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081128a디모데전서5장24절
광주 강의(08. 11. 28) 43-1
디모데전서 5장 24에 보면,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라고 했는데, 여기서 ‘죄가 왜 밝히 드러나야 되는가?’ 하면, 죄가 있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죄가 드러나게 되어 있지요.
심판의 기준이 뭐냐 하는 것은 그때 가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죄를 죄라고 이야기할 때 이 기준이 그대로 심판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좀 어려운 것 같은데, 쉽게 이야기하면 “지금 그것은 죄입니다.” 라고 할 때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죄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마지막 때의 심판 기준은 이것입니다. 이 기준으로 보았을 때 당신의 그것은 죄입니다.” 라고 이야기해서 이 죄를 나중에 심판과 연계를 시켜 줘야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그러면 관점이 뭐냐 하면, 보통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는 경우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 비위에 상한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나쁘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나쁘다고 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성경 말씀에 어긋났기 때문에 죄입니다.” 라고 했을 때, 이것은 맞습니까? 굉장히 애매하지요. 왜냐하면 그 성경 말씀을 누가 해석했는가 하는 것이 또 문제가 됩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성경을 해석해 놓고 그 해석을 기준으로 해서 “당신의 그 행위는 죄입니다.” 라고 한다면 이건 별 의미 없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내가 성경 볼 때는 이것이 전혀 나쁜 것이 아닌데 너는 성경을 잘 못 해석하고 있구먼.”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죄는 심판에 이른다.’고 할 때 결국 우리는 성경 해석을 내 기준 말고 다른 기준에 의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를 간단히 해 봅시다. 심판 주는 우리가 아니잖아요. 내가 심판주도 아닌데 남을 함부로 정죄하고 “너는 나빠. 지옥 가.” 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내가 심판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주께서 하신 말씀을 증거해야 되겠지요. 심판주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의 기준을 제시했을 때,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저주가 임한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부처를 믿는데 예수 믿는 너희들이 일방적으로 예수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그것은 말도 안 돼.” 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기준이 뭡니까? 성경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가 불경을 기준으로 성경 말씀을 공박하지요. 이럴 경우에 죄가 된다 이 말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성경 말고 다른 기준, 과거의 자기 경험이라든지, 자기 집안에서는 그렇게 안 배웠다든지 뭐 이런 기준이 있을 것 아닙니까.
늦게 오신 분이 계셔서 앞부분을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자, 지금 디모데전서 5장 24~25절을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의 핵심이 뭐냐 하면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심판에 나아가고” 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가 궁금한 것이 뭐냐 하면, ‘그 죄가 무엇인가?’ 이것을 지적하는 것이 궁금한 거예요.
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마지막 심판 때의 기준을 앞서 적용하면 그것이 죄냐, 아니냐가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자기 비위에 안 맞다고 “그것은 죄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성질을 부릴 문제가 아니고, 마지막 심판 때의 그 기준을 그대로 가져와서 볼 때 “당신은 심판 때에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짓을 했습니다.” 라고 해야 제대로 된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 기준은 누가 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지요? 이것은 누가 정합니까? 우리는 심판주가 아니니까 우리는 빠지고, 예수님이 심판 주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에 따라 기준을 정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더 이야기했어요. 어떤 사람이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심판하십니다.” 라고 하니까, 그 소리를 듣고 반발을 하는데 어떤 식으로 반발하는가 하면, “너희들은 성경이 절대적인 줄 알지만 나는 절에 다니기 때문에 불경을 기준으로 하면 너희들 주장은 엉터리다.” 라고 나올 때, 성경을 기준으로 이것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아하, 저 사람이 근본적으로 하나님 말씀 자체를 거부하네. 그래서 틀림없이 심판을 받을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겠지요. 이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가 애매하냐 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다고 하면서 해석이 달라서 ‘너는 죄로 보지만 나는 죄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재미있는 것은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마지막 심판 받을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처음에는 성경에서 출발을 하지만 결국은 성경에서 이탈해서 성경 아닌 것(상식, 윤리, 민주주의 법칙 등등)을 가지고 성경에다 집어넣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3-5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한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처음에는 성경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점점 말씀에서 벗어나서 나중에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자기주장을 내세워요. 복음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야 됩니다. 그 근거는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거든요. 여기서 두 개가 나오는데, 하나는 다른 복음이 나오고, 그 다음 제대로 된 복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은 뭐고 제대로 된 복음은 뭐냐고 할 때, 갈라디아서 3장 1절을 보니까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러니까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여기에 있는 시계가 십자가라면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구원 받습니까?” 할 때, 보통 사람들은 ‘나는 이렇게 했고, 이것을 믿고, 이렇게 사랑하고 --’ 이렇게 나오는데,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혜택으로 구원 받습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고린도전후서 녹취록]에 보면 나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누가 강의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녹취록을 다시 보면서 얼마나 감탄했는지 몰라요. 디모데전서 6장에 있는 사람처럼 교만해지면 자기의 것을 끄집어내려고 해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런데 사도바울은 우리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혜택을 입어서 우리가 구원 받으면 어떤 짐이 날아가 버립니까? 내가 제대로 된 인간이 되어야 하고, 훌륭하게 살아야 되고, 완벽해야 되고, 철저해야 된다는 이런 무거운 짐이 일소에 없어져버리지요.
마치 학교에서 시험을 치고 난 뒤 성적표를 받았는데 엄마가 언제 성적표 내놓으라고 할지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엄마나 불러요. “철이야!” ‘아이쿠, 성적표 가지고 오라고 하시는 모양이다.’ 생각하고 겁에 질려있는데, 엄마가 “냉장고에 있는 귤 좀 가져와라!” 엄마는 귤 가지고 오라고 했지 성적표 가지고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 우리에게 오라고 하는 것은 일생동안의 내 성적표, 3살 때 뭘 했고, 10살 때 뭘 했고, ‘일생을 나쁜 짓하고 살았는데 이걸 내 놓으라고 하면 어쩌나?’ 하고 있는데, “00야! 내가 사다놓은 귤 가져오느라.” 이 귤의 혜택으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겁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이것을 신학박사도 모르고 철학박사도 몰라요. 성경공부 30년을 해도 몰라요. 생각해 보면 이것처럼 간단한 것이 없어요. 사람들은 자꾸 자기 내신 성적을 걱정해요. 복음을 안 사도바울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못 알아들어서 어떨 때는 화를 내고, 어떨 때는 지치고 그래요. 너무나 간단한 것인데 ---
돈을 요구했습니까? 성경 100독을 명령했습니까? 예배당을 세우라고 했습니까? 뭘 하라는 것이 없고, ‘너는 무슨 혜택으로 구원 받는가?’ 하는 것을 묻고 있는데, ‘성경대로 믿고 있느냐, 다른 복음이냐?’ 이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사정을 다 아십니다. 생존을 위해 이 땅을 살면서 하나님 외면하고 살았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쁜 소식은 외부에서 추가되어 옵니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쁜 소식’이라는 상표를 붙여서 우리에게 그냥 완제품으로 준 것을 받아서 그 완제품을 간직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 받는 이것이 하나님 뜻 아닙니까.
마지막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옆에 있는 살인강도도 구원 받았잖아요. 이건 뭘 말합니까? 자기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성경인데, 이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당신은 이 성경에 있는 복음을 믿습니까?” 라고 하니까, 불신자들은 자꾸 자기변명과 질투, 분쟁 이런 것들, 한 마디로 자아를 내세우고 있어요.
지금까지 공부했던 것이 전부 다 ‘십자가의 혜택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인데, 이것을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서는 것이 누구냐 하면, 구원 받아야 할 당사자가 이것을 극구 싫어해요. 이상하지요? 주시는 것을 받아먹으면 되는데 그것도 못해요. 먹다가 토하면서 “나 이것 안 먹을래. 나 이것 안 받아들일래. 나는 내 훌륭함으로 살 거야.” 라고 자꾸 자기 자아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 고귀함 그것을 안 놓치려고 그렇게 애써요.
자, 이제 6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지금부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한 번 봅시다.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아는데, 이것을 성경에서는 ‘비밀’이라고 합니다. 비밀은 감추어진 것이지요? 감춰졌으니까 비밀을 우리가 파헤치면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파헤치면 점점 비밀은 저만치 물러갑니다. 5m 다가오면 5m 물러가고, 10m 다가오면 10m 물러가요. 왜냐? 계속 비밀로 남아야 되니까.
공개되어서 ‘이제 비밀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안 돼요. 끝까지 계속 비밀이 되어야 해요. ‘주님의 비밀에서 나온 능력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이 성립이 되려면 비밀로 남아 있어야 해요. 만약 비밀을 파헤쳐서 알았다면 이것은 ‘비밀을 파헤친 나의 능력으로 구원 받았다.’고 할 수 있지요.
이 시계가 만약에 십자가라면 이 시계와 나는 거리상 떨어져 있어요. 이것은 살아있는 생물체가 아니에요. 여기에서 손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시계를 분석해 봐도 아무것도 내가 알 수 없어요. 그런데 둘 다 떨어져 있는데, 떨어져 있는 것이 나를 구원한다고 할 때, 비밀에서 나온 능력도 뭐가 됩니까? 이게 어려워요. 이것도 비밀이어야 해요.
비밀에서 나온 구원의 능력도 비밀스러워야 해요. 그래야 우리 자아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어요. ‘비밀을 내가 알아냈다.’는 식으로 될 수 없단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십자가에서 능력이 나왔는데 그 능력을 알아 챈 것은 나의 능력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은 지금 사기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서 십자가가 너를 구원할 수 있어? 그 순서를 이야기해 봐.” 라고 했을 때, 우리의 정답은 뭡니까? “그것은 내가 모르지.” 정답은 ‘몰라’가 정답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는 고등학교 1학년 시험을 치고 싶어요. 다음 중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1번부터 5번까지 보기가 있는데 5번이 ‘몰라’예요. 5번을 찍으면 천국 갑니다. 모르는데 구원 되었다. 다만 이 구원의 능력이 어디에서 온다는 것은 알지요. 십자가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을.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은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능력이 있다는 것은 믿고 싶은데, “그 능력이 어떤 방법으로 나에게 오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몰라’가 정답이 되는 거예요. 이 ‘몰라’를 고상하게 표현한다면 ‘성경말씀 자체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왠지 이 말씀이 믿어지더라.’ 라고 수동태로 이야기합니다.
이제부터 정말 어려운 부분으로 들어가겠는데, 왜 제가 자꾸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처음 이 비밀이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뭘 받아왔습니까? 십계명 받아 왔지요? 십계명을 받아 왔는데, 이 십계명을 산 밑에 있는 백성들이 이해했습니까? 이해 못했어요.
이해를 못했는데 이해를 해서 하나님 백성 된 것이 아니고 이해 못하는 인간들을 누가 일방적으로 백성이라고 해 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계명을 이해도 못하는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간주할 때 하나님은 무슨 근거로 이야기하는가 하면 이 십계명은 인간이 못 지키잖아요.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누가 지킵니까? 못 지킵니다. 성경 어느 구절도 우리는 못 지킵니다.
못 지키는 줄 뻔히 알면서도 못 지키는 그들을 ‘이것은 내 백성이다.’ 라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 뭘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 자신이 준 이 십계명을 자기 스스로 성취했다고 여기시고(앞으로 성취 하실 것이니까), 그 조건 하에서 이 백성들에게 주어졌을 때, 이 백성 가운데 구원 받지 못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구원 받지 못하겠습니까? 십계명 안 지켜서 구원 못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주께서 지켜서 우리에게 공짜로 넘겨준다는 그 사실은 안 믿어서 구원 못 받습니다. 무서운 이야기죠?
이장우 목사님이 늘푸른교회 홈페이지에 [피]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무서운 이야기”라고 했던데, 오늘 본문이 정말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6장 9~10절을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렇게 쭉 나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것도 무서운 말씀이지만 십계명 하나하나가 인간으로서는 못 지키는 거예요. 못 지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뻔히 아시면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게 제 이야기가 아니고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못 지키는 줄 알면서 줬어요. 그런데 어떤 식으로 오해를 하는가 하면, ‘주신 십계명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지키다가 못 지키면 어쩔 수 없고, 지키면 구원 받고’ 기껏 이런 생각을 해요. 하나님의 구원은 비밀인데 이 비밀을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바꿔요. 이게 바로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주 어려우면서도 따지고 보면 쉬워요. 그래서 안 믿는 사람에게 ‘왜 바보같이 안 믿느냐고 닦달할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안 믿는 것을 내가 믿는다는 것이 이게 참 놀라운 거지요. 내가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믿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어디에 홀렸다든지 아니면 과대망상증에 걸려 안 믿으면서도 믿는다고 자꾸 최면을 걸었다든지.
인간이 못하는 것을 주께서 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너무너무 간단해요. 쉬운 것을 ‘누워서 떡 먹기’라고 하는데, 어릴 때 제가 누워서 떡 먹기를 시험하다가 죽을 뻔 했습니다. 떡이 목에 걸려서.
하나님이 구약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구약 시절에 십계명 주시고 못 지키는 자들에게 백성이라고 할 때는, 우리가 못하는 것을 주께서 다 하시겠다는 뜻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 안에 이미 우리가 못하는 것을 완성하겠다는 그 의지가 포함된 채 우리에게 다가오신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안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안 믿는가?’ 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사람은 어떻게 믿느냐?’ 하는 것을 아주 간단히 ‘성령으로 믿는다.’라고 이야기해요.
말씀의 대부분이 ‘어떻게 해서 안 믿는 사람은 안 믿게 되느냐?’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말씀이 무엇과 안 맞느냐 하면 흔히 안 믿는 사람들 속에서 통하는 그 진리체제와 말씀이 충돌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어요.
6장 1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안 믿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게 되어 있어요. 물론 믿는 사람도 못 지킵니다만.
이제 이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 아시겠지요? 아예 이 본문 말씀을 놓고 ‘우리는 왜 이 말씀을 못 지킬 수밖에 없는가?’를 가지고 해석하면 100점입니다. 같은 성경을 놓고도 ‘이것을 어떻게 하면 지킬까?’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 40년, 50년 해도 성경을 거꾸로 보고 있는 거예요.
이 말씀은 놓고 ‘도대체 우리는 왜 이 말씀을 못 지키느냐?’ 라는 쪽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면 굉장히 쉬워요. 이미 승리한 입장에서 재방송을 보면 재미있잖아요. 최근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축구를 했는데 우리나라가 이겼어요. 이것을 재방송 보면서 감독과 선수들이 “그 때 박주영 선수를 처음부터 뛰게 했으면 두골 정도는 더 넣었을 것인데.” 라고 할 때 초조합니까? 불안합니까? 아니죠. 이미 승리는 다 챙겨놓고 “박주영 선수를 전반전부터 뛰게 했으면 3:0 또는 4:0으로 이기지 않았겠나?” 이렇게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요. 그게 믿음이라니까요.
어떤 사람은 성경 읽으라고 하면 “못 지킬 말씀을 보기만 하면 뭐해. 부담만 되지.”라고 해요. 그런 인식 자체가 잘못 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경 자체는 십계명과 같아서 ‘이 말씀은 왜 우리가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지키신 것으로 우리에게 주셔야 우리가 용서 받는가?’ 하는 것을 차후에 증거하기 위해서 성경이 주어졌단 말이지요.
1절에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라고 했는데, 이 말씀 지킬 수 있습니까? 못 지키잖아요. ‘다 같은 인간인데 꼴에 상전이라고. 더러워도 내가 참는다.’ 이것과 공경하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어떤 인간도 상전을 대하면서 마땅히 공경하지 못해요. 혹시 그 상전에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고 극진히 아껴주는 상전이라면 혹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인간도 상전을 범사에 공경하지 못한단 말이지요.
상전까지 갈 것 없이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부부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어느 아내가 남편에게 주께 하듯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세상에 어느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 목숨을 바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천국에 못 가는지’ 그리고 ‘왜 예수님의 공로로만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아주 느긋한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개척교회 하는 목사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교인 수 줄고, 헌금 줄면 미치고 환장합니다. 그만큼 자기는 뭘 기대합니까? ‘나 같은 인간에게 잠시나마 복음 전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될 목사가 “경건을 (자기)유익의 재료로 생각”해요.
근본적으로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빙자하고, 예수님 빙자하고, 교회 빙자해서 교인들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데 몰두할 때, 진짜 복음 전하는 사람들과 부닥치면 변론이 나오고, 이 변론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물론 자기 변론이지요. 그리고 논쟁, 교만, 시기, 질투가 나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거저 구원 받는다고 감사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이런 것들이 나온단 말이지요.
성도는 아예 성경 말씀 못 지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느긋한 마음으로 ‘내가 왜 이 말씀을 못 지키지?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 1장에 나오는 말씀 못 지켜서 교인 수 줄게 하셨습니까? 그래도 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는데 좀 봐 주세요.” 이렇게 되면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고 초조와 불안에 떨고, 나중에는 하나님 욕하고, 예수님 욕하고 그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못 지키는 것을 아시고 어째서 못 지켰기에 예수님의 공로만이 높여져야 하는가를 차후적으로, 재방송 보듯이, 구원 받기 전 우리의 모습을 재방송 보듯이 짝 펼쳐놓는 거예요. 펼쳐놓으면 우리는 어째서 못 지키는가를 보니까 전혀 우리가 지킬 사항이 아니네요. 상전을 하나님 모시듯이 하는 아랫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상전을 이용하려고 하지 섬기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엡6:1).” 만약 자녀가 부모를 주께 순종하듯하면 부모가 말릴 겁니다. 부담 되어서. ‘애가 뭘 잘못 먹었나? 왜 이러지.’ 순종 안 하던 자녀가 순종하면 부모가 불안합니다. 뭔가를 요구할 것 같아서. 사업 자금이나 뭔가를 달라고 할 것 같아서.
성경 어느 말씀도 우리는 못 지킵니다. 저희 교회에서 중등부 연극을 하는데, 제 상전이 있어요. 김00 집사님이 제 상전입니다. “목사님은 학생을 연극 지도하세요.” 그래서 제가 순종해서 연극을 하는데,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 데리고 연극을 합니다.
연극 대본이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독한 천사들], 두 번째가 [달인을 만나다], 세 번째는 [천국 문]인데, 독한 천사가 뭐냐 하면 천사가 독한 놈으로 변장을 해서 교회로 왔어요. “나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환상을 다 깰 거야. 너희들 엄마가 교회 가자고 할 때 엄마가 너희들 천국 보내려고 그렇게 하는 줄 알지? 아니야. 너희들이 교회 봉사하는 것 엄마들이 제일 싫어한다. 교회 와서 복 받아서 공부 잘하는 것이 중요하지 교회 일에 시간 빼앗기는 것은 안 좋아 한다.” 그러면 뒤에서 “독하다. 독해.” 이런 내용입니다.
두 번째 [달인]은 뭐냐? 성경을 10년 동안 1만 독 한 달인을 만나다. 그래서 만났는데, 성경을 엉터리로 알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배고파서 구원 받았습니다.” “나가!” 이런 연극. 중학생들이니까.
이렇게 세 가지 연극을 하는데, 그 연극 내용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독한 천사가 교회 실상을 다 까밝히는 거예요. 하나님을 좋아해서, 주께서 공짜로 구원해 주시는 그 은혜를 감사해서 교회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잘 보여서 복 받으려고 오는 그 인간들의 실상을 다 폭로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유익의 재료로 활용하는 인간들의 실상을 폭로하는 것이지요. 이게 문득 생각이 나네.
자기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왜냐? 모든 인간은 항상 하나님이야기 할 때는 자기의 목적하는 바 “하나님, 이것 기도하면 이것 들어줄 거예요?” 라는 노림수가 있어요. 그 노림수를 빼고 하나님을 찾을 리가 없어요. 그런 인간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신자고 불신자고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다만 신자는 뭘 아는가 하면, ‘노림수가 들켜 버렸네.’ 이것을 감사하죠. 역시 말씀이 최고다.
6장 7-8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어느 인간이 먹고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압니까? 그런 인간 없습니다. 이런 것으로 족했으면 금융위기가 왔겠어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고기 삶을 때 제대로 익었는지 꼬챙이 같은 것으로 푹 찔러보잖아요. 우리가 고기라고 생각하고 말씀이라는 꼬챙이를 가지고 푹 찔러봐요. 우리가 잘난 척 하다가 뭐가 쑥 들어오면 우리 내부가 다 해부가 되지요. 우리가 하나님 찾을 때 먹는 것, 입는 것은 기본이고 이것 외에 혹시 뭔가 더 얻을까 싶어서 하나님을 믿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요구하는 수준은 뭐냐 하면, 낮추고 낮춰서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혹시 뭔가 있거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정상인데, 예레미야에 나오지요? 태어나지 않아도 될 인간이 태어나게 된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품고 태어났다고 보는 겁니다.
제가 지난 주 강의에서 했습니다. [피]라는 책 뒷부분에도 약간 나옵니다. 사람들의 문제가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죽어도 안 죽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병들고 죽고 썩어도 하나님은 다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이 뭐가 실수인가 하면 사람 된 것이 실수라. 쥐포처럼 찢고 또 찢어도 이게 안 찢어져요. 그 인간 그대로 있어요. 그래서 안 죽는 게 문제라.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애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자기를 없애려 해도 안 됩니다. 빼도 박도 못해요. 운명의 장난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손아귀에서 못 벗어납니다.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라고 할 때, 이런 우리의 취약점, 죄를 알려 준 것에 대해서 얼마나 우리가 확실하게 구원 받았으면 차후에 구원 시켜놓고 뒤늦게 이런 꼬챙이로 푹 찔러서 ‘있었나? 복음만 의지하는지 보자.’ 하고 찔러 보는 거예요. ‘네가 예수님만 의지하는 지 보자.’
그러니까 성경 말씀 자체가 우리가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이 말씀으로 쑤시고 저 말씀으로 쑤시고 하는데, 그런데 불신자들은 왜 이 말씀을 믿지 않는가 하는 것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원래 하나님이 원했던 인간과 전혀 다른 자아를 항상 염두에 두기 때문에, 하나님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아는 이런 인간을 딱 집었는데, 불신자들은 자기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런 나는 나가 아니고 적어도 ‘재산이 50억은 있어야 하고 이 정도는 되어야 나다.’ 하는 나라는 것을 따로 만들어 놓았어요. 그래서 남의 것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만족하는, 원래의 자아와 다른 자아를 상상하고 있으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아상을 방어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사랑이 쳐들어오는 것을 진력을 다해 밀어내지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미쳤습니까? 내가 그것으로 족하게.” 이렇게 나오지요.
신자는 그 말씀 앞에 “아, 죄인이구나.” 아주 간단하지요. “아하, 이래서 내 힘으로 구원 못 받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는데, 불신자는 “우리가 거지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다니.” 이런 반발심이 나오지요.
3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에 착념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잖아요. 비밀이니까. 비밀의 능력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냥 믿어져요. 그냥 예수님 말씀이 옳은 거예요. 부처의 말은 그냥 틀렸고 예수님 말씀은 그냥 맞는 거예요. 따질 필요도 없어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사람은 그냥 예수님의 말씀은 틀릴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걸 기본으로 해서 여기 있는 말씀들은 우리 힘으로는 지킬 수 없습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우리 힘으로 지킬 수 없다.” 라는 그 순간 뭐가 이뤄졌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아는 것이 이루어 졌어요.
‘나는 못 지킵니다.’ 라고 나자빠지는 그 순간 우리에게 뭐가 보이는가 하면, 현재 있는 먹는 것, 입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지요. ‘욕심 부리는 내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는 것을 보니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라고 고백하는 순간, 디모데전서 6장 8절은 이루어 진 겁니다. 이게 얼마나 갈까요? 한 3초 정도 갈까 몰라요. ‘감사합니다.’ 라고 했다가, 누가 백화점에서 최고로 좋은 옷 사는 것을 보면 나도 갖고 싶고.
어쨌든 간에 어떤 순간에만 말씀이 지켜진단 말입니까? 내가 이 말씀 보고 ‘내 힘으로 안 됩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이 바로 이 말씀이 지켜지는 순간이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말씀 지키는 사람 맞잖아요. 자기 힘으로는 아니지만. 이것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성도는 자기 힘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말씀 지킨다.’
개혁주의자들이 이런 말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은 굉장히 수상해요. ‘성령 받았으면 일단 내가 지켜야 돼.’ 지키면 지킬 수 있다는 쪽이고, 저는, 성령께서 오셔서 ‘너는 죄인이야. 주의 공로로 구원 받는다.’ 라는 순간 모든 말씀이 지켜지는 것이고. 그래서 진짜 순수하게 주님의 능력으로 이 말씀이 지켜지는 것이고, 저쪽은 주의 말씀의 능력을 빙자에서 자기가 지킨 만큼만 지켜진다고 보는 거지요. 이런 자들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첫째시간을 마치면서 한 번 더 정리를 해 보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 지키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이 말씀을 못 지킨다는 것을 아시고, ‘아,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못 지키는 구나.’ 하는 그 순간 이 말씀은 이미 우리를 사용해서 지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10분 쉬겠습니다.
---------------------------------
광주081128b디모데전서6장5절
광주강의(08. 11. 28) 43-2
이제 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5절에 보면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고 했는데, 교회에서 이미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부패해졌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관리하지 않는 대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아가 주동이기 때문에 자기를 누구한테 보이려고 의식합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캉은 말하기를, 인간의 주체라는 것은 타인의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타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해요.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가 해 드리겠습니다.’ 항상 남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식으로 자기 마음이 다져져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식인 경우에는 ‘엄마, 아빠가 뭘 원하지?’ 교인들 같으면 ‘목사님이 뭘 원하지?’ 남들의 눈에 띄고 남들에게 부합될 때 자기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 이런 식으로 인간의 주체는 형성된다고 보는 겁니다. 라캉은.
결국 이건 뭐냐 하면 ‘내 마음은 내가 관리한다.’는 식으로 움직이는데, 성도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성도의 특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분이 이것이 죄라고 지적하고 친히 관리해 주신다는 측면에서 그 마음이 부패해 질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부패한 마음인데 그걸 부패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관리해 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항상 그리스도의 교훈에 착념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자기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고, 용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늘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6장은 의외로 쉽게 넘어갑니다. 만약 이 말씀을 지키려고 할 때는 무진장 어렵지요. 질문이 여러 가지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할 때, ‘목사님, 그러면 한 달 수입은 어떻게 써야 되고, 사계절에 옷은 네 벌만 있으면 됩니까? 주택문제는 어떻게 하고 의료보험은 어떻게 됩니까?’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이런 질문이 나온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능력껏 이 말씀을 지켜보겠다는 의도가 있지요. 내가 할 수 있는 능력껏 해 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고맙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나름대로 해 보겠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고, 인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그냥 맡겨보시면 주의 사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나 같은 인간도 구원 되었다는 그런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9절을 봅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왜 부자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갑니까? 그것은 자기 소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유가 있으면 왜 힘든가? 사람은 뭔가를 소유하게 되면 그 소유물이 자신을 대변하는 대변자가 됩니다. 50억의 재산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는 없고 50억 짜리 ‘나’가 있어요. 50억 뒤에 ‘나’가 붙어요. 자기가 박사라면 박사가 앞에 가고 뒤에 ‘나’가 붙어요. 박사로서의 나. ‘50억’, ‘박사’ 이런 것이 나를 이루는 형용사가 되는 겁니다. 단독적으로 나는 될 수 없습니다. 뭔가 소유가 있다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자기 소유를 채우는 것이 나의 발전이라고 여기고, 소유가 줄어들면 내 인생이 실패했다고 여기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합니다. 남에게 욕을 먹는다. 나는 욕먹고는 못 살겠다. 왜 죽는가? 라캉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 속에 타인의 목소리가 있다.’ 타인의 목소리가 나에게 나쁜 소리로 들려왔을 때는 나는 더 이상 못 살겠다고 생각하고 죽는 것입니다.
남을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정말 불쌍해요. 제가 지난 주간에 KTX를 타고 가는데 기차 안에서 어떤 덩치 큰 사람이 큰 목소리로 전화통화를 하기에 제가 “밖에 나가서 전화 하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자기에게 시비를 거는 줄 알지만 시비 건 게 아닙니다. 제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그 사람이 “좀 있다 전화하자.”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러면 끝난 거예요. 누가 잘났느냐 경쟁을 한 게 아니고 조용하면 되는 거예요. 다른 주위 사람들에게나 나에게나.
사람은 자신이 현재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면 그것을 더 지켜내기 위해서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네가 감히 나에게 흠집을 내?” ‘흠을 냈으니까 너도 한 번 당해 봐라.’는 식으로 공격을 하는데, 이 자체가 자아 중심입니다. 만약 자기 속에 자아가 없다면 자아가 없으니까 남의 자아와 싸울 필요가 없잖아요.
‘내가 지금 존재하는 것도 주께서 존재케 하시니까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아가 없어지는데, ‘주께서 존재케 하셔서 내가 있으니까 내가 나를 유지해야 돼.’ 이렇게 되면 또 자아를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이 자아를 관리한다고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요.
남을 의식해서 ‘이건 어때요?’ 날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때로는 만족하고, 때로는 실망하고. ‘선풍기 아줌마’ 알지요? 성형수술을 너무 여러 번 해서 그 부작용으로 얼굴이 선풍기처럼 커진 사람. 일종의 정신병입니다. 만족을 못하는 거예요.
책 교정 볼 때 너무 완벽하게 보려고 하지 마세요. 대충 넘어가면 돼요. 뜻 통하면 됐지 한 자도 오자 없이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자칫하면 그 책의 완벽함 뒤에 ‘자아’가 붙어요. 완벽하게 책을 낸 ‘자아’가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에게 근심될만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네가 상상하고 지어낸 것이니까 쓸데없는 것이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이 몸이 있는데 ‘이 몸 따로, 내가 생각한 몸 따로.’ 2중으로 있으니까 이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심하면 정신분열증이 일어납니다.
내가 여기 있는데 ‘또 다른 상상한 나’를 만들어서, 현재의 나를 자꾸 상상의 나로 가려고 하니까 힘만 들고 되지도 않고 주위 사람도 힘들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하려 하는 사람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고,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10절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보통 ‘사람이 돈을 사랑한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아닙니다.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돈 속에 있는 인간이 자기 주위의 것을 무시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돈 속에 놓여 있는, 경제나 생존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이 자기 주위를 둘러보면 전부 돈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무시할 수가 없지요. 마치 엄마의 양수 속에 있는 태아 같아요. 인간은 돈(경제)속에 잠겨 있어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항상 돈으로 연결돼요. 저 사람을 만나서 얼마나 이득을 얻을 것인가? 전부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네 주위는 돈 말고 다른 것으로 바뀌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뭔가를 섬긴다.’고 했어요.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돈을 섬기게 되어 있지요. 돈을 안 섬기면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하나님 아니면 생존(이건 마귀죠). ‘스스로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이 길러 주시는가?’ 하는 그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고 해서, 여기에 ‘섬김’이 나오지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26절에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새는 하나님을 섬깁니까, 돈을 섬깁니까? 새를 보고 ‘하나님 섬겨라.’ 이런 소리 안 하지요. 오히려 새를 누가 기르시는가?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잖아요. 마태복음 10장 31절에 나오지요. ‘참새보다 더 귀한 것이 너희들이다.’
하나님이 친히 기르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도 주위에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신데, 그러면 돈을 사랑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이런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지요.
태아가 어머니 뱃속 양수 안에 있는 것처럼, 금붕어가 물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나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직장이나 가정이나 어디 가서라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꾸 내 영역을 넓히려 하지 마시고, 안 넓혀도 돼요. 금붕어 헤엄 잘 친다고 주인이 더 좋은 어항 안 사 줍니다. 그냥 물속에 있으면 된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됐지 뭘 이 세상에서 빛나야 되고, 공부 잘해야 되고, 돈 잘 벌어야 되고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래봐야 하나님이 훌륭하다고 칭찬 안 합니다.
저는 주머니 속에 있는 먼지가 행복하다고 봅니다. 주머니 속의 먼지는 나갈 일이 없잖아요. 항상 주인이 가면 같이 따라가니까. 우리가 주머니 속의 먼지처럼 그렇게 살아가면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는 말씀을 보고,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까?’ 라고 묻는데, 궁극적으로 성도는 돈을 사랑해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높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돈보다 더 우선적으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만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돈과 관련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돈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떠난다.’는 것은, 그 당시 교회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척했는데 하나님께서 기어이 자기 백성 아닌 사람을 골라내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면 삐쳐서 교회 안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성공하신 거예요. “어디 감히 네가 천국을 와!” 하면서 추방을 시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에 대해서 신자는 ‘감사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맞군요.’ 라고 고백하게 되는 거예요. ‘뭐가 나쁩니까?’ 하고 대들다가는 믿음 없다는 소리 들을 것이 뻔하지요.
이 뒷부분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쉬워요. 원리만 알면 쉽습니다. 이것을 지키려고 하니까 힘든 거예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니까 ‘돈을 몽땅 교회 헌금해야 합니까? 돈벌이 나가지 말고 기도만 할까요?’ 등등 온갖 되도 않은 생각을 다 하고 있어요. 자기 주인만 바꾸면 됩니다. 마음껏 돈 사랑하세요. 그리고 그것이 죄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다음 11절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서 디모데후서 2장 26절을 보겠습니다.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여기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구원 기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너 하나님의 사람아!’ 아, 멋있잖아요? 엄청난 이야기 아닙니까?
11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이것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싸움꾼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겁니다. “영생을 취하라.” 취하게 만들어 내십니다. ‘취하라’는 이 명령이 반갑게 다가오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밀어내지요. 말씀 자체를 영 마음에 안 든다고 하고 밀어내겠지요.
그러나 말씀이 우리에게 꽂히면 말씀과 더불어 그 말씀의 능력이 우리한테 폭발해 버립니다. 벌써 우리는 싸움에 돌입한 것이지요.
“이를 위하서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항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희를 명하노니”
왜 사도바울이 그냥 명하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론합니까? 그것은 바울이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말씀을 통해서 꽂히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사람은 이것이 그대로 꽂히지요. 꽂혀서 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지요. “아하, 이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구나.” 하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인도하시는 구나’ 하는 것을 수용하고 믿게 되어 있지요.
‘돈을 사랑하지 않고, 침륜에 빠지지 않고, 영생을 위해 선한 싸움을 하게 하시는 구나.’ 이렇게 고백하란 말이지요.
만약 불신자 남편과 한바탕 싸울 때 ‘아하, 이 싸움도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구나.’ 라고 이해하면 되지요.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여,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신앙생활 더 이상은 못하겠습니다.” 자아가 이 말씀 지키려 하다가 실패를 하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 욕하고 ‘내 신앙생활 못하게 한 것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겠지요.
1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느긋하게 이 말씀을 봐야 돼요. 느긋하게 이 말씀을 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단들에 의해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까? 목사라는 이단들에 의해서, 목사 자신도 못 지키면서 교인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하지요. 자기도 돈을 사랑해서 월급 올려달라고 난리를 칩니다. 자기도 지키지 못하는 것을 교인들에게 압박을 가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람’을 만들어요.
“이 명령을 지키라.” 고 했는데, 이 말씀을 간수합니다. ‘나는 이 말씀 못 들었어. 이런 말씀은 아는바 없어.’ 이러지 말자는 거지요. “나는 그 말씀 늘 듣는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는 말씀이 늘 내 속에 상주해.” 그게 바로 지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사태가 오게 되면 제일먼저 성경 구절이 생각나요. 어떤 일을 처리할 때. 그 말씀을 지키지는 못하지만 생각이 나요. 이처럼 성경 말씀이 생각난다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힘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스스로가 이 말씀대로 지켜질 때 모든 공로를 주께 돌리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나오지요? ‘네가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마지막 심판 받을 때 책망 받을 것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셨기 때문이지요. 깨끗하잖아요. 나에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알려주신 주님의 사랑이, 돈 사랑하는 그 순간에 그것이 덮쳐오니까 주님의 사랑에 압도당합니다. 그렇게 되면 흠도 티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우리로 하여금 죄인의 자리에, 주님 없이는 못산다는 그 자리를 유지케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으로 유지케 하시는 겁니다. 만약 이런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자꾸 자기 위주로 나설 수밖에 없어요.
부자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아하, 그것이 잘못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지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 아닙니까.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딤전1:15).” 그래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고전15:10).” 이 모습이 흠도 없고 티도 없는,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살아있는 사람이 되겠지요.
15절에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여기서 ‘나타나심’이란 대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타나신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끊어진 것들, 부분적으로 다 흩어진 것들, 앞뒤가 정리 안 된 것들이 합쳐져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심’으로 이런 것들이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만약에 “오늘 이근호 목사님과 성경공부 하는 날인데 옷은 뭘 입고, 구두는 뭘 신고, 머리 모양은 어떻게 하고 --” 하면서 온갖 생각을 다 했는데, 막상 나타나니까 그 모든 생각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 것이 관심사가 아니지요.
나타나기 전까지는 부분 부분을 통해서 조합해서 구체화 시킵니다. 마치 코끼리를 부분부분 만져서 그것을 조립해서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진짜 코끼리가 나타나면 ‘어머나!’ 하고 바라보지, 그동안 자기가 부분적으로 알았던 것을 조립하고 이런 것들은 다 잊게 되지요.
그래서 ‘나타나심’은 모든 것을 몽땅 잊어버리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뭘 하며, 어떻게 살고-- 등등의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죽니 사니 했는데, 막상 그분이 나타나니까 이런 문제는 문젯거리도 안 돼요. 속상하고 힘들고 어렵고 이런 것들이 막상 주님이 나타나니까 ‘그런 일이 있었나?’ 할 정도로 꿈에 본 듯 잊어버립니다.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하룻밤 꿈처럼.
여러분, 꿈에서 깨어나면 어떻습니까? 깨고 나면 그 꿈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왜? 현실이 있는데 쓸데없이 다시 꿈으로 돌아갈 일이 없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예수를 잘 믿어야 할 텐데’ 하면서 조마조마하고 걱정했던 모든 일들이 일순간에 다 헛된 생각이었던 거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은 사람은 지금도 돈 때문에 근심에 잠기고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가는데, 막상 예수님이 나타나면 그런 것은 문젯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내가 몇 년 더 사는가? 내가 목사 일을 얼마나 더 오래 할 것인가? 아직 내 몸이 병들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조차도 다 쓸데없는 것이 돼요.
연애 시절에는 ‘내 옷차림을 보고 그분이 어떻게 반응할까? 내가 화장을 너무 진하게 했나? 혹시 점심 때 마늘을 먹었는데 입 냄새는 안 날까?’ 등등 온갖 것들을 다 염려했는데, 막상 그분이 오시면 그분이 왔다는 그 현존의 환희와 감격 때문에 이전의 생각들을 다 잊게 되지요. 그런데 만약에 그분 앞에서도 자기 옷차림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아직도 자아에 얽매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설교 할 때 제일 좋은 설교는 교인들이 설교시간에 자아를 못 느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주님의 현존, ‘말씀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여기 계십니다.’ 라고 알려주고 그것을 분명히 해 줄 수 있는 그런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목사 본인이 남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주님을 소개하는 식으로 하면 최고입니다. ‘주님 여기 계십니다. 그분이 해같이 빛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야 되지, ‘오늘 오랜만에 교회 나온 분이 있는데 저분을 잘 설득해서 교회 잘 출석하도록 해야지. 저분은 내 설교에 은혜를 못 받는데 오늘은 꼭 은혜 받도록 해야지’ 이런데 신경을 쓰면, 목사 자아가 너무 강해지고 교인들은 예수님 만나려고 나왔다가 목사의 자기변명과 자기 정당성만 잔뜩 듣고 가면서 “그래 너 잘났다.”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지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 앞에서 신앙의 모범을 보인다는 것이 참 힘들어요. 잘못하면 자식의 눈에 엄마, 아빠가 자기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으로 비쳐지고, 예수님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자체를 기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피]라는 책에 보면, 몇 가지 예가 나와 있지요. ‘어떤 사람이 졸음 운전해서 사람을 죽여 교도소에 갔다. 그래도 주님 계시기에 감사했다. 어떤 사람은 나무를 자르다가 다쳐서 반신불수가 되었는데 그래도 주님 살아 계시기에 기뻐했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 문젯거리도 아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거예요.
때가 이르면 누가 나타난다?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그런데 있는지 없는지, 진짜 예수님이 부활했는지 안 했는지, 뭔가 근심되고 불안정하고 우왕좌왕하든 것이 막상 나타나니까 “아이고, 주님은 복되시고 능하신 분입니다.” 라고 예수님이 흠뻑 빠져버릴 때에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십니다.”
정말 이런 고백을 하려면 집구석에 시시한 일들은 다 문젯거리도 안 되고, 쉽게 말해서 문제 자체가 없어요. 성경말씀은 우리가 실패했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됩니다. 문젯거리가 없어요.
어떤 드라마를 보니까, 아가씨가 유럽에 공부하러 간다고 사랑하는 남자를 버리고 공항으로 떠나요.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하고 있는데 남자가 뒤따라 와서 만나는데,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나랑 다시 결합하자.’ 그런데 여자의 대답은 ‘나는 과거는 다 잊고 싶다.’고 해요.
자아는 과거가 누적되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자아가 남아 있으면 절대 과거를 잊을 수 없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과거를 잊을 수 있는 경우는 한 경우 뿐입니다. 옛날 남자보다 더 멋있고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어서 자아를 잊을 정도로 푹 빠지면 자동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시시한 남자는 다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것도 아니고 공부하러 떠나면서 ‘나는 이제 과거는 다 잊겠다.’고 하는데 안 됩니다. 어딘가에 완전히 빠지지 않는 한 과거는 자기를 괴롭히게 되어 있습니다.
15-16절에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완전히 사도바울은 지금 도취에 빠졌습니다. 주님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요. 그러니까 이런 분위기에, 앞에서 이야기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고. 돈을 사랑할 필요도 없고’ 이것이 가능하단 말입니다.
아까 김00 집사님이 시간론이 어렵다고 하셨는데, 항상 미래의 것이 미리 와서(엄청난 숭고함과 위대함이 오게 되면), 과거로부터 누적된 나를 잊어버리고 미래에 납치되어 끌려가듯이 간단 말입니다. 예전이 이런 이야기했지요?
그 다음 17절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부한 자들의 마음이 높아지는 이유가 뭡니까? 본인 스스로 높아지는 겁니까, 남들이 높입니까? 남들이 좋아해서 높아지는 거예요. 정용섭씨에 대해 올린 글에 제가 리플 단것 봤지요? ‘남이 똥 좋아한다고 더 큰 똥 얻으려 한다.’고 했어요. 그것이 더러운 것인지 좋은 것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많으면 좋은 줄 알고, 그것이 독약인지 극약인지도 모르고 퍼마시는 거예요. 남들이 마시니까 그것이 좋은 줄 알고.
고등학생이나 젊은 사람들이 왜 술을 배우는지 압니까? 본인이 객관적으로 무인도에 와서 술을 먹어보세요. 쓰고 맛없어요. 3살, 7살 아이가 술 좋아하는 것 봤습니까? 안 좋아하지요. 그것이 정직한 거예요. 이 아이들은 사이다, 콜라 맛을 좋아해요. 나는 아직도 사이다 좋아하는데 앤가? 그 아이들 소주 줘 보세요. 싫어합니다.
그런데 청소년들은 소주를 왜 마십니까? 남들이 먹고 좋아들 하니까 뭔가 내가 못하는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 용서가 안 돼요. 그래서 뭐든지 다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술을 마시고, 약간 취하면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지요. 하지만 술을 마셔서 기분 좋은 것보다 술 마신 이후 두통과 토하는 것과 술 취해서 말을 함부로 한 것과 부끄럼도 모르고 길에서 소변 본 것과 --- 술 마신 후에 트림을 해 보세요. 자기 입 냄새 자기가 역겨워 못 맡을 지경입니다.
자아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데, 술 깨고 나면 술 마신 과거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머리가 띵하게 아파요. 그래서 ‘컨디션’을 마시는데 그래도 머리 아파요. 남들이 부러워하니까 남들의 욕망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나도 남들처럼 되고 싶어서 한 거예요.
부자가 왜 마음을 높이느냐 하면, 부자가 가는 곳마다 주위 사람들이 굽실거리니까 그것을 다 부러워하는 거예요.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생각해 보세요. 재물에 소망이 없는 인간이 부자 될 리가 있습니까? 그리고 진짜 재물에 소망이 없는데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이지 부자가 아닙니다. 돈이 많지만 옛날 돈 없을 때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이지 부자가 아닙니다.
부자는 돈이 많은 것만이 아니라, 돈도 많지만 돈 많은 사람의 티를 내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이런 부자가 스스로 마음을 낮춘다? 미쳤습니까. 마음을 낮추게. 나는 아무리 봐도 프라이드와 벤츠의 차이점을 모르겠어요. 차이는 있어요. 하지만 돈 값만큼 차이가 나는가에 대해서는 저는 아직 의심을 갖고 있습니다. 오디오 잘 나오고, 승차감 좋고 그런 것은 다 좋은데, 그만큼 돈 값을 합니까?
명품 옷은 좋아요. 하지만 그것이 값만큼 좋습니까? 아무리 명품이라도 그 옷 원가 얼마나 합니까? 과연 그 값만큼 되냔 말이지요. 나는 도저히 그것을 못 믿겠어요. 이것이 부르디외(프랑스 사회학자)의 ‘상징 가치’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명품을 소비하기 원하니까 그 원하는 것이 경쟁이 붙어서, 터무니없는 프리미엄이 붙어서 상징 가격으로 5만 원 짜리를 50만원 받는 거예요. ‘나는 이런 것을 소유할 만한 인간이다.’ 라는 그 값이 명품에 매겨져 있는 것입니다.
고급식당은 음식 값이 굉장히 비쌉니다. 대신 서비스가 정말 좋습니다. ‘서비스’는 추상적인 것이지요. 허름한 식당에서 서비스 없습니까? 서비스가 별것입니까. 음식 갖다 주는 것이 서비스지. 바이올린 키고, 피아노 연주하는 그 값을 아무리 넉넉히 계산해도 그런 터무니없는 음식 값이 나옵니까? 이것이 상징 가격입니다.
마르크스는 교환가치, 사용가치를 말했는데, 자본주의는 이것에다 명품 값, 상징 가치를 붙인 거예요. 아파트고, 차고, 물건이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낮출 수가 없어요. 마음을 낮추면 명품을 사지를 않지요.
17절에, 재물 앞에 뭐가 붙어 있지요? ‘정함이 없는’ 이 구절 사업 실패한 사람은 절실히 느낄 거예요. 돈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용준이 연예인 중 제일 재산이 많았는데 이번 금융위기 때문에 2등으로 밀렸어요. 가진 주식이 반값이 되어서. 박진영한테 밀렸다고. 주식이 잘못하면 깡통이 된다고.
제 고등학교 동기 중 한 친구가 한때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야후’ 한국회장이라. 재산이 몇 천억이라고 했어요. 지금은 다 날아가고 얼마 안 남았어요. 주식이나 펀드는 돈이 아니에요. 그것을 팔아야 돈이 되지. 정함이 없는 거예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자기’는 누구 자기입니까? 홀로 있는 ‘자기’가 아니고,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님이 함께 있는 그 성도에게는 참된 생명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입니다. 20절에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제가 이런 소리하면 ‘이 목사는 강의하면서 꼭 부정적인 소리를 한다.’고 하는데, 원래 성경은 부정적인 것을 썩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 선한 싸움을 해야 되니까.
21절에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지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지어다.”라는 것은, 사도바울은 누구인지 모르지요. 바울은 그냥 편지만 전할 뿐이고 여기에 대해서 ‘이것은 나에게 하는 소리네.’ 하고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신자고, 자아가 이것을 극구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이 편지 받고도 불신자가 되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목사나 성도는 남 구원할 책임은 없어요. 그게 참 좋아요. 또 책임진다고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이제 정리를 해 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복음이라는 것은 이 말씀 자체가 우리 속에 침투해서 푹푹 수십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말씀을 들어도 잊어버려요. 잊었다가 뭔가 계기가 되면 ‘아하, 만왕의 왕이 계시는데 내가 쓸데없는 걱정 했구나.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지. 맞아. 돈에 울고 웃는 이것은 아니야.’ 이런 것이 불쑥불쑥 생겨나는데, 이것은 내가 생각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렇게 생겨나게 하는 대상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6:11 “하나님의 사람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제 알았습니다. 이것을 하고, 저것을 안 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관리 대상이 되어서 말씀이 우리 속에서 폭발하면서 말씀이 이런 뜻이라는 것을 남들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난 자가 저희들인 줄 압니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다음 시간에는 디모데후서 하겠습니다.
(2008. 12. 19. 11:28 녹취 서경수) |