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081024a디모데전서5장17절
광주 강의(08. 10. 24) 42-1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부터 할 차례인데, 그것 하기 전에 15절에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사단이 지배하는 영역 따로 있고, 성령이 지배하는 영역이 있어요. 중립은 없습니다. 둘 중 하나지요.
사단에게 지배받든지 아니면 성령에 지배를 받든지, 성령의 지배도 안 받고 사단 지배도 안 받는 그런 인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구원이란 것이 사단에게서 성령으로 옮겨가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성령에게 옮겨 갔을 때만 비로소 자기가 예전에 있었던 동네가 마귀가 지배하는 동네였다는 것을 알게 돼요. 이 때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내가 참 큰일 날 뻔했다. 내가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니 큰일 날 뻔했구나!”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될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의 영역으로 온 것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자기 형편이 좀 가난하고 아프고 해도 그것은 큰 문젯거리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전에 사단에게 속했을 때에는 문제가 되지요. “나는 왜 몸이 아플까? 왜 수입이 적을까? 우리 가정은 왜 고부간에 갈등이 있을까?” 이런 것들이 문젯거리가 되는데, 사단에서 성령으로 옮겨오고 보면 이런 것들은 전혀 문젯거리가 되지를 않지요.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5절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7절에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여기에 보면, 사람들이 뭘 받지요? 뭘 받습니까? 성령을 받지요. 이 소식은 KBS 9시 톱뉴스에 나오는 그런 것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뉴스에 나오는 첫 소식 ‘주식이 1000선이 무너졌다.’는 것은 뉴스거리도 안 돼요. 이런 것은 같은 사단의 영역 속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거예요. 환율이 어떻고 하는 것은 전부 사단의 영역입니다.
사단의 영역에서, 즉 돈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돈 없이 살게 된 영역으로 옮기게 된 것, 이것은 행운 중 행운입니다. 로또복권 당첨되고 난 뒤 2년 후에 다 날리고 도둑질하다 잡힌 사람이 있었지요? 보통 로또복원에 당첨되면 ‘인생 역전되었다.’고 합니다. 사단의 세상에서는 역전이 열 번, 스무 번 돼도 소용없어요. 여전히 사단의 영역입니다. 진짜 인생이 역전되려면 사단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성령이 지배하는 세계로 가면 이것이 진짜 역전입니다.
구00 목사님 글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요새는 살 재미가 없다. (2008년 프로야구 플레이오프에서)롯데가 초반에 탈락해서 재미가 없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재미를 찾지요. 그러나 성령을 받게 되면 롯데가 지든 삼성이 지든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지요. 주식이 오르든 땅값이 내리든 별 신경 쓸 필요가 없단 말이지요.
이 아파트 값이 폭락해서 집값이 반토박이 되었다고 해도 우 집사님이 성령을 받았으면 별로 신경 쓰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집값이 얼마가 되건 그것으로 성령을 살 수 없거든요.
제 3의 지역은 없습니다. 사단 아니면 성령, 성령 아니면 사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성경을 보기 전에 예상했던 그것을 밀쳐버리고 우리가 예상도 못한 기쁨을 줘요. 우리가 성경을 덮어버리면 “이런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기대감이 있지만, 막상 성경을 펴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바라고 있는 것과는 전혀 딴판이에요. 완전히 다른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5:15).” 성령에 속해 있다가 사단에게로 간 것은 아니고요, 교회에 왔다가 돌아갔겠지요. 교회 다니다가 ‘이제는 교회 안 다닌다.’ 뭐 이런 식으로 돌아갔겠지요. 이런 사람은 성령이 있는 교회에 온 것이 아니고 사단이 세운 교회 다니다가 그만둔 것이에요.
사단의 동네에 교회 많습니다. 이 지역에도 온통 교회가 널려 있습니다. 밤이 되면 빨간 십자가 레온사인이 사방에서 보입니다. 밤마다 천국이라. 교회는 다녔는데 성령을 못 받았기 때문에 결국 교회 한 10년 다니고 하는 이야기가 “나는 교회에 대해서 다 안다. 목사 설교 초반만 들으면 끝이 어떻게 될지도 다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몰라요.
그래서 성령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교회가 어뺐?활성화되고 즐겁고 화목한 교회 만드는가?’ 그런 것에 관심이 있지요. 우리는 이러해야 합니다. 교회 망해서 성령을 주신다면 우리는 당장 교회 망해야 됩니다. 그 정도로 성령 받은 것이 내가 다니는 교회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제부터 꽤 어려울 거예요. 오늘 본문 5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이걸 보고 여러분들이 어렵다고 느낄 거예요. 저도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17절과 18절 말씀이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17절에 ‘잘 다스리는 장로에게 존경하라.’는 것과, 18절에는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련성이 없어 보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목사를 소에 비유한 것이다.’ 라고 하는데, 목사를 소에 비유했다면 목사에게 ‘소’라고 부르면 굉장히 기분 나쁠 거예요. 왜냐하면 농사지을 때 소는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소는 짐승이지요. 그것도 사람이 부리는 짐승. 부려먹는 짐승으로서 “우리교회 소 있다.” “어떤 소?” “우리가 부려먹어도 되는 소 있거든.” “누군데?” “목사.”
만약 이런 관점으로 목사를 보게 되면 무엇이 빠져버립니까? 17절의 “배나 존경하라.”가 빠져버려요. 우리 교회 소 있다. 소에게는 막말을 하는 겁니다. “이랴!” 막말을 합니다. “이리와 주세요.” 이러지는 않지요. 소는 부리는 짐승입니다. 소는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요즘 개 키우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교회 강 장로님 집에도 그렇습니다만, 원래 사람이 가축을 키우는 법인데 장로님 댁에 보면 개가 상전이 되어 있어요. 장로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개가 스스로 그렇게 행동해요.
짐승은 기능성입니다. 부려먹을 것이 없으면 잡아야 돼요. (일 못하는)늙은 소는 잡아먹어야지 살려두면 사료만 축을 냅니다. 따라서 배나 존경하는 소는 없어요. 그런데 배로 존경할 것 같으면 그분을 감히 소라고 하면 안 되지요.
그러니까 17절을 택하든지 18절을 택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지, 둘 다를 취해서 연결시킬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엄마, 우리 담임선생님은 참 존경스러워.” “어떤 분인데?” “소거든.” 얼른 생각하면 납득이 되지 않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납득이 되는 구석도 있어요. 뭐냐? 존경을 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된다? 소처럼 살아야 된다.
장로 직이라는 것이 원래 이 사단의 세계에는 없는 거예요. 성령 안에서의 장로 직이라는 것은 이게 원래 장로 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장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없는 장로 직이 있음으로 바뀌었지요. 그러면 그 장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없음에서 있음으로 머물면 안 되고, 있음에서 없음으로 내려가 줘야 합니다. 어떻게? 희생과 봉사로. 이럴 때 이 장로(혹은 목사)를 소와 연결시킬 수 있단 말입니다.
“난 목사다. 당신들이 날 목사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내 말을 안 들어?” 이렇게 나오면 이것은 배나 존경을 강요하는 것이죠. 배나 존경 받으려고 하면 목사직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그 목사 되시는 분이 어떤 식으로 나가야 되는가 하면 ‘이 일 감당하다 죽을래요.’ 하는 그냥 소처럼 “여러분을 위해 나는 희생해야 됩니다.”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이렇게 희생과 봉사의 모습을 보일 때 이런 사람이야 말고 성령에 의해 생긴 진짜 목사, 장로기 때문에 배나 존경을 받지요. 이것이 말로는 간단한데 막상 ‘그런 사람 나와 봐!’ 라고 하면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기적이라고 보면 됩니다.
“난 목사야!” 하는 것은 협박, 공갈이지 배나 존경이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습니다. 누구를 위한 목사냐를 늘 목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 자신을 위한 목사는 이미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소’입니다. 소는 결코 소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소는 일하기 위해 있는데, 그 일은 그냥 설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희생과 봉사의 모습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목자의 원천은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전서에 나오지요. “우리의 큰 목자”라고 하지요.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형이 되고 모델이 되어서, 큰 목자가 그러하면 작은 목자도 희생과 봉사의 길로 가야겠지요.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이번에 새로 나올 책 제목이 [피]인데 그곳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성도의 마음가짐은 “내 죽고 너 살아라.” 이것입니다. 이것이 한 알의 밀알입니다. 남편은 예수 안 믿고 아내는 믿는다면, 그 때에 예수 믿는 아내가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죽고 너 죽자!” 이러면 안 되고, “내 죽고 너 살아라.” 이렇게 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은 쉬웠지요?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어렵게 갑니다. 어떤 점이 어려우냐 하면, 이렇게 연결이 안 되는 것을 왜 사도바울은 어떤 신학 이론에 의해서 연결을 시키는가? 만약 이 연결점을 안다면 사도바울이 구약을 어떤 식으로 해석 했는가 하는 전모가 드러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어렵다는 말은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아하, 사도바울이 구약을 볼 때 우리가 보는 것처럼 상식적으로나 문자적으로 안 보고, 다른 특별한 해석 방식을 주입시켜서 구약 전체를 해석했구나.’ 따라서 제대로 그 해석 고리를 파악하면 우리도 바울처럼 구약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자, 그렇다면 5장 18절을 봅시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이 대목이 구약에 나오는데요, 구약에 나오는 이 대목을 어떻게 신약 교회에 목사의 위상과 어떤 논리적 고리를 가지고 해석을 하느냔 말이지요.
신명기 25장 4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부분으로 돌입합니다.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이 구절과 신약의 목사 설교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난감하지요? 엄청나게 난감해요.
도대체 사도바울이 ‘말씀을 잘 가르치는 목사를 배나 존경하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그 많은 성경구절 가운데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신명기 25장 4절을 거론한단 말이지요. 그래서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해서 문학에 대해 박식하고 정통한 문학자들도 성경 해석에 대해서는 깡통입니다. 아무것도 몰라요.
그야말로 성경은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지 문학적으로 어원적으로 아무리 연구해도 안 풀립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것을 해석할 때 바울 본인만 알고 있는 비밀이 있었는가? 어떤 원리에 의해서 풀었는가? 그러면 우리는 모른 채 그냥 넘어가야 되는가? 천만의 말씀. 우리도 사도바울의 해석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원리에 의해서 신명기 25장 4절(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과 디모데전서 5장 17절(잘 다스리고, 말씀을 잘 가르치는 자를 배나 존경하라) 말씀이 연결이 되는지 그 내막을 한번 풀어 봅시다.
그 힌트가 신명기 25장 5절부터 나옵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하면, 8절에 보면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신명기도 그렇고 민수기도 그런데, 이런 대목이 있어요. 어떤 집안에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부모 말을 너무너무 안 들어요. 그럴 때 그 부모가 아들을 어디로 데려가는가 하면, 이스라엘 공동체 내의 장로들에게 데리고 갑니다. 그렇게 해서 장로들 앞에 다시 한 번 다짐을 하지요. ‘너 부모 말 잘 들을래, 안 들을래?’ 그렇게 해도 그 아들이 부모를 거역하면 그 아들을 죽여 버려라(신21:18-21).
예를 들어, 김 집사님이 자녀분이 계신데, 만약에 자녀들이 부모 말을 안 듣는다. 그러면 집사님이 자녀를 화평교회에 데리고 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타이릅니다. 그래도 안 들으면 죽여 버려라. 그런 대목이 나와요.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근대 국가의식이나 가정 상황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남들이 우리집안 일에 왜 간섭하는데?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그런 말씀이잖아요. 그리고 아까 신명기 25장 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집안이 대를 못 이었을 때 형제를 대신해서 다른 형제가 대를 잇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부모가 그 자식을 장로들에게 데리고 가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방탕한 자식이라도 자기 자식을 다른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도록 내놓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해석 자체가, 구약의 성경 해석을 신약 교회에 연결시키려면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그러한 모든 인식을 완전히 부숴야 돼요. 왜냐하면 그것은 사단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에 속한 자는 개인주의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들어오면 개인주의가 사라지고 공동체주의가 됩니다. 공동체 위주로 갑니다. 개인에서 공동체주의로 갈 때 ‘개인을 스스로 부정하고 공동체 속으로 들어간다.’ 이런 식의 공동체는 아니에요. 그런 것은 사단의 세계에서도 할 수 있어요. 그것이 아니고, 개인에서 공동체로 가려면 이 공동체는 개인이 단합한다든지 개인의 의지로 뭉쳐서 공동체로 가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홍해가 있어요. 홍해 이전에는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있었지요.
홍해를 건너는 것은 하나님이 문설주에 발린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개인적인 의도에 의해서 “야, 우리 혼자 살면 힘드니까 이스라엘 만들어서 단합해서 살자.” 라는 식으로 단결해서 홍해를 건널 수 있습니까? 못 건너지요. 홍해바다에 뭔가가 빠져야 됩니다. 모든 개인적인 것은, 다시 말해서 내가 구상하는 나의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희한하게도, 이미 용서받은 공동체는 하나님이 직접 여기에 관여해야 그 공동체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는 그러한 집단이 됩니다.
언제 대구강의에서 사르트르 이야기하면서 집합과 집단을 나눠서 이야기 했어요. 집합은 그냥 무작위로 숫자만 모았다 뿐이고, 집단은 하나의 같은 생각을 가지고 모인 것을 집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란 것이 서로가 끄집어낸 생각이 아니고 예상치 못한 주님께서 집게로 각자를 골라내는 거예요.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철수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성령께서 집게로 우리의 목덜미를 쥐고 있어요. 쥐면서 우리가 예상 못한 그러한 인간상으로 설명, 해석을 가해주지요.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천국에서 살려면 지상에서 사는 것과 생활 방식이 달라요. 그래서 여기서 뭔가 고쳐져야 돼요. “목사님은 늘 주장하기를, 죄에서 구원 받았다고 했지 않습니까? 모든 죄에서 구원 받았기 때문에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해놓고 뭘 고칩니까?” 라고 하는데, 성경에 보면 죄와 죄가(罪價)를 나누고 있어요. 죄라는 것은 All(전부) 아니면 Nothing(아무것도 아닌) 이 돼요. “모든 사람이 죄인이매 의인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죄라는 것은 구조적인 것입니다. 어떤 범위 내에 속했으면 전부가 의인이에요. 그리고 저쪽에 속했으면 전부가 죄인이고. ‘도’ 아니면 ‘모’입니다(윷놀이). 죄는 구조적인 것이기에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의 죄의 경중에 따라서 조금 감해주고, 많이 감해주고 그런 것이 아니라 피가 있으면 모든 죄는 다 사라집니다.
그 다음에, 이 구조를 사람은 하루아침에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죄가에 있어서는 경중이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있겠지요. 특히 젊은이들 보면 자기 행동에 대해서 “내가 뭐 잘못 했는데?” 라고 하잖아요. 늙은이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아하, 그것도 죄구나.” 알잖아요. 죄는 객관적이지만 죄가(罪價)는 주관적인 요소가 많아요.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구원 안 받은 것이 아니고, 이미 자가가 소속되어 있는, 이미 자가가 자기에게 주고 있는 그것을 자기가 잘 모를 때가 있다니까요. 또 알았다고 해놓고 돌아서면 잊어버릴 때가 있어요.
그래서 죄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죄책이라고 보면 됩니다. 죄의식으로 생각하면 쉬워요. 이것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요소가 많아요.
우리가 보고 있는 디모데전서의 이야기가 뭐냐 하면, 개인적인 죄가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는 겁니다. “네가 구원 안 받았으면 내가 이런 소리 하지 않는다. 네가 이미 구원 받았는데 그런 행동을 해서 되겠느냐?” 하는 차원에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 봐라. 너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데?” 라고 할 수 있단 말이지요. 그런 일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라고요? 잘 가르치는 장로(목사). 이런 사람에게는 배나 존경해라.
지난번에 공부했지요. 집사 된 자는 어떻게 하라?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 나오지요. 감독은 “잘 가르치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 쭉 나오지요. 이 말은 완전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소속해 있는 성령 안에서 그런 짓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알아가라는 말이지요.
공동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개인에서 출발해서 개인의 다수가 모여서 공동체 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공동체로 시작해서 공동체로 끝나는 세상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여호수아 7장에 보면 다른 사람은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아간 혼자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했지요. 그러니까 그 영향력이 다른 사람한테 미쳐서 다른 사람이 많이 죽잖아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변절자가 있다.’고 해서 뽑아내니까 아간이 걸려서 돌에 맞아죽지요.
이것은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고 그런 문제가 아니고, ‘현재 우리가운데 누가 계시느냐?’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과연 같은 전세버스, 천국으로 가는 전세버스의 분위기가 어떠냐?’ 이 분위기 파악을 하라는 겁니다. ‘나 잘났어요, 못났어요?’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놓여있는 이 동네가 성령 안인데,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이 과거 사단에 놓여 있을 때와 어떤 차이가 나는가를 통해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말씀 듣기를 게을리 하지 말고 부지런히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신자이면서 말씀 듣기에 열심 없는 사람은 지옥 간다는 뜻이 아니고, 아직까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잘 모르는 거예요. 그럴 때는 찾아가서 권하기를 ‘아무리 바빠도 말씀 듣기를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고 일러주는 그 역할을 누가 해야 된다? ‘소’ 장로들이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 너는 잘났나?’ ‘그것이 아니라 나는 말씀 소홀히 하는 것이 죄인 줄은 안다. 그런데 너는 바쁘다는 이유로 말씀 등한히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는 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말도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 죄가는 어디로 모아지게 됩니까? 하나의 죄로 모아지겠죠. 죄가를 가지고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이러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라는 쪽으로 모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라는 말이 얼마나 신앙의 깊이가 있는 말입니까. 신앙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죄인 나오라고 하면 제가 손들고 먼저 나가겠습니다.’ 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그 사람은 세상을 넓게 봅니다. 어디까지? 사단의 세계까지.
사단의 세계는 개인주의 세계이기 때문에 “내가 뭐 잘못 했는데?” 이런 식입니다. 공무원들 뇌물 받다가 잡히면 하는 말 있지요? “나만 잘못했나? 나만 쌀 직불금 받았나? 나는 아니지만 우리 아버지는 농사짓는다. 털어서 먼저 안 나는 사람 누가 있는데?” 이러거든요. 그러나 목사는 그러면 안 되지요. “다른 사람들 다 그런데 목사는 뭐 별다른 사람인가?” 이러면 안 돼요.
목사는 자기 변명하라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는 ‘소’이고, ‘소’는 희생과 봉사를 위해 있습니다. 희생과 봉사라는 것은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남들은 살고자 할 때 자신은 죽고자 하고, 남들은 있고자 할 때 자신은 없어지고자 하고. 이럴 경우에만 배나 존경해야 됩니다. 그런데 자기 죄가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목사를 보면 배나 무시하지요. “우리 목사는 바보 멍청이다.” 이런 식으로 무시하지요.
이것이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신명기 25장 4절에서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하고 이어서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 이렇게 나오지요. 1절부터 보면, 재판하는 이야기가 나오다가 4절에 농사짓는 이야기가 왜 나오느냔 말이지요. 이게 농사에 관한 이야기냔 말이지요.
앞뒤 문맥으로 볼 때는 이것이 농사짓는 이야기가 아니고, 소의 입에 망을 씌우면 소의 감정표현이 안 나타나고 모르게 되지요. 망을 씌워 소가 해야 될 일을 못하면 그 소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됩니다. 망을 안 씌울 경우에만 소 값을 다 빼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게으른 소 같으면 망을 씌우든지 해서 잡아먹으면 되는데, 소가 열심히 곡식을 떨고 있는 때 그 일에 방해가 되는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망을 씌움으로 곡식 떠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소에게 일을 시키는 그 본래의 기능을 다 발휘 못하게 되는 그런 사태가 발생한단 말이지요.
결국 여기서 이 소는 어디에 소속된 소냐 하면, 공동체를 위하여 있는 소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보기에 이 소는 공동체를 위한 소지 소를 위한 소는 아닙니다. 소 잘 대하라고 있는 소가 아니고 이 공동체에 얼마나 쓸모가 있느냐 하는 것이 망을 씌울거냐, 말거냐 하는 결정 요인이 된다는 겁니다.
곡식을 떠는 것이 소 자신이 먹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소를 부리는 자들이 먹으려고 하는데, 소의 입에 망의 씌워 능률이 안 오르면 손해는 공동체가 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대목을 듣는 순간 ‘아하, 소도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구나.’
자, 그렇다면 이 공동체라는 것이 소를 통해서 공동체가 공동체다운 면모를 보여야 되지요. 소가 열심히 곡식을 떪으로 말미암아 이 공동체는 하나님에 대한 공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 하나님에 대한 은총, 구원에 대한 기쁨 이런 것을 공동체가 보여줄 책임이 있는 거예요.
제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그 뒤 구절에 어떤 집안에 자식이 없이 죽었는데, 며느리가 시동생과 결혼해야 하는데, 시동생이 반대하든지 혹은 며느리가 개인적인 입장에서 반대한다면 이것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이 공동체의 어떤 가정이라도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경우는 없다. 마치 소처럼.
곡식 떠는 소만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개개인 가정도 각 가정의 명예나 영광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모시는데 있어서 개인의 사정을 봐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라는 것은 사적으로 볼 때는 짐승이기에 마음대로 무시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이 소가 공동체를 위해서 곡식을 떨 때는 사적인 감정으로 소를 무시하거나 망을 씌운다거나 학대하거나 절대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신명기 25장 범위 내에서 그렇게 되지요.
이 의식, 이 생각을 그대로 디모데전서 5장 17-18절에서 가져온 거예요. 가져 올 때에 신명기 25장 4절을 가지고 오니까 몸통인 구약 전체가 다 딸려오지요.
본문을 다시 봅시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그 다음에 “성경에 일렀으되”라고 나오지요. 그러면 이 신명기 25장 4절이 방금 읽었던 17절 ‘배나 존경하라’는 것과 부합된다는 말입니까, 안 된다는 말입니까? 부합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이게 딱 연결됩니까? 라고 묻는다면, 장로나 일반교인이나 전부 뭘 위하여? 바로 하나님이 세운 공동체 교회를 위하여 일해야 하고 개인적인 것은 버려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경 어느 구절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해석이 안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성경 어느 구절도 자신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그 성경해석은 다 엉터리입니다. 제가 방금 교회를 위해서 라고 할 때 개개인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죠. 이 교회는 그리스도 몸을 이야기하죠.
그래서 개개의 교회 부흥을 위해서 이 본문을 적용한다면, 또는 목사가 자기 권리 회복을 위해서 이 말씀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사기죠. 목사가 이 구절 펴놓고 월급을 제때 안 주니까 ‘월급을 잘 챙겨줘야 일을 하지.’ 이런 식이로 나옵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복 받으려고(돈 많이 벌려고) 교회 나왔는데, 복이 안 오니 헌금을 못했지요.’ 이렇게 나오고.
조현창 성도가 하신 명언 “예수 믿기 싫은데 잘 됐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 이런 명언이 없습니다. ‘그동안 억지로 믿는 척 했는데 목사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나오니 잘 됐다.’ 이게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인들이 언제 성경 말씀이 좋아서 교회 왔습니까? 혹시 교회 왔다 가면 하나님이 돈 보따리 채워줄 줄 알고 교회 온 거지요. 돈 주는 하나님께 누가 헌금은 안 하겠습니까? 하나님 쪽에서 먼저 돈을 안 주니까 헌금을 못하지, 돈 주는데 갈라먹기도 못할까.
그러니까 그 목사는 성경 구절을 인용해서 자기 욕망 채우려고 하다고 오히려 된통 당한 것이지요. 성경에 관심도 없는 교인에게 성경구절을 들이대니 그것은 아주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조심해야 돼요. 이 악한 세대를 잘 분별해서 해야지 그런 분별도 없이 성경 들이대다가는 ---
심지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목사님, 평소에 뭐라고 설교했습니까? ‘저는 복음 전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라고 했지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딴소리 합니까?” 라고.
이 본문은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과연 우리가 공동체를 바로 봅니까? 과연 우리는 사단의 세계에 있었는데 이제 성령에 속한 자가 맞습니까?’ 라는 확인 차원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 뿐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본문을 이야기할 때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당신들 교회 맞아요?” 이걸 묻는 겁니다. “당신들이 아직도 성도 맞습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Who are you? 라고 묻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그 목사의 경우에는 뭐가 잘못 되었어요? 공동체를 위한 말씀을 목사 개인에게 적용시킨 거예요. 이것은 개인주의입니다. 이런 목사는 굶어 죽어야 마땅합니다. 목사는 희생과 봉사로 큰 목자 되시는 주님을 본받아서 없음으로 내려갈 때 진짜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배나 존경 받을 것이고, 성령 못 받은 자들은 배나 무시할 겁니다.
잠시 쉽시다.
----------------------------
광주081024b디모데전서5장18절
광주 강의(08. 10. 24) 42-2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입에 망을 씌우는 것’과 그 앞에 보면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를 연관시키지요. 말씀과 관련된 신체의 부위가 어디지요? 입이죠.
입에다 망을 씌우면 말씀이 안 나오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구약 신명기 25장 4절에 나오는 이 대목을 채택할 때는 소라든지 가정사 전부를 공동체를 위한다는 큰 범위를 몽땅 가져오고, 이 신약에 와서는 어디에다 관심을 두는가 하면, 말씀 가르치는 일에 강조를 두고 신명기 25장 4절을 ‘입과 망’에 관련된 부위를 소를 통해서 말씀 가르치는 장로에게 그것을 적용시킵니다.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말씀은 어떤 경우에도 중단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말씀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여기서는 필히 이야기합니다.
우리교회 김대식 성도님이 주일날 화장실 청소를 하거든요. 제일 먼저 왔다는 이유로 화장실 청소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늦게 오기 때문에 청소는커녕 예배 참석하기도 바빠요. 어쨌든 일찍 와서 청소를 하는데, 사도바울 같으면 “밀대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청소하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청소가 공동체 유지에 중요한 대목은 아니에요.
공동체 유지에 중요한 대목은 말씀입니다. “청소하는 사람이게 배나 존경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 정도로 이 말씀 가르치는 사람을 ‘배나 존경하라.’고 했어요. 이 말은, 다른 사람은 존경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배나 존경할 인물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에 주목하란 말이지요. 교회의 교회됨은 말씀이 말씀대로 전파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약 신명기 공동체의 ‘소’ 이야기는 공동체가 밥 먹고 사는, 소가 농사를 지어야 밥 먹고 살잖아요. 밥 먹고 사는데 있어서 방해되지 않도록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해서 곡식이 중요하지만, 이 곡식은 신약에서는 어디에 해당됩니까?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 본문을 가지고 시골에 있는 교인들은 “아하,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힘이 되도록 내가 양식을 드려야지. 성경에 보니까 그런 대목이 있던데.” 라고 하면서 고구마나 옥수수 등 간식거리를 목사에게 줘요. 줄려면 아이 피아노 레슨비를 줘야 되는데 그런 것은 안 주고 배나 채우라고 고구마, 감자 이런 것을 준다니까요. 차라리 쌀을 주면 좋겠는데 쌀은 안 주고.
고구마 농사짓는다고 고구마 주고, 이상하게 쌀농사 지으면 쌀은 안 주는데 고구마는 줘요. 자두 농사지었다고 자두는 주는데 절대 현찰은 안 줘요. 그래서 시골 교회 목사님 집에 가면 간식거리가 많아요. 진짜 목사는 소라. 소 같으면 그런 것 먹고 말씀 전하지요.
목사가 설교하려면 아침 양식도 중요하지만 아이 학비 잘 내는 것도 말씀에 도움이 됩니다. 다른 아이들 다 있는 휴대폰 하나 사줄 때 설교가 잘 돼요. 그런데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목사님, 이것 잡수시고 힘내세요.” 하면서 고구마 가져와요. 그것도 맛있는 것은 잘 팔리기 때문에 농협에 넘기고 상품 가치가 없는 것들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다 정이지요.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주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이 대목을 목사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는가? 사례비 적게 준다고 설교를 성의 없이 함부로 한다든지, 아니면 교회에 들어온 헌금을 다른 교회에 주면 ‘목자가 먹어야할 꼴을 어디에 가져다주느냐?’고 고래고래 고함치는 목사와 부흥사들이 많아요. 여기에서 꼴을 먹었으면 여기에 내야지 왜 딴 곳에 내느냔 것이지요.
교인들이 교회를 잘 못 옮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설교가 좋고 교회가 좋아서 못 옮기는 것이 아니고, 의리 때문입니다. 사람은 의리 빼면 시체라고 합니다. 교인이 한 사람 오면 다른 사람들이 많은 정을 줘요. 그런데 이 정을 다 끊고 다른 교회로 가면 정을 준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얼마나 욕하겠어요.
그래서 제가 화요일 대구 성경공부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숨어있는 증오심이다.” 라고. ‘내 사랑 안 받으면 죽여 버릴 거야.’ 이렇게 되지요.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너, 내 사랑 안 받아주면 죽어!” 이런 뜻입니다. 이게 무슨 사랑이에요? 이건 거래지.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네 것 다 내 놓아라.’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하나의 욕정이고, 폭력이고, 일방적인 거지요.
인간의 말 속에는 증오가 들어있어요. ‘내 사랑을 네가 안 받아주면 너는 나한테 죽는다.’ 이런 스토커 적인 의식이 있는데, 하여튼 이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 공동체를 누가 주도하고 있고, 누가 쥐고 있느냔 말이지요.
말씀 가르치는 사람은 월급을 주든 말든 상관없이 누구의 지시를 받아야 돼요? 공동체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주님의 지시를 받아서 설교한 거예요. 설교 내용도 주님이 주신 겁니다. 이것을 저는 ‘사명감’이라고 합니다. 사명감은 절대로 내 소유가 될 수 없어요. 오히려 내가 소유 당해야 되지요. 보이지 않는 주님에게 내가 소유 당해야 되지요.
그리고 이 말씀은 목사뿐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목사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말씀 자체가 말씀이 되어서 교인들에게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그 사람에게 대가를 알리기 위해서, 주관적으로 내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에게 ‘이것도 죄다.’ 말씀 전하는 자에게 배나 존경하지 않는 이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어떤 목사는 이것을 잘못 해석해서, 배나 존경을 돈으로 환산해요. 배나 존경하니까 장로들 가운데서 어떤 장로를 배나 존경하라고? 말씀 가르치는 자를 배나 존경하라고 했으니까 현재 장로가 5명이면 장로 수입을 평균을 내요. 그래서 만약 300만원 된다면 목사는 얼마를 가져가야 됩니까? 배니까 곱하기 2를 하면 얼마입니까? 600만원 가져가야지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성경에 보니까 그냥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잘’ 가르쳐야 돼요. 잘 가르치지도 못하면서 돈만 ‘배’로 가져가려고 해요. 잘 가르치려면 희생과 봉사의 길을 갈 때 그까짓 돈 600만원이 아깝겠습니까? 700만원이라도 내 놓지. 문제는 잘 안 가르치면서 단지 가르친다는 이유로 핏대를 올리고 요란을 떨 때 그런 사람에게는 준 것도 빼앗아야 돼요. 안 줘야 돼요. 없어서 못 주는 것과 안 주는 것은 다르지요. 이런 인간들은 있어도 안 줘야 됩니다.
18절 봅시다.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이것은 또 성경 다른 대목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레위기에 나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품꾼은 품삯을 누구에게 받는가? 공동체 주인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받아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이유가 뭐냐 하면, 모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품꾼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토지 주인은 여호와고 나는 주인의 품꾼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계비나 곡식을 여호와께서 친히 주신 은혜라는 의식을 갖겠지요.
그래서 이 말씀은 바로 목사나 교인 다 같이 목사가 월급 받아도 이것은 교인이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복음 전하라고, 단지 복음 전하라는 이유 때문에 주시는 것이고, 그리고 교인들도 이런 돈을 줄 수 있게 된 것을 큰 자부심과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 귀한 돈을 복음이란 이름 때문에 내 놓을 수 있는 그런 품꾼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느끼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러면 받는 자나 주는 자나 전부 주님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여야 이것을 말씀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자체가. 디모데전서 5장 전체가 마찬가지입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이것도 전부 ‘너희들은 교회 맞아?’ 이런 뜻이고, ‘참 과부는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고, 일락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 이것도 ‘교회 맞아?’ 라고 되묻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19절을 봅시다.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이것은 왜 그러냐 하면, 구약 때 역시 백부장이나 제사장들은 이 원칙을 따랐습니다. 두 세 증인 아니면 송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제판하는 일을 했는데, 재판하는 일에는 뭐가 보장되느냐 하면 사적인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런 위치를 보장해 줘야 되는 겁니다.
재판을 하는데 자신에게 불리한 재판을 했을 때, “판사 너 죽었어.” 하면서 그를 모함하거나 할 수 있죠. 그래서 이런 지도자 급에 있는 사람들의 송사는 반드시 두 세 사람의 증인을 필요로 했습니다.
두 세 사람의 증인을 세운다는 이야기가 디모데전서의 장로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또 해당되는 사람이 있어요. 예수님이죠.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고 하셨을 때, 바리새인이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라고 했을 때, 두 증인이 나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18절).”
이게 예수님 말씀이니까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데, 이걸 보통 사람이 말했다면 이것은 뺨 맞을 이야기입니다. 이건 말장난밖에 안 돼요. 본인이 자신에게 한 표 던지고,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거론해서 또 한 표 던지고 이게 증인입니까? 이것은 결국 표가 있다, 없다? 한 표도 없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나는 너희들의 성경 해석에 대해서 일체 인정하지 않겠다.’ 한 표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19절)이 교회에 적용될 때는 예수님의 정신이 공동체로 확산됩니다. 그래서 장로에 대해서는 증인이 없이는 송사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로의 기능이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판별하고 죄가에 대해서 가르쳐야 되고 잘못된 것에 대해 지적해야 될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보호하고 그 말씀의 권위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장로 임직식을 해야 되는가? 장로 임직을 안 받은 집사는 두 세 증인이 없이 송사를 해도 되고, 장로는 두 세 증인이 있어야 하는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 성령 받은 공동체 내에서 배나 존경받을 사람이 있어요.
지난주 우리교회 이종성 장로님께서 기도를 하셨는데, 그 기도 후에 저는 설교를 안 하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기도가 너무 좋아서. 너무 큰 은혜를 받았어요. 누구를 통해서든 은혜 받았으면 됐지 내가 왜 또 설교해야 되는데? 복음대로 설교하니까 꼭 내가 안 설쳐도 됩니다. 장로님이 기도하시고 나는 쪼그려 앉아서 듣기만 하면 좋겠어요. 기도가 너무 좋아서.
기도 내용이 이랬습니다. ‘돌아온 탕자가 무슨 권리로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할 수 있습니까? 돌아온 것을 받아 준 것만도 감사한데 뭘 더 원하겠습니까?’ 그런 내용입니다. 얼마나 은혜가 되고 감사한지 더 설교할 필요 없겠다. 3분 기도(설교) 듣고 그냥 집에 돌아가도 아쉬움이 없겠다.
이처럼 존경이 우러나오게 되어 있어요. 복음 안에서 존경이 우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 목사님 설교 할 때 얼마나 열정적으로 합니까. 보면 존경이 우러나지요? 이런 경우(존경이 우러나오는 때)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면, 돈 문제가 생각이 안 납니다. 아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펀드, 주식 값이 추락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돼요.
그래서 복음 전하는 교회에 오면, 오기 전까지는 돈 문제, 자식문제, 온갖 세상 걱정을 가득 지고 왔는데, 복음을 들으면 전혀 낯선 세계에 와서 세상 것을 다 잊게 되는 그런 감격을 누립니다. ‘세상의 문제로 근심, 걱정한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쓸데없는 일에 마음 빼앗긴 내가 밉다. 그런 일에 스트레스 받은 내가 우습다.’ 라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이 환하게 다 풀립니다.
성령이 주는 기쁨이 퍼지게 되면 눈이 녹듯이 모든 문제가 녹아버립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이 다 녹아 내렸는데, 예배 후에 식사시간이 되면 조금씩 다시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고 식사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다가 또 말씀 들으면 구름이 확 걷히고 이것이 교회입니다.
자, 그 다음 20절을 봅시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이 말은 사도바울이 교회에게 하는 말입니다. 결국 이것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라는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죄는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죄는 개인을 묻는 것이 아니고 어디 소속이냐? 하나의 구조를 이야기합니다. 사랑의 구조 안에는 두려움이 없어요. 그런데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알려면 두려움을 느껴야 두려움을 없게 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느낄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이론상 지식으로 잘 들어오지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두려움이 없을 때는 이해가 돼요. 그런데 두려움이 생기면 “주님이 날 사랑한 것 맞아?” 하고 주님께 항변해요. 이것이 바로 감춰진 증오지요.
이런 두려움을 가질 때, 그 두려움이 어디서 생기는가? 공포영화나 괴기영화를 본 후 잠에서 가위눌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어요. 귀신이 왜 무서운가 하면,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내가 해체될까봐 무서운 거예요. 팔은 여기 있고 몸통은 저기 있고 이런 식으로 내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흩어질 것에 대해서 무서워합니다.
갑자기 차가 나를 향해 달려오면 무섭지요? 그러면 있는 몸을 더욱 움츠려요. 어떤 위기가 왔을 때,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모으지요. 사람의 공포는 내가 해체될 것에 대해 두려움 때문에 생깁니다.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내가 해리(풀어서 떨어짐)되는 것이 제일 무서워요.
활극 또는 스파이 영화를 보면 시청자들을 애타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마지막 대목에 남자가 혼자서 적 소굴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때 꼭 남자가 여자에게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는 여기 있어라. 나 혼자 갔다 올게.” 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말을 안 들어요. “싫어. 나도 따라 갈 거야.” 그렇게 해서 여자가 인질로 잡히곤 합니다.
여자가 따라올 때부터 시청자들은 불안해요. ‘또 일이 꼬이겠구나. 보나마나 잡히겠다.’ 그렇게 해서 실컷 남자가 죽을 고생을 하고 난 뒤에 나중에 극적으로 구출해서 둘이 뽀뽀하고 영화가 끝나잖아요.
여자는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합치려고 하는 거예요. 아내가 남편을 제일 미워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남자가 여자를 당연히 보호해야 할 시점에서 남자 혼자 행동할 때 정말 밉습니다. 여자는 항상 합체를 통해서 사랑을 확인해요.
잠 잘때 등을 돌리고 누우면 괜히 미워요. 등을 돌리는 것은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등 안 돌리가 서로 마주보고 자면 잠이 안 와요. 왜 그런가 하면 콧김 때문에. 등 돌리면 절로 잠이 오는데. 그런데 등 돌렸다고 서운해 해요. 물론 40대 넘어서는 아니고 2~30대 때 그래요.
두려워한다는 것은 결국 (해체되지 않고)자아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자아가 있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으니까 공격 표적이 되지요. 자아가 이곳저곳 분리되어 있으면 공격 대상이 없어요. 그러니까 공포를 느끼는 것은 본능인데, 어떤 본능인가 하면 자아를 자아대로 지탱하려는 마음이 두려움을 낳지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네가 다 흩어져 있어도 어디를 가도 너는 하나의 사랑이라는 그 영역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느껴야 그것이 사랑입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 이것은 전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라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나쁜 짓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사람이 성령에 충만하면 나쁜 짓을 할 이유가 없지요. 이미 기쁨을 얻었는데 또 새삼스럽게 기쁨을 얻기 위해서 나쁜 짓을 할 필요가 없어요. 사람이 본의 아니게 나쁜 짓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돌아서면 다 시시한 거예요. 화투 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화투 칠 수도 있는데, 화투 치는 것이 시시하다니까요.
성령 받기 전에 화투 칠 때는 고부간에 형제간에 화투치면 살벌합니다. “왜 속입니까? 왜 한 장 더 많습니까?” 난리를 치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화투 치면 “형님, 마음대로 하세요. 돈 잃으면 잃지 뭐.” 하면서 그 자체에 대해서 자아를 거기다 걸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잖아요.
범죄는 꼭 자아를 몽땅 건데서 일어납니다. 가스관 타고 올라가는 범죄. 그것이 뭡니까? 죽기 살기로 ‘나는 살아야겠다.’는 데서 오는 행동이잖아요. 뇌물 받는 것도 그렇고. “나는 그냥 월급으로 살랍니다. 뭐, 돈 좀 더 있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고.” 하면서 그런 것들이 시시합니다. 죄를 못 지어서가 아니라 너무 시시하고 재미가 없어서 안 하지요.
교회 가운데 범죄가 있거든 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작은 두려움에다 더 큰 두려움으로 네 자아가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은 일을 했다는 것을 알려 주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아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죄가에 대해서 아직도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하, 자기를 위해서 살면 저런 나쁜 짓을 할 가능성이 나에게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서, 우리가 속해있는 영역이 성령 안인 것을 확인하게 하는 겁니다.
그 다음 21-22절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치 말고 네 자신을 지켜 결정케 하라.”
이 대목에서 또 모순이 돼요. 뭐냐 하면, 20절에서 ‘죄 지은 사람에게 공적으로 꾸짖어 다른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해놓고, 22절에는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치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에게 하는 소리입니까?
금연 지역에서 담배 피는 사람에게 잔소리 하고, 버스 안에서 큰 소리가 통화하면 지적하고, 길에 휴지 버리면 주우라고 하고 이러면 이것이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지요. 그 때 주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나 잘 해.” 라고 하시는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사명이 중요해요. 나라는 인간은 흩어져야 마땅한데, 어떤 경우에 나가 모아져야 하는가 하면, 주님의 말씀과 복음을 전할 때는 그 복음을 위해서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목사뿐 아니라 일반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서는 목사, 장로에게 이야기하지만.
내 사명이 복음 전하는데 있다면, 펀드 내려가고 주식 값 떨어지고 해도 사명이 중요하다면 그런 것은 시시하게 여겨집니다. 사모님이 학교 교사로 계시는데 복음 때문에 많은 다툼과 충돌이 있잖아요. 그럴 때 양보를 하란 말이지요. 양보하는 것이 이 본문에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치 말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요. 저것은 틀렸고, 논리도 없는 일방적 주장이고 한 것을 알지만, 그런 것을 자아를 동원해서 억지로 이기려고 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시시한 것까지 간섭하지 말고 내 사명은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증거하는 것인데, 이것이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는 져도 괜찮은 인생을 사시라는 말입니다.
또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실적 위주로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3명 안수했다. 나는 5명 안수했다. 이번에 장로 또 세운다.” 그것이 교회에 자랑인줄 아는데, 안수 할 때는 “배나 존경하라.”는 조건에 맞을 때, 이것은 공동체가 이미 알아요. 안수하는 것은 하나의 형식이고, 공동체가 “장로님으로 봉사해 주세요.” 또는 “말씀 전하는 목사님으로 봉사해 주세요.” 라고 요청하면 그냥 실행에 옮길 뿐입니다.
다음 주일 세례식 하는 것도, 제가 세례식을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가 아이들 커고, 세례 안 받은 성도가 있어서 그냥 집사 직분을 주기도 뭣하고 해서 저는 그냥 소이기 때문에 요청하는 대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성찬식은 먹는 사람 있고 못 먹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것은 하지 말고, ‘그냥 세례식만 합시다.’ 라고 해서 세례식만 합니다. 성찬식 하는 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 지금으로서는 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우리교회 대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그 다음 23절에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계시가 아니고 민간요법입니다. 왜 민간요법이 성경에 있느냐? 이것은 바로 ‘너의 사명은 네 몸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러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계시입니다. ‘네가 맡은 사명(복음 전하는 것)은 네 몸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중요한 사명을 위해서 너는 네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말고 연약할 때는 잘 신경 써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너 좋으라고 포도주 마시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만약 이 구절을 문자대로 이해하면 “포도주 몇 년 산을 마실까요? 몇 잔 마실까요? 프랑스 산으로 할까요, 아니면 캘리포니아 산으로 할까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그런 뜻이 아니고 “네가 받은 사명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네 몸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한다면 “이제부터 아침마다 조깅해라.” 이렇게 됩니다. 운동 안하면 뱃살 나오고 더 심하게 되면 서서 설교하는 것도 어렵다. 이런 소리입니다.
24-25절에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이것은 한 마디로 이런 뜻입니다. ‘네가 지금 증거하려 하고, 네가 소속되어 있고, 네가 같이 살아가고 있는 이 집단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단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단체가 아니고.
만약 우리가 창고라면, 하나님이 만드신 거룩한 창고인데 그 거룩한 창고 안에서 ‘너는 네 할 일을 다 하고 있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개인주의가 아닙니다. 개인주의를 위해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말씀이 있어야 개인은 부인되고 공동체를 위한 개인이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말했지요. 가정에 문제 있으면 그 가정의 문제를 공동체까지 가지올 정도로 주님 만든 공동체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5장 1절에 보면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이게 뭡니까? 교회 이전에 자기 집안 식구 아닙니까. 자기 집안 식구처럼 돼야 제대로 된 교회라는 것입니다.
가족의 특징이 뭐냐? 아무리 집안에서 싸워도 가족이 술 취해 길에 쓰러져 있으면 달려가서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고 데려오는 것이 가족입니다. 자식 공부 못한다고 쥐어박고 해도 그것이 미워서 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대학 가고 좋은 곳에 취직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제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가 하면, 죄와 심판을 항상 들춰내시는 사랑. 고마운 공동체. 겉치레로 위로와 칭찬만 남발하는 그런 단체가 아니라 죄와 심판을 들춰내서 진짜 사랑, 진짜 용서를 날마다 같이 공유하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그 공동체를 위해서 너는 양보 없이 전해라. 미워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서 나무라지 말고 지금 우리가 성령을 받았잖아요. 사도행전 10장 안 봐도 되지요? 이방인에게 뭐가 임하더라? 성령이 임하니까 죄 사함을 알게 되고, 성령을 안 받으면 ‘내 죄가 사함 받았다.’는 소리를 못해요. 성령을 받으면 “와, 내 죄 사함 받았다.” 이런 소리가 나온단 말이지요.
정말 우리 죄가 사함 받았다면 나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이것은 죄야. 이것은 나쁜 것이야.’ 지적하는 가운데서 도리어 주님께서 거저 용서하시고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하는 이것이 참된 교회입니다. 이것이 디모데전서 5장의 내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임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성령이 임해서, 성령이 쏙 들어가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죄 용서를 알고 기뻐했습니다. 이런 성령 받았사오니 성령 받은 값을 하면서 우리의 죄가 무엇이며, 우리의 부족이 무엇이며,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서 이런 죄에서 일시에, 한꺼번에 다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감사하는 귀한 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