 하는데 마치 계약자가 주일날 만나자고 해서 계약자 만나기 위해서 가버리고, 예배 참석한 사람은 달랑 3명입니다. 목사까지 하면 4명이죠.
자, 이 비참한 현실. 그런데 강원도에서 300명 모이는 어떤 교회에서 오라고 하는데 안 가고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 영화를 보면, 교회라는 것이 유동성이 아니고 하나의 고정성이라. 그러니까 결국은 ‘내 교회’라는 인식. 내가 여기 고정적으로 있잖아요. 나를 위해 꾸미는 것, 예배당을 치장하는 것. 이런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해요.
선지자는 자기 것이 뜯겨 나가고, 꾸미는 것이 아니고 찢겨 나가요.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얼마나 가식적이고 위선자인지. 하나하나 주님의 성령의 태풍이 불어서, 태풍 불면 지붕 날아가고, 유리창 깨지고 다 날아가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가지고 있던 가식적인 것, 윤리, 도덕 이런 것들이 다 깨지고, 남는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희생당할 그 피의 자리에 합류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유동성이에요. 그런데 그 영화를 보게 되면 목사는 뭐냐? 나의 교회, 고정적인 내 성도가 없어서 ‘찌질남’으로 나온단 말이지요. 내가 여기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나를 꾸밀 수 있는 화려한 저택이라든지 좋은 직장이라든지 고급 승용차라든지 현재 나를 고정되게 할 수 있는 이런 많은 꾸미는 것들, 나를 화려하게 드러낼 것들을 끌어 모으므로 고정성에 점점 더 집착하게 되지요.
그런데 선지자는 자기의 것이 점점 더 떨어져 나가요. 엘리야의 경우에는 다 떨어져 나가고 나중에는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고정된 것이 없어요. 다 뜯겨 나갔어요. 심지어 자기 목도 자기 것이 아닌 사람이 있었어요. 세례 요한. 횟집도 아니고, 생선 대가리도 아니고 세상에 사람 목이 쟁반에 담겨서 그렇게 죽을 줄 누가 알았어요. 세례 요한이 평소에 이런 사실을 알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나도 남들처럼 가지고 싶고 내 것이라고 할 것들을 갖고 싶은데, 뭔가 나로 하여금 움직이게 만드는 그 하늘의 경건의 힘, 하늘의 비밀. 그 힘에 의해서 선지자는 유동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교회 수련회 가서도 했고, 서울 강의에서도 했는데, 광주에서도 이것을 하고 5분 쉽시다. 컵 좀 가져오세요. 목사님은 보셨지만 다른 사람은 힘 모으다가 바빠서 못 봤으니까.
컵이 이렇게 있으면, 우리는 빈 그릇이고 주께서 주신 비밀이 있어요. 비밀을 우리는 (컵의 물을 다른 곳으로 부으면서) 이렇게 유동적으로 흘려보네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의와 사랑입니다. 유동적이에요. 남에게 주기 위해서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빈 그릇이 됩니다. 서울에서 많이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고정적이 아니고, 힘이 와요. 오지만 이 힘은(이 경건의 힘은) 남에게 주기 위한 힘입니다. ‘나 구원 받았다.’ 이게 아니라 흘려보낼 때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내 것도 아닌 것이 하늘에서 주어졌다. 그래서 내 것이 아니기에 당신께 드립니다. 뭘? 이 피를. 하늘의 경건의 비밀을 드립니다. 나는 하나의 전달자(매개체)에 불과합니다.
재산이 얼마냐? 그것은 구원 받는 기준이 아니에요. 신앙생활 몇 년 했는가 하는 것도 기준이 아닙니다. 네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가? 예수의 피가 흐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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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080822b디모데전서4장3절
광주 강의(08. 8. 22) 40-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했는데, 이런 곳은 없지요. 제가 없다고 한 것은, 있는데 사람 눈에 안 띄지요. 사람 눈에 띄지는 않고 오직 믿음의 세계에서만 보이지요.
그런 교회가 어디 있는데? 그런 교회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유동적일 때만 있고 고정적일 때는 없지요. 한 번 교회가 계속 교회가 아니잖아요. 계속 움직이잖아요. 선지자가 한 번 계시 받았다고 계속 선지가 됩니까? 아닙니다. 한 번 사용하고 버리면 버려져야 하는 겁니다.
뭐가 고정적이냐 하면, 하늘나라가 고정적이고 그 밑에 있는 지상의 모든 것들은 유동적이지요. 유동적이라고 해서 만날 이사 다니라는 그런 뜻은 아니고, 고정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저는 20년 전에 예수 믿었으니까 잘 믿지요?” 20년 전에 믿은 것은 그 때 믿은 것이고, 지금 믿는 것은 20년 전에 믿은 것과는 관계없고 지금 믿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항상 끈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휩쓸려 가야 됩니다.
자, 그러면 고정적인 것이 깨어지고 유동적인 것이 될 때 이것의 특징이 뭐냐? 16절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경건의 비밀, 경건이란 하늘나라거든요. 천국의 비밀. ‘크구나. 천국의 비밀이여.’ 라는 것이 늘 깨달아지면 그 사람은 고정적인 하늘나라의 교회로서 이 땅에서 유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20년 전에 잘 믿었는데” 이러면 고정적이 되고, “지난 주 은혜 받았는데” 이러면 안 돼요. 오늘 지금 역시 “천국의 비밀이 지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게 크구나. 하늘에서 중보자가 오셔서 제단에서 피를 흘렸다는 그 사실이 우리를 구원하는구나.” 이것이 크게 늘 다가오게 될 때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집에 속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을 내가 소유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집에 내가 속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집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요.
이제 4장을 봅시다. 이런 유동적인 것 말고 이것을 고정적으로 만들려고 해요. “나는 목사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 나오는 것은 ‘목사다우면 어떻게 되지?’ 이렇게 되지요. 이게 고정적입니다. 목사다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게 바로 잘못 됐다는 겁니다. “나는 목사다.” 어떻게 해서? “하늘의 비밀에 의해서 목사다.” 오늘 목사기 때문에 내일도 목사냐? “그건 아니다.” 그것은 하늘의 비밀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나는 한 번 목사기 때문에 계속 목사다. 이렇게 되면 고정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유동성을 모르고 고정적으로 만들려고 해요. “나는 영적 인간이다.” 영적 인간을 고정적으로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그 만드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4장에.
4장 1절에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2절에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 3절에는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거절함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도사가 되겠지요.
왜 혼인을 금할까요? 혼인하면 신앙생활 계속 못하는 겁니까? 남녀가 혼인을 하게 되면 부부관계를 하게 되어 있지요. 부부관계를 하면 아무리 훌륭한 목사라 할지라도 부부관계를 할 때는 짐승과 같이 되지요. 동물원 원숭이 교배하는 것 봤습니까? 개들이 길에서 교배하는 것 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저 짐승들!” 하잖아요. 짐승이죠.
교인들이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어요. 뭐냐 하면, 아주 훌륭한 목사님인데(저 말고, 저는 안 훌륭하니까), ‘한경0 목사님이 사모님과 부부생활을 할 때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 생각할 수 있죠. 그냥 짐승처럼 헐떡거리면서 하지요 뭐.
그런데 그것을 본인이 “나는 경건하다. 나는 훌륭하다. 성경을 봐라. ‘모든 경건의 비밀이여’ 그러니까 나는 큰 경건을 해야 돼.” 그런데 큰 경건해야 되는데 아내와 짐승처럼 헐떡거린다고 하면 앞뒤가 안 맞잖아요. 큰 경건을 하려면 밤이나 낮이나 계속 고상해야 되지 않습니까?
옛날에 황진이라는 유명한 기생이 있었어요. 이 황진이가 남자 둘을 표적해서 꼬시려고 했지요. 하나는 화담선생을, 또 하나는 유명한 고승을 유혹하려고 했어요. 황진이는 자기의 미모를 무기 삼아서 소위 남자로서의 기개를 자랑하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과 종교인을 꺾는다면 자기는 조선 최고의 여성이 되는 거예요.
먼저 화담선생을 유혹했는데(지금 이게 성경과 관련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고), 황진이 혼자서 별별 짓을 다 했어요. 그런데 화담이 하는 말이 “치마폭을 펼쳐라.”라고 하고는 거기에다 붓으로 글을 써서 황진이를 무안하게 만들지요. 그런데 중은 한수 더 떠요. 사람들이 중은 황진이에게 넘어갔다고 가는데 넘어간 게 아니에요. 중도 시를 써는데 그 시 속에 열 십자(十)를 사용해서 욕을 하는 거예요. 욕을 아주 고상하게 한자로 풀이해서 했어요.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 적나라해서 큰 경건을 갖고 있는 목사 입에서 차마 말을 못하겠는데---.
이처럼 뭔가 부부관계나 성관계나 혼인 이런 것들을 멀리함으로 말미암아 세속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도사가 될 때 비로소 자기는 하나의 고정적인 경건이 되겠지요. “나는 여자도 모른다. 나는 오직 주님 밖에 모른다.” 그런데 만약 여기에서 혼인을 하게 되면 성관계뿐만 아니고 아이들 애먹일 때 분을 내며 때려야 하지, 생활비 걱정해야 하지요. 특히 사모님들은, 영화[작은 것도 아름답다]에 보면 나오는데, 처음 사모님이 되어서는 주님의 종인 남편을 성심을 다해 도와서 같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동참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생활이 안 되니까 보험 영업사원으로 다니면서 예배참석도 못하고 ---. 그 영화에서 사모님이 하는 말이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사모가 뭔지”
‘사모’라는 것이 있다고 고정적으로 잡아넣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하늘의 비밀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지 왜 사모의 역할을 자꾸 생각합니까? 이것은 바로 그 사회에서 “사모는 이러해야 되고 목사는 이러해야 된다.” 라는 그 개념의 틀에 억지로 껴 맞추려 하니까 힘들어요.
사람은 오기가 있는데, 그 오기가 “내가 사모노릇 못할 줄 알아! 너희들 잘 봐. 내가 어떻게 사모 노릇 하는지를” 이렇게 자꾸 남들을 의식해요. 그래서 남들에게 뭔가 경건의 티를 보이려고 합니다.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없는데 혼자 금메달 따보세요. 찐맛 없지요. 야구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동네 아주머니들 모아놓고 이승엽이 홈런 쳐 보세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아무도 박수 안칩니다. 축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가 축구를 보면 운동장에서 뛰는 젊은이들이 불쌍하다고 “각자에고 공 하나씩 던져줘라. 그렇게 차고 싶은데.” 라고 합니다. 그러나 축구는 공이 하나 있을 때 의미가 있어요. 공이 3개, 4개 있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지, 뭐든지 최고의 자리는 하나여야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경건도 이런 올무에 빠져요. 자기는 경건하다고 신장은 동생한테 떼 주고, 사모님도 교인에서 장기를 떼 주고 했는데, 만약에 다른 교인이 그 목사부부보다 다 많은 것을 남에게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패배감을 느끼지요. 자신이 금메달을 땄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자기의 기록을 깨는 사람이 나왔을 때 기분 굉장히 나쁩니다. 오기가 생깁니다.
하나의 게임이에요. 뭐든지 고정적이 되어 버리면 남에게 지고는 못 살아. 이게 무슨 경건입니까? 바로 이 세상에서 기껏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가르친 경건이 뭐냐? 남보다 더 착하다는 것에서 남을 이겼다는 것. ‘착한 게임에서 남을 이겼다는 그 보람을 한 번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라는 이런 헛된 경건에 내몰아요.
이게 얼마나 악마적인지, 본문 4장 1절에 보면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만약 모른다고 칠 때 우리에게 괄호 속을 채우라고 하면, 음주운전 하는 놈, 도박하는 놈 이런 것으로 채울 거예요. 그게 아니에요. 귀신에 홀린 자, 그리고 악령에서 사로잡힌 자들이 하는 짓이 뭐냐 하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폐하는 거예요. “이것은 먹으면 안 되고, 이것은 먹어도 되고.” 이런 식으로.
누가 이런 짓 했어요? 이상구 박사 압니까? TV에 나와서 ‘엔돌핀’이란 유행어를 남긴 사람인데 안식교 교인인데,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했어요. 이사람 강연 때문에 한 때 돼지고기 값이 폭락했어요. 이 사람은 레위기에서 나오는 오징어, 돼지고기 이런 것을 성경 말씀대로 먹지 말라고 했어요.
세대주의자의 특징이 이것입니다. 오늘날 개혁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큰 경건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기껏 자기가 고정적으로 있는 나를 경건으로 포장을 해야 되잖아요. 극단적으로 자신을 포장했는데, 자기보다 더 잘 포장한 사람을 보면 견딜 수가 없어요. 잠을 못 잡니다. 시기심 때문에. “되도 않은 인간이 왜 나보다 더 경건해?” 참을 수가 없어요. 오 목사님이 경건하게 살면 나는 참을 수가 없어요. 오 목사님이 “나는 게을러서 겨우 성경 3세간 밖에 못 읽었습니다.” 라고 하면, 나는 바빠서 30분도 못 읽었거든요. 오 목사님이 금메달이면 나는 동메달도 안 돼요.
제가 앞서 이야기했지만 하늘나라의 구원 기준은 동메달, 금메달이 성립이 안 되는 기준입니다. 우리 피는 흠이 있기에 안 받고, 하나님은 흠 없는 예수님 피만 받습니다. 이게 경건의 큰 비밀이에요. 이것이 비밀입니다. 이것이 왜 비밀인가 하면, 이 세상에서는 고정된 자기를 고정된 타인과 비교해서 남에게 안 지려고 착하면 착한 대로, 공부면 공부로, 돈이면 돈으로 안지고 이겨서 그것으로 보람을 느끼고 그런 쓸데없는 경건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음식도 먹을 것과 안 먹을 것을 따로 구분하고, 혼인을 해서 짐승들처럼 성관계를 하고 이런 것이 본인 스스로 용납이 안 되기에 혼인을 금하고 이렇게 합니다. 신부와 수녀들이 결혼을 안 해요. 이유가 뭐냐 하면 ‘천국을 위해서 고자 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자인지 아니지는 확실히 모르지요. ‘천국을 위해서 고자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결혼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고, 신부와 수녀들은 자신들이 경건하기 위해서 결혼을 안 한 것이고. 이것이 성경과 전혀 달라요.
하나님의 말씀은 유동성인데 그들은 “한 번 신부는 영원한 신부다.” 이렇게 나와요. 이런 고정성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신부들이 선언을 할 때 땅에 엎드립니다. 그것을 보고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천주교는 폼생폼사다.” 폼에 죽고 폼에 산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신부가 신부복장을 벗고 평상복을 입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마음을 낮춘 게 아닙니다. ‘신부님이 예수님처럼 우리 죄인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평상복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셨구나.’ 그 소리 듣기 위해서 평상복 입었어요.
중이 머리를 왜 깎습니까? 승복 왜 입어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기준은 기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알아채는 기준은 기준이 아니에요. 구원 받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 기준은 사람들에게 비밀입니다. 사람들이 못 알아채야 돼요. 인간은 자기가 내세우는 것으로 구원 받으려 합니다. 그런 것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이 행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흠 없는 어린양의 피로 구원 받습니다. 그것 때문에 중보자가 있는 거예요.
고정성은 악마가 유도를 합니다. 만날 더 철저히 해야 한다고 다그칩니다. ‘더 철저해야 돼. 보다 더 철저해야 돼.’ [다빈치 코드]의 끝 장면을 보면 신부들이 채찍 끝에다 쇠붙이를 달고 자기 몸을 때려요. 그러면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가요. 왜 그런 짓 합니까? 자기를 때림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정욕을 억제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쉬는 시간에는 뭐 합니까? TV 봅니까? 스포츠 중계 봅니까? “나는 경건을 위해서 설교 준비하는 토요일에는 TV를 안 본다.”는 목사도 있고, 주일 아침 경건을 위해 금식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 사람 점심은 곱빼기로 먹어요. 아침에 못 먹은 것 다 보충해요. 이게 원인은 전부다 고정성 때문입니다. 만날 “나 이렇게 될 거야!”
선지자에게는 ‘나’라는 게 없습니다. 선지자는 주님의 계시대로 그냥, 주님이 주신 경건의 비밀대로, 자기가 자기를 뜯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자리를 뜯어서 자신의 본색이 다 드러나고 자기는 죽어야 마땅한 죄인으로 남는 거예요. “주여, 저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이게 바로 신약의 사도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식물(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3).”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여기 [화평교회]라고 작품이 있는데, 누가 만들었습니까? 집사님이 만들었어요. 예. 그러면 ‘화평교회’ 글씨 자체는 집사님이 아니지요? 집사님 몸은 따로 있으니까. 그런데 제가 이 작품을 뚝뚝 치면 집사님 기분이 굉장히 나쁩니다. ‘내가 만든 작품 왜 손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무엇을 우리에게 줬으면, 무엇과 연관시키는가 하면, ‘하나님이 지으셨구나.’ 하고 감사히 받으면 되지,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의 피조물인 내가 그냥 합류하면 그게 내 할 일이지 내가 왜 따로 고르느냔 말이지요. ‘이것은 먹을 것. 이것을 못 먹을 것.’ 자기가 왜 고르느냔 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제가 결혼할 때 그랬어요. “하나님, 어떤 여자라도 제게 오겠다는 사람 있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와 결혼 했어요. 군에 입대할 때도 그랬어요. “주여, 어디에 배치되더라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서 전방에 갔어요.
지금도 그래요. “교인이 많든 적든 복음 듣기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교인 많이 나가버렸어요. 아마 그들이 원했던 기준이 아니었던 모양이지요. 피 말고 다른 기준을 원했던 것 같아요. 나의 고정성을 알아주는 그런 기준을 원했던 모양이에요. 물 붓는 것 말고, 물이 꽉 차 있는 것. “나는 물이 꽉 차 있다.” 이것만 자랑하고, 그 물을 흘려보낼 줄 몰라요.
4절에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여기에서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을 감사히 받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왜 고르려고 합니까? 감사히 안 받아요. 군인들 같으면 “나는 전방에 배치되면 안 됩니다. 후방에 배치 받아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왜 자기가 자꾸 고르려고 합니까? “나는 저 남자(혹은 여자) 아니면 안 됩니다. 나는 꼭 저 사람과 결혼해야 됩니다.” 왜 자꾸 내 마음대로 고르려고 해요?
이것은 본은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이여, 내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손대지 마세요. 이건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는 자기 고정성을 갖기 때문에 그래요. 저 작품이나, 저 물건이나, 저 자리가 하나님이 지었다면 저것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할 건데 “왜 나는 키가 작습니까? 나는 왜 멍청합니까?” 하면서 온갖 불평의 조건을 다 붙여요. “이런 것들은 내가 원하는 고정성이 아닌데” 하면서.
감사히 받으면 버릴게 없습니다. 내 몸뚱이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감사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파도 아픈 몸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감사히 받으세요. 자식이 2명 있으면 그것도 감사히 받으세요. 버릴게 없습니다.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진다.”는 말은 뭐냐?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히 받으라는 겁니다. 감사히 받기 위해서 말씀과 기도로 ‘왜 감사할 수밖에 없는가?’ 구원 받는 것도 내 피가 아니고 주님의 피로 했기에 감사하지요, 현재 내가 존재하는 것도 버릴 게 없이 감사하지요.
그러니까 말씀과 기도를 하면 뭐가 나옵니까? 감사가 나오지요. 그런데 말씀과 기도를 안 하면 감사가 안 나오고 고정성이 됩니다. 자기 뜻만 있어요. “주님, 왜 내 뜻대로 안 해 줍니까?” 말씀과 기도를 안 하면, 하나님께 반발하고 협박하기 바쁩니다. 예를 들면, [작은 것은 아름답다]라는 그 영화에 보면, 교인이 떠나가니까 목사가 울지요. 운다는 것은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식으로 대합니까? 이러면 곤란합니다.” 라는 마음이 담겨 있지요.
제가 그 목사의 경우라면, 강원도에서 사택 제공하고 초빙하는 그 교회에 갑니다. 무슨 똥고집으로 계속 서울에 버티느냔 말이지요. 혹시 그 목사의 생각은 “그곳에 가도 교인들이 좋아하지 않고 결국 쫓겨날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에 안 갔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갑니다. 이사 한 두 번 합니까? 저는 14번 했는데.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가서 복음 전하고 오는 거예요.
정석훈 목사 보세요. 두 달 만에 쫓겨났지. 두 달 만에 쫓겨났는데(두 달인지 석 달인지 확실치 않은데) 하루에 심방을 열 곳 넘게 했어요. 새벽기도 설교하고 실컷 복음 전하다가 왔잖아요. “하나님, 열심히 했는데 왜 두 달 만에 쫓겨났습니까?” 이러면 안 되고, 감사가 나와야 해요. 기도와 말씀으로 감사가 나오면 돼요. 이게 큰 경건이에요. 이것보다 큰 경건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대목가지고 “이근호 목사는 말씀은 있는데 기도가 없더라.” 이런 소리를 해요. 그러면 제가 묻지요. “그러면 기도로 구원 받습니까, 말씀으로 구원 받습니까?” 1) 기도로 구원 받는다. 2) 말씀으로 구원 받는다. 3) 말씀과 기도로 구원 받는다. 4) 예수님 피로 구원 받는다. 몇 번입니까?
그 사람은 기본적으로 구원이 뭔지도 몰라요. 이 이야기는 감사가 나오는 것은, 거룩한 약속의 층과 유동적으로 약속이 어디 가든지 가고 하려면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나오니까.
그 다음 6-8절을 봅시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이 대목에서 핵심은 뭐냐? ‘약속’입니다. 금생뿐 아니라 내생까지 약속이 지배합니다. 이렇게 항상 약속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을 아는 그런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간단하지요?
이것을, ‘육적인 경건이 있고, 영적인 경건은 따로 있다’고 사람들을 족치고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약속이 얼마나 큰 경건의 비밀인가를 늘 새삼스럽게 알아가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는 말은 육체의 연습은 결국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으로 시작한 것으로 육으로 끝나요. 왜냐하면 고정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 이렇게 사람은 뭔가를 하게 되면 점점 더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게 돼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영적 경건은 뭐냐 하면, 자기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고 ‘나같이 못난 인간, 나같이 어리석은 인간’ 자꾸 자기가 못났고, 못난 인간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큰 경건에 대해서 감사가 늘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지금은 이렇게 밤늦도록 힘들지만 말씀을 공부하는데, 공부가 끝나서 성경을 덮으면 생각이 어디에 갑니까? 자기 자신에게 가 있지요. 자기 자신에게 가 있으면서 그 다음에는 “내가 한 시간 뒤에는 뭘 할 것인가?” 할 것을 계획을 하지요. 이런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나’라는 고정성을 근거로 해서 계획을 잡는단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란 것은 늘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다시 말씀을 생각해서, 차타고 집으로 가면서 “오늘 목사님 강의하신 핵심 내용이 뭔가”라고 말씀을 생각하게 되면 뭘 잊게 됩니까? “한 시간 후에 뭘 하지?”라는 생각을 잠시 잊어버리잖아요. 그렇게 되면 아직은 감사가 이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강의 끝나자마자 자기 고정성으로 가버리면 뭐가 없어집니까? 감사가 없고 불평이 나오지요. “할 일도 많은데 성경공부 참석하느라고 못했다. 괜히 시간 낭비했다.”고 하면서 투덜거려요.
그래서 목사의 입장에서는 교인들에게 설교마치고 난 뒤에 투덜대지 않는(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한테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돼요. 세상이야기 하지 말고 ‘왜 흠 없는 피가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을 용서하는가?’ 예수님이 하신 큰 경건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잠시나마 그들로 하여금 경건의 훈련에 임하게 되어서 감사가 약간은 더 지속되는(얼마 후에 또 끊어지지만) 그런 설교를 해 주면 참 고맙겠어요.
10절을 봅시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하나님 앞에 뭐가 있습니까? “살아 계신” 그러니까 우리는 유동적이지요. 하나님 앞에 붙잡혀 유동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의 본이 되어”
이 대목을 젊은 부교역자들이 자주 거론해요. 젊은 부교역자를 누가 무시하는가 하면 장로들이 무시하거든요. 그럴 때 부교역자들이 반발하는 근거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럴 때 “네가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었나?” 라고 물어보세요. “내가 달리 업신여기겠나?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일에, 행실에 본이 되었나?” 다른 말로 하면 “네가 하늘나라 선지자처럼 살아가고 있느냐?” 다른 말로 하면 고정적으로 말고 유동적으로 살아가느냐는 말이지요.
누가 장로들로부터 존경받는 부교역자입니까?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생각하는 사람. 진짜 복음 아는 사람 같으면 그런 부교역자에게 존경이 안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이00 씨를 존경합니다. 나이가 얼마인지 그런 것은 전혀 생각지 않고(혼자 있을 때는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글을 써도 그리스도 앞에 죄인인 것을 이야기하고 이건 존경 안 할 수가 없어요. 제보다 나이 적습니다. 제보다 연소해요. 연소하다고 업신여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있으면 보통사람이 아니에요.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있으면 천사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없고 자기 고정성만 있으면서 대우받고 존경 받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성질나지요. 그리스도를 보여주면 존경 하지 말라고 해도 존경합니다. “나는 목사다. 나는 장로다.” 그래서 제가 지난 수요일 그런 설교했어요. “목사 중에 믿음 있는 사람 누가 있나?”라고. 아니 수요일이 아니고 주일 오후에 했습니다. 그런 설교 하니까 우리교회 윤00 집사님이 ‘아멘’했어요.
아니, 목사치고 믿음 있는 사람 누가 있느냔 말이지요. 왜 목사들이 믿음 없느냐 하면, ‘나는 목사입네.’ 하거든요. 이건 고정성이에요. 설교할 때만 목사이지 내려오면 평신도인데, 자기가 평신도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거예요. “나는 목사다워야 해.” 목사다울 생각 말고 본이 되면 목사 아니라도 목사 이상으로 대우합니다.
저는 나이 들면 사람이 인간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인간은 나이를 헛먹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나이는 그야말로 숫자일 뿐이지 나이 든다고 인간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고정성을 유지하면 인간이 안 됩니다. 뭔가 흘러가야 돼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조종하고 흔들어대고 해체시키는 주님의 능력이 바로 나로 하여금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14절에 나옵니다. “내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은사라는 것은 가르치는 은사를 말합니다.
15절에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전심전력에 진보하라는 것입니다. 전심전력해서 네가 뛰어나라는 말이 아니고, 전심전력이 계속 이어지라는 것입니다. 전심전력이 중간에 전심전력이 아닌 것으로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옛날에 열심히 했다고 지금 놀아도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전심전력 자체가 계속 이어지는 사람이 되어 달라는 거지요. 즉 전심전력 자체의 진보에요.
‘옛날에 공부 많이 했는데.’ 그것은 고정성이죠. ‘옛날에 이근호 목사 책 20권 냈다. 이제는 안 내도 되지.’ 그건 옛날이지요. 지금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옛날은, [아, 옛날이여] 그건 이선희 노래지요.
‘저 사람은 항상 전심전력하는구나!’ 무엇을 말입니까? 그러면 교사 그만두고 신학공부 할까요? 그게 아니고, 감사하는 일에, 세상 사람은 알지 못하는 그 경건의 비밀에 대해 감사하는 일에 쉬지 않고 전심전력해야 됩니다. 어제 감사했는데 오늘은 좀 쉬자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은사’가 뭐냐 하면, 공짜 선물입니다.
그 다음 16절에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여기 “구원하리라”는 말씀, 특히 “네 자신을 구원하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미 구원이라는 구조가 있어요. 하나님의 경건의 비밀의 힘이 있어요. 그 구원 속에서 너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은 안 보이지요. 안보여도 있습니다. 저를 보세요. 저 같은 인간도 구원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이미 와있는 구원을 소개하는 거예요. 구원은 하나님의 계속되는 유동성이거든요. 하나님은 살아계시니까.
아까 강의한 것 다시 해 봅시다. 문어가 움직일 때 문어지요. 하나님은 살아 계세요. 살아 있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그 움직임 자체가 구원의 역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을 누가 보여주는가? 본문에서 디모데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움직이심을 보여줘야 하는데 “나 구원 받았다.” 라는 고정성으로 나와 버리면 무엇이 가려집니까? 지금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이 가려져요. 내 일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거나 가리지 마세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5장입니다. 1절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여기 앞의 것 다 뺍시다. 그러면 ‘아비’가 있고, ‘어미’가 있고, ‘형제’가 있고, ‘자매’가 있지요. 아비, 어미, 형제, 자매 이것을 뭐라고 합니까? 가족이죠. 쉽게 말해서 ‘너희들은 같은 식구니라.’ 이 말입니다. ‘디모데야, 한 식구다.’ 남이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의 경건의 비밀 속에 있는 사람들, 이들은 한 가족이란 말입니다. 남으로 여기지 말라는 거지요.
따라서 만약에 꾸짖게 되면 남으로 간주하는 것이 돼요. 한 식구가 아니라 남처럼 되지요. 자기 아버지를 꾸짖지 않듯이, 아버지한테는 권하지요. 권한다는 것은 한 가족이란 말이고, 꾸짖는다는 것은 남남이란 뜻입니다.
그 다음 3절에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
옛날에는 남편을 잃으면 전부를 잃어버려요. 왜냐하면 옛날 여자한테는 일체 사회적 권리가 없었습니다. 여자가 독자적으로 살 수 있는 형편이 못 됐어요. 그래서 여자는 남편이 아니면 자식이 먹여 살려 줘야 살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이 시대였습니다. 여자가 혼자 사는 것은 매춘부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식구들이 여성을 먹여 살렸습니다. 여성은 그냥 살림만 살고. 집사님은 요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까? 사실은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욕심이 많아서 돈을 더 벌어 자식들을 더 잘 키우려 하기 때문에 나가서 벌지요.
여자가 나가서 돈을 벌게 되면, 처음에는 다 집안을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여자가 돈 맛을 알게 되면 돈맛에 빠집니다. 자녀들이 ‘엄마, 이제 나가지 마세요.’ 해도 계속합니다. 말릴 수가 없어요. “돈이 눈앞에 보이는데 그걸 왜 놓쳐.” 돈을 벌어서 뭘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돈을 버는 거예요.
유치원 아이들이 운동회 할 때 과자 매달아놓고 따 먹는 게임 있지요. 이처럼 ‘돈이 보이는데 왜 내가 남에게 양보해. 내가 따 먹을 수 있는데.’ 그래서 부지런히 돈 있는 곳은 다 찾아서 따 먹으려 해요.
처음에는 사람이 돈을 먹지만 나중에는 돈이 사람을 먹습니다. 술도 그래요.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셔서, 술이 취해 비틀거리면 그 사람이 술인지 인간인지 분간이 안 돼요. 돈 줄, 술 줄 끊는 것 기대하지 마세요. 못 끊습니다. 한 번 돈 맛을 보고, 술 맛을 봤으면 못 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끊지를 않지요. 술, 돈 이것은 못 끊는데 여기에 큰 경건의 비밀이 와버리면 관심사가 술, 돈에 있다가(끊는 것이 아니고) 관심사가 옮겨가 버리지요. 관심사가 옮겨지면 술, 돈이 시시해 지는 날이 와요. 이게 시시해 지면서 새로운 관심사에 몰두하지, 술, 돈을 끊어서 새로운 관심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곳으로 관심이 옮겨질 때 과거의 관심사가 엷어지지 다른 관심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관심을 끊을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돈보다 더 좋고 술보다 더 좋은 것이 나타나면 자연적으로 돈, 술이 시시해 지지요. 시시해 지니까 전에는 3병 마시다가 “한 병만 마시자.” 그러다가 “먹어도 소용없는 것 내가 왜 먹지.” 이러다가 나중에는 안 먹게 되지요. 예전에는 왜 3명 마셨는가? 안 지려고. 자기 술 세다는 것 자랑하려고. ‘나는 3병 마셔도 끄떡없다.’ 술 금메달 따려고. 이제 올림픽도 끝났는데 술, 돈 금메달 그만 따고.
흠 없는 피가 얼마나 소중한지, 돈 밖에 모르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피를 흘렸다는 그분 앞에 우리가 좀 미안스러워 하고, 죄송하고 부끄럽기조차 한 그러한 감사가 우리에게 나와야 할 줄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철없는 우리. 태어날 태부터 죽을 때까지 남한테 안 지려고 하는 그런 오기로 똘똘 뭉친 체 살아가는, 힘을 끌어 모으는데 진력을 하다는 저희들, 아무것도 아닌 저희들, 의미 없는 저희들을 위해서 피를 흘려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천국에 넣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늘 감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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